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파의 시작
구원파는 자생적으로 한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외국에서 침투한 이단 집단이다. 1961년 미국인 선교사 ‘딕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은 유병언과 1961년 네덜란드 선교사 길기수의 영향으로 죄 사함의 깨달음을 얻은 권신찬을 중심으로 대구에서 구원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처음 구원파가 교계에 나타나서 한국교회에 물의를 일으킨 것은 1968년 10월 포항중앙교회에서부터였다. 그 이후 구원파는 1983년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에 반대하다 집단 구타를 당하고 이탈한 이요한(일명 이복칠)을 시작으로 분열로 인한 분파가 시작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권신찬, 유병언이 이끄는 구원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이요한이 이끄는 구원파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이름으로, 박옥수가 이끄는 구원파는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요즘은 권신찬이나 이요한보다 박옥수가 한국 교회에 더욱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박옥수는 2000년에 사단법인 국제청소년연합(IYF)을 설립해 지금은 대표 고문으로 있고, 해마다 많은 청년에게 마음 세계에 대한 마인드 강연을 이어오고 있다.
2. 구원파의 견인 교리에 대한 분석
a. 회개무용론(悔改無用論)
박옥수는 권신찬처럼 종말론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모든 설교가 오직 구원론에 집중되어 있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 내지는 ‘죄 사함’ 문제만 다루고 있다. 박옥수는 죄 사함과 구원을 거의 동일시하고 있어서 늘 좁은 의미에서 구원에만 모든 관심이 있고, 죄 사함이란 단어나 사상이 거의 빠진 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최삼경은 박옥수가 ‘구원지상주의’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의 개념은 정통 개신교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데, 특이한 점은 구원파에서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는 ‘돌이킨다’는 말인데,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는 돌이킬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삼경은 구원파가 한번 회개한 이후에 또다시 회개하는 것을 불신앙으로까지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박옥수 구원파의 가장 큰 맹점은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파에서 통역을 담당하며 8년 동안 충성하다가 극적으로 탈출해 정통교회로 옮긴 정동섭도 박옥수가 “죄에 대한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인데(박 씨는 죄 사함 받는 데 회개가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 기성 교인들이 계속 범죄만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박옥수가 구원을 마치 전매특허 받은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결국 박옥수는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 해도 여전히 삶 속에서 지을 수 있는 옛사람의 습관들과 본성들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성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 베르까우어도 성경에서 신자들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다고 할 때, 죄와 악의 세력들과 싸움이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새로운 삶은 여전히 깊은 그림자에 의해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구원파의 교리에서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박옥수는 “의인은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가 견고하게 서 있으려고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견고하게 서 있게 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원파 교리의 오류는 신자가 죄 사함을 받을 때, 신분과 성품이 동시에 의인이 된다고 여기는 것에 있다. 따라서 구원파의 교리에는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로서의 ‘점진적인 구원’이 빠져 있고, 결국에는 칭의와 성화 사이의 긴장을 제거해 버린다. 이러한 구원파 교리에 반하여 존 머레이는 견인 교리가 ‘신자라면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고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누리게 하는 교리’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에 참된 믿음의 시금석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것이라고 말하며, 칭의와 성화 사이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르까우어는 ‘죄의 잔재’(remnants of sin, reliquiae peccati)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죄의 잔재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지상 교회의 삶에 속하는 부분으로서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거룩성과 죄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죄의 잔재를 묵인하거나 간과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보았다. (사 64:6) 깔뱅도 신자가 삶의 전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단 한 번 포용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베르까우어는 신자들 안에 나타나는 이러한 의인 됨과 죄인 됨 사이의 관계가 ‘동시에’(simul)라는 원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내재된 죄’(indwelling sin) 또는 ‘육신의 잔재’(remnants of the flesh)에 대해서 신자는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경고한다. 구원파 교리처럼 의인으로 칭해지면 모든 것이 완전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는 여전히 수많은 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본성적으로 ‘동시에’라는 것은 불평만 하고 기쁨이 없는 기독교로 왜곡되고 변질할 수도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반(反)율법주의나 죄의 심각성이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일반화로 쉽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거듭난 신자에게는 ‘동시에’라는 중대함이 신자의 관심에서 벗어나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박옥수는 그의 책 『번제(燔祭)』에서 “여러분 마음속에 미움, 음탕한 마음, 악한 생각, 정욕, 욕심 이런 것들이 일어날 때 ‘이걸 없애야 하는데···’ 하고 여러분이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하십시오.’ 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진술한다. 결국 이러한 교리는 율법 폐기론이나 도덕 폐기론과 같은 자유방종주의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회개 무용론은 예수의 사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성도를 나태함이나 방종에 이르게 만들 것이다. 신자가 받은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보증되기 때문에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구원파 교리는 값없이(free)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야말로 값싼(cheap) 은총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이라면 그들의 삶은 값싼 은총으로 인해 비록 구원받을지 모르나, 그 은총은 더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통치하지 못할 것이다.
b.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적인 분리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을 배타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박옥수는 구원이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고 여기지만, 반면에 은혜 이후에 인간의 노력은 무용지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즉 피구원자는 어디까지나 가만히 있고, 구원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박옥수는 “이제 더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와 싸워서 이기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죄와 싸워서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구원파 교리에 반하여 헤르만 바빙크는 성화를 ‘법적인 성화’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하면 신자의 거룩함이 이미 존재해오던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수고와 선행을 통하여 소유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모순을 이루거나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속에서 하나님이 성화를 이루어 가신다고 주장한다. 즉 신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복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베르까우어는 신자가 구체적인 삶의 행위들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거룩과 성화의 개념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구별된다는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르까우어는 신자가 삶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면서 ‘객관적인(objective)’ 또는 ‘제의적인(cultic)’ 구조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거룩과 성화를 구체적인 삶과 분리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신·구약성경은 철저하게 경고하며 반대하고 있다고 베르까우어는 부연 설명한다. 하인리히 오트도 “신앙의 확실성은 지나간 어떤 것, 이미 통찰된 어떤 것, 단번에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이나 혹은 자기 것으로 삼은 것에 따르거나 거기에 근거를 둘 수 있는 확실성이 아니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의 확실성은 실천적인 확실성이며, 이러한 확실성은 단지 삶 속에서, 그리고 행동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지식적인 동의와 의지적인 회개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옥수는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립 시켜, 하나님 앞에 둘 다 가지고 나가면 안 되고, ‘믿음’ 하나만 보여주면 그만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신자의 행위가 추하고 더럽든지 전혀 상관할 바 없고, 집에 버려두고 오면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자기가 닮으려고 노력하면 주님이 절대로 역사하지 않고, 신자가 쉬어야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그는 주장한다. 신자가 무엇인가 하려 하면 예수는 구경만 하신다고 주장하고, 신자가 더는 못하겠다고 해야만 예수가 역사하신다고 서술한다. 여기에 그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날마다 짓는 죄 속에 빠져서 탄식하며 그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을 약하게 하는 방법이라고까지 왜곡하며 진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박옥수의 견인 교리에서 우리는 그가 ‘믿음’과 ‘행위’를 신자가 모두 취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어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박옥수의 설교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견인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자가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고, 한번 칭의된 자는 ‘실제로’ 깨끗하게 씻어져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는 어떠한 죄도 남아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박옥수의 견인론은 신자가 거듭난 이후에 실제 삶의 투쟁과 고난, 유혹으로부터 오는 신자의 약함과 죄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도록 만든다. 심지어는 그는 죄인이라고 여기며 회개하는 행동도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그의 견인 교리에서는 한번 칭의로 인해 성화와 견인과 영화까지 모든 것이 마치 선험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결국 구원파의 교리는 칭의론을 강조하다 보니 성화론과 견인론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구원파의 교리에서는 구원받은 자로서 의로운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기초가 되는 칭의론이 오히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칭의론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삶, 그리고 신자의 믿음과 행위는 서로 배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순종의 행위를 멈추게 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촉진한다. 진실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은 한번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한 구원으로 여기게 하거나,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여 자만과 방종에 빠지게 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신자의 실존을 깨닫게 하고 죄를 일깨워주며, 죄를 회개하게 하며 순간순간마다 신중한 선택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