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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10월 6일 주일오전
렉시오나리 : 애1:1-6; 3:19-26; 눅17:5-10
본문 : 시59:1-17
제목 : “악인들과 하나님”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18편 1,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11편 1,2,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81편 1,6,8,13
설교 후 찬송 - 시59편 4,5,8
성찬식 찬송 - 시65편 3,5
폐회찬송 - 시108편 1,2,4
오후 렉시오나리 : 합1:1-4; 2:1-4; 딤후1:1-14
주일오후찬송
경배찬송 - 시118편 1,8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119편 1,2,3
폐회찬송 - 시91편 1,5
악인들과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난 달에 ‘악인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의 한 주제로 다뤘던 것이 ‘정말 악만 존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이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성경에서 악인은 악과 분리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은 존재하고, 악은 사람과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복음주의 진영의 큰 약점 중의 하나가, 늘상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랑만 말하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 ‘죄에 대해 벌주시는 하나님’은 감춰지거나 삭제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루뭉술한 복음주의의 복음에서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항상 감싸주고, 돌봐주고, 사랑만 해주시고, 죄에 대해서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
하지만 실은 이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 화를 내십니다. 악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사람을 향하여 패악을 일삼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분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악에 대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핑계로 하여 나약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와 악에 대해 보복과 진멸을 행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 일을 통해서 신자는 악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하는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한 징벌은 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보다, 죄를 지적하고 경계하고 무너뜨리고 멸하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마 성도들께서도 다들 스스로의 죄나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죄나 악에 대해서 덮고 넘어가 주는 것은 ‘쉬운 일’에 속합니다. 하지만 죄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속에서 죄를 끊고 멸절시키기 위해 싸우거나, 죄와 정면의 대립 구도로 살아가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대강 죄를 넘어가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편의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자녀된 시인 역시 죄를 미워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 죄의 표상이 되는 악인들이 등장할 때, 그들의 죄와 악에 대해서 시편이 두루뭉술하지 않고 단호하다는 사실 등을 발견합니다.
지난 달의 ‘악인전’에 이어서 59편 역시 악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59편은 또한 ‘이 악인들에 대한 승리’ 역시 말합니다. 죄나 악에 대해서 단호한 자세를 갖고, 이것들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 역시 신자의 중요한 도리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악인들
악인들에 대한 여러 묘사
1)
오늘 말씀에서 악인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 이들로 나타납니다.
1절과 2절에는 악인이 네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내 원수”와 “일어나 치려는 자”, 2절에서는 “사악을 행하는 자”와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이 악인들이 실제로 공격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나타나 있는데,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린다”와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2절의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사실 의역인데, 원문으로는 “피들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때 “사람”이라는 말은 주로 “인류”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은 ‘피를 좋아하는 어떤 인류’, 그러니까 마치 사람의 종자 중에서 피를 원하는 어떤 종자가 있는 것처럼, 마치 뱀파이어와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람처럼, 악인이 그런 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그 종자에 있어서 피 흘리기를 기뻐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3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3절의 끝부분을 보면, 이 악인들이 시인을 치려고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이 절과 바로 다음 절 앞, 4절 앞부분까지 하면, 시인은 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하면서 자기는 이 중 어느 죄도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히브리어에는 ‘죄’를 묘사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다). 3절에서 “범과”라고 번역된 말은(히. 페샤) 주로 ‘반역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저항하여 저지른 죄를 말합니다. 3절 말미의 “죄”로 번역된 말은(히. 핫타아) 말 그대로 본연적인 죄를 주로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에 비해 4절의 “허물”이라고 번역한 죄는(히. 아온) 죄가 주로 행위로 드러난 것, 행실로 나타나게 된 죄를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 세 종류의 죄악을 열거하면서, 자신은 이 중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세 종류의 죄를 말하면서 자신이 무죄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말이 옳다면, 3절 뒷부분이 말하고 있는 악인들의 공격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됩니까? 그야말로 ‘무죄한 자를 치는 것’,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사람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 됩니다. 그야말로 여기의 악인들이란 앞서 2절에서 말한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치는 이들,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멸망시키려 하는 이들, 정말 ‘피를 즐거워하는 인종’, 뱀파이어들처럼, 피 흘리기를 즐겨하는 어떤 인류의 종과 같은 그런 이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여기 악인들입니다.
2)
그리고 6절과 7절에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 부분도 한 번 주목해서 보겠습니다.
6절에서 시인은 이 악인들을 ‘들개’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닌다” 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모습을 “낮에는 햇빛을 받으며 자거나 슬금슬금 걸어 다니다가 저녁에는 거리를 쏘다니며 음식을 뒤지고 불길하게 짖는다”라고 표현했는데, 머릿 속으로 그런 그림을 상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개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애완견들처럼 그렇게 좋고 귀여운 이미지로 사용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서 개는 대표적인 부정적 짐승으로, 모욕적으로 사용되거나 불결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동물 이미지는 정결, 부정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들에서 사는 개들은 죽은 시체나 쓰레기들을 먹기 때문에 부정적 의미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6절의 개들은, 이렇게 어슬렁거리면서 다니다가 시인과 같은 이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죽이고, 또 그 시체를 먹는, 그런 종류들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런 이들을 “그들은 끝없이 도는 굶주리고 사나운 개에 비교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로 그들이 악을 행하려는 욕망에 충동되어 끊임없이 행동하면서 보여주는 그들의 흉포를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인 7절을 보시면, 이 개들로 묘사된 악인이 입으로는 악을 토하고, 또 입에는 칼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시편들과 함께 읽어 본다면 “입으로 악을 토한다”는 것은 “오만한 말을 한다”, 즉 입으로 악을 토한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인데, 악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칼빈 선생님은 이것을 “자기들의 파렴치한 계획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공공연하게 선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네들끼리 은밀하게 죄없는 자를 죽이려는 음모를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도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악인들
이렇게 시인들의 주변에는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살아가던 세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근본적으로 이 세계는 언제 그리고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정의를 따라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이렇게 포스트 모던 사회가 되어서는, 어떤 패악을 행하더라도, ‘저마다의 정의를 따라’, 즉 자기 나름으로는 의롭다고 여기는,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설명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분명히 ‘명확한 악’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저마다의 정의’라고 변명하려고 하고,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옳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변명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 타인을 위하여 행동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 타인을 죽이기 위하여 행동합니다. 같지 않습니다. 악은 존재하고, 악인들 역시 존재합니다. 단지 그 사람이 항상 선인이거나 항상 악인이 아닐 뿐입니다(연쇄 살인마들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친절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에 분명히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의 전령, 수호자 역할을 하는 ‘악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과 악인들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악과 악인에 대해서만 배울 것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나님’도 배워야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이 악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이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1. 산성
먼저, 우리가 시편 59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필 때 제일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산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성이라는 단어는 9절에 한 번, 또 16절에도 한번, 16절에는 비슷한 단어로 “피난처”라는 말로, 그리고 17절에도 다시 “산성”으로 한 번, 이렇게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시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말할 때, 주도적인 단어가 바로 이 “산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악인들에 대해서 살폈는데, 이 악인들의 여러 계교들 속에서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산성”으로 나타납니다. 이쪽 편에 악인들이 있고, 저쪽 편에 하나님이 서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에게 몰려, 쫓겨 다니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이 때 악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요? 첫째가, “산성”입니다.
1)
산성이라는 것은 일전에 제가 한 번 설교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그 의미가 “높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안전하게 높은 곳에 두다”,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높다”라는 단어(히. 사가브)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산성”이라는 말을 조금 더 문자적으로 잘 번역한 단어는 “망대”입니다. 사무엘하 22장 3절에서는 같은 단어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22:3)
그러니까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실 때는 아주 높은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있는 새를 연상해 보시면 됩니다. 땅에 있는 짐승들이 해를 끼치고 싶어도, 전혀 닿지 않아, 아예 그 가능성이 없는 곳!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산성이 되신다” 했을 때의 성경에서의 의미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인들이 이유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산성”이 되신다는 것, “높은 망대가 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악인들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개는 닭을 쫓다가 지붕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습니까? 개는 지붕에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서야 개가 닭을 잡을 수 있지만, 닭이 날개를 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리면, 이제는 개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망대”가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악인들이 근본적으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산성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로부터 고통당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악인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의 망대’와 같습니다. 보호라는 것이 ‘차원이 다른 보호’입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참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참호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총탄이 들어와서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망대”로 계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호는 ‘차원이 다른 보호’입니다. 절대 총탄이 침범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보호지요.
그러므로 이 “산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력한 의미는, ‘악인의 근본적인 무력함’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무력함입니다. 3절과 4절에서 보았듯이, 아무런 허물이 없는 주의 백성을 악인들이 이유 없이 삼키려 하지만, 주의 백성들은 ‘차원이 다른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죽일 수도, 해할 수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손이 닿지조차 않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산성”이라고 부르는 시인의 근본적인 고백이요, 악인들의 근원적인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산성”, 곧 “높은 망대”로 나타나셨습니다.
2)
여호와께서 ‘높은 망대’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악인들에게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여호와께서 높은 망대이심을 말하기 바로 전의 문맥을 보십시오. 8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우리는 조금 전에 6절과 7절에서 들개와 같이 주의 백성을 해하려 하는 악인들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공포스런 것일 수 있습니다. 저는 6절과 7절을 읽을 때,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는데요......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혼자 살아 남아 있고, 세계는 좀비들의 천국입니다. 해가 지면 그림자를 따라서 좀비들이 달려오는데, 해가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넘어가면서, 빌딩의 그림자가 길 위를 드리울 때, 그 그림자 선을 따라서 좀비들이 몰려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치 6절과 7절의 ‘들개’로 묘사된 악인들을 읽을 때 그런 장면이 연상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웃고’ 계십니다. ‘비웃고’ 계시지요.
모든 권력의 끝을 잡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일의 결국을 모르기 때문에 몰려드는 악인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인들을 비웃으십니다. 이렇게 하고 8절과 9절을 연결하여 읽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비웃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높은 망대가 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악인의 궁극’과 ‘그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이 승리하는 듯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세계가 동화 같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권선징악이 우리의 삶에 항상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늘 그렇다면 누구든 쉽게 선을 택하고, 누구든 원치 않아도 이익을 위해서 선을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계를 복잡하게 하신 것은, 참으로 선한 이가 역경 속에서도 선을 택하고, 악한 이들은 자기의 심중을 숨긴 채로 악에 머물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 비웃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높은 망대이신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이 길을 붙들고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59편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영접
그리고 이제 그 다음으로 우리는 궁극의 것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어떻게 궤멸하시며, 또 의인들을 어떻게 건져 구원하시는지를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즉 그 다음의 내용들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건지십니까? 1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1)
칼빈 선생님은 여기 “영접하다”라는 단어를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브리어 카담은 ‘때에 맞추어 나오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즉각적이고 때에 맞추어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10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라고 할 때, 이 “영접한다”는 단어의 의미는 정확하게 적절한 시각에,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산성이 되신다고 말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 구원해 주신다고 말할 때, 어떤 경우에는 ‘피상적으로’ 이런 ‘개념을’ 말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하는 것이죠. “그래 맞아, 성경에는 언제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시지”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고,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진정으로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실 수도 있고 안 도와주실 수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이 매우 피상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하신다’ 같은 것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시편 59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그야말로 “가장 적확한 시기에”, “가장 필요한 때에” 주어지는 도움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사람인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 아니라 우주의 주재자이신 분께서 보시기에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외과 의사는 최정밀을 요하는 수술의 집도에서 사람에게 손상을 최소화하면서 질병의 근원을 없애버리는 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력이 둔하고 사람들의 인기에만 영합하려고 하는 가짜 의사들이 “지금이야, 지금이야”라고 말할 때, 듣지 않고 잠잠히 있다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혈관을 자르고, 병증을 잘라내고, 다시 정확한 타이밍으로 자른 것을 봉합하고, 매듭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주어집니다.
악인들에게 둘러싸인 주의 백성들에게 시편 59편은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라고 말씀하는데, 이 때의 도움이란,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주어지는 도움인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필요하신 바로 그 순간에’ 간섭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시점이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넘어지려 할 때가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시점인 것입니다. 이 시점은 ‘내’가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확히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59편은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단어에는 생각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의 본래의 뜻, 어근이 갖고 있는 원래의 뜻인데, 10절의 “영접하다”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어근의 의미는 “앞서 가다”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방금 들은 칼빈 선생님의 해설을 연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방금 ‘가장 정확한 때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들었는데, 그 때의 ‘가장 정확한 때의 도움’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 두 번째 뜻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에 ‘앞서’ 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야 할 역경을 아시고, 그래서 우리의 길에서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정확한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신학 사전에 의하면(BDB), “주로 전쟁 상황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싸움의 상황에서 말이지요. 아마 여러분은 매우 분주하고 바쁘고 정신 없는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중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했고, 분유를 탈 물을 끓이고 있던 알람이 울리는데, 갑자기 가스 배관에서 경고음이 납니다. 바깥에서는 커다랗게 물건 파는 장사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전화를 받으려고 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분유통을 놓쳐서 바닥에 다 쏟아졌습니다. 이런 때는 정말 울고 싶은 상황이죠.
전쟁 상황은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분들은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훈련소에서 사격장을 처음 갔을 때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총소리가 그렇게 큰지 처음 알았습니다. 하물며, 수류탄이 터지고, 옆에서 포들이 발사를 하고, 폭격기가 폭격을 퍼붓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정신이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10절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신다” 할 때의 그 “영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가시기 때문에, 어떤 정황 속에서도 가장 똑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분유가 쏟아지고, 포탄이 쏟아지는 정신 없는 상황 속에 아무런 판단력이 없이 멍해 있더라도 말입니다.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도움은 어떤 것입니까? 10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 도움은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그리고 앞서 가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정확한 도움이다”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 보복, 그리고 그 보복의 성격 : 여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58편은 악인들을 말하면서, 악인들의 어떠함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시편 58편은 악인들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있고, 따라서 승리는 ‘명확한 것’입니다. 이 명확한 승리를 11절과 13절의 비교를 통해서 한 번 보십시오.
11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그런데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11절과 13절은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악인들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궤계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높은 망대 위에 숨겨진 이들에게 해를 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 보듯 뻔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시인은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비 때문입니까? 시인은 악인들을 멸절시키지 말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11절의 뒷부분을 보시면, 악인을 진멸하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 진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즉 교육적 이유 때문입니다. 악인을 한방에 진멸하지 않고, 서서히 망하게 하여, 주의 백성들에게 악인이 망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고부동하게 새기고 알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이 11절의 진행과정이 끝나고 나서의 결론을 말합니다. 완전한 소멸, “없어지기까지 소멸”, 곧 악인이 눈에 보이지도 않도록 하는 완전한 멸망! 그래서 14절과 15절, 그리고 비교하여 16절을 보십시오.
14절과 15절은 앞의 ‘들개’ 이미지를 다시 가져오지만, 이번에는 의인의 심장을 노리는 들개가 아니라 구차하고 비루먹은 들개입니다. “개처럼 울며 성으로 다닌다”, “식물을 위하여 유리한다” 그렇죠?
하지만 16절에서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아멘!
이것은 ‘여유’입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 차원이 다른 보호를 믿고, 아는 이의, 진정한 여유......달리기를 예를 들자면, 열 바퀴를 돌아야 할 때, 실력이 월등하게 높은 챔피언이 다른 사람들이 도는 것을 뒤에서 서서히 따라가면서, 마지막 바퀴에 피치를 높여서 단번에 승리를 거머쥐듯이, 그렇게 가지고 있는 여유입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