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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성고 57회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목
열심히 해설을 듣는 모습 ~~~제임스박 똥폼으로 감시하셔~~~???
늠름한 보성 57 노땅님들~~~
육사에 대한 홍보관에서 약 15분 영상교육도 보고~~~
육사생도들의 사열행사
학교생활
각종 취미활동 활쏘기,승마,골프,자전거타기 등등 다양한 취미활동상
군사훈련
보기 좋소이다!!!추억의 기념촬영
육사의 졸업생도 중에 가장 위대한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연병장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시 답사를 직접 타고 다녔던 헬기에서 잠시~~~
박정희 대통령은 육사 2기생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육사 11기로서 이때부터 정식 4년제 육군사관학교로 발전되었다네요!!!
전통은 축구 골킵선수였고,노통은 럭비선수였다네요!!!
1950년 10월 6.25전쟁 중 진해에서 4년제 육사 창설의 공로자인 장군이 100세로 별세하기 2개월 전(1992년) 육사생도에게 보낸 편지로서 다음은 본문의 내용 중 일부이다.
"인내심과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란 소중한 것이지만 또한 소멸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자유'를 수호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군대가 필요하며 그 군대의 국민의 의사에 응해야 하고 그 군대의 전문성과 모범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밴 플리트(Van Fleet, James Award, 1892~1992.9.23)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1951년 4월 M.B.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6․25전쟁에도 참전하는 한편, 한국군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육군사관학교 재건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장교단 및 군의 기초를 다지는데 큰 일익을 했던 인물이다. 1892년에 태어나 1915년 미 육사를 졸업하고 제2차세계대전때는 미 제4보병사단장으로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전사(戰史)에 기록된 유명한 발지전투를 지휘한 장본인이다.
또한 자기 외아들이 공군으로 6.25에 참전 원산폭격시 추락 실종해서 북괴에 억류된 포로로
잡협다는 보고를 듣고, 특공대를 투입 구출할 것을 부하로 부터 재가를 올렸으나
만일에 다른 많은 희생이 예상되어 구출작전을 못하게 한 장군이
었답니다.
진학이가 다시 태어나면 육사에 입학하고 싶어서~~~ㅋㅋㅋ
야외 무기전시관을 둘러보고~~~ ,범무천 동상은 박대통령 사비 35만원을 희사하여 건립했다네요!!!
잘 조성된 연못 공원에 벤취도 많이 있어 연인이 면회오면 데이트 장소로 인기라~~~
육사 견학을 마치고 맞은편 태릉으로~~~
문화탐방에 열의가 대단한 보성 동무들 잠시 인증샷!
이조 왕릉전시관에서 약 30분간 왕릉의 위치와 왕릉의 구성 과 종묘제례에 대한 멋진 해설로 공부도 하고~~~
태조 이성계는 4대손 함흥에 8기 릉을 만들고 이조 왕릉 42기를 합하면 왕릉이 50기가 우리나라에 있답니다.
왕릉을 만드는데 약 5개월이 걸리는데 제7대 세조때 부터는 왕릉을 짓는데 간소화해서 약 3개월 정도 걸렸답니다.
태릉 솔숲길을 걸어면서 힐링도~~~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康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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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로 옮긴 정릉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봉분을 감싼 12면 병풍석에는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을 새겼고,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 12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봉분 바깥쪽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과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시켰으며, 뒤쪽으로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쌓았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과 석마(石馬) 각 1쌍, 팔각 장명등이 있고, 가장 아랫단에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있다. 능원 밑에는 정자각·비각·수직방(守直房)·홍살문이 있다.
태릉은 문화해설 시간이 맞지 않아 강회장께서 있는 실력으로 해설을 대신 듣고~~ㅎㅎㅎ 공부 많이 하셨네~~~
문정왕후는 본관은 파평(坡平), 성은 윤(尹),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며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중흥을 도모하였다
문정왕후는 남존여비가 세상의 정당한 가치관이라고 굳게 믿어지던 시대에 비록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누구보다 지적이었던 조선의 남성지배 관료층을 발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오로지 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 될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고 지성과 지성의 대격돌장이던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시켰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지적이며 어떤 남성 관료와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을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조선왕실에는 몇차례 왕비들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남성 관료들을 쥐락펴락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종종 부정적인 의미로 중국의 측천무후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역발상을 해보면 그것은 그만큼 문정왕후의 정치능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정왕후에 대해 이후 남성 지배층들이 보여준 것은 불평이나 비난의 수준이었을 뿐, 그녀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한 것을 보면 문정왕후는 조선 전시대를 통해 매우 강렬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나 짐작하게 한다. 그녀의 능호를 여느 왕비들의 능호에 주로 붙는 여성적인 글자가 아니라 ‘태(泰)’자를 붙혀 태릉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정왕후가 가진 탁월함과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주는 한 부분이다
노원구청에서 추천한 맛집 제일콩집으로~~~
두부전골에 감자전 과 막걸리 끝내주네~~~오늘은 웰빙식사이군~~~
강희인산악회장께서 참석에 대한 감사와 협조에 대한 인사말씀이~~~
오늘의 만찬은 지난번 딸 혼사에 대한 보답으로 서병호 교우가 스폰서한답니다 감사~~~오늘 회비는 없소이다!!! 박수
오늘 참석 인원은 총 18명이 참석했습니다.
이충선 교우회장께서 격려말씀도~~~
헤어지기가 아쉬워 노천까페에서 입가쉼 호프 한잔후~~~
드 늦기전에 노래방에서 띵가띵까 병호의 노래 실력 한곡조로~~~ 오늘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원규가 노래방 가자고 바람잡아 왔는데 명가수 실력을~~~ㅎㅎㅎ
또한 지그시 눈감고 구수한 노래가락에 인수가 스트레스 확 날려~~~
그 동안 유난히 무덥던 여름을 잘 보내고 9월 산행에서 우정과 건강한 하루를 잘 마치고
가을 단풍산행시 10월에 다시 만납시다
강희인 산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