|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6:14)
최근 우리나라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신문에서는 ‘삼성전자도 허리띠를 졸라매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현대기아차’도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졸라맨답니다. 그래서 ‘허리띠 졸라매고 비용절감’이니 ‘허리띠 졸라매고 에너지 절약’이니 ‘실적감소-허리띠 졸라매기’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다”라는 말은 ‘검소한 생활을 하다, 마음먹은 일을 이루려고 새로운 결의와 단단한 각오로 일에 임하다, 배고픔을 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리 졸라맨다는 것은 몸가짐을 새롭게 하고, 마음의 다짐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리띠란 바지 따위가 흘러내리지 아니하게 옷의 허리 부분에 둘러매는 띠를 말합니다. 활동을 편안하게 하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 허리띠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에 맨 먼저 하는 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입니다. 역도선수는 가죽 허리띠로 허리를 든든히 하고 역기를 듭니다. 오래 전 부인들이 한복을 주로 입을 때에 보면 일할 때는 먼저 허리띠를 매고 일을 합니다. 허리가 든든해야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14에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합니다. 당시의 의복이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말합니다. 전투를 위해서는 먼저 옷을 붙들어 매야했습니다. 의복을 매는 띠는 ‘진리’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변치 않는 진리가 온 몸을 든든히 지탱해야 세상에서 악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5에는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오실 메시야에게 적용된 말씀입니다. 메시야는 공의의 허리띠를 띠고 오십니다. 든든하여 변치 않은 공의로 허리띠를 하고 오십니다. 메시야가 오실 때는 공의의 허리띠를 띠고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은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첫째는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옷은 길고 통이 넓어 여행하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허리에 띠를 띠었습니다. 일을 잘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등불을 켜라고 합니다. 해가 없어 어두운 동안에도 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어느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맞아들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허리띠는 메시야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에 중요한 차림입니다.
예레미야 13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썩은 띠”를 두르지 말고, “여호와의 말씀의 띠”를 사서 띠고 견고하게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하여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허리를 단단히 띠로 묶고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도약하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허리에 띠를 띠고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허리에 띠를 띠는 의미를 잘 알고 허리에 단단히 띠를 띠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36에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주인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어야 하는 것은 주인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인을 기다리려면 항상 허리띠를 단단히 묶고 긴장해야 합니다.
성경에 많은 곳에는 주인이 기다리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아버지가 오랜 방탕 생활 가운데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주인에게 “주여 열어주소서”라고 애원합니다. 주인은 기다리는 자입니다.
오래 전 애굽 사막의 수도원에 갔을 때 참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수도원 입구에 자그마한 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문에 나와 문을 지키는 문지기 수도사는 나이가 80이 넘은 수도사였습니다. 왜 젊은 수도사를 시키지 연세 많은 수도사가 문을 지키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젊은 수도사가 문에 나와 외부 세계를 접하면 수도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늙은 수도사가 문을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늙은 수도사는 매일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늙은 수도사가 문을 지키고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있고, 보기도 참 좋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은 종입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한밤에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인이 밤늦게 혼인잔치를 마친 다음 돌아올 때 종은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주인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은 모름지기 주인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옛날 사대부나 고관들이 외출 후 귀가할 때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은 잠들지 못합니다. 종은 잠들면 안 됩니다. “이리 오너라”하고 주인이 부르면 주인이 오는 소리를 듣고 얼른 문을 열어야 합니다. 더 착하고 신실한 종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자기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문을 열고 맞이하는 종입니다.
‘주인’이란 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말인데 신앙의 주로서의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일반적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언제 오실지 알 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느슨해져서 주인이 와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은 종의 자격이 없습니다. 왜 자격이 없습니까? 그 종은 허리에 띠를 단단히 묶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띠지 않고 긴장감 없이 사는 것은 결코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종말 현상을 기록하고 있고, 25장에는 종말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비유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오는 시간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올 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아야 하는데 성경은 열 처녀가 다 “졸며 잘새”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다섯 처녀는 졸았고,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잤다고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졸고 잤다는 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이 들더라도 기름을 준비하고 언제든지 주인이 오면 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라고 합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주인의 뜻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올 날까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놀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한 말씀처럼 반드시 그리고 속히 오실 것입니다. 현대 과학적으로도 종말이 눈앞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현상을 보면 흔히 말하는 종말적 현상이 많습니다. 말세라고 할 징조들이 너무나 많이 감지됩니다.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핵물리학자들이 핵의 위협이 얼마나 지구의 멸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정한 것입니다. 1947년 자정을 지구의 멸망 7분전으로 정하여 2012년까지 20번이나 시간을 조정하였습니다. 현재는 지구의 운명의 날 시계가 종말 5분전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도 지구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재림과 지구의 종말은 모든 사람에게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4:36에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합니다.
분명히 오시지만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발표했다가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천국과 종말에 대한 지나친 주관적 해석이나 신비적 해석은 다 금물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을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지구의 종말적 현상은 핵전쟁의 위협 외에도 도덕의 타락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의 사는 해괴한 모습을 보며 “말세다”라고 합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종말적 현상입니다. 또한 기후변화를 봐도 그렇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발생하고, 태풍이 거세지고, 한발이 끊이지 않는 것을 봐도 지구가 끝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는 ‘마라나타’라는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소망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마라나타’를 ‘샬롬’ 대신 인사말로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다렸으면 ‘마라나타’로 인사했겠습니까? 우리도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매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잠들지 말고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37에는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고 합니다. 종은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종에게 주인이 수종들 것이라고 합니다. 종이 주인을 수종드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종을 수종듭니다.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반전입니다.
초원의 짐승이 미물이지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자기 종족을 지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자면서도 눈을 뜨고 사방을 감시합니다. 미어캣이란 동물이 있습니다. 잠비아나 짐바브웨에 서식하는 몽구스과의 동물인데 가장 부성애가 발달한 포유동물이라고 합니다. 수컷이 육아를 전담하는데 앞발을 들고 서서 사방을 감시하는 모습이 완전히 파수꾼입니다. 보초서는 후임개가 그렇고, 다람쥐도 자기 종족을 잘 지키고, 병정개미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종족을 지키고 싸움하는 일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중요한 사업 때문에 지방에 가려고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잠이 들어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습니다. 잠에서 일어나 보니 부산역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의 결정적 실수 때문에 사업이 성사되지 못하고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설교에 종종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답니다. 잘 깨어있지 못하면 인생을 망칩니다. 그래도 육적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괜찮습니다. 잘하면 목사라도 됩니다. 그러나 영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영적 인생을 망칩니다.
잠이 들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실패한 인물들이 성경에도 제법 많습니다. 사사기 4장에 보면 사사 드보라 시대에 가나안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야빈왕의 장수 시스라는 이스라엘을 치러왔다가 오히려 군대가 전멸하여 도망을 하다가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깊이 잠이 들어 야엘이라는 그 집의 부인이 잠잘 때 말뚝을 관자놀이에 박아 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힘센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만나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다 알려주었습니다. 삼손은 잠을 자다가 머리털이 다 밀리고 힘이 떨어져 결국 죽게 됩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에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자신 때문에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났는데 그는 잠을 자다가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3제자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갔지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잊고 깊이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제자 중 베드로는 잠결에 일어나 보니 예수님을 잡는 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는 칼을 빼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쓴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누구나 잠들면 이런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깨어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깨어있음은 중요한 일입니다. 주인이 혼인잔치에 다녀올 때까지 종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종은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지만 주인은 만족하고, 주인으로부터 종은 보은의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띠를 띠고 종을 대접하는 이런 인생역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할 때에 저를 비롯한 목사님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하고, 커피를 대접할 때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대접을 받는 성도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은 목사님들이 대접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일도 아닌데 그렇게 즐거워하는데 하물며 주님이 우리를 대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며 영광이겠습니까?
종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인이 올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올 시간을 알고 있다면 자다가 시간을 맞춰 일어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올 시간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13:35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는 도둑 같이 오리라고 합니다. 도둑은 예고 없이 옵니다. 예고하고 온다면 이미 도둑이 아닙니다.
로마서 13:11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마니교에 깊이 빠져 살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잠에서 깨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우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옛날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허리를 띠로 단단히 묶어야 합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하는 말을 외국인들은 참 재미있다고 합니다. “니가 한 턱 쏴라”라는 말을 합니다. 턱을 쏘면 즉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답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 받아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외국인은 “손님을 던지는 것인가?” 라고 생각한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나 오늘 엄청 애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애를 잡아먹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식탁 훔쳐라”라고 합니다. “이 식탁들이 다 도둑질 한 건가?” 라고 생각한답니다. 밥 먹고 나오면서 날씨 좋으면 “날이 깨어났다”라고 합니다. “날이 언제 잠들었나?” 라고 한답니다. 날도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삶이 평안합니다.
누가복음 21:36에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항상 기도하며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기름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잠드는 어리석은 처녀 같지 말아야 합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다. 신성한 깨어있음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잠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주님이 오신다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며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가운데 좋은 찬양이 있습니다.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잠들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라나타’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신의학자 칼 융은 “깨어나려면 안을 보라”, “밖을 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보는 자는 깨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깨어남의 의미를 독자적으로 반전시킨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깨어남이란 안을 보는 것입니다. 깨어남이란 영혼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교단의 모체이며 한국에 그리스도를 전해준 미국장로교회(PCUSA)가 동성결혼과 동성결혼주례를 결의하고 허락하였습니다. 교회가 넘어서는 안 될 금지선을 넘었습니다. 교회가 시류에 따라 성경을 버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종말적 현상인 것 같습니다. 어느 미국장로교회에서는 동성결혼 허락 후에 비로소 교회가 교회답게 할 일을 했다고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사야 5:27에는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허리띠를 풀지 말고 거룩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영혼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거룩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성희 목사
첫댓글
허리에 띠를 띠라는 의미 ...
*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라!
* 잠들지 말고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