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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 삶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과 같이 살 때였습니다.
한번은 몇 명의 아이들이 경미한 비행 끝에 가정법원으로부터 판결을 받고 저희 시설로 입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입소 날이 성삼일이 시작되는 성 목요일 오후였습니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모두 신부님 수사님들과 함께 하는 성목요일 만찬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물론 그날 입소한 아이들도 영문도 모른 채 길고 긴 거룩한 대 예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은 성 목요일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십자가 경배예식, 그리고 토요일에는 부활성야 대미사, 주일에는 부활대축일 아침미사가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부활절 아침 저를 만나자마자 아이들이 대뜸 언성을 높여서 엄청 따졌습니다.
“신부님, 살레시오 여기, 생활하기 좋다고 해서 판결 받고나서 엄청 좋아했는데,
저녁 때 마다 지루하고 짜증나는 집회가 있어서 살기 너무 힘들어요.
다른 시설로 보내주시면 안돼요?” ^^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는 참으로 값지고 아름다운 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체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 성체강복, 성경, 묵주기도...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
이 아름다운 보물들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것들이 다시 또 없습니다.
언젠가 성체성사의 맛에 흠뻑 빠져 거의 황홀경에 도달한 한 신자를 봤습니다.
당시 저는 그분의 모습에서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보물들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체성사나 성체강복의 시간은 그야말로 고역이요 너무나 지루한 시간입니다.
미사에 참여한 어떤 신자들의 얼굴에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정말이지 거룩해야할 성찬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 전체에 짜증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혼잣말로 궁시렁궁시렁 거립니다.
몸은 성당에 와있지만 마음은 이미 성당 밖을 벗어나 전국산천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거룩함이 세상에 훼손되거나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오 복음 7장 6절)
사실 개들에게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다이아반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돼지들에게 영롱한 진주 목걸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것들은 개껌 하나, 양배추 하나보다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거룩함 앞에서 선 한 인간 존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로지 육적인 생활에만 흠뻑 빠져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신비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되는대로 세상의 논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전례는 형벌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거룩함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천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거룩함의 예식에 맛을 들이는 일입니다.
거룩한 예식, 동작, 문구 하나 하나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옛날 군대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군대에 입대해서 신병교육대 훈련을 마치고 이제 자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신병으로 잔뜩 군기가 잡혀서 앉아있는 저를 포함한 신병들에게 많은 고참들이 몰려와서 묻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많은 질문은 “여자 친구 있냐?”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축구 잘 하느냐?”라는 것이었지요.
우선 신학생인 제게 여자 친구가 있을 리가 없지요.
또 한 가지는 축구를 잘 한다고 했다가 실제로 못한다고 평가되면 얼마나 혼날까 싶어서 “잘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입대했던 동기 신병은 “축구는 못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못한다는 말과, 축구는 못한다는 말의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축구는 못한다는 것이지만, 다른 것은 잘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동기는 어떤 일이든 열정을 가지고 정말로 열심히 군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아저씨가 “넌.. 기타 칠 줄 아니?”라고 한 꼬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아직 한 번도 안쳐봐서요.”
기타를 못 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안 쳐봤기 때문에 ‘칠 줄 안다, 모른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런 것이 아닐까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안 해봤기 때문에 모르는 것뿐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소위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는 것입니다.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는 것이 가능은 할까요?
아마 대부분이 불가능하다고 외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도 힘든데,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손해 보면서 왜 해 주느냐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황금률을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만 보면 짜증이 나고 괜히 욕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바라는 대로 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짜증내면 행복할까? 화를 내면 기분이 좋아질까?
욕을 퍼 부으면 기쁠까? 불평불만을 가지면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을까?
짜증, 화, 욕, 불평불만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에 결국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황금률이 남만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루카 6,32)
오래 전입니다.
교우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를 옆자리에 태운 것이 긴장되었는지 후진을 하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얼른 내려서 잘못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 운전사는 차량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차량 상태를 확인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마 확인을 했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은혜를 입었으니 같은 처지가 되면 그런 넉넉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세 가지 가르침>
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 하느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 타락한 자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는다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나 타락한 자들이
하느님(예수님)을, 또는 말씀과 복음과 성사 등을 모독하는 것을 뜻합니다.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억압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 주었더니 믿고 구원을 받기는커녕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독하고 더욱 심하게 박해를 하는 것.)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이라는 말과 ‘마땅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마태 10,13).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지 않은 자들’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이고, 그들이 개들과 돼지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또는 겉으로는) 그것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단 복음을 전해주긴 하는데, 받아들이는지 거부하는지는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거부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요하듯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음이 우러나와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가는 나라입니다.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인지 먼저 신중하게 판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사를 집전할 때에도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실적을 올리려고 예비신자 교리 교육을 충분히 하지도 않고 함부로 세례를 주거나,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주거나... 그런 일은 옳지 않습니다.
(혼인성사, 견진성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태 10,14)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과 멸망을 상징합니다.
복음이란,
받아들여서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즉 개들과 돼지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미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개들과 돼지들로 전락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는 것,
또는 성경책이나 성물들을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을, “너희가 먼저 사랑하여라.”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2,37-40).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하여라.”가 아니고,
“사랑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여라.”입니다.
즉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주어라.”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경우에,
사랑을 준만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왜 나는 주기만 해야 하는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또 준 대로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이 말씀에서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씀에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하지 않더라도”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네가 의로움을(자비를) 실천해서 부활하게 될 때에 하느님께서 너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라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받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또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문과 그 문으로 가는 길은 당연히 아주 넓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문이 원래 좁으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좁다고 생각하는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그 문과 길을 좁다고 생각할까?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기는커녕 힘들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재미있고, 쉽고, 편하기 때문에 넓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편하고 쉽고 즐거운 쪽으로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긴 하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 본성을 억제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길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만,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간 그 길만 가야 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말로 백성을 현혹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경계하시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관한 비유를 통해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와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 대목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과 그리스도인 모두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7,16-17)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옳고 그름은 그 결과, 곧 그들의 행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에도 신자들을 현혹하는 이단과 무신론, 반그리스도적 사상들, 뉴에이지, 그릇된 신비주의, 혼합주의 등이 넘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가정을 파괴하거나 명예와 재물을 노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이란 아름답고 호감을 주며, 재치 있고, 경건하며 슬기롭고 매혹적일 수 있으나 ‘거짓’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실인가는 행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이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고, 얼마든지 참된 견해와 실제 의도를 은폐하는 수단으로도 쓰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고, 이간질로 분열을 조장하여 양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이런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7,19-20)
이 말씀은 특히 거짓 예언자들에게 해당되지만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행동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말해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좋은 열매’란
산상설교에서 요구하신 가르침, 곧 하느님 뜻에 일치하는 올바른 행실을 말합니다.
좋은 열매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영의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을 가리킵니다(갈라 5,22).
반대로 나쁜 열매는 육의 열매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당파심, 이기심, 싸움, 시기, 분열 등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만을 찾는 잘못에 빠졌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보다는 순진한 양들의 믿음을 악용하고, 파벌과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서보다는 자기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말뿐이었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으며, 어떤 열매를 맺고자 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혹 우리 사이에서 험담이나 중상모략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경우는 없는지 살펴야겠지요.
또 사나운 이리처럼 자기 인기에 신경을 쓰고, 자기 공적처럼 자랑하고,
자존심을 앞세우며 누구에게든 인정받으려는 삶의 태도는 없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끼리끼리 모여 남을 헐뜯고,
상대방의 영혼의 괴로움은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고,
제 3자의 말만으로 판단하며,
늘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처신을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말로 남을 현혹하고 말로만 사랑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좁은 문, 생명의 문 -지혜, 사랑, 기도>
가톨릭 성인들의 모습이 참 다양합니다.
성인들의 삶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웁니다.
성인들의 축일이나 기념일을 맞이할 때 저는 우선 생몰(生沒) 연대를 보며 얼마나 사셨는가 확인합니다.
사신 연세도 참 다양합니다.
김대건 성인과 소화데레사 성녀가 스물 넷쯤에 돌아가셨고,
오늘 기념하는 성 알로이시아 곤자가 수도자는 고작 스물 셋에 돌아가셨습니다.
산 햇수가 아니라 얼마나 열렬히 주님을 사랑했는가가 성덕의 잣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좁은 문’을 잘 통과하여
하느님의 집에 귀가(歸家)한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확연히 다른, 그러나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세 단락의 말씀이라
하나로 종합하기 힘들지만 어느 하나도 놓지고 싶지 않습니다.
1.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짓밟을지도 모른다.”
주석에는 ‘수수께기 같은 말씀이다.’, ‘이 문장은 맥락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해석하기가 어렵다.’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 이대로 한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여 선물을 하던지 말을 하던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상황입니다.
이 또한 ‘좁은 문’을 잘 통과하기 위한 분별의 현실적 지혜입니다.
2. 황금률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황금처럼 귀하다 하여 황금률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황금률입니다.
예수님의 동시대 유명한 율사 힐렐은 부정적 언사로 표현합니다만 뜻은 동일합니다.
“네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다.”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명으로
이 두 가지 지상 계율에 따라 세부 지침들을 풀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사랑이 상대방을 배려한 이런 황금률의 사랑입니다.
제가 볼 때 이 또한 ‘좁은 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한 배려의 사랑입니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삶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삶은 고해(苦海)가 아니라 축제(祝祭)라 말하기도 하지만
가만히 신앙없이 들여다 보면 세상 현실은 좁은 문 연속의 고해입니다.
아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어제도 50대 초반의 참 열심히 살아오던 자매가 갑자기 쓰러져 뇌사 상태에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도움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시험도, 취업도, 결혼도, 출생도, 죽음도 도대체 좁은 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천수(天壽)의 선종(善終)도 참 좁은 문입니다.
전혀 다른 맥락의 앞의 두 지혜와 사랑의 진리가 좁은 문의 통과에 아주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기도를 첨가합니다.
좁은 문의 통과에 끊임없이 바치는 간절한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기도해야 좁은 문은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내적 삶에 충실하다보면 좁은 문을 통과해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져 가는,
‘좁은 문이 넓은 문’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읽은 행복의 정의가 재미있었습니다.
‘행복’은 ‘현실’ 나누기 ‘기대’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그대로이니 기대를 줄여야 행복지수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아’ 기대를 하향 조정하라는, 갈수록 기대를 줄여가라,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이래야 행복할 수 있고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도규칙은 좁은 문을 통과한 후로의 감미로운 삶을 머리말 끝부분에서 다음처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러니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머리 48-49)
‘헬조선;지옥 한국’ ‘금수저-흙수저’란 널리 회자되는 말이 오늘 우리의 좁은 문의 현실을 웅변합니다.
곳곳에 널린 장애물들이요, 유혹의 덧, 악의 함정들에 출구(出口)가 좀처럼 보이지 않습입니다.
이래서 기도입니다.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보면 끝이 없습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과 내적 변화가, 긍정적 낙관적 삶이,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오늘 1독서의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좁은 문의 현실을 구원의 문으로 바꾸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임금이 보낸 협박의 편지를 주님 앞에 펼쳐 놓고 목숨을 내놓고 간절히 기도했고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의 응답을 받아냅니다.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간절한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도움으로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히즈키야 임금입니다.
답은 항구하고 끊임없는 기도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좁은 문의 통과에 최고의 처방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20여년 동안 얼마나 많이 고백성사 때, 보속의 말씀 처방전으로 써드렸는지
이 구절이 있는 성경의 쪽은 누렇게 바래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사실 좁은 문의 통과로 말하면 바오로 사도를 능가할 사람은 참 찾기 힘들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쁘게 자발적으로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셨네.
천사들의 빵을 우리가 먹었네.”
(시편 78,24-25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에게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는 이기적 욕망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각박하고, 살기 힘들어질수록 이기적 유전자는 더 강해집니다.
관계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기적 사회는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애에 빠져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타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웅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삶은 결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내 부모, 내 자식, 내 가족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고통스럽지만,
그들이 있어서 내가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헤어지고 싶지만, 정 때문에 산다는 부부들이나,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한탄을 하고,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고 서로를 원망하는 부모 자녀들,
때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시부모나 며느리와 같은 고부 갈등에 이르기까지
관계 속의 상처가 끊이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운명처럼 엮어진 인생이기에 삶을 더 곱씹으며 그들이 나를 살게 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 삶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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