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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거부, 제3의 공간 만들기, 탈주. 휴식과 자본주의와 상상력의 깊은 관계를 규명하다! 착취 속에서 살아온 흑인 여성 예술가가 세뇌에서 벗어나, 휴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하려는 시도에서 알게 된 모든 점을 한 권으로 정리했다. 휴식은 탈식민화이다. 거부의 정치다. 문화 전환이다.
휴식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쉬지 않는 탓에 당신은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을 놓치고 있는 걸까? 과연 휴식을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런 삶을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한 우리를 인간다운 삶과 지식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독창적인 치료제이다. 한국어판만의 부록으로 휴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주는 저자와의 Q&A가 실려 있다.
저자 소개
트리샤 허시
낮잠의 주교(Nap Bishop), 시인, 공연 예술가, 신학자, 공동체 조직가.
휴식의 해방적인 힘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삼는 ‘휴식은 저항이다(Rest Is Resistance)’ 운동의 선구자이다. 워크숍, 공연 예술,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휴식을 탐구하는 단체 ‘낮잠사역단(Nap Ministry)’을 창립했다. 연구 분야는 흑인 해방 신학, 흑인여성주의, 몸학, 문화적 트라우마이다.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서 숨 돌릴 틈 없이 노동하고 공부하며 스스로를 혹사하던 도중, 자신이 과로문화에 깊이 세뇌되어 있으며 무자비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2017년부터 집단 낮잠 체험을 열어오면서 항거, 저항, 배상으로서의 휴식, 해방의 도구로서의 휴식을 널리 알려왔고,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의 세뇌에서 벗어나 휴식을 인간의 기본적인 신성한 권리로 바꾸어놓을 때 탈식민화가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스스로 주기적인 안식 기간을 마련하고 공표하고 지킴으로써 휴식의 본보기가 없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뚜렷한 선례를 만들고 있다. 시카고 출신이며 현재 조지아주 남부에 거주한다.
목차
추천의 말
서문
들어가며
1부 쉬자!
2부 꿈꾸자!
3부 저항하자!
4부 상상하자!
감사의 말
낮잠사역단 도서관
참고 문헌
저자와의 Q&A
옮긴이의 말
책 속으로
〈낮잠사역단의 교리〉
1. 휴식은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뒤흔들고 밀쳐내므로 하나의 저항이다.
2. 우리 몸은 해방의 장이다.
3. 낮잠은 상상과 발명과 치유의 관문을 열어준다.
4. 우리는 빼앗긴 꿈의 공간을 되찾기를 원한다. 휴식을 통해 이를 되찾을 것이다.
-29쪽
많은 이가 과로문화는 손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조종하는 괴물이라 믿지만, 현실에서 과로문화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과로문화를 형성한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하는 행동, 기대, 스스로와 서로를 둘러싼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모든 면에서 과로문화의 거짓말을 믿도록 사회화되고 조종당하고 세뇌되어왔다. 자본주의 체제가 번영하려면 생산성과 노동에 관한 우리의 잘못된 믿음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 교훈을 내면화한 우리의 영은 좀비처럼 변하고 몸은 지쳐버렸다. 그래서 고도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양 위장하고 자신과 서로를 다그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쉬어야 한다는 몸의 요구와 서서히 단절하는 과정을 거치고, 기력이 다하도록 일하면 칭찬받는다. 자녀가 우리와 동일한 강도로 노동 문화에 참여하지 않으면 “게으름 부리지 말아라”라고 한다.
-37~38쪽
저항으로서의 휴식과 배상으로서의 휴식이라는 개념을 짧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도 몇 줄로 간단히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휴식이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유와 저항을 생성하는 장소라는 믿음은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나고 자란 문화 속에서 결코 이런 개념을 배운 적이 없다. 잠깐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게으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비친다. 그렇기에 정의(justice)로서의 휴식에 관한 설명은 다층적이고 미묘하다. 나는 휴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간결하고 진실한 방법 하나를 알게 되었다. “휴식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듭니다.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인간다워지는 것. 진정한 자신과 연결되는 것이 우리 휴식 운동의 핵심이다.
-41쪽
아버지는 공동체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헤쳐나갔지만, 이런 열정의 이면에는 과로, 탈진, 건강 소홀이라는 어두움이 존재했다. 심각하게 아픈 와중에도 아버지는 남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실제로 수면 부족 및 스트레스는 만성 질환 발병과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당뇨 병, 비만, 고혈압, 심장 질환, 수면 무호흡증 등 심각한 질병을 얻었다. 내면화된 과로문화가 아버지를 쉰다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으로 이끌었다. 75퍼센트까지 막힌 동맥을 복구하기 위한 세 차례 수술도 당당히 이겨냈건만 당뇨병 때문에 회복 과정이 뒤엉켰고, 돌봄과 경계의 부족, 기대 등에서 오는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62~63쪽
내 컵부터 채워야 다른 사람에게 따라줄 수 있다는 관념은 온당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일상적 주문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적 언어가 배어 있다. “잠은 죽어서 자는 것”, “일어나 움직이라”, “남들이 잘 때 나는 죽도록 일한다”, “돈 안 되는 것은 다 헛소리다”, “깨어나서 뛰어라” 등등. 컵 비유는 또한 가부장제와 성차별로 인해 노동의 부담을 지는 여성을 겨냥할 때가 많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노동자 집단은 소외 계층, 특히 흑인과 라틴계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노동은 백인 여성의 삶을 좀 더 여유롭게 만드는 데 쓰였다. 그래서 소셜미디어상이나 웰니스를 내세우는 집단 속에서 “네 컵부터 채우라”라는 말 을 마주할 때면 나는 휴식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여전히 과로문화의 거짓말로 채워져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컵을 아주 산산조각 낸 다음, 컵을 채우는 일 대신에 실험과 재건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쉬고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를 제안한다. 더는 채우고 싶지 않다. 이제는 분주함을 향한 숭배를 해체할 때다. 한 명씩. 한 마음씩. 한 몸씩.
-72쪽
찰리는 그 공간을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써도 되고 비용도 일절 받지 않겠다고 했다. “실험을 위한 공간이에요. 쓰세요”라면서. 그리하여 신학대에서 거의 4년을 보내고 생활비를 충당할 일자리도 없이 구직 중이던 내가 오직 일회성으로 마련한 이 낮잠사역단의 휴식의 방, 치유 및 교육의 장에 40명이나 되는 참가자가 몰렸다. 나는 지원서를 낸 어느 곳에도 채용되지 못했지만, 행사가 끝난 뒤 온전히 이 사역에 뛰어들었다. 마치 조상들 이 바람을 일으켜 나의 날개를 밀어 올리고 손을 잡아 휴식을 이 세상에 선물로 건네주기라도 한 듯이, 몸 존중하기와 공동체 돌봄과 조상들을 기리는 작업에 전념하려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74쪽
공동체 돌봄의 윤리를 확장하려면 고요할 때와 바쁠 때, 침실에서, 욕실에서, 학교에서, 집 앞에서, 동네에서, 도시에 서, 우리의 머릿속에서 언제나 휴식을 취해야 한다. 휴식이라는 아름다운 개입이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 이 자본주의 세계를 떠날 완벽한 기회나 완벽하게 마련된 행사, 완벽한 순간을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의 휴식이 생성적인 것이 되려면 언제나 반자본주의 의제를 딛고 뛰어올라야 한다. 소셜미디어에 흘러다니는 밈(meme)들, 사람들을 기만하고 영향력을 모으려고 생각 없이 퍼트리는 인터넷 세계의 엉터리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소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플랜테이션에서 비롯한 체제에, 돈과 근사한 매트리스와 개인주의의 매력이 있어야만 생성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다는 핵심적인 믿음에 맞선다. 이런 믿음은 거짓이다. 해방, 자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이해하도록 매일 천천히 벗어나야 한다. 얼마나 버는지, 일하지 않는 시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 휴가를 얼마만큼 쓸 수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80~81쪽
휴식은 이런 모습일 수 있다.
1. 10분간 눈 감고 있기.
2. 침묵 속에서 오래 샤워하기.
3. 10분간 소파에서 명상하기.
4.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기.
5.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따뜻한 차 마시기.
6. 느린 음악에 맞추어 혼자 천천히 춤추기.
7. 소리 목욕이나 소리 치유 등을 경험하기.
8. 태양 경배 자세 연습하기.
9. 20분간 낮잠 자기.
10. 기도하기.
11. 집 안에 둘 작은 제단 만들기.
12. 오랫동안 따끈하게 목욕하기.
13. 정기적으로 소셜미디어 접속 끊기.
14.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에 즉답하지 않기.
15. 음반 전체를 깊이 귀 기울여 듣기.
16. 자연 속에서 명상 산책하기.
17. 뜨개질, 바느질, 퀼팅 하기.
18. 악기 연주하기.
19. 진지하게 눈 마주 보기.
20. 격하게 웃기.
-92~93쪽
두 시간에 걸쳐 휴식의 관문을 드나든 뒤, 다음 행사 예정 시간에 맞추어 공간을 비우기 위해 사람들을 깨워야 했다. 그대로 두면 밤새 잘 수도 있을 듯했다. 휴식 체험 후 ‘낮잠 대화’ 시간을 열자 많은 이가 눈물을 터트렸다. 대면으로든 가상으로든 집단 낮잠 체험을 열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들은 깨어나면서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실감하고 눈물을 쏟았다. 다들 한낮에 낮잠을 자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소진된 상태인지 몰랐다. 이 멈춤의 시간이 커다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난생처음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쉬어보았다는 데 감정이 북받쳐 우는 이도 있었다. 애틀랜타의 어느 공공 도서관에서 집단 낮잠 체험을 열었을 때, 평소 외롭게 지낸다는 한 여성이 다른 이들과 함께 쉬는 이 순간 자신을 안아주고 알아봐주는 느낌이 들었다는 소감을 털어놓았다. 떠나려고 짐을 정리하는 내게 참석자 한 명이 다가와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이런 자리가 더 많아져야 해요. 저에게 필요해요”라며.
-114쪽
우리가 태곳적 휴식의 진실로부터 얼마나 심하게 괴리되었는지 그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2020년 1월에 ‘부활을 위한 휴식 학교(Resurrect Rest School)’를 만들었다. 1960년대의 ‘자유 학교’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깊이 있는 공부와 공동체 돌봄, 자유의 핵심인 교육을 향한 헌신을 지향하는 대안적이고 일시적인 공간. 이런 내용을 염두하면서 ‘휴식은 저항이다’ 개념 틀에 맞춘 특성화된 교육의 필요성을 드높이고자 했다. 집단적 꿈꾸기가 왜 필요한지 깊이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많은 이가 학습의 종착지이자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믿는, 소셜미디어에서 빠르게 소비되는 피상적인 접촉에 대한 반발이다. 여기에서는 형광펜과 볼펜이 놓인 탁자에 둘러앉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상하고, 다 같이 모이는 시간에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도록 자신을 가라앉힌다. 누구나 들여다보고 분석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해방의 교재를 배부한다. 허브 차와 건강에 좋은 간식, 동료의식을 공유하며 항상 집단 낮잠으로 마무리한다.
-123쪽
휴식에 대한 우리의 메시지를 완전히 오독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낮잠사역단 소셜미디어 계정에 나타나는 흐름을 관찰하면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 운동에 담긴 사회 정의와 정치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휴식하기를 백인우월주의와 자본주 의에 맞추어져 있던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무너뜨리는 혼란스러운 과정의 시작이 아니라, 그저 너무 지쳐 다 그만두고 침대에 누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그동안 자신이 지배적인 문화의 폭력적 교훈에 따른 훈련에 얼마만큼 속박당하고 제한당해왔는지 파악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이것은 치유의 사역이다. 정의의 사역이다.
-126~127쪽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자유임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틀에 딱 맞아떨어지는 치유란 없다. 누구에게나 고유의 이야기, 역사, 상호 연결된 정체성이 있다. 휴식에는 세뇌에서 벗어나는 자기만의 여정을 만들어갈 자유의 공간이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두 다인 공간. 과로하고 애쓰고 번아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만성 피로와 수면 부족 상태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영적, 육체적으로 자신을 죽일 필요가 없다. 이 연결의 작업은 회복하기, 기억하기, 재상상하기, 되찾기, 배상, 구원에 관한 것이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는 법을 배우고 트라우마의 반대편을 바라보는 일. 살아 있기에 쉴 자격이 있다고 믿는 일이다. 우리 몸과 영혼은 건강하고, 치유하고, 충분히 쉬고, 삶을 옥죄던 생산성의 구속에서 풀려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 휴식과 돌봄과 여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신성한 거처인 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곳에서 살 자격이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기계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기계가 아니다. 당신은 신성한 인간이다. 우리는 고요한 시간에 휴식과 돌봄에 푹 빠져들 수 있다. 언어의 힘이라는 또 하나의 도구를 저항의 도구 상자에서 불러낼 수 있다.
-127~128쪽
미국 도망노예의 사연은 우리 문화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이다. 이 역사는 내가 휴식과 해방 사이의 점들을 연결하기 시작할 때 저항을 이해하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도망노예는 동산 노예제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 체제의 공포에 대응한 흑인들이었다. 거의 두 세기에 걸쳐 그들은 다시는 붙잡히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북미 해안에 도착한 노예선에서 뛰어내리고, 조직적으로 플랜테이션 농장을 떠나 남부의 동굴과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고, 노예제 바깥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도망자가 아니라 기쁨 과 자유의 임시 공간인 제3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과 서로를 해방했다. 그들은 두 세계에 존재했다. 동산 노예제의 세상에 존재하되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플랜테이션 노동의 폭력적 체제에 에워싸였으면서도 자율성과 주권을 주장했다. 체제를 향해 “아니, 넌 나를 가질 수 없어. 난 네 것이 아니야”라고 선언하고 이를 온몸으로 실현했다.
-137~138쪽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안식 기간을 보내며 가혹한 현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노동도, 요청도, 활동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첫 안식 기간에 내가 안식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로부터 이러한 요구를 무수히 받았다. “안식 기간 중이라는 건 알지만, 한 시간만 팟캐스트 녹음에 참여해줄 수 없을까요?”라고 묻는다든지. “30일 동안 안식 기간을 보내고 계신다는 자동 응답 메일을 읽었는데요, 혹시 30일이 지나기 전에 돌아오신다면 제 일과 관련해서 전화로 의논을 좀 드리고 싶어요”라는 이메일도 계속 받았다. 감정적, 육체적, 영적 노동 착취에서 벗어난 흑인 여성의 상이나 본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납치당해 북미 해안에 도착한 후로 우리의 몸은 끝없는 착취와 폭력과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흑인 여성은 지구상에서 그 누구보다 적은 돈을 받으면서 돌봄 노동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저작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지적 노동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탈취당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는 동시에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 여겨진다.
-168쪽
휴식을 우리 문화에 결합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거기에 다다르기까지는 수천 시간에 걸친 상상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더 많은 휴식으로 이르는 쉽고 빠른 길을 알려 달라는 질문을 잔뜩 받아왔다. 평생토록 사회화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일목요연한 할 일 목록을 내가 줄줄 읊어주기를 기다리듯이 다급한 어조로 답을 요구한다. 하지만 마술과 같은 해법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해방감과 희망이 찾아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불안으로 가득 차 빠르게 달려가는 존재 방식에 대한 대항 서사이다. 수천 가지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여 치유로 나아가자는 권유는 혁명적이다. 혁명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은 길고 느리며 나는 바로 그 점에 감사한다.
-171쪽
낮잠사역단은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이상에 헌신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상상하고 희망을 품을 공간을 만들어내기에 혁명적이다. 상상과 희망은 해방의 열쇠이다. 휴식을 통로로 활용해 상상력을 키우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지배적인 체제를 막아서는 데 쓸 만한 내면의 모든 도구를 조사하고 실험하고자 멈출 때 문이 열린다. 우리는 귀 기울이기 위해 멈추고 천천히 탐구할 공간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휴식 수행은 평생에 걸친 호기심의 여정이 될 것이다.
-173쪽
나: 그동안 SF 소설 작가들은 왜 흑인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그렸다고 생각해요?
소년: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틀렸어요. 우리가 미래예요.
나는 그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가 미래예요.”
휴식은 충분히 쉬는 미래의 문을 연다. 미래는 지금이다. 매일 우리 몸과 연결하고 공간을 되찾고 집단적으로 상상하는 운동 속에서. 미래는 휴식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휴식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 매일 낮잠을 잘 가능성을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상상력이 제한되어 있다. 완전한 반자본주의 세계로 갈 수는 없을지라도 상상력은 우리의 저항이다. 상상력은 하나의 돌봄이다.
-178쪽
이것이 신성한 공동체이다. 해방의 핵심인 상호 연결성이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균열 위에 서서 흔들림 없이 지지하고 증언하기로 결심한다면 억압을 없앨 수 있다. 이 진실에 담긴 미덕은, 이런 일이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형태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졸업식장과 결혼식장에서, 교실과 법정에서, 시위 대열과 엘리베이터에서, 전장에서, 갱단의 구역에서, 출산 중에, 심지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밀접히 묶여 있다. 서로를 통해 신성과 휴식을 발견할 수 있다.
-187쪽
저항으로서의 상상이라는 개념은 지배적인 서사에 대한 대항 서사이다. 항의와 저항은 한쪽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중요하고 세밀한 부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아니요, 그것이 다가 아니에요. 제 관점은 다릅니다. 저는 제 입장에서 말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으라는 말을 듣고도 사는 것이다. 매일 고통과 억압에 휩싸여도 기쁨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취약한 상태에 처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릴지라도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문화 전체가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해도 낮잠을 자는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왔어도 잠자는 것이다. 하루, 일주일, 일 초를 안식 기간으로 지키는 것이다
출판사 서평
★★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 《타임》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 사이의 점들을 연결하는 책”
★★ 《북페이지》 “절묘하게 아름답다… 펜을 쥐고 노트를 펼쳐둔 채 읽고 또 읽을 책”
● 거부, 제3의 공간 만들기, 탈주
저항으로서의 휴식에 관한 명상, 낮잠사역
“휴식은 항거이자 저항이자 배상이다.”
2017년 어느 일요일, 애틀랜타의 조그만 임대 공간에서 ‘집단 낮잠 체험’이라는 독특한 행사가 열렸다. 말 그대로 조용하고 안전한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낮잠을 자는 행사였다. 이 행사를 홀로 주최한 트리샤 허시는 당시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 오래전부터 대학원을 통해 학계의 과로문화를, 불안정 저임금 노동을 통해 일터의 과로문화에 시달려왔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트리샤는 소진된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의식적인’ 휴식 수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 일련의 휴식 수행으로 인해 그는 자본주의와 과로문화에 우리 모두가 얼마나 깊이 세뇌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돈도 직장도 없었지만 무작정 ‘집단 낮잠 체험’ 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40명이나 참가해 기꺼이 바닥에 몸을 누이는 것이 아닌가. 트리샤는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얼마나 지쳤는지 깨닫고, 몸과 깊숙이 연결되고, 삶의 속도를 줄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후 수많은 기관, 단체, 개인에게서 ‘집단 낮잠 체험’을 열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트리샤는 비영리 단체 ‘낮잠사역단’을 세우고 ‘낮잠의 주교(Nap Bishop)’로서 미국 전역에서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을 이끌었다. ‘집단 낮잠 체험’은 요가스튜디오, 공원, 극장, 서점, 체육관, 미술관, 주택, 공유작업실 등에서 지역사회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로 멋지게 확장되었다. 지치고 소진된 많은 이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으며, 《뉴욕 타임스》, 《NPR》, 《포브스》, 《오프라 데일리》, 《보그》 등과 같은 수많은 매체로부터 조명을 받았다.
트리샤는 우리 모두가 하루에 한 시간, 10분, 혹은 1초 만이라도 ‘의식적으로’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휴식이야말로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쉬면 집세는 어떻게 내요? 어떻게 먹고살아요? 당신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에요!”
사실 이런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자본주의와 과로문화에 깊게 세뇌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오직 생산성만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도록, 모든 일이 지금 당장 완료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현실을 믿도록 사회화되었다. “잠은 죽어서 자는 것이다”, “가만히 쉬고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같은 말이 미디어와 일상 대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횡행한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자본주의가 날로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는 작금, 인류가 다른 삶의 방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휴식을 통해서라면 가능하다. 휴식은 탈식민화이기 때문이다. 거부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휴식이 당연한 권리인 세상을 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문화 전환을 이룰 수 있다. 트리샤의 말대로 “쉰다는 것은 더 많이 움직이라는 과로문화의 요구에 대한 창조적 대응이다.”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불안으로 가득 차 빠르게 달려가는 존재 방식에 대한 대항 서사이다. 휴식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임을 믿는다면, 진정한 인간이 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의식적으로’ 쉬어야 한다. 천천히, 느리게, 세뇌에서 풀려나야 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한낮에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이 자기를 낮잠의 주교라고 소개하면서 베개와 담요를 내어주는 곳에서 낮잠을 잘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 행사가 효과를 내고 미국과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낮잠사역단’은 어디까지나 지쳤으면서도 호기심 많은 어느 흑인 여성 예술가의 개인적인 실험이었다.”_본문에서
●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해내는 법.
마룬(도망노예)들처럼
이 세계에 존재하되 속하지는 않기.
낮잠사역단과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은 흑인여성주의, 흑인해방신학, 아프리카미래주의(아프로퓨쳐리즘), 몸학 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트리샤는 끔찍한 노예제 시대에 백인들에 의해 강제노동하며 살아간 조상들에게서 휴식의 힘과 메시지를 발견했다. 상상력을 발휘해 북부로 달아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탈주를 모색했던 사람들. 플랜테이션 농장에 존재하나 그곳에 속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 농장 바깥에 은신처를 만들어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꾸려갔던 사람들. 그들의 역사는 백인의 말과 달리 억압과 박해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저항하고, 서로를 돌보고, 길이 없는 곳에서도 상상력을 나침반 삼아 새로운 경로를 찾아낸 이들로 가득했다. 트리샤가 설명하는 이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역사는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트리샤는 우리도 마룬처럼 쉬고 꿈꾸고 상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되 속하지는 말아야 한다. 거부하고, 제3의 공간을 만들고, 탈주해야 한다. 트리샤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비현실적인’ 인간이라는 데 감사한다고. 백인들의 노예제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조상들에게서 상상력을 물려받았다는 점에 감사한다고.
우리 역시 과로문화의 노예가 아니다. 지금 당장 휴식을 취하는 이 행위가 무자비한 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들고 헤집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나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들을 빼앗길 수 없다고 저항해야 한다. 해방의 미래가 지금 바로 여기에 와 있다고 믿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맹렬히 기세를 떨치는 지금, 우리는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면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선택하고 대안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어디서나 휴식의 순간을 누리고 배치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육체적으로는 여전히 과로문화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영적으로는 그 기만을 끊어내야 한다. 상상력의 힘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꾼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의 성공으로 증명되었다.
● 어차피 누구도 당신에게 쉬라고
말해주지 않을 것이기에…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쉰다. 기다리지 않는다.
지금 휴식하고 저항한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죽기 전에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데다 고쳐 쓸 수도 없으니, 우리가 할 일은 상상하지도 못할 것 같던 방식으로 자기 몸과 시간을 되찾는 것이다. 우리는 상상해야 한다. 지금 휴식하고 저항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과 돌봄의 순간을 누리게 해줄 능력자를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기다리려 하다가는 매일의 고역에 영원히 붙들릴 것이다. 지금 저항한다는 것은 휴식을 재상상해낸 삶의 방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_본문에서
그렇다면 휴식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수면을 취하는 것만이 휴식일까? 이 책은 다양한 활동을 휴식으로 여긴다. 차 마시기, 명상하기, 춤추기, 멍 때리기 등 각양각색이다. 각자 고유의 이야기, 정체성, 역사를 가졌기에 누구에게나 딱 들어맞는 휴식이란 없다. 하지만 만약 휴식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면, 이 책에 실린 휴식에 관한 목록들과 팁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로 낮잠사역단 팔로워들의 휴식 방법 중에는 ‘음반 전체를 깊이 귀 기울여 듣기’, ‘뜨개질하기’, ‘진지하게 눈 마주 보기’, ‘격하게 웃기’ 등과 같은 참신한 항목이 많다. 이 목록들을 훑다 보면 자신만의 휴식 수행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을지 영감을 얻게 된다.
트리샤는 이제 정부나 기관이 휴식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여기에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의 가장 큰 차별점이 있다. 낮잠사역단은 체제가 어찌하든, 뭐라 하든 상관없이 휴식을 취한다. 기다리지 않는다.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어차피 누구도 우리에게 쉬라고 얘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잠을 자야 한다. 하루, 일주일, 일 초를 안식 기간으로 지켜야 한다. 취약한 상태에 처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릴지라도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휴식은 저항이다’ 운동은 별난, 영외(outlier) 운동이다.
『휴식은 저항이다』는 착취와 인종차별 폭력 속에서 살아온 흑인 여성 예술가가 세뇌에서 벗어나, 휴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구하려는 시도에서 알게 된 모든 점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의 서술은 독특하다. 내내 우리를 세뇌하듯이 “휴식은 저항이다”라고 속삭인다. 마치 자본주의의 세뇌를 세뇌로 깨트리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자신과 주위 사람에게 휴식은 나의 저항이라고 거듭 말하자. 반복은 세뇌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독자에게 주문을 거는 듯한 시적인 서술, 가슴 아프고 뭉클한 개인적인 에피소드들, 자신을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 휴식에 대한 실용적인 팁 등이 함께 어우러져 독특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책 『휴식은 저항이다』는 무자비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이런 삶을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한 우리를 인간다운 삶과 지식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독창적인 치료제이다. 당신은 휴식을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쉬지 않는 탓에 어떤 기적 같은 순간을 놓치고 있는 걸까? 한국어판만의 부록으로 휴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주는 저자와의 Q&A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