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과 여름휴가 차 해외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가족들과의 해외여행 기간 중에 꼭 한두 번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자유여행인지라 특히 갈등의 소지가 다분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사실 해외여행에서 좋은 곳을 방문하고 멋진 경치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늘 보면 본말이 전도되어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난 해외여행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갈등의 원인은 늘 계획적인 저의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일정을 사전에 수립한 계획에 따라 시계처럼 차질 없이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저의 성향과 여유 있게 여행을 즐기려는 가족들 간의 성향이 충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짐에 다짐을 하였지만 이번 여행도 사나흘 지날수록 충돌 위험이 증가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인내가 폭발 수위를 넘나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사정상 같은 지역에서 저희 부부만 호텔 방을 옮기기 위해 짐을 싸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성질이 급한 저는 등에 백팩을 메고 트렁크 하나를 끌고, 다른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습니다. 뒤늦게 따라온 아이들이 제 옆에 섰지만, 누구도 제 가방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손에는 가벼운 짐만 들려 있었는데 말입니다.
순간 화가 나 고함을 쳤습니다. "너희들 눈에는 아빠 짐이 안 보이니." 그제야 아이들은 죄송하다며 짐을 받아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저의 잔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배려심이 없어서 어떻게 해. 정민이는 아프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고…" 홧김에 할 말, 못할 말이 따발총이 되고 있음을 직감하였지만 이미 총은 발사된 후였지요.
아이들은 제가 많은 짐을 든 것을 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퍼붓고 말았던 것입니다. 뒤늦게 따라온 아내에게까지 도대체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하였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그 아름다운 스위스 융프라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화가 난 표정이 역력하였습니다. 결국 저녁을 먹다 말고 저는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호텔 방에 먼저 들어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 순간을 그렇게밖에 처리할 수 없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들에게 "아빠 짐 하나씩 들어주면 좋겠네." 이렇게 부드럽게 이야기하여도 충분하였을 일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여행 중반, 이 상황을 잘 수습하지 못하면 여행을 망치고 말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여행 기간 중에 읽고 있던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부모 자식 간의 정서적 유대가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1920년대 육아계의 최고 권위자였던 존 왓슨은 부모들에게 단호하게 조언하였다. '(당신의 아이에게) 포옹과 입맞춤을 해주지 마라. 무릎에 앉히지도 마라. 꼭 해야 한다면 잠자리에 들 때 이마에 한 번만 입맞춤해주고 아침에는 악수를 해라.'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와서야 이 이론을 버리고 정서적 필요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합의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저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과의 사이에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저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아버님으로부터 경험하지 못한 정서적 유대감을 공부해서 쌓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래전 처 막내 삼촌이 자녀들과 만화를 보면서 같이 키득이며 재미있어하던 장면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뭐 아이들 만화가 그리 재미있을까, 재미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삼촌은 아이들 세상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같이 느끼고 생각하고 반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정서적 유대감일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 세상에 뛰어든 적이 없습니다. 늘 밖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관찰하고 평가한 다음 칭찬하거나 나무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아이들은 제가 어렵고 거리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서적 유대를 강화하는 대화가 아니라 이성적 유대를 증진시키는 대화였을 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 강의였지요. 아들 녀석은 그래도 좀 나은데 아내나 딸은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또 강의를 시작한다'는 표정을 취하곤 합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왜 귀찮아할까?
저는 기본적으로 정서적 유대감이라는 용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였나 봅니다. 가족과의 문제뿐만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시간 보내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친구 간의 우정은 쓸데없는 잡담으로 형성되는 정서적 유대감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아이들에게 카톡을 하였습니다. "윤아, 정민. 아빠가 미안하다. 너희들에게 좀 더 따뜻한 말로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모질게 너희들 가슴에 비수를 꽂았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빠는 정서적 유대감이 매우 부족한 사람인 것 같구나. 이성적 유대감은 높아 지적 대화는 몇 시간도 끌어갈 수 있는데 정서적 유대감은 그렇게 못하는구나. 아마도 성공 드라이브로 점철된 인생의 폐해일 거야. 미안하다. 내일 아침 웃는 얼굴로 만나면 좋겠구나. 아빠가 정서적 유대감을 키우도록 노력하마."
"아빠, 아니에요. 저도 보고 바로 행동하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죄송하고, 제가 잘못했음에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너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어요. 아빠가 저희들을 위해 여행을 준비하셨는데 죄송해요. 내일부터 새롭게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시작 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저희가 충분히 잘못했고 아빠가 말씀하실만하신 것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빠가 저희한테 많이 맞춰 주신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저희는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요. 누나 말대로 새롭게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내일 뵈어요."
이런 소동이 있고 난 뒤 여행을 마칠 때까지 별다른 갈등은 없었습니다. 부모 자식 관계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다 큰 다음에 깨닫게 되니 저는 낙제점 아빠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늦게나마 하나하나 배워보렵니다.
여러분 가정의 부모와 자녀 간 정서적 유대감이 어떠신가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오늘 귀국하는 바람에 월요편지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2017.8.17.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