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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동북아 역사기행을 재개하기 위해 중국 현지를 답사한 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4시에 숙소에서 출발했습니다. 통화를 거쳐 집안까지 가는 일정입니다. 일요일 아침이라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고구려 당시 비류수라 불렸던 혼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달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멀리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통화는 환인보다 상류에 있어서 가는 동안 중간중간 혼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고속도로가 닦이지 않아 시간이 꽤 걸렸는데 새 고속도로를 달리니 두 시간 남짓 만에 집안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터널도 이전처럼 어둡지 않고 밝고 쾌적하게 건설해 놓았습니다. 집안에 가까워 오자 도로 안내판이 고구려의 수도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집안으로 가는 길 중간에 청하라는 동네가 있는데, 마침 그곳에 고속도로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역사기행을 할 때 대중이 이용할 수 있을지 점검을 하기 위해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이 마을에서 쉬었는데 그때마다 여자 화장실 칸이 부족해서 남자 화장실까지 이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장실이 넓고 한국 못지않게 쾌적했습니다.
휴게소에는 고구려 삼족오와 인삼을 홍보 소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오전 6시가 넘어서 집안에 도착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로포장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압록강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집안에는 압록강 건너 북한 만포로 들어가는 기차 철교가 있습니다. 동네 어귀에는 큰 동상이 하나 있는데 자세히 보니 6.25 전쟁(항미원조 전쟁) 때 중국군이 가장 먼저 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군한 곳으로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흐렸지만 북한이 잘 보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쪽에서 철조망을 높고 견고하게 쳐서 바라보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근처의 국동대혈은 어떤 상태인지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연락을 여기저기 하자 관리자가 와서 “코로나 때 폐쇄한 이후 아직 개방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관리자의 허락을 얻고 잠시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철조망 너머로 북한에 세워진 건물들이 다수 보였습니다. 강변 초소도 보이고, 구호를 크게 쓴 건물도 보였습니다.
늘 꺼져있던 만포의 공장 굴뚝에도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집안 시내로 들어와 아침시장에서 밥을 먹기로 했습니다. 새벽 4시에 출발했는데 어느덧 8시가 다 되었습니다.
아침을 죽으로 간단하게 먹고, 바로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집안 서쪽에 있는 서대묘와 천추묘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천추묘로 가려면 국내성 서문을 지나 통구하를 건너야 합니다.
천추묘는 아직 정비가 덜 되고 문이 굳게 잠겨져 있었는데, 문 앞을 기웃거렸더니 한 분이 와서 자물쇠를 열어 주었습니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천추묘는 집안의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늘 문이 잠겨져 있어서 들어갈 엄두도 못 내었는데 처음으로 들어와 봤어요.”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후 자세히 둘러보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곧 개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물쇠를 열어준 분은 개방할 계획이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천추묘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서쪽의 큰 무덤이라는 서대묘가 있습니다. 서대묘도 가까이 가보기로 했습니다. 진입로가 조그마한 골목이라 입구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서대묘를 향하며 스님이 말했습니다.
“늘 역사기행단을 이끌고 오면 이렇게 둘러보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 답사 일정으로 오니 세세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네요.”
서대묘를 둘러본 후 내려오는 길에는 강 건너 북한 쪽이 잘 보였습니다. 강변에 풀과 나무가 전혀 없는 넓은 들판이 허전해 보였습니다. 중국 농민들은 집의 담벼락도 놀리지 않고 대파를 심어 놓았습니다.
차를 돌려 환도산성으로 가 보았습니다. 성벽은 코로나 이전과 비슷한 상태였고, 성벽 중간중간 깃발을 꽂아 놓은 게 달라진 점이었습니다.
안내판이 보강되었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환도산성의 공간 배치가 중국의 전통 사상인 풍수지리설에 따라 만들었다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환도산성은 고구려인들이 만든 것인데 말이죠. 또 입구에 산성 사진을 걸어놓은 조그만 전시관을 함께 마련해 놓았습니다.
산성을 내려와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새로운 전시물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입구에는 고구려를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시기의 옛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첫 불교 사찰이었던 초문사로 추정되는 동대자 유적을 복원된 모형으로 전시해 놓았습니다. 집안에서 출토된 불상도 있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화살촉을 사용했습니다. 벽화에서 보듯 짐승을 사냥할 때는 끝이 뭉툭한 화살촉을 사용하여 상처가 남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방단계제식 석실분 모형도 있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묘지 위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추묘라고 이름이 불리게 된 기와,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밝혀준 기와가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난 다음 장수왕릉이라고 알려진 장군총으로 갔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기차 길을 넘는 오르막 길이라 혼잡했는데 지금은 주변이 캠핑하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일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5회분 5호 묘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폐쇄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안타깝지만 폐쇄했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주차장 입구에 줄이 쳐져 있고, 내부에는 풀도 제대로 베지 않고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5회분 5호 묘를 보지 못한다면 대신 박물관을 둘러보는 게 좋겠어요.”
대략 기본적인 유적지를 모두 둘러본 후 역사기행을 할 때 늘 점심을 먹으러 갔었던 압록강변으로 갔습니다.
강 건너 북한 땅에는 초소에 서 있는 군인들과 들판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식당에 도착하여 오후 일정을 의논하였습니다. 마침 비가 장대같이 쏟아졌습니다.
길이 좋아 답사 일정이 일찍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역사기행 코스 이외의 지역을 답사할까 하다가 스님이 운전자인 진신 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안에서 연길까지 7시간이나 걸리는데 갈 수 있을까요? 5년 만에 중국에 왔는데, 조춘호 선생님을 만나보면 좋겠어요. 하지만 운전자가 무리가 된다면 굳이 안 가도 됩니다.”
조춘호 선생님은 초창기부터 동북아 역사기행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분입니다. 오늘도 스님 일행을 안내해 주고 있는 조신 님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운전자인 진신 님이 갈 수 있다고 대답을 해서 점심을 먹고 나서 연길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또 예전에 북한난민을 도울 때 함께 했던 조선족 어르신들 몇 분도 함께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도로 위를 한참 동안 달려 백두산 산록을 지나자 천지 휴게소가 나왔습니다.
어두워질 무렵 드디어 연길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7시에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30분을 늦추었습니다. 5년 만에 오는 연길 거리도 많이 바뀐 상태였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자 초대받은 조선족 어르신들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한분씩 인사를 나누고 늦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조선족 사기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으로 인연이 된 조선족 어르신들은 지난 30년 동안 북한난민 돕기, 역사기행, 현지 통역 등 많은 분야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30년의 긴 세월을 스님과 함께 해 온 분들입니다. 식사 대접을 한 후 한 분 한 분에게 선물을 챙겨드렸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어르신들을 보내고 스님은 몸이 불편해 식당에 오지 못한 분들을 찾아뵙기 위해서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먼저 코로나 기간에 돌아가신 방학봉 교수님의 사모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방학봉 교수님은 초창기에 동북아 역사기행을 안내해 주셨고, 사모님은 한평생 의사로 살아오면서 중국에서 고생하는 북한 난민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음은 조춘호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30년가량 역사기행을 도와주다가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건강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작은 딸인 조신 님이 2009년부터 역사기행에서 통역을 도와주다가 아버지가 쓰러진 후에는 역사기행을 전담해서 맡아주고 있습니다.
스님은 옛 인연들을 찾아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밤 11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연길의 밤거리도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월 통일의병대회에서 질문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해 잘 모르고 살까요?
“통일의병이 되기 위해 역사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민족의 시원이 요하 문명이라는 사실에 대해 배운 후 저의 무지에 대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변의 지인들도 저와 비슷한 수준이어서 왜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중국 변방의 아웃 사이더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거기에 수긍하고 사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민족은 배달 문명 시대부터 동북아 지역에 이주해 와서 이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토착 주민들과 통합을 하여 나라를 이루고 살았는데,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보면 그 역사가 배달 시대부터 약 6천 년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단군 시대라고 하는 것은 선진 문명을 가지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 지배 세력을 형성하다가 토착 세력과 결합을 해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나라의 임금이 된 때부터를 말합니다. 단군 시대부터 지금까지는 4천3백 년이 됩니다. 우리 민족은 계속 독립적인 문명을 가지고 동북아 문명의 중심국가 역할을 하다가 이웃의 황하 문명을 기반으로 한 집단과 경쟁과 갈등, 그리고 충돌을 하게 됩니다. 신석기 문명과 청동기 문명까지는 배달 문명이 월등하게 앞섰는데, 철기 문명 시대에 와서는 약간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선 문명은 주로 안주를 하게 되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더디기 때문입니다. 철기 문명이 도래했을 때 약간 뒤처지게 되면서 중국의 한 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게 되고 고조선이 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토 일부가 중국 땅으로 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고조선 유민이 이주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주민들이 지금의 한반도로 많이 옮겨 왔습니다.
원래 우리 민족의 주 거주지는 한반도가 아니고 훨씬 더 북쪽인 만주 지역이었는데, 전쟁에 패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일부는 한반도로 이주하고, 일부는 일본으로 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양쪽 문명은 오랜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부여와 중국의 전쟁,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입니다. 계속 전쟁을 해오면서 어느 일방이 우세한 것이 아니라 약간 밀리면서도 경쟁을 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에는 우리 문명의 세력이 완전히 축소되어서 밀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세력이 축소된 원인은 중국에 밀려서 축소되었다기보다는 우리 문명권 안의 주도 세력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 안에 있던 피지배 민족인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고, 다시 말갈의 후예인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다시 몽골이 원 나라를 세우면서, 동북아 문명의 주도권을 우리 문명권 안에 있던 소수 민족이 주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은 동북아 문명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전쟁을 일으켜서 왕조가 바뀐 경우도 있지만,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처럼 우리가 이민족에게 패할 때는 이민족이 도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 서적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런 참상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우리 손으로 기록한 역사 서적이 대부분 사라지게 됐습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들만 나중에 다시 기록이 되면서 종합적인 역사책이 남지 않고 토막토막 난 기록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경성대학에 역사학부가 생기면서 그 당시 유럽에서 유입된 역사학의 조류인 실증주의 학문이 팽배해지게 되었습니다. 실증주의란 역사를 연구할 때 증거를 통한 고증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조입니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실록, 조선실록이 있지만, 그 이전의 기록물은 소실이 되어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 역사책 안에 기록된 동쪽 나라 오랑캐들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기록만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실증주의 사조에서 그 기록들을 모아 없어진 역사를 복원하다 보니 우리의 역사가 짧아지고 내용이 빈약해졌습니다.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 쓴 변방사에 대한 기록물이다 보니 우리의 역사는 당연히 중국의 변방 민족처럼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누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한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관 주도로 교과서가 만들어졌고, 그 교과서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할 때 구전으로 전해진 옛날 역사에 대한 기록물이 민간인의 집에서 하나씩 발견됐습니다. 그걸 보니까 우리의 옛날 역사가 어마어마했던 겁니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 같은 분들이 그걸 모아서 편집하고 책으로 출간을 하게 되었어요. 환웅 시대와 단군시대의 옛날이야기라고 해서 ‘환단고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습니다. 한 사람이 잘 정돈하거나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쓴 것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이 책으로 우리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런데 옛날 기록에 없는 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된 겁니다. 내용도 좀 황당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고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런 얘기라도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중국 만주 지역에서 옛날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연대를 측정해 보니, 4천 년 전 것이다, 6천 년 전 것이다, 9천 년 전 것이다,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중국의 황화 문명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5천 년에 불과한데, 그 보다 훨씬 더 오래된 유적이 나온 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의 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아무 기록이 없었고,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중국 입장에서는 유물은 있는데 역사가 없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역사는 있지만 유물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 유물이 발견된 지역이 묘하게도 우리 조상들이 환웅시대와 단군시대에 살았던 주요 지역입니다. 단군신화가 옛날의 황당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최근에 발견된 유물과 결합하면 거의 맞아떨어지는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 확실하게 검증을 받으려면 우리의 역사와 발견한 유물을 함께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이 그런 연구 작업을 함께 하기가 어렵다 보니 아직 검증 절차를 못 거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검증되지 않았다고 문제 제기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직관적으로 보거나, 이것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유의미하고 연관성이 깊습니다. 그래서 저도 없는 시간을 내어서 두 차례나 일일이 그 지역을 답사해서 발견된 유적과 전시된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이나 장수왕릉과 같은 피라미드형 무덤은 고구려인들이 만든 독특한 무덤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무덤이 1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요하 지역에는 4천 년 전에 이미 그와 비슷한 무덤과 성곽이 만들어졌다는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독창적으로 창조한 게 아니라 고구려인들이 이 문명의 계승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에서 부르는 요하 문명은 우리말로 배달문명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세계 4대 문명만 강조했는데, 요하문명까지 넣어서 5대 문명이라고 해야 합니다. 중국학계에서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조선의 옛 문명이라고는 절대로 말을 안 합니다. 이 지역에 옛 문명이 있었다고만 말합니다. 그리고 중국은 만리장성 밖의 오랑캐땅이라고 여기던 곳에서 발견된 요하문명을 중국문명 원류의 한 줄기로 편입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문명은 요하문명과 황하문명 두 개의 원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물이 자기 나라 땅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연구를 할 때는 현재의 한국에서 발견되었느냐, 중국에서 발견되었느냐, 이렇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인류 문명사는 소유 문제를 갖고 다투지 말고 나라를 넘어서서 공동으로 연구를 하면서 문명의 원류를 찾아나간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언어학적으로도 중국은 차이나티베트어족이고, 우리나라는 우랄알타이어족입니다. 문명적으로도 중국은 황하문명을 계승한 사람이고, 우리는 배달문명을 계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다 보니 충돌도 하고 교류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발전해 온 겁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우리가 주도권을 빼앗기다 보니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편재가 된 것입니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려면 모두가 합의하는 검증 절차를 거쳐야 되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명한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가 나와서 국가 차원에서 투자하고 연구해서 결론을 낸 다음에 교과서에 실으면 제일 좋겠지만, 현재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이 그렇게까지는 안 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내일은 연길을 출발하여 청산리 전투터를 답사하고 통화를 거쳐 심양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