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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일
벧전 4:12-19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벧전 4:12-19 /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시련이 여러분 앞에 옮겨 붙더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치는 시련은 결코 이상한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닙니다. 13) 오히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이니 진정으로 기뻐하십시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 여러분은 그 영광을 함께 받고 한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때문에 저주와 모욕을 당하거든 행복해하십시오. ㄱ) 하나님의 영이 큰 영광으로 여러분을 감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ㄱ. 70인역 사11:2) 15)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말썽을 일으키거나 남의 일에 쓸데없는 간섭을 해서 벌을 받는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6)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통받는다면 그것은 조금도 수치스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한 식구가 되어 그리스도의 그 빛나는 이름으로 불리는 특권을 받았다는 증거이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십시오. 17) 이미 심판의 때가 왔습니다. 그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까지도 심판을 받는다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18) 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도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ㄴ. 70인역 잠 11:31)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모른 체 그냥 내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종말의 때일수록 성도들에게 더 큰 고난이 찾아오지만, 고난을 기뻐할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불 시험(12-13) 불 시험은 로마화재사건을 시작으로 약 200여 년 동안이나 이어왔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당한 박해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박해를 예상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는 자신이 받는 박해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 불같은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연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불 시험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이중성(14-16) 베드로는 고난의 종류들을 나열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고난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고난을 구분합니다. 먼저 부끄러워해야 할 고난은 두 종류로 살인, 도둑질, 악행처럼 현행법을 어긴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들이 받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받아야 할 고난은 부끄러워할 고난이 아니라 복된 고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람만이 이런 고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입니다(행 11:26; 26:28).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은 복된 고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17-19) 베드로는 교회에 임하는 심판과 마지막에 불신자들에게 받을 심판을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먼저 불 시험으로 거짓 신자들과 참된 신자들이 가려질 것입니다. 그럼으로 불 시험은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한 심판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보라 의인이라도 이 땅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라는 말씀을 통해, 심판의 때에 어떤 환난이 있을지를 설명합니다. 견디기 힘든 불 시험이지만 성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기에 고난 중에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의탁하라는 것은 안전한 보관을 위해 맡기라는 뜻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당한 고난이 있습니까? 이 고난을 함께 나누어보십시다.
우리가 살다 보면 간혹 답이 없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서게 됩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으며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해결하지 못하고 의문만을 남기고 내일로 넘기므로 다시 의문의 시간은 계속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주님께 의지하는 자에게는 내일로 넘기지 않고 오늘의 것은 오늘로 마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러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 설 교 >
고난이 다가올 때의 자세
김철한목사 /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고난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난이 없다면 예수를 잘못 믿는지도 모른다.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피하여 흩어져 사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다.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고난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소망을 지니고 견뎌내며 살아야 한다는 편지다. 베드로전서는 고난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① 그리스도와 관련된 고난 (벧전1:11, 2:21, 3:18) ② 성도들과 관련된 고난 (벧전4:1, 13, 15, 16, 19) ③ 고난 당함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서 벧전4:17~19까지의 오늘의 본문은 성도들과 관련된 고난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난은 영어로 ‘Suffering’, 헬라어로 ‘파테마(π?θημα)’란 단어를 쓰는데 괴로움과 어려움이란 말이다. 괴로움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 누가 그 고난을 좋아하고 환영할 것인가? 하지만 고난이 다가올 때 실망만 할 수 없다.
오늘의 본문은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①이사야는 고난에 대해 임마누엘 신앙으로(사63:9), ②바울은 승리를 믿음으로(롬8:36~39), ③야고보는 상급을 바라봄으로(약1:12), ④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림으로(시37:7~8) 대처하라고 한다. 여기 베드로 사도는 네 가지 자세를 언급한다.
1. 성도는 고난이 다가옴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벧전 4:12)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다정스러운 말로 질문을 던진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 사도는 다가오는 고난을 불 시험이라고 하였다. 불 시험이란 얼마나 강하고 참아내기 어려운 고난인가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신앙 문제로 다가오는 박해를 불 시험이라 했기에 박해 받는 자는 불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 같은 무섭고 고통스럽고 경악스러운 시간이지만 그 불 시험은 우리를 파괴시키고 태워버려 잿더미로 화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단하려고 오는 연단의 불이다. 불이 있으므로 잡티와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듯 성도를 순전하게 만드시는 불이다. 진노의 불, 심판의 불인 것 같으나 성도가 겪는 고난은 연단의 불이요, 정련하는 불이다. 그 불로 인해 더럽고 추한 정욕과 죄를 멸하시고 깨끗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겪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다가온 것이 아니다. 성도를 중생하신 하나님이 새롭게, 거룩하게, 완전하게 하시는 과정이시다. 순전한 믿음을 만드시는 과정이시다. 그러므로 불 시험이 올 때 혼란에 빠지지 말고 이상히 여기지 말자. 단3:8~30을 보면 불 시험을 받게 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불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시리라 믿었지만 또 한 편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불 구덩이 속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좋다고 하였다.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다가오는 불 시험 속에 아예 들어가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처럼 고난이 다가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 시험의 시간을 견디려고 하라.
2. 성도는 고난을 견디는 것을 즐거워하라. (벧전 4:13)
고난이 성도들의 삶에 다가올 때 이상히 여기는 부정적 태도에서 사도 베드로는 긍정적 태도를 천명한다. 벧전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고난인가? 벧전3:18을 읽어보면 의인이신 그리스도가 불의한 자들인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다. “의인이신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으시다.” 이 사건 앞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악인이 고난을 겪어야 되는 것 아닌가?’이다. 그런데 왜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죄를 위하여 단번에 죽으셔야 하는가? 정말 의심하면 이상하기 짝이 없다.
사실 사람들의 삶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악인이 고난을 받는 것보다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욥기서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 욥도 무고히 자녀들이 죽고 아내가 도망가고 재산을 다 상실하고 본인의 건강마저도 다 빼앗기고 벌거숭이로 남는다. 삶이란 왜 이렇게 고난 속에 있는지 수수께끼다. 하지만 성경의 뜻,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 선지자들은 말하길 그 분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을 증거하였다.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의하여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가 그 분의 고난으로 인해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셨다. 그 분은 친히 나무에 달리셨다. 채찍에 맞고 능욕을 당하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려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의인이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부활의 영광이 되셨다.
우리도 믿는 자의 이름으로 살면서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의로워진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에 그 분과 함께 의인으로서 고난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 성도는 그 길을 즐거워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견딘 고난에 우리도 참여한다는 것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이 신자의 올바른 태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우리가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다. 이것보다 큰 영광의 기쁨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고난을 견딘 자는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머물 것이다. 고난을 견디고 고난을 즐거워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이니 그 분 앞에 충분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이 오는 것을 꼭 두려워 할 위협이 아니다. 약속이다. 장래 받을 영광의 약속, 즐거워함의 약속이다.
3. 성도는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려라. (벧전 4:16)
벧전4:14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머리 위에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난은 아프고 괴롭고 힘들지만 고난이 복이 된다.고난은 성령을 몰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성령이 가까이 오셔서 역사하신다. 담대히 할 말을 주시고 놀랍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하게 된다.
벧전4:16의 기록처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령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기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답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행16:19~32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옥에 던져졌으나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서머나교회의 폴리캅 감독은 신자의 고발로 AD 155년경에 체포되었다. 로마 총독은 그를 배교시키려 황제를 주로 인정하라고 하였다. 그 때 폴리캅은 “86년간 살면서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으신데 어떻게 내가 참 주님되신 그 분을 배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광을 돌렸다.나는 나를 태우는 불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 더욱 무섭다고 고백하며 주께 영광을 돌렸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4. 성도는 고난을 받을 때 영혼을 주께 맡겨야 한다. (벧전 4:19)
벧전4:19을 보면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고 하였다.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관리하시고 다스리는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믿고 고난을 받는 자들은 무기력해서는 안된다. 고난을 받는 한복판에서도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선을 행하는 삶이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함이다. (벧전2:12)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의 고통을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벧전2:20)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 하였다. 따라서 고난을 받는 그 때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성도의 길이다. 선을 행함으로써 성도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 영혼을 의탁해야 한다. 즉 맡겨드려야 한다.
주님을 보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운명하셨는데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도 행7:59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잠들었다. 고난을 당할 때 믿음의 평정심이 깨지지 않아야, 소망의 기대가 깨지지 않아야, 사랑의 넘침이 모자라지 않아야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 맡기면 잠들 수 있다. 하늘의 평안이 내려온다. 맡기는 것은 절대적 신뢰다. 고난의 때에 신음 소리, 괴로움의 소리가 커질 때에 더욱 절대적 신뢰를 하나님께 두고 고난의 때를 받아들여라.
결국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산 소망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 죽음 권세를 이기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이어 받게 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네 가지 자세로 유연하게 대면할 수 있다. 그 힘들고 어려운 날에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즐거워하는 자
벧전 4장 12~19절 / 이삼규목사(낙양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이 천국으로 가는 길에 그와 동행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바로 ‘고난’이라는 친구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고난을 더욱 잘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그것을 더욱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악한 일들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드는 법입니다. 본래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모르는 것은 두려움을 주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를 안다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에서 절반은 승리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안다면 우리의 두려움과 괴로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12절)라고 했는데, 이것은 편지의 수신자들을 위해 그들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수신자들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믿음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박해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소아시아 갑바도기아 같은 데서 신앙생활을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이 찾아오면 동굴 속으로 피신하여 살았습니다. 핍박의 피바람이 지나가기까지 숨어서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불 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만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둘째, 고난을 예상하고 있는 사람은 막상 고난이 찾아오면 그것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고난은 더 큰 피해를 입힙니다. 고난을 예상하는 사람은 그것이 닥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에 찾아온 고난은 지극히 큰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셋째, 고난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더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이 일반이라는 것을 알면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런 심리는 인간 본성의 뒤틀린 측면인데, 설명하기도 어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여러분! 요즈음 한파가 몰아닥쳐 추위 때문에 고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추위를 혼자만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얼어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추위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다 당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서울 이북 특히 북한 지역은 혹독한 추위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쪽에 사는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추위는 추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겪어야 하기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됩니다. 이런 감정은 거룩한 것도 아니고 신령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을 즐거워하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서 세 가지를 주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자연스럽고 선한 것들입니다.
둘째, 자연스럽지만 나쁜 것들입니다.
셋째, 신령한 것들입니다.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들을 위해 ‘불 시험’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었는데,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그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12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불 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고 말씀한 베드로는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3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불 시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편지 수신자들은 불 시험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연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이 인류의 시작부터 줄곧 모든 사람들이 당한 고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고난을 견디는 영광을 얻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고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치욕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14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이 오셨을 때 아이들과 버림받은 자들과 정직한 자들과 진지한 여자들은 그분께 열광했지만 제도화된 종교지도자들은 그분을 미워했습니다. 제도화된 종교 안에는 그분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돌은 그런 종교의 건물에 들어맞지 않는 돌이었습니다. 그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돌들이 있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그분, 즉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그분을 배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권모술수를 써서 그분을 체포하고 십자가에서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악하게 하는 주장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범죄자로 몰아 죽인 그분이 살아계신 것을 많은 사람이 보았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그분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이름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그 이름에는 한순간에 폭발할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들리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 거역하든지 태도를 표명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믿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왜냐하면 치유와 위로와 평안과 새 삶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께 거역한 자들은 조직화된 종교의 교리를 믿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려 미친 사람으로 사회 조직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든가 아니면 거역하든가 양자택일만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어떻습니까? 이런 흑백논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와는 달리 분명한 태도를 보이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순진하지도 않고 직선적이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순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순진함을 인간 최고의 미덕으로 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이 평가하신 것은 어린아이의 무지나 더러움이나 시끄러움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진함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진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들으면 분노했지만 그들은 머리를 숙이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그토록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순수함을 잃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대립이 존재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설픈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린아이들처럼 그리스도를 찾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런 대립이 존재한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절)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건전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핑계로 우리의 악행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종종 그랬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을 기독교의 신앙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 자신의 악을 감추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방패로 삼는 사람은 자신이 거짓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벧전 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집에서부터 심판을 감행하신다면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은 더욱 무섭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다윗이 아주 오래 전에 한 이 말을 받아서 이제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고 하나님의 뜻 밖에서 고난을 받으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상급도 없고 격려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창조주께 의탁하라
19절에 “의탁할지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의탁한다는 것은 보호를 받기 위해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두려워말고 하나님께 맡겨라!
사람들이 귀중품을 가지고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언제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은행금고 안에 넣어서 보관합니다. 은행은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대여 금고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관하면 안전합니다. 불이 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것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에 귀중품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신경이 쓰입니다. 문단속 잘해야 하고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으면 cctv까지 설치합니다. 그런데 금은방 털이범들을 보면 그것도 소용이 없습디다. 그런데 은행은 안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고 맡깁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의탁해야 합니다. 한 번 의탁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2) 통제권을 하나님께 넘겨 드려라!
의탁한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의탁한다는 것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요, 자기보다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에게 권리를 완전히 넘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라는 말씀 속에는 “너희 영혼을 너희보다 우월한 능력의 소유자께 넘겨드려라. 하나님께 너희 영혼의 통제권을 넘겨드려라”라는 뜻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혼을 맡기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위험한 일들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혼을 맡겼다면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야말로 참 평안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대여 금고에 여러분의 귀중품을 보관하면 안전하듯이 가장 안전한 곳이 있습니다. 미쁘신 창조주라고 불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미쁘신 창조주께 당신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당신 영혼의 안전을 위해 창조주께 의탁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넘겨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의 의미
벧전4장 12~19절 / 피종진목사
사람들 중에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조건 고난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고난을 무조건 피한다고 해서 능사는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고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고난’이란 헬라어(파데마)에 보면 ‘맛을 보아서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맛을 알게 되면 고난이 왔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고난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유일의 과정이다. 고난은 육이 죽고, 영이 사는 훈련의 과정이다.’라고 말했고, 괴테는 ‘고난은 참된 인간을 만들어주는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첫째,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고난과 연단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원망과 불평으로 더욱 완악한 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기도와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이를 통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순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은 풀무 불과 같은 시련을 통해 성도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자연 상태의 금광석이 뜨거운 용광로에서의 제련 과정을 거쳐야 순금이 나오듯이,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불과 같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벧전 1:7). 그리스도인은 연단을 받는 가운데 죄를 회개하여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참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단 12:10). 또한 연단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됩니다(히 5:14).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사 48:10).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했고,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은 성도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둘째, 주님의 영광과 즐거움에 참여하게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로 하여금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과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터널을 지나면 밝은 세계가 전개되듯이,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영광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크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인해 받는 고난은 성도가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성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 받는 성도들은 고난 중에도 적극 선을 행하며 생명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은 자들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집사는 그에게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죽음의 순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으며, 영안이 열려 영광 중에서 그를 지켜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행 7:55).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주님의 영광과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며, 성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믿고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승리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가지 질문
피영민목사 / 베드로전서 4:12-18
서론
사도 베드로의 본래의 직업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학벌은 대단하지 못했습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은 베드로가 학문이 짧은 어부라는 이유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고 난 후 지혜가 넘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설교 한 편으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언어를 가지고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철학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증거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2등 하라고 하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에도 수석 사도였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사도는 베드로요, 이방인을 위한 사도는 바울입니다. 베드로의 복음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게 되면, 사도 베드로는 복음에 대해서 세 가지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할 때에 복음은 the gospel입니다. 정관사 the를 사용해서 “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복음 중의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유일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여러 길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길이 여러 길이 있는데 그중에 예수 믿는 것도 한 가지 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종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쁘게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죽은 후에 천국 가는 문제에 관해서 세상 종교는 완전 무력합니다. 그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인간에게 죄 사함을 주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죽은 후에 천국으로 인도하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뿐이라고 확신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베드로는 17절에 보면 이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the gospel of God)’으로 불렀습니다. 이 복음의 기원이 세상 어떤 철학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대학 교수가 말한 것도 아니고, 어느 위대한 종교인이 말한 것도 아니고, 이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복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사도 베드로는 복음은 값싼 것이 아니고,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받는 다는 말은 의인의 구원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렵게 얻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이 구원받는 데에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쉽게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는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는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채찍에 맞으셨고, 얼굴에 침 뱉음도 당하셨고, 온갖 고난을 겪으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천지를 창조하기보다, 죄인을 구원하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천지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지장조 할 때에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말씀만으로 안 됩니다. 제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리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값을 치른 값비싸고 어려운 것입니다. 또 예수 믿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생명이 위협당하는 수난을 수없이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마음껏 설교하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비행기 타고 1시간만 가도 마음껏 예수 믿을 수 없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설교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매 맞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성도로 사는 것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3장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사는 길은 좁은 길을 가는 것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너무 쉽게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단이 시험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도해야지, 성경 읽어야지, 금요 철야 예배 나와야지, 수요 기도회 나와야지, 주일 낮․저녁 예배 나와야 하지. 이렇게 예수 믿기가 쉬운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쉽게 확보하신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예수 믿는 길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길만이 생명 길이요, 천국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고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 복음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어떠할 것인가(17절), 둘째, 경건치 않은 사람들은 장차 어디에 서게 될 것인가(18절)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이 너무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대답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세상 철학자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종교인, 학자들이 하는 말에 이 대답을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관한 질문이요, 죽음을 넘어서는 세계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할 자격도 없고 지식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서 오신 참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도들만이 답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리를 아는 분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넘어선 세계에 관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계시를 받은 사도들뿐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Ⅰ. 베드로가 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은 누구인가?
첫째,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듯이 그 반항의 정신, 불순종의 영을 그대로 가진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묻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입을 열어 하신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부탁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죄를 회개치 않고,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복음에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베드로가 묻고 있습니다.
둘째, 경건치 않은 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ungodly)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불경건한 자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공부 잘하고, 돈을 잘 벌어도 부모 없이 태어났고, 부모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자식은 버릇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경건치 않은 사람입니다. 경건치 않은 사람이 어디에 설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셋째, 불순종하는 사람, 경건치 않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sinner)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헬라어 시제로 현재 시제입니다. 즉 계속해서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이루지 못했고, 지금도 이루지 못하고 있고, 내일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의인이라고 말할 때에 명확한 기준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기준에 도달한 사람만이 의인이 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어기지 않고 모두 지킨 사람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완전하고 정확한 법입니다. 또 분명한 법입니다. 즉 누구든지 이 법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대인에게 주신 법이기 때문에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우리의 양심에 거룩한 기준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의인이라고 말하려면 십계명을 완벽히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준에 도달하는 이 세상에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에 도달하신 한 분이 계십니다.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완전한 의를 가진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서 천국 갈 사람은 못 됩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 갈 때에 의의 예복을 입고 가는 것입니다. 의의 예복은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에 받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사람이 의인 되어 천국 가는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Ⅱ. 이런 사람들은 장차 어디에 설 것인가? (18절)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심판의 날을 염두 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무런 예고와 경고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예고와 경고를 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경에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반드시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지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부터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자녀부터 심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 전반부에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지으면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한 번 죄지었다고 때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랫동안 참고 참으시다가 때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심판하시는 심판은 우리가 현세를 사는 동안에만 국한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징계라고 부릅니다. 그 목적은 성화 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훈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현세를 떠나 내세로 들어가게 되면 성도에 대한 죄의 심판은 없습니다. 내세에서는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심판을 모두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현세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불순종하고, 불경건한 죄인들이 어디에 설 줄로 생각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도 심판하시는데, 자녀도 아닌 원수들을 당연히 심판하지 않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1절로 15절을 보면 크고 흰 보좌 심판이 나옵니다. 이것을 한자로 백보좌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받고,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서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Ⅲ.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17절)
첫째, 마태복음 25장 41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영원한 멸망, 영원한 형벌이 그 결국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불로 소금 치듯함(willl be salted with fire)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의 논문 하나를 써 주었습니다. 써 주었더니 안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기사 식당에서 선지 해장국을 사 주셨습니다. 선지 해장국만 먹은 것이 아니라 닭똥집도 먹었습니다. 닭똥집을 연탄불에 구워 왕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또 밴댕이를 왕소금에 찍어 먹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위에 올라가서 불로 소금 치듯함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이 그런 곳입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셋째, 요한계시록 14장 11절입니다.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지옥은 밤에도 못 쉬고, 낮에도 못 쉽니다. 지옥은 쉼도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쉼도 없는 고통을 당하는 지옥에 가면 좋겠습니까? 넷째, 시편 9편 17절입니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섯째, 누가복음 16장 23절로 24절에는 음부의 떨어진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음부에 부자가 떨어졌습니다.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아브라함이 보이고 나사로가 보입니다. 나사로는 예수 믿어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가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혀서 내 혀끝을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청합니다. 그런데 냉정히 거절합니다. 그곳에서 고통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 것입니다. 음부에는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고, 쉼과 평안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입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어디서 영혼을 보내시렵니까? 어떤 결국을 맞이하려 하십니까? 왜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시려 하십니까? 영혼을 영원한 기쁨으로 보내시렵니까? 영원한 고통으로 보내시렵니까? 천국에 기쁨을 누리시렵니까?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받으시렵니까? 왜 복음에 불순종하려 하십니까? 왜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 죄인으로 삶을 마치려 하십니까? 저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씀드립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어 의인이 되고, 천국 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후원자로 삼고 살게 됩니다. 복음에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길 외에는 죄 사함 받고, 의인되고, 하나님과 화목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처음 나오셔서 복음을 처음들은 분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에 교회 나오면서 예수 안 믿고 불순종하신 분들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력한 멘토-성령
이정익목사 / 벧전 4:12-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립바에게는 첩이 네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첩들이 어느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 제목이 “순결”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이 첩들이 그날부터 아그립바와의 잠자리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집정관인 알비누스의 아내도 베드로의 순결의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정관 알비누스와 아그립바가 그때부터 베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로 공모하였는데 그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이 첩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종용해서 베드로는 마침내 위협을 느껴 변장을 하고 조용히 로마를 떠납니다. 베드로가 막 로마성을 벗어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스쳐가다가 베드로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발견하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말이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시 달리려고 로마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눈이 번쩍 뜨였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길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끝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경외서인 베드로 행전 3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생키에비치(Henrik Sienkievicz)라는 사람이 “쿼바디스”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사후 초월적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합니다. 로마의 핍박 앞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렇게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습니다, 사형집행자들이여 나의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죽어갈 때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기쁨으로 죽어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용감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런 베드로의 모습에 감동받아 아이들 이름을 베드로 혹은 피터라고 지었으며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베드로 이름으로 짓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감화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약함
예수님 곁에는 늘 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그 자리에 이 세 제자를 대동하고 가셨습니다(막 5:37).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이 세 제자를 동행하게 하셨습니다(막9:2).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안드레를 추가한 채 그 세 제자들을 동행시키셨습니다(막13:3).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자자를 가까운 곳에 두셨습니다(막14:33).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는 모든 장소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예수님의 최 측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를 수제자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공관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그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측근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베드로에 대해서 조금도 가감 없이 그대로를 기록하였습니다. 위인전을 보면 대부분 미화되어 있습니다. 링컨도 어렸을 때 통나무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고 하지만 켄터키 주에 나무가 많지만 그곳은 그냥 농촌이었지 그렇게 깊은 산골 통나무집이 아니었습니다. 패트릭 헨리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록하여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자유 애호자인줄로 알고 있지만 그는 자기 집에 있는 노예 수백 명을 해방시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괴테는 아주 고상한 지식인인줄 알려져 있지만 집 주모의 월급이 아까워 매번 투덜거리며 월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세가 하루라도 늦어지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세상에 나온 자서전들은 다 이렇게 미화한 것이 많습니다. 삶에서 주어진 실패나 오점이나 부족한 점은 다 생략되고 장점만 극대화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쓴 마가복음은 스승인 베드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 측근 세 제자들 중 베드로는 측근 중의 측근이고 2인자이고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으로 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베드로는 그런 카리스마도 용맹스런 모습도 없습니다. 마가는 스승인 베드로를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초라한 모습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27~30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엘리야라, 선지자 중 한사람,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보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화가 끝납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단히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인간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이제 베드로라, 네 이름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노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6~19). 너무 구구절절 마다 칭찬과 과장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베드로는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막 8:29절을 보면 조금 전 개명사건, 천국열쇠를 주신 사건, 칭찬받은 일들이 순식간에 일시에 다 까먹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막 8: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며 만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2).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십니다. 어제는 천국열쇠를 주시며 칭찬을 하시고 오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9:18~22)에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베드로는 분위기를 분간 못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9장5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엘리야 모세가 나타나 함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환상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갑자기 “랍비여 여기가 좋아오니 초막 셋을 짓고 ... 여기서 삽시다”하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14장37절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합니다. 내일은 십자가 져야 합니다. 아주 심각한 시간입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하며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비롯해서 세 제자가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코를 골며 잠을 잤다는 말은 없지만 분명 제자들은 그때 코를 골며 잠을 잤을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14장72절을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마당에서 불을 쬐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종이 “너도 한패 아니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 나가서 참담한 심정으로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는데 스승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평신도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가려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베드로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거듭남
그러던 베드로가 언제 진정한 제자로, 용기자로, 순교자로, 지도자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하면 성령을 체험하고 난 이후입니다. 마가복음의 시대가 지나고 사도행전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 사후 그리고 승천 후에 성령이 임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 베드로는 그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때 강력한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영적 지도자로, 예수의 참 제자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중 1장에서 8장까지는 전반부로 베드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얼마나 용감한 지도자로 변화 받는 가를 보여줍니다. 지도력이 눈부시고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예수 승천 후 120명의 신자들을 모아 기도회를 주도합니다. 가룟유다를 메울 제자를 새로 선택하는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또 오순절 날 다락방 기도회를 이끌고 그날 모두가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아가 설교할 때 수많은 인파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행2:37)”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주 의연하고 당당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2:38~39)” 외칩니다. 그 결과 3천명이 회심하였다고 했습니다(행2:41).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행전3장7절을 보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행전3장11절 이하에서는 두 번째 설교 때문에 핍박을 받아 이틀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 일로 5천명이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4장6절에서는 대제사장 안나스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모여 베드로를 문책했을 때 전에는 여종에게도 무너졌고 예수를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는데 오늘은 당당하게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도행전4장13절을 보면 그 모습에 모두가 놀라 저가 평소 어부였고 학식이 없고 언변도 없는 사람인데 오늘은 저렇게 담대하니 “할 말이 없었다(행4:14)”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베드로를 그냥 놓아주었다(행4:21)고 했습니다. 얼마나 강력한 카리스마입니까. 또 병든 자들은 베드로가 지날 때 그림자라도 밟으려 모여들었습니다(행5:15). 대제사장이 시기하여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밤에 천사가 빼내 주었습니다(행5: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불러다가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행4:28)” 하고 주의를 주니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4:29)”고 말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듯이 베드로는 이제 성령에 흠뻑 취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난 신학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신학이 바뀝니다. 신앙도 변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던 사람인데 그 베드로가 이제 고난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합니다. 베드로전후서를 쓰면서 가장 강조한 내용이 고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난을 아주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이제는 성숙해졌다는 말입니다. 미성숙자는 고난이 오면 먼저 불평부터, 원망부터, 탓부터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뒤로 신학이 바뀌고 신앙이 변하여 고난을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벧전1:7)”,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 을 받으셨도다(벧전2:21)”, “너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벧전4:13)“, “너희가 예수를 위하여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을 것(벧전4:14)”, “너희는 그리스도인 됨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베드로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성령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를 영광의 예수로만 알았습니다. 정치적인 예수로만 알았습니다. 기적을 베풀고 박수 받고 화려한 예수로만 보았습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예수께 찾아와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청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예수 사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신앙과 신학이 완전히 변화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만 바라보던 메시야관이 고난의 메시야로 관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형통하고 성공하게 해 주는 영광의 예수에서 고난 받는 예수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설교 때마다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고난이라는 말이 15번이나 나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고난의 의미와 신학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가 십자가의 고난을 전할 때마다 성령이 주어졌고 그곳에 신유와 능력이 나타났고 모두 어찌할꼬 하고 눈물의 회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아주 성숙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성숙은 이렇게 변화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성숙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이렇게 성숙하도록 인내하십니다. 자식이 어릴 때에는 주는 것만 좋아합니다. 선물을 주면 아주 좋아합니다. 용돈을 많이 주면 더 좋아합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장하고 철이 들게 되면 이제는 부모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고 보답할 줄 알게 됩니다. 성장하고 철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심방을 갔다 오면 가방부터 뒤졌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사탕과 과자를 찾아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의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다 올 때는 일부러 사탕과 과자를 사 넣고 왔습니다. 그 딸이 커서 시집을 갔습니다. 딸이 보고 싶어서 가방에 과자랑 사탕을 가득 채워가지고 딸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딸이 반갑게 맞더니 가방을 받아 소파에 놓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가방은 처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얘야 저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묻자 딸이 “아버지는 제가 아직도 어린애 인줄 아세요. 그동안에는 아버지를 만나면 무엇을 얻어먹을까를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해 드려야 하나를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성장이고 성숙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의미를 찾게 됩니다. 뜻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찾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숙치 못하였을 때는 철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시행착오도 일으키고 실패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베드로는 보기 흉하게 망가지기도 하고 아주 왜소하고 처참하게 사탄으로 몰리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어느 여종의 말 한마디에 맹세까지 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제 주님이 없는 조직을 추수려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버렸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새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때 그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를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용기자로 변신하게 하셨습니다. 지도자도 그냥 지도자가 아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로 변신을 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평안의 복이고 형통의 복만 생각하면 그것은 미성숙자입니다. 진정한 복과 성숙한 믿음은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성령께 의존하십시오. 문제는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강력한 멘토이십니다. 그 성령께 의존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 삶을 맡기십시오. 그 분께 사로잡히려면 여러분의 내면을 비우십시오. 그래야 그 성령께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이정익목사 / 벧전 4:12-14
엊그제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갑자기 몸이 이상해서 검진을 받아보니 중병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의기소침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젊은 분인데 갑자기 뇌졸중으로 입원을 했습니다. 한참 혼수상태에 있다가 겨우 의식이 회복되어 치료 중에 있습니다. 또 엊그제는 29살 된 젊은이가 심장마비로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상심이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40대 집사님이 중국에서 일하다가 심장 마비로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혼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며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엊그제는 이런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유세프 나다르카니라는 이란의 젊은이가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이제라도 포기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 목사는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어서 지금 사형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계가 나서서 사형을 막으려고 압력을 넣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교계에서도 탄원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요즘 갑자기 어려운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면 두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나는 왜 저런 고통이 저들에게 오는가 하는 아픈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저들을 좀 챙겨주시지 않고 왜 놔두시는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용서하기 위해서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이런 고통의 문제들과 이기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렇게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삶에 나타나는 고난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사람이 살아있는 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불평하고 생각하면 주어진 고난이 더 무겁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어려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찾아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생로병사에 따른 고난이 따라옵니다. 똑같이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앓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물론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지켜주심만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고난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없애기 위해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고난의 종류
고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만든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고난에는 나의 실수로 잘못함으로 부주의로 과욕으로 인한 경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난이 이런 고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4장 2-3절에서 “이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당부하면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무법에 의해서 발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건강을 잃고 생활의 무질서를 야기하며 실패와 싸움과 사고 당함이라는 고난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난날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부주의함으로 고난당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스운 기도입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때는 “내가 이런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새벽마다 나와서 큰 소리로 남편이 나를 핍박한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께 찾아와서 본질은 말하지 않고 남편이 핍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비싼 밍크코트를 샀으니까 그렇지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어떻게 알았느냐며 놀랐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어떻게 알기는요, 기도소리가 너무 커서 나 말고도 새벽기도 나오는 모든 분들이 밍크코트 산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왜 나에게 무거운 시험을 주십니까?” 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고난은 내가 잘못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지해서 주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평소 몸 관리에 무심하며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몸 관리에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중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것이 무지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무지해서 술에 취해 알콜중독자가 되고 무지해서 담배를 많이 피우다가 병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일을 참견하다가 주어지는 고난도 있습니다. 무분별하게 남의 보증을 서고 지식도 없으면서 욕심껏 투자했다가 낭패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무지 때문에 오는 고난들입니다. 그런 경우에 “나에게 왜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주십니까?”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지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이 문제를 잘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고난 중에는 이유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바로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욥은 실수도 잘못도 과욕도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심각한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엊그제 29살 된 젊은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의 잘못도 실수도 아닙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더 안타깝고 힘든 것입니다. 이렇게 때때로 우리에게 이유 없는 고난도 찾아옵니다. 그런 경우는 속단하지 말고 시간을 기다려 보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는 진정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런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고난당하는 성도들 즉 1장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3:14)”,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라며 격려합니다. 당시는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너무 심각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짐승의 밥으로 맹수우리에 던져지기도 했고 화형이나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황제숭배 신앙이라는 큰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가리켜서 “쿠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쿠리오스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황제를 주님처럼 신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그래야 정부의 공무원도 될 수 있고 평안히 살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공무원도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당하고 순교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피해서 땅속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고난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쓴 논문을 보니까 오늘날 세상에서, 사업하면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에 “비리, 부정, 뇌물”이라는 대답이 20%였습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접대문화”가 18.3%였습니다. 또한 그런 일에서 벗어나려고 하니까 불이익도 당하고 따돌림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물었더니 31.6%의 사람들이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극복해 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고난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느끼지도 못하는 고민입니다. 오히려 즐거워 할 수도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고민은 내가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난 극복 방안
베드로는 그런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근신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난이 왜 주어졌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5장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주께 맡기라, 대적하라(5:7-9)”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대개 예수를 믿으면 다 해결된다고 아주 막연하게 대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믿으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극복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겸손하라, 주께 맡기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대적하라”고 말입니다. 이 요소들이 신앙을 건강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지혜롭고 때로는 신중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때로 근신하기도 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는 강하게 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참고 넘어가는 것만이 미덕은 아닙니다. 사탄은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더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우유부단하거나 불투명하고 염려가 많은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덤벼듭니다. 마치 뇌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우유부단하고 불투명한 사람에게 자꾸 찾아오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얼씬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5장 9절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둘째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고난을 분석해 보니까 그 고난은 주님 때문에 온 것입니다. 성경은 그 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4장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은 고난을 당하면 더 기고만장했습니다. 매를 맞으면 더 희열을 느꼈고 옥에 갇히면 더 찬송을 불렀고 박해를 받으면 더 강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난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에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오기도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18절에는 “의인이 겨우 구원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서라도 잘 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면 세상에 큰 충격을 줍니다. 그래서 사탄은 큰 그리스도인을 무너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작은 그리스도인들은 저절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초대교회 시대 교부였던 폴리캅은 황제숭배를 끝까지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폴리캅의 친구를 보내 회유했습니다. “한마디만 하고 이 순간을 모면하게. 그리고 후에 회개하면 목숨은 건지지 않겠나?” 얼마나 그럴듯한 제안입니까? 그런데 폴리캅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시험이 된다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넘어트리기보다 모든 사람들이 의지하는 한 사람을 넘어트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암 전문의가 암에 걸렸습니다. 이미 암 세포가 간과 뼈까지 전이된 말기 4기였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자기가 치료하고 있는 암환자들이 받을 충격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내 병부터 고쳐보자 다짐하고 마음과 생각과 언어의 습관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자신이 치료하는 많은 암 환자들이 다 무너진다는 절박감이 그를 무장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환자들에게 자신의 병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암환자들에게 암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암환자에게는 약도 중요하고 요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올 때는 찬송 413장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통이 줄어드는 평안도 체험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10번의 암 수술과 재발을 이겨내고 암을 극복하여 이겼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전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도 고난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희망과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한 대로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은혜와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과 험담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집안에서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은 무섭게 전염됩니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에게 더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평불만과 험담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이 더 무거운 것입니다. 창조적인 말과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자꾸 애급을 말하지 말고 가나안을 말해야 합니다. 남의 교회가 좋다고 말하지 말고 내 교회가 좋다고, 남의 집이 더 좋다고 하지 말고 내 집이 더 좋다고, 남의 남편과 아내가 좋다고 하지 말고 내 남편과 아내가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실패만 말하지 말고 승리, 치유, 회복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 말이 있는 곳에 소망이, 희망이, 회복이, 치유가,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그때 내 주변이 가나안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으면 복이 있다(3:14)”,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께 맡기라 주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 “너희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 모두 주님의 은혜로 승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벧전 4장 12~16절 / 배 혁목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믿음이 흔들리기 쉬운 때가 고난을 만날 때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고난을 받고, 또 그 고난이 길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때의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도 베드로는 이를 불시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교인들에게도 성도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이상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시험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한 일이라고 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불시험 당하는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성도가 불시험을 당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나 현대 교인들이나 때로는 예수님을 믿기에 당하는 불시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 시험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그것처럼 이상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버려 두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이 그 고난, 불시험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얼마나 유익한지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도로서 당하는 고난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불시험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우리가 당하는 불시험은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이루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불시험이 오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연단하려고 온다고 말합니다. 연단이라는 것은 ‘페이라스모스’라는 희랍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훈련을 대표하는 곳은 군대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철저하게 훈련을 받습니다. 기초훈련을 하면서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체력과 전투 능력을 훈련합니다. 훈련 과정은 정말 하기 싫고 고통스럽습니다. 군인이라고 총쏘고 싸우는 법만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모든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훈련시킵니다. 잠자고 일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훈련을 받습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에 어떻게 먹으라고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연단의 과정,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된 군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된 자들에게 불시험을 주시는 것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불시험을 통해서 만들고자 원하시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제대로 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연단하십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불시험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관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고통없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연단의 과정속에 들어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 받을 제대로 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불시험이 따르게 됩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유대에서 바벨론 포로로 같이 잡혀 온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바벨론의 두라평지에 세웁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 명령하기를 악기 연주 소리가 들리면 그 금신상에 절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다가 던져 넣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신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는 불풀무에 들어가기로 결단합니다. 왕이 이제라도 금신상에게 절하면 불에 집어 넣지 않겠다고 회유합니다.
그런데 그 세친구는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비록 세 친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불시험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그 시험을 통하여서 자신들의 믿음을 더욱 확실히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그 고난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하나님께서 나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 것이고,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자 아주 당연한 연단의 과정임을 깨닫게 되면 그것도 은혜로 여겨집니다.
2. 그리고 불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불시험, 곧 고난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한 말을 합니다. 바로 고난을 받을 때에 도리어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고난은 내가 의도하지 않게 불현듯 찾아오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대면하기 때문에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코이노네오’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공유하다. 동업자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내가 즐거워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고난당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하시고자 함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는 자원하여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불같은 시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억지로 감당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 병사로부터 채찍을 맞고 침뱉음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욕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고통스러운 박해를 온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받으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피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제압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그 고난을 강제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고난에 참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하나님 자녀는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시험을 연단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 고난을 피할 수 없거나, 나에게 고난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그고난을 피하지 않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자원하며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내 감정과 생각대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응하기 위해서 그 고난을 자원하여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깡패 목사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1874년에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유교집안의 외아들로서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학문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가 16세 되던 해에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그만 낙방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젊은 김익두는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시험에서 떨어진지 얼마 안되어 그의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김익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만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김익두는 술을 마시게 되고, 마을 사람들을 폭행하며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난폭하게 사람들을 대했는지, 사람들은 김익두를 ‘안악골 호랑이’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주소서’ 하고 성황당에 가서 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네사람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김익두가 변한 모습을 보고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 귀신에 사로 잡혔다며 정신 이상자 취급을 하며 도리어 욕하고 핍박했습니다.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자 그는 동네에 ‘김익두 죽다’라고 방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김익두가 정말로 죽었는지 시험하려고, 그는 김익두 얼굴에 더러운 물을 퍼부었습니다.
김익두가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이내 감정을 다스린 김익두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를 믿은 것은 나인데, 복은 당신이 받는구료'라고 말했습니다. 김익두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고난을 받는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그 고난을 이겨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김익두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시베리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시다가 1950년 공산군이 쏜 총에 순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자 주시는 불시험은 억지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스스로 그 고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불시험을 통해서, 성도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존재로 훈련을 받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일을 경험하면 찬송하고 즐거워하지만, 고난을 당하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고통가운데 훈련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불시험 중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성도의 영광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복된 것은, 그 고난으로 인해서 하늘의 영광을 더욱 소망하게 되고, 결국 하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6절에는, 성경은 모세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이 땅에서 왕자로서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보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이 고난받는 것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에 이르게 하는 관문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 고난에 참여하며, 또한 이 고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과할 때에, 또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과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불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즐거워하라”는 베드로의 말은 정말로 이상한 말입니다. 하지만 불시험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불시험은 성도들에게 특권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받는 것이 불시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훈련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을 억지로 당하는 자가 아니라,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피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응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만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에게 불시험의 시련을 주심으로써, 성도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늘 영광돌리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늘 불시험과 같은 시련의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일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고난에 참여하여 그 시험을 이김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 자녀의 모습으로 더욱 성숙하고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난 가운데 기뻐해야 하는 이유
벧전 4장 12~19절 / 계강현목사(금광교회)
베드로전서는 베드로 사도가 고난당하고 있던 초기 신자들에게 쓴 설교편지다. 1장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지금의 터키 일대에 보낸 편지다. 당시 수신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기독교 신앙 때문에 압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더 이상 기독교를 그들이 승인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비밀리에 회합하면서 혐오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위험한 소 종파로 경계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성만찬을 행하면서 "이것은 예수님의 살이요 피"라고 하는 멘트를 오해하여 기독교인들을 인육을 먹는 식인종이라는 소문을 만들었다. 또 입맞춤으로 하면서 형제, 자매라고 인사하는 관습을 오해하여 근친상간하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 악 소문 과 로마의 경계 때문에 이곳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심한 박해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로 배교하여 고난을 피할 것을 유혹받고 있었다. 지금도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면 꼭 가보는 카파도기아나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마치 카타콤처럼 숨어서 초기 신자들이 예배하는 장소다. 이런 지하도시가 30여개쯤 더 있을 거라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변질되지 말고 고난을 끝까지 견뎌내라고 편지로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를 꿰뚫고 있는 주제는 바로 고난이다. 나는 고난에 대해서 설교할 때마다 미안한 기분이 든다. 성도들이 힘든 삶을 사는데, 축복에 관한 설교를 하면 좋을 텐데, 고난에 대해서 설교함으로써 짐을 더 얹어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것을 주님이 주시는 그대로 전할 뿐이다. 고난에 대해서 설교하면 오히려 은혜가 된다는 분들도 많이 있다.
사람들은 고난이나 시련이 역경을 나쁜 것이나 피할 것으로 대게 생각한다. 처음 예수 믿었을 때에는 지혜는 부족하고 열의는 있는데, 이런 때에는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안 낫는 병이 없고, 전쟁에 나가도 절대로 안 죽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고난이나 시련은 악한 것인데, 하나님이 사랑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걸 허락하실까? 이해가 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고난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당연히 들어가는 곳이지만,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고난 다음에 축복 또는 영광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을 밥의 반찬처럼, 요리에 소금이나 조미료처럼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고난은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
v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v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고난)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v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본문에 세 구절 모두 ‘고난’이란 단어가 ‘영광’이란 단어와 연결된 걸 볼 수 있다.
고난과 영광은 항상 같이 가기 때문에 고난이나 시련이나 역경은 반드시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고난 없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고난이나 역경이나 시련이 단절된 삶을 제공해주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고난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걸 어떻게 극복할까 가르쳐 줘야지, 자식들을 너무 온실에서 키우는 건 잘하는 게 아니다. 높은 생활수준에 익숙해져 버리면 고난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걸 경험해보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중에 해쳐 나갈 것인가? 만약 고난 없는 삶을 꿈꾸고 고난 없는 걸 목표로 삼을 때 결국 실망하게 되고 원망하게 된다. 고난은 반드시 있다. 이걸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v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다. 반드시 있는 거다. 용광로에 들어간 철광석이나 금광석이 용광로 불을 보고 놀라면 되겠나? 용광로 불을 거쳐야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거다. 그런데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난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v13a,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기쁘게 여겨야 할까?
1.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마 5:11-12,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한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복음 전하다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서 고난 후에 영광이기에, 고난을 통해서 실제로 상급을 받게 되는 거 다 알지만, 그 상급은 우리가 상상하는 거 이상이기 때문에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v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갑을 주었는데, 천만 원이 들어있어서 돈 빼고 우체통에 넣을까 하다가 하나님 보시기에 양심이 찔려서 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사례금을 한 20만원 받을 걸 예상했는데, 주인이 말하길,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너무 고마우니 우리 반팅합시다!”하면서 500만원을 주는 거다. 그러면 얼마나 기쁘겠나? 20만원 받으면 기쁠 텐데, 500만원 받으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예상보다 너무 크니까 뛸 듯이 기뻐한다.
이렇듯 예수님이 오실 때 뛸 듯이 기뻐한다. 너무너무 상급이 큰 거다. 그때 고난을 주셨는데, 그 고난당한 것 때문에 이렇게 큰 상급을 주시는 거야! 뛸 듯이 기뻐한다.
바울사도도 롬 8: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나중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사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한 뭘 보고서 확신 속에 얘기하는 거다. 여기는 그림자이고 거기가 진짜다. 상상하긴 힘들지만, 고난 받은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귀한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도 기뻐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v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고난)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반절은 사 11:2에서 인용한 거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이 구절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지혜와 모략과 지식의 영이 함께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할 때 마찬가지로 지혜와 모략과 지식의 영이 임재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말씀하시면서 막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너희는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지 그 시각에 말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런데 이 약속이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부활을 전하다가 공회 앞에 체포되었을 때, 당당히 유일한 구원자가 예수라고 전하자, 공회원들은 그들이 무식한 어부인 줄 알았다가 깜짝 놀란다. 행 4:13,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이게 그들 스스로가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입에 말을 주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실제로 고난을 통해서 성령을 더욱 체험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는 걸 경험하지 않나? 우리가 과거를 정직히 돌아보면 힘들었고 했지만, 고난 받는 걸 통해 오늘의 내가 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게 만들고 정금같이 나오게 하신다. 5:10,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싫지만, 고난 가운데 기뻐해야 한다.
3.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v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가운데서 이겨내서 간증을 하는데 그게 더 위로와 도전이 된다. 우리 교회가 평세를 하는데, 여러 목자목녀가 간증을 참석자들 앞에서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전종한 장로가 간증을 했다. 끝나고 참석자 중에 몇 분이 나에게 너무 은혜와 도전이 되었다고 말하는 거다. 그들 얘기는 나 같으면 그런 와중에 목자를 계속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텐데, 장로님은 끝까지 이겨내신 것이 감동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버티고,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서 감사하고, 헌신할 수 없는 가운데 헌신할 때 오히려 하나님에게 더 큰 영광이 되는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중증뇌성마비 환자인 송명희 시인은, 자기에게는 남들이 가진 재물, 지식, 건강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는 음성을 들었고, 남들이 받지 못할 사랑을 받았고, 남들이 모르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시를 적어 노래하고 있다. 오늘 많은 걸 누리면서도 조그만 게 없어서 불평하는 자들 앞에 이것이 도전이 되는 거다.
우리가 오늘 고난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오늘 복음을 위해서 좀 손해도 보고 욕도 먹고 자존심도 상하고 희생도 좀 하고 그런 고난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에게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거다. 주저 않는 대신에 힘차게 붙잡고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기뻐하는 거다. 그렇기에 고난이나 역경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난이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주를 위한 고난이어야 한다. v15,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을 엿볼 수 있다. 살인자, 도둑, 악을 행하는 자, 남 일에 간섭하는 자 등 지저분한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 남 일에 간섭하는 자란 도둑질을 의미한다. 엡 4:28, “도둑질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게 하십시오.”
안 믿는 사람을 초청하면 “사기꾼 같은 사람이 다니는 교회에 나는 안 나간다.” 그런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얘기 들으면 기분 나쁘지만, 이 사람이 교회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죄인이 모이고 환자가 모이는 병원과 같다. “나는 그 병원 다시는 안 간다. 갔더니 병원에 맨 환자만 있더라.” 그러면 맞는 말인가? 병원에 환자가 있어야지 건강한 사람만 있으면 그게 병원인가? 헬스클럽이지. 물론 변화가 있어야지. 형편없지만, 그러나 예수 믿기 전하고 엄청 달라졌다. 그거면 되는 거다.
그런 사람이 모였는데, 아마도 이런 식으로 비난했을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가치관을 모르기 때문에 비난하게 되어 있다. 너무 잘해주니까 수상쩍어지고 경계하는 거다. 세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감동을 받고 목장과 교회에 나오게 되는 거다.
우리의 고난이 주를 위한 고난이어야지, 자초한 고난을 당하면 안 된다. 잘 못살고 그런 것은 게을러서 그런 건데, 마치 주를 위한 고난인 것처럼 하면 안 된다. 외롭고 고립된 것을 말을 막 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서 그런 건데, 마치 주를 위한 고난인 것처럼 오해한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 봐야지. 안 그러는 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의 표시고,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불손종의 표시이다.
이런 죄가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지정의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에서 시작해야 한다. 마치 주를 위해서 받는 고난처럼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겠다는 변하지 않겠다는 교만이고 불순종이고 고집이다. 회개한 다음에는 그게 죄일지라도 하나님이 그걸 통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롬 8:28에 말씀한 것처럼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 잘못, 남의 잘못 따지기 힘든 고난도 있다. 그것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고난으로 바꾸어줄 수 있다. 인내하며 기다리면 바꿔주신다.
또 고난 가운데 바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 가끔 듣는 얘기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주님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받을 필요가 없는 손해나 희생을 피하지 않고 수용할 때 주를 위한 고난이라 한다. 더 나아가서 주님이 반응하셨듯이 반응해야 한다. 벧전 2: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과 저주하는 강도들과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해 저들을 용서해주시길 아버지에게 기도하셨다.(눅 23:34) 우리도 고난당할 때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보복하고 방어기재를 사용하고 싶지만, 예수님이 하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눅 6:28)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알지만,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v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영혼을, 인생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맡기는 거다. 그렇게 했다가 쫄딱 망하지 않을까? 이건 근거 없는 두려움이다. 능력의 하나님의 손이 지켜주신다. 그렇게 못하는 것은 공격하는 사람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과하게 반응하는 거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크시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턱 맡기라. 시 27:1,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벧전 5:6-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자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상급을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여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에게 큰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그러니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고난 앞에 당당하게 맞서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살자. 코로나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고 오히려 더욱 예배에 집중하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벧전 4장 12~13절 / 김명혁목사
벧전4:12,13,롬5:3,4,마5:10-12,행5:41,고후12:10,골1:24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기간 중 네 번째 주일을 맞으면서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중심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도 싫어하고 죽음도 싫어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현세주의에 빠진 오늘 우리의 세대는 고난도 불편도 수고도 희생도 모두 싫어합니다. 사실 은혜 받기 전에는 수제자 베드로도 고난과 죽음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16장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말씀했을 때 베드로는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마땅히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을 강조해서 말씀했고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와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1-24).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2,23). 그러면 이제부터 고난과 관련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은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을 싫어하던 베드로 자신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은혜 받은 다음에는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저는 1988년 4월 극심한 가뭄으로 모두가 죽어가는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를 방문하고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폈는데 그때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현지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롬5:3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이후부터 롬5:3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Even in tribulations we rejoice.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기뻐하라는 말씀을 제일 먼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고난을 싫어하며 십자가를 등지고 도망갔었지만 나중에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과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 바울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능욕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면서 고난을 예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제가 가장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도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 고난을 귀중히 여기면서 고난을 예찬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1986년 4월 22일 합동신학교 학생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수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사람과 기도의 사람과 고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죽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은 저주다 고생은 싫다 고생은 꿈에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고난과 고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조되고 새로워지고 눈의 밝음을 얻으며 귀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고난관은 세상 사람의 고난관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고 다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사실 평생토록 고생과 수고로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환경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박 목사님 스스로 고생과 고난과 수고의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삼으신 이동휘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고 "별세"의 삶을 주창하셨던 이중표 목사님도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거의 모두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을 고난이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성경은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참예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참예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소유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소유에 관심이 많지만 이타적인 사람은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평안과 기쁨과 치유에 참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서 고통을 당할 때 자식의 아픔과 고통에 참예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지성이 아빠는 지성이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지성이에게 주는 아픔과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 값으로 당해야만 하는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면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지옥의 고통과 저주에 참예하셨고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니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께서 아직도 당하셔야만 하는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예할 수가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고난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고난에 참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2).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기쁨이고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기쁨이고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기쁨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천국에서 받을 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경은 고난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고 그리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 고난이 우리 자신을 시련하기 위해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순수하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고난은 우리를 시련하고 우리를 단련하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난과 환난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소망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저의 아들 철원이는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순수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예수님과 천국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주님과 천국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강변교회 초기의 조축국씨는 그가 당한 척추암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죄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전도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찬송을 부르며 담임 목사의 기도를 받은 후 고요히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 중 고난과 고통 없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둥병 중풍병 소경 등의 고난을 통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죄인들로 하여금 두 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또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고 겸손하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안흥규 장로님이 몸에 고난과 고통을 지니므로 인격이 성숙하게 되었고 주님과 교회를 겸손하고 충성스럽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몸을 찌르는 육체의 가시를 몸에 가지므로 더욱 더 겸손하게 되었고 더욱 더 충성스럽게 되었고 더욱 더 주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난은 축복입니다. 아직도 너무 뻣뻣한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둘째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믿음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골1:24).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고후1:6).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황인범 군이 캄보디아에서 고난과 수고를 당하는 것은 캄보디아에서 사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성장과 소망의 성장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 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통 사고로 죽음의 위험도 당합니다. 그런데 황인범 군은 자기가 그곳에서 고난과 환난을 당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설교도 아닙니다. 수고와 고난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여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방식은 설교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고난과 수고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아펜셀라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 언더우드 선교사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조선의 구원과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 다음 셋째로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 아시아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후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5-7). 예수님은 주님 자신 때문에 받는 고난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고 천국에서 받을 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도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좋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5,26). 고난이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고난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안일과 평안은 지옥을 준비하게 하고 고난과 수고는 천국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모슬렘 지역에서 사는 지하 교회 성도들에게도 보다 진하게 다가가는 설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극도로 이기적이고 극도로 세속화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설교입니다. 성경 말씀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피하는 대신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방편으로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모두가 의인이 되어서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고난을 모르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불편과 수고를 싫어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군대에 가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남을 죽이고 자기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고난의 귀중성과 필요성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기쁨과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성도의 태도
벧전 4장 12~16절 / 임덕순목사
이 주간은 고난주간 입니다. 예수님은 애굽에서 고통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었던 유월절 양처럼, 바로 그 유월절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고 멸망할 우리 인류를 구원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당하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하고 피하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무익하고 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영생을 원하지만 죽음이 있고, 선하게 살고 싶지만 죄악 속에서 살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눈물, 근심, 고통 등 불행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고난을 벗어날 길이 없는 존재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닛츠는 인간을 괴롭게 하는 해악이 셋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오는 불행으로, 죽음, 무지 등의 형이상학적 해악이요, 둘째는 자연계와의 부조화에서 오는 고난으로 지진, 사고, 질병, 흉년 등 물리적 해악이며, 셋째는 인간의 죄악성에서 오는 것으로 죄, 수치, 근심 등의 도덕적 해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나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생 자체가 해악이므로 이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정해 버리고 떠나가는 것, 해탈하는 것으로만 고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의 고난은 벗어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불행의 원인을 찾는 데는 일조하지만 그 고난의 참된 원인과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서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죄로 인하여 상하고 그릇 행하는 인간에게 크나큰 유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관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참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고난을 만날 때,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하는가? 그것을 이 고난주간에 생각합시다.
고난에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죄의 삯으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의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죄악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고난이 아예 없었고, 모든 환경은 완전히 선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는 이런 고난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개꼬리를 잡아당기면, 개에게 물리는 것이 당연하듯이 죄를 지으면 그 죄 값으로 막대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고통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다가 내외가 한날에 즉사하였고 다윗의 밧세바취한 범죄는, 그 가문에 칼이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간의 범죄는 이스라엘 전 국민으로 크나큰 고통과 대가를 치르게 했고, 열 정탐꾼의 불 신앙적 주장은 이스라엘로 40년의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으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악은 인류 전체에게 죽음과 고통을 물려주었습니다.
우리 중에 "내가 지금 너무 큰 고통을 당한다" 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혹시 내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업의 부진으로 인한 고통, 소외로 인한 고통, 질병으로 인한 고통, 이러한 고난들을 겪게 될 때에 그것은 종종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깨달았다면, 속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고 회개해서 용서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른 생활을 하여서 하나님의 채찍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알만큼 알고 하나님의 채찍도 맞을 만큼 맞은 성도가 아직도 깨달음이 없어서 계속하여 어리석은 죄를 짓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자신에게는 불행한일이요 하나님도 안타까워하시지 않겠습니까?
고난중에 있습니까?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교회에 와서 예배는 드려도 마음이 가눌 길이 없을 정도로 답답한 일을 만나셨습니까?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든 고난의 원인은 죄라는 것이 성경의 첫째공식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는 부지런히 죄를 찾아내어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곱 배나 굵은 매로 징계하십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가 또다시 죄를 짓는 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세월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아야합니다. 이 고난주간에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당하신 주님 앞에서, 지금도내가 죄를 버리지 못하여 고난당하며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을 지금도 마음 아프게 하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고난을 몰고 오는 숨은 죄악을 찾아내어 버리는 일에 힘쓰는 이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의를 이루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의를 이루는 고난의 가장 대표적인 예 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는 사단에게 매여 사단이 씌워주는 죄의 그물에 얽혀 살면서 그 죄 값으로 당하는 고생을 지긋지긋하게 당하고 결국 지옥으로 가는 인생들을 살려주려고 오셨습니다. 죄인을 살리는 비결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당할 고난, 형벌, 죽음을 대신 당하여 죄의 형벌을 없애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려고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요 왕이신데도 종의 모양을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는데, 십자가는 로마나라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형벌은 우리가 당해야 할 것이었기에, 예수님에게는 그게 너무 치욕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밤에 성만찬을 행하며 당신이 우리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것을 약속 하시고서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밤새워 기도하실 때에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애원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주시지 않으시니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자기의 소원을 포기하시고 계획한 대로 십자가에 죽는 길을 택하셨으며,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시는 동안, 하나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한 인생들의 대표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그 외면하신 증거로 하늘의 태양도 세 시간동안이나 빛을 잃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고통, 그 부끄러움, 그 대접을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본의 아니게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을 대신 당해 주심으로서, 우리가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고, 그가 잠시 버림을 받아주신 덕택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분명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전적으로 의를 이루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살던 사람이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로 나아가서 생활하는 것도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가는 일입니다 마는,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인간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짓지 않은 죄,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짊어지고 사면하기 위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주님이 그 고통을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의를 위한 고난이며, 값지고 고귀한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인생에게도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의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고 결심하고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끊이지 않고 시련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고난도 의를 이루는 고난인 경우가 많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도 그런 종류였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당하는 시련을 통해서 참된 신앙이란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셨으며, 또한 어떤 고난들은 고난을 견디고 감당한자를 정금 같은 신앙이 되도록, 다듬어주는연단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일신의 불편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선교지에 찾아가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가면서 자신을 드려 봉사하며 삽니다. 그들의 고난과 수고로 말미암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고난들은 의를 이루기 위한 고난입니다. 성도들은 고난을 당하려면 이런 고난을 당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다가 그런 "의를 이루기 위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본문은 그런 고난을 당했을 때의 태도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를 시련하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12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은즉 부끄러워 말라 -16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16
"이상히 여기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도리어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것이 택함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고난에 대한 태도며, 바른 생활을 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 취해야 될 태도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하려 함이라" 라는 것입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라는 말씀은 어떤 때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시를 두고 말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심판주로서 재림하시는 그날의 영광은 우리가 상상 못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도 영광스러우시지만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 건설위하여 힘써 복음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고난도 당한 성도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얻게 될 그날의 영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이 들지라도 그 영광스런 날을 위하여 힘써 말씀대로 살며 인내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를 달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받던 사람이 회개하고 죄를 끊어버리고 돌아오거나, 연단을 받던 성도가 연단을 굳건히 견디고 나서 마침내 그 "시련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영광스럽게 하여주십니다.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고난을 이겨낸 성도만 아니라 그를 연단하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연단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의도 하신 축복을 주시기 시작하셨을 때" 라고 해석할 수 도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던 사람이, 그 고난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은혜의 하나님께 의지하고 바른 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 하십니다.
또한 모진 연단을 받던 성도가 그 고난을 견디고 견고하게 서면,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사랑을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고난과 절망 가운데서 견뎌내고 성공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있다는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했을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이켜서, 고난을 감당한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날" 을 만들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고난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12절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려고 작정 하셨으나, 나의 죄악 때문에 유보하셨던 축복을 받을 자격을 갖춰주는 도구가 된다고 강조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죄악과 교만과 어리석음을 돌이키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틀림없이 복을 받게 됩니다.
고난을 견디고 순종한 후에 복을 받은 이들의 실례들...
채찍 맞고서 깨달은 후에 복을 받은 이들의 실례들...
실패 속에서 예수 만나고 복을 받은 이들의 실례들...
질병 속에서 항복하고서 복을 받은 이들의 실례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실례들을 주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을 축복으로 알고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새로운 자세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를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고난을 인내하며 나를 위해서 생 살을 찢기신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를 맞이 하시를 바랍니다.
물질로 인해 고통하던 사람이 고난 속에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다시 일어선 뒤에, "이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니 주를 위해 사용 하겠습니다" 라면서 봉사와 구제와 선교를 위하여 마음껏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이 고난 통해서 연단을 받으면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이제는 주님 말씀의 약속을 희망삼아서 살아가 는 인생의 승리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나에게 닥쳐왔던 그 고난이 오히려 나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고난의 매로 자신의 방향을 바꾸어주신 하나님께 찬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유를 모르는 고난속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고난을 통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를 만나서 감사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고난은 겉보기와는 달리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나무입니다. 고난의 결과가 이렇게 아름다울진대 어찌 고난을 재앙으로만 여기며 고난을 두려워하고 외면하려고만 합니까?
고난은 의를 이루며 지혜를 가져다주며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이며, 성도들의 변함없는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님들은, 고난을 나에게 보내시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를 만들어 주실 선하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이 한 주간 동안은 나에게 있는 고난을 돌아보며 고통의 근본 원인은 찾아내어 버릴 것은 버리고 붙들 것은 붙들며 인내할 것은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새기는 보람 있는 한 주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대비
벧전 4장 12~19절 / 박조준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 베드로전서 4장 1∼11절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올 때 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 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 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장에서 우리는, 경건하게 살려 고 하면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 것이지만 모두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 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언제나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가 스스 로 택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색깔이나 형태는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에게 핍박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행할 때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핍박의 대상 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양상이 불신자와 다르 다는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때문 에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생활 속에 아무런 핍박이 없다면 우리는 한 번쯤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적당히 타협하면 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적당 한 선에서 타협해 버릴 때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 리를 향해 불신자들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지금까지 말한, 일반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아니라 불시 험에 의한 고난 을 대비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 희를 시련하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의 시험, 이 고난을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시 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 시험이 우리의 삶의 문턱에 들이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미리 이 사실을 경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그때야말로 핍박이 몰려오고 있는 아주 중대한 시험의 시기였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주후 64년경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대대적인 박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서운 불시험이 다가오기 직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밤에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 베드로전서 를 통해서 이 고난을 대비하는 메시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경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입 니다. 로마의 디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 기지 않고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앞에 두고 성령께서 는 사도 베드로를 감동시켜서 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비하도록 소망의 편지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고난당할 것을 대비하세요. 여러분을 시련하려고 찾아오는 불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이 곧 찾아옵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만, 1장의 요 절인 7절에도 불시험 을 암시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 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 이라. 여기서 말하는 불이 어떤 도구로 쓰여졌습니까?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금이 어 디서 연단됩니까? 용광로의 불 속에서 연단됩니다. 불 속에서 모든 금이 아닌 부분, 그러니까 찌 꺼기는 녹아서 없어지고 순금이 구별되면서 얼마나 제련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련의 시간, 불시험의 어두운 시간은 순금과 찌꺼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시 간입니다. 핍박이 올 때, 박해가 올 때, 고난이 닥쳐올 때 이 고난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 도인의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순화시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점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고난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은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기 억하십니까? 욥이 고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 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다 아시고 계 십니다. 그리고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우리의 삶과 믿음과 인격이 제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 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세요. 요한복음 15장을 흔히 포도나무의 장 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삶을 독려하는 동시에, 17절 이하를 보 게 되면 이 고난에 대한 대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19절 말씀을 보십 시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 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 희를 미워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우리가 세상의 것이기 때문 에 우리를 사랑할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0, 2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 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 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당부하셨습니 다. 사랑하는 자들아, 고난을 준비하라.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 을 입은 주님의 사랑받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시험을 주십니다. 때로 그 시험은 격렬한 불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불시험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있 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을 감수하며 길을 걸어왔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현실의 길입니다. 이 길은 단련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 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셔야 합 니다.그리고,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 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베드로전서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낱말 셋이 있습니다. 고난 이란 말과 즐거워하라, 기뻐하라 는 말, 그리고 소망 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고난과 기쁨, 그리고 소망이란 이 세 가지 낱말이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다 시 말하면 우리가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 망으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입 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또 주님 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했습니다. 여러 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님 스스로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 대가로 받은 고난이 있습니까? 이미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 기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 런 이유도 없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2장 19∼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에 대한 종류를 이야 기하면서,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애매하게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없는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인데요? 2장 24절을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 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 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됩 니다. 주님은 고난받은 사람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스펄젼 목사는 자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프지요, 고통 스럽습니다. 그러나 제 고통보다도 주님이 제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고통 받는 사람에게 주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랑과 격려를 고통받는 사 람에게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생을 같이한 사람들끼리는 얼마나 친분이 두 텁습니까? 기쁨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어도 고생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쉽게 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교제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영광의 날에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은 바라면서 고난은 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주 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 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차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 영광 속에 같이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 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세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 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 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난 속에서도 생동하는 발걸음으로 전진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 대신에 영광을 주시는 하나 님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을 통과해야 영광이 옵니다 왜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합니까?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 령님이 누구를 제일 가까이 하십니까? 고난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광스럽게 임재하 십니다. 14절을 보세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의 위 에는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리 텐 붐이 쓴「나의 피난처」 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리가 어렸을 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 해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잡혀가고 죽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어린 소녀는 굉장히 두려 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리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난 어떻게 하죠? 난 죽는 게 두려 워요. 그때 코리의 어머니는 자상하게 코리에게 타일렀습니다. 코리야, 우리가 기차를 타려면 먼 저 뭐가 필요하지? 정거장에서 기차표를 사야지요. 언제 표를 사지? 기차 타기 직전에 사야지요. 그래,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주님이 우리가 죽음을 통과할 수 있도록 표를 주실 거야. 여러분, 우리가 순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주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주신 말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맞이할 때 영광스러운 하 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우리를 어떻게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하신 그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고난받는 우리 위에 함께 계시면서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울어 주시고, 힘을 주셔서, 이 고난을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있다 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낯익은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 또는 장막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다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히브리어로 쉐키나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막 위에 임재했던 불기둥을 보고 한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빛의 아름다움을 이스라엘 백성들 은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 나 고 생생하게 들렸겠습니까! 고난은 아픈 것이지만 고난 속의 위로는 정말 큰 것입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을 생각해 보세요. 스데반이 죽을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돌팔 매질을 당하여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스데반을 능히 순교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천사의 아름다운 광경이 스데반의 얼굴을 통해서 빛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시선은 하나님 우 편에 서 계신 주님을 향했습니다. 그 주님이 자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팔을 벌리고 서 계신 그 광 경을 보았을 때 자기를 향해서 돌을 던지는 그들을 용서하며, 거룩한 순교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 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때는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습니다. 고난이 오면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인 이란 말이 나 오는데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 이란 말은 세 번만 나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안 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았 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불신자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Chris tian)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이기만 하면 주님 이야기를 합니다. 또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 저 사람들은 그리 스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구나 해서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의 삶의 질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28절을 보면 바울이 전도하는 장면에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 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이 선교할 때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 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 그리 스도인 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 리가 복음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고난받는 주님의 자리에 설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그 고난에 참 여하게 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18절까지의 말씀은 고난이 올 때를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 를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 말씀에서는 너 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말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남의 일을 간섭함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 는 말 은 홍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 할 일만 하라는 권면입니다. 자기의 일도 잘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가 있 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난받지 마시기 바랍니다.16절을 보세요.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 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 의 이유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 중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합니까 아니면 영화롭게 합니까? 오늘 주신 말 씀에서는 부끄러워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베드로 자신이 부끄러워해 본 경 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 그래서 그는 뼈아픈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습니까? 17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심 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으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전도했습니다. 주 예수 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우리는 고난을 전도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까? 또한 고난의 때, 우리는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 할지어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 까? 첫째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나에게 억울한 고난이 다가올 때, 그때에도 선을 행해 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합니다. 왜요? 그들이 우리를 혹시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임 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며 박해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서 있는 그리 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선을 행하면서 혹시 육체가 죽임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네 영혼을 미쁘 신 조물주께 부탁하라 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한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 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주님께 부탁했습니다.우리도 죽을 때 하나님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마음놓고 부탁해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헌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고난 속에서도 더욱 철저히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이 최후의 헌신은, 최후의 고난을 최후의 승리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 이길 수 있는 힘과 비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시련이 오면
벧전 4장 12~19절 / 이병일목사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반대말 찾기를 합니다. 위-아래, 춥다-덥다, 사랑-미움, 아버지-어머니 등등. 쭉 나열하다가 보면, 그 의미가 반대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가까운 짝말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말이라고 합니다. 같은 부류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보완하거나,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있기도 합니다.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게 됩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집과 분별심이 작용하는 불완전한 세상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이 있게 됩니다.
그 짝말들 중에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화두로 하여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빛과 어둠의 은유를 통해서 삶을 표현합니다. 빛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선(善)하다고 하지만, 어둠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악(惡)하다고 합니다. 낮과 밤의 차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낮이 시작되는 새벽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희망을 갖게 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가 성탄절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빛은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어둠과 혼돈을 물리치기 위해서 처음으로 빛을 만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빛이며, 세례자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장).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고,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장).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이며, 빛의 열매(선행, 정의, 진리)를 맺으며 어둠의 일을 폭로하라고 합니다(에베소서 5장).
반면에 어둠은 살인의 음모와 죽임의 시간입니다. 무지와 깨닫지 못하는 미명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술수와 모략으로 유혹하는 어둠은 빛과 깨달음과 보게 됨의 반대이고, 밤이라는 시간으로 구체화 됩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위기의 시간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잡히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당한 것도 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도 밤입니다.
실제로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삶은 빛과 밝음을 추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실제로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입니다. 그 빛으로 모든 식물과 동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연 에너지인 빛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순환하게 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빛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반대로 어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 크게 하였고, 빛과 어둠을 반대의 자리에 놓고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무시하거나 어둠을 의인론적으로 인간의 죄에 환원시켜 구원과 연결짓는 감상적인 찬가들이 우리 세계의 과도한 조명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을 서로 대칭되고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계몽주의로 시작한 근대 이후의 역사는 빛과 함께 있는 어둠을 부정함으로써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둠을 지양하고 빛을 지향하는 삶은 문명의 힘으로 어둠의 영역을 침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스스로를 빛으로 칭하면서 중세의 역사를 암흑기로 말하였습니다. 중세시대를 암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관점에서만 그렇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하여 결코 중세시대를 암흑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려고만 한다면, 밤도 대낮같이 밝힐 수 있게 되었고, 밤이나 낮이나 시간을 구별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둠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고, 빛으로 어둠을 정복하려는 과정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신비의 시간도 정복하려 했습니다. 빛이 없음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빛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빛과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의 오류를 극복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빛과 어둠은 반드시 서로 공존하고 있으며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둠은 그 속에 빛을 담고 있으며, 빛은 그 내부에 어둠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은 뒤섞여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차원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큰 나무가 서 있기 위해서는 땅 속에 그 만큼이나 큰 뿌리를 깊이 박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둠과 밤은 쉼과 명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게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둠의 영역이 침범당한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점점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상의 원래 모습이 어둠이었던 것처럼 모든 생명의 근원도 어둠이었습니다. 우주의 90% 이상이 어둠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잉태한 자궁이나 씨앗을 품고 있는 껍질도 어둠으로 형상화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어둠과 빛의 영역은 서로를 보완하며 공존하고,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의미와 오해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보여줍니다. 어느새 우리의 삶은 풍요와 편안함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족함이나 시련과 불행을 두려워하고 견디지 못합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풍요로움과 부족함, 편안함과 시련이 서로 보완하며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에게 시련이 닥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절망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 결손상태에 임하게 되었을 때,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가 있습니다. “충격 - 부인(일어난 현상에 대한) - 확인 - 좌절과 비애 - 인정 - 치료에 자발적으로 응함 - 변화에 대한 걱정(갈등) - 사회적 적응”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시련이 닥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충격과 부인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인이나 절망의 단계를 훌쩍 건너뛰어서 자기에게 일어난 현실을 받아들여서 위로받기 보다는 오히려 주위의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가 되려면 자기의 행복과 시련이 서로 의존적이고 공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는 반드시 행복이 함께 공존하고 녹아있음을 알아야 하고, 행복을 느끼는 상황도 마찬가지로 불행과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 속에 불행이 있고 불행 속에 행복이 있음을, 그리고 희망 속에 절망이 절망 속에 희망이 내포되어 있어서 어둠과 빛이 반전하듯이 행복과 불행도 그렇게 반전하며 나아가는 과정임을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빛과 어둠, 시련과 행복이 서로 보완적이라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흐르면 치유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동쪽 하늘의 푸르름의 빛과 함께 찾아오는 여명이 주는 신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주는 휴식과 침묵을 충분히 누린 사람이 새벽을 신선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시련을 견디면서 아픔과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시련을 겪게 되지만, 시련에 대처하는 방식은 각기 다릅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가슴 속에 쌓아둔 채로 묵묵히 견디는 사람도 있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결과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내게 시련이 오면, 흐름을 타면서 쉼과 명상의 기회, 하느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극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시련이 오면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시련을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시련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여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놓여 있는 징검다리(사닥다리)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굳게 세워주고, 강하게 하며 기초를 튼튼하게 할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누리는 행복보다는 어둠을 즐기는 가운데에 희망을 만들어가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 더 큰 기쁨을 줄 것입니다. 청년주일을 맞이하는 청년들, 그리고 모든 교우들께 당부합니다. 이미 갖추어진 것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삶에 더 큰 의미와 기쁨을 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귀찮아하지 말고, 함께 즐기며 희망을 만들어 봅시다.
봄에 피는 꽃이 아름답고 대견한 이유는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박상미 님의 “빛과 어둠의 갈래에 서서...” 라는 시를 들으며 묵상하겠습니다.
따스했다...밝고...다정했다...
그래서 난 그것을 빛이라고 믿었다..
싸늘했다...어둡고..냉정했다...
그래서 난 그것을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빛은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어둠은 언제나 주위 사람에게 무관심했다..
내 마음속에 어느새 한 가지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빛은 좋은 사람이고...
어둠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만...시간이 아주 많이 자나고 나서야 난 알았다...
밝다고 해서 빛이 아니고, 어둡다 해서 어둠이 아님을...
내가 너무나 지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할 때
빛은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따스하고 다정했지만...그건 모두의 것일 뿐... 그뿐이었다.
그 밝음으로 내 슬픔을 드러내려 했고
따스함으로 날 녹여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정함으로 날 무너지게 했다..
하지만 어둠은 내가 쉬게 해주었다..
어두움으로 날 가려주었고..
그 싸늘함으로 나의 슬픔을 얼려주었다..
그리고 냉정함으로 동요하지 않은채 날 위로해주었다..
그랬다..
어쩌면 난 계속 겉만 보고 세상을 다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었는지도 모른다..
빛이 있는 그 곳은 밝고 편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로 간다면 난 그와 같은 바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겉만 따스하고 속은 얼음보다도 차가운 빛이...
물론 어둠이라고 해서
모두 그와 같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적어도 겉만 따스하고 속은 차가운 사람보다는
겉은 차갑고 주위에 무관심해도
막상 알고 보면 다정하고 따스한 그런 어둠이 되고 싶다...
빛과 어둠의 갈래 길에 서서...
난 이제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따스한 어둠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