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흡혈귀 야녀
http://cafe.daum.net/suttlebus
(불펌 절대 금지)
집으로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번화가 골목으로 향했다. 판자촌이 보이는 곳을 지나 '하늘 아파트'에 다가갈수록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괴물은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내가 그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저주의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인가!
만화방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죽인 후 피씨방엘 갔다. 피씨방은 사람들로 붐볐고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러한 소란스러움이 내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일곱 시쯤 피씨방을 나왔다. 멀리 아파트가 보였다. 무언가에 지독히 감염된 아파트! 그곳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아 판자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지막한 단층 건물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 그 골목의 풍경이 무척 살갑게 느껴져 한 시간 여를 맴돌았다.
여덟 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너 요즘 시험기간이라면서 왜 이렇게 늦게 다녀?"
누나가 거실에서 연속극을 보며 망고를 먹고 있었다.
"자 이거 먹어. 비싼 거라서 그런지 되게 맛있다."
누나는 접시에 망고 두 개를 담아서 내놓았다. 하지만 비싸고 맛있다는 망고보다 누나의 목에 혐오스럽게 버티고 있는 두 개의 상처에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사실 조용히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정규가 다섯 번이나 나에게 휴대폰을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다시는 그의 전화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천백오 호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미경 누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어젯밤 정혁 때문에 지체되었던 그 몇 분 동안 미경 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고 삼인 나의 답답한 일상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 위해 꾸민 하늘모의 깜짝 쇼라면 얼마나 좋을까.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프라임 영어 사전을 배게 삼아 잠을 잤다. 잠을 잤다기보다는 누워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경찰에 알려야 하나. 아니면 초자연 현상 연구팀인 PSI에 연락을 취해야 하나.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지난번의 그 돼지였다. 이름이, 삼길이였던가.
"수돗가로 좀 나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가 일으킨 작은 경련은 나에게 느끼는 두려움 속에서도 전령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안도의 흥분감 이었다. 대개 전령들은 그런 흥분에 취해서 살아가는 법이다.
수돗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꺽다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무슨 장군의 아들이라도 되는 양 갖은 폼을 다 잡으며 패거리들 틈에 당당히 서 있겠지. 그게 재미있거든 계속 하라고 그러고 싶다. 미안하지만 나는 사양이다. 해골 복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십 분쯤 후 뒷문이 열리며 희선이 교실로 들어섰다. 나는 죽은 듯이 자는 척을 했다. 왠지 시선이 마주치면 이번에는 일 점 오 리터 짜리 박카스를 먹게 할 것 같아서였다.
다시 십 분쯤 지나자 전령이 또 나타났다. 그는 상기된 얼굴이었고 패거리 두 명을 달고 왔다. 달려가서 이틀 전처럼 묵사발을 만들어주고픈 심정이 굴뚝같았다. 내가 프라임 영어 사전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전령과 아이들은 물러났고 나도 자리에 앉았다. 문득 돌아보니 희선이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지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그래, 하는 시늉으로.
수학을 필두로 오늘 분량의 시험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제각기 주어진 분량의 여물을 먹어치우는 소들처럼 우직하게 문제를 풀었다. 언뜻 보니 희선도 열심히 문제를 푸는 중이었다. 나에게 이상한 물 같은 것을 먹게 했지만 사실 공부를 꽤나 하는 아이였다. 척척 문제를 풀어 가는 그녀의 리드미컬한 팔의 움직임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컴퓨터용 사인펜을 움직였다. 오늘은 특별히 형평성의 법칙을 적용해서 일 번과 이 번을 많이 이용해주었다. 하지만 복병처럼 튀어나온 수학의 주관식 세 문제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세 문제 모두 영으로 보답해 주었다.
지루한 네 시간이 지나갔고 나는 쇼생크를 탈출하는 앤디 듀프레인처럼 교실을 나섰다. 날은 무더웠다. 나는 열 걸음도 못 걸어서 배관을 청소하는 사람처럼 땀을 흘렸다. 매점으로 발걸음을 돌려 소이밀크를 마시며 열을 식혔다.
갑자기 등이 무척 아팠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아 척추 부근이 묵직하게 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 날파리처럼 잽싸게 아른거렸다. 날파리의 입에서 염불하는 듯한 욕설이 연방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날아오는 무언가를 팔뚝으로 막아내야 했다. 오른쪽 팔꿈치에 강한 타격이 느껴졌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찌릿함이 전해졌다. 그 충격에 나는 매점의 탁자를 넘어뜨리며 넘어져야 했다. 나는 바닥에 벌러덩 누운 채로 사태를 명확히 파악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상민이 소이밀크를 마시고 있던 나를 공격한 것이었다. 어디서 구해 들었는지 그의 오른 손에는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흡혈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십자가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휘둘러댔다. 그는 계속해서 뭐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흡사 자신이 겉잡을 수 없이 화가 나 있는 상태임을 알아 줬으면 고맙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댔다. 하지만 그 옹색한 변명 같은 오버액션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의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으로 어설픈 연기자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원체 연기 못하는 연기자들은 증오하는 편이라. 그래서 나는 허벅지의 통증을 호소하는 녀석의 얼굴 위로 무차별 의자 공격을 퍼부었다. 쌍코피가 터지고 눈밑이 찢어졌다. 녀석의 얼굴이 피범벅이 됐지만 나는 의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아이들 누구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만약 그때 누군가 나를 말렸다면 나는 그 녀석을 죽여버렸을 테다.
결국 싸움을 뜯어말린 이는 매점 아저씨였다. 매점 아저씨는 팔 힘이 상당했다. 단번에 나를 저만치 밀쳐버렸다. 나는 꼭 쟁기질이라도 하다 온 사람처럼 땀을 비오듯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상민의 패거리들은 갑작스런 불빛에 당혹해하는 바퀴벌레들처럼 쓰러져 있는 상민을 부축해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도 서둘러 그 난장판에서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독한 무더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겨울 외투를 나에게 입혀놓은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속에서부터 무언가 용암 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상민이 이 자식! 내일 만나면 더 패줘야겠어!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과의 일 때문에 내가 남들보다 체감 더위를 더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몹시 분통이 터졌다.
후우-!
심호흡을 크게 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 두드렸다.
골 아픈 사건들이 껌처럼 달라붙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간 용량이 바닥난 컴퓨터처럼 폭주해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유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꼬마 애 한 명을 샌드백 두들기듯 두들길 뻔했다.
현관문을 여니 집은 죽은 자를 덮고 있는 관처럼 고요했다.
누나는 없었다.
찬물에 샤워를 한참동안 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상민에게 맞은 등이 욱신거렸다. 짜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침대 옆 카세트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내가 좋아하는 황비홍 영화 음악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편안한 잠을 청해보았다.
아홉 시에 눈이 떠졌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 떠진 눈이었다. 소변을 보고 누나 방을 확인했다. 언제 돌아왔는지 누나는 자고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자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몹시 처량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깨와 등이 많이 야윈 것도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빼빼로만큼 마른 누나인데 저렇다가 아주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미경 누나처럼.
누나 방의 문을 닫고 현관으로 가서 현관의 관건 상태를 점검했다. 안전 고리도 확실하게 걸었다.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것은 마치, 시체가 든 관속에서 들리는 노크소리 같았다.
문구멍으로 밖을 확인했다.
정규였다.
환풍구 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던 그 정규.
퉁퉁퉁!
이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내렸다. 역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안전 고리를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정규는 검은 셔츠 깃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얘기 좀 하지?"
정규가 말했다. 목소리가 얼음 송곳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셔츠 하나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열쇠로 현관문을 관건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정규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악마의 소굴로 순순히 걸어 들어가는 꼴 같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규가 물었다. 따지는 말투였다.
"그냥- 시험 때문에 피곤했어."
"피곤해? 어차피 공부도 안 하는 놈이 피곤하기는-."
"뭐?"
뭐라고 한 마디 받으려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려."
정규가 명령하듯 소리쳤다. 어쩐지 그의 말투와 표정이 그저께 밤의 정혁과 무척 닮아 있었다.
"들어가."
정규가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내 모습은 꼭 간수의 등에 떠밀려 독방으로 들어가는 죄수였다. 현관으로 들어선 나는 불꺼진 거실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규가 등뒤에서 문을 닫았다. 달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철커덕 하고 안전 고리 채워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 문을 잠그고 그래?"
"입 다물고 안으로 들어가. 이 뻔뻔스런 녀석아!"
별안간 그가 화를 냈다.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그 동안 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던 발병의 실체가 이제 나에게 찾아온 것 같은 공포였다.
잠시 후 정규가 거실의 불을 켰다.
"거기 앉아."
나는 거실 탁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예전 신문이 놓여 있었고 신문 기사에는 '다미 빌라 살인사건'이 실려 있었다.
"커피 마실래?"
나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정규는 냄비에 물을 끓였다. 냄비의 물이 끓는 동안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타는 소리가 났다.
"마셔."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가 내 앞에 대령했다.
"이민혁. 너하고 나하고 안 지가 몇 년이냐?"
정규가 탁자에 마주보고 앉으며 물었다.
"네가 이 아파트에 이사온 해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벌써 햇수로 사 년째다. 사 년! 그런데 네가 나를 못 믿고 그 따위로 배신을 하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배신이라면 배신일까?
"그래도 나는 너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해왔었다. 너나 나나, 사실 남남이지만, 한 아파트에 같이 살게 된 것 자체가 무시 못할 인연이라고 생각해왔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모도 만들고 그런 거 아니냐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서로 알고 지내면서 가족 같은 인연을 만들어가자는 취지였잖아?"
그는 꼭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인연의 중요성'에 대해 피력하는 연사 같았다.
그가 계속 말했다.
"내가 임마,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 너 왜 그날 나보고 도망쳤던 거야? 그날 넌 꼭 무슨 괴물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도망쳤어. 그리고는 내가 전화를 해도 안 받았고.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나는 말없이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너 그날, 미경 누나한테 전화 연락 받았지?"
"네가 그걸 어떻게?"
"놀랄 것 없어 임마. 나한테도 연락이 왔었어."
정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홉 시쯤 전화가 왔더라고. 혜주 누나가 연락이 안 된다면서. 목소리가 잔뜩 겁에 질려있기에 걱정이 돼서 미경 누나 집엘 가봤지.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야. 그냥 가려다가 창문이 열려 있기에 안으로 들어가 봤어. 거실이고 방안이고 샅샅이 찾았지만 어디에도 미경 누나는 없었어. 나한테 전화한지 오 분도 안됐는데 그새 누나가 사라진 거야. 나는 마지막으로 화장실엘 들어가 봤어. 그런데 화장실 천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고. 나는 누나가 무슨 이유 때문에 화장실 환풍구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환풍구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환기통을 조사하고 있었던 거라고. 그리고 얼마 후에 네가 들어왔던 거고."
정규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연기를 내뿜었다.
"환풍구 틈으로 널 발견했을 때 나는 네가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게 무서웠어. 넌 내가 괴물 같았는지 몰라도 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닥에 주저앉아 뒷걸음질치는 네 행동이 오히려 기이했다고."
"그게- 그렇게 된 거였냐?"
정규의 해명을 다 듣고 나자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것은 참 미묘하게도 불안했던 것에 대한 안도와, 그렇게 안도함으로써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새로운 불안감의 충돌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내 전화야."
정규가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예, 사장님."
그는 중요한 전화라도 되는 모양 작은 방으로 가서 통화를 했다.
그리고 나는 정규가 작은방으로 가자마자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삼킨 것 같은 싸늘한 전율을 느꼈다.
정규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육감이 먼저 그렇게 신호를 알렸고 이성이 그 근거를 더듬어 갔다. 분명 미묘하게 잘못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정규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날 밤, 미경 누나의 집에서 미경 누나를 찾다 문득 미경 누나가 화장실 천장의 환기통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장실의 환풍구 속으로 들어가 환기통을 조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경 누나의 집을 방문해서 화장실 문을 열기 직전, 화장실의 불은 꺼져 있었다. 통상적으로 화장실을 조사하기 위해선 불을 켜기 마련이다. 더구나 정규는 화장실의 천장 환풍구로 들어가 환기통을 조사하고자 했다. 그랬다면 분명 화장실 불을 켜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은 꺼져 있었다!
내가 화장실 스위치를 올리고 화장실 문을 열기 전까지, 화장실 스위치는 내려져 있었고 화장실 문은 닫혀 있었다. 말하자면 화장실 안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였고 그 어둠의 환기통 속에 정규는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분명, 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지금…… 가두어 두었으니…… 빨리 이곳으로 오세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작은방에서 흘러나왔다.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정규의 통화 내용이었다.
가두어 두었다니, 누굴?
이곳으로 오라니, 누굴?
내가 작은방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인 것과 정규가 고개를 내밀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미경 누나의 화장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엉덩방아를 찧으며 엉금엉금 뒤로 기어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규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혀가 급격하게 부풀어오른 모양 입안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다 엿들은 거야?"
정규는 탁자 앞으로 다가와 마시다 말았던 자신의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너……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나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 내 모습에 정규는 씩 웃었다. 그 웃음은 현재의 사태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정규는 빈 커피 잔을 개수대에 담갔다. 그가 돌아섰을 때 그의 손에는 시퍼런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뒤로 뻗어 큰방 문을 열었다. 베란다 쪽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규의 검은 셔츠의 깃이 펄럭이며 내려갔다. 그의 왼쪽 목덜미에 두 개의 작은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도망 갈 곳은 없어."
정규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다 알아버렸으니 죽어야 한다는 소리야."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그 자는 대체 누구지……?"
"곧 알게 될 거야."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정규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셨군!"
정규가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너무 절망하지는 마. 어쩌면 너도, 나처럼 연대의식에의 동참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라!"
"무슨…… 뜻이야……?"
"흡수 아니면 제거! 이게 우리들의 방식이거든."
정규는 천천히 걸어가 관건 장치를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 한줄기가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는 유령 같은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문 앞의 유령은-
파란 코트의 마스크 여인이었다.
<계속>
첫댓글 희선의 정체는 뭔지 정말 궁금해요.......
후아~ 숨도 안쉬고 읽어 내려갔네여 다음편 기대기대
정말 넘 잼나여~~ 5편 정말 기대돼요!!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이 압권이네요 기대많이 합죠 ㅎㅎ
오홋~!! =..=//
오옷~ !! 재밋어요~ ㅎㅎ
정말 오랜만에 제이슨 님 글 보니 너무 반갑고 너무 재미있어요- 숨도 안쉬고 단번에 다 읽어버린.ㅎ 역시 스릴 만점.! 최고입니다.ㅎ
하루가 지났는데 다음편이 안 올라와요 ㅠㅠ 다음편 빨리 원츄~ 잘 읽었습니다
답글 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시원한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