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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역사와 저장방법★
이전에 일본이 기무치란 이름을 국제표준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알려져 화제였었죠.
다행히 국제표준은 우리나라의 "김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내실을 살펴보면.
이름만 한국의 김치를 사용하고 있을 뿐 내용은 한국식 발효김치가 아닌 일본의 짝퉁 기무치를
표기하고 있다더군요.
한국인들은 이런것도 모르고 김치의 "이름"만을 지켰다며 득의양양 하는 중이죠.
김치전쟁은 현재. 우리한테 그닥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김치의 뜻과 역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종류는.....다음에 다루겠습니다. 너무 길면 읽기 귀찮아 지니까....^^ㅋ
<김치의 유래>
김치류를 뜻하는 말로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의 중국 문헌 '저(菹)'라는 글자가 나온다. “
저(菹)”는 채소 절임을 뜻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사」에서 “저(菹)”가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문헌을 인용한 듯하다. 고려시대에 김치 무리를 ‘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저’나 ‘지’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우리말에 “디히”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15세기 후반 당나라의 시인 두보의 시를 우리말로 옮긴 두시언해에 원문의 “저(菹)”가 “디히”로 번역된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우리고유의 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김치를 “지”라 부르고 있으며 서울말에도 오이지, 석박지, 싱건지, 젓국지, 짠지, 등의 지는 ‘디히’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는 평안도 방언에서는 ‘오이디, 잔디’라고 함도 중요한 증거가 된다. “장아찌”는 16세기의 한 책에서 나온 “장앳디히”가 장아찌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디히”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조 중종 13년에 “쉰무우 딤채국”이라는 말이 나오고 중종22년에 “저”를 딤채조. ‘제위위제’라 하여 김치라는 말이 등장한다.
또, 김치 무리에 “저(菹)” 의외에 “제()”가 등장하고 있다. 1600년대 「주방」에서는 가지 등을 간장 및 양념을 하여 담근 것을 ‘야지히’라고 기록하여 ‘침채(沈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
침채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였는데 이것은 아마 소금에 절인 채소류가 국물이 나와 그 속에 잠기게 되는 김치 담그는 방법이
우리나라에만 있어서 이것을 15세기의「내훈」에서 ‘저’를 침채라 하였고 『훈몽자회』에는 저를 일컬어 “딤채 조”라 하였는데 이것은 팀채가 “딤채”로 다시 구개음화 되어 “김채”가 되고 “김치”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다.
소금에 절인 채소에 천조, 마늘, 생강 등의 향신료만 섞어서 재워두면 채소의 수분이 빠져 나와 채소 자체가
소금물에 가라앉는 침지(沈漬)상태가 되는데 여기에서 "침채(沈菜) : 소금에 절인 채소" 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침채-딤채-짐채-김채-김치"로 변화 되었다고 국어학자들은 설명한다.
한편 "김장"의 어원은 「이조실록(李朝實錄), 1409」의 "태종 9년에 침장고(沈藏庫)를 두었다" 는 기록 등으로
보아 "침장(沈藏)"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요약해보면 김치에 관한 어원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저(菹) -> 디히 -> 지히 -> 지
침채(沈菜) -> 딤채 -> 짐채 -> 김채 -> 김치
침장(沈藏) -> 김장
역사
신라 ·고려시대에 와서는 나박김치와 동치미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양념으로는 천초(川椒) ·생강 ·귤껍질 등이 쓰였고, 산갓처럼 향신미의 채소로는 국물김치를 담가 먹었다. 향신료로 천초를 넣다가 고추로 바뀌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며, 고추가 쓰이기 전에는 맨드라미꽃을 섞어 넣어 붉은 색을 내었다고 한다.
젓국에 고추를 넣어 양념하는 방법은 조선시대 중엽 궁중에서부터 발달하였다고 하는데, 궁중의 김치도 민간의 김치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다만 젓갈을 조기젓 ·육젓 ·새우젓으로 썼다. 이에 비해 민간에서는 멸치젓이나 갈치젓을 주로 썼다고 한다.
18세기 중엽의 기록인 《증보산림경제》에 의하면 여러 가지 김치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나복함저(蘿菹)는 무에다 고추를 저며서 넣고 오이 ·호박 ·동아 ·천초 ·부추 ·미나리 등을 뿌리면서 항아리에 포개어 담고 소금물과 마늘즙을 넣고 봉한다고 하였다. 황과담저(黃瓜淡菹)는 오이를 주재료로 하여 나복함저와 같은 방법으로 담근다고 하였고, 초숙(酢熟)은 죽순 ·부들순 ·연뿌리 ·무 ·부들뿌리 등을 소금과 누룩, 또는 멥쌀밥과 소금 ·누룩에 섞어 절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김치를 담그는 방법으로, 오이 ·가지 ·생강 ·마늘 등을 술지게미 ·소금, 백비탕(白沸湯) 식힌 것에 담갔다 건져서 다시 술 ·술지게미 ·소금을 섞은 것에 담그는 조해법(糟法)과, 가지 ·동아 ·오이 등을 초에 절였다가 다진 마늘과 소금을 섞어 절이는 산법(蒜法)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배추김치를 담그는 법은 비교적 후기에 개발되었던 것 같고, 무김장이 훨씬 먼저 숙달되어 있었던 것 같다.
*뜻
김치(←沈菜)[명사] 무˙배추˙오이 같은 채소를 소금에 절였다가 고추˙파˙마늘˙젓 등의 양념을 버무려 넣고 담근 반찬.
*시대별 김치
삼국시대 ☆
당시의 문헌기록이 없는 관계로 고대의 김치 발달과정은 확실히 규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시기에는 정착생활이 보편화되어 채소류의 저장성을 높이기 위한 단순한 소금절임이 성행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
도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김치에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배추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 시대의 김치에는 순무장아찌와 순무소금절이(김치류)가 있었으며, 김치는 단순히 겨울용 저장식품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즐겨 먹는 조리가공식품으로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조미료가 발달되어 각종 채소에 향신료를 섞어 만든 김치가 있었음이 추정된다.
조선시대☆
지금과 같은 우리 김치의 형태가 시작한 것은 외래 채소들, 특히 결구배추 가 도입 재배되어 이를 주재료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나 200년이 지난 18세기에 와서야 김치양념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다. 조선후기에 고추를 조미료로써 사용하면서부터 김치의 담금이 다양해지고 이때부터 김치는 빨간색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장법
- 여름철 김치저장방법 -
우리 조상들은 더운 여름에 김치를 저장하기 위해서 석정과 이중독이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흐르는 냇가나 우물가에 석정(石井)을 설치한 후, 내부에 이중독을 넣어 흐르는 물로 하여금 이중독을 차갑게 유지하여 그 안의 김치를 차가운 온도로 보전하였던 것이다.
- 겨울철 김치저장방법 -
"땅에 김칫독을 묻고 그 위에 가는 통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워 짚을 덮어서 만든 작은 움집으로, 눈, 비를 피하고 일정하게 유지되는 땅속의 온도를 이용하여 김치를 숙성시키고 장기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진다.
1. 남부지역: 땅을 파서 김칫독을 묻고 짚으로 위를 덮는다.
2. 중부, 북부지역: 묻혀있는 김칫독 위에 원뿔 모양의 움집을 만든다.
3. 대가족의 가정집: 살림집의 부속건물로 김치광을 지어서 김치를 저장한다."
*나무 김칫독
태백산이나 개마고원과 같은 산촌에서 김치를 저장했던 독이다.
예전에는 보통 옹기라고 하는 질그릇이나 오지그릇에 김치나 된장, 간장을 보관하였으나,*옹기
김치를 저장하는 독과 항아리들을 통틀어 옹기라 일컫는다.
이러한 옹기는 가마굴에서 구워지는 동안 표면 전체에 미세한 숨구멍이 만들어져 김치가 적절히 발효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 준다.*김치광
땅에 김칫독을 묻고 그 위에 가는 통나무를 원뿔 모양으로 세운 다음 짚을 덮어 작은 움집을 만드는 것이 김치광이다.*석정과 이중독
여름철에는 우물이나 개울에 이중으로 된 김치항아리(이중독)를 담그어 김치를 보관하였다.
이중독 입구쪽에 찬물이 휘감아 돌면서 옹기 속의 온도를 적당히 유지시켜 주었다.-이미지 없음 ㅡ_ㅡ;;;
*마치면서.
이번장에선 김치의 역사나 어원에 대해 다뤘습니다.
검색중에
-한민족이 채소류를 절여 먹은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 됐지만 파, 마늘 등의 향신료가 가미되는 양념형 김치가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일이라고 한다.
-통배추가 한반도에서 육종 재배돼 무와 오이,가지에 앞서 김치의 주재료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즉 오늘날과 같은 배추김치 원형은 1800년대가 되서야 나타나고 붉은색의 매운 배추김치가 일반화된 것은 19세기 후반.
-고춧가루가 들어간 매운 김치가 만들어진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남미 볼리비아 원산 고추가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에도 붉고 매운 고춧가루의 파트너는 오랫동안 배추가 아니라 무나 오이 등이었다고 한다.
....등이 눈의 띕니다. 뭐, 배추가 원래 지나땅에서 수입된거란 설도 진짜인양 배추농가에서 광고로 쓰고 있더군요.
고려시대 이전엔 "김치"가 그저 무와 오이정도를 소금물에 절인 "짠지"로 일컬음은 신빙성이 있습니다.
마늘,파 등은 이미 많이 먹고 있었으나 김치양념 으론 개발이 안 돼었을수도 있고. "청국장"도 고려때
병사들이 "찐콩"을 볏주머니에 담아 말안장 및에 넣고 돌아다니다 발명되었다죠.
통배추에 대한건 1236년(고려 고종 23년)에 출판된 ≪향약구급방≫에 이미 설명이 나와 있다고 하니 이조시대 명나라 유래설은 이걸로 덮어버릴수 있겠습니다.
고추의 유래에 대해서도--- 한국에서 고추가 일본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던 반면, 일본에선 조선에서 고추를 전한 것으로 여겼다. 도쿠카와 막부 초기 식물학자이자 여행가였던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의 『야마토혼조(大和本草)』(1709)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고추씨를 가져왔기 때문에 고추를 고려후추로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또 1775년에 나온 사전인 『부쓰루이쇼코』에도 “고추가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술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란 기록이 있으니 일본을 경유한 남미 유래설 또한 좀더 유보해야 겠구요.
웃긴건 김치의 역사를 찾아봐도 "빨간배추김치"의 형태는 100년 안팍이라느니 하는 자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위의 [향약구급방]건만 봐도 알수 있듯이 좀더 제대로된 연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아는 것들의 상당수가 영,정조시대에 도입된 것이 많다는데.
이는 전국에 맥을 이어오는 무술을 모아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처럼 원래 있는 것들을 수집,체계화 해서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
시켰다로 봐야 하겠습니다.
즉. 판소리,김장배추,고추가 200년전 정조시대에 정착되었다 함은 [이미 전국에 산재해 있던 것들이 체계화 되어 기록. 보급됨]
이란 것 이지요.
이런 전통문화유산들이 임금 1세대에서 뚝딱 발명될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무,오이 절임에서 몇단계 진화한 "배추김장김치"도 그 역사가 더 올라갈수도 있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추가루 혼합 한 현재의 김치 탄생 이조중엽에 소금값 폭동으로 인해서 소금 대신 고추 혼합한 것이 현재의 김치 탄생 이요
그런일도 있었군요.
그런데 고춧가루로 배추 절이는게 가능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