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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소화4년) 발행 동래군 지도
부산부, 서면 동래면 남면 기장면 북면 철마면 일광면 정관면 장안면 구포면 사상면 사하면
오늘날 우리가 ‘부산(釜山)’이라고 부르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생겨났다.
원래 부산은 15세기까지 동래현에 부속되었던 동평현의 한 지역인 좌천동(佐川洞)에 위치해 있던 ‘부산(富山)’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증산(甑山)이라 부른다. 그 산 아래에는 고려시대에 ‘부산부곡(富山部曲)’이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이 지역을 부산포(富山浦: 뒤에 釜山浦)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의 도청 소재지는 당초 상주(尙州)에 있었으나 1466년(세조12)에 대구(大邱)로 옮겨졌다. 1519년(중종14)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경상도를 경상좌도(慶尙左道, 낙동강 동편), 경상우도(慶尙右道, 낙동강 서편)로 분리하고 좌도의 치소(治所)를 대구, 우도의 치소(治所)을 진주에 두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무렵 좌·우 도(道)를 통합하고 대구에 감영(監營)을 두었다.
1897년(광무1)에 전국을 13(道)로 개편하게 됨에 따라, 경상 남·북도로 분리하여 북도의 도청을 대구에, 남도의 도청을 진주에 두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진주에 있던 도청 소재지를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1963년1월1일 부산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이 경상남도로부터 완전 분리되었다.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부산(釜山)’이란 이름이 등장한 것은 1868년 편찬된『동래부사례(東萊府事例)』에서 나타난 대로 동평면에서 부산면이 분리되어 나온 그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부산이라는 행정 명칭이 널리 쓰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10월에 동래부(東萊府) 전역이 부산부(釜山府)로 개칭되고, 1914년에 부산부제(釜山府制)가 공식적으로 실시되면서부터다.
1678년 초량왜관 설치
1916년 용두산공원 조성
부산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중앙동 등 이른바 원도심 일원은 부산을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킨 장소였다.
1678년 용두산 주변인 현재의 남포동, 광복동, 동광동, 신창동, 대청동 등 35만㎡에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이 일대는 다양한 문물교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1607년 동구 수정동 일원에 세워진 두모진왜관을 확장 이전한 것이다.
초량왜관 시대가 열리면서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예전 200여명 수준에서 5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왜관은 일본상인들이 중국 상품을 구입해 가는 중계무역 기지인 동시에 조선과 일본간의 국제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특구였다. 이곳을 통해 양 국가는 외교, 경제, 문화, 풍속 등에 걸친 다양한 교류를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은 본격적인 개항장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부산항일본인거류지계조약’이 체결되면서 기존의 초량왜관은 일본인 외교관들이 머무르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로 개방됐다. 비록 압제와 침탈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되기는 했으나 광복동 일원이 본격적인 근대문물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도 됐다.
개항이후 유입되는 일본인들이 급증하면서 지금은 복개된 광복로의 실개천 주변으로 주택도 크게 늘어났다. 이후 각종 공공기관과 업무, 상업시설은 물론 항만과 철도 등 각종 산업시설들이 모두 이곳을 중심으로 들어섰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1910년 8월29일 이후 이 일대에 대한 일본의 개발야욕은 더욱 본격화됐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6월 사이에 용두산공원을 조성, 현재 부산타워가 있는 곳에 신사를 세워 부산시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시절 광복동은 일본인들의 상업중심지로 자리매김 했다. 식당, 극장, 백화점, 은행 등 근대식 업종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당시 장수통 또는 변천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사람들은 남부민동과 아미동 등 고지대에 살고, 일본사람들은 자갈치 시장 인근 평지에서 생활하는 등 주거 차별도 심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주권을 회복했다는 의미에서 이 일대는 비로소 ‘광복동’으로 이름 지어지고 광복로도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광복동 일원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설치되는 등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때 경남도청으로 사용된 건물,
한국 전쟁시(1950년 8월~10월, 1951년) 임시정부청사로 사용,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사가고 2001년까지 부산지방 검찰청사로 사용.
검찰청이 거제리로 이사가면서 동아 대학교에서 인수했다는데...
1876년 부산항 개항
1883.11.3 부산세관 개청
(부산세관)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피난민촌 중에서도 소위 공동묘지 마을로 불리는 곳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역이다. 당시 피난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자의 공간까지 비집고 들어가야만 했다.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은 농막마을(현재 문현동 안동네) 뒷산 공동묘지에 형성됐다. 문현초등학교 뒤편 골짜기에 있던 농막마을은 옛날 막노동꾼이나 가난한 농부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곳. 일제강점기 말기 30채 가량의 이 마을은 전쟁직후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공동묘지 주변으로도 판잣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무덤 옆 공터에 조심스럽게 집을 지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무덤을 절개하여 반만 남겨둔 채 집을 짓는가 하면 담 안에 무덤을 그대로 두고 집을 지어 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8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있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서구 아미동 묘지마을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다. 뒤늦게 부산으로 피난을 와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이곳 공동묘지로 흘러들었다.
다른 피난민 정착지역과 달리 아미동 무덤 일대는 땅이 평평해 외려 집을 짓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일본인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대로 집벽으로 활용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 시절,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데 유용한 건축자재였다.
“당시에는 눈 앞의 생존을 위해선 무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납골함 위에 놓여 있던 비석과 상석, 받침돌 등 커다란 돌덩이들을 옮길 수도 없어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산 자는 물론, 죽은 자에게도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었다.
당감동 화장장 앞 정화 작업 장면. 빨강색 원이 화장장 굴뚝이다
1957.12.10. 개장 (화장로 7기에 하루 최대 56구 처리)
1987.11.30. 당감동 화장장 폐쇄.
화장장 자리에는 지금의 롯데백화점 부산점 자리에 있던 부산상고(현 개성고)가 1989.4월 이전했다.
당감동에 화장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구 아미동에 화장장이 있었다. 1929년 아미동 2가에 신설됐다.
일제강점기인 그때도 지역 주민의 반대 운동이 거셌다. 부산 전역에 흩어져 있던 화장장을 아미동으로 이전한 뒤 아미동에는 장례행렬이 줄을 잇고, 유족들의 곡성과 시체 타는 악취가 온 마을을 진동했더랬다. 화장장의 연기가 아미골을 뒤덮었고, 제물로 차려진 음식은 까치를 불러 모았다. 화장장 부근의 까치고개란 이름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 1934 중앙동
▲ 1952 중앙동
▲1950 대청동
▲ 1953. 1. 국제시장 화재
▲ 1960 구덕운동장 (제1대 참의원 선거)
꽃동네.
부산 서구 서대신동 ‘꽃동네’는 60년전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기구한 애환을 간직한 곳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포화를 피해 전국에서 200만명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터는 턱없이 부족했다. 피난민들은 등을 뉠 수 있는 한뼘의 땅이라도 있다면 도로변과 산비탈, 공동묘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구덕령(九德嶺) 정상에 위치한 꽃마을까지 피난민 발길이 닿은것도 이러한 연유였다. 당시 꽃마을에서 부산 전차종점이 있던 구덕운동장까지는 차편이 없어 30분 이상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해방 직후까지 꽃마을은 초가집 60여채가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100여세대의 피난민들이 정착해 원주민 수를 넘어섰고, 마을의 규모도 커갔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구덕령. 꽃마을 사람들은 피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방 2칸중 1칸을, 3칸인 집은 2칸을 내줘가며 이들은 보듬었다. 집집마다 원주민과 피난민의 애틋한 동거생활이 펼쳐졌다.
“당시 꽃마을 일대는 국유지가 대부분인데다 감시가 심해 다른 지역처럼 움막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었다.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내칠 수 없어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을 내줬다”
고난의 피난생활이었지만 꽃마을 피난민들은 그나마 여유로운 편이었다. 시내 다방과 상가 등지에 꽃을 내다 팔며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이 유입돼 부산인구가 늘어났고, 이는 꽃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다방과 상점 등 꽃을 찾는 가게가 늘어났고, 서울 등지에서 온 부유층도 주요 고객이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꽃을 내다 파는 사람들은 꽃마을의 젊은 아낙들이 유일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인근 엄광산과 구덕산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를 꺾어다 일본인들에게 판매했던 경험이 밑바탕이었다. 특히 다방, 상점, 가정집 등 꽃을 찾는 단골 위주의 방문판매라 큰 품을 안팔아도 됐다.
이들은 마을에서 꽃을 재배해서 팔거나, 판매할 꽃을 김해와 마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떼어오기도 했다. 새벽이면 대야 한가득 머리에 꽃을 이고 줄을 지어 고갯길을 내려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당시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장관이었다. 비닐하우스가 없던 시절이라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카네이션과 다알리아, 가을에는 국화가 인기였다.
꽃마을은 60년대 중반 또 한번의 전쟁을 겪으며 재차 꽃을 피웠다. 베트남전에한국군을 파병하면서 꽃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베트남으로 떠나거나 돌아오는 국군장병들 목에는 어김없이 ‘꽃마을표 꽃다발’이 하나씩 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인 꽃, 꽃을 상징하는 꽃마을의 번성과 참혹한 전쟁의 역사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꽃마을에는 1981년 구청에서 건설한 2천여평 규모의 양묘장이남아있다. 여기서 생산된 꽃들은 지역 내 길거리나 화단 등 조경용으로만 사용된다. 몇몇은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과 펑화시장에서 꽃도매상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9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면서 꽃마을 아낙네들 중 일부는 음식점을 열어 이들을 맞고 있다.
▲ 공동수도
▲ 급수차
▲광복동
▲광복동
▲ 국제시장
▲구덕운동장 앞길
▲舊 부산역 (現 중앙동 외환은행)
▲부민동
▲1953. 11. 부산역 대화재
▲보수천
▲ 1961 부산터널
▲ 1963 서면로터리
▲ 1966 대연동
▲ 1968 보수천
▲1969 장림동
▲1969 동천(전포동)
▲1970 구포
▲ 1960 중앙동 (산 위에 남성여고)
▲1970 중앙동 (상공회의소)
▲1973 해운대 (극동호텔)
▼. 영도다리
934. 11.준공
전체길이 214m (시내쪽 도계교 跳開橋 31m)
처음에는 하루 여섯번 들다가, 이후 2회(10:00, 16:00) 들었고, 배가 지나 다녔다.
당시 부산인구 16만명
하루에 두 번 들었고. (10:00, 16:00)
1966년 9월 이후 들지 않았다.
영도에 수돗물이 공급되면서, 상수도관이 다리에 묶이게 된 때문.
영도 (봉래산)
▲ 1965 영도
▲ 초량동 1975
남포동
▲ 송도 출렁다리
▲ 송도 해수욕장 (다이빙대와 케이블카)
▲ 영선고개
영주동 부산터널 입구에서 코모도호텔∼메리놀병원∼카톨릭센터∼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는 고갯길로 '유엔고개'라고도 한다. 이 고갯길은 6.25전쟁 때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포장함으로써 '유엔도로' 또는 '유엔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래의 영선고개는 유엔도로 동쪽 아래 있는 언덕 바로 윗길(영주동 시장 남쪽입구∼부원아파트 뒤∼논치시장∼대청로로 이어지는 길)이 통하고 있는 고개로 영선산(瀛仙山)의 착평공사(鑿平工事, 1909∼1912년) 때 헐려 없어진 영선산(營繕山) 등성이로 가로지르고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선산은 대낮에도 혼자서는 좀처럼 나다닐 수 없는 소름끼치고 으스스한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무렵 초량왜관 담장을 넘어 함부로 다녔다가 우리나라 번병(番兵)에게 들킨 사람이 참수형을 당했던 곳이 바로 영선산 숲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영선고개' 오솔길을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초량객사와 임소(任所, 초량왜관 사무를 맡아 오던 우리측 관원들이 지켜있던 관청)가 있던 영주동에서 초량왜관(현 용두산 부근)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 바로 이 고갯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 장전동
▲ 임시승합차 -
▲ 자갈치
▲ 3부두 (맹호부대 월남파병 1966)
서면로터리
서면로터리와 부산탑
부산 서면의 중심에 원형의 ‘서면로터리’가 조성된 시기는 1957년, ‘부산탑’은 1963년에 세워졌다. 부산시가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2년 12월 1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이날 기념식에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 재부 기관장 그리고 부산 상공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했다.
또한 부산상공회의소는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는 부산탑 건립 공사를 추진하였는데 예산 250만원(부산시 100만원, 부산상공회의소 150만원)으로 1962년 12월 25일에 기공식을 가진 뒤 1년간의 공정을 거쳐 1963년 12월 14일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써 부산의 명물, 부산탑이 탄생을 보았다.
탑의 전체 높이는 23m, 상부에는 오륙도(五六島)를, 중앙에는 자유의 횃불을 든 4.2m 높이 남녀 동상을 안치하여 부산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였고 가로 61㎝, 세로 91㎝, 두께 14.2㎝ 크기의 기념비도 세웠다.
기념비에는“이 탑은 넓은 바다와 맑은 하늘의 복과 덕을 입어 자유와 평화에의 굳은 신념으로 새로이 출발한 직할시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것이다.”라는 취지문과 탑 건립에 참여한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인 姜錫鎭과 具仁會, 金智泰, 朴敬奎, 朴正寬, 申景浩, 申德均, 申世均, 愼重達, 梁泰振, 王相殷, 李秉喆, 李英震, 張洪植, 鄭翼鈺, 鄭泰星
外 釜山商議議員一同이라는 명단을 새겼다.
서면로터리는 중앙로, 가야로, 새싹길, 동성로를 연결하는 부산 교통의 중심은 물론 상업·금융·유통·문화·정보 등이 교차하는 소통의 로터리였다. 찻길은 늘 차량의 홍수를 이루었는데, 솜씨가 서툰 신출내기 운전자는 로터리를 빠져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바퀴나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도시가 발전하고 교통량이 폭증하자 부산에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산탑은 1981년 7월 부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로터리는 신호등이 달린 교차로로 바뀌었다.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상은 부산박물관 뜰에 보관되어 있으며 기념비는 종적이 묘연하다. 2009년 3월, 부산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한가운데로 전차가 지나 다녔다
부산시청
상공회의소
▲ 중앙동 전찻길
* 출 처 : 조은산님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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