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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로 사는 삶
벧전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 4:7 세상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8) 무엇보다 먼저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ㄱ)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ㄱ. 잠10:12) 9) 허기지고 잠잘 데 없는 사람을 보거든 집으로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해 주십시오. 10)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 11) 설교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거든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빠짐없이 설교하십시오. 남을 돕는 일에 부름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거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열성을 모두 쏟아서 남을 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소서. 아멘.
베드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권면합니다.
정신 차리고 근신하라(7)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한 제자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산 증인입니다. 그는 감람 산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였고, 이 때 두 천사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증언을 생생하게 들었습니다(행 1:11). 따라서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바라는 소망의 초점을 이 세상이 아니라 심판의 주님께서 가져오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벧후 3:13-14).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통로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고, 시험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딤전 4:5).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8-9)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먼저 뜨겁게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잠 10:12). 불친절하고 무례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고전 13:407; 빌 2:1-4). 두 번째는 섬김에 관한 말씀입니다(9). “서로 대접하기를”의 뜻은 나그네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나그네를 잘 접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출 22:21; 신 14:28-29; 히13:1-2). 실제로 베드로 당시에도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천의 행위였습니다. 이에 성도들은 어려운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하여 순회 전도자들을 위해 가정을 개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10-11) 세 번째는 은사에 관한 말씀입니다(10). 영적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집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말하는 은사와 섬기는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으로 행하여져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은 개인의 이익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 때문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기도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봉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습니까?
예수님 오신 때를 기점으로 해서 예수님 오시기 전을 BC라고 해서 ‘before Christ’ 예수님 이전이라고 하고, 예수님 오신 이후를 AD, ‘Anno Domini’라고 그래서 ‘주님의 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축복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 설 교 >
선한 청지기의 삶
벧전 4장 7~14절 / 피종진목사
성경에 보면 ‘청지기’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선한 청지기’라고 표현하여 더욱 더 착하고, 진실하고, 올바른 청지기라는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청지기’란 헬라어(오이코노모스)에 보면 ‘집안 관리’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로서 선한 청지기의 삶을 일평생 살아야 됩니다. 선한 청지기는
첫째, 정신을 주님께 집중하고 살아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벧전 4:7a)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조금도 소홀히 함이 없이 마음과 뜻을 다하고,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집착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한곳에 집착하면 주변에 떠드는 소리에도 동요되지 않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전진함으로 마침내 성공의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전진해 나갈 때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자제심을 가지고 환경에 따라 요동하지 말고 냉정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킬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둘째,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b)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고난 중에라도 기도하기 위해 마음과 정신을 맑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접목시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때로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응답인 경우도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7~38절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예비해놓으셨습니다. 그래도 구할 때 이루어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입을 넓게 열 때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순금 같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고, 사랑으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전달됩니다. 미워하고 혈기를 내며, 욕하고 저주하고 원망불평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왜 사랑으로 봉사할 때 선한 청지기가 될까요? ①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어떤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너무 감사해서 성이 ‘이씨’인데, 아들을 낳자 이름을 ‘처럼’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부를 때 ‘이처럼, 이처럼’ 이렇게 불렀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감격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곧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③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넷째, 각기 받은 은사대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오직 하나님과 교회 전체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게으름으로 인해 그 은사를 땅에 묻어두거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사사로이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필요한 곳에 잘 활용하여 충성하는 자가 바로 선한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활용하여 충성할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큰 능력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6~8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신을 주님께 집중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깨어서 기도하며, 순금 같은 사랑을 가지고, 각기 받은 은사대로 충성을 다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인의 경건생활
벧전 4장 7절 / 김광선목사
베드로전서 강해의 배경은 초대교회시대입니다.
로마제국 황제 중 가장 광기에 가깝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네로 황제 시절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당시의 핍박에 대해 우리는 잘 들어 왔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목숨을 담보하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시대를 또 다시 리마인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신앙의 내용은 변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왜곡된 비복음의 만연으로 믿는 방식마저 달라져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고 했습니다.
좁은 길 택해 가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만연된 비복음은 “교회는 아무런 부담 없이, 영화관 가듯이, 커피숍 가듯이, 쇼핑 가듯이 그렇게 가볍게 가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부담을 주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역시, 친구하고 소풍가듯, 여행을 가듯 나의 만족한 삶을 위한 동반자자 정도로 여기지게 만들어 줍니다.
비복음의 초점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세속주의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물들어 버린 교인들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거나 귀에 거슬리면 않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쓰던 가전제품이나 화장품을 바꾸듯이 교회도 옮길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 목회자 역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복음을 외면하고 청중들이 원하는 요구에 맞추는 비복음을 말해야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가벼운 주제, 성공과 번영, 자기 개발, 건강, 인간관계 등......
비복음을 잘 포장하여 복음처럼 전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비복음을 통해서는 교회는 커질 수 있어도, 교인들은 결코 진정한 구원과 확신과 평안과 죄를 이기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 것만 좋아하면 이가 썩고, 비만이 오고, 당뇨병에 걸립니다.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비복음을 먹고 자란 결과 오늘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당뇨병에 걸려 있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습니다.
비록 귀에 부담이 되는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게 되는 것입니다.
듣고, 믿고, 복음의 능력을 맛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주의 재림’입니다.
본문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주제는 실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현대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는 주제들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근신하라’
‘기도하라’
얼마나 부담을 주는 주제들입니까?
하지만 이런 주제들이야말로 비복음에 물든 영혼들을 깨워 살게 하는 생수와 같은 주제들입니다.
재림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저는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께서 저에게 ‘재림을 설교하라’고 예언 가운데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진지한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I. 재림의 징조입니다
본문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이 가깝다는 경고는 초대교회시대부터 있어 온 말입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로 지금 2000년이 흘렀습니다만 오늘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2,000년 동안 성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비록 우리 보기에는 시간이 오래 흘렀고, 그 흐름이 더디게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의 물결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 날을 향하여 하루하루 정확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취할 자세는 그 날이 내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 상류에 있는 물은 천천히 흐르지만 폭포가 가까울수록 물살이 세집니다.
2,000년 전부터 서서히 흐르던 재림의 물결이 바로 코앞에 가까웠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는 것을 분명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성경적인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1. 마태복음24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고 했습니다.
그 후 1985년 전 세계의 종족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 보니 24,000종족인데 그 가운데 12,000종족은 복음화 되었고 나머지 12,000종족이 복음화 되지 않은 미전도 종족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후 2005년 '세계기도정보’ 책자에 의하면 미전도 종족은 6500여 종족으로 줄어들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약 20여 년 동안 약 5,500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미완수 과업인 6,500여 종족에게 복음이 들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가?
각종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 그리고 교통의 발달로 기간이 당겨질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미전도 종족이 밀집되어 있는 실크로드 주변의 선교를 위해 중국 교회에서 앞으로 십 만 명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백투 예루살렘’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기가 앞 당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요한 계시록 6장 9-11절의 말씀에 근거하면 순교자의 숫자가 차면 세상 끝이 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순교자의 숫자 통계를 보면 예수님 이후 AD 1900년까지의 순교자의 숫자보다 1900년부터 2000년까지의 순교자의 숫자가 많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즉 1900년 동안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보다 그 후 100년 동안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매년 평균 18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그리고 예수를 증거 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보고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적인 근거에 의하면 순교자의 숫자도 거의 포화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도에서도 심심찮게 기독교 핍박이 일어나고 있고, 해마다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3.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를 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 8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지진은 옛날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동안 일어났던 지진의 수보다 최근 50년 사이에 일어났던 지진의 수가 월등 많습니다.
요즘 지진은 지구 일상의 사건입니다.
자주 일어 납니다.
저도 인도에서 여러 번 겪었습니다.
지금 구르가온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낮은 층인 세커드 플러워에 살고 있습니다.
처남이 일본 선교사로 간지 30년이 가까운데 오래 전 오사카 지진 때 17층에 살다가 죽을 뻔 했습니다.
위가 더 흔들리거든요, 잠을 자다가 지진을 만났는데 얼마나 심하게 흔들렸는지 방에 책장이 넘어졌습니다.
그것 잠자고 있는 이불 위에 덮쳤으면 큰일 날 뻔 했는데 마침 옆으로 쓰러져 살았습니다.
한창 흔들리는데 계단으로 내려 갈 수도 없고, 뛰어 내릴 수도 없고........
그 공포는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진 이후에 일본 사람들이 잘 때 무서우니까 아예 술에 취해서 잔다고 합니다.
일본 처남이 생각이 나서 세컨 플러워를 얻은 것은 있고요 잔디가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것이 좋아서 얻은 것입니다.
민족 간의 전쟁, 국가 간의 전쟁, 기근과 지진이 어느 때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때, 멕시코 만 원유 유출은 지금 50일이 자났는데로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앙입니다.
인간은 재앙을 만들어 스스로 멸망해가고 있습니다.
폭설, 폭우, 공해, 지구 온난화......멸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4. 그것들보다 더 뚜렷한 종말의 징조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4절에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배교는 종말을 예견하는 표지입니다.
배도하는 일은 어느 때나 있어 왔습니다.
배도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배반함으로 시작합니다.
오늘의 세속주의 배도 현상은 과거에 없었던 형태이다.
전 세계적인 반기독교 현상, 반 진리현상, 종교일치주의 운동, 혼합 영성...
갈수록 더 해 갈 조짐입니다.
지금의 시대만큼 기독교가 비난과 멸시를 받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배교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배반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래서 배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이나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설교 주제는 성공, 축복, 자기계발과 자기관리, 내적치유 등입니다.
성경을 사용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배교를 조성하는 과정이요, 배경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복음을 자기 연민을 채워 주는 심리학적 위로 정도로 여깁니다.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기도 생활이나 말씀 듣는 일을 자기 위안용으로 삼고, 실제로 말씀에 자신을 순종시키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나를 부인하지 않고 나의 만족만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신앙.....
이것이 다 배도로 가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것 처럼 가지만 나중에는 무감각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재림의 징조들은 강 상류에서 폭포가 감지되지 않듯이 지난 2,000 년 동안 제대로 감지가 되지 않고 내려왔지만, 폭포가 가까울수록 물살이 세 지듯이 이상의 네 가지 징조들은 재림의 긴박성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런 긴박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경건생화를 해야 하는가?
II. 재림에 대비하는 삶
1.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본문에, “정신을 차리고” 라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서 잘 보아야 재림의 징조들이 보입니다.
비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고, 바람이 불면 ‘비가 오겠구나’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남인도 쓰나미 났을 때 수십만 명이 죽었지만 놀랍게도 짐승들은 쓰나미 덥치기 전에 전부 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원숭이, 코끼리, 사슴, 산돼지.......
사람만 당했습니다.
짐승들은 지진이나 쓰나미를 인식하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재난을 대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종말이 가까워 왔음이 보입니다.
재림의 때를 예수님은 노아의 시대와 비교해서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38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이런 일들은 잘못된 일들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입니다.
직장생활하고, 사업하고, 아이들 교육하고, 시집 장가보내고.....
지극히 정상적인 일들입니다.
잘못된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일들 몰두하느라 재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부모가 돌아가셔도, 형제들이나 일가친척 친구들이 죽어도 그 당시만 나도 언젠가 끝이 있구나 잠깐 느꼈다가도 잊어버립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들, 직장생활하고, 사업하고, 아이들 교육하고, 시집 장가보내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상적인 일에 몰두하다 재림은 고사하고 자신의 종말까지 잊고 삽니다.
시편 90편 12절에,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재림과 개인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계산될 때 지혜의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근신해야 합니다.
본문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정신을 차리면 근신하게 됩니다.
금주에 축하할 일이 여러 개가 소개되었는데요 그중 김 진 성도의 아들 정훈이나 미국 프린스턴 경제학부 수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겠습니까?
누가 열심히 공부합니까?
정신을 차린 애들이 열심히 공부합니다.
정신을 차리니까 근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못 차리는 아이들은 부모가 보내주는 유학비를 유흥비로 탕진합니다.
그런 애들 많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돈인데 정신차린 아이에게는 학비가 되지만 정신 안 차린 학생에게는 유흥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근신한다’는 원문의 의미는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종말론적인 인식이 있을 때 근신하면서 살게 됩니다.
종말론에 대한 인식이 비이성적이거나, 맹신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종말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종말이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현실적으로 삽니까?
종말론적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근신하면서 살겠습니까?
내일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삽니다.
되는대로 삽니다.
재림이라는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사니까 삶이 정리되고 안정이 되고, 평안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3. 기도하여 힘 얻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일 올해 말에 주님의 오신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직장, 사업, 돈, 집 사는 것.........
다 중요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종말을 맞으면서 해야 할 기도는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주님은 평상시도 기도를 많이 하셨지만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빗방울이 되도록 집중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 잘 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잘 지어야 하는 이유를 4장 1절에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문제를 해결하고 죄를 그치게 하기 위한 사명 감당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 나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여 힘을 얻어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사명을 알게 되고, 사명을 받은 자가 기도함으로 힘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 단련된 신앙이 세속을 이기고 승리하여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재림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개인의 종말도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의 날을 계수하면서 사는 지혜의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근신할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에, 개인의 종말이 있기에 오늘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현실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입니다.
내 사명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비복음으로 물든 세상 가운데 재림신앙으로 무장하여 세속주의를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재림의 날을 사모한다면
벧전 4:7-8 / 김상수목사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7-8)
사람들은 가끔 우스개 소리처럼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한다. 웃자고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을 뼈가 있는 말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기회가 있을 때 지금 평상시에 잘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한다. 지금 그리고 평상시에 잘하는 것,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의 날을 정말 사모한다면, 기름을 준비할 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이 오시기 전에 전도에 힘쓰자’는 말씀을 함께 나눴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이 시간에 나누고 싶은 핵심은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재림의 날을 사모한다면, 지금 서로 뜨겁게 사랑하자’는 것이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이라는 말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권면을 시작한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 마지막 때 가장 강조한 첫 번째 성도의 자세는 이것이다.
7절 -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절 -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9절 - 서로 대접하되 원망 없이 하라
10절 -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절 -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
11절 - 봉사할 때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렇게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11절). 이 중에서 이 시간에 나누고 싶은 것은 8절 말씀이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7-8절)
이 마지막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되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 7절 말씀처럼 깨어서 근심하고 기도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싸움의 기본이라면, 8절 말씀처럼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적싸움에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지옥에 떨어질 사형집행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사형수들이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사형을 받아 주심으로 해서 살아난 사람들이다. 죽음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할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0-11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므로,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 언제?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운 바로 지금이다.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기 전에 지금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단 몇 분, 단 몇 초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성도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몇 분 후에도 계속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사실은 없다.
어떤 크리스천 집사 부부가 밤중에 말다툼을 했다. 그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전에 남편은 그의 아내에게 손을 내밀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그의 아내는 그 손을 외면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녀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어쩌면 그날 아침에 말다툼을 하고, 용서를 구하는 손을 거절당한 것에 대해 신경 쓰다가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여집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의 시신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이미 서늘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었다.
“이렇게 떠날 줄 알았다면, 아침에 그렇게 가게 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요”
이렇게 울부짖었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이미 저 멀리 지나가 버렸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우리들의 눈앞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기회 지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서기 전에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자. 주님이 나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허물과 죄를 용서하자.
얼마전 어느 신앙서적을 읽는데, 중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아내가 죽자 한 묶음의 꽃을 그녀의 영정 앞에 놓았다. 그때 그의 아들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꽃을 주는 것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책 속에서 나온 짤막한 몇 문장이었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꽃을 주면서, 살아있을 때는 한 송이도 주지 않았는가? 영정 앞에서는 용서를 구하면서도, 왜 살아있을 때에는 용서의 말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기회 지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서기 전에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자.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것과 유사한 상황이 저에게도 발생했다. 지난 주 중에 아버님께서 소천 하셨다. 첫 날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아버님의 영정 앞에서 하얀 국화꽃을 드리면서, 책 속에서 읽었던 그 내용이 생각났다. 부모님의 영정 앞에서 대부분의 자녀들은 잘 한 것보다는 못해드린 것들이 더 많이 생각 날 것이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장례기간 동안 문상객이 없을 때나 밤늦게, 그리고 새벽에 영정 앞에 앉아서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묵상했다. 그때 읽은 성경이 데살로니가 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고린도전서 15장이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오늘 본문 8절 말씀도 바로 그때 묵상한 부분이다.
장례일정을 마치고 다같이 큰집으로 모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님이 쓰시던 방과 물건들을 보면서 다들 또 다시 눈물을 지었다. 뒷정리를 하다 보니 애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문상객들이 적지 않게 오셔서 약간의 조의금이 남았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상의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날 새벽에 아버님의 영정 앞에서 묵상했던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집사람과 별도로 합의를 본 후에 말을 꺼냈다. ‘그 돈의 절반은 없는 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아버님을 모신 형수님께 드리고,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개척교회를 하는 막내에게 줬으면 좋겠다. 아마 아버님이 살아계셨더라도 마지막으로 그동안 고생한 며느리에게 옷이라도 한 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말에 형님도 동생도 그리고 모든 가족이 서로 손을 잡고 눈물 흘렸다.
그리고 목회자인 제가 대표기도를 하고, 장례의 모든 절차를 은혜롭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올려드렸다. 그야말로 화합의 마당이었다. 이 장면을 거기 모인 자녀들과 모든 조카들이 다 지켜보고 함께 울었다. 이것이 묵상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내 욕심을 버렸더니 모든 것이 잘되었다. 기회 지나가기 전에, 주님 앞에 서기 전에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자. 주님이 나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허물과 죄를 용서하자.
마지막으로 얼마전 서울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11일 오후 7시 20분경 서울 강북구 송중동에서 11세인 누나와 9세인 남동생이 맨홀 철판 뚜껑이 내려앉아 빗물 체류지 펌프장 물속에 빠지게 되었다. 수심이 130cm였고 누나의 키는 153cm, 동생의 키는 140cm였다. 누나는 까치발을 하면 간신히 목에까지 물이 찼지만 동생은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누나가 동생을 등에 업고 구출되기까지 50분을 버텼다. 그때 등에 업힌 동생이 누나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나, 그냥 나 내려줘. 이러다 누나 죽으면 안 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동생을 등에 업고서 까치발로 서 있는 것이 힘들고 지쳤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 차리고 있어. 소방관이 오고 있으니 걱정마”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마침내 119소방관이 와서 50분 만에 안전하게 구출 되었다. 어린 누나의 사랑과 희생이 동생을 살게 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들이 주님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기회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자. 서로 용서하자.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 그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그동안 서운했던 것, 잘못했던 것들, 상처 주었던 것들도 다 덮는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의 힘이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다고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셔야 한다. 이 시간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능력을 간구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벧전 4장 7~11절 / 이기복목사
9월 첫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지난 주간은 두 개의 대형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였습니다.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입어 낙심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즈음 모든 면에서 각종 어려움이 엄습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심상치 않은 시대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날뛰는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하늘문 교회와 성도들의 사명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종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증거 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큰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모든 만물의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때문에 시대적인 종말신앙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종말의 신앙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생일이 있듯 끝나는 종말이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있는 것을 알고 예비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The end of all things is at hand)로 시작을 합니다. “만물”이란 모든 피조물을 총 망라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헬라어로 “텔로스”인데 시간과 공간의 끝자락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만물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경고하면서 종말론적인 신앙과 구체적인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모든 피조물은 종말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종말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7절).
본문 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세에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주 간단하면서 종합적으로 핵심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첫째는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올바른 마음” “건전하고 깨끗한 마음” “침착하고 냉정한 마음”을 의미합니다.(영어로 sober) 우리는 이 세대의 파수꾼으로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근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근신(勤愼)이란 말은 “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말과 행동에도 근신해야 합니다. 즉 자제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셋째는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명령에 주어진 목적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만 아니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하고 효과적인 무기입니다.
2.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8-9절)
본문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첫째 의무요 특권인 것처럼, 사랑은 인간을 향한 첫째 되는 의무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뜻은 “나그네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남을 대접할 때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기 어려운 때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힘들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원망하면서 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과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3. 서로 봉사하라(9-10절)
본문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보내진 존재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청지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은혜는 각자가 혼자 독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함으로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 말씀을 우리는 각자의 가정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가족은 가장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청지기로 봉사할 때 작은 천국이 됩니다.
다음으로 교회에서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실천하는 장소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는 서로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직장에서도 선한 청지기가 되어 봉사해야 합니다. 특히 직장에는 믿지 않는 이방인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청지기로 봉사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1절).
11절 말씀은 본문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전 10:31절과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벧전 4장 7~11절 / 이필재목사(갈보리교회)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퇴계원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전도사 시절에 퇴계원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던 때입니다. 고등부에 나오는 여학생 가운데 굉장히 믿음이 좋은 학생이 1명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의 소원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 전도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저에게 와서 “전도사님! 나는 소원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전도사님이 직접 우리 아버지 만나서 전도를 하실 마음이 없으신가요?” 그러니 제가 전도를 하러 가야지 전도사인데 전도 안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때 나는 20대 중반이었고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40대 후반으로 그 지역에서 제일가는 사업가이며 소문나게 잘 나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여학생 집으로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제가 딸이 나오는 교회 전도사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인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갔다가 얼마나 그 아버지께 혼났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당신 좀 만나려고 했소. 우리 똑똑한 딸 당신 때문에 버리고 있는 거 알지? 왜 교회 나오라고 해서 내 딸 망쳐놓는 거야?” 막 야단을 치고 날 보고도 “당신을 보아하니 똑똑한 사람 같은데 뭐 할 일이 없어서 전도사를 하는 거야?” 혼내시는 겁니다. “교회 때문에 대한민국이 망하는 거야. 일은 안하고 나가서 노래 부르고 뭐하는 거야? 나까지 그런 일을 하라고?” 얼마나 화내시는지 왕창 망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전도사님! 아버지가 만나자고 하십니다.” “야! 너희 아버지 만나자고 했다가 나 죽을 뻔 했다. 왜 만나자고 하니?” “아버지가 못사신데요.” “뭐라고?” “지금 병원에 계세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꼭 전도사님을 만나게 해 달래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병원에서 성경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야단 안 맞을 거 같이 예상이 되었습니다.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말이 겸손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지난번에 초면에 내가 실례를 너무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나 죽는다고 진단 나왔습니다. 나 다 잘한 것 같이 생각되었는데 우리 딸이 왜 나를 그렇게 열심히 교회 나가라고 날마다 기도하고 졸라댔는지 전도사님 같은 사람도 나한테 야단맞고 갔는데 내 마음이 지금 아주 후회가 됩니다. 제가 얼마 못산다고 진단이 나왔는데 그동안 이 성경책 한번 다 읽고 죽으려고 매일 성경을 보고 있는데 전도사님 생각이 나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일주일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저한테 세례 받고 가장 선한 말을 남기고 그의 말대로 얼마 안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고 위기의식 같은 것을 늘 강조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성경말씀에 뭐라고 합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나옵니다. ‘왜 이렇게 위기의식을 만들어서 사람을 조바심 나게 하는가?’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할 때가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이런 말로 성경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진리입니다. 인간은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존재입니다. 황수관 박사는 우리 갈보리 교회 오셔서 신바람 나게 건강 강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나는 100세까지는 넉넉히 살 테니 두고 보십시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데 70세도 안되어서 별안간 그렇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니까 ‘인간 존재라는 것이 참 허무하구나!’ 또 한 번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은 다 되어 있는데 왜 그런가? 사람이 내일이 보장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뿐이라는 이 개념 때문에 그나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한테 나오지 100세까지 내가 절대 보장된다는 것을 내가 미리 안다면 누가 교회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내일에 대한 보장을 절대 알려주지 아니합니다. “내일 일은 네가 모를 것이다.”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면 그게 복이 됩니다. 아무리 괴롭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오늘은 최선을 다하고 내일은 보장이 없으니 ‘주시면 또 내일 일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삶의 풍성함을 우리들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생활의 단위를 하루로 정하고 살아가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임박한 하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치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는 것 같은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몇 가지 제목을 여기서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뭐라고 했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정신까지 차리고 근신하면서 기도생활을 하라고 했느냐? 우리 인간은 능력이 많은 거 같지만 인간 같이 나약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초월자의 힘을 빌려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능력의 내재성이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게 하려면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기도인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기도 안하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게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있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시간 노동하시겠습니까, 한 시간 기도하시겠습니까? 한 시간 노동하는 거 삽 들고 왔다 갔다 하면 지나갑니다. 노동자들이 다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하루에 8시간 노동하시겠습니까, 하루에 8시간 기도하시겠습니까? 기도는 앉아서 가만히 하는 건데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루에 8시간 노동하는 거 아침에 출근하고 출근부에 도장 찍고 좀 일하다가 쉬는 시간에 커피 마시고 점심시간 한 시간 라면 끓여먹고 떡국 먹고 재미나게 농담하고 그럭저럭 하다오면 시간 다 갑니다. “당신 그렇게 노동하지 말고 하루에 8시간씩 기도만 해!” 그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못합니다. 기도하는 게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기도해본 사람은 압니다. 살이 마릅니다. 아주 심하게 할 생각하면 피가 마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오게 하는 힘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10분 동안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10분 동안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더니 사회자는 시계를 그동안에 5번을 봅니다. 노동하면서 10분은 그럭저럭 그냥 지나갑니다.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시간이 안 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철야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금식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면 이 정신력을 동원해서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는 일들이 있어서 우리가 신기하게 봅니다. 김정빈씨가 쓴 “단”이라는 책을 보면 우학도인이 정신력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 초능력 행사를 소개한 것을 볼 수가 있고 우리나라 최면술의 최고 권위자였던 유한평 씨 책을 보면 이 정신통일이 가져오는 최면의 초강력을 거기서 보여주고 설명합니다.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하는데서 발생하는 초능력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청년 유리겔라라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했었습니다. 스텐 숟가락 하나 놓고 쳐다보니까 구부러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신 집중을 못해서 그렇지 집중하면 됩니다. 사실 그때 유리겔라 그 청년이 그거 하는 바람에 그 후에 대한민국에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고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구부러지나 안 구부러지나 시험해보려고 그런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힘듭니다. “목사님! 이거 기도해주세요.” 그런데 자신은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 기도제목 가지고 새벽마다 나갑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제목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근신하며 정신 차리고 기도해서 얻어야 될 힘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초능력자의 힘을 초능력으로 내게 가지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런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정신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해서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할지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아름다움이 사랑하는 일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랑을 못합니다.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자기한테 좋게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아닌 다름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초능력을 가져와야 되는 일이지 이게 안 됩니다. 자기한테 유익하면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하는 힘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이 내게 와야만 되는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기도를 통해서, 초능력을 다해서, 정신을 집중하여서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오게 하라. 그 다음에는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지는 크리스찬의 능력을 행사하며 살라.”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어느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자기의 유익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신도 안 차리고 근신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는 사람도 자기한테 잘해주고 유익한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근신해야 합니까? 그러면 그렇게 기도해서 얻는 사랑의 힘이란 무엇입니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덮어줄 수 있는 초능력을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허다한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을 때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결과가 내게서 행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내 마음의 방향이 사랑 쪽에 속해있을 때는 상대방의 실수도 넉넉히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 힘이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새로 시집온 색시가 밥을 하다말고 들어와서 신랑한테 말했다고 합니다. “떡 좋아하나요?” “그럼! 떡 좋아하지.” 그랬더니 밥을 떡같이 만들어놓고 한 말이랍니다. 신랑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평생 먹어보지 못한 떡을 오늘 아침에 먹어봤다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제가 지난 주일에 언급한 J. C. 페니가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페니 씨는 교회 봉사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잡화상에 점원으로 취직을 하다가 자기가 아이디어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미국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 10명을 선정했을 때 그가 1번으로 뽑힌 적도 있습니다.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점원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점원 생활 하면서, 또 내가 나중에 주인이 되면서 얻은 진리가 있는데 나를 찾아 여기 왔던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도록 인격 대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졌느냐고 물었더니 “성경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에서 내가 얻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집중을 해서 ‘어휴! 여기 다시 오기 싫다.’ 이러면 끝난 거 아닙니까? 왔던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도록 자기가 평생 일했더니 이렇게 미국 사회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인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말하는 대접이라는 헬라어 원문은 “펠로세노이”라는 말인데 “나그네를 대접한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서로가 모르는 낯선 자” 처음 만난 사람을 인격 대우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때가 언제입니까? 모두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입니다.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서 방황하는 생활을 할 때이므로 낯설고 모르는 사람을 날마다 만나게 되니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대접하라.” 이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5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치가는 아니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잘되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이 한국 땅을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공정한 기회 제공을 하면서 그들을 인격 대우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나그네를 서럽게 하고 학대하지 말라. 살기 좋은 나라라고 자꾸만 찾아오도록 하라. 찾아오는 나라는 잘될 것이다.” 잘되지 않습니까? 북한은 자국민도 살기 싫다고 자꾸 탈북해 나갑니다. “왔던 사람이 여기가 내 살 곳이라고 생각하게 하라.” 아이다호의 감자밭 주인들은 끝이 없는 농장의 마지막 줄 한 줄을 수확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현장에 갔습니다. 나그네들이 그것을 캐서 먹으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다호 감자밭 주인들이 다 부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성경대로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 봉사도 그렇습니다. 초능력이 내게 와야만 남을 위해서 우리가 시간을 내고 헌신을 하지 내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을 빌려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이 네가 하라.” 오늘 말씀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 교회에서 집사를 선택합니다. 목적은 교회 봉사하라고 기회를 만들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를 영어로 “Deac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διακονείν(디아코네인)’에서 온 말입니다. “διακονείν(디아코네인)”은 무슨 말입니까? 먼지를 뒤집어썼다는 말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사람이 “Deacon”, “집사”라는 말인데 내게 주어진 이 은사를 위해서 봉사를 하되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과 같이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공급해 주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봉사하게 하시니 한다는 믿음으로 하라.” 오늘 여기 이렇게 열심히 먼지까지 뒤집어쓰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면서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마지막에는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결론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 우리 크리크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것을 위해서 정신 차리고 근신해라. 기도하라.” 여기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모든 영광 하나님께!”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고 그 기도한 힘으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봉사하는 모든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 제목 하나에 둘 때에만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고난이 나의 기쁨이 되는 생활이 되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손해난다고 생각합니다. 약삭빨라서 그럽니다. 하지만 손해 안 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내가 이름을 댈 테니 아시는 분은 손들어보십시오. 김범일! 한명도 안계시네요. 그 다음 사람은 아시나요? 임춘애! 아시는 분 계십니까? 많으시네요. 육상선수입니다. 86아시안 게임에서 3관왕 스타가 된 소녀입니다. 임춘애를 스타로 만든 사람이 김범일 코치입니다. 전도사님입니다. 3류급에도 들지 못하는 무명의 육상 코치 전도사입니다. 바로 여기 성남에 사십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을 자기가 육상을 좋아하니까 80명의 육상부원을 만들어서 코치하면서 자기의 소원은 이 사람들 다 예수 믿게 하는 거라고 하고 자기가 전도사니까 교회 하나 개척했는데 10명도 안모입니다. 조그만 교회를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가르치는 거 좋아해서 아이들 모아놓고 육상 가르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일주일씩 금식해 가면서 기도하다 어느 날 임춘애가 거기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드리기 시작했는데 이 전도사 육상 코치의 신앙과 육상 훈련은 오직 목적이 하나였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그렇게 하고 아이들 운동 가르치는 것입니다. 임춘애의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가 학업도 운동도 다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돈 벌라고 했는데 김 코치가 부모와 싸워가며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성보여상에 진학시키고 육상 계속 하자고 하고 목표는 “아시안 게임에만 나가보자.” 그런데 그해 예선 경기가 4월, 5월 두 번 있었습니다. 임춘애는 그때마다 몸이 아파서 출전도 못하고 끝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결정되었습니다. 기록경기이니까 허무한 꿈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전도사님은 “우리가 처음부터 금메달을 목표로 했다면 허무하지만 봐라.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우리 삶 자체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노력해 왔으니 실망하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 건강해서 운동할 수 있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 아니냐?”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하며 운동시켰는데 그 다음 6월 달에 전국 체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한번 출전하자.” 그런데 임춘애가 1600m, 3000m, 10km 세 종목 모두 한국 신기록이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육상계에서 깜짝 놀랄 거 아닙니까? “아니, 이런 선수가 이제 나왔으니 어떡하냐?” 그래서 번복을 해서 임춘애가 아시안 게임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가 태릉선수촌으로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범일 코치는 무명의 코치이기 때문에 국가 선수 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게임이 이제 두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하냐?” “이때 코치를 바꾸면 변화가 심해서 안 됩니다.” 그래서 김범일 씨가 그대로 코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4월과 5월에 임춘애가 출전했다면 김 코치는 아예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태릉선수촌에서 선수 임원들이 옷을 다 입을 때도 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공식 명칭이 없는 코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증으로는 그때마다 그는 불암산에 올라가서 목청이 터져라 밤새도록 기도한 거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쨌든 이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세요.” 마침내 임춘애가 아시아 3관왕이 되었을 때 김 코치가 기자들에게 막 질문을 받을 거 아닙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목적은 이루어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저는 전도사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사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임춘애 선수는 영원한 영광도 주어졌고 국가가 베푼 혜택도 무시 못 하게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전도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김범일 아느냐고 했더니 같은 성남에 사시면서 한 분도 손드신 분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때 ‘이제는 내 사명이 끝났다. 육상 코치의 생활을 그만 청산하고 본래 내가 가야할 전도하는 일에 더 열심히 몸을 바치자. 모든 일이 끝난 다음 자기에게 주신 은사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제는 달리기 선수와 같이 열심히 전도하면서 살자.’ 모든 일을 끝내고 자기 손에 주어진 열매는 아무 것도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간증집 하나를 내면서 자기가 섬기는 개척 교회 그 외로운 10명밖에 모이지 않는 그 강대상 밑에 와서 외롭게 혼자 와서 이 일의 모든 청산을 마지막으로 복음성가 하나를 부르고 끝났습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모든 영광 하나님께 나는 자유해!” 2013년 다른 생각 많이 하실 수 있지만 ‘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사심을 다 버리고 이 손에 아무 열매가 없다 하여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벧전 4장 7~8절 / 이수영목사
영화관에 가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최근에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영화를 한 편을 보러 갔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워낙 원작소설이 유명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소설의 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도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영화는 영화인데 뮤지컬 영화입니다. 모든 대사를 노래로 하는 것이 긴박감과 극적인 효과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의심이 있었지만 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걸작입니다. 이미 무슨 영화인지 다들 짐작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한국에서만 지금 관람객이 6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레 미제라블”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위고(Victor Hugo)의 대표작인 대하소설을 원제목 그대로 뮤지컬화한 영화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 제라블”인 줄로 알고 있고 대부분은 그저 한 단어처럼 “레미제라블”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입니다. 프랑스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832년 프랑스 빠리에서 있었던 6월 봉기입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이루려는 일련의 투쟁과정 중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쫓겨난 샤를(Charles) 10세 대신 프랑스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Louis-Philippe)에 대한 일부 공화주의자들의 불만이 학생, 노동자, 부랑아들 주축의 봉기로 표출된 사건입니다. 6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 만에 끝난 이 봉기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진압군에 대치하던 시위대는 백 명 가까이 죽고 삼백 명 가까이 다쳤으며 진압군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숫자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는 제목 그대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먼저 주인공인 쟝 발쟝입니다. 그는 막노동으로 살아가던 사람인데 누이의 일곱 어린아이들을 굶어죽게 할 수 없어서 빵 한 덩어리를 훔쳤다가 감옥에 가야 했고 네 차례나 탈옥했다가 다시 붙잡히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형량이 누적되어 결국 19년 간 옥살이를 해야 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의 대명사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빵띠느라는 여인도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직장 감독관의 음흉함과 동료 근로자들의 멸시와 미움의 희생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어린 딸을 먹여 살릴 돈을 벌기 위해 긴 머리털을 잘리고 이까지 뽑히며 마침내는 몸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가 애처럽게 죽는 비련의 여인입니다.
그녀 외에도 가난 때문에 매춘굴로 들어온 여인들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쟝발쟝이 끔찍이 아끼는 꼬제뜨를 사랑하는 귀족 청년 마리위스를 가슴 아리게 짝사랑하다가 무장궐기한 대학생들과 진압군의 대치 상황에서 목숨을 잃고 마는 에포닌이라는 여자도 있습니다. 이들도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이 봉기에 끼어들었다가 바리케이트에서 총 맞아 죽고 마는 부랑아 소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혈기왕성해서 궐기했다가 무참해 진압당하고 죽어가는 대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압군에 쫓겨 피할 곳을 찾는 대학생들을 향해 냉정하게 문을 닫고 외면하는 비겁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쟈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로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냉혈한입니다. 그는 그늘진 구석에서 어둡게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경멸하며 엄격한 법의 집행으로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강제노역장의 감독관이었을 때 자기 눈으로 직접 쟝발쟝의 괴력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쟝 발쟝이 완전히 변신하여 선량하고 추앙받는 시장이 되었을 때 마차에 깔린 시민을 보고 가만히 잇을 수 없어 마차를 들어 올려 시민을 살려주는 모습을 지켜본 쟈베르 경감은 그가 족적을 놓쳐버린 옛날의 죄수 쟝 발쟝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는 시장이 옛날의 쟝 발쟝이라는 의심을 갖고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 다시 그를 감옥에 쳐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무에 충직한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 찬 쟈베르 경감은 6월 봉기를 와해시키기 위해 시위대 사이에 위장 침투했다가 신분이 발각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그때 바로 쟝 발쟝이 나타나 그를 놓아주어 살리는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내면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토록 잡아 가두려고 했던 범죄자의 선처로 생명을 건지게 된 사실 때문에 상처 받은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번민 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불쌍한 사람들 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이던 그가 사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가 모든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 아닌가 생각합니다.
쟈베르 경감을 불쌍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려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 때문이겠습니까? 자기가 경멸하며 파멸시키려고 한 범죄자에 의해 오히려 생명을 건짐 받는 은혜를 입음으로 받은 자존심의 상처 때문이겠습니까? 6월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지략과 용기를 인정 받아 더 출세할 수 있을 사람이 마음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답을 찾는 일은 잠시 미루기로 합니다.
쟝 발쟝을 무너뜨리려 한 쟈베르 경감을 쟝 발쟝이 살려주는 대목은 이 작품 속에서 가장 통쾌한 반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불쌍해야 할 사람이 전혀 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가장 불쌍해야 할 사람이 전혀 안 불쌍한 사람이 되고, 전혀 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쟝 발쟝을 가장 불쌍한 사람에서 전혀 안 불쌍한 사람, 아니 가장 복된 사람으로 바뀌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에게서 가장 귀한 가치의 발견이었다고 봅니다. 그 가치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이 답은 앞서 미루어두었던 답 곧 전혀 안 불쌍해 보이던 사람 쟈베르 경감을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사람에게서 가장 귀한 가치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사랑을 아는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며, 따라서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라는 진리가 이 작품의 주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메시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쟝 발쟝을 가장 불쌍한 사람이면서 가장 위험스러운 범죄자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복된 인간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죄를 덮어준 한 신부의 사랑이었습니다. 출옥한 쟝 발쟝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준 신부에게서 떠나며 쟝 발쟝은 또 어처구니없는 죄를 범합니다. 신부 방에 있던 은식기들을 다 훔쳐가지고 달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결찰에 의해 그는 의심을 받고 다시 붙잡혀 그 신부 앞에 서게 됩니다. 그가 갖고 있는 은식기들이 그 신부의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확인 받으려는 경찰에게 신부는 자기가 쟝 발쟝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고 그에게는 왜 은촛대까지 줬는데 그건 안 가지고 갔느냐며 그것마저 싸줍니다. 여기서 쟝 발쟝은 크나큰 수치와 자기경멸과 회한에 사로잡혀 괴로워합니다. 사랑을 배신으로 갚은 자신의 초라하고 추악한 모습 때문에 통곡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다짐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고 사라졌던 쟝 발쟝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그는 자기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며 따라다니는 쟈베르 경감에 의해 자기의 본래 신분이 탄로 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펼치는 일을 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꼬젯뜨를 위해, 꼬젯뜨와 서로 사랑하는 청년 마리위스를 살리기 위해 그는 죽음을 무릅쓴 행동에 나섭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리위스를 살려내고 그와 꼬젯뜨의 행복을 위해 그들에게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하나님께로 가기를 소원하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그는 쟈베르에 의해 그가 옛 쟝 발쟝임이 밝혀졌었지만 6월 봉기의 와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오히려 쟈베르 경감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리게 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눈엣가시 같고 자기를 늘 불안과 긴장 속에 몰아넣던 화근을 확실하게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쟝 발쟝이 택한 것은 쟈베르를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깨닫고 그를 변화시킨 바로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힘껏 실천하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노래가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일이라”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난 말씀이 요한1서 4장의 말씀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1-12, 20-21)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우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는 같은 편지의 1:18-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이 순결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상 때부터 헛된 행실에 빠져있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어린 양 으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시는 그런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같은 편지 2:24-25에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며 길 잃은 양 같았던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또 같은 편지 3:18에서는 쓰기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죄 없으신 아들을 죄 많은 우리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면 우리 또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를 묵인하고 은폐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의 별것 아닌 작은 허물을 캐며 광고하고 과장하며 비난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쓰기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합니다. 야고보도 쓰기를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5:20) 했습니다. 잠10:12에서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다한 죄를 덮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복된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그 성전 건물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시고는(마24:1-2)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 12) 하셨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성하며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말세의 징조라 하신 것입니다. 온통 불쌍한 사람들이 들끓는 세상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며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허다한 오늘날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마지막 때의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선한 청지기가 사는 방법
계강현 목사 / 베드로전서 4:7-11
본문 v10에 보면 ‘선한 청지기’란 단어가 나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청지기’란 누구를 말합니까? 집안일을 전체적으로 주관해서 맡아 일하는 집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the ruler’(KJV). ‘the steward’, ‘the manager’(KJV, NIV)라고 번역했고 ‘the servant’(CEV)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한 청지기’란 단어가 있는 걸 봐서 ‘악한 청지기’도 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9장을 보면,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일하면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했는데, 요셉이 바로 오늘 말씀처럼 정말 ‘선한 청지기’였습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달란트의 비유’가 나오죠. 이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종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각각 장사하여 배로 이를 남겼고, 주인은 그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종들이 바로 ‘선한 청지기’입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속에 묻어둔 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종이 바로 ‘악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선한 청지기로서 이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칭찬 듣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어떻게 하면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자신의 축복과 형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들을 향해 불평과 원망하며 살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주인은 여전히 나 자신인 거죠.
여러분, 이게 맞습니까? 뭔가 대단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 청지기, 집사,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분이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존재를 계속 의식하며 사는 자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계속적으로 주인의 지시를 받아서 그 주인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결코 자기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악한 청지기는 주인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소유자인 것처럼,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입니다. 계수할 날이 있는 것도 잊고 허랑방탕하게 시간을 낭비하며 사는 자입니다. 주인의 뜻에 순종은커녕 주인의 뜻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고 삽니다. 정신 나간 청지기이이죠.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선한 청지기입니까? 과연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까? 그분의 통치와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고 사십니까? 이런 청지기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v7) 주인이 계산할 마지막 날이 있음을 기억하며 삽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삽니다. 그분의 지시를 듣는 겁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또 무시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선한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착각이요 망상입니다. 기도에 깨어있지 않은 성도는 금방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분노와 혈기와 시기 질투 미움과 게으름과 다툼의 옛 속성들이 속에서 금방 튀어나옵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 직분생활을 잘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생활, 그것이 신앙에 깨어 있다는 증거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방편입니다. “주님, 이 시간 이 문제에 대해 저를 다스리시고 통치해주십시오.” 선한 청지기로서 주님의 주권에 항상 복종하는 선택의 기도를 드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의 주인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주인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를 가리켜 ‘육신에 속한 사람’, ‘영적인 어린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믿는데 사는 건 안 믿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왜 그래요? 여전히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살던 방식입니다. 내가 내 주인노릇하며 사는 거 말이죠.
그런데 내가 주인노릇하면 무엇으로 나를 다스리겠어요? 오늘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세 가지 정도를 가지고 다스릴 겁니다. 그것은 지성과 경험과 전통입니다. 가만히 살펴보세요. 사람들마다 다 특성이 있는데, 각기 다르죠. 어떤 사람은 지성이 발달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이성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 상황을 예견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 결론의 잣대를 가지고 주위 사람과 상황을 다 재고 판단합니다. 언제나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자신이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우리의 이성이 죄로 타락했을 때 같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속받아 회복되긴 했지만,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가지고 모든 걸 다 판단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신앙은 이성과 지성을 초월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중요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옛날에는 이렇게 했는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러이러 했는데 …”, “요즘 젊은 것들은…”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전통은 귀하고 필요하지만, 전통이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내용은 잊어버리고 전통이 훗날에 형식만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통만 고집하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주위 사람들과 많이 부딪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유교적 사고의 상하관계, 제사제도나 토정비결이나 풍수지리설 같은 것에 얽매여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합니다. 효도 같은 좋은 전통은 전수해야겠지만, 조상제사 같은 쓸데없는 형식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성가대가 꼭 있어야 된다거나 예배 순서에 교독문이 꼭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전통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구약에 다윗과 솔로몬 왕정시대에는 성가대가 있었지만, 신약교회는 성가대 없이 회중찬양을 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할 수도 있고,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형편에 맞게,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통은 형식적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을 가지고 모든 걸 판단하려는 생각은 신앙인으로서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일이 보편진리이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경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가 천국을 보는 환상을 보았다고 다른 사람도 천국 환상을 보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방언을 한다고 다른 사람도 방언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경험이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신앙은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런 체험에 중독이 되면 더 자극적인 경험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험을 앞세워서 모든 걸 판단하고 다스리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권위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성경 말씀이 우리를 영혼구원에서부터 인격의 구원을 거쳐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 됩니다. 지성, 전통과 경험도 말씀의 권위 아래 두고 비춰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이시란 사실을 아십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요 1:1-2) 이 구절은 우리에게 성부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초월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속성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지성이나 전통이나 경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음성에 매순간 복종하여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록된 말씀인 66권 성경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사랑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연구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그렇다고 그러면 그런 줄 믿는 게 믿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버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일깨워주신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겁니다. 말씀되신 그리스도, 그의 말씀을 주인으로 삼는 삶, 이렇게 사는 게 선한 청지기의 삶입니다.
3. 선한 청지기는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주인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면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에 그 사람의 인격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선한 청지기가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할 겁니다.
먼저 생각이 달라집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일단 부정적인 생각과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비판적이기 보다는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나 죄짓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빨리 주님에게 보고하고 다스리도록 요청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내 생각을 바꿔주시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악한 것뿐이고 허무할 뿐입니다.(창 6:5, 시 94:11) 그러므로 내 마음에 좋은 생각이 났다 싶으면 ‘이건 주님이 주신 마음이구나.’하고 빨리 알아차리고 빨리 그것을 시행해야 합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주님이 마음을 다스리시면 그 다음에는 말이 바뀝니다.
우리의 말은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또 내가 말하는 게 마음에 다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생각을 주님이 조정하시도록 맡겨드려야 합니다.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의사전달이 우리의 말 자체로는 7%밖에 전달이 안되고, 목소리 톤이 38%. 표정과 바디 랭귀지가 55%라고 합니다. 그러니 같은 말을 해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가 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면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의 톤과 표정이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매순간 주님이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선택해드리면 그 다음에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지혜롭게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말을 잘못해가지고 언성이 높아지고 다툼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 하는 게 뭐예요? 뭔가 들어서 던지고 발로 차고 손으로 부수고 싶은 겁니다. 말에서 행동으로 바로 연결되어 죄악 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선한 행동은 마음과 말을 주님이 다스리도록 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주님이 지시하시는 것을 즉각 순종하는 연습을 계속 해야 되요. 처음엔 용서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잘 안되는데, 문제는 습관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시게 되면 안 되던 게 점점 되기 시작합니다. 한두 번 성공하다보면 자신도 붙게 되고 이제 잘 되는 게 습관이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마음의 소원을 주시는 동시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편해지고 습관이 되고, 그러면서 능력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고 축복된 결과가 찾아오는 걸 체험하게 됩니다.
vv8-11,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여러분, 누군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용서하거나 사랑해보려고 할 때 잘 되던가요? 시댁식구들에게 잘 해보려고 하는데 그게 쉽던가요? 우리가 사랑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힘들고 좀 하다가 곧 지치고 한계에 봉착하고 맙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하면 용서하고 용납하고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은사를 따라 서로 봉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봉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것,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어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실 때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속성 자체이신 주님이 나를 다스리심으로 나를 통해 나타나실 때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럴 때 내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와 사랑과 능력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말씀을 하는 사람답게 말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겠죠.
내 얼굴 나타내려 하지 않고 내 체면 살리고자 하지 않고 주님의 다스림에 주권을 맡기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는가?’ 이걸 생각하면서 매순간을 사는 자가 선한 청지기입니다. 그런 매순간의 삶을 통해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통치 속에 변화를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며 사는 놀라운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서 마지막 날에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받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버킷리스트
벧전 4장 7~11절 / 이은규목사(성암교회)
인생의 전성기를 훌쩍 넘긴 남자 탤런트 네 사람과 40대 초반의 미남 탤런트 이서진씨가 출연하는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70을 넘긴 나이에 배낭을 메고 함께 여행을 떠난 그들의 모습이 참 부러워 보였습니다. 배낭을 멘 모습이 참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분들도 이번 여행을 무척이나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우리가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겠어?’ 즐기면서도 아쉬움이 잔뜩 배어 있는 것 같고... 그러기에 그들은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여행을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프로를 보면서 몇 년 전에 만들어 진 영화 ‘버킷리스트’가 떠올랐습니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출연해서 그야말로 연륜이 묻어나는 연기를 했었지요. 서로 다른 인생의 여정을 거친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한 병실에서 만납니다. 둘은 생각지도 못한 암 선고를 받아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젊은 날의 꿈을 접고 45년 동안을 자동차 정비에만 매달렸던 카터가 문득... 대학 1학년 때 철학교수가 했던 말을 생각해봅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보라... 그 땐 치기어린 시절이라 대단했습니다. 백만장자가 되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고... 이제는 그렇게 대단한 꿈은 아니지만... 정말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을 적어 봅니다.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적었던 버킷리스트를 우연히 같은 방실에 있던 에드워드가 보고서는 거기에다가 자신의 것을 덧붙입니다.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작성한 버킷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가는데 의기가 투합니다. 그들이 적어 놓은 것들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장엄한 광경 보기, 낯선 사람 도와주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카 레이싱 하기,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 몸에 문신 새기기, 스카이다이빙, 여행하기,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평원에서 호랑이 사냥하기...’
그들은 이런 것들을 다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들이 하려 했던 것들을 해 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자기들이 이루려 했던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이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히말라야에 올라가서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고 싶었던 그들의 희망 1호는 그들이 죽은 후에 유골이 눈 덮인 산에 묻히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기들이 희망하는 것들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 이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들에게 마지막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그리고 그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이루려하였을 때... 그 순간이 그들에겐 정말 중요하고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생을 가족들을 돌보느라고 공부라든지 자기가 가진 꿈을 다 버렸던 카터에게도 그랬고... 오로지 돈을 위해서라면 가족이나 인간관계라든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던 에드워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버킷(bucket)이란 말은 원래 양동이나 물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사람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는지는 여러분들이 한 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설혹, 나는 아직 멀었어... 내겐 죽음이란 가당치 않아... 아마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리스트를 작성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정말 마지막 순간이 찾아 왔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고... 마치 천상병 시인이 ‘잘 놀다 갑니다...’ 이렇게 말하고 간 것처럼... 그렇게 갈 수가 있는 것인지요.
베드로가 작성한 우리의 버킷 리스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꼭 해야 할 일’저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 이런 제목을 붙여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v.7) 마지막이 가까웠다... 사실 이것은 베드로만의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지막이 가까웠다. 곧 종말이 닥칠 것이다.’ 이런 말씀들이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그런 말씀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바울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마지막이 곧 임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절박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몇몇 차원이 높은 신앙인들만의 의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엔 온 교회가 이렇게 임박한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 그 기다림이 심하고 절박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들떠서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성도들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음에 이르게 된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이 말씀이 초대교회교인들에게처럼 그렇게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많이 무디어졌다고나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씀이 전하여진 지도 거의 20세기가 흘렀으니까요...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어도 ‘어쩌면 우리의 생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초대교인들이 곧 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시간은 아직도 임하지 않고 있으니... 그래서 우리는 또 베드로도 인용했던 시편 90편의 말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후서 3:8)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래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달라도 너무 달라...’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론적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 종말이 우리에게 임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종말이 들이 닥칠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나 기준을 종말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추어서 사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종말론적인 삶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한 것이지요. 물론 그것은 우리들의 현실과는 상관이 없는 아주 추상적이고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사람들은 곧 예수가 오실 것이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죽기 전에 예수가 다시 오시는 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살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런 기대감은 점점 더 희박해졌고... 마지막이 가까웠다... 는 말씀도 그 영향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을 생각하는 사람... 언젠가 나의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마지막이 다가올 것이다... 이런 종말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사는 삶... 그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과 종말을 전혀 의식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달라도 너무나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많은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한 번 만이라도 보았으면... 좋을 텐데... 단 한 번만이라도 주님과 함께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어 보았다면... 이렇게 희미하진 않을 텐데... 여러분 앞에서 설교를 잘 못하는 데 대한 구차한 변명 같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직접 보아서 그럴 거야... 예수와 함께 먹고 자고... 함께 지냈으니...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었으니... 오죽하겠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확신에 가득 찼겠어...’ 그런 생각 말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과거도 중요하겠지만...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입니다. ‘곧 주님이 오신다...’ 베드로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오시고... 더디 오시고...’ 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마지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다시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비쳐 오는 빛이 이미 그들의 내면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롬13:12)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바로 이것이 그가 예수를 통해서 바라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아직은 밤이지만... 저 멀리서 새 아침이 밝고 있구나... 낮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구나... 그는 어둠 저 편에서 희미하게 비쳐오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을 보았을 때... 그는 가만히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미 날이 밝기나 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자기를 단장하며 마침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13:12)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직 아침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는 아침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란 말 앞에서 베드로도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곧 아침이 밝아올 텐데... 새 날이 우리 앞에 활짝 열릴 텐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v.7) 베드로는 먼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마지막이란 시간 앞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조용히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이런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현실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기도할 때, 우리는 더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일을 저는 ‘영혼의 피서’라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흥미로운 것을 느꼈습니다. 온도의 차이라고나할까요? 8절에는 ‘뜨겁게’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9절엔 ‘따뜻하게’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7절에서 느낄 수 있는 온도... 그것은 서늘함... 또는 차가움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이 말에서 풍기는 온도가 바로 서늘함이란 것이지요.
우리들의 상식과는 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뜨겁게 기도하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목소리를 높이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 같은데... 베드로는 오히려 기도에는 뜨거움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단 번에 무슨 승부를 보려는 것처럼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뜨겁게 달구어졌을 마음을 식혀가면서... 하나님 앞에 조용히 자신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기도의 숨은 매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란 우리의 영혼의 피서... 또는 우리의 내면의 피서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10일부터 이슬람교도들은 이른바 라마단이라고 하여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는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을 해야 하고...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이슬람들이 살고 있는 중동은 이 계절에 얼마나 뜨거울까요? 40도가 넘는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야하다니... 이것이 그들에겐 영혼의 피서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뜨거운 계절이야말로 그만큼 더 절실하게 영혼의 피서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런가하면 불교에선 하안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요. 이번 여름을 보내며...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꼭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휴가철을 맞아서 산이나 바다로 더위를 피해서 떠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권하는 것처럼... 마음을 좀 식히고... 차분히 가라앉히고...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의 영혼과 내면이 좀 쉴 수 있는 영혼의 피서 시간을 꼭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 베드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v.8) ‘무엇보다도 먼저’ 베드로는 이렇게 먼저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때 생각해 보면 하나도 없는 것 같지만... 막상 무엇인가 마음먹고 일을 하려다보면... 걸리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냥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 딱 감고...’ 이렇게 읽는 것이 제겐 몸에 더 와 닿습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형편을 내세우지 말고...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미루지 말고... 지금 그것을 하십시오...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그 일... 그것을 베드로는 뜨겁게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것... 그것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바로 그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랑에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덮는다는 게 가능한가? 죄를 덮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을 주석하는 학자들에겐 이것이 참 중요한 관심사였는지... 깊이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에게 이것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한 번 설명해 보십시오... 이렇게 물으면 그는 대답하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이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현상을 몸으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얼마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지... 만일 그를 누군가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는 어떤 실패나 잘못된 삶을 살았어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러하였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 그 사랑을 그는 예수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는 그를 거기까지 찾아 오셨고...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이렇게 멋진 베드로를 만든 것입니다. 그 전엔 예수를 따라다니긴 했어도 단지 ‘요한의 아들 시몬’에 불과하였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주님을 사랑의 힘으로... 그는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진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도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참 부족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덕택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이 바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네가 가진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까지라도... 다 감싸주며 사랑하는 것... 이런 뜨거운 사랑...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v.9)
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것과 따뜻하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온도차가 있을까? 사랑하는 것과 대접하는 것은 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 말이지요. 허물을 덮어 줄 만큼 사랑하는 것이 뜨거운 사랑이라면... 불평을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대접하려는 마음으로 바꾸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따뜻함이 아닐까?
우리가 함께 지내다보면 불평이 쌓일 수밖엔 없을 것입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교우들 사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너에게서 불평할 이유들을 찾는 일은 이제 그만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너에게 잘해주고 대접할 이유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늘 불평만을 해 대던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에게 고마워할 일은 없을까?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또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엔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을 경험하였습니다. 암이 재발해서 수술을 받았던 양인숙 권사님이 초대해 주셨습니다. 대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양권사님 입장이 되어 보면... 불평할 이유가 참 많을 텐데...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접하는 마음... 이것은 그 자리에 함께하였던 사람들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따뜻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불평할 것은 말하지 않고... 대접할 일을 찾는 것... 그런 마음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또 봉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v.10)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꼭 해야 할 일... 그것은 다름 아닌 봉사라고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란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에겐 봉사할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저마다에게 독특한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잘하는 사람만...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생각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기가 힘든 일도 아니었고, 많은 돈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처럼 사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행위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여기서 ‘선한 관리인’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서 봉사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이렇게 우리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v.11)’ 말을 잘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말을 잘하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을까요?(야고보서 3:2b)
나는 좋은 뜻으로 말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한 번 내가 한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냉정하게 들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잘 사용하던 말이 ‘좋은 말로 할 때... 조직의 쓴 맛을 보고 싶냐?’ 이런 말이었습니다. 저는 참 좋은 뜻으로 그런 말을 사용하였는데... 한 번 제가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은 말을 듣고 나니까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이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을 낳기도 하지만... 멋진 말들은 얼마나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인가요? 이럴 때 말은 말의 한계를 넘어 서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격려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말할 때, 바로 그 말이 생명력을 지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말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를 살리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면 두 사람이 피라밋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전설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저승의 문턱에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진정한 기쁨을 누렸는가?
* 그리고 그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는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근원적인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맡기신 일... 기도하고...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일...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좋은 말을 해주는 일... 이것은 또한 우리의 소중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한 청지기인가
벧전 4장 7~10절 / 김광일목사
시인 류시화의 저서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인도 여행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는 인도를 10번 정도 여행하였는데 어느 지역에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방을 의자에 올려놓고 잠시 딴 곳을 쳐다보는 사이에 인도 사람이 오더니 가방을 열고 물건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붙들고 “왜 함부로 남의 물건을 꺼내 가느냐? 내 것인데” 라고 했더니 그 인도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겁니다. “어떤 이유로 이 물건이 당신의 소유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잠시 이 물건을 관리하고 맡고 있을 뿐입니다. 주인이 모자를 벗어 잠시 걸어 놓는다고 모자가 벽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잠시 모든 것을 맡겨두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잠시 맡고 있는 것이지 당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억지 같지만 주어진 재물을 선한 일에 선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주인은 따로 있구나. 모든 물질의 소유가 내 것인지 알았는데 주인이 따로 있구나. 나는 물질과 시간과 재물을 그분을 위해 바로 사용할 때 그분이 기뻐하시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노라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네로 황제에 의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될 즈음에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박해에 대해 인내 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종말과 재림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로 위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시대의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으로 위로를 받았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때보다 더욱 종말과 주님의 재림으로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오면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만물의 마지막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누구입니까? 원문은 ‘오이코노모스’인데 신약에 10회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 스튜어드(steward)라고 하는데 가옥이나 재산을 관리하며 주인을 대리하는 직책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위임받아 고용된 사람이기에 마음대로 해도 안 되고, 주인의 소유를 허비해도 안 됩니다. 다만 주인의 소유를 주인이 원하는 대로 효과적으로 관리하여 주인에게 최대의 만족과 이익을 주어야만 합니다. 주인이 성실하게 일했는지 평가하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청지기로 한 해를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불의한 청지기로 살아오셨습니까? 어떤 청지기로 살아오셨습니까? 본문은 선한 청지기가 감당해야 할 일을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한 해 동안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선한 청지기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기도하는 청지기였는가
2002년 10월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달이었습니다. 얼굴 없는 연쇄 저격범에 의해 무고한 시민 10명이 계속적으로 살해당하고 3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던 때 미궁에 빠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크리스쳔 트럭 운전사들의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한 트럭 운전사요 교회 주일 학교 교사였던 란 랜츠(Ron Lantz)는 다음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경찰에 신고된 자동차 쉐브레를 발견합니다. 그의 신고로 15분 후 도착한 경찰에 의해 범인은 체포되고 살인극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립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랜츠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총기를 지닌 범인을 상대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대답합니다. “우리는 기도했고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라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상금 수령을 거절하고 보상금 전액을 피해자들에게 쓰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꾸었습니까? 바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믿고 기도로 역사를 바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재주나 열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사역의 방법임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기도로 사역하는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해동안 기도의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해오셨습니까?
본문 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청지기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입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항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평안할 때도 기도해야 하고, 문제가 있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에도 기도해야 하고 밤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은 기도의 청지기인 우리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세상 것에 더 분주하게 만듭니다. 기도의 청지기가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청지기였는가
미국 시카고의 한 교회학교에 불량기가 가득한 소년이 나왔습니다. 허름한 복장과 적의에 가득 찬 표정, 소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로 인해 심신에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지처럼 남루한 차림의 옷과 험상궂은 소년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교회학교 교사 파라(Fara)는 소년을 꼬옥 껴안으며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파라 교사는 소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극진히 사랑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던 소년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적의에 찬 얼굴에 잔잔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로서 수백만 명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한 미국 최고의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한 교회학교 교사의 진실한 사랑이 불량소년을 부흥사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고장 난 인생을 정상의 인생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사랑은 비극적인 인생을 희망적인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사랑으로 고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해 동안 사랑하는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까?
본문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선한 청지기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약점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가 필수적이라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으면 갈등이 생깁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을 가릅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합니다. 편을 가르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내 편 네 편이 없습니다. 모두 다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이들을 보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마귀는 잘한 것을 덮고 잘못한 것은 들추어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잘한 것은 드러내고 잘못한 것은 감추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시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소홀히 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사랑하되 열심으로 해야 합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사랑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선한 청지기처럼 예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봉사하는 청지기였는가
인촌상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던 운보 김기창(金基昶) 화백의 말입니다.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남을 위한 봉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는 정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봉사에서는 동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기창 화백은 8살 때 학교 운동회날 심하게 장티푸스를 앓고 나서 후천성 청각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7살 때부터 화가의 길을 걷게 되고 약 70년 동안 그림을 그린 돈으로 청읍회관을 설립하고, 한국 농아복지회 회장이 되어서 매년 1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면서 불행한 청소년들을 위해 써 왔습니다. 김기창 화백은 자기 인생에 대해 “화가가 예술만을 위해 살다보면 환쟁이로 전락하지만, 봉사가 곁들여지면 정말 예술가가 되지요”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해동안 봉사하는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까?
본문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선한 청지기는 봉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기 것은 아니지만 주인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봉사는 하나님이 힘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부족하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힘을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물질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환경을 구하고 모든 것을 다 구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봉사하기에 봉사하고서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에 젖어 삽니다.
시골학교의 졸업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학교장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특별하게 준비된 순서입니다. ‘손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 찾기 대회입니다. 아름다운 손을 추천해주세요.” 한 소년이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단상으로 모셨습니다. 교장이 단앞에 나온 사람들의 손을 들여다보며 심사를 시작합니다. “ 왜 할아버지의 손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교장의 안경 너머의 눈에 궁금증이 가득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손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습니다. “손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니?” “여기. 지금은 나이가 많아 그만 두셨지만,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사셨던 꽃동네 식구들이 웃는 모습이 그려져 있잖아요. 이 손에요.” 한 해 동안 선한 청지기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며 달려 오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집의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활용하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로서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청지기로 살아오셨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훗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기도하는 청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청지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세에 경건하게 사는 길
벧전 4장 7~11절 / 정필도목사
오늘 본문 말씀인 베드로전서는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에 전 세계로 흩어지기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타국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 환란과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베드로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타국에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에 이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고 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은 말세,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이날, 세상 사람들은 심판받고 멸망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그날을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모든 고생이 끝나고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당부하면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영광을 얻게 됩니다.
지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이 분명합니다. 세상을 보아도 그렇고, 우리의 죄악이 극에 달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매년 환란과 재난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을 보면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라고 사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분명히 심판이 가까웠으니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그날이 영광의 날, 축복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세에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첫째,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말세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원수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와 싸워 이기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기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8~29절에 보면,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예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면 기도하는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못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룩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거룩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멋대로 살면 죄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고난이 있어도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면서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사는 거룩한 자가 되려면 타락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행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건한 삶이란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경건한 삶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경건을 지키기는 어렵지만, 경건을 잃어버리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경건한 왕이지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지붕에 올라갔다가 벌거벗은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는 순간에 음욕이 들어가서 경건을 잃어버리고 죄를 범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경건하게 살다가도 한순간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경건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경건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사사 삼손도 하나님이 크게 들어서 사용하시는 사람인데, 기생을 가까이하면서 머리가 깎이고 당나귀처럼 맷돌을 돌리다가 죽고 맙니다. 경건을 잃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젊은 교역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이전 성경에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삶은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기도훈련이 필요합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훈련,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건해질 때까지 계속 기도훈련을 해야 합니다. 목사님들도 경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저는 82년도에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공부하느라고 하루에 한 시간 밖에 기도를 못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마음이 메말라서 사막 같고, 설교하고 목회한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이러다가는 목회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못하더라도 기도는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아침에 기도를 최우선으로 삼고 마당에 있는 장난감집에 들어가서 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잃어버린 영력이 회복되고, 은혜가 풍성해지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좋은지, 사막에 생수가 솟고, 사막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런 영적인 풍성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말세에 경건하게 살려면 사랑하고 봉사하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10절에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면서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고, 봉사하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참 경건을 이루려면, 내 형편도 어렵지만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지금도 도움이 필요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들은 일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환란 중에는 살길이 막막하니 더욱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면 안 될 줄 믿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부모 없는 불쌍한 고아를 깔보거나 함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는 하나님께 혼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과부의 재판장이시니 과부를 속이고 빼앗으면 하나님께서 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우리는 그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이런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아주는 것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은혜도 주시고 축복도 주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함께해주실 줄 믿습니다.
황광은 목사님은 6.25전쟁 중에 고아 30명을 데리고 주일에는 창동교회 강단을 지키고 밤에는 인민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찬송가 가사만 돌려 읽었습니다. 어느새 인민군들은 동네의 유지들을 조사하여 사형자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잔인한 공산당들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내무서에서 황 목사님을 불러서 가 보았더니 다짜고짜로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이나 고발했느냐고 물었습니다. 황 목사님은 젊은 혈기로 어디서 그런 고약한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더니 그들이 싸늘한 맛을 보여주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때 그 동네의 인민위원장이 내무서에 들어왔다가 황 목사님을 보고 내무서원에게 “저건 뭣하러 끌고 왔어? 저건 고아밖에 모르는 건데, 어서 내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황 목사님은 그 길로 고아들을 데리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황 목사님은 누구보다도 고아들의 불행한 설움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아들을 돌보고 대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하나님께서 왜 축복하시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은 고아들을 돌보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아들러 박사에게 심한 우울증 환자가 진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박사는 상담도 해주고 약도 처방해 보았지만, 도저히 차도가 없자 혹시 가족과 주변 사람이 문제인가 걱정이 되어서 조사를 해보았지만 가족과 친구들 역시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도우려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치료법을 고민하던 아들러 박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고는 그 환자가 사랑과 관심을 받기만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약은 평소와 똑같이 처방하지만, 앞으로 한 달 동안 시설을 찾아가던지 주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환자는 아들러 박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는 다시는 진료를 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을 돕는 과정에서 우울증이 사라지고 기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우울증이 있는 분들은 말씀 그대로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그 병이 나을 것입니다.
셋째, 말세에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입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 보면 그 작은 혀가 얼마나 위험하고 큰 영향을 주는지 예를 들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작은 혀는 큰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같아서 키 조절을 잘 못하면 암초에 부딪히거나 큰 배가 파선하는 것입니다. 또한 작은 혀는 불씨와 같아서 불씨 하나가 큰 산을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혀를 잘 쓰면 좋은데 잘 못쓰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혀를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그 경건은 헛것이며,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우리의 입도 경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같이 한마디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은 좋은 말을 하면 복이 되지만 좋지 못한 말을 하면 화가 임하고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가 한 파티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을 흉보고 공격하면서 낄낄댔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자, 사람들이 왜 같이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폭에 흰 물감을 칠한 후에 가운데에 까만 점 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까만 점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 눈에는 하얀 것만 보인다고 하면서 너희는 남의 허물만 보고 들춰내느냐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허물이 큰 사람일수록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데에 앞장섭니다.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입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덕이나 산 위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물이 흐르면서 모든 것을 쓸어내려서 언덕 아래에 있는 논밭이나 집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항상 보고 삽니다. 저 집에서 찬송소리가 나는지, 다투는 소리가 나는지 항상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경건하게 살면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세상을 복음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근신하고,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4장 7-11절 / 김영목목사)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자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삶 속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나 소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셈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코너스톤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시라는 약속을 믿고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언제 즈음 다시 오실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천사도, 아들도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약 2천년 이후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은 2천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당장 오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감보다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실 수 있겠다’는 안일한 마음이 은연 중에 깔려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지 불과 약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 밤이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긴장감과 기대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변함없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어떠한 것인지 오늘 본문 속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도를 위하여 근신하라
첫째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한글 성경으로 읽으면 베드로의 권면이 ‘기도하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의 의미에 맞게 다시 해석해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려라. 그리고 기도를 위해 맑은 정신을 유지하여라”가 됩니다. 즉 베드로의 권면은 ‘기도하라’가 아니라 ‘기도하기 위하여’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라’는 말과 ‘근신하라’는 말은 각각 무슨 뜻일까요?
먼저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통제된 마음을 가리킵니다. 즉 주변 상황이나 환경에 요동하지 않는 절제된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 친구들이 죄로 유혹해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로 인해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삶을 통제하는 상태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분별력’과 ‘자제심’을 갖고 있으라는 것이죠.
‘근신하라’는 말은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면 ‘술에 취해 있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는 절대 운전대를 맡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판단이 흐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사람이 어찌 올바르게 행동하고, 하나님께 바른 정신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기억하고, 근신하며 살아갈 것, 즉 ‘술에 취하여 살아가지 말고,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도록 우리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 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욕심, 재물에 대한 탐심, 세상을 살아가는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도에 큰 방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죄가 주는 짧지만 강렬한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의 경우도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죄가 기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근신하라’라는 헬라어에는 1차적으로 ‘술에 취해 있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만, 또한 ‘정신을 맑게 하라’는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7절에서 “기도하기 위하여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기도에 방해받지 않도록 세상의 죄악과 유혹에 빠져 살아가지 말고, 언제나 영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바른 사고를 가지고 절제하며 살아가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혹시 요즘 우리들의 기도가 막혀 있지 않습니까? 꺼져 가는 불씨처럼 기도가 죽어버리진 않았습니까? 기도하려고 해도 자꾸만 딴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내 삶에서 기도는 사라지고 Youtube나 TV시청, 인터넷, 영화, 드라마, 게임, 스마트폰, 주식, 스포츠 활동 등 세상적인 향락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하루에 10분도 채 시간을 따로 때어 놓고 기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만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오락거리와 향락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이런 장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십시오. 한 여인을 무척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달려오는 트럭에 대신 몸을 던질 수도 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날아오는 총알도 대신 맞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 고백에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여인은 자신은 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화해도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를 않습니다. 일 때문에 바쁘면 문자라도 줄 수 있잖아요? “내가 지금 바빠서 미안해. 내가 이따가 일 끝나고 전화 할께!”라는 식의 연락도 한 번 해주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없이 주중에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주말이 되서야 전화가 옵니다. 그리고 딱 3분 전화하고 바로 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남자 정말 이 여자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함께 ‘quality time’(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죠. 사람들은 연애할 때 없는 시간도 쪼개서 만나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지내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사람하고 장거리 연애하는 모습을 혹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시차 때문에 때로는 밤 늦은 시간에, 때로는 남들 다 자는 새벽 이른 시간에도 일어나서 전화합니다. 상대방이 무척 보고 싶거든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말로만 하는 사랑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그 누가 말로만 하는 사랑을 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 소식도 없다가 주말에 짠하고 나타나서 3-5분 전화하고 헤어지는 사람을 보고, 그 누가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면 매일 전화해야죠. 전화 못하면 문자라도 남겨야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반드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바빠도 틈내서 기도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쪼개고 만들어서라도 기도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는 데 시간도 장소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3절을 보니, 로마 병사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몽둥이로 많이 때렸습니다. 심하게 때린 후에 그를 감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의 발에는 차갑고 무거운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밤중이 되자 바울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방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보다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에 있으신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그보다 기도하기 더 좋은 환경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도하기 위해서 술에 취해 살아가듯이, 세상에 취해 살아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링 안에 들어간 권투 선수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기에 임하는 것과 같이 기도하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가 세상의 죄악에 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뒷전으로 보낸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 여러분, 매일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된 사랑함을 삶으로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라
두 번째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8,9,10절에 각각 ‘서로’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라’,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서로’라는 것은 불신자들을 제외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이요 한 형제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디자인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면, “무엇보다도”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표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서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사랑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상호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교회 내에서의 사랑이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실하고 진지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동시에 모든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물론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 구성원 모든 사람에게 피상적인 사랑을 나눠주는 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한 번에 모든 사람을 피상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여 진실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소수의 사람을 택하여 그 사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선택하신 사역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3년 반 동안 공생애 기간 중 그들에게 집중하여 자신이 가진 시간의 70% 이상을 쏟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열 두 명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집중적으로 양육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와 동시에 회중을 대상으로 사역하셨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사마리아 여인, 나인성의 과부, 니고데모, 삭개오와 같이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과 1대1로 만나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열 두명의 제자들에게 집중하시고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데 보내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동시에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삶의 방식은 결코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가 예수를 섬기도록 도와주고, 그가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복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섬깁니다. 그 사람이 영적 홀로서기가 가능한 영적청년으로 자라고,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고 양육할 수 있는 영적 부모로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 후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에게 집중하여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또 다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코너스톤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한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진실하게 사랑하고자 품고 있는 그 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진실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그 한 사람 없이, 피상적으로 모든 교인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하며 신앙생활하고 계신 분들은 교회 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피상적인 관계는 그 누구에도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십시오.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와 함께 진리 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누고 교제하다 보면, 반드시 상대편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몰랐던 단점이 새롭게 보이는 경우도 있고, 기존에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의 단점이 생각보다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진실하게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반드시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상처받는 지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단점이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기 전에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거나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죄가 우리를 아프게 찌르는 가시가 될 때에도, 우리는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8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상대방의 허다한 죄를 덮어줍니다. 여기서 죄를 덮어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죄를 눈 감고 못 본 척 덮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친구가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는 것을 분명히 보고도, 모르쇠로 눈감아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상대방의 죄를 용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바꾸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죄는 분명 죄입니다. 어떻게 죄를 죄가 아니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보고도 방관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잠 27: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고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타협 없이 죄라고 말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치명적인 실수와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자세와 태도가 바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잠언 10:12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을 허물을 그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도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할 때 성도는 그의 삶이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은 그의 삶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완벽한 섭리를 믿습니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코너스톤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또한 주님의 뜻, 주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시죠? 하나님께서 이 교회 공동체에 우리를 보내신 이유는 이곳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 자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를 동시에 피상적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진실로 사랑해야 하는 그 소수의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이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도록 그 사람을 진리 안에서 사랑해주십시오. 비록 그 사람의 허물이 보이고, 단점이 치명적이라 해도, 사랑으로 그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십시오. 그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십시오. 그러한 삶을 통해 예수께서 나와 같이 이기적이고 못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고,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또 깨닫고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세상의 향락과 유혹을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 사람을 진실되이 사랑하십시오. 주일학교 교사 분들은 주일학교 학생 한 명을 택하시고, 그를 진실되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순장분들은 순원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진실되이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어떤 사역에 임하지 않는 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한 사람을 마음 속으로 품고 그를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오. 이를 통해 코너스톤 교회 안에 피상적인 사랑은 그치고, 진실한 사랑이 가득하여 주님께서 보실 때 아름다운 교회, 주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삶
베드로전서 4:7-11 / 배의신목사
들어가는 말
생각하게 하는 우화입니다.
어느 집에서 개를 길렀는데 한 날은 밤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훔쳐 갔습니다. 그런데 개가 도둑이 들어온 것을 보고도 멍청하게 보고만 있고 짖지를 않았습니다. 괘씸하고 어이가 없는 주인이 개를 잡아놓고 야단을 쳤습니다. “야 이 개 삐리리야, 도독이 오면 짖어야 할 것 아니냐. 왜 도둑이 들어와도 짖지 않는 거야? 응? 밥값을 해라 밥값을…” 그러자 듣고 있던 개가 냉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도둑인지 분간이 돼야 말이지요! 주인이 도둑인지 도둑이 주인인지 혼동이 돼서 짖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안 짖기로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 시대가 하도 혼란스러워서 개도 도둑과 주인을 분별할 수가 없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한 번의 생애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 못 살았다고 물건을 사듯이 무르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우화처럼 개도 헛갈리는 헛된 삶이 아니라, 신중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삶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천명한 요리 문답 제1번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며, 답변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계명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22:37-4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즉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인 베드로 서신은 사도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지역 중에서 갈라디아와 아시아는 바울의 선교지역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 의하여 박해와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가 더욱 심해지는 위급한 상황에 빠진 성도들에게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복음의 진리와 종말의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위급한 환경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생활을 통하여 신앙을 나타내도록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12절에서 이 내용을 밝혀줍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격려의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 자신도 이 편지를 쓴 직후에 순교의 제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이 더욱 믿음 안에 굳게 서서 담대해야 함을 실감하게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아마도 이 구절이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런 박해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느슨하게 만드는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이 되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삶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인생 지도를 그리며 삽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 혹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잠언 16: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의 생각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살피시며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2:1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5:10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인생을 책임성 있게 살아야 합니다. 즉 인생의 끝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 설 때, 후회를 남기지 않는 최선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과자 집을 운영하면서 직접 과자를 굽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과자 집에는 과자를 사려고 하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과자 굽는 손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무슨 마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이 가득하고, 온 몸짓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던 사람도 그 과자 집에 들르면 금방 마음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일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율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했으며, “기름칠한 듯한 탱탱한 삶의 모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하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과자를 구우면서 곧잘 “결코 어제와 같은 과자를 굽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으로 살아서, 어제보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과자에 새겨 넣고 싶다’라는 말입니다.
별것도 아닌 과자 굽는 일이 사람들을 밝게 하고, 힘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일 년이면 한두 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기도드리고 싶은 과자가 구워졌어요. 이런 과자를 굽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없어요. 손님에게 팔기에는 너무 귀한, 그래서 하나님께 고이 바쳐서 제사 드리고 싶은 과자예요.”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환경’과 ‘재능’과 ‘부족한 물질’, ‘건강’ 등을 내세웁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생명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것’이 실제로 가장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안다면 결코 이러한 핑계로 허송세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돈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일할 수 있는 건강이 항상 있지도 않고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기회와 시간도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최선과 최상의 삶에 관하여 긴박하게 말씀하십니다. 내용 중에는 ‘기도’와 ‘사랑’과 ‘대접하는 것’과 ‘봉사’, 이 네 가지가 대표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를 포함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긴박하다는 표현은 본문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할 일들입니다.
본문 8-10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언제나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줍니다. 허기지고 잠잘 데 없는 사람을 보거든 집으로 데려다가 따뜻하게 대접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 개역 성경에서는 “열심으로 사랑하라.”라고 번역했고,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뜨겁게 사랑하라.”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에서는 “깊이 사랑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열렬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쉽게 표현해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의 사랑으로 행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더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특별한 능력)를 활용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연결하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며 섬기며 봉사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행한 일들을 주님 앞에서 결산할 때, 자신이 받은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서면 책망과 함께 끔찍한 선고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26-30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하여 내게 주어진 능력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를 생각하게 했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우석대학교 문예 창작 교수이자 작가인 ‘안도현’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제목의 시집이 있습니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입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단 두 문장으로 된 짧은 시이지만,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한 수작입니다. ‘연탄재’로 표현된 것은, 뜨거운 열정을 바쳐 자신을 하얗게 사르고, 재만 남은 희생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즉, 더는 사용 가치가 없어져서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너는 연탄재처럼 다른 사람에게 뜨거운 사랑과 배려를 해 보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연탄처럼 다른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고 배려하고 봉사해보지 않았다면 연탄재를 발로 찰 자격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에 비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따뜻한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내 앞가림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책망과 함께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신 디모데후서 4:2-5절을 봅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직무에서 흔들리지 말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결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일에 충성과 성실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을 눈여겨보시며, 능력과 필요를 채우십니다. 우리도 이러한 최선의 삶으로 이 시대를 능력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때의 영적각성
벧전 4:7-11 / 김종일목사
이 시간에 “마지막 때의 영적각성”이라는 제목입니다. 요즘 우한독감이라든지 더구나 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된 어느 사이비집단이 전국 교회로 흩어져서 예배에 참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 모로 기도할 제목이 많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의사협회는 경고하기를 '이 모든 것은 초기대응의 잘못이라. 위기를 심각으로 격상하고 나라의 문을 통제하라. 통제하지 않으면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 했는데 아직도 마이웨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마지막 때는 더욱 천국이냐 지옥이냐 사느냐 죽느냐 치열한 영적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는 믿음 지키기 참으로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어려울 수도 평안하고 안전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멸망의 구렁으로 끌고 가려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시험의 때입니다. 이런 때를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마지막 때 우리가 각성할 것은 무엇일까요?
1.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 정신을 차리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만큼 정신 차릴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그 수법들이 교묘해서 영분별의 은사가 없이는 다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뛰쳐 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높인 개구리는 죽고 말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세속적 정치적 이념적 깊은 시험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도 하나님의 종들은 '위기가 다가옵니다. 피하시기 바랍니다.' 했지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눅17:26-30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노아시대만큼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대나 음행죄는 있었지만 노아 소돔시대란 음란이 보편화되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말합니다. 유흥산업의 발달 이 정도는 보통이고, 우리나라도 유럽을 닮아가 유치원 초등학교에서까지 동성애와 남녀 성관계를 가르치고 서로가 원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까지 가르쳐서 장려하는 모습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슬람의 확산입니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전 세계를 이민으로 이슬람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수일 때는 한 없이 유순하다가 국민의 5% 10%만 되면 국가를 절단내버리는 악한 집단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이슬람교가 자기 신의 이름을 알라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공산주의 위험입니다. 미국의 폼페오 국무장관이 “은밀한 중국의 위협”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공개했듯이 인구와 돈과 미인계를 이용한 보이지 않는 중국의 검은 손길이 온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인물의 크기에 따라 미인계를 통해 수십억 수백억씩 주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도 이것 때문에 골치꺼리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화의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정부가 미국과 멀어지고 중국과 친하되 중국처럼 토지공개념하자고 부르짖는데 그건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재산국유화입니다. 그리고 총선 끝나고 종교는 중국 삼자교회처럼 설교도 국가가 하지 말라는 설교는 하지 못하게 되고, 언론의 자유도 통제하겠다고 합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잘 분별하시고 국민의 권한을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뿐 아니라 평화만 외치는 거짓선지자들의 활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하나님의 참 종들은 미래를 경고하고 피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고 모여든 이스라엘 청년들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모두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강단에서 아무렇게나 통일만 되면 된다고 평화를 외쳐대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는 사랑 없어 피차 물고 먹다가 멸망하는 일이 많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마24:10-12에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셨습니다.
교회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다투고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려고 합니다. 그렇지않는 교회라면 아주 복되고 귀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을 하되 덮어주는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마지막 때는 공개하고 까발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세요. 어설프게 배워 율법의 눈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랑 없는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습니다. 상처는 상처를 낳고 그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재생산합니다. 세상이 흉악해질수록 누구와도 서운한 관계 만들지 마세요.
625사변 한국전쟁이 비극인 것은 동족 끼리 싸운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이웃 사이에도 싸움을 붙인 원수 갚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도에서는 인민공화국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학습이다 뭐다 불러내가지고 서로 비판하게 하면서 원수를 맺어 서로 앙갚음의 인민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모함하면 그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탈북민들에게 들어보니 지금도 북한학교에서는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소 사랑을 베풀던 사람들은 누가 보증을 서서든지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세상을 사는 지혜요 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입니다.
3. 더욱 지혜로우시기 바랍니다.
9절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원망이 있었습니다. 제자가 더 많아져 헬라 파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빠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일군은 적고 각국에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온 관계로 헬라 파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집사들을 세워 그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게 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성탄절을 맞이하여 지역교회 대표자들이 그 면의 공공기관에 선물을 하기로 결의했는데 그 대상에서 면사무소를 뺐습니다. 다른 기관보다 형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시험 든다. 구제도 아니고 선물인데 빼면 기분 좋겠느냐? 그러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면장이 화가 잔뜩 나가지고 퍼부어 댑니다. 괘씸하게 생각하게 되면 큰 결과를 불러옵니다.
대접을 안 하면 안 해도 원망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소외된 계층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원망의 습관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원망부터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이유가 원망이었습니다. 원망은 불뱀처럼 나타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멸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약5:9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했습니다.
4.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왜 말세에 은사를 강조할까요?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길 능력을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중세기에도 신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시대 그들을 통해서 영혼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하기 전에 하나님께는 무슨 방법이 있든지 있을 것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란 말씀은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와 함께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이고 교회고 마찬가지입니다. 목사하기도 어렵고 장로하기도 어렵고 성도하기도 어렵습니다. 말세가 되면 힘 있는 사람이 다 장악하려고 합니다. 헌법을 위반하면서 실세들이 등장하면 그것이 그 집단의 종말입니다.
5. 그리고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말세의 교훈에 이런 교훈이 주어진 것은 자기가 부각되는 순간 그 인생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써주신 것을 감사해야지 내가 했다거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그것이 그 인생의 끝입니다.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충에 먹혀 죽었습니다. 느브삿네살 왕도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다가 7년을 야수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영광 하나님께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온갖 전쟁과 난리의 소문도 있고 한편으로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세상 돌아가는 줄을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속고 또 속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이 오실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생각하면서 베드로가 교훈한 대로 정신 차려 깨어 기도하고 믿음과 지혜와 사랑과 겸손으로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더 열심히!
김원효목사 / 벧전 4:7-11
저의 경우 고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Sunday Morning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만 겨우 드리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한 후 만 25살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이전의 내 신앙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참! 억울했습니다. 뭐가 억울하나요? 그 동안 예수님은 믿었지만 열심히 믿지 못했습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주님께 거치며 양다리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적당히 술도 마셨습니다. 담배도 피우며 지냈습니다. 세상 오락도 제법 많이 했습니다. 즉 믿기는 믿었지만 날라리 신자였습니다.
아- 그때 좀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그게 깨달아지고, 그게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나태하게 하나님을 믿은 것이 크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 청춘의 황금기를 방황하며 나태하게 보낸 것이 너무 안타깝고 분했습니다.
아- 잃어버린 내 청춘! 어디서 보상을 받을꼬? 그래서 다짐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내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야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청년회에 들어가서 봉사했습니다. 전도부장, 전도실장, 구역장, 조장을 하면서 전도에 힘을 썼습니다. 전도상도 여러 번 탔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중등부 교사도 했습니다. 맡은 학생들이 선생님인 저를 따라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흥이 되어 3개월 마다 새로 반을 나눠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도 가고, 수요예배도 가고, 금요예배도 가고, 금식성회도 가고, 모이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갈 때도 혼자가지 않고 “오늘은 누구를 데리고 갈 사람 없나?” 생각하면서 새로 전도한 사람들 연락해서 될 수 있으면 같이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이전에는 혼자 교회 가는 것도 아주 힘들었고 가까스로 갔었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성령을 받으니까 교회 일에 열심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쫒기는 적의 무리 쫒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즉 나를 하나님 제대로 믿지 못하게 하고, 나를 방탕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하도록 만든 이 원수 마귀 녀석이 너무 미웠습니다. “아-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 그래, 내가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이 원수를 갚는 일이다. 그래,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전도를 하자.”
그래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미치도록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신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주위 분들이 저를 보고 말합니다. “재는 목사님이 될 사람이다.” 맞습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목사님이 되고 싶습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할 수 있고, 평생 주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귀중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전도자로서, 목회자로서 사명을 감당한지 이제 벌써 37년이 흘렀습니다. 만 62세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주의 일을 하면서 목회자가 겪는 고난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들은 나중에 다 영광이요 상급이 될 것이기에 실지는 고난이 아니요 축복입니다.
고로 목회자가 된 것에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대로 목회를 마치면 평생 후회가 되겠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최근 COVID-19으로 인해 2년 동안 교회 예배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전도도 거의 못하게 되었고, 있던 성도님들도 2년간 예배에 빠지다 보니 믿음도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최근 못나오던 성도님들이 서서히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 그 수가 완전히 회복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예 교회하고 담을 쌓은 분들도 있습니다. 예배 안 드리는 습관이 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교회 가기가 너무 힘들고 큰 스트레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분들에게 몇 번 전화를 해보고 연락을 해보지만 여전히 교회 안 나오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가는데, 은퇴는 다가오는데, 천국에 갈 날은 가까워 오는데, 내가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성도님들의 수가 줄어든 상태에서 목사의 직을 마치면 이건 너무나 하나님께 죄송하고 후회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마치면 안 됩니다. 저를 다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결단했습니다. 새벽예배 다시 드리자. 수요예배 다시 드리자. 금요예배 다시 드리자. 그리고 성도님들과 같이 기도하자. 그래서 지난주부터 COVID-19으로 인해 2년간 중단됐던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를 다시 드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COVID-19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전처럼 치사율이 높지 않고 독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정부에서도 모임 제한을 철폐했습니다.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도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로 이제는 중단됐던 예배를 다시 드릴 때입니다. 이제는 골방에서 나와서 다시 광장으로 모일 때입니다.
그 동안 COVID-19 때문에 못 만났던 사람들도 다시 만날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던 분들도 다시 직장 사무실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좀 어색합니다. 그 동안 COVID-19으로 인해 생활패턴이 바뀌다보니 그런 것입니다. 최근 성도님들 중에 한국 방문을 하시려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동안 COVID-19으로 인해 여행제한이 있다가 이것이 풀리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동안 못 뵈었던 고국의 부모님, 가족 식구들 만나야 합니다. 특히 인생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만나 뵙고 인사도 드리고, 살아계실 때 효도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빨 치료도 가능한 빨리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그 동안 못 드렸던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도 다시 드려야 합니다. 그 동안 못했던 기도와 찬양도 다시 해야 합니다. 그 동안 못했던 원주민 선교와 코스타 연합 성회도 다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확진자가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년간 생활패턴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알게 모르게 침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다시 하려고 하니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바로 열심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느니라.”(잠24:16)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로 인해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다가 인생이 마치면 안 됩니다. 인생은 후회하며 살기에 너무나도 짧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일어나는 것이 힘들지만 일단 일어나면 점차 괜찮아집니다. 하나님이 힘을 줍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일어나면 하나님이 감당할 힘을 줍니다. 하나님이 옆에서 “애야, 이제 힘을 내라. 다시 일어나라.”고 격려하며 박수를 쳐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다시 열심을 내십시오. 본문은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7-10)
달리기 선수가 마지막 골인지점을 앞두고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잘 달려왔던 선수가 마지막 골인 순간에 힘이 떨어져서 뒤로 쳐지거나, 넘어져서 아예 못 일어나면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즉 저와 여러분의 골인지점도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젖 먹던 힘까지 낼 때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보십시다. “이제는 젖 먹던 힘까지 내자.” 이때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렸을 때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젖 먹던 힘이 없습니다.” 아- 그러면 어렸을 때 우유 먹던 힘까지 내십시오.
본문은 마지막 때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냥 나태하게, 안이하게, 기도하지 않고 살다가는 마귀의 밥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고로 될 수 있으면 일찍 일어나 정신 차리고 기도하십시오. 예배 시간에 늦지 않게 정신 차리고 일찍 나오십시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미지근하게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십시오.
봉사도 열심히 하십시오. 2등 하려고 하지 말고 1등 하려고 하십시오. 내 힘으로는 부족하니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얻어서 봉사하십시오. 본문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벧전4:11)
중고등학교 때 학생들을 보면 공부할 때 열심히 하고, 교실 청소도 열심히 하고, 체육활동도 열심히 하고, 매사에 범사에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공부도 땡땡이, 청소도 땡땡이, 교내 활동도 땡땡이, 매사에 범사에 땡땡이만 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어휴- 재가 왜 그럴까?” 하고 염려가 됩니다.
여러분, 인생은 나태하게 살기에는 너무나도 짧습니다. 사랑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찬양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열심을 낼 수 없습니다. 에너지가 딸립니다. 능력이 부족합니다. 최근에 습관도 나쁘게 들었습니다.
아- 안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선한 일에, 주의 일에 열심을 내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결론입니다. 열심에 열심을 내봅시다. 다시 일어나 봅시다. 다시 사랑해 봅시다. 다시 충성해봅시다. 그래서 골인지점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주님의 품안에 안깁시다. 그리고 그 주님의 품안에서 큰 위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벧전 4장 7절 / 김양인목사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또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국적과 관련한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또는 “나는 여자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성에 대한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신앙과 관련해서도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또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은 신앙적인 정체성 또는 영적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국권을 일본에게 팔아먹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존속하는 한 역사에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타고난 성에 대한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로 인해 갈등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남자가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손을 낳아 종족을 번식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성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켜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또는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는 응분의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27).
그런가하면,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정체성 또는 영적 정체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흔들림이 없어야 신앙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정체성이 없거나 분명치 않은 신자는 교회생활을 할지라도 소속감이 없이 구경꾼 노릇을 할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나님을 섬기는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가운데 으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신자는 권리와 함께 의무를 집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이르기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이렇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러분, 이제까지 언급한 것처럼 분명한 영적 정체성을 갖고 있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오늘 살펴볼 사도 베드로의 권면은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구히 머물러 살 곳이 아니며 때가 이르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갈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지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이 세상은 시작이 있었듯이 마지막 곧 종말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이 말씀을 한 지 벌써 천구백 년이 넘게 지났으나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알아 둘 점은,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으나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세의 마지막 시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말세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것’은 세상의 종말에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더라도 실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머리가 상한 바 되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나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는 성도들을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경고하기를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고 했습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최후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계 12:12).
더구나 지금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대보다 근 2천 년이나 지난 때로서 종말이 그만큼 가까워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는 마지막 때를 알리는 많은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 하나는 유대인들의 회심입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다시금 유대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으므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근 2천년 동안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메시아닉 쥬’라고 하는데,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메시아닉 쥬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을 보면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아직은 이방인의 때지만 이미 유대인들의 회심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방인의 때가 끝나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대로 유대인들이 범민족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유대민족이 완전히 주님께로 돌아올 것인지 알지 못하나 그 때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민족은 종말의 때를 지시해 주는 시계와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이 가까운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인 것을 명백하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슨 중대사를 앞두고는 정신을 차리고 일이 잘 성사되도록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언제 무슨 방해거리가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지난 달 15일 아침에 길이 10m 쯤 되는 북한 목선 한 척이 삼척 항 부두에 정박한 것을 지나던 시민이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건으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목선에는 북한 사람 넷이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었고, 또 한 사람은 인민복 차림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작업복 차림이었으며, 그들을 이상히 여긴 시민이 다가가 “어디서 왔느냐?” 하니, “북한에서 왔다”고 하였는가 하면 그 중 한 사람은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전화를 하고 싶으니 휴대전화를 빌려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 시민이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고 곧 이어 순찰차가 달려오고 무장 병력을 태운 군 트럭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군의 해상 감시에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레이더 감시병의 근무 태도와 군과 해경의 해안경계에 허점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비무장 목선이 아니고 과거처럼 무장공비를 태운 잠수정이었다면 큰 불상사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경계가 중요하므로 군대에서는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아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전쟁에 나선 군인에 비유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 이르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하였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대적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단에게 속한 악한 세력들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요즘 기독교인이면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의 경우, 토요일 밤늦도록 게임을 하다가 정작 주일에는 늦잠을 자서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저절로 신앙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직장의 산악회에 가입하여 주일마다 산행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산행을 하다가 재미에 푹 빠져서 아예 교회생활을 포기하고 취미활동에 전념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세상 재미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직장일과 사업에 몰두하느라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수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므로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면 결국 믿음을 버리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돈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권면을 무시하고 방심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는데,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서울 강남의 어느 거리에서 만취된 사람들이 휘청거리며 택시를 잡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술을 이기지 못하고 보도에 쓰러져 곯아떨어지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소매치기들이 다가가서 지갑을 빼가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안위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엇에 몰두해 있으십니까? 영적인 잠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신자들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때, 큰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너희는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근신이란, 자제하는 것, 자기의 감정이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분별력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자 하면 신앙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신앙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순식간에 세속화되고 마귀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근신의 중요성을 우리는 운동선수들을 통해 실감나게 알 수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준비하는 선수들은 고된 훈련을 소화하느라 힘들 뿐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없고, 늦게까지 오락을 할 수도 없고,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감독과 코치의 통제에 따라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근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운동선수에 비유하여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고 했습니다. 운동선수들도 승리를 위해 그토록 절제한다면, 성도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근신하는데 어려움을 겪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근신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고 권장합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제품들을 선전하는 광고들을 대합니다. 티비를 통해 뉴스나 드라마를 한편 보려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수십 개의 광고를 대면해야 합니다.
또한 현대는 향락의 시대입니다. 엔터테이먼트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호황입니다. 영화, 노래, 스포츠, 오락, 술을 비롯하여 인간의 기분을 흥분시키고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므로 엔터테이먼트 산업은 갈수록 번창할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은 기독교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쾌락과 안일을 이용해서 성도들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오랫동안 헌신했던 사람인데, 그만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복음사역자의 사명을 버리고 사도 곁을 떠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딤후 4:10). 우리는 데마 뿐 아니라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근신하지 않으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주님을 떠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고통하는 까닭은 핍박이 심하고 궁핍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거기 보면, 말세 사람들의 형편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이 사회를 떠나 외딴 섬에서 살 수 없고 이 같은 악덕에 물든 사람들 속에 섞여서 그들과 거래하면서 살아가야 하므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모든 일에 근신하여 세속화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너희는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반드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번 식사할 때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이 전부인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고, 세속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도하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려면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고 하셨습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제자들은 슬픔으로 인해 잠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고 다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경고를 듣고서도 여전히 잠만 자다가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사들이 밀어닥쳐 예수님을 체포하자 다 주님을 버리고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죽는 데도 함께 갈 것이라고 맹세했던 시몬 베드로조차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께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기력해 지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지 못하므로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강력한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마귀가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로마 가톨릭과 교황을 상대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라는 찬송가를 작사 작곡했는데, 거기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맞습니다. 마귀는 우리 인간보다 강하고 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량으로는 마귀를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므로 얼마든지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하신 후에, 사도들과 한 무리의 성도들이 주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받기 위해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더니, 오순절 날에 그들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그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곧바로 거리로 나가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라고 전했습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하여 병든 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버리고 도주했던 그들이 서슬이 시퍼런 대제사장들과 공회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했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이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지시를 순종하여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우리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 일이 많아도 먼저 기도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응답을 받은 경험이 없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시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고 응답 받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생활 속에 당면한 문제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질병의 치료와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인 것을 명심하시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매일의 삶속에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귀의 시험과 세속의 도전을 물리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강림하실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관리인
안양준목사 / 벧전 4:7-10
1. 공동체로 묶여진 세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면 하나 하나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함께 연합해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살펴보아도 우리의 몸은 하나인 것 같지만 머리와 눈과 코와 입과 손과 팔 등 많은 것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고, 우리의 가정 그리고 학교 나아가 나라까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하나가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여 그 공동체가 무너지고 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 가운데 가장 작은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금방 아픔을 느끼게 되고, 불편을 느끼게 되며, 우리의 가정에서 어느 하나만 아프거나 슬픈일을 당해도 모두가 슬퍼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학교에서 어느 한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면 그 학교 전체에 욕이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공동체의 주인은 그 공동체의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지난번 서해 훼리호 사건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선장이 발견되지 않자 선장이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했다고 전국에 수배를 내리는 난리를 피웠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된 이유는 선장의 잘못이 아니라 그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ꡒ나 하나 쯤이야? 나는 책임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끼어서 가면 그만이지?ꡓ하는 생각을 갖고 탔기 때문에(즉 과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선한 청지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들에게 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라고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며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지기라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관리인이라는 말입니다. 관리인은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남의 것을 맡아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건물에도 관리 아저씨가 있지만 관리인은 자기의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공동체의 책임을 주시고 우리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나아가 이 사회의 관리인으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학교를 지키고 사회를 지키며 교회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책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의 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면 먼저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파도와 같은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사고를 당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인 것입니다. 조금만 나의 몸의 주인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나의 몸을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면 금방 병에 걸리게 되며 조금만 성적을 관리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지고 조금만 한 눈을 팔면 사고를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 선한 관리인은 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리인이 주인의 뜻에 따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해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째로 선한 관리인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두가 함께 책임을 지고 있는 관리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혼자 주인이 아니라 함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함께 배를 타고 하늘 나라로 항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위치와 임무를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째로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기관이 각각 다르고 우리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각각의 임무가 다르듯이 우리들도 우리가 맏은 자리에서 각자가 해야될 일을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나는 선한 관리인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다양한 기관을 하나로 모아 우리의 몸을 만든 것과 같이 우리 교회를 만드시고 학교를 만드시며 나아가 우리 마을과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선한 관리인으로 이러한 모든 곳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바로 교회와 학교와 나아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 관리인이라는 책임을 가지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정이라는 배와 교회라는 배와 학교하는 배 그리고 우리의 마을과 나라라는 배에 우리를 태워주시고 우리들 모두를 그 배의 관리인으로 세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타고 싶지 않은 배에 탔다고 원망할 수 있으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탄 배에서 할 일들을 주셨고 우리들이 탄 배가 하늘나라에 이르게하기 위한 역할을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기가 타고 있는 배를 원망하거나 자기가 관리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맡은 일을 해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파선을 당하고 말것입니다.
4. 하늘나라에 까지 관리하는 선한 관리인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배를 움직이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들을 통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의 배로 변화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우리들을 거룩한 국민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들을 불러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동안 무책임한 사람들로 인해 그리고 스스로 주인이 아니라고 함부로 해서 어지러워진 그리고 우리가 주인 이라고 관리인이라고 깨닫지 못애 생겨난 많은 폭풍우 속에서의 환란을 하나하나 잔잔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나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공부 못하는 친구를 따돌리며 나와 한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보다 옷을 야하게 입는다고 따돌리며,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따돌리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무시하며, 조금 자기와 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환경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사랑하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주님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모두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배가 파선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가운데 선한 관리인이 되어 주님의 나라를 이땅에 이루는 베다니 중등부 친구들의 생활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벧전 4장 10~11절 / 김필곤목사
문학가 쉘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는 글입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놀이터를 제공했고 그 그늘에서 그는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가 자라서 나무 열매를 구합니다. 나무는 그에게 좋은 열매를 줍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가지를 내어 주었습니다.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했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은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그런 분일 수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는 동료가, 구역 식구가, 교회 식구가 그런 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 병든자 죄인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 섬겼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생명까지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 가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도 물어 보고 있을 것입니다.
"내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죄를 사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위 해몸을 주건만 날무엇주느냐 너위해 몸을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185장 1절)"
이제 2002년 둘째 주일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을 위한 봉사, 교회와 성도를 위한 봉사, 가족을 위한 봉사,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 나라와 민족을 위한 봉사의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미약하지만 그동안 사회 교육원을 통해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면 소년 소녀 가장을 도왔습니다. 작년 부터는 각부서 별로 사회봉사를 하고 일만 생명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40여명의 아이들과 장애인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이 일에 동참하여 봉사하는 교회로 쓰임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를 위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은혜을 맡은 청지기로 봉사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봉사하는 삶은 희망이 있습니다. 봉사하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봉사하는 삶은 건강합니다. 봉사하는 삶은 보람이 있습니다. 이 사회가 병들고 가정이 병들고 개인이 병드는 것은 봉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자가 봉사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시끄럽지 않습니다. 가정 식구들이 봉사 정신으로 가정을 섬기면 가정이 늘 행복합니다. 성도들이 봉사 정신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밝아지고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봉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에 기도하라 8절에 열심히 사랑하라 9절에 서로 대접하라"고 말씀하고 마지막으로 봉사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사 부분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1. 비교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으로 봉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은 은혜의 원리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사람이 봉사하면서 늘 비교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은혜 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도 비교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는데도 비교하고 직장에서 일하는데도 비교하고 심지어는 무엇을 입는데 먹는데도 늘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의 봉사란 비교의식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은혜 의식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건강 주시고, 물질 주시고, 기회 주시고, 일할 수 있는 일터 주시고, 섬길 수 있는 교회 주시고,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직분 주시고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봉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이 봉사 정신이 약합니다. 우리 나라도 기독교 정신이 뿌리 내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도 약합니다. 한국자원봉사포럼의 관계자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15% 정도가 자원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원봉사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은 자원봉사조직이 1백40만 개 이상이며 미 국민 의 56%가 이들 단체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고 영국은 국민의 50%가, 캐나다는 45% 이상이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이웃 일본만 해도 약 25%의 국민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받은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봉사할 때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교의식을 가지고 하면 그 봉사는 오히려 자신에게 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일터 주신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직장에서 왜 똑같이 입사했는데 저 사람은 과장되고 나는 계속 대리로 있느냐고 비교하며 봉사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교회에서도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하나하며 비교하면 봉사에 힘이 없고 오히려 시험에 들어 분노와 시기를 마음에 담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에게 금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맨 뒤에 받았으므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주인공을 끝에 나오는 것인데 그래도 첫 번 사람보다 더 많이 주겠지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최고 적게 받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모자라기에, 내가 무엇이 못났기에 저 사람들보다 적게 맡는단 말인가? 악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노가 생겼습니다. 주인을 굳은 사람 불공평한 사람, 불의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배차라고 땅에 파묻어 놓아 버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맡김받았은데 자신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을 받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정도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무익한 종,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종, 쓸데 없는 종, 오히려 피해만 주는 종으로 낙인찍혀 쫓겨나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은혜의 원리를 잃어 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주인이 그 재능을 알고 재능대로 준 것입니다. 한 달란트도 엄청난 것입니다. 1달란트의 가치는 6천 데나리온 가량 되고(마18:24)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품삯이므로 1달란트는 일반 노동자가 거의 20년 동안 일을 하여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아마 자신 홀로만 한 달란트 받았으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료들과 비교하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일을 하든,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를 하든 비교의식으로 일하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비교하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같으면 우월감이 생겨 교만해집니다. 비교하여 자신이 조금 못한 것 같으면 열등감이 생겨 비참해 집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예배드리는데도 비교의식을 가지고 드립니다. 동생 예배는 받고 왜 내 예배는 받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분노를 품습니다. 미워합니다. 결국 살인합니다. 비교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꾸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서로 봉사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제어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결과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불행해 집니다. 봉사란 은혜 의식으로 할 때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봉사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종이 상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미니스트리(ministry)라고(엡4:12)표현하고 있는데 받들어 섬긴다는 뜻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대가없이 하는 수고가 봉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해야 봉사입니다.(시40:8)
내가 무엇을 맡았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봉사는 자존심 문제가 압니다. 평북 정주에 있던 명문 오산학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당시 그 동네에는 아주 똑똑한 청년이 살았습니다.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청년이었습니다.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오히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그는 주인을 위한 최상의 봉사를 했습니다.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아놓곤 했습니다.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마침내 그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됐습니다.이 청년이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이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이었던 사람인데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집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 주고 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현역 국회의원인데고 교회에 나와 차량봉사를 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봉사입니다.
2. 소유의식(주인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청지기는 두가지입니다. 디스펜사토르(분배자)로 이는 주인의 한 가족 전체의 가사 정리를 책임지고 가족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청지기입니다. 또 하나는 빌리쿠스로 주인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주인의 소작인들에 주인을 대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때 청지기는 관리하고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주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란 주인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에 맡게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선한 청지기는 자신의 것처럼 일하지 않고 주인의 뜻에 거역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청지기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올 한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이 맡겨준 것입니다. 건강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지위도, 직분도, 직장도, 사업장도, 자녀도 교회도 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일하여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가질 때 그 때부터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청지기로 부름받은 사울을 보십시오. 그렇게 성령 충만하였고 준수한 용모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효성도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맡겨준 일을 충성스럽게 봉사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생을 비참하게 불안과 공포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세 아들은 전사하고 자신은 자살해야만 했을까요? 무엇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수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수렁의 길로 들어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성경 사무엘상 13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 바위에 숨고 전의를 상실하고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사울이 무엇을 합니까? 13장 9절보니까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렇듯합니다. 사무엘이 약속된 날짜에 오지 않았으니 사무엘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 권한는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제사장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 삼권을 가지고 나라를 흔들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다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권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선이 없습니다. 내 것으로 내가하는데 누가 시비하냐는 것입니다. 맡겨준 자의 의도를 잃어 버리게됩니다.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 후 어떻게 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청지기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 후부터 사울의 인생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느날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치고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 오니 여인들이 거리에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노래합니다. 사울이 청지기 의식을 가졌으면 그것 무난히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가 이겨주지 못한 사람 다윗이 이겨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는 권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성경 삼상 18장 8절 말씀 읽어 보십시오. 오해하는 것입니다.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이 사울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10절 보세요.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이 사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미끄러져 버립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소유의식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실제적인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다 모든 것 놓고 갈 것입니다. 잠깐 맡았다가 관리하다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국적 인종 종교를 초월, 세계 79개국에서 11만5000가구의 주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어준 해비타트 운동을 하는 풀러 총재가 있습니다. 그분은 28세의 나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사람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저택에는 가정부와 비서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최고급 자동차를 비롯, 보트와 자가용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호수를 낀 멋진 별장이 있고 그와 별도로 목장에는 수백 마리의 말과 소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 좋은 아내가 어느날
“당신은 차라리 돈과 결혼하는 편이 나았어요.남을 위해 조금도 봉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이제 갈라설 때가 됐어요”편지를 남기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내에게 다시 시작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 재산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선교사, 시민운동가로 살던 그들이 76년부터 시작한 사업이 해비타트 운동입니다. 그들 부부는 청지기로서 삶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찾았습니다. 몇 년전 조앤 크로크라는 할머니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에 써달라며 8,000만달러를 자선 기부금으로 구세군에 내놓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000억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구세군 133년 역사상 최대규모라 합니다. 그녀는 기부 소감을 "현금 수송차가 영구차를 따르는 것을본 적이 없다"는 남편 레이 크로크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레이 크로크는 52세에 사업을 시작하여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를 세계적인 레스토랑체인으로 키운 기업인입니다. 오늘날 맥도날드 레스토랑은 전세계 111개국의 2만3,000개 체인점에서 연간 330억달러의 매출고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오직 청지기 정신으로 사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교수는 그의 저서 "혁신과 기업가정신"에서 구멍가게를 거대기업으로 일으킨 레이 크로크의 기업경영을 "경영기술"의 극치로 꼽고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도, 지식도, 지혜도, 능력도 우리의 부도 우리의 외모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잠깐 맡았을 뿐입니다. 맡기신 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값진 봉사입니다.
3. 자기 영광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식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으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로 봉사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봉사하려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공급하는 힘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범사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고입니다. 우리의 봉사는 결과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봉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봉사의 결론이 되어야 하며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주인 노릇하는 사람도 싫어하시지만 열심히 봉사해 놓고 스스로 영광을 받는 것도 싫어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봉사는 많이 있습니다. 숨겨진 봉사, 작은 일의 봉사,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지키는 봉사, 듣는 봉사 등 모든 봉사는 공로의식로 해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이 영광을 거두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영광을 다 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진정한 평가는 그 사람이 떠난 후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수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식당에 가서 앉아있는데, 30분을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와서 뭘 드시겠냐고 물어보지를 않습니다. 참다 못한 장로님은 지나가 버리는 한 종업원을 억지로 붙잡고 따졌습니다. "왜 물도 갖다주지도 않고 뭘 드시겠냐고도 물어보지도 않는거요? 서비스가 뭐 이래요?" 종업원이 하는 말, "장로님, 여기는 셀프서비스입니다",
장로님이 다시 받아 칩니다. "그러면 왜 저기 있는 사람들은 셀프서비스가 아니고, 종업원들이 서비스를 직접 하는거요?" "아 저분들 말입니까? 저 분들은 집사님들과 평신도들입니다. 저분들께서는 지상에서 서비스를 항상 남에게 베풀고 남을 잘 섬겼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종업원의 이 말에 장로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어디에 있소? 보이지를 않는데..." 종업원이 말했다. "아 그 목사님요? 지금 막 배달나가셨어요."
주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나는 봉사하면서 조롱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영광스럽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을 위해 봉사하다 이 땅에서 보상 못받는다고 억울해 할 필요없습니다. 저도 목회자로 일하면서 참 상대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 있습니다. 그럴 때 봉사할 마음이 싹 가셔 버립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가슴에 들려 주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너가 하늘 나라에서 받을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그런 모습을 보여 줌으로 그 분을 이해하고 더 목회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한 기회로 받아 들이면 그 봉사도 신이 나는 것입니다.
어제 모 신문을 보니까 중증 장애아 아들처럼 돌보는 인제 상계 백병원 김흥동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나환자를 돌보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의사는 돈버는 직업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대가 없는 사랑"으로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기사중에 저의 마음을 감동케 한 것은 김교수님으로부터 10년째 돌봄을 받고 있는 선천성 근육병을 앓고 있는 21살의 김지태씨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병은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각종 합병증으로 인해 결국 죽음에 이르는 희귀 질환입니다. 수개월 전부터 거의 누워 지낼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김씨는 성탄절 한달 가량 앞두고 밤을 새워 1000마리의 종이 거북이를 접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 없이 돌보아 주는 김 교수에게 성탄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손가락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지기 전에 선생님에게 선물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에 종이 거북이를 접었다고 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어 2주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힘으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선생님에게 선물하기 위해 종이거북을 접었습니다. 이 청년에 비하면 우리는 많은 것이 아직 남아 있고 주어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남아 있는 인생을 보내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