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원대 신학지 <신학과 현장> 제12호에 실린 이선희 교수(목원대 조직신학)의 논문<감리교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해서 감신대 김홍기 교수(역사신학)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복음주의를 가장한 자유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자들이 기독교 진리에 중요한 내용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이 비판하는 부류의 신학자로 감신대 김득중 총장을 지목했다. 본보는 김홍기 교수의 논문을 세차례 나누어서 싣는다. <편집자주>
이선희 교수(목원대)는 조직신학자로서 2001년도 목원대 신학지 <신학과 현장>에서 역사신학 전공인 나의 웨슬리해석을 조심없이 비판하였고, 2002년 11월에 발표한 <신학과 현장> 논문에서는 신약신학자 김득중 총장 논문(<신학과 세계>1998년가을호)을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신학적 논문으로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조직신학자로서 신약 전공인 김득중 총장의 논문을 함부로 쉽게 비판할 수 있는가 의심하게 된다. 이 교수는 웨슬리로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비전문가로서 마치 자신이 전문가인양 웨슬리신학적 입장에서 역사신학적 논문이나 신약신학적 논문을 비판하는 것은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교수가 해석한 웨슬리신학이 얼마나 깊이가 없는 해석인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웨슬리는 구원의 출발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지만,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웨슬리의 구원론의 완성은 성화와 완전 성화다. 회개는 종교의 현관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라면 성결과 사랑으로 이루어 지는 성화는 종교자체이다. 이 교수처럼 오직 신앙의인화만을 강조하면 웨슬리 구원론의 절반만 얘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구원 자체를 즐기기 보다는 구원의 문에만 머무르는 미성숙한 성도의 상태에만 거하게 된다. 물론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웨슬리가 여러번 심지어 ‘거듭남’은 60번이나 같은 설교를 할 만큼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계속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설교하여야 한다. 그래서 많은 불신자들과 초신자들을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 한국교회에는 거듭났지만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영적 어린들을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가 강조되어야한다. 구원을 확신하지만 영적으로 어떻게 성숙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성도들의 목마름이 오늘날 너무나 절실하다.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말씀과 기도로 내면적으로 경건을 훈련시키고, 다양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통하여 생활을 성결시켜야한다.
웨슬리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있는 믿음이 성화를 위해 필요함을 강조한다.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의 믿음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은 그 후 25년 후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의 행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서의 행함은 로마서적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지 믿음 이전의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가 말하는 의롭다하심은 의인화(義認化)이고 야고보서가 말하는 의인화(義人化)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웨슬리가 약2장 주석에서 말하는 의인화(義人化)란 곧 의로운 인간으로 속성이 변화하는 성화를 의미한다. 루터교회의 영성운동 집단이었던 모라비안 진젠도르프는 오직 신앙만이 복음적인 성화라고 강조한다. 그는 사랑을 더 많이 한다고 더욱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덜 사랑한다고 덜 거룩하여 지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한편, 또한 거룩함 안에서 성장한다고 해석한다. 참 성도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매일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고 강조한다. 이선희 교수도 진젠돌프처럼 믿음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본다. 웨슬리가 강조한 사랑과 선행은 성화의 조건이 아니라고 보는 위험성을 이 교수는 갖고 있다.
웨슬리는 또한 “형식적 크리스천”이란 설교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참 크리스천은 믿음을 통한 은총의 신학에 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윤리에 서서 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구원받은 믿음 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참 크리스천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곳에서 언제나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하여 선행을 실천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 “Do all the good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By all mean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In all the way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In all the place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At all the time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To all the people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As long as ever...you can!(네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러므로 구원의 출발인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의 조건은 믿음만이지만, 구원의 완성인 성화와 완전성화의 조건에는 사랑과 선행이 필요하다. 웨슬리는 구원의 완성을 의롭다하심의 완성이라고도 표현하는 데, 그 의롭다하심의 완성에는 선행이 필요함을 1744년 연회록에서 강조한다: “기회있는대로 모든 선행을 행하지 않은 아무도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1745년에 쓴 “더욱 간절한 호소”에서 “내적 성결과 외적 성결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에 뒤따라오는 결과로서 내적 성결과 외적 성결은 의롭다하심의 완성의 조건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선행은 의롭다하심의 출발을 일으키지 못함을 강조하는 한편, 다른 한편 의롭다하심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에서는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선행은 분명히 말과 기질과 생각의 전적인 변화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25장에 나오는 양의 편에 든 무리들이 병들고, 굶주리고, 갇히고, 나그네 된 지극히 작은 소자를 돌보는 선행이 마지막 구원의 조건이 됨을 그의 [신약성서주해] 강조한다. 내적 선행으로써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외적인 선행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미스터 힐스와의 대화에서 “구원의 완성은 조건으로서의 선행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마25장을 읽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미스터 처치와의 대화에서 “선행은 의롭다하심을 얻기 전에는 구원의 조건이 못된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의 조건은 된다. 누가 감히 우리가 마지막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선행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인가?” 1741년 8월 1일 일기에서 미스터 잉함과의 대화에서 두 가지 합의를 하였음을 기록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를 기나긴 대화를 통해 합의하였다. 첫째로,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선행들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이 기회가 있는대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그가 받은 은혜를 잃어버릴 것이다.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고 선행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라, 이것이(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설교한 것이 문제가 되어 런던에서 설교 하지 못하도록 영국성공회로부터 금지당하여 브리스톨에 가서 옥외설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곧 모든 죄악성에서 성별되는 거룩함과 사랑의 온전한 실천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선희 교수가 김득중 총장의 논문을 오해한 것은 마치 김총장이 믿음은 무시하고 선행만 강조하는 것처럼 해석한 것이다. 김총장은 성서를 총제적으로 읽어야한다는 것을 누누이 주장하였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강조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마치 김총장이 믿음은 제외하고 행함만 강조하는 도덕신학 내지 자유주의신학자로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지만 사랑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신학적 입장에서 성서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려고 김총장은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선희 교수의 글에는 성령에 의해서 주입되는 성화(imputation)는 강조되지만, 성령의 사역에 성도가 영성수련으로 동참하여 본성마저도 변화되는 성화(impartation)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논문에서 아예 선행의인화에 기초한 영성수련이나 영성신학은 필요없다고 단정한다. 그러한 영성신학이나 영성수련은 천주교회적 발상이라고 규정짓는다. 천주교 속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체험하는 영적 각성운동이 더욱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개신교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영성수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웨슬리의 속회의 목적도 단지 행정적인 조직이나 교인수만을 증가시키는 양적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훈련이라는 질적 성숙을 도모하는 목회적이고 신앙적인 동기에 있었다. 모든 속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들을 간증형식으로 고백하고 나눔으로써 서로 권면하고, 돌보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영적 책임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성화의 책임의식과 연대의식인 ‘accountability’를 직고(直告)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속회를 통하여 소규모 단위의 성경공부, 기도회, 그리고 신앙적 담화를 위한 좋은 장이 마련되었다. 이 속회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파선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랑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속도들이 속회공동체를 통해 공동의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강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서로 응답하며, 서로 격려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속회를 통한 공동체적 성화 생활을 강조한 반면에, 개인적, 수도원적, 신비주의적, 은둔적 성화 생활을 비판했다. 고독하고 은둔적인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웨슬리는 못박아 얘기한다.
▲웨슬리가 두번째로 만든 예배당.왼쪽에 보이는 대리석 기둥이 예배당 전체를 돌아가며 세워져 있다.이대리석 기둥을 영국왕 찰스대제가 감리교의 사회변혁과 사회구원 운동에 감하사며 기증한 것이다.
성화훈련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첫째로, 내면적 개인적 경건을 힘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와 금식과 성경읽기와 일기쓰기 등 경건의 선행을 힘쓴다.
둘째로, 상호협동적 영성훈련을 힘쓴다. 이를 위해 서로가 권면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상담하는 크리스천 컨퍼런스를 가진다.
셋째로,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의 선행을 힘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갇힌 자와 나그네와 신체장애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선행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사회적 성화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속회의 영성수련에서도 이렇게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경건의 선행과 함께 세상 속으로 성육신화해 가는 자비의 선행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선희 교수가 오직 믿음 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인용한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 후반부에서 웨슬리는 “성화를 위해 선행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하면서 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이 성화의 수련을 위해 동시에 필요함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성화가 시작되지만 믿음의 증가와 계속성을 위해서 선행의 열매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만이 성화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과 선행(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이 함께 성화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속회의 본래의 목적을 한국감리교회가 회복해야 한다. 성화훈련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영성수련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지도자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영국과 미국 감리교회의 속회가 죽어가게 되었다. 한국감리교회가 이러한 철저한 지도자 훈련에 의한 성화중심의 속회로 돌아가야 한다.
가령 알콜중독자가 그 병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의 은총을 강하게 체험하면서도 부단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성수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4단계로 영성수련을 알콜중독자에게 거치게 한다. 신경질내고, 분과 화를 내는 사람이 은총과 믿음으로만 나쁜 기질을 고칠 수 없다.
성령의 은총과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자기 절제의 영성수련을 할 때, 그 나쁜 성질에서 그리스도의 성질로 변화될 수 있다. 교회출석을 열심히 하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병도 고치는 감리교권사가 교통사고가 나서 6명의 환자와 더불어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미국에 사는 딸이 간호하러 왔는데 환자들 보는 앞에서 내 딸이 아니라고 딸을 야단치고 신경질을 냄으로써 전도의 길을 막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영성수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오래 예수 믿었고 능력은 있으나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이런 성도들을 철저하게 성숙시키는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을 매 연회 때마다 강조하였다. 다양한 은초의 수단을 활용하여야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다가오지만, 그 은혜가 임할 때까지 선재적 은총으로 일하는 자유의지를 통하여 은총의 수단 곧 성경읽기, 금식, 기도, 선행의 실천 등을 사용할 것을 웨슬리는 강조한다: “그리고 행동하기를 배우십시오. 선행을 사모하십시오. 자비의 선행뿐만 아니라 경건의 선행도 열심히 하십시오. 가족기도와 은밀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도 노력하십시오. 은밀히 금식하십시오.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성경말씀을 우리들과 함께 들으며, 또 홀로 읽으며 그리고 그 읽은 말씀을 명상하십시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찬에 참석하십시오.” 이것을 오해한 모라비안교도들은 웨슬리와 1740년경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모라비안지도자 몰더는 신앙이라는 선물이 다가 오기까지 기다려야하고 모든 외적 선행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정숙주의를 비판하면서 한 여인이 아직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거듭나기 전에-성찬을 받다가 거듭남을 체험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를 통하여 이러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해야함을 강조한다.
웨슬리의 성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웨슬리가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였고, 사회적 성화는 강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웨슬리사상을 너무나 편파적으로 보는 해석이다.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말하며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고 말한다. 웨슬리는 산상수훈의 빛과 소금 구절을 강해할 때,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내면적 경건과 사회적 개혁,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의 생동감있는 조화를 그의 [찬송가 서문](Hymns and Sacred Poems(published in 173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독한 종교는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거룩한 고독은 ‘거룩한 간음행위’ 이상이 아님을 복음은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종교 아닌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크리스천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하여 준다. 참으로 그의 형제들을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자는 선행들을 열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영혼 속에서 선행들을 실천하기 위해 타오르는 끊임없는 갈망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주님처럼 매사에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감리교회는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민족을 개혁하기 위해서’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교회개혁과 민족개혁이 감리교정신이다. 기독교를 은둔자의 종교, 기도하고 명상하는 종교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행위로 본다.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운동을 통하여 영국 민족을 개혁하는 것이 감리교회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임을 매 연회 때마다 강조하였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자 아우틀러는 수직적이고, 내면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해석하고,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수평적 외향적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 것이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해석하면서 웨슬리의 사상은 바로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풀이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이라고 아우틀러는 해석한다.. 마음의 성결과 생활의 성결을 웨슬리는 강조하고, 내적 성결과 외적 성결을 강조한다. 마음의 성결과 내적 성결은 인격적 성결을 말하고, 생활의 성결과 외적 성결은 사회적 성결로 연결되어 진다.
이선희 교수는 사회적 성화를 마치 사회도 인격체처럼 회개하고 인격체처럼 항상 기뻐하는 성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기괴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사회적 성화라 함은 사회를 인격체로 보고 구원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다. 의로움과 거룩함이 인간 속에 이루어졌다면, 그는 사회 속에서 의로운 사회와 거룩한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성화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그의 내면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그리스도가 사회 속에서도 통치하시는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기도문대로 하나님나라가 사회와 국가 속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사회와 국가 속에 임하도록 사회적 성화운동을 일으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나 사회복음처럼 지상의 유토피아만을 꿈꾸는 것이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가 아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마음과 사회 속에서 자라는 하나님나라가 초월적으로 미래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믿는 것이다.
이 교수는 어떻게 18세기 웨슬리 시대의 사회적 성화가 얼마나 강하게 일어났는지 그 역사적 상황을 모르고 조직신학적 개념으로만 웨슬리 신학을 설명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사회적 성화는 후대학자들의 해석이 아니고 웨슬리 자신이 강조하였음을 그의 저술들 속에서 이미 밝혔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적 성화운동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일어났는지를 살펴 볼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1738년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한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의 탄광지역의 광부들, 농부들, 노동자들 곧 민중들을 찾아가 다양한 사회적 성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과 사회적 성화 정신은 이론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다양한 사회봉사운동과 사회변혁운동으로 나타났다. 사회봉사운동은 1741년 46명이 2명씩 짝을 지어 23개 지역으로 나누어 일주일에 세 번씩 각 지역 병자들을 방문하는 일, 1747년 “원시 의학”을 저술하여 병, 증상, 상처를 알파벳 순서에 따라 명시하고 289가지 표제들로 정리하여 설명한 일(174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런던의 5세 이하의 아이들 사망율이 74.5%에서 31.8%로 줄어든 것에 기여함), 1746년 가난한 병자들을 돕기 위하여 영국에 무료의료진료소를 시작한 일, 나그네친구회(Strangers‘ Friendly society)를 1785년 런던에서 감리교도에 의해 조직하여 친구 없는 나그네, 병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조직되었는데 영국 전역에 감리교 신도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이 봉사센터도 세워지게 한 일, 1748년 탄광지역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워 가난한 광부들의 자녀들을 위해 기숙사비와 교육비를 전혀 부담하지 않고 공부하게 한 일, 1747년부터 신용조합을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한 일 등이었다.
웨슬리는 사회봉사만 아니라 사회구조변혁을 일으켰는데, 산업혁명과정에서 소외된 광부, 농부, 노동자들을 위한 속회 형태의 노동조합운동 시작하여 1831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 연합 산업노동조합“ 등이 결성된 일, 1774년 “노예제도를 논박함”이란 논문을 써서 본격적으로 노예제도를 공격한 일, 1739년 봄부터 런던과 브리스톨 감옥에서 복음설교와 죄수상담목회를 동시에 실천하여 1743년부터 죄수들을 방문하는 것을 감리교의 사회활동을 방향 짓는 감리교신도회의 원칙으로 삼게 한 일등이다.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를 미국적 상황에서 잘 발전시킨 학자들이 해리스 롤, 알버트 누드슨, 에드가 브라이트만 등이 있었고, 미국의 웨슬리신학의 대가 알버트 아우틀러가 그의 저서 [웨슬리정신의 복음주의]에서 사회적 성화론을 잘 발전시켰으며, 그리고 이러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사상을 현대의 해방운동과 연결시켜서 러년은 1977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대학에서 있었던 제6차 감리교신학연구에 관한 옥스퍼드 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아 가지고 [성화와 해방]이란 주제로 책을 편집하면서, 제임스 콘은 흑인신학적 입장에서, 보니노는 남미해방신학의 입장에서, 하데스티는 여성신학의 입장에서 웨슬리의 성화이해와 하나님나라 이해는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임을 강조하기에 이르게 된다. 제닝스는 [가난한자를 위한 복음]에서, 믹스는 [가난한자의 몫]에서 복음적 경제윤리와 대안적 경제윤리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려고 애쓰며, 사회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는 제3의 대안적 경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제도의 구조적 개혁을 강조한 웨슬리의 논문은 “식량의 현재적 궁핍에 관하여 논함”이라는 논문이다.
이 교수가 강조한 것처럼 그리고 웨슬리가 강조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열심히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이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의인화와 거듭남만 열심히 설교해서는 안된다. 웨슬리가 그토록 영적 성장을 위한 성화를 강조하였듯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화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많이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많이 강조하지 않았다. 20세기 한국교회의 부흥회의 포스터를 보면 회개와 거듭남은 항상 슬로건으로 등장하였지만, 성화를 주제로 하는 부흥회가 과연 있었는가? 21세기 한국교회 부흥회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인화와 거듭남)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성화)을 함께 강조해야 한국교회가 살수 있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으며, 그러한 영적 성장은 자연적으로 양적 성장도 이룩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사회 속에서 사회성화운동으로 전개함으로써 웨슬리처럼 우리도 민족을 개혁하고 통일의 역사를 이룩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 한국감리교회의 지도자가 된 김진호 감독회장이 소파개정을 위한 촛불시위도 주도하고, 북핵문제와 인간복제문제에 대하여도 입장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감리교회가 웨슬리 당시처럼 한국 민족과 사회의 빛이 되는 사회적 성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바라기는 한국감리교회의 감독들과 감독회장이 김수환 추기경 이상으로 우리 민족과 사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도자들이 되어서 감리교회가 한국민족을 변혁시키는 교회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본보는 지난 3주간 목원대 신학지 <신학과 현장> 제12호에서 “복음주의를 가장한 자유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자들이 기독교 진리에 중요한 내용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이선희 교수(목원대 조직신학)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해 김홍기교수(감신대 역사신학)의 반론을 게재했다.
김교수의 글에 대한 재반론과 본인의 논문에 대한 설명의 원고를 이선희교수가 보내옴에 따라 앞으로 3주에 걸쳐 똑같은 방식과 지면을 통해 게재한다. <편집자주>
웨슬리의 텍스트에는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홍기교수는 웨슬리를 오해하고 있다.
“감리교 신앙의 근본에 관한 소고.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감리교 내의 자유주의적 신학들의 오해에 대한 고찰”, 「신학과 현장」제12집(목원대학교 신학연구소, 2002, pp.54-100). 이것이 김홍기 교수가 비판한 본인의 논문이다. 그 비판의 핵심은 ‘이선희 교수는 이신칭의와 중생만을 강조하고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논문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증거: (1) 나는 이 논문에서 오직 이신칭의와 중생만이 참된 성화의 시작이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으로 이루는 성화의 행위가 본격적인 기독교인의 삶이며,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각 사람의 행위라는 것(고후5:10)을 바울, 야고보, 루터, 웨슬리를 통해서 입증했다. (2)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웨슬리도 강조한 사실을 입증했다. (3) 그러나 김 교수가 주장하는 소위 ‘사회성화’는 웨슬리의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민중신학적 사회운동 이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신학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기 논문의 주장을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상기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본인은 독일 본 대학에서 민중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 1992년부터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웨슬리 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4년 중생을 체험하고, 웨슬리 신학에서 나의 연구대상을 발견했다. 10년여 웨슬리 신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웨슬리 신학이 전형적인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음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하고, ‘칭의와 동시에 중생하여, 이로부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된다’는 성화론을 핵심교리로 삼는 신앙양태를 의미한다.
(2) 또한 이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웨슬리 신학에 대한 해석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개 자유주의 신학 또는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웨슬리 신학이 ‘(복음적)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이라는 해석은 자유주의 신학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고,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행동으로 완성한다’는 주장은 그 후에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텍스트를 조금만 치밀하게 분석해 보아도, 그런 관점들은 웨슬리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분석결과를 나는 졸저 「웨슬리 신학의 탐구」(도서출판 복음, 2002)에 피력했다.
(3) 이런 연구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이것이다: 오늘날 한국감리교에서 주장되는 신학들 가운데 웨슬리의 복음주의 신학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신학, 토착화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과 행동에 기대를 거는 신학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별로 기대를 걸지 않거나 심지어 불신하는 풍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일들이 그간에 한국 감리교 신학계에서 발생했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들에 관한 평가를 나는 졸저 「복음주의적 감리교신학의 모색」(도서출판 복음, 2002)에 피력했다. 여기서는 이 논쟁에 관련된 두 가지 실례만 들어 본다.
① 김홍기 교수의 웨슬리 해석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 양심, 자유의지, 종교성이 선행은혜다”라는 주장은 인간이 가진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는 사상이며, 이는 웨슬리의 텍스트에 명시된 선행 은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 나는 ‘존 웨슬리의 선행은혜 개념에 대한 소고’(「신학과 현장」제11집, 2001, pp.96-136)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홍기 교수처럼 자유주의 신학으로 출발하면 웨슬리의 복음주의가 말하는 이신칭의와 성화를 올바로 알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와는 달리 인간 자신의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김홍기 교수는 이신칭의와 중생을 신학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 속에서 역사하는 ‘개인을 구원하고 사회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김 교수는, 웨슬리 신학과 민중신학을 비교 연구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그의 ‘사회성화’ 사상에 여실히 나타나듯이, 민중신학적 사회운동의 사상에 의지해서,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사회를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세계관에 맞춰서 웨슬리를 자기와 비슷한 일종의 ‘종교사회주의’ 색채를 띤 국민윤리적 사회운동가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② 2001년 4월 경주에서 있었던 ‘위대한 감리교를 위한 감리교 대표자 회의’에서 K 교수가 발표한 강연도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 및 불신을 노출하고 있다. 이 강연에서 그가 주장한 핵심내용은 이렇다: “바울이 말하는 ‘행위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기독교인들의 도덕성 타락의 원인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이미 바울의 ‘오직 믿음만으로’의 잘못된 신앙유일주의를 야고보와 마태가 ‘행위있는 믿음’으로 올바로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칼빈은 신약성경의 균형잡힌 가르침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울의 신앙유일주의만을 강조하여 믿음을 확대왜곡하고 행위는 축소왜곡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바울의 믿음강조와 야고보의 행위강조를 조화시킨 성공적인 신학자다. 오늘날 감리교는 이러한 웨슬리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K 교수의 이런 주장에 있어서 오류는 다음과 같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도덕성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용(誤用)’이 도덕성 타락의 원인인 사실을 그는 간과한 것이다. 그는 이런 착각에 근거하여 ‘오직 믿음만으로’를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불신하며 논한 결과, 이신칭의를 강조한 바울과 루터가 믿음만 말하고 행위는 말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과 루터는 오히려 반대로 성화의 행위를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바울과 루터의 텍스트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K 교수는 ‘웨슬리는 그래도 바울 보다는 야고보에 가깝다’고 주장했는데, 웨슬리는 야고보서 2:14에 대한 주해에서 야고보나 바울이나 공히 이신칭의라는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진정한 이신칭의는 의와 거룩의 행위를 낳는 것이며, 이 두 사도 사이에 상호모순이 없다고 명시한 사실을 나는 확인했다. 그러므로 나는 K 교수의 경우에서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근거없는 오해와 불신을 텍스트를 왜곡하면서까지 주장하는 현실을 보았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주장한 이러한 잘못된 관점이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의 일부 목회자들과 소위 의식화된 평신도들의 평균적인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말씀하고 웨슬리의 복음주의가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와 성화 교리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알리고 바로 잡고자 했다. 이것이 상기 논문을 쓰게 된 동기다.
(4) 오늘날 한국감리교회의 위기상황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라고 웨슬리도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기대감 상실이다. 일부 신학자들과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이신칭의 교리가 행위를 말하지 않거나 개인적 행위만 말한다고 오해하면서 불신한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능력에 의하여 사람이 구원받으며 사회가 새로워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갈수록 무지해지고 있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시작부분에서만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인간 자신의 선행(영성훈련과 사회참여 방식의 선행)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천주교식의 오류를 향한 치명적인 의식전환이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믿는 자의 영혼과 삶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상실을 표현하는, 그리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의 눈에 보이는 소위 인간다운 행동으로써 인간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혁하자는 일종의 인본주의적 도덕종교의 세계관이다. ‘우리 자신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고 웨슬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고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교’(설교, ‘원죄’, III,3)를 망각한 일종의 사회윤리적 휴매니즘의 세계관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서 감리교는 예기치 않게 천주교식의 신앙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천주교는 명시적으로 이신칭의를 거부하며 소위 ‘믿음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해온 교단이다.
본보는 지난 3주간 목원대 신학지 <신학과 현장> 제12호에서 “복음주의를 가장한 자유주의 신학과 정치신학자들이 기독교 진리에 중요한 내용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이선희 교수(목원대 조직신학)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해 김홍기교수(감신대 역사신학)의 반론을 게재했다.
김교수의 글에 대한 재반론과 본인의 논문에 대한 설명의 원고를 이선희교수가 보내옴에 따라 3주에 걸쳐 똑같은 방식과 지면을 통해 게재한다. <편집자주>
웨슬리의 텍스트에는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를 오해하고 있다 ②
웨슬리가 말하는 ‘이신칭의와 중생’은 그의 인간론과 기독론을 알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을 알아야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칭의 받고 거듭난다’ 할 때, 인간에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1)웨슬리의 인간론.
(1.1) ‘하나님의 형상론’: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인간이란 무엇인가?”,10). 몸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나의 본질이 아니다. 나의 본질은 오직 영혼에 있다(ibid). 이 영혼은 불멸하는 영적 실체로서 몸의 언행 전체를 주관하는 내적 원리다. 그래서 “몸은 썩어 먼지로 화할지라도, 이 스스로 움직이며 사고하는 원리는 그의 모든 정욕들과 정서들을 다 가지고 계속 존재할 것이다”(ibid). 인간이 “이 세상에 보내지고 영혼을 부여받은 유일한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요, 영원토록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다”(ibid,15). 이를 위해 영혼은 이해력과 의지와 정서와 자유라는 기능을 받았다(ibid,5-11). 이해력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며, 의지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따라 의지를 결정하고 행하며, 정서로는 창조주를 사랑하되, 자유로써는 이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감화되어 기쁨으로 자원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영혼이 바로 웨슬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이다(“신생”,I.1). 이 영혼이 사랑으로 충만하고, 의와 자비와 진리로 충만한 상태를 웨슬리는 ‘의와 진정한 거룩’이라고 하며, 이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라 부른다(ibid).
(1.2) ‘원죄론’: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로 각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이해력은 하나님에 대하여 불신앙의 상태가 되고,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교만과 자기의지의 상태가 되며, 정서는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사랑하는 육신의 정욕 상태가 된다(“원죄”, II.1-11). 이것이 원죄개념의 첫째 항목인 ‘본성의 전적부패’다. 몸의 언행을 주관하는 내적원리인 영혼이 부패했기 때문에, 여기서 전적으로 부패한 언행이 나온다: 불신앙으로부터 신성모독적 언행이, 교만과 자기의지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언행이, 육신의 정욕으로부터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언행이 나온다(“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II.2-3). 이것이 원죄개념의 둘째 항목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적무능’이다(“원죄”,III,1-2). 이렇게 인간은 나면서부터 영혼의 전적부패와 전적무능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역사(役事)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그래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2:16)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자명하게 깨닫게 하시는 것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설득된 확신의 상태’라고 웨슬리는 말한다(“성경적 구원의 길”, II.1-3). 이 믿음에 의해 죄의 용서와 칭의를 받아서 원죄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이신칭의다(“믿음에 의한 구원”, II.2). 이것이 바로 오직 이신칭의만이 중생의 근거요 성화의 시작이 되는 이유다. 그래서 원죄를 올바로 이해하면, 반드시 이신칭의의 필수성을 이해할 수 있지만, 원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반드시 이신칭의를 오해하게 된다.
김홍기 교수처럼, 중생 이전의 인간이 선행은혜로 인하여 전적부패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된 ‘이성, 양심, 자유의지, 종교성’을 갖고 있다고 오해하여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인정하면, 사실상 원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갖고 있다 하는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면서, 이신칭의는 마치도 신앙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요식절차처럼 여기고, 모든 문제는 이제 인간 자신의 행동으로 이룬다 하는 성화에서 다 해결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신칭의는 요식절차가 아니라, 믿는 자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임과 동시에 부패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라는 사실을 우리는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볼 수 있다.
(2)웨슬리의 기독론은 양성론과 속죄론의 결합형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신성적(神性的) 의(義)와 인성적(人性的) 의(義)를 가진다(“주(主), 우리의 의(義)”, I.1-4). 그의 신성적 의는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거룩성이다. ...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다”(ibid, I.1). 죄인에게 전가되는 것은 그의 신성적 의가 아니라, 인성적 의다.
그의 인성적 의는 내적 의와 외적 의로 구성된다. 그의 내적 의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과 기능에 인쳐진 하나님의 형상이다”(ibid, I.2). 이 영혼이 내적원리로서 몸의 언행을 주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그의 외적 의다. 그의 외적 의는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로 구성된다. 능동적 의는 죄를 범치 않은 소극적 의와 모든 언행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행하신 적극적 의로 구성된다. 수동적 의는 그가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 전체를 온전히 감수하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 전체가 죄인이 전가받는 그리스도의 의다(ibid, I.4). 이것을 전가받는 방편은 오직 믿음이다(ibid, II.1).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것은 “믿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시고 감수하신 것 덕분에 용서되고 용납된다”(ibid, II.5)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얻는[=칭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총애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성화] 방법이기도 하다”(ibid, II.5). 즉, 믿음에 의한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는 이신칭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성화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에서도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며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화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래서 웨슬리는 말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칭의]도 이런 방법으로 하는 것이고, 그 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성화]도 동일한 방법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이 하나의 동일한 방법 안에서 걸어가는 것이다”(ibid).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이식(移植)을 결과시킨다: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의(義)를 전가받은 사람은 그 열매로서 내재적(內在的) 의(義)를 갖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의를 전가하신 모든 사람에게 의를 심으시는(implant)”(ibid, II.12) 결과다. 즉, “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칭의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성화하신다. 그리스도의 의(義)가 전가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의롭게 만들어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들이 그 안에서 본래 피조되었던 바의 의와 진정한 거룩으로 새로워진다”(ibid).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義)의 이식(移植)에 의하여 일어나는 실제적 변화인 중생이요, 이로써 시작되는 성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영혼의 각 기능을 정상기능하도록 회복하여 의와 거룩의 상태로 회복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믿음 받기를 열망하는 자의 영혼 안에서 이해력의 눈을 열어서 불신앙을 믿음으로 바꾸고, 교만과 자기의지를 겸손과 순종으로 바꾸고, 세상사랑을 하나님사랑으로 바꾸신다(“그리스도의 오신 목적”, III.1-2).
영혼의 기능이 이렇게 믿음에 의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때문에, 칭의을 받으며 동시에 중생하는 것이요, 중생이 성화의 시작인 바,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가 성화의 근거인 이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義)의 이식(移植)도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고 웨슬리는 주장하는 바, 이것이 바로 성화도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그가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받았다고 자칭하되 이런 실제적인 ‘의와 진정한 거룩’으로의 내적 및 외적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칭의받은 것도 아니다. 다만 ‘자칭 믿음’이라는 망상 속에서 ‘나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속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칭의받는 순간에 영혼의 각 기능이 회복된 것이 중생(重生)이고, 이로부터 믿음에 의한 지속적인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 및 이식(移植)에 의하여 영혼이 ‘의와 거룩’으로 회복되며 성장하는 것이 성화(聖化)이고, 이 성화된 영혼의 각 기능이 몸의 언행을 주관하여 나오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선행(善行)이다. 즉, 믿음에 의한 영혼의 성화(聖化)로부터 몸의 선행(善行)이 나오는 것이다. 선행으로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믿음에 의해 성화되면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홍기 교수가 이신칭의는 믿음으로 받지만, 성화는 인간의 행위로 이룬다는 주장은 웨슬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웨슬리의 인간론과 기독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일 뿐이다.
웨슬리의 텍스트에는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를 오해하고 있다 ③
기독교의 목표는 구원이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라고 웨슬리는 강조한다(“성경적 구원의 길”,1. 이하 문단번호는 이 설교에 해당됨). 여기서 구원은 칭의와 성화를 의미한다(I.3). 즉, 칭의도 오직 믿음으로 받으며, 성화도 오직 믿음으로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웨슬리 당시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칭의는 믿음으로 받고, 성화는 행위로 이룬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사실을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화된다고 너[=웨슬리]는 믿는가?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네가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들로써 성화된다고 너는 믿고 따라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하다고 지난 25년 동안 일반적으로 그리고 열렬하게 주장들 해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정확히 그 반대를 공언해 오고 있다. ...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화된다고 나는 개인적으로나 그리고 공개적으로, 또한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증거해 오고 있다. ... 믿음이 칭의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인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화의 조건이요 유일한 조건이다. 첫째로, 믿음이 성화의 조건이다. 즉, 누구도 믿지 않고는 성화되지 않는다. 믿음 없이는 아무도 성화되지 않는다. 둘째로, 믿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다. 즉, 믿음만이 유일하게 성화를 위해 충분하다. 믿는 자는 누구나, 그가 그 이외에 다른 무엇을 가졌든지 가지지 않았든지 관계없이, 성화된다. 아무도 믿기 전에는 성화되지 않는다; 누구나 믿을 때 성화된다”(III.3).
그 이유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깨닫게 하시는 자명성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설득된 확신의 상태’다(II.1-4). 즉, 믿음이라는 것은 창조주, 섭리주, 심판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가운데 우리의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질적으로 이성(理性)의 인식능력을 초월하는 현실에 관하여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영혼에게 그것의 자명성을 깨닫게 하시고, 이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이 직관적으로 설득된 확신의 상태요, 그래서 영혼의 각 기능 (즉 지(知), 의(意), 정(情), 자유(自由)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의와 거룩 가운데서 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칭의받고 성화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한 것이다”(II.4). 웨슬리에 의하면, 이렇게 믿음으로 칭의와 성화를 이루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하나님에게 이 일이 가능한 이유를 웨슬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하는 말씀’이라는 종교개혁적 말씀개념에서 보고 있다: ①칭의의 경우: “하나님이 네 마음에 ‘안심하고 힘을 내라, 네 죄들이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자마자 그의 나라가 도래한다”(“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II.9). ②성화의 경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것은[=“마음을 온전한 거룩으로 채우는 것”]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다’”(III.15). 그러므로 소위 ‘나, 예수 믿습니다’라는 마음의 결단으로 칭의받고 성화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마음의 결단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서, 이제 믿었으니 행위로써 개인성화와 사회성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도 성화도 모두 그르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면 행위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전혀 필요 없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경우에만, 그 믿음에서 진정한 선행(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필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것이 웨슬리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 반대로 선행으로써 위에 말한 그런 의미의 믿음이 생긴다거나 믿음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웨슬리는 이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다:
(a) 칭의의 경우, 칭의를 받기 위해 믿음은 절대적으로,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필요하나, 칭의 전의 회개와 회개의 행위는 조건적으로,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만 필요하다(III.1-2). 회개와 회개의 행위를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계속 죄 가운데 있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칭의를 얻게 하는 믿음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행위]를 맺기 위한 시간도 기회도 없는 경우에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반드시 그리고 충분히 칭의를 받는다(III.2). 위에 말한 그런 의미의 믿음이 있다면, 이로써 그는 그 순간에 칭의 받고, 이미 영혼의 각 기능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중생한 상태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b) 성화의 경우도 동일하다: 믿음은 성화를 이루기 위해 절대적으로,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필요하나, 행위는 성화를 위해 조건적으로,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만 필요하다(III.13). 이런 행위들은 기도, 성만찬 받기, 성경독서, 금식 같은 경건의 행위 및 이웃의 영과 육을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즉 배고픈 자 먹이기, 헐벗은 자 입히기, 감옥에 있는 자 방문, 병든 자 방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돕기, 무지한 자들 가르치기, 어리석은 죄인 깨우기, 미지근한 자들 분발시키기, 동요하는 자들 굳세게 하기, 의지박약자들 위로하기, 유혹 받는 자들 구조하기, 영혼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에 여러 가지로 공헌하기와 같은 자비의 행위로 구성된다(III.9-10). 이런 선행들은 믿음으로 성화된 영혼이 몸의 언행을 주관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서 필수적이며, 믿음이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로서 필수적이다(III.13). 그래서 이런 행위들을 의도적으로나 나태로 인하여 회피하면, 선행의 근원이 되는 믿음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선행을 할 시간도 기회도 없는 경우에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그런 행위 없이도 성화된다(III.13).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그런 행위가 아무리 있어도 성화되지 않는다(ibid). 믿음 없이도 겉으로는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말하는 것은
(1) ‘선행으로써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선행으로써 성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2) ‘오직 믿음으로써 칭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써 성화를 이룬다’는 구원의 근본이치다. 즉, 구원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이요, 그래서 구원은 신인협동(神人協動)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선행을 보이지 않으면,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해졌거나 소멸된 것이다(“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II.7). 이런 경우에는 영성훈련이나 사회참여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이 필요한 것이라고 웨슬리는 말한다(“믿는 자들의 회개”, II.1-6). 위에 말한 의미의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영성훈련이나 사회참여를 강조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지속적으로 성경이 지시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웨슬리의 가르침이다. 이 믿음을 단지 ‘나, 예수 믿습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없다’는 식의 오진(誤診)과 ‘행위로써 성화를 이루라’는 사이비 처방들로 인하여 기독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이런 불행을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감리교회 안에도 일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신칭의와 중생을 인정한다 하면서, 영성훈련과 사회참여의 행위로써 성화한다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는데, 이것이 바로 웨슬리가 한탄했던 오류라는 사실조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김홍기 교수가 주장하는 ‘사회성화’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 단어는 부적절한 조어(造語)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착각하게 하는 치명적 오류다. ‘사회의 의식구조 및 제도의 인간화(人間化)’를 ‘사회성화’라고 부르는 것은 ‘성화’라는 신학적 개념의 오용이다. ‘성화’ 개념은 믿음과 영혼과 몸의 선행에 관련된 현상을 지칭하는 신학적 전문용어이고, ‘사회의 의식구조 및 제도의 인간화’라는 것은 일정한 사회현상을 지칭하는 사회학 내지 윤리학의 전문용어다. 전문용어의 의도적 혼동은 주로 이데올로기적 선동과 기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쓰라린 경험이다.
사실 ‘사회성화’ 또는 ‘사회구원’이라는 개념이 1970년대 미국연합감리교회(UMC)의 ‘교리와 장정’에 등장한 것은 그 당시 소위 ‘Student Power’라고 불렀던 반전(反戰)운동, 자본주의 비판운동, 공산주의 지지운동, 인권운동 등과 직결되어 있다. 즉, ‘사회성화’ 또는 ‘사회구원’이라는 표현은 전승된 기독교문화를 좌파적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비판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반자본주의적-친사회주의적 개혁운동을 신학에 반영한 결과였다. 이런 목적과 이유로 ‘성화’ 내지 ‘구원’이라는 신학적 전문용어를 오용한 것은 당시에는 신학적 미숙으로 인하여 유행하던 현상이었으나, 이제는 신학적 성숙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극복함이 마땅하다. <끝>
■존 웨슬리 구원론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의 관계 - 이선희 교수의 3회에 걸친 논문을 읽고서
본보는 지난 2월 1일부터 3회에 걸쳐 김홍기 교수(감신대)의 논문 ,‘이선희 교수(목원대)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한 반론’을 실었고, 이어서 이선희 교수의 재반론의 글을 지난 3월 15일부터 같은 형식으로 게재했다.
김홍기 교수가 본지에 실린 이 교수의 글을 읽고 ‘웨슬리 신학’ 논문을 다시 보내옴에 따라 세차례 나누어서 싣는다.
<편집자주>
<들어가는 말: 문제제기>
존 웨슬리탄생 3백주년을 맞아(1703년 6월 17일) 존 웨슬리는 믿음만 강조하고 선행을 무시하는 루터의 한계를 넘어서고, 은총만을 강조하고 자유의지적 책임성을 무시하는 칼빈의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종교개혁신학을 완성하였음을 본 논문에서 밝히고자 한다. 그런 시각에서 3회에 걸친 이선희 교수의 논문들을 읽고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 성화,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 가능한가?: 이 교수가 웨슬리설교 ‘성서적 구원의 길’에서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라고 해석한 것은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지 않은 자의적 해석이다. 웨슬리는 그의 같은 설교 “성서적 구원의 길”안에서 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을 통한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을 전혀 외면한 채 왜곡된 해석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수의 해석은 웨슬리설교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총체적 의미를 모르고 문자하나에 매달리는 문자주의자적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2. 이 교수는 웨슬리가 루터적 모라비안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과 평생 논쟁한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 율법페기론(antinomianism) 논쟁사를 통하여 종교개혁신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루터와 칼빈의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종교개혁신학을 완성하였음을 전혀 모른다. 이 교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신앙제일주의와 율법폐기론으로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그렇게 해석했는가?
3. 이 교수는 웨슬리가 알미니안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칼비니스트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만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무력만을 강조한 칼빈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을 주장하면서도 선재적 은총을 체험한 인간의 자유의지적 책임성을 함께 강조하는 알미니안 웨슬리의 사상을 전혀 배제한 칼비니스트적 해석으로 지금까지 이 교수는 일관하고 있다.
이 기회에 웨슬리를 알미니안으로 혹은 칼비니스트로 이해하는지를 분명히 밝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교수 자신은 알미니안인가? 칼비니스트인가? 그 점도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지금까지의 일관된 이 교수의 해석은 지극히 칼비니스트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교수는 자유주의신학과 웨슬리복음주의신학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19세기 자유주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9세기 자유주의신학자는 감신대에 아무도 없다. 이 교수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자유주의개념으로 필자와 감신대 교수들을 자유주의신학자로 비판하였다.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은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본성의 낙관주의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인정하는 인간본성의 비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일으키는 십자가의 속죄의 은총과 사랑과 선행의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의 은총을 강조하는 낙관주의를 믿는 감신대 웨슬리복음주의신학자들을 자유주의신학자로 오해하는 무분별한 발언을 학자의 양심으로 회개하기 바란다.
1. 성화,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 가능한가?(“믿음만이 칭의와 성화의 유일한 조건”에 관한 이 교수의 문자주의적 해석의 위험성):
이 교수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을 “첫째로, 믿음이 성화의 조건이다. 즉 누구도 믿지 않고는 성화되지 않는다. 믿음 없이는 아무도 성화되지 않는다. 둘째로, 믿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다. 즉, 믿음만이 유일하게 성화를 위해 충분하다.”는 번역을 하면서 믿음 이외에 사랑과 선행이 성화를 이룬다는 김홍기의 주장은 오해라고 자신감 있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하나하나에 매달려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에 매달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성서 저자의 역사적 상황과 성서 저자의 총체적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마치 자구 하나를 붙들고서 성서 구절을 해석하는 것과 같다.
이 설교를 쓴 웨슬리의 삶의 정황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삶의 역사적 상황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설교는 1765년에 쓰여졌다. 그 당시에 1750년부터 로버트 샌드맨(Robert Sandeman)이 신뢰하는(trust) 확증의 믿음(faith of assurance)보다는 의지적으로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faith of adherence)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구원하는 믿음과 성화케 하는 믿음”(the faith that saves with the faith that sanctifies)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한 번 더 정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선행들이 하늘나라에 갈 미래적 원인(the cause why we shall come to heaven)은 아닐지라도, 선행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는 현재적 원인”(that good works are the way to come to heaven)이라는 헨리 스미스(Henry Smith)의 주장을 다시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양면적 주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그의 초기 설교들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 “신앙으로 의롭다하심” 등에서 밝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객관적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은총: imputation)과 “마음의 할례”에서 밝힌 바대로 믿음에 근거한 사랑과 선행으로 본성마저도 바꿔져서 성화되는 것(주관적 능동적 본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은총: impartation)을 총체적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는 웨슬리의 이 양면이 함께 강조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의인화와 성화 모두 믿음을 조건으로 체험한다고 이해한다. 믿음은 의인화의 근거요, 동시에 성화의 근거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믿음으로만(only faith)을 해석할 때 믿음이 전부(whole)라고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출발이란 뜻으로 해석한다. 스테판 군터(Stephen Gunter)는 웨슬리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오직(sola)을 너무 강조하는 이 교수처럼 정숙주의나 신앙제일주의나 율법폐기론은 건강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오직(sola: only)이란 유일하게(solely)란 뜻이 아니고 제일차적으로(primarily)란 뜻으로 이해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미국의 웨슬리신학의 대가 아우틀러(Albert Outler)가 이러한 웨슬리의 이해를 흥미있게 분석하였다: “신앙은 크리스천 경험에 있어서 제일차적인 현실성이지 총체적인 현실성은 아니다.”(W. Stephen Gunter, The Limits of ‘Love Divine,’ (Nashville: Kingswood Books, 19), 69.) 이 교수는 총체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신앙은 성화의 제일차적 현실성(primary reality)이다. 신앙만을 고집하면 웨슬리 그토록 비판하였던 루터주의적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에 빠진다. 루터의 한계를 넘어서서 종교개혁신학을 완성시킨 웨슬리를 다시 루터주의적으로 하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바로 똑같은 설교에서 이 구절 뒤에 웨슬리는 성화의 과정에서 선행의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모든 선행의 실천 곧 경건의 선행 뿐 아니라 자비의 선행들(이 선행들은 모두 신앙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은 어떤 의미에서 성화에 필연적이다.“ (Wesley, “성서적 구원의 길”(Scripture way of Salvation), John Wesley’s Sermons: Anthology, ed. Albert Outler, (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377. 이하 Anthology로 표기함.) “어떤 선행들이 성화에 필연적이라고 확신하는 가?”(But what good works are.....necessary to sanctification?)(“성서적 구원의 길,” Anthology, 378.)
첫째로는 경건의 선행들(works of piety)로서 공중기도, 가족기도, 골방의 명상기도, 성찬을 받는 것, 성경을 읽고 듣고 명상하는 것. 금식 등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확실히 성화은총의 수단이 되는 선행이 아니고 무엇인가? 둘째로는 자비의 선행들(works of mercy)로서 인간의 몸과 영혼을 볼보는 것과 관계있는데,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며, 나그네를 대접하고, 갇힌 자와 병자와 약한 자들을 방문하는 것 등이다.(“성서적 구원의 길”, 378.)
이러한 자비의 선행들은 성화를 위해 확실히 필연적인 선행들이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것은 사랑과 선행이 믿음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 사랑과 선행이 의롭다하심의 조건이 못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사랑과 선행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무시하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전통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가톨릭의 약점을 극복함으로써 종교개혁신학을 새롭게 완성시키고 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에서 이 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을 성화은총의 수단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경건의 선행 즉 기도, 금식, 성경읽기, 성만찬 등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instituted means of grace)이라고 해석하였고, 자비의 선행 즉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나그네된 자와 갇힌 자들을 볼아 보는 것은 상황적 은총의 수단(prudential means of grace)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의 수단은 우리를 성화케 하시는 은총의 수단임을 웨슬리의 설교 “은총의 수단”에서 밝히고 있다. “이 은총의 수단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어진 외적 상징, 말씀, 행동을 이해한다. 인간에게 .....성화의 은총을 제공하는 필요한 채널이다.”(Wesley,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 Anthology, 160)
매독스는 성화케 하는 은총의 수단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웨슬리가 강조하였다고 소개한다: “성만찬, 기도문, 찬양, 설교, 상호 협력하는 영적 책임의식, 애찬회, 철야기도회, 개약갱신예배, 감리교규칙을 준수하는 것, 속회활동, 개인적 영성수련, 성서연구, 경건서적 읽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자기부인의 노력, 옷 입혀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병자를 돌보고 갇힌 자들을 보는 다양한 자비의 선행 등.”(Randy Maddox, Responsible Grace, (Nashville: Abindon Press, 1994), 201-15.)
결국 이선희 교수의 총체적 실수는 웨슬리설교 본문의 역사적 상황과 웨슬리의 삶의 자리와 논쟁의 역사적 사건들을 전혀 모르면서 웨슬리설교를 자의적으로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협성, 목원, 감신에서 웨슬리신학과 감리교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감리교회사, 웨슬리 생애, 그리고 웨슬리신학의 역사신학적 배경과 웨슬리 이후의 감리교신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가 그러한 지식을 갖고 웨슬리 설교들을 주해하는 훈련을 받았더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화는 십자가의 은총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성령의 역사에 응답하는 행함 있는 믿음 곧 믿음과 사랑 및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교수가 필자를 오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인정하며,” “본성에 따른 도덕적 능력,” “그러므로 김홍기 교수가 이신칭의는 믿음으로 받지만, 성화는 인간의 행위로 이룬다는 주장은 웨슬리의 생각과 거리가 멀다.” 이것은 전혀 필자의 해석을 곡해한 것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웨슬리의 선행은 도덕적 능력이나 인간적 행위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이 먼저 역사함에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인간의지가 동참함으로 나오는 것이 선행이라고 필자의 책 [존 웨슬리의 구원론](성서연구사)에서 누누이 강조하였다. 도덕의 선행과 성화의 선행을 이 교수는 구분할 줄 모르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모든 사랑의 근원, 모든 선행의 근원은 십자가의 은총을 전제하면서 성령의 은총과 능력을 힘입어 나오는 것이다. 웨슬리는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이 성화의 과정에서 전제됨을 회개와 신앙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계속>
■존 웨슬리 구원론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의 관계 - 이선희 교수의 3회에 걸친 논문을 읽고서 ②
본보는 지난 2월 1일부터 3회에 걸쳐 김홍기 교수(감신대)의 논문 ,‘이선희 교수(목원대)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한 반론’을 실었고, 이어서 이선희 교수의 재반론의 글을 지난 3월 15일부터 같은 형식으로 게재했다.
김홍기 교수가 본지에 실린 이 교수의 글을 읽고 ‘웨슬리 신학’ 논문을 다시 보내옴에 따라 세차례 나누어서 싣는다.
<편집자주>
또한 웨슬리는 그의 설교 “더욱 좋은 길”에서 성화의 두 차원 곧 소극적 낮은 길(lower path)은 죄악성(inner sin)에서도 해방되는 것과, 적극적 높은 길(higher path)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회개와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에서 성결을 힘쓰는 것은 소극적이고 낮은 성화의 방법이고, 회개와 믿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은 적극적이고 높은 성화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한 성화에 이르면 이 소극적 방법과 적극적 방법이 완전성결과 완전사랑의 두 면이 나타난다고 웨슬리의 “기독자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에서 강조한다. 완전성결과 완전사랑은 부단한 성결의 열망과 추구, 부단한 사랑의 열망과 추구를 필요로 한다.
완전사랑을 이루려면 어찌 사랑과 선행의 부단한 실천 없이 어찌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 믿음만이 성화와 완전성화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성화의 조건은 회개, 믿음, 경건의 선행을 통한 성결추구, 자비의 선행을 통한 사랑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의 영성에 이를 수 있다. 그 성결과 사랑을 추구하는 열심 때문에 감리교회가 18세기에 침례교회나 장로교회나 영국성공회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교수처럼 믿음만으로 성화가 이루어진다면 그런 열심을 다 잃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그런 완전성화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사랑과 선행실천의 열정이 한국감리교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보다 뒤졌다. 이제 한국감리교회는 3백만 총력 전도운동에 이 완전성화추구의 불을 붙일 때 바람직하고 건전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웨슬리와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 성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루터적 그리고 칼빈적 신앙제일주의자 곧 율법폐기론자들과의 논쟁: 이 교수의 주장은 웨슬리가 논쟁하였던 신앙제일주의자(solafideism), 율법폐기론자(antinomianism)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서, 사랑 없이 신앙만으로 성화를 이룬다는 신앙제일주의 및 율법폐기론 논쟁을 여기에 소개한다. 웨슬리는 1738년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한 후에 1738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Salvation by Faith)라는 유명한 설교를 세상에 내놓았다. “선행의인화”(justification by good works)의 신학에서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의 신학으로 신학적 전환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루터나 칼빈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신학은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진리에서 종교개혁적이다. 그래서 올더스게이트 이전에 추구하던 천주교식 선행의인화(justification by good works)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같은 해 1738년 독일 헤른후트(Herrnhut)의 루터주의모라비안 센터를 방문한 후에 신앙의인화의 신학이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얻은 이후에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무시하는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 정숙주의(stillness),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에 빠진 것을 보고서 루터주의적 모라비안과 신학논쟁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1741년 6월 15일(월) 다음과 같이 루터와 모라비안들의 선행과 율법을 무시하는 생각들을 비판하였다: “ 루터는 얼마나 선행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신성모독적으로 말하는가?---여기서 모라비안들의 큰 실수의 근원을 알 수 있다. 모라비안들은 더욱 좋을 때나 더욱 나쁠 때나 무조건 루터를 따른다. 여기에서 선행도, 율법도 계명도 없다.(No works; no law, no commandments). 누가 율법에 대하여 악하다 말하고 율법을 판다하는가?”
이 교수처럼 성화의 과정에서 신앙만을 강조하는 것이 신앙제일주의요, 이 교수처럼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이나 열심을 낼 필요가 없이 은총과 신앙만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정숙주의요, 이 교수처럼 율법은 죄를 깨닫게 만하고 성화의 과정에서 성화의 채찍질로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그 세 사상의 공통점은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1738년 10월 29일 야고보서를 재해석하면서 성화의 과정에서 선행으로 신앙이 온전하여 진다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하였고, 1738년부터 1739년까지 영적 성장을 위한 자기점검(self-examination)을 만들어서 부지런히 자신의 영성수련과 선행실천을 힘씀으로써 성화에 이르기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으며, 1738년 10월 18일에 돌아온 모라비안 몰더(Molther)와의 논쟁에서 몰더가 미쎄스 터너(Mrs. Turner) 한테 신앙을 성령의 선물로 체험할 때 까지 아무런 외적 선행(outward works)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야함(still)을 강조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신앙의 강한 확신과 함께 선행을 추구하던(strong faith and zealous of good works) 여성 미쎄스 터너를 지지하였고 웨슬리는 성화의 추구를 위해서 핵심적으로 강조하였던 선행적 은총의 수단을 무시하는 몰더의 율법폐기론적 견해를 거절하였다.
또한 웨슬리가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거부하면서 구원의 은총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책임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예정은 성화를 추구하는 선행의 실천을 무관심하게 하는 율법폐기론적 경향에 이르게 됨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결국 휫필드를 비롯한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는 1741년 봄에 결별하게 되었는데, 웨슬리의 충실한 평신도설교가들 존 쎄닉과 조셉 험프리즈가 웨슬리를 공격하는 설교를 하면서 떠나는 아픔을 겪으면서, 웨슬리는 율법폐기론과 신앙제일주의로 인한 선행의 무관심이 루터적 모라비안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 모두 나타나는 현상임을 절실히 체험하였다.(Coppedge, 62.) 오늘날 웨슬리가 다시오면 이 교수에게서 똑같은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1755년부터 1766년 사이에 옥스퍼드대학교의 웨슬리제자였으나 칼빈주의자가 된 제임스 허비(James Hervey)는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하여 의롭다하심이 객관적이고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사상을(imputed righteousness) 강조함으로써 믿음과 함께 선행의 실천을 통해 본성마저도 변화하는 능동적이고 주관적이고 본성적인 의로움(imparted righteousness)도 강조하는 웨슬리와 논쟁을 하기에 이르렀고, 1782년에 쓴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란 설교에서 웨슬리는 성도의 성결과 행복을 증가시켜주는 모든 수동적 은총의 수단을 수련해야하며(exercising), 다양한 선행으로(in various good works) 성도들 자신을 수련해야함(exercising)을 강조하였다.
1769년부터 1775년까지 웨슬리는 토프라디(Augustus Montague Toplady)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주제로 논쟁하게 되었는데,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는 성령의 성화 사역에 참여하는 도덕적 책임의식(moral accountability)을 유지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사랑의 율법이 요구하는 성화추구를 위한 선행을 무시하는 율법무용론임을 재차 강조하였고(Coppedge, 188.), 1770년부터 1778년까지는 웨슬리는 헌팅돈 공작부인(The Countess of Huntingdon)과 감리교연회록논쟁(The Minute Controversy)을 벌였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하여 내심으로 웨슬리신학에 불만이 있었으나 그것이 외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1770년 감리교회연회록에 ‘선행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good works)이 언급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선행에 의한 구원은 인간의 선행의 공로로 구원받는 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시작되는 데 그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결과로써 선행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구원의 완성 곧 성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헌팅돈 부인은 웨슬리가 선행에 의한 구원을 교리로 강조했다고 생각한 것이다.(Coppedge, 203-04.) 헌팅돈 부인은 웨슬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고 카롤릭적이라고 비난하였다.(Coppedge, 210.)
이렇게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의 중요성을 논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논쟁사를 무시하고 웨슬리는 단순히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 신봉자라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not a given), 추구되어야 하는 것(something to be pursued)이며, 선행(good works)과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과 함께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웨슬리는 결론지었다.
이선희 교수는 이렇게 웨슬리의 평생에 걸쳐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무시하는 루터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의 성화론과 논쟁한 역사적 과정을 조직신학자이기에, 웨슬리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전혀 모르면서 웨슬리의 성화론은 믿음만을 조건으로 한다고 해석한 것은 또 하나의 신앙제일주의, 율법폐기론일 뿐이다. 이 교수의 글에서 율법을 무시하지 않은 루터와 율법을 무시한 루터의 후예 모라비안들의 차이를 지적한다. 그러나 모라비안적 율법폐기론이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무시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다만 사랑과 선행은 성화의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그냥의 자연스러운 성도의 생활정도로 파악함으로써 자기 모순에 빠진다. 이 교수의 해석은 모라비안 율법폐기론을 외적으로는 비판하나,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고 신앙만을 강조함으로써 모라비안적 신앙제일주의와 율법폐기론의 입장을 내적으로 그대로 수용하는 현대판 신앙제일주의 혹은 율법폐기론의 경향성을 띄게 되었다.
■존 웨슬리 구원론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의 관계 - 이선희 교수의 3회에 걸친 논문을 읽고서 ③
본보는 지난 2월 1일부터 3회에 걸쳐 김홍기 교수(감신대)의 논문 ,‘이선희 교수(목원대)의 논문 <감리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고>에 대한 반론’을 실었고, 이어서 이선희 교수의 재반론의 글을 지난 3월 15일부터 같은 형식으로 게재했다.
김홍기 교수가 본지에 실린 이 교수의 글을 읽고 ‘웨슬리 신학’ 논문을 다시 보내옴에 따라 세차례 나누어서 싣는다.
<편집자주>
3. 웨슬리를 알미니안으로 혹은 칼비니스트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이 교수는 알미니안인가? 칼비니스트인가?: 웨슬리는 알미니안으로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되는 자유의지를 말하고 자유의지의 응답을 회개의 과정에서 강조하며,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가 성령이 사랑과 선행을 요구할 때 응답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웨슬리는 스스로를 알미니안이라고 생각하였고, 감리교잡지 이름까지도 “Arminian Magazine”이라고 만들었다. 이러한 웨슬리를 이 교수는 알미니안으로 생각하는가? 칼비니스트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이 교수는 웨슬리를 해석함에 있어서 알미니안적 입장에서 웨슬리를 해석하는가? 칼비니스트적 입장에서 웨슬리를 해석하는가?
이 교수는 또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처럼 칼빈적 감리교회로 감리교신학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 교수도 칼빈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에 대한 노예의지적 요소만을 강조하고 있다.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첫 소원(the first wish)을 포함하여, 그의 뜻을 깨달아 아는 영적 빛이 비취는 첫 여명(the first dawn)이고, 구원과 생명에 이른 어떤 경향성(some tendency toward life, some degree from salvation)이다.(웨슬리 저, 김홍기 역, [존 웨슬리의 설교], (서울: 땅에쓰신글씨, 1991), 169-170) 따라서 먼저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것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고 웨슬리는 그의 설교 “우리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우리가 먼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면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전혀 배제한 칼빈주의적 해석을 이선희 교수는 계속 강조한다. 똑같은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웨슬리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구절 요 5: 17(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을 이 교수는 아주 쓸모없는 구절로 만들어 버린다. 이 교수가 최근에 집필한 책에서 웨슬리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이나 신인협조설을 말하지 않는다고 칼빈주의적으로 아예 해석하여 버렸다.(이선희, “제1장 웨슬리신학은 신인협동설이 아니다.” [웨슬리신학의 탐구], (대전: 도서출판 복음, 2002), 19쪽)
4. 자유주의인가 웨슬리 복음주의인가?: 이선희 교수는 필자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비판하였다. 김득중 총장도 자유주의 신학자로 비판하였다. 마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들은 모두다 자유주의 신학자처럼 비판하고 있다. 이 교수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웨슬리복음주의와 자유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9세기에 발생한 자유주의신학(liberalism)이란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과신하며, 지상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던 신학운동이었는데, 1차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러한 자유주의신학의 유토피아가 산산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을 그대로 믿고 강의하는 감신대교수들은 없다. 다만 감신에서는 진보적(liberal) 요소는 있다. 이성에 의한 성서비평학적 연구를 통하여 성서 저자들의 삶의 자리를 바르게 이해함으로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추구하려 하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하여 오늘날의 종교 간의 갈등에 의한 테러도, 전쟁도 없는 인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요소는 지극히 웨슬리적이다. 웨슬리가 루터나 칼빈과 다르게 신앙의 정확성과 신빙성을 위해,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이성을 신학의 방법론으로(성서, 전통, 체험과 함께)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는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을 이루는 다양한 사회적 성화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에 근거하여 타종교인들에게도 일반계시적 선재적 은총이 임한다(그러나 그들에게도 자동적으로 구원이 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믿어야만 구원받는 것이다)는 면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여는 개방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감신대 신학에는 복음적(evangelical) 요소도 아주 중요하게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듭나는 웨슬리신학을 그대로 믿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화를 또한 믿고 가르치고 있는 점에서 감신대 신학은 웨슬리적 복음주의(Wesleyan evangelicalism)를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필자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이래로 1991년 9월부터 한국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와 강연을 하여 왔다. 필자의 설교와 강연을 들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필자를 자유주의신학자로 평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감신대 교수들이나 필자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필자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필자는 감신대 생활관장으로 2002년 일년 동안 봉사하면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고, 모든 기숙사방을 두 학기 동안 심방하였으며, 150여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속회를 구성하여 속회를 인도하였다. 현재 안식학기로 미국 드루대학교에서 웨슬리신학세미나를 강의하고 있으면서, 매일 10여명의 한인학생들과 성경말씀을 공동으로 해석하면서 속회형태의 영성생활을 나누는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다. 이렇게 웨슬리복음주의자를 자유주의신학자로 비판한 것을 학자의 양심으로 회개하기를 바란다.
<나오는 말>
이선희 교수가 “감리교는 예기치 않게 천주교신학의 신앙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천주교는 명시적으로 이신칭의를 거부하며 소위 믿음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해온 교단이다”라고 염려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가톨릭교회가 사랑에 의한 성화는 강조하면서도 신앙으로 의롭다하심 무관심한 것을 비판하며, 동시에 루터와 루터신학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주장하면서 사랑으로 성화되는 것에 무관심한 것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회 세계연맹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인 신학선언을 하게 되었다. 루터가 강조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이선희 교수가 그토록 강조하는-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수용한 것이다. 트렌트공의회에서 루터를 정죄하고 선행으로 의롭다하심(justification by faith)을 주장한 것을 이제는 수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루터교회는 의롭다하심을 얻은 이후에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의 실천이 필요함을 수용하였다.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과 선행이 필요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여는 자유의지적 결단을-이 교수가 강하게 부정하는-루터교회가 마침내 수용하였다. 16세기의 루터처럼 노예의지를 말하는 것을 수정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웨슬리가 이 양자의 극단을 넘어서고 양자를 조화시키는 중도적 방법(via media)으로 이미 18세기에 구원론을 정리한 것이다. 웨슬리가 로마천주교회는 사랑과 선행에 의한 성화는 강조하였지만 신앙의인화에 무관심하였고, 루터는 신앙의인화를 강조한 나머지 사랑과 선행에 의한 성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감리교도들을 통하여 이 둘을 구분짓고 이 둘을 종합시킴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웨슬리적 종합은 종교개혁신학을 완성시킨 걸작품이고, 개신교인들만 아니라 천주교인들까지 구원시키는 가장 훌륭한 구원론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 가장 초교파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이룰 수 있다.
이 점을 필자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2002년 5월 한국교회사학회에서 발표하였을 때, 2백여 명의 장신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하였고, 23명의 교회사 교수들이 웨슬리의 탁월한 종합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장신대 교수가 이렇게 말하였다: “웨슬리에게서 한 수 배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가톨릭신자가 대학생선교회를 통해서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의 은혜를 체험한 후, 성화의 과정에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구원론을 찾다가 필자의 책 [존 웨슬리의 구원론](성서연구사)을 읽고서 감리교회로 개종하고 감신대학원을 금년에 졸업하였다. 현재 서울남연회 강동지방에서 교인은 하나도 안 남고 교회이름과 교회건물만 남은 작은 개척교회 담임목회를 하려고 한다. 가톨릭신자를 개종케 하고 감리교목회자로 만든 힘이 바로 웨슬리 구원론에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신학이 종교개혁신학의 완성이며, 동시에 개신교도와 천주교도를 모두 감동시키고 모두 구원시키는 가장 훌륭한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롬1:17)과 성령으로 거듭남(요3:3)을 철저히 믿는 웨슬리안이 되어야 하고, 더욱 나아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5)을 사모함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는 말씀을 더욱 사모함으로 성화를 이루는 웨슬리안이 되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