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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벧전 5:1-9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1-9 /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라] 이제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마디 당부해 두고자 합니다. 나는 같은 장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직접 본 증언이며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그분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사람으로서, 동역자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2)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십시오. 마지못해 하지 말고 기쁨으로 그 일을 하십시오. 거기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 열성을 다해 주십시오. 3) 그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고 몸소 훌륭한 모범을 보여서 그들을 지도하십시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오실 때 여러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광과 영예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5)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장로들의 지도를 따르십시오. 그리고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ㄷ)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채찍을 내리실 것입니다. (ㄷ. 70인역 잠3:34) 6)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해진다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ㄹ)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늘 여러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ㄹ. 시55:22) 8) 여러분의 최대의 적인 사단의 공격에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십시오. 사단은 배가 고파서 울어대는 사나운 사자처럼 찢어 삼킬 먹이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9) 사단의 공격을 받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온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이같은 고난을 겪어 왔습니다.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에게 겸손하며 깨어 믿음을 지킬 것을 격려합니다.
지도자 장로들에게(1-4) 베드로는 먼저 장로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들이 먼저 바로 서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는 것은 양 무리의 목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치밀하고 정확한 권면들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 장로들은 오늘날 제도적 장로제도의 장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기능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위치에 있는 어른들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도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난의 증인 그리고 장차 계시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소개합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억지로 하지 말고,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해하지 말고, 군림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양 무리의 본이 된다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영광의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을 온전하게 세우십니다.
젊은 자들에게(5-9) 교회 안에서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장로들의 다스리는 권위에 대한 복종할 것을 명령합니다. 장로들의 지침에 복종하라는 것은, 그 지침들이 사람들에게 죄악으로 이끌지 않는 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 모두는 장로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너희 젊은 자들에게” 이 권면을 받을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도록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권고로 이어집니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겸손할 때 가장 좋은 방식으로 높이신다고 합니다. 염려를 맡기는 것은 겸손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사람으로 그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염려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그로 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 주는 길이 됩니다. 위험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고 주의하라는 충고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대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여 성도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입니다.
적용: 세상을 이기는 교회는 종말의 신앙으로 깨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당신이 깨어있기 위해 믿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편 높은 자리에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합니다. 겸손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고 섬기는 사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하게 배우는 사람으로,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으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내려놓고 모든 일을 성취하시며 그분이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것을 바라봅니다.
< 설 교 >
마귀를 대적 하는 믿음
벧전 5장 8~9 / 강성찬목사
학생들에게 마귀를 그리라고 하면 뿔 달린 괴물의 형상을 그린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실재성을 받아들이려하지 않고 있으나 마귀의 존재가 과학적으로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귀의 존재를 교훈 해 주고 있스니다. 인간의 얄팍한 사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음모가 있고 술책이 있고 선동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 배후에는 그 어떤 실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존재입니다.
마귀는 사단이라 부르기도 하며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아바돈(Abaddon)과 아볼루온(Apolloyon)으로 파괴자(destroyer)라는 뜻입니다. 형제를 참소 하는 자(계 12:10) 대적 마귀(벧전 5:8) 바알세불(Beelzeball) 벨리알(고후 6:15) 천하를 꾀한 자 (계 12:9) 큰 용(계 12:9) 적 (마 13:28-39) 악한 자 (마 13:19) 거짓의 아비 (요 8:44), 세상 신(고후 4:4) 거짓말쟁이 살인자(요 8:44)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세상 임금(요 12:31, 14:30, 16:11) 옛 뱀 (계 12:9) 시험하는 자 (마 4:3, 살전 3:5)등 입니다
욥기 1장과 2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는 존재 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성격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았다는 의론에 반박하면서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 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6)라고 했습니다.
분열을 위해 활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이행하며 잘 조직된 왕국의 우두머리입니다.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 세계의 통치자로서 그의 원칙, 방법, 목적에 따라 조직된 세계에서 역사합니다. (고후 4:3-4, 엡 2:2, 골 1:13)
그러므로 민족의 탐욕과 야망 정치적 술수 사업에 있어서의 극심한 증오와 경쟁심 그리고 인간 중심의 무신론 등 이런 것은 마귀의 영향력에 의하여 퍼집니다.
욥기 1:7, 2:2에서 사단 마귀는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 하나님과 진리의 적으로서 끓임없이 대적하는 활동을 합니다.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욥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하자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9-10)라고 합니다.
사단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물질과 재화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특히 그의 활동은 도덕적으로 어두운 영향을 끼쳐 인간을 죄로 타락하도록 유도합니다. 인간을 죄에 빠지도록 하기 위하여 거짓으로서 인간을 유혹합니다.
이런 활동은 창세기 3장에 생생하게 나옵니다.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뱀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하려는 사단의 술책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인 고로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미혹하였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접근할 때 하와도 알고 있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을 건네면서 다가갔습니다. 하와는 평범한 질문이요 대화이기 때문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 질문에 대답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도구인 뱀의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을 교만한 마음으로 유도해서 죄에 빠지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딤전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 가운데서 가장 된 신봉자로 자처하면서 가라지를 뿌리기도 합니다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 13: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또한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유혹하기도 합니다.
[고후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어떤 때에는 반대로 무섭고 격렬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믿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사단은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리고 사단의 격렬한 공격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종교적 박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딤후 3:11-13 계 12:13-17)
사단 마귀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면서도 한정된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한계 내에서만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만 피해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계시록 2:10 절에 보면 사단의 시험은 단지 10일간만 계속된다고 하였습니다. 시험기간의 길이는 하나님에 의하여 설정되었고 사단은 그것 이상을 시험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의 그의 노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해하는 것을 허락 받았지만 그러나 결코 완전한 승리를 얻지는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쭈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욥 1:7-11절의 사단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사단의 한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사단은 신성하지도 않고 전지 전능하지도 못합니다. 사단은 거대한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지 전능하지 못하므로 큰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예수를 멸망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여 그의 힘이 전 세계적으로 뻗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영원 자존자가 아닌 창조된 자입니다.
그의 기원은 에스겔 28:11-19에서 불의로 이사야 14:12-14에서 “계명성”으로 나타나며 교만이라 공통점이 있는 자로 나타납니다
계명성은 바벨론 왕을 넘어서서 사단을 언급하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5번의 계명성에 대한 말씀은 사단의 반란 적인 기고만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과 사단의 사이에 투쟁의 시초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마귀 나라와의 결정적인 싸움은 예수와 사단사이의 투쟁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뚜렷한 목적은 악의 근원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사단의 첫 번째 패배는 예수님 선교 초기에 광야의 유혹에서였습니다. (마 4:1-11, 눅 4:1-12)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하고 천하 만국을 보여 부며 절하라고 유혹하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로 인해 예수님은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물을 빼앗을 수가 있었습니다. (막 3:27)
사단의 결정적인 패배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요 12:31-16:11)
사단은 횡령자 (usurper)로서 판명됐고 이 세계의 합법적인 통치자의 자리에서 내쫓겼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도록 했습니다. (골 2:13-14, 15, 31, 2:14-15)
그러므로 판결은 이미 사단에게 내려졌지만 그는 그의 마지막 투옥 될 때까지는 횡령 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성경은 사단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운명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선교활동 중에서 사단의 마지막 패배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또한 예수님은 악을 위하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계시록 20:1-3절에 보면 사단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00년이 지난 후에 그는 다시 무저갱에서 풀려 나와 인간을 속이고 고통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단의 유혹은 박살이 나고 다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던짐을 받습니다. (계 20:7-10)
그의 운명은 그가 속인 사람들의 영원한 형벌을 떠맡는 것입니다. (계 20:12-14)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는 악마로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그들의 발로 사단을 박살나게 합니다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안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롬8:31-39 요일 5:18)
우리는 날마다 사단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마귀는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치 하와를 꼬여 범죄하게 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말로 우리를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니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대적하여 물리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대처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엡 4:25-27]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렇게 사단에게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길입니다.
[엡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또한 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게 된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으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로 전향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속이려 할 때 허술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가장 합리적이며 적절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 속입니다. 때로는 금전으로, 때로는 명예로,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여 틈만 생기면 우리의 인격과 생명을 삼키려 듭니다. 상대의 취약점을 골라 허점을 찌릅니다.
그러므로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말은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에게 특히 해당됩니다. 젊은이는 경험이 없어서 잘 속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크리스천은 마귀의 속임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말의 뜻은 정신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6),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벧전 1:13), 그리고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달려든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야 하겠습니다.
믿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길만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라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의지할 때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 살아 게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적하면 피하기 때문입니다
[약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함으로 모든 성도는 이미 죄로부터, 그리고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했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 군대의 대장이 되실 때, 십자군에 대항하는 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되 보배로운 믿음의 교인으로 큰 믿응의 교인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믿음의 교인으로 나아가며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눈에 안보이는 대적
벧전 5장 8~9절 / 조용기목사
세상 악한 일의 배후에는 원수 마귀 있어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안에서 마음지켜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마귀는 영체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나타날 때는 인간 의 생각을 통하거나 동물,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마귀는 우리의 대적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도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 배후의 영체인 마귀를 밝히 알고 인간과 싸우지 말고 그 배후 세력인 마귀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1. 마귀가 사용하는 도구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마귀의 도구는 뱀이었습니다. 마귀는 영체이므로 직접 나타나 말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지혜로운 뱀의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3
장 4∼5절의 말씀을 통해 마귀는 간교하게 하와를 유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뱀이 여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귀는 아담
과 하와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다가와 유혹해서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도
록 만들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마귀가 인간과 만나기 위해 뱀을 통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0∼12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
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
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그가 악한 자에게 속해서 한 행동입니다. 여기서 ‘악한 자’란 바로 원수 마귀입니다. 가인
이 아벨을 시기질투하고 분노로 죽인 것은 그 배후에 마귀의 충동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
을 통해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불의한 일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
다. 세상에 불의와 부정부패가 횡행하지만, 우리는 그 배후에 언제나 마귀가 도사리고 있
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는 마귀의 탈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단순히 죄로만 보면 안됩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죄는
영적 마귀의 형상입니다. 단지 죄만을 없애려 해도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집안에 거미줄을 아무리 거두어도 거미를 잡지 않는 이상 계속 거미줄이 생기는 것
과 같습니다. 마귀가 있는 이상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
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는 마귀의 일은 우
리 가운데 항상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4일 매일경제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경마에 빠진 아버지가 아들을 500만원에 팔아
넘겨 받은 돈마저도 경마에 걸어 모두 잃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500만원에 팔
아서 그 돈으로 경마에 내기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이미 그
마음에 경마 마귀가 든 것입니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이 세상 악한 일에는 그 배후에 원수 마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미움의 배후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
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과 우연히 말다툼을 하고 난 다음부터 남편이
보기 싫고 너무나 밉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미움의 정도는 커서 남편이 출근하다가 교
통사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
움으로 인해 그 자매님은 두려운 마음이 생겨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그녀
는 자기의 진정한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만 흉측한 상상이 들어 고통스럽다고 고백했
습니다. 남편과 싸운 이후 자매의 마음에 생긴 미움의 근원은 그녀 자신이 아닙니다. 싸우
는 틈을 타 사단이 그 마음에 들어와서 미움을 생기게 하여 결국 그 가정을 파괴하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 배후에 영적 세력이 있
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에 있던 미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미워하는 마
음의 배후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
님께로부터 옵니다.
살인의 배후에도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자입니다. 살인
의 배후에는 늘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큰 살인이 행해지는 것의 배후에
도 전쟁을 치루는 지도자의 마음속에 살인하는 마귀가 들어와 그런 것입니다.
마귀가 생각을 타고 사람의 마음에 오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흉악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배후에 마귀가 들어와서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
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가룟 유다를 이용했습니다. 유다의 생각에 예수
님을 팔 것을 지시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팔아라’
는 생각을 유다의 마음속에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생각을 잘못 관리하면 마귀의 생각을 받아서
결국 마귀로 인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가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의 생각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탐욕이 마음에 생기면 이를 통해 모든 마귀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흉악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
혈과 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르비딤
에서 아말렉과 싸운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광야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
치고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훈련된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군사들이 몰
려왔으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신속히 여호수아를 세워 장정들을 조
직하여 아말렉을 대적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말렉 군대에게 밀리고 수많은 이
스라엘 청년들이 죽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모세는 전쟁터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전쟁이 치열한 곳을 향해 손에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들에게 엄청난
능력이 임했습니다. 이들은 아말렉 군대를 대적하여 순식간에 치고 밀고 나가 수많은 아말
렉 군사들을 물리쳤습니다. 모세가 팔이 아파 내리고 기도를 그치자 그만 그 능력이 사라
져 다시 이스라엘 군대는 아말렉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다시 손을
들어 기도하자 이스라엘 군대는 의기충천해서 아말렉 군사들을 무너뜨렸습니다. 나중에
는 아론과 훌이 모세의 양팔을 각각 붙잡아 들어 올려 해가 질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자 아
말렉 군대는 완전히 패하고 물러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배후에도 영적 세력
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결국 하나님의 천사들과 사단의 사자들이 영적
전쟁을 벌인 것이 이스라엘과 아말렉 군대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도
가 중대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방해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세력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사람이든 뱀이든 어떠한 형태라도 입고 나타나서 우리를 도
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입
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쫓아내야 마귀와 함께 모든 저주도 물러갑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
귀의 세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
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
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선생은 마
귀에 대해 자세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정사가 있습니다. 정사란 바로 정부, 나라를 지칭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2장
26절에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
떻게 서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권세가 있습니
다. 정부 조직에는 장관들이 있듯이 마귀 나라에도 이와 같은 조직이 있어서 마귀의 세계
를 다스리고 돌봅니다. 마귀는 세상 주관자, 세상 여러 가지 어두움의 조직을 가지고 있습
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마귀는 개인과 가정까지도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가 주관하는 조직에 속해 있습니다. 에
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
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
다.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의 권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심각합니다. 마귀는 각각의
조직들을 악의 세력으로 붙잡고 이들을 세상풍속을 따르게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
어지도록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매우 조직적으로 일합니다.
또한 악의 영들인 마귀는 군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군사들을 통해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총공격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용이 쫓겨나갈 때 그
사자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세상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계 배후의 세력으
로 작용하는 마귀는 이처럼 엄청난 조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
귀를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며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
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군과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싸
워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리라는 말씀에 대해 이를 말
리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
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전에 베드로는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
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이 짧은 순간, 사람의 생각에 사단이 들어왔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순식간에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근원을 분명히 알고 계
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 주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아시고 베드로가 사단에 의해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생각이 아닙니다. 사단이 들어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
하도록 하고 그를 좌절시키고 절망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결국 그의 믿음
을 버리지 않고 넘어지지 않았던 것은 주께서 이미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
다.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생각이라고 여기는데, 사실은 마귀
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을 따라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이 들어와서 우리를 넘어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단은 흉악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
를 협박하거나 위협하지 않습니다. 매우 교활하게 우리의 생각에 들어와 우리의 행동을 조
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의 배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늘 깊이 생각하
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사단
이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늘 새벽기도를 하며 매일 말씀을 읽고 묵
상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마귀를 대적하라
우리는 마귀의 정체를 분명히 알아야 대적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15절에 “또 너
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
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
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시고 난 다음, 마귀 나라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말씀입니
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서 무장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
지 못하는 우리에게 마귀는 계속 협박과 공갈로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마귀의 행위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도적질합니다. 우리의 신앙 열정을 도적질합니다. 성도 간에
서로 참소하게 하고 비난하도록 하여 시험에 들게 하고, 결국 우리 마음의 뜨거운 신앙을
도적질합니다. 그 뿐 아니라 마귀는 마음의 기쁨과 평안도 도적질하고 믿음과 소망, 사랑,
육신의 건강을 도적질하는 도적의 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
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
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빼앗아갑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A. 심핸슨은 사단이 인간을 유혹할 때 쓰는 방법이 매우 심리학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를 집어 넣습니다. ‘나
는 무능하다. 나는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립니다. 우리
는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에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내게는 미래가 없다. 꿈
도 없다’라며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스스로를 절망적인 존재로 생각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
다. ‘너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버림 받은 자이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마귀는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도록 하여 파괴적인 삶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산적으로 생
각하여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
고 대신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절망하고, 비관적으로 자기를 비하하면서 미래를 잃도록 하
고, 결국 죄의식을 부추겨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
니다.
마귀가 하는 행위는 그 이름과 같습니다. 마귀는 히브리어로 ‘사탄’인데 이는 ‘송사자’ ‘대
적자’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디아볼로스’로 이는 ‘훼방자’ ‘거짓의 아비’란 뜻을 가지
고 있습니다. 즉 마귀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며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참소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입니다. 즉 우리를 타락시켜 마음에 고통을 가져와 결국 좌
절과 절망을 통해 공포의 마음을 갖고 삶을 포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미움과 시
기, 분노와 질투 등을 통해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하면서 우리 마음을 죽이고 영을 죽이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와 희락은 모두 생명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 사랑을 빼앗고 의와 평안, 기쁨도 빼앗아 마음에 죽음을 가져옵니다. 삶의 희망을 모
두 없애 버리고 살아갈 용기와 힘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
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를 준비하지 못하게 해서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
의 최종 목적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가 마귀에게 잡혀서 그 마음이 도적질 당하고 그 영이 죽임을 당하여 멸망의 길에 들어가
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고 무신론자나 인본주의자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
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라고 증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를 단호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마귀
는 떠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4장 10절에 예수님을 유혹하는 마귀에 대해 “사단아 물러가
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예수님이 말
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는 “그런즉 너희는 하
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의 모
든 무장을 해제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
을 사용할 권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할 권리가 있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 이름으로 원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신앙이 미지근해지고 타락하는 이유는 마귀와 타협하
고 마귀를 쫓아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을 의지하여 마귀
를 대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에 올바로 서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
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마귀가 우리 마음에 정죄감을 가져올 때 우리는 ‘기록하였으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았느니라’고 외칠 때 마귀는 물러갑니다. 병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힐 때
에도 ‘기록하였으되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느니라’는 말씀으로 질병의 마
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를 위하여 저주 받은바 되사 나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복 받은 사
람이다 너희 저주 귀신아 물러갈지어다’라고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말씀은 매우 큰 능력
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를 물리치고 기
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
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더욱
이 금식하면서 기도하면 어떠한 강한 마귀라 할지라도 쫓겨나갑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 권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사단
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
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권세있는 자, 마귀는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는 그보다 크신 예수
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시험과 환난, 고통의 배후
에 사단의 조종이 있다는 것을 알므로 마귀를 대적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
다. 사람이 아니고 마귀가 하는 일이면 인간의 힘이 아닌 기도와 말씀, 예수님의 보혈의 능
력으로 대적하여 물리치면, 마귀는 떠나가고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하게 될 것
입니다.
내가 만약 사탄이라면
벧전 5장 8절 / 김홍도목사
오랜 옛날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많은 천사들에 둘러쌓여 계셨는데 그 천사들 중에 가장 높은 천사, 루시퍼(계명성)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다가 천사장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하늘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결코 용납되거나 묵인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교만입니다. 사탄은 영원히 이 타락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방해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에스겔 28:11), (이사야 14:12-17).
그러나 기독교는 이원론(二元論)(Dualism)이 아닙니다. 즉 이 세상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고, 선과 악의 대등한 입장에서 대결한다는 이원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요(ultimate, almighty, Sovereign),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타락한 천사이며 파괴적이며 부도덕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과 같이 창조적(Creative)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적인 분이십니다.
사탄은 그 힘과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기는 해도, 하나님을 능가할 힘은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사탄은 이미 패배했으며 예수님이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대의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다시 구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대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라면 사탄의 최대 목적은 어찌하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못믿게 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대단히 교활하고, 지혜를 가진 피조물입니다. 이 지혜와 계교를 가지고 분주히 일해 오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사탄이라면,<1. 자신을 숨기겠습니다.>
사탄이 꼭 그렇게 합니다. 에베소서 6:11 "마귀의 궤계(詭計)"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궤계, 즉 계교(trick)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계교가 자신을 숨겨서 사람들이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목사님, 신학박사님들 중에서 사탄은 실재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로 아는 이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라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단 하루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한다면 사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저도 신학대학을 나오고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마귀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는데 시골 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귀신 잡힌 사람을 다루다가 그 마귀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또 밀접하던 그 여자의 이모한테 들어가 쓰러뜨리기도 하고 발광을 하며 말하는 것을 본 뒤부터 어느 정도 영계를 볼 수 있게 되고 마귀를 보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인격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구령사업을 하고, 목회를 하는 동안 수 천번이 넘게, 마귀를 대항하며 싸우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제가 오늘날 마귀와 성령을 몰랐다면, 영적인 승리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교회가 부흥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신앙 생활도, 목회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탄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교활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서 잘 숨기기 때문입니다.
현대 만화가들은 사탄의 존재를 농담거리로 만들어서 사탄을 그릴 때 붉은 옷을 입고 긴 꼬리를 가지고 손에 큰 갈구리를 가지고 있는 괴물로 그려놓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런 흉칙한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고, 아름답고 빛나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경에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묘사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무서워 해야 합니다. 또한 마귀는 뱀이며, 속이는 자, 악한 자, 용이라고 했으므로 자신을 위해서 피할 때는 피해야 합니다. 마귀는 비록 아름답고 빛나는 옷을 입었을지라도, 그 밑에는 옛날과 같이 악한 마귀가 숨어 있으므로 여기에 속지 말고, 대적하여 물리쳐야 됩니다.
옛날 동화에도 어린 소녀가 할머니 집에 갔더니 할머니 침대에 할머니의 잠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누워 있은 것을 자세히 보니 할머니가 아니고 긴 꼬리가 보이는 늑대였다고 하는 이야기와 같이 마귀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역시 무섭고 악한 존재입니다.
옳습니다. 사탄은 교활해서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믿지 못하게 하고, 부인하게 만듭니다. 내가 사탄이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2. 죄를 매력있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는 일은 죄를 꼭 매력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이브는 아름다운 환경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게 했으나, 사탄은 이브를 꼬여서 죄를 매력있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맛있는 열매가 다 있는데 하필이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해서, 결국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사탄 마귀는 죄에 대해서 매력있게 하고 끌리게 만들어서 유혹에 넘어가도록 한 후에 사탄은 기뻐서 웃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에 제일 좋은 것을 보여 주고 나중에는 제일 나쁜 것을 보여 줍니다. 죄를 아름답고 달콤하게 만들어서 죄를 범케한 다음에는 영원한 파멸의 벼랑으로 밀어 넣습니다.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처음에는 다 몽롱하고 붕붕 뜨는 것 같이 멋이 있어서 먹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마귀의 올무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나 노름(投錢) 배후에도 다 마귀가 숨어 있어서 매력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파괴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세워 주신 복된 가정도, 사업도 파괴시킵니다.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내 아내보다 다른 여자가 더 매력있게 보이고, 못견디게 그립게 만듭니다. 내 남편보다 남의 남편이 더 좋아보이고 매력있게 보이게 합니다. 이 때, 마귀를 직시하고 대적하여 물리치지 않으면 큰 파멸을 가져옵니다. 매력있게 만들고 죄를 짓게 충동을 주는 것은 모두 마귀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 "이 세상 신(마귀)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했습니다. 쥐덫에 매달린 맛있는 미끼를 따 먹다가 형 쥐가 쥐덫에 걸렸습니다.그 다음에 동생 쥐가 쥐덫에 매달린 미끼를 먹으면 덫에 잡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력있는 미끼에 끌려서 그만 따먹다가 쥐덫에 걸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마귀는 덫을 놔서 많은 영혼을 잡았습니다. 마귀는 아주 맛있는 미끼를 놔서 사람들을 잡았습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은 잡혀도 나는 결코 안 잡힌다"고 하면서 계속 죄를 짓다가 마귀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으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라도 범죄하면 회개해야 마귀가 물러갑니다. 오늘날 제일 멋있는 장소가 어느 곳입니까? 그 거리에서 가장 멋있고 찬란한 곳은 죄악의 장소입니다. 매력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꾀어들여서 희생물이 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이에 못지 않게 가능한 한 건물을 멋있고 매력있게 짓고 시설도 멋있고 편안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다가 복 되신 구주를 전해서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부흥회를 다녀온 포항제일교회는 포항 역사상 단일 교회 집회로는 최고(2500-3000명) 였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을 잘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성전, 그리고 에어콘, 칼라 TV 시설, 교육관 등 훌륭한 시설 때문이었습니다.
마귀도 이처럼 시설을 좋게 해서 매력있게 하는데 하나님의 교회도 매력있고 멋있게 하고 시설도 잘 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합니다.>
내가 만일 사탄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떠하든지 못받아 드리게 방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꼭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고로 이 말씀이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서 구원받게 되기 때문에 마귀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우리 속에 의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키기도 하고 졸음이 오거나 잡념이 들게 해서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 가운데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주워먹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배시간에 말씀의 씨앗은 뿌릴 때는 성령께서도 역사하시지만, 마귀도 역사해서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자는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설교를 듣고 와서 아이들 듣는 데서 설교를 비평하면 아이들은 은연중에 '종교란 필요없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몇 년 후에 자녀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면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탄에게 이용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을 때 아멘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받고, 순종할 마음으로 받아야겠습니다. 성경책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매일 읽고 생활에 적용해야 되겠습니다.
<4. 교회의 일을 파괴하겠습니다.>
내가 만일 사탄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교회의 힘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꼭 그렇게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날마다 부흥되어 갔습니다. 사탄이 핍박을 강하게 했으나 교회는 계속 부흥되었습니다. 이 때 사탄은 교회 안에 과부들을 구제하는 문제로 불평과 다툼이 일어나게 했으며, 파당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뜨겁게 사랑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이런 미지근한 교회를 원하고 미지근한 신자를 원합니다.<5. 교인들을 넘어지게 하겠습니다.>
내가 만일 사탄이라면 교인들을 낙심케 만들고 넘어지게 만들겠는데, 마귀가 꼭 그렇게 합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크리스천들을 실족하게 만들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 접촉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를 이길 자
벧전 5장 8~11절 / 피종진목사
우리 인생은 나면서부터 전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질병, 정신적으로 오는 불안과 공포, 우리 삶의 터전을 침범하는 악한 자들과 더불어 싸우며 삽니다. 또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마당과 방불한 치열한 산업화시대에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싸움은 영적인 전쟁으로 마지막시대에까지 최후로 발악하는 이 어두움의 권세, 마귀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사탄 마귀를 이기는 사람은 자기를 이길 수 있고, 환경 여건을 이길 수가 있으며, 모든 것에 승리합니다. 그러나 마귀를 이기지 못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동산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기의 모든 의지, 건강, 지혜, 결심, 각오도 물거품같이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우는 사자같이 최후로 발악하는 악한 사탄 마귀의 권세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를 ‘사탄, 악령, 어두움의 권세와 세상 주관자, 악신, 바알세붑, 용, 뱀, 더러운 영, 거짓말하는 영’ 등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마귀란 원어에 보면 ‘이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마귀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범죄케 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갈라놓았습니다. 마귀가 틈을 탈 때에 친구간에, 부자간에, 모녀간에, 부부간에, 또 교회 성도간에도 사탄이 이간을 합니다. 또 ‘비방자, 참소자, 중상모략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사탄 원수 마귀는 이 땅의 평화를 위협하고, 또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들의 천국 길을 막고, 택함 받은 자라도 미혹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태양빛이 떠오르는 순간에 물러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말씀했습니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8절) 도적은 잠든 사람 집에 찾아가서 물건을 훔쳐갑니다. 마귀는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고 쾌락에 빠져 영적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을 사단의 존재를 기억하며 영적 잠에 빠져 사단의 희생물이 도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7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사탄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자를 무서워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남의 순간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를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3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바로 무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을 굳게 하여 무장해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9절) 믿음은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일이 되기 때문에 사탄은 그 믿음을 파괴시키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으로 역사합니다.
①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의심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자꾸 의심을 줍니다.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보며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우연이겠지, 응답을 받고서도 우연의 일치겠지, 이적과 기사와 능력에 대한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자꾸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의심을 믿음으로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무기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항상 견고하게 되기를 권면했습니다(고전 15:58).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서 장성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이 믿음의 무장이 있어야 됩니다.
②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시험을 줍니다. 그래서 낙심케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는데 왜 사업이 안될까, 왜 이렇게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왜 나의 길이 이렇게 막히는가, 왜 나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이 많은가’ 이런 저런 시험이 와서 믿음이 약해지게 하고, 결국은 마귀에게 항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불같은 시험과 환난이 와도 믿음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위대한 힘으로 이 세상의 역경도 이겨야 되고, 근심과 환난 고통도 이겨야 되고, 불안 공포도 다 정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시기도, 원망 불평도 믿음으로 다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③환난과 시험이 와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잘 믿는 사람에게는 기도를 쉬도록 만듭니다. 기도가 있으면 주님의 능력이 항상 함께 하여 마귀가 넘어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를 쉬도록 하여 무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기도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강해도 기도가 약해지고 기도를 쉬게 되면 함께 약해지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계속 할 때만이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이단에게 넘어지고, 세속화되기 쉽고,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들이 다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일평생 약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5:4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계신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해야 마귀를 이길 수 있고, 병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말세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바벨탑과 지식의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경시를 당합니다. 우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려 영생과 천국의 보화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보화요, 생명이며,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9절) 여기에서 ‘대적하라’란 말은 헬라어에 보면 ‘대항하여 이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적당히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마귀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죄와 불의와 타협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피하지 말고 대적해서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미혹합니다. 이러한 마귀와 대적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①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여러분, 어릴 때 술래잡기 하는 놀이가 있지요? 술래가 들어오려고 하면 다같이 힘을 모아 틈을 주지 않고 막아냅니다. 그러나 한 틈이 생기면 거기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항상 내 개인의 힘으로도 사탄을 이겨야 되지만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와 믿음의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을 위한 모든 일에 믿음으로 전진해나갈 때에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기도를 쉴 때, 낙심할 때, 조금이라도 예배에 등한히 할 때 틈을 탑니다. 예배가 얼마나 귀한지 아십니까? 예배만 충성해도 하나님 앞에 기본적인 신앙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자를 하나님이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약한 자는 강하게 해주시고, 빈곤한 자는 부유하게 해주시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롭게 해주시고, 환난과 시험이 있는 자는 막아주시고, 길이 막힌 자는 열어 주시고,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등한히 하지 말고 예배에 충성해야 됩니다.
②사탄에게 절대로 방해를 받지 말아야 됩니다.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8) 우리는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③사탄에게 속지 말아야 됩니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2:11) 우리가 사탄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판단의 지혜 즉, 영분별의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오늘날 영분별을 잘못해서 악령의 지시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알고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어떤 말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고 따르다가 자기 일생을 망쳐버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신앙, 잘못된 이단들에게 빠져서 자기 신앙의 일생을 망치고, 영도 육신도 하나님의 은혜의 반열에서 떨어지는 이런 탈락자들이 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의 신앙, 그리고 언제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그 열매가 바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10절)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잠깐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잠깐 받는 고난을 통하여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친히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8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약속된 하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은 영원하되, 이를 위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당시에는 한없는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출산하여 새 생명을 품에 안으면 즉시 모든 고통을 잊고 기뻐하는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앞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면 현재의 고난은 능히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고전 10:13).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과 소망으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4:17,18에 보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때에 항상 기도로 깨어있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며,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굳게 하라
벧전 5장 8~11절 / 피종진목사
마귀는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된 성도보다는 믿음 생활을 게을리 하고 쾌락에 빠져 영적 잠을 자고 있거나 신앙공동체보다는 세상 주변을 배회하는 자들을 더 가까운 표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우는 사자와 같이 온 땅을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을 사단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믿음을 굳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마귀를 대적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8,9절)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마귀는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는 대적하여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잃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는 믿음이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유일의 무기는 바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속성을 본문 8절에 보면 ①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 마귀를 우는 사자로 비유했을까요? 우는 사자로 표현된 마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이와 같이 두렵고 잔인한 존재입니다. ②마귀는 두루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마귀는 두루 다니다가 틈만 있으면 그 속에 들어가 사람을 악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며, 또 삶의 의욕을 잃게 하고,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라도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안됩니다. ③마귀는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삼킨다는 것은 통째로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의 명칭을 ‘마귀, 사탄, 악령, 악신, 뱀, 용’ 등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명칭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활동성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아볼로스’라고 하는 마귀의 원명은 ‘속이는 자, 참소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마귀는 불순종의 영으로 역사합니다(엡 2:2). 즉 마귀는 하나님께 대해서 역행하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은 본 마음이 아닙니다. 그 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대해서 불순종의 영으로서 자기가 그 속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래 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항상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귀는 ‘더러운 영’(계 16:13),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점치는 영’(삼상 28:8), ‘거짓말하는 영’(삼상 28:10)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적하라’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십니다. ②도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③그냥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지 못하면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은 세상과 싸워 승리하신 오직 주 예수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둘째,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10절) 믿음의 결국은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에서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고,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믿음으로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광 즉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천국의 예행연습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저 천국을 바라보면서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사모하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믿음으로 끊임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14에 보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수록 더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이방 사람들에게 조롱도 받고, 핍박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해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에 십자가 짐 같은 그런 고생도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서 8:18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온전함을 입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10절) 여기에서 ‘온전케 한다’라는 말은 ‘의롭게 행동한다, 완성한다, 원상태로 회복된다,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과 같이 상처 나고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완전케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원상태로 회복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성도의 상처를 치료하고, 구부러진 것을 펴주며, 연약한 것을 굳고 강하게 하여 견고히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온전함을 입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되고,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해지면 생각과 행동이 악해지고, 말도 경건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주님의 모습을 닮게 되고, 그 형상을 입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인격자로 만들어주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굳세고 강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10절)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의지도 약하여 작은 일에도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며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철같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일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전진하는 자에게 언제나 새로운 것을 안겨주시고, 믿음이 강하고 담대한 자에게 큰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단 한가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7) 믿음을 굳게 하면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연조에 관계없이 굳세고 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며, 온전함을 입고, 굳세고 강한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귀가 왜 나를 억압하나
벧전 5장 8~9절 / 조용기목사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마귀가 왜 나를 억압하느냐?」그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도 종종 마귀의 억압을 당합니다. 감기가 걸리면 몸이 약해지는 것처럼 마귀의 눌림을 당하면 신앙의 영적인 삶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감기를 얕잡아 보지만 잘못 치료하면 만병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감기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폐렴이 될 수도 있고, 폐렴이 악화되면 심장병이 될 수도 있고, 위장병이 될 수도 있고, 몸에 중대한 질병이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억압을 가볍게 느끼다가 삶의 큰 시련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억압을 당장 해소하지 아니하면 큰 영육 간에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밤중에 잠을 자다가 깼는데 마음이 굉장히 뒤숭숭하고, 머리가 복잡하고, 꿈자리가 사납고 그리고 몸이 으스스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를 드리려고 하니까 기도가 안 나와요. 기도가 딱 막혀요. 저는 마귀가 억압한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내 생각에 ‘혹시 마귀가 나를 억압한 것이 아닌가’싶어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아무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삼세번이라고 해서 세 번 꾸짖어 보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몸이 으스스해요. 세 번째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러니까 큰 고함소리를 하면서 마귀가 탁 튀어 나가요. 몸에서.. '아 이놈 마귀구나!' 두 번째 또 명하니까 두 번째 마귀가 또 튀어 나가요. 세 번째 명하니까 세 번째 아주 대마귀가 완전히 창자를 뒤집어 놓고 튀어 나가요. 그러더니 마음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넘쳐나더니만 몸도 깨끗해지고 평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마귀가 오면은 언제나 마음이 불안하고 뒤숭숭합니다. 몸도 감기 걸린 듯이 한기가 오고 편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와 뒤숭숭함과 불행을 가져오고 편안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러한 기미가 있으면 내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마귀를 대적하라 저가 너를 피하리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고 마귀를 대적하면 곧장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마귀는 쉽게 나가지 않습니다. 한번 억압하면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대적을 하면 나중에 떠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런 은사를 어릴 때부터 주셔서 마귀 들어올 때는 몰라도 나갈 때는 알아요. 마귀가 나갈 때는 거의 고함을 치고 나가는 그 마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언제 마귀가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입니까? 꼭 다 그렇지는 않지만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마귀가 죄를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본론>
1. 범죄할 때 마귀가 덤벼온다
죄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품에서 떠나가면 마귀가 덤벼드는 것입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고 부모가 꾸짖을 때 반항해서 집밖으로 나가면 깡패들에게 붙잡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거짓말쟁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고 나가면 "날 따라 와라. 날 따라 와라. 하나님 믿지 말고 날따라 와라. 믿더라도 나중에 정년퇴직하고 믿지 지금부터 믿을 필요 없다."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끌려가면 마귀의 올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지 도적이 축복을 가져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러분, 어둠이 어디에 있고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둠과 빛의 거리가 있습니까? 집안에 들어가서 방안이 아무리 캄캄해도 스위치를 탁 켜면 즉시로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탁 꺼면 순식간에 어둠이 다가오고 빛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둠과 빛의 거리는 순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도 순간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성령의 역사는 그치고 마귀가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정결케 하면은 또 순간적으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7절로 8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존재요, 우리가 범죄하면 마귀가 당장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마귀를 멸하는 것이 마치 빛이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회개하고 보혈로 씻지 않고 마귀의 억압을 그대로 두면은 마귀가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일단 마귀가 뿌리를 내리면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범죄하고 마귀의 억압을 당하면 즉시로 회개하고 마귀를 쫓아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돼요. 일단 뿌리 내려 놓으면 아주 귀찮게 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의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인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죄를 변명하고 타당화 하고 죄속에 사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떨어지면 곧장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넘쳐흐르고 있어서 보혈을 주장하면 언제나 와서 씻어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원망할 때
둘째로, 언제 마귀가 우리를 억압하느냐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마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 전에 원망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쉽게 원망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시느냐. 왜 이런 일이 다가오느냐. 왜 슬픔이 다가오느냐. 하나님도 무심하다.' 원망하는 것입니다. 원망소리가 제일 하나님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보모와 솔직히 마음을 털어놓고 상담하는 것은 좋지만 부모 뒤에서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면 부모의 마음속에 상당히 상처가 들어오고 괘씸한 생각이 들어오는 것처럼 하나님도 원망하는 것 굉장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왜 다 멸망 받았던 것입니까? 원망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5절로 6절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야훼께서 불뱀 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보세요. 원망할 때 불뱀이 와서 물고 백성들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하면 마귀가 불뱀처럼 덤벼들어서 우리를 물고 찢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에 눌릴 때 언제나 원망한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망하지요. 저도 50년을 목회 했으면서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귀가 곧장 내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원망하라. 불평하라. 탄식하라.'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속아서 그 말을 듣고 곧장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해서 마귀의 덫에 걸려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요사이는 마귀가 그러면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동하여 선을 이루니까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 뜻에 맡기면 하나님이 다 좋게 만들어 주시니까 원망 안한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고 하나님 앞에는 절대 긍정만 있지 부정은 없다. 원수 귀신아 물러가라. 그러면 원수는 더 이상 시험하지 않고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로마서 8장 28절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목회를 해보니까 절실히 느끼는 것은 현실에는 좋지 않고 현실에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찬송하면 이것이 나중에 다 좋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좋게 풀려요. 그러나 이것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실타래가 엉키듯이 점점 일이 더 엉켜지고 고통이 다가오고 괴로움이 다가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불평, 원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달아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감사를 몰라요. 언제나 원망, 불평해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 불평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너를 하나님처럼 못되게 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뭡니까? 하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상이란 것은 사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진 보았지요? 사진은 누구 형상 닮았습니까? 여러분 사진 찰칵 찍으면 누구 형상 닮았어요? 남편 형상 닮았어요? 아내 형상 닮았어요? 아내는 아내 형상 닮고, 남편은 남편 형상 닮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냐. 사진보면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보이려면 사진을 보내면 돼요. 사진이 나의 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어떻게 생겼는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매일같이 보면서 왜 야단이냐!" "어디 보입니까?" "네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아이고 나는 턱주걱이 나왔는데.. 이것도 하나님 이렇게 생겼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타락해서 세상에 속에 살았으므로 턱주걱도 생기고 장구머리도 생기고 실눈도 생겨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모양을 닮아서 희노애락의 감정도 가지고 있고 지식과 감정과 의지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고 마귀는 달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하나님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뭘 조그만큼 해주고도 꼭 감사하면 굉장히 감격적인데 뭘 해주고도 받고서 감사하지 아니하면 마음에 섭섭한 생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성도들이 제게 뭘 선물을 주면은 제가 감사를 해야 되겠다는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 감사를 안하면 혹시 내가 준 것 받았냐, 안 받았느냐. 누가 가로채지 않았느냐. 받아도 목사님이 별로 만족 안하는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할까 싶어서 꼭 감사의 편지라도 내고 감사하는 말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요. 남에게 어떤 도움을 베풀어 놓으면 감사하다는 말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편지라도 한통 받고 그렇지 않으면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간접으로나 직접으로 전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는데 형상은 형상이고, 모양은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늘 감사하면서 살 때 하나님은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하면 더주고 있는 것 가지고도 불평하면 있는 것도 내놓으라.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조그마한 것까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에게 더 시험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마음이 부정적이고 우울하며 슬퍼하고 탄식할 때
셋째로, 마음이 부정적이고 우울하며 슬퍼하고 탄식할 때 마귀가 덤벼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우연히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환경에 의해서 부정적이 되고 우울하고 슬퍼하고 탄식이 나올 때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벌써 영혼의 감기가 들 징조인 것입니다. 절대로 마음을 부정적으로 먹으면 안돼요. 우울하도록 내버려 놓으면 안 되고 슬퍼하고 탄식하면 반드시 마귀가 그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몸이 굉장히 약한데 그날따라 몸이 허약해서 굉장히 고통을 당했습니다. 젊을 때였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길거리에 물건 파는 아이가 슬픈 소리로 "물건 사줘, 물건 사줘.." 추운 겨울날 지나갑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얼마나 처량한지 그만 불쌍한 생각이 나서 이 세상의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서 뭐하나 다 죽어 버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진짜로 죽겠어요. 막 온몸이 고달파지고 심장이 뛰고 정신이 아뜩 아뜩 하더라구요. 그래서 안되겠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기쁘게 살아야 될 것인데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나니까 마음이 또 깨끗하고 상쾌하고 몸이 기분이 좋더라구요.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이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순식간에 마귀가 와서 짓누르고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욥기 3장 25절로 26절에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 남았구나"
보십시오. 마귀가 오는 것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고 평온도 빼앗고 안일도 빼앗고 휴식도 빼앗고 불안만 갖다주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내가 참으로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먹고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같이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먹고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귀의 네가지 전략을 우리 마음속에 꼭 알아서 마귀의 전략에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첫째로 집착 관념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마귀가 우리를 점령하려고 할 때 생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꾸 집착 관념으로 마음에 생각이 자꾸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우울한 생각, 부정적인 생각, 미운 생각, 원망스러운 생각이 자꾸 떨쳐 오는 것인데 이것을 떨어 버려야 되는데 안 떨어 버리고 내버려 놓으면 내 마음속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켜서 잘못된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면 예수님 이름으로 당장 쫓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귀가 제일 처음에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생각을 집어 넣었는데 그 생각을 자꾸 마음속에 받아 들였기 때문에 나중에 그 생각이 그를 점령한 것입니다. 생각을 부정적인 생각은 받아 들이지 말고 아에 처음부터 내어 쫓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계속 받아 들이면 그 다음에는 생각이 마음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탄식하고 절망이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집착 관념에 있을 때는 쫓아낼 수 있습니다만 이것이 그대로 두면 마음을 억압에서 이제는 주야로 이것이 내 마음에 점령하고 이제는 그렇게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생각이 입을 통해서 말로 나올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팔자탄식이 나오고 우울해지고 '아이고 인생 될대로 되라. 까짓것 내가 노력할 필요가 있느냐. 애쓸 필요가 있느냐.' 탄식을 하고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귀가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집착심을 가질 때는 바깥에 있습니다. 억압할 때도 바깥에서 억압해요. 억압을 할 때 여러 가지 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프고, 위가 소화가 안되고, 심장이 뛰고, 관절염이 오고, 억압할 때는 마귀에 눌려서 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우울증이 들어와서 포기하기 시작하면 마귀가 속에 들어와서 완전히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가 점령하기 까기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을 통해서 그 다음 마음을 점령하고 억압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우울증이 생겨서 포기하게 만들고 기도도 다 그치고 교회 나오는 것도 그만두고 성경도 읽지 않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마귀가 점령하면 그때부터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말씀 읽기와 기도를 게을리 할 때
넷째로, 언제 마귀가 우리에게 오느냐. 말씀 읽기와 기도를 게을리 할 때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읽기와 기도를 게을리 하면 세상이 마음속에 들어오거든 온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귀가 세상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 마음밖에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읽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방파제인 것입니다. 방파제를 해놓아야 파도가 치더라도 방파제에 부딪혀서 동리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게 못하지 방파제가 무너지면 물이 온 동리에 들어와서 동리를 삼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하기 싫지만은 기도를 하고 하기 싫더라도 말씀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읽기 성경을 매일 매일 그날 그날 한 장씩 읽고 기도하면 마귀가 대문밖에 왔다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말씀과 교통하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 안할 수가 없지요. 세상에 살면은 세상에 들어오면 세상을 좋아하고 하늘나라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친구를 만나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회 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귀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하고 있으면 세상이 싫어지고 세상을 멀리할 수가 있지만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 하면 세상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는 천국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있다 할것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들어오고 기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땅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와요.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것은 말씀 읽고 기도하면 마음에 기쁨이 들어오고 평화가 들어오고 행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지옥은 마귀의 세력은 마음에 불안과 공포와 좌절과 슬픔과 불행이지만은 천국은 마음에 평화와 기쁨과 행복과 사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였던 조지 뮬러는 평생에 3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5만 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었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100번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싫증난 적이 없고 읽을 때 마다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신앙체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는데 그때는 영적인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기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읽지 않는 신앙생활은 기도도 아니하고 기쁨도 잃어 버리고 소명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죽은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참으로 살아있는 기쁨을 얻고 평안을 얻고 행복을 얻고 하나님의 소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천국의 능력입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므로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먹을 때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5.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없어지면
다섯째로, 예배와 성도의 교제가 없어지면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마귀는 힘이 세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떼 뭉치면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면 두 사람은 만을 쫓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30절에 보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야훼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하나님이 같이 했으면 한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는 그런 힘이 생깁니다. 두겹실은 잘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누우면 춥거니와 두 사람이 누우면 몸이 따뜻한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연료를 절약하려면 부부간에 딱 껴안고 자십시오. 그러면 따뜻해요. 파리에 있는 우리 한국 여성 한 사람이 제게 간증하기를 자기가 파리 불란서 남자하고 결혼을 했는데 구라파 사람들은 겨울에도 꼭 창문을 열어놓고 잡니다. 방에 온도를 따뜻하게 하는 장치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자요. 그러나 한국 사람은 아파트에 뜨끈뜨끈하게 하고 자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 추워서 밤마다 남편을 꼭 껴안고 자니까 남편은 자기 사랑해서 그런 줄 알고 입이 싱글벙글 싱글벙글 하는데 그렇게 부인 하는 말이 "저 사람 입이 싱글벙글 하고 내가 자기를 좋아해서 로맨틱해서 끌어 안은 줄 알지만 추워서 못 견디기 때문에 내가 끌어 안고서 자야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끌어 안으면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새끼들도 보면 서로 막 뭉치지 않습니까? 추위를 이기려고 서로 몸을 끌어 안고서 자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 굉장한 힘이 발생하고 마귀가 쫓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구역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해 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역에 들어가라. 구역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가지라는 것은 우리가 교회 밖에서 생활할 때 시험을 당하면 함께 모여서 기도해 줄 동지들을 얻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할 것 두 세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희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루어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회사 경영이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직원 간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입니다. 부부 상담자 퀴베이는 이혼하는 부부의 절반 이상이 부부사이에 대화가 원활치 않기 때문에 오해가 들어와서 부부가 이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범죄 심리학자는 범죄자의 90%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여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대부분 집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교감을 가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충분한 대화를 잘하는 딸들이 사회에 나가서 성공적인 생활을 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대화해야 신앙에 성공하고 가정에 성공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생활에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없이 영의 아버지께 나가서 깨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6절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험이 다가올 때라도 아버지와 기도해서 대화를 하고 있으면 시험을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아니하면 시험이 없어져요. 시험에서 넘어져요. 육신의 자녀들도 아버지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면 사회생활에 성공하고 승리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영적 자녀들이 영적인 아버지와 대화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 공격을 해오더라도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으면 천국이 능력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9절로 20절에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따라 말씀하세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사람이 모이면 세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모이면 네 사람이 되는 것은 왜냐하면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가운데 던져졌을 때 보니까 묶이지 않은 네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느부갓네살이 보고 놀랬습니다. "우리가 불못에 던진자는 세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저 네번째 사람은 누구냐? 신의 아들 같도다." 그들과 같이 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두 세사람이 모이면 하나님도 같이 하시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세사람이 되고 세사람은 네 사람이 되어서 마귀가 보고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여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러기가 이동할 때의 모습을 보면 브이자형을 만들어 가지고서 날아갑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기러기가 날개를 치면 그 바람이 뒤에 있는 기러기를 떠올려서 별로 힘을 들지 않고 상승효과를 가지고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두에 선 기러기가 피곤해 지면 또 뒷 기러기하고 서로 바꾸는 것입니다. 저것 보십시오. 앞에 기러기가 날면 뒤에서 그 바람 타고서 쉽게 날라가지요. 그리고 기러기는 날라갈 때 그냥 날라가지 않습니다. "꽉, 꽉, 꽉, 꽉" 합니다. 왜냐,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힘내라. 서로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세상 이야기하고 원통하고 분통한 부정적인 이야기 하면 오히려 안돼요. 서로 모이면 힘내라. 힘내라. 용기를 내라. 축복을 해주면 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러기가 우리 사람보다 어떨 때는 똑똑한 것 같습니다. 혼자 날 때보다 공동체로 날면은 71%나 더 멀리 날라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기러기는 희안하게 피곤해서 병이 들어 그만 땅에 내려 앉거나 총에 맞아 땅에 내려 앉으면 날라가는 기러기들이 다 함께 내려서 앉아서 그가 복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잘아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에 한 사람이 신앙에 시험에 들면 다 구역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해 주고 병들어도 같이 기도해 주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같이 도와주고 협조해 줘야 함께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 하면 보통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71%나 더 효과적이고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쫓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 예배와 성도간의 교제가 없어질 때 마귀는 각 개인을 유혹하여 신앙은 상실되고 마귀의 밥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자꾸 흩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함께 뭉치지 못하게 구역 예배도 시험이 들고, 서로 미워하고 원망해서 흩어지게 만들고 교회도 당파를 만들어서 시험이 들어 흩어지게 만들고 자꾸 쪼개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흩어 놓으면 잡아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뭉쳐 놓으면 잡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들이 사나운 짐승이 오면 머리를 안으로 하고 전부다 엉덩이를 밖에서 둥글하게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면 뒷발질을 하기 때문에 짐승이 다가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짐승이 어떻게 하느냐. 소들 모여 있는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뛰어 들어가면 소들이 짐승을 뿔로 박는 것이 아니라 확 흩어져요. 흩어지면 개개로 흩어진 놈을 공격해서 잡아 먹는 것입니다. 마귀도 우리를 흩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누어지면 죽고, 뭉치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나누어지면 망하고, 뭉치면 사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뭉쳐서 기도하면 승리하고 흩어지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마귀는 항상 우리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잡히면 상처 나도록 할퀴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아무도 예외 없습니다. 이 강단에 선 조용기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이곳에 있는 우리 장로님들, 안수집사, 권사님들, 구역장, 지역장들 할 것 없이 평신도까지 예외 없이 마귀는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지 말라!
벧전 5장 8~9절 / 이삼규목사
컴퓨터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려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프로그램이 망가져서 그동안 수고해서 작업한 파일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바이러스에 걸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는 컴퓨터 백신으로 바이러스를 잡아 제거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역시 아무리 좋은 목표와 계획을 세웠다 해도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곧 마귀라는 바이러스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치려면 먼저 마귀의 전략을 알아야 합니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
마귀는 탁월한 전략가입니다. 그는 백전노장의 장군처럼 자신의 공격 방법을 필요에 따라 능숙하게 바꿉니다. 자신이 노련한 성전(聖戰)의 용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속임수가 마귀에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즘 수요일에 욥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욥이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된 데는 사탄의 참소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욥기에 세 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런 욥이 사탄에 의해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욥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까닭은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셔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축복을 다 거두어 가시면 분명히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거두어 가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루아침에 욥을 알거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가고 심지어 10명의 자녀들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욥이 뭐라고 말합니까?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마귀의 1차 시험을 잘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귀가 시험하는 것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집요하게 욥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합니다.
욥 2: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그래서 이번에도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맡깁니다. 그러나 생명은 헤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욥 2: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아내까지 욥을 시험합니다.
욥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때 욥이 아내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마귀는 우리를 멸하기 위해서 서로 상반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는 우리의 죄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덕(德)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마귀는 우리를 죄로 유혹합니다.
이것은 그가 아주 흔히 사용해온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먹혀들었고,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광범위하게 먹혀드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매년 무수히 멸망과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하지만 인류의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은밀히 마귀와 내통하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바로 그 내부의 적입니다. 그 내부의 적만 없다면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2)우리의 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죄의 유혹만이 아닙니다. 그의 지극히 교활한 술책은 우리의 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술책은 때로 놀라울 만큼 큰 성과를 거둡니다. 죄의 유혹을 통해 마귀는 우리의 개인적 삶을 공격하지만, 우리의 덕을 이용해서는 신자들의 공동체 전체를 공격합니다.우리의 덕을 이용한 마귀의 공격은 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의 방어능력을 무너뜨립니다.
마귀의 전략과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 반역적인 정치단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헌법을 파과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바로 그 헌법을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법을 구실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은 사실 모든 언론의 자유를 파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법에 의한 통치를 열렬히 주장하지만 사실 이 나라를 독재국가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다시 말해서, 비열하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도당을 만들고 정권을 잡아 모든 법을 자기 마음대로 집행하는 독재국가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그들의 이런 방법이 악마적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그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배웠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를 섬긴다.”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을 빼앗기 위해 원수 마귀는 우리의 저항을 무력화 하거나 약화시키려고 애씁니다.복음주의 진영을 파괴하기 위해 마귀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의 저항력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성벽에 서 있다가 원수의 공격을 병사들에게 알려주는 성실한 파수꾼이 있다면, 마귀가 하나님의 성채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교회가 마귀의 공격에 저항하는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는 교회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술책을 구사합니다.
잘못된 개념을 유포하는 마귀
그러나 오늘날 마귀의 전략은 달라졌습니다. 물론 마귀가 과거의 전략이 먹히는 곳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그의 더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덕을 이용하여 우리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우리의 자비심의 덕을 이용합니다.
우선 마귀는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사람들에게 유포시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미소 짓고 온유하고 관용적인 분이시다.”라고 속삭이며 사람들의 감상적 감정을 파고듭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귀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그리스도처럼 행해야 한다.”라고 속삭입니다. 만일 우리가 문 아래의 틈으로 보이는 그의 발을 보고 그에게 저항하려고 일어나면 그는 그리스도를 닮길 원하는 우리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부정적 사고에 이끌려 행동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라고 말씀하셨고, 또 ‘비판하지 말라’(마7:1)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주장과 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너는 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논쟁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킬 뿐이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모든 자들을 사랑하라. 그러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다.”
마귀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라!
이렇게 마귀는 성경을 교묘하게 인용하면서 속삭입니다. 그의 이런 감언이설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만일 목자가 그의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법입니다. 파수꾼이 아무 위험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면 성은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적의 손에 넘어가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우리의 덕을 이용하여 우리를 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악한 정치사상을 전파하는 교활한 사람들은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자국민들에게 불어넣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매스컴을 활용하여 그들은 국민들에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것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항상 미소 짓고 관대하고 야구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소수 과격파의 정치사상에 대해 관용적인 사람이 훌륭한 국민이다.’라는 가치관을 대중에게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들의 선동과 감언이설에 넘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은 만민의 아버지이시고 온 인류는 형제이다. 그러므로 걱정할 것 없이 낚시나 하러 가자”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을 위해 기부금을 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그는 즉시 사회의 화합을 해치는 분열주의자라고 비판을 받습니다. 마귀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을 세뇌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그에게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교활한 마귀는 그들의 두려움을 재빨리 이용하여 도처에 바알 제단들을 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논쟁과 다툼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마귀와 철저히 싸우셨습니다. 사도들, 교부들,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은 논쟁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귀에 대항하여 죽기까지 싸웠고,다음 세대들을 위해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기는커녕 그것을 꺼뜨린 부끄러운 사람들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와 마귀 나라와의 결정적인 싸움은 예수님과 사탄사이의 투쟁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뚜렷한 목적은 악의 근원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사탄의 첫 번째 패배는 예수님 선교 초기에 광야의 유혹에서였습니다(마 4:1-11, 눅4:1-12).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하고,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절하라고 유혹하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로 인해 예수님은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물을 빼앗을 수가 있었습니다(막 3:27).
사단의 결정적인 패배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골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사단은 횡령자 (usurper)로서 판명됐고, 이 세계의 합법적인 통치자의 자리에서 내쫓겼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판결은 이미 사탄에게 내려졌지만 그가 마지막 투옥 될 때까지는 횡령 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사탄의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운명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70명의 선교활동 중에서 사단의 마지막 패배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또한 예수님은 악을 위하여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계시록 20:1-3절에 보면 사단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00년이 지난 후에 그는 다시 무저갱에서 풀려 나와 인간을 속이고 고통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탄의 유혹은 박살이 나고 다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던짐을 받습니다(계 20:7-10). 그의 운명은 그가 속인 사람들의 영원한 형벌을 떠맡는 것입니다(계 20:12-14).
죄에서 구원받은 신자는 악마로부터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그들의 발로 사탄을 박살나게 합니다.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날마다 사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하여 그의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마귀는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치 하와를 꼬여 범죄하게 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말로 우리를 속이고 유혹합니다. 그러니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대적하여 물리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대처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이렇게 사단에게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길입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또한 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게 된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계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로 전향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마귀를 물리치려면?
1)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속이려 할 때 허술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가장 합리적이며 적절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에 맞는 방법을 사용하여 속입니다. 때로는 금전으로, 때로는 명예로,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여 틈만 생기면 우리의 인격과 생명을 삼키려 듭니다.상대의 취약점을 골라 허점을 찌릅니다.
그러므로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근신하다’라는 말은 ‘네포’라는 말인데 ‘술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근신한다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말은 어린 사람이나 젊은 사람에게 특히 해당됩니다. 젊은이는 경험이 없어서 잘 속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크리스천은 마귀의 속임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말의 뜻은 정신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6),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벧전 1:13), 그리고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말씀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달려든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야 하겠습니다.
2)믿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길만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라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의지할 때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3)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살 다루거나 타협하려고 하면 마귀는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강력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함으로 모든 성도는 이미 죄로부터, 그리고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승리했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 군대의 대장이 되실 때, 십자군에 대항하는 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지 맙시다. 마귀는 강온 전략을 구사합니다. 마귀가 어떤 전략을 사용하는지 잘 분별하여 마귀의 전략을 무너뜨리고 근신하여 깨어 있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의 치유법
벧전 5장 7~9절 / 김홍도 목사
며칠 전 어느 교수가 카드빚 때문에 걱정하다가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불안이나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술, 담배나 약물복용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판단을 잘못하게 되고 쉽게 잊어버리게 되고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게 되고 나아가서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타살로 죽는 사람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 통계가 있습니다.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비결이 성경에 다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나 스트레스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가 숨어 있음을 알고 영적으로 대처하고 말씀으로 무장하면 문제없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1. 불안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그 문제에 억눌리지 말고 그 어려운 문제보다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얼른 쳐다보아야 합니다. 소년 다윗이 무적의 장수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그 엄청난 골리앗을 쳐다보지 않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담대히 나아가서 싸워 이겼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꼭 죽을 것만 같고 내인생이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는 골리앗 같은 절망에 부딪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에 그 문제만 쳐다보고 낙망하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쳐다보고 의지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 해답도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들의 40%는 지난 과거의 일 때문이고, 50%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속한 것이고, 오직 10%만이 현재 존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해결 못할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순간순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시오.
2. 감당치 못할 시험과 고난은 주시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험을 당할 때는 나 혼자만 그런 고난과 시험을 당하는 것 같고 틀림없이 나는 패배당하고 살아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바에는 속히 인생을 끝내고 말자” 이런 생각을 마귀가 갖다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이길 수 없는 고난과 시험은 주시는 법이 없고, 참다 못해 쓰러질 때쯤 되면 얼른 피할 길을 주시는법입니다. 제가 수없이 많은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마다 큰 힘을 얻고 용기도 얻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불안이 몰려올 때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환경이 절망적일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뜨겁게 기도하면 어떤 고난과 시험도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이나 고난은 주시는 법이 없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때쯤 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3. 에벤에셀의 신앙을 꼭 붙잡으십시오
선지자이며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통치할 때 블레셋이 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 때, 온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큰 우레 소리를 발하여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여 패배시켰습니다. 그리고 빼앗긴 땅을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세우며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꼐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는 뜻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으로 승리했다는 뜻이고, 또 앞으로도 그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사무엘상 7장 13절에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신앙생활 해본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도우시고 구원하신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환난과 고통이 몰려와도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믿음을 굳게 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사해서 과거에는 하나님이 살려주셨지만 이제는 도와주시지 않을 줄 알고 낙심하고 탄식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생활 가운데 수없이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열두 가지 재앙과 장자 죽는 재앙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배불리 먹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시는 등, 기적의 연속이었지만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하며 돌로 쳐 죽일 듯이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노하셔서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을 꼭 붙드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4.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이 몰아닥칠 때 꼭 죽을 것만 같고 내 인생이 다 끝장난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시지 않고 성령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신 말씀대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함께 하시고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잊고 우리가 근심하고 불안에 떨고 있으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는지 모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셨습니다. 제가금란교회에 처음 왔을 때, 작은 교회이면서도 목사에게 까다롭게 하는 교회로 유명한 교회에 담임자로 왔으니 몹시 불안해 하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성경을 펴보라” 하는 영음이 들려서 성경을 손가는 대로 폈더니 사도행전 18장 9~10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제게 큰 힘이 되었고, 작은 금란교회가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풍랑이 일고 폭풍이 몰려와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코 풍랑과 파도를 바라보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서는 안 됩니다.
소년 다윗은 무적의 거장 골리앗을 대항해 나가 싸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가 싸워 이겼습니다.
5. 기도로 불안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Master-Key와 같습니다.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열쇠입니다. 이 말은 기도하면 무엇이나 내 뜻대로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불안과 근심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때 낙심하지 말고 간절히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어려운 문제일수록 뜨겁게 부르짖고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 기도하십시오. 사방이 막힌 것 같아도 하나님이 헤쳐나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
저는 무수한 폭풍을 만나고 밀 까부르듯 하는 환난을 당할 때, 사방이 막힌 것 같고 헤쳐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불안할 때 눈이 말똥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흘러서 내복이 푹 젖습니다. 그때는 침대에 누워서 고민하지 않고 잠옷이라도 갈아입고 무릎꿇고 앉아서 두 시간 내지 세 시간 기도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또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뜻밖에 해결되는 것을 수없이 체험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찾고 찾으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헤쳐나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나 행하시고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뜨겁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거나(이사야 41장 10절), 지혜를 주셔서(야고보서 1장 5절), 힘을 주시고(빌립보서 4장 13절), 믿음을 주셔서(시편 37편 5절),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십니다.
39년 동안 마약중독자였던 어느 사람이 마약을 끊고 새사람이 되었는데 어떻게 할 수 있었느냐고 하니까 “무릎으로 싸웠다”고 하더랍니다. 기도에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어떤 노이로제 환자는 정신과 의사가 2년 이상 걸려야 고칠 수 있다고 했는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단 3일 만에 완치되었다고 합니다.
6.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마귀 악령은 우리에게 의심과 불안을 줍니다. 그런고로 먼저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본문에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7절) 하시고,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며 불안이 엄습해 올 때는 곧 마귀가 나를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고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마귀를 담대히 꾸짖고 물리쳐야 됩니다. 우연히 우울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악령의 역사입니다. 야고보서 4장 7~8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면 곧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저는 근심과 불안이 몰려와서 내 인생이 곧 파멸당할 것 같고 교회가 하루아침에 다 파괴될 것같이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서 땀이 나고 열이 날 때는 두세 시간 기도하는 것과 내 가슴을 치면서 “마귀야, 물러가라. 저주받은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물리치면 곧 평안해집니다. 한두 번에 안 되면 다섯 번, 여섯 번 계속 꾸짖고 물리치면 마귀는 쫓겨가 평안해집니다. 저는 누가복음 10장 19절을 수없이 외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의심, 불안, 우울증은 영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마귀를 물리쳐야 치유됩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인데 시시각각 공격해오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이 영전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셨기 때문에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7. 하나님께 맡겨야 치유됩니다
불안과 스트레스를 치유하려면 제일 먼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절대로 없다는 것, 에벤에셀을 믿고 임마누엘의 신앙을 잊지 말고 뜨겁게 기도할 것과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근심과 불안거리를 몽땅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는데 내가 근심 보따리를 꽉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없습니다.
“맡긴다”는 히브리말은 “꼬올”이라고 하는데 “은행에 돈을 맡긴다”는 뜻이고 “던져 버린다”, “굴려 보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기도와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하는 맡기는 기도였습니다. 본문에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시편 55장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37편 5~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참된 안식이 없는 믿음
벧전 5장 7~8절 / 박지온목사
인사하겠습니다. 안녕하십시오. 평강하십시오. 당신은 이 지역의 전도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지역과 세계를 맡기시고 우리에게 확실한 복음의 비전으로 주의 음성들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주님. 먼저 우리에게 믿음 주시고 믿는다고 하지만은 사실적인 믿음으로가 아니고 우리가 몽상과 또 막연한 믿음 속에 사는 저들에게 구체적으로 응답 받는 사실적인 믿음으로 한 주간도 응답 받을 수 있도록 은혜 입혀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주의 음성 듣도록 하실 때에, 흑 암의 권세가 무너지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목 자체가 약간 이해가 안 되는 게 "참된 안식이 없는 믿음"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앞에 말과 뒤의 말이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러나 지금 이게 현실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현재 다락방을 한다 그러고, 전도자가 된다 그러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 없으면서도 또, 그리스도는 알고 있고 이렇게 해서 다락방 교회나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이 믿음이라는 사실 자체가 정리가 잘 안 되고 그래서, 이제 갈등이 자꾸 오는 그런 경우들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조금 정리를 해야 될 것이 참 믿음 그러면, 참된 안식이 없을 수가 없죠. 그런데 "참된 안식이 없는 믿음"이라고 붙이는 일은 우리 지금 현재 기준으로 믿음이라 그럴 때에 이런 어떤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지금 있거든요.
그래서 먼저 조금 알아야 될 것이요. 항상 제가 말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영적 문제라 그러면 많은 경우 오래 믿는 사람들이 뭔 생각을 하냐 하면요.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실제적으로...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 사람이 영적 문제가 더 있어요. 없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다. 이런 어떤 착각이 있기 때문에 믿음을 갖고 있으나 실제적인 안식이 없어요. 실제적인 믿음이 아니에요. 또 이런 어떤 것 때문에 사단의 통로가 열리고 이런 사실들을 좀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죠. 그래서 지금 이 목사님 메시지 속에서 다락방에 흘러나오는 문제점들을 이런데서 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왜 그렇게 되느냐? 예수 믿어도 뭐냐 하면요. 지금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없어요. 이게 지금 현재 아주 큰 문제입니다. 영적 문제! 영적 문제! 그라는데 영적 문제를 안다 그랬을 뿐이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마음의 변화가 실제적으로 없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전도하자! 전도는 모든 문제 해결이다. 백 번 말해보니 뭐합니까? 역시 우리 속에는 전도가 모든 문제 해결이다라는 그런 말만했지, 내 마음과 생각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안 바꾸어 져요. 그러니까 어떤 문제나 사건이 생길 때에 전도의 시각에서 영적인 시각에서 이 보는 눈이 안 나와요. 그러니까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이것이요 요즘 자꾸 뭔가 좀 들하고 있어요. 묵은 디이, 묵은 디이 그랬던 소리를 요즘에 많이 덜하는데, 사실은 묵은 디이들이 오는 문제가 이 문제이거든요. 그게 뭐 "묵은디이" 그럴 때에 나는 뭐 안 빠졌느냐?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제일 어려운 문제가 이 문제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오래도록 갖고 있는 그런 어떤 그 영적 문제가 많아서 그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이나 습관 이런 것들이 변화가 안 되거든요. 그대로 지금 갖고 있습니다. 갖고 있으면서도 지식으로는 이제 전도다! 전도다! 이러니까? 뭔가 이 실질적인 사건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따라서 나오는 갈등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제 시간이 되면서 나오기는 나와야 되겠고, 그렇게 하자니까! 첫 번째 감동 받았던 것이 뭐냐 하면요. 율법에서 해방이다! 해방이다! 이래서 처음에 우리 메시지 속에 흐름이 뭔가 너무 율법에 눌렸던 것에 대한 어떤 그 이 문제 때문에, 율법에서 해방이라는 문제가 말하자면 소위 앤티미쥼이란 식으로, 무 율법주의 적으로 뭔가 막 먹어도 되고, 뭔가 막 생활해도 되고, 막 움직여도 되고 이런 것으로 흘렀어요. 이런 것이 어디로 흘렀느냐 하면요. 생각과 마음이 안 바꾸어지니까? 이게 어디로 가느냐 하면요. 조금 그런 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다 보니 무질서에 빠져 버렸어요. 무질서해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타락이라 그랍니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처음 초기에 그런 어떤 의미에서 소위 이제 율법에서 해방이다. 그럴 때에 안 먹던 술도 먹어야 마치 복음이 된 것처럼. 이것이 상당한 파장으로 들어오더라 구요. 그 다음에 담배도 막 피워야 되는 것처럼. 이렇게 해 가지고 술, 담배 하면 율법에서 해방된 것처럼. 복음이 된 것처럼. 그러니 이것이 상당한 무질서로 말하자면 그것은 무질서지. 무질서는 바로 타락으로 이어 집니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 왜냐하면 여기에 이것이 안 바꾸어지고 오래 동안 우리가 종교 속에 빠졌다. 무질서 속에 빠졌다. 그 율법 속에 빠져 있다 보니까? 거기에 대해서 뭔가 마음과 생각을 한번 바꾸어 보면서 해방을 시켜보고 해결해 본다는 생각들이 뭐냐 하면 무질서로 빠져 버리는 겁니다. 실제로 있어요.
그렇게 해 가지고 뭔가 이 모여 가지고 술 파티도 하고, 뭐! 그러고 그냥....
여러분 뭔가 담배 핀다 술 마신다. 그 차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그것이 들어 올 때에 무질서가 들어온다 이겁니다. 타락이 들어온다 이겁니다. 뭐! 예를 들어서 여러분 잠이 안 온다 그래서 한잔씩 마시면, 잠이 잘 오는 사람 많더라 구요. 그렇게 한 잔씩 하면, 그러니 그 꼴깍 꼴깍 하다 보면 뭡니까? 알 콜 중독이 되는 겁니다. 안 먹고는 못 살아요. 그때부터 타락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결국은 문제가 여기서 다 나오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여기서 또 문제가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게 이제 우리가 빠졌던, 우리 교회가 빠지고 내가 빠졌던 우리들이 쉽게 송현 교회에 어떤 그 습관이나 삶에서 빠졌던 문제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요.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이 오니까 안 된다 이것이거든요. 안 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용인을 하다가 이것이 너무 와 버리니까, 이리로 빠지니까,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율법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이 소위 말해서 이건 규모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걸 갖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으로 빠지느냐? 원래 이런 의식에서 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이래서 안 되겠다. 그러면서 뭐냐? 정 죄 해버립니다. 정 죄 해요. 이러니까 뭐냐 나옵니까? 교회가 다시 어디로 흐르느냐? 옛날 우리가 정 죄 하던 교회로 돌아가 버려요.
복음이 뭔가 해결 받는다. 이런 의식보다도 이건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그러면 교회가 또 날카로워져버려요. 그래서 막 비판하고 비판이 나오고 이렇게 되니까? 문제가 율법으로 조금 배경이 되어 있는 데다가, 율법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그런 배경에서 이것이 나오다가 이게 강조가 되니까? 율법주의가 또 나와 버립니다. 여기에 빠진 게 바로 이것입니다. 거의 그래서 저도 이렇게 가만히 돌아가는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율법주의가 되어서 되는 것보다도 이것이 문제다.
저는 늘 바울을 들어서 말합니다. 왜? 복음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율법주의였던 바울에게 율법을 맡겼느냐? 그것이 규모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율법주의에 빠진 게 아닙니다. 보면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이 경건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만 그걸 오늘은 좀 피하겠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요. 율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을 우리가 율법 그 차체를 두고 너무 중요시 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율법이 됩니다. 그것이 삶에 규모입니다. 하나의 어떤 질서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뭡니까? 타락에 빠져 버립니다.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바로 좀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놓고 볼 때에 그러면 믿음입니다. 어떤 종류에 믿음이 있냐? 이걸 좀 분석을 해 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우리 살면서 우리 믿음! 믿음! 그럴 때에 어떤 종류에 믿음이 있냐? 그러니 여기서 일반적인 믿음 사실상 어떤 이 믿음이라는 것이 없으면 치유라는 배경 가지고 계속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이 믿음이 떨어져 버려도 정신적인 문제가 와 버려요. 예를 들어서 내가 이 땅을 디딜 때에 절대로 안 꺼진다는 믿음이 있거든요. 이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마음에 뭐냐 하면요. 언제부터 뭔가 내가 이 땅을 디딜 때에 이 땅이 안 꺼지겠나? 이런 의심이 와 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하느냐 길 갈 때에 안 꺼질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건 정신병자요. 간단히 말해서 정신병자 아닙니까? 여러분 일반적인 믿음이 떨어 졌을 때 정신 문제가 와요.
그러면 확실한 것은 여러분 지금 뭐 우주선이 날아 올라가고 그런데요. 잠깐 제가 신문을 보면서 느낀 것은 우주선에서 참 힘들 일이 뭐냐? 무중력 상태니까? 음식 먹는 게 참 힘들데요. 이게 뭔가 물방울도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붕 떠 있으니까? 이게 너무 너무 힘드는 겁니다. 밥을 먹어도 이게 내려가야 되는데 이게 뭔가 상당히 어려운가 봐요. 그리고 특별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화장실 가서 볼일 보면 물이 둥둥 떠다니니까! 생각해 보세요. 뭔가 딱 내 놓으면요. 내려 가버려야 되는데 이게 둥둥 떠다니니까! 기가 찰 것 아닙니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삶이 이 땅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새삼 한 번 느껴져요. 생각을 해 보세요. 무중력 상태니까? 그러니 뭐든지 떠다닙니다.
그러니 뭔가 이제 어떨 때는 뛰어 날아 올라봐야 되겠다. 그러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게 아니거든요. 반드시 힘에 의해서 올라갔다가 구체적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되어야... 이것이 만유 인력 아닙니까! 모든 행동에서 기본적인 법칙이거든요. 이것이 없으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제 말하자면, 이런 믿음이 딱 떨어진다. 그러면 뛰면 떨어질 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딱 떨어 질 때에 푹 꺼져 내려가 버린다. 이걸 또 못 믿을 때 다른 문제가 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일반적인 믿음! 일반적인 믿음! 그럴 때에 여기서 뭘 또 느끼느냐 하면, 사실상 이게 무너지면 참 어려워요.
아내가 남편을 믿고 남편이 아내를 믿는 것 일반적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못 믿어요. 그런데 어디 갔다 오면은 혹시 무슨 짓을 하고 오지 않았나 싶어서 셔츠를 벗겨 가지고 딱 뭐 루즈 자국이 없나 싶어서 살피고 뭔가 이상한 냄새가 안 나나 싶어서 살피고 이러면 그것을 가지고 뭐라 그러냐 하면 의부증이라 그랍니다. 나는 의부증 앓는 심각한 사람을 실제로 봤거든요. 어떠냐 하면 남편이 어디가면 남편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녀요. 혹시 뭔 짓을 할까 싶어서 어디까지 가느냐? 나는 진짜 더러운 병이다 싶은 것은 남편이 화장실에 가면요. 시골에서 화장실 갈려면 밖에 조금 나가거든요. 그러면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정신병 완전히 정신병이거든요.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못 믿는 것 의처증 아닙니까? 제일 더러운 병이 의부증, 의처증이더라 구요. 그러니 뭐냐? 못 믿는 것 이것 정신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이런 증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뭐냐 하면요. 이 일반적인 믿음조차도 없어 가지고 오늘날 사회적으로 깨지니까 이게 지금 사회 문제가 오거든요. 이건 정신문제 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이제는 부모 자식간에 관계가 이게 와 버렸어요. 부모는 자식을 못 믿어요. 자식은 부모를 못 믿어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최소한으로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나는 내 자식을 믿어야 합니다. 내 자식은 부모를 믿어야 됩니다. 이것이 깨어져 버리면 여러분 정신문제 고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와요.
그래서 이걸 너무 객관성이 없는 믿음도 좀 문제예요. 왜? 학교에서 문제가 있어서 아이들을 학교에서 가정 상담을 가니까! 우리 아이들은 절대로 안 그런다! 이것도 또 문제예요. 그러나 어느 정도 뭔가 하면요. 자기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믿어 주지 않는다. 이것은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제주 있는 지혜 있는 부모들은요. 나는 절대로 안 속는다. 네 한 테 안 속는다. 그러거든요. 속아야 됩니다. 이게 안 속으면요. 이것이요.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막 알면서도 속을 수 있는 부모라야 자식이 바로 됩니다. 이 안 속으면요. 부모는 자식에 대한 불신이 와 버린다. 피차 이렇게 되면요. 결정적인 순간에 부모도 자식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와야 됩니다. 이것이 조금 더 나가서 여러분 보세요. 이것이 만년 되어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심지어는 목사와 교회가 모든 게 이게 전부 불신이 와 버렸습니다. 이게 정신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이게 악령의 역사,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뭔 생각이 드느냐? 맞다! 그렇다! 나는 내 교인들을 믿는다. 내 교회를 믿는다. 나는 내 교회를 믿는다 무슨 소리하든지, 무슨 말이 들려도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는다. 이것이 와야 되겠구나. 그리고 여러분은 뭐냐 하면 무슨 이야기 무슨 소리 나와도 나는 뭐냐? 목사님 믿는다. 나는 장로님들 믿는다. 이것이 깨어져 버리면요. 여기에 가장 회복할 수 없는 정신 문제가 와 버립니다. 이것은 뭐 겉으로 정신문제가 왔다. 사실 의처증, 의부증 무섭다 그러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문제가 나와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오느냐 하면요. 이렇게 배경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나중에 또 설명이 되겠습니다만...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오는 것이 뭐냐하면, 이 특수한 믿음입니다. 특수한 믿음은 뭐 여러 가지 말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쉽게 뭐냐 종교라는 것. 종교라는 것을 특별히 들 수 있죠.
그런데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고 심리적인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알아야 하는 것은 특수한 믿음이 있을 때에 사실은 종교적인 믿음, 심리적인 믿음이지만 어떤 역사가 나오느냐? 아닙니다. 훨씬 역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신비주의도 특수한 믿음 속에 속합니다. 그러니 제가 그 여러분 잘 알다시피 40일 철야하면서, 40일 금식하면서 30일 딱 넘어 가니까! 30일 넘어가면 여러분 힘을 못써야 되는데 3시간 딱 자고 계속해서 성경을 봤거든요. 성경 보면서 심지어 엄청난 내 나름대로의 어떤 표현 못할 어떤 기적들이 체험이 되는 겁니다. 체험이 되면서 그러니까!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는 그런 과정에서 오는 것이 뭐냐 하면, 엄청난 역사들이 나오더라 구요. 그러니까 여러분 보세요. 심리적이라거나 여러 가지 명상운동이다. 이런 것이 전부다 어떤 면에서 특수믿음입니다. 이런 믿음...
그런데 이것이 요즘 어떤 면에서 21세기 사단의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 같은 경우 유럽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는 경우로 많이 파고드느냐? 거의 이리로 많이 파고 들어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냐?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굉장히 좋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전부 속아 버리는 겁니다.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명상운동 참 요즘 많이 번집니다. 학교도 뭐 명상운동까지 하는 학교도 있더라 구요. 딱 앉혀 놓고 수업 시간 전 30분 아니면 10분 딱 앉아서 명상하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우 역사가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엇이냐? 이것이 생겨 버립니다. 이걸 보통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신비도 하면 할수록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역사가 안 일어난다는 게 아닙니다. 또 뭐냐? 틀렸다는 문제보다도 문제가 엄청난 문제 다음에 문제 배경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어떤 믿음이냐? 또 예를 들어 볼 수 있냐 하면요. 이게 좀 말이 안 돼요. 그러나 좀 말해야 되겠어요. 무슨 이야기냐? 한번 받아합시다. "염려하는 믿음" 이게 지금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특별히 다락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게 이제 정리가 안 되었을 때에 뭐가 안되냐 하면 이게 너무 많아요.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 잘 알아요. 그걸 믿어요. 이게 이상한 겁니다. 앞 뒤 안 맞아도 사실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보세요. 뭔가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알고 모든 문제 해결 됐다 그라는데도 염려는 혼자 하고 앉았거든요. 독차지하고 앉았어요. 그런데도 안 믿느냐? 믿어요.
자! 그런데 일단은 여러분 여기서 우리 짚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이 구주이신 것을 믿어도 우리 마음과 생각이 너무 오랫동안 습관이 되었던 것이 염려 걱정 이런 문제 영적 문제되어 있을 때에 그것이 금방 안 바꾸어집니다. 안 바꾸어지면서 뭐가 오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으나 뭐가 오느냐 우리 생각에 삶에 이것이 안 사라져요. 염려가 안 사라져요. 한번 받아 합시다. "염려해도 염려하고 믿어도 나는 천국 갈 수 있다." 맞아요? 여기에 지금 모순 투성이의 믿음이 설명 잘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구속받는다 구원받는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백 번, 천 번 염려하고 근심하고 심려하는 것 어디입니까? 내가 구원받는 역사는 심지어 내가 타락하고 뭐 사창가 들어갔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정권입니다. 이것은 그것은 내가 잘했다 못했다 여기서 구원받는다! 못 받는다! 그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당신의 주권 적인 역사로 염려를 백 번, 천 번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 그러면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염려를 해도 나의 영역과 상관없이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것이 보통 거의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염려하면서 근심, 근심하면서 뭐가 오느냐? 심지어는 이것이 확인이 안 되면 무엇으로? 구원 문제로 직결되어 버리면, 여러분 진짜 감당할 수 없는 혼선이 옵니다. 삶이 안 돌아가요. 이것을 감당을 못합니다. 이런 문제가 와요.
아마 이것이 가 안 되면, 여러분 신앙 생활이 상당히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습관과 이런 것들이 너무 뭔가 영적 문제 속에 빠져 있던 이런 것에 지금 너무 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라 그래도 염려 걱정 안 빠져나가는데, 왜? 워낙 오래 깊이 거기에 젖어 있기 때문에 뭔 문제 생겼다 그러면 염려를 통해서 바라보거든요. 뭔 사건이 생겼다 그러면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거든요. 그래서 한번 받아합시다. "구원은 받아도 고생은 많다." 그 이야기예요. 이 문제가 그래서 여러분 조금 아실 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믿음 이라도 여러분 우리 흔히 말하는 데로 이제 심리적인 믿음 적극적인 사고의식이라던가 이런 것들로 통해서 하는 사람들은 염려 안 하고 거의 이 땅에서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안 믿어도 이런 어떤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된다! 하면 된다. 뭐 그 걱정할 것 없다! 생각으로 이런 사고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수 안 믿어도 일만 잘 될 수 있어요.
저는 그 오랫동안 질병 가운데 있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참 중요한 것이 거의 문제는 내가 여기 믿기는 믿어도 질병 통해서 오는 염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는 것이요. 다음에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다른 문제로 심각하게 빠져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잘 믿고 죽어서 천국 갈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내가 염려하는 모든 염려가 어디에 있냐? 전부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도들에게 지금 특별히 뭡니까? 다락방을 비판하는 것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러니까 뭐냐? 범사에 염려하는 것들로 다 빠져 버려요. 한번 받아 합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옛날처럼 교회에 대해서 염려 안 합니다. 염려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고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 교회에 대해서 뭐 할 때에 앞 짚어서 뭔가 일어날 걱정부터 먼저 하거든요. 일어날 걱정하게 되면 일어날 일들이 와요. 생기에 되어 있어요. 그게 그렇게 되더라 구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로 그런 내용들로 오더라 구요. 그래서 오늘 조금 여기서 말씀해야 될 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늘 말씀하는 겁니다만 이런 염려를 통해서 뭐냐 하면 사단이 예수 믿는다! 안 믿는다! 상관없이 일단 창세기 3장 1절에서 6절. 불 신앙에 사로 잡혀 버립니다. 여러분 염려 들어오는 것이 왜 겁나느냐? 왜 지금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 땅에 고통받느냐? 불 신앙이 심어져 버려요. 우리가 아무리 불 신앙으로 빠지고 넘어지고 쓰러진다 그럴 지라도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은 안 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은 안 망한다는 말은 이건 영적으로 완전히 멸망 받았다 할 지라도 궁극적인 면에서 구원의 역사를 축복을 안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적인 삶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면이 여러 가지로 제가 이 마음에 질병 통해서 설명 드렸습니다만 어느 순간에 아!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은 주권 속에 들어 왔는데 안 망한다. 상관없다. 그러면서 이제 바꾸어 지잖아요. 그러면서 뭐 하느냐? 기대가 옵니다. 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내가 아픈걸 통해서 뭘 하실까? 이런 것이 오면서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마음이 바꾸어집니다. 그러면서 뭔가 일부러 기대를 자꾸 합니다. 주여 뭘 주시려고 이러십니까? 뭘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그래서 전에처럼 빨리 일어나야 되는데 이런 것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면 느슨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죽을 때까지 일하라면 일 하는 것이고 고치면 고쳐 주시는 것이고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이걸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왜 하나님께서 이만큼 뒤쳐져야 되고 세계 앞에 지금 뛰어가서 전도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왜 우리 교회를 이렇게 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이걸 나름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뭐가 오느냐 하면 제일 어려운 문제가 오래 동안 질병이 올 때에 이것이 오더라 구요. 이것이 오면 뭐가 되느냐 사단의 통로가 돼요. 이것이 오게 될 때에 염려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교회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나 일단 여러분들이 비판하고 불평하고 그게 전부 불 신앙 배경이거든요. 그것이 왔다 그러면 여러분 생애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정 생활이 어려워요. 그래서 교회가 복잡하게 되면 가정이 복잡해지는 것이 딴 게 아니거든요. 교회가 어떻다 이러면 불 신앙이 들어와 버려요. 그러니까 가정 생활과 삶이 어려워져 버립니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적극적인 사고로 사는 사람들은 쉽게 열립니다. 그 만큼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데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범사에 부정적으로 일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것이 심리적인 배경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어떤 배경에서 오는 것은 이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이런 엄청난 신앙의 축복을 가지고서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 부정적인 시각으로 뭔가 안 된다! 안 된다! 이러면 안 되는 문제만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 인생 계속해서 부정적인 사건이 자꾸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 후대까지 계속 연결되더라 이겁니다. 이러니 엄청난 문제가 나와요.
그러니 여러분 우울증이라던가! 어저께 우리 윤 목사님이 치유 메시지 하면서 열등감, 열등의식. 그런 문제 나오고 열등감, 열등의식도 전부 이겁니다. 나도 모르게... 구원과 상관없어요. 구원받은 사람도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교회에 여럿이 모이다 보면 저 사람 보다 못한데 열등감 나오거든요. 이건 뭐 중직자도 그렇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상관없어요. 수준에 맞추어서 다 나오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불 신앙이 다 들어와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히 뭐냐? 절대로 감사 못하고 삽니다. 한번 받아 합시다. "내게 주신 것이 너무 많다. 감사하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 신앙에 빠지면 뭡니까? "주여 내게 해 준 게 뭡니까?" 그랍니다. 그러니 자식들도 부모한테 "부모가 내게 해 준 게 뭐냐?"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안 낳아 줬으면 나오지도 못 할건데, 낳아 준 것도 하나님 은혜지만...
그러니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서 눈이 안 열려요. 여기에 빠져 버리면, 그러니 감사라는 게 전혀 안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벌써 신앙 생활에 감사가 사라졌다! 없다! 이렇게 되면, 일단은 여기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생애가 어려워요. 어두워요. 힘들어요. 뭐든지. 제가 뭐든지 안 된다!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이게 점점 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대만 집회를 치유 사명자 집회를 하는데 이건 뭐 류 목사님 상관없이 대만에서 약속을 해 가지고 신청을 했습니다. 따로 일본 팀이 들어가는 그 시간에 대만 집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이 뭔가 들어가야 된다! 안 들어가야 된다! 이런 말 가지고 치유 총국이니까? 목사님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 내 생각은 안 된다! 안 된다! 이러다가 그러다가 마음에 평생 안 된다 그러면 평생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작정을 했습니다. 주여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신청을 했거든요. 해 놓고 딱 나와서 한 주간 전에 또 대만은 덥다던데 무척 덥다 그래요. 또 더워도 무덥습니다. 거기는 막 덥다던데 나는 더우면 상당히 안 좋은 그런 어떤 신경질이 나는 하나의 어떤 문제가 있어요. 더우면은 그래서 마음에 아! 안되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 그래서 내가 안 간다 그러고 작정을 했어요. 작정을 하고 신청을 안 하겠다고 하고 신청 보고를 하고 그랬다가 어저께 내가 메시지를 들으면서 메시지를 쭉 들으면서 내가 또 여기에 잡히는 구나! 나도 모르게 워낙 나한테 이게 많은 것 같아요. 워낙 이 많은 여러분들도 이 메시지를 듣고 살았으니, 여러분도 이것이 많은 것 같아요. 송현 교회 이 문제 있는 사람 많은 것 같아요. 날 닮아 가지고, 불 신앙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일단은 거기에 가는 것을 확정을 했습니다. 주여 가다가 멈추어도 메시지 전하다가 그냥 거기서 치유하다가 죽으면 그대로 죽는 거 아닙니까? 주여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여기에 대한 생각이 안 된다고 하다가 내가 치유하다가 가다가 메시지 전하다가 죽으면 죽는 거지 이런 것과, 전혀 생각이 달라져버려요. 마음이 달라져 버려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이런 배경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어떤 하나의 사건이 터졌을 때 저거 안 된다. 큰일 났어! 안 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요. 그대로 내가 염려하는 것이 역사가 해 버립니다. 왜? 역사는 배경이 있어요. 사단의 역사는, 그런데 그런 문제가 왔을 때도 신앙으로 "주여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됩니까? 안됩니까?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래 버리면 생각이 달라져요. 마음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때에 엄청나게 달라져 버립니다. 이게 전부 사단의 배경, 불 신앙이 들어와 버리면요, 엄청난 문제가 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 그 다음에 두 번째 문제는 마태복음 4장 1절에서 나오는데 이 불 신앙을 주는 문제의 배경이요, 어떤 문제냐 하면, 의식주 문제입니다. 제일 기초적인 불 신앙이 의식주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의약분업을 보면서 신문에 뭐! 밥그릇 가지고 싸운다! 그라는데, 내가 속으로 진짜 참 모르는 소리다. 인간은 밥그릇 가지고 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내 이익과 연결되면 뭐가 나옵니까? 신경질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이걸 이용해서 기본적인 인간의 문제, 기초적인 문제 가지고 덤빕니다. 그래서, 우리가 딱 시험을 받을 때에 먼저 뭡니까? 예수님에게도 돌 가지고 뭐 되게 만들어 먹어라 구요? 빵으로 만들어 먹어라! 뭡니까? 먹는 것 가지고 시험했어요.
여러분 먹는 것 가지고 걸핏하면 시험 듭니다. 그래서 옛날에 뭐라 그랬습니까?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나는 그게 진짜요 명언이요.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 그게 아무 것도 아닌데 마음 상해요. 한 그릇 얻어먹으나 안 얻어먹으나 마찬가진데 요즘 많이 얻어먹으면 괜히 뚱보 되고 안 좋은데, 그런데도 그것 가지고 마음 상하더라 이겁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여러분이 이 문제 가지고 딱 부닥쳐 올 때에 여러분 엄청난 문제로 불 신앙에 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 생활 할 때에 의식주 문제, 특별히 먹는 문제가지고 직장문제 딱 걸려 나오면, 정말 이것이 헤어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 아니면 이기기 힘들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사단의 정체! 어떻게 통로로 들어오느냐? 이걸 알면 영적 문제니까?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일어나게 되죠. 그러니 의식주 문제도 마찬가지죠. 입는 것, 그 다음에 잠자리 같은 것, 명예 문제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이 나오게 되죠. 이렇게 있어서 사람을 유혹하고 그렇게 하게됩니다.
자! 그런데 또 한가지는 문제는 다 좋은데 다 이겼는데, 문제는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11장 14절에 보면, 이게 사단이 완전히 얼굴에 가면을 쓰고 옵니다. 여러분 사단이 뿔 달고 뭐! 이빨 이렇게 해 가지고 내가 널 잡아먹겠다! 이러면 예수 이름으로 사단 결박 받아라! 물러가라! 이렇게 기도 할건데 이게 없어요. 싹 웃으면서 천사의 날개를 달고 유혹을 해 버립니다. 그렇게 오는 것들이 나는 그렇게 봅니다. 종교라든가 심리 배경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거의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변형이 되어 가지고 따라옵니다. 이것은 말씀 없으면 다 넘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말씀 속에 안 서 있게 되면, 말세에 이것은 엄청나게 깊이 들어옵니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인 척 하고 덤벼듭니다. 여기에 전부 다 넘어져요. 자! 이런 배경을 여러분 좀 보시고...
그러면 이제 중요한 것은 염려를 하고 걱정을 하고 근심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염려, 걱정, 근심을 해도 여러분, 다시 한번 확인해야 됩니다.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었든지, 어디에 처했든지, 나는 아무리 지옥 갈려고 그래도 갈 수가 없어요.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이게 처음에 안 됐거든요. 왜냐하면 사창가에 있는 사람은 절대 구원 못 받을 줄 알고 아예 전도도 안 했거든요. 뭐 술 처 먹고있는 사람들, 여기서 내가 술 처먹었다는 말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고 이건 밤낮없이 처먹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술데레끼. 아예 안 된다 이래가지고 가지도 안 했어요. 그래서 여기서 술 먹는 사람 그러니 먹는 사람보다 처먹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도 같이 술 먹자 하다 보니까 타락에 빠져 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각입니다. 어떤 자리에 앉아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그럴 때에 구원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끝났어요. 일단은 기초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을 지금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 막 염려, 걱정, 근심이 발짝을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워낙 그냥 내가 염려하는 체질이 되어 가지고 문제만 생겼다 하면 염려에 빠지고 우울증에 빠지고, 염려를 너무 해 가지고 우울증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붙잡고 있는 한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정신병자들이요, 정신병이 워낙 귀신에 붙잡혀 가지고 이 염려하던 체질이 되어 있다 보니까!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있어도 교회에 나와도 여러분 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순간순간 조금, 느낌이 편안하다 그럴지 모르지만 금방 어디에 빠지느냐? 염려에 빠져 버립니다. 또 근심에 빠져 버립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럴지라도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정확하게 영접했다 그럴 때는 지금 아직까지는 너무 염려에 빠져 가지고 사단의 이 뭔가 속임수에서 못 헤어 나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씀이 확인 안되면 빠져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조금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하면, 여러분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선진국가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실력으로는, 의학지식으로는, 세상 지식으로는 정신병에서 안 된다는 사실이 증명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여러분 미국 같은데 얼마나 문화가 발달했습니까? 지식이 발달했습니까? 그러나, 미국에도 점점 정신 문제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안 된다 그랬습니다. 막말로 해 가지고, 솔직히 말해서 정신병은 안됩니다. 이게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만 오면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뭐가 옵니까? 평안이 옵니다. 이게 맛이 들었을 때에 이 사람들은 뭐! 그래 내가 정신병 환자다 이런 것 상관없이 내가 그런 것을 못 느꼈다 할지라도 뭐가 오느냐? 일단 메시지 안 듣고는 못살아요. 이 사람은 같이 정신병자입니다. 여러분 여기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정신 치유 메시지를 한다, 딴 게 아니고 복음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양심적으로 그들이 막 고생하게 될 때에 잠시 잠깐 왔든지, 어디에 왔던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안식이 왔다 그래서 내가 갈급한 마음이 됐다. 그렇게 된 그 사람에게는 뭐가 되느냐? 복음에서 볼 때 소망이 있는 겁니다. 그게 그냥 오는 게 아니거든요. 왜? 그게 지속되어 버리면 치료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신병 환자 왔다 그럴 때에 한꺼번에 뭐 낫는다고 그 말을 첫 번부터 안 하잖아요. 그렇게 안 된다 안 그랍니까! 지속해서 뭐 합니까? 지속해서 메시지를 쭉 들을 때에 나도 모르게 언젠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게 해결되어 버립니다. 말씀이 확인되고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게 확인되어 버리고 이렇게 될 때에 이 문제가 나아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뭔 시간을 봐야 되느냐 하면 이 사실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받아 합시다. "나는 비록 염려해도 구원은 확실하다. 믿습니까? 진짜 확신합니까? 확실합니다. 아마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안되면 메시지가 안 들어가요. 제일 첫 번째 문제가 이것이 안되면 여러분 구원의 백성이 안되면 뭐가 안 되냐? 메시지가 안 들어갑니다. 혹시 메시지가 안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진짜 염려스럽습니다. 메시지가 안 들어가면 언젠가는 떠나게 되요. 구원이 안 되거든요. 이것이 안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구원받았다! 안 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생명이 있다! 분명히 먹도록 되어 있어요.
제가 우리 그 조그마한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이게 뭔가 먹는 게 조금 눈이 열리면서 뭐! 이 떠 먹이고 그렇잖아요. 이러면 배가 고프잖아요. 배가 고프면 그 조만한 게, 아무 것도 모르는 게 내가 사과를 먹는다거나 이러면은 내 입만 봐요, 아! 내가 그것보고 참, 야! 뭔가 이 애들이 이러면 진짜 입에 들어가는 게 내 맘대로 안 되겠더라 구요. 뭐냐 한 숟가락 떠 넣으면 떠 넣지! 내가 못 먹겠더라 구요. 그런 게 느껴져요. 그래서 속으로 참! 살았다는 것이 때문에, 사람이 살았다! 분명히 먹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이게 들어갑니다. 그러니 죽어 버리면 끝이요.
여러분 정말 구원의 백성이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 그럴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뭡니까? 메시지입니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게 안 들어간다. 이거는 10년, 100년 믿어도 안됩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메시지 듣고 메시지 속에서 잠시 잠깐 평안이 왔다가 또 잡혀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여기에 기본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언약이라 그랬어요. 언약! 중요한 것이요.
자! 이런 구체적인 은혜의 역사가 이 구원받은 믿음 속에서 오는데 그러면 여기서 이제 나오는 말씀이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뭡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뭘 얻었어요?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참 나는 이게 너무 감사해요. 한번 받아 합시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막 강퍅해도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다." 믿어지잖아요, 이건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믿고 싶어도 예수님은 나와 상관없어, 이래 되면요, 곤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의 상태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 같아요, 지금 거기에 빠져 있으면서도 안 들어옵니다. 이래 되면요, 구원의 축복이 어떤 것이냐? 암만 말해도 이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여러분 진짜 참 그래서 새삼스럽게 참 감사한 것은 이 메시지를 들을 때에, 우리 마음이 확 열려서 이러나 저러나 지금은 뭐 염려도 하고 근심도 하고 지금은 남 보기에 이상하고 이상한 짓을 해도 이 사실이 내게 이루어 졌습니다. 말씀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주여 감사합니다.
여러분 받아 합시다. 모양은 이래도 뭘 받았어요? 구원을 받았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첫 번부터 우리가 잘한다 못한다 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것이 지금 바로 확실히 이해되어야 된다는 것을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뭐냐? 로마서 8장2절 아닙니까!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습니다." 내 잘한다! 못한다! 이미 법적으로 여러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음과 멸망의 법에서부터 해방 받아 버렸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나올 때에 로마서 8장 31절부터 이제 뭐가 나오느냐? 확실히 나옵니다. "누가 나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안 끊어집니다. 여러분 세상의 피조물도, 세상의 어떤 권능도, 어떤 힘도, 능력도, 심지어 내 불 신앙까지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주님께서 완전히 붙잡아 주십니다.
자! 이런 사람에게 얼마나 마음이 약하던지, 여호수아 1장 1절부터 9절까지 이미 벌써 모든 것을 다 준비 해 놓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전부 준비 다 해놓았어요, 그래서 광야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광야를 인도하실 것 다 준비 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느냐? "너는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 좌우로 흔들리지 말라. 강하고 담대 하라!" 매 구절 구절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받아 해야 합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았다." 못 누리는 겁니다. 광야 생활 할 때에 이게 안 믿어졌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래서 나가서 문제 당할 때마다 누가 해결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놓았습니다. 발걸음마다 다 해결해 놓았어요,
그런데 이게 안 믿어지니까 뭘 생각하느냐? 항상 지난날에 애굽에 있을 때에 좋았는데... 애굽에서 불평으로 가득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지금도 항상 뭔가 안 받은 것만 생각하고 이건 받았는데, 다 줬는데 못 누리니까? 애굽이 좋았더라! 옛날이 좋았더라! 그랍니까? 이것이 전부 사단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전부 다 실패한 겁니다. 현실적으로... 받아합시다. "이미 다 받았다." 뭐하면 됩니까? 누리면 되는 거예요. 기도까지도 할 것도 없어요. 다 해 놓았는데 어떤 면에서 기도하면 받는다 그것도 어패가 있더라 구요. 이미 벌써 다 해놓았습니다. 믿으면 돼요. 이것만 회복하면 우리는 확실하게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가복음 10장 19절입니다. 이제는 사단의 역사들이 도저히 나와 여러분의 영역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여러분은 신령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수의 능력을 뭐라 그랬습니까? 제어할 권세를 벌써 여러분과 저에게 주었으니 결단코 여러분과 저를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믿습니까? 다 된 거예요, 지금. 이것이 구체적으로 안 믿어져요. 이것이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뭡니까? 비록 염려는 하고있지만, 아직 못 믿고 있지만, 구원의 믿음 속에 이런 엄청난 축복이...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이제는 마지막 결론으로 하나 더 나가야 됩니다. 이것이 배경이 되어서 이제는 뭐냐? 치유라는 것이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 첫번부터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더라 구요. 여기서부터 치유가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모든 것 다 주시고, 하나님 전능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여러분에게 전부 뭔가 준비 다 해 놓았어요. 이제는 뭐 하면 됩니까? 누린다는 사실 자체가 그 믿음의 회복이 결국 기도입니다. 기도해서 얻는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기도로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으시리라! 그랬습니다.
이게 안 되니까? 지난주에 설명을 했죠. 이게 안되니까! 옛날에 술 먹던 사람들은 또 역시 타락에 빠져 버리고, 옛날에 마약 하던 사람 또 마약에 빠져 버리고, 문제 생겼을 때, 사건 생길 때에, 이게 되면은 아! 문제 생겼구나! 기도하면 될걸. 아무런 문제없이 나가서 기도합니다. 기도가 안 된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모르긴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와 또 내게 얼마나 큰 축복을 준비를 했을까? 이게 늘 지금 현재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바꿉니다. 전에는 아이고, 왜 안 되냐! 빨리 일어나야 되는데, 나는 왜 이렇지? 겉으로는 또 멀쩡하거든요, 그러니 또 이상해... 남 보기에는 또 멀쩡해요. 그런데 뭐! 홀쭉하거나 거미줄처럼 되어 있으면 아이고 야! 목사님이 아프구나! 이럴 텐데,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멀쩡하거든. 그러면 뭐냐 하면 우리 목사님들 오시면 어떨 때 목사님 꾀병합니까? 왜 이랍니까? 그래! 왜 꾀병한다 왜? 그래 웃기도 합니다 만은, 실제적으로 이런 것이 이제 내 마음에 있어서 상당히 뭔가 자꾸 그런 것이 오더라 구요. 그러나 지금 자꾸 돌립니다. 하나님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 너무 많더라. 문제는 뭡니까?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그 능력 안에 있습니다. 뭐합니까? 기도하면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바로 되면은 치유라는 것은 여기서 자연적으로 따라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될 때에 여러분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이미 여러분과 저는 뭡니까? 교회입니다. 성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면 너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전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제 성전이라 그럴 때에, 교회라 그럴 때에 송현 교회는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건물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따질 때에 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건물이 없다 할지라도 누가? 여러분과 제가 있는 곳이 뭡니까? 성전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건물 여기다가 치료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계를 갔다놓고 병원에서 진단하고 치료한다. 그러면 송현 병원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다. 교회가 모여서 예배 드린다.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점 잘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 모여서 교회가 모이지 않고 모든 모인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기 위해서 모였다. 그건 우상의 소굴이 되는 겁니다. 이미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바로 나다." 말이 적어요. 믿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해야 되니까 깨끗해야 되니까? 거룩하고 깨끗하게 그러니까, 주초 문제는 어떤 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면에서 사실상 가려지고 있습니다.
뭔가 성경에 담배피지 마라! 그런 말없거든요. "담배 피면 지옥 간다." 그런 말 없거든요. 그런데 왜 피지 못하게 하느냐 담배 피면 지저분하거든요. 그러니 담배 피울라 그러면 제가 늘 말하지 않습니까 담배 피울라 그러면 담배 피는 목적 같으면 코를 바꾸어 놓아야 돼요. 굴뚝을 만들라 그러면요.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게 하지 마라 여러분 잘 압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 잘 알잖아요. 담배 피우는 집 더럽습니다. 막 냄새도 나지만 아무 데나 재떨이... 재떨이만 들어갑니까? 아무 데나 담배재가 날아다니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해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깨끗하게 해라 그런 예식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몸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깨끗하게 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 술 먹는 사람 진짜 더럽거든요. 술도 간단하게 적당히 먹는 것 같으면 좋은데 우리 나라 사람은 왜 술을 못 먹게 했느냐? 이해가 돼요. 먹었다 그러면 술로 완전 이골을 내 버리니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분 술 먹는 사람 안 봤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술 처먹는다 안 그랍니까? 술을 적당히 먹는 건 술 처먹는다 안 그랍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일단 먹었다 그러면 쳐 먹어야 되니까! 이게 잘 안되어 져요. 그래서 우리 선교사들이 술을 못 먹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구원과 관계 있다는 문제가 아니고 성전을 더럽히니까! 여러분 술 먹었다 아무 데나 먹고 아무 데나 재 떨어 놓고 아무 데나 더럽혀 놓고 더럽습니다. 냄새 피우죠 그러니까 뭡니까 그래서 여러분 진짜 더럽다는데 대해서 조금 생각을 해 봐야 돼요. 우리가 너무 깨끗한데 있고 이러니까 별로 모르는데요. 정말 아프리카나 이런데 가면요. 정말 더러워요 진짜 못 살아갑니다. 그리고 진짜 정신 이상자 한 테 가면 청소 안 합니다. 그리고 정말 정신 이상자 한 테 가면 청소 너무해 가지고 안 되고...
그래서 나는 우리 집사람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무리 아프고 아무리 괴로워도 청소는 해야 돼요. 그러니 왜 그러냐? 그렇게 청소를 해도 어떨 때는 제가 왜 저럴까? 싶은 생각이 나다가도 안 하는 것 보다 낮다 싶더라 구요. 우리 2층에 문을 열어 놓고 안 있습니까! 하루만 지나 버리니까 뭐냐하면 새 감해요. 닦으면 새 감해져 버려요. 그렇게 대기권이 오염이 많아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일주일만 안 했다. 완전히 돼지우리입니다. 그러니 이걸 못보고 못 견디니까! 그냥 하루에도 한번 두 번 해야 돼요. 아무리 아파도 청소는 합니다. 그러니 어떨 때는 왜 저럴까? 하다가도 안 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귀신들린 사람은 또 반대로 죽어도 청소 안 해요.
그래서 너무 깨끗해도 탈이고 너무 깨끗한 해도 탈이고 그러니 귀신이 들렸다! 안 들렸다! 이전에 진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뭔가 너무 깨끗해야 된다! 그것만 강조해서 안 됩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살기에 지장 안 받도록 그러니 지장 안 받도록 청소는 해야돼요. 또 이런 면에서 무질서 타락이 되면 또 들어와 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옛날에 우리가 특별히 여자 분들이 밥 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 이렇게 해 가지고 누린다! 이렇게 해서 밥 안 해주고 누린다! 이렇더라 구요. 그리고 충청도 아줌마는 밥 안 해주고 누린다! 그러다가 자가 남편 밥 시켜먹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누린다 그라는데 이것 가지고 사단이 역사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메시지 속에 흐르다가 이렇게 빗나가더라 구요. 이것은 통로가 되는 겁니다. 뭔가 하나님의 역사는 알맞게 하는 역사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랬거든요.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고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동양사상이 어떠니, 요즘 노자를 한창 하는데요 중용이다 그라는데 여러분 중용 못지 않은 중요한 메시지가 성경에 전부 다 나와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비교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 여러분과 제가 완전히 성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이러니까 뭐가 오느냐? 뭐든지 긍정적이 된다. 이것은 심리적인 배경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런 면에서 바울이 큰 몹쓸 병에 걸려 가지고 사탄의 가시라 안 그랬습니까? 그러면서도 뭐라 그랬습니까? 감옥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안 된다 소리 안 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믿음이 와 버리면 능력의 믿음이 와 버리면 치료의 역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안 나오면 기도가 안 나와요. 이 치료가 안 나오죠.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 구체적인 이런 역사들이 나오게 돼요.
그래서 제가 이 뭔가 질병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 이렇게 뭔가 메시지를 통해서 제 속에 있는 제 실제의 삶을 짚어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이것이 쉽지 않구나! 워낙 안 되니 하나님께서 쥐 박아 놓았겠어요. 그러니 뭐 워낙 안 되니까? 나라도 쥐 박아야 여러분 고칠 것 아닙니까! 여러분 다 쥐 박아 버리면 일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 혼자 어떤 면에서 주여 감사합니다. 뭐! 그렇든 안 그렇든 간에 나는 그렇게 위로를 해요. 대표적으로 쥐어 박혔습니다. 그러면서 고친다. 그러면서 혹시 그 신비주의에 빠졌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너무 느껴요.
이것이 뭔가 기도하면 되고 사실적인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쉽진 않아요. 얼마간 노력해야 되도록 나는 그런 배경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렵더라 구요. 그래서 나는 그 참! 하나님께서 이 믿음 사실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지난 배경을 쭉 보면서 회개도 회개이지만, 주님 앞에서 뭔 생각을 하느냐? 주여 하나님이 저에게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될 겁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 능력으로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못 할게 어디 있습니까? 이때부터 치료, 치유 이것이 구체적으로 역사가게 되죠.
자! 그러면 한 가지, 마태복음 28장 16절에서 20절. 지금 여러분과 제게 어떤 문제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잠시만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항상 어떻게 한다 고요? 함께 하시리라! 함께 계십니다. 이것만 말해도 안 믿으려고 그래요. 자꾸 너는 따로 나는 따로 놀려고, 그래도 뭐 대구에서는 유명한 국밥을 개발했는데 따로 국밥이라! 그래 가지고 그래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대구 사람 따로 놀라 그래요. 어쨌든 따로 입니다. 아닙니다.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계복음화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기서 나온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받아 합시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뭐라 구요?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기 이전에 증거 주어라. 여러분 우리가 이 증거 잡고 증거! 그러니까 증인 앞에는 꼼짝 못합니다. 증거 있는 사람 앞에는 할 말이 없어요. 증거 있을 때에 뭡니까? 설득력이 나갑니다. 뭐니, 뭐니 해도 다른 게 없어요. 그래서 오직 성령으로 여러분과 제게 주신 이 엄청난 축복의 역사를, 정말 이 언약을 붙잡고 세계복음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증거 주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덮어주는 사랑
벧전 5장 7~8절 / 김홍도목사
요일 1:7-2)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사랑은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요 고마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덮어 준다는 것은 죄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며 죄를 드러내지 않고 감싸주는 것이요 죄를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려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고맙고 넓은 사랑인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덮어 주시는 사랑>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범죄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으려면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죄가 아무리 크고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길을 피로써만 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피만이 죄를 덮어주고 가리워 주고 씻어주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죄대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죄와 허물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구약시대는 양과 염소와 짐승의 피를 뿌려서 용서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온 애굽의 가정마다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그 재앙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의 피가 그 집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해 주었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어 주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는 우리들의 죄를 모두 덮어 주시는 것이기에 이 다음 심판대 앞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고 마음의 문설주에 바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민수기 19장에 보면 다른데와 달리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그 피를 회막을 향하여 일곱번 뿌리고 그 암송아지를 그 가죽과 고기와 심지어 피와 똥까지 불사르게 하라는 말씀이 민수기 19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를 불태울 때에 우슬초와 홍색실과 백향목을 함께 태우게 했습니다. 불이 다 탄 후 재는 한 곳에 긁어 모아 두었다가 죄를 지었거나 무슨 부정한 일을 한 자에게 그 재를 물에 타서 그 잿물로 씻으면 부정한 자가 깨끗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기 붉은 암송아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대개 남성적인 것은 객관적인 진리와 증거와 신앙을 의미하고 여성적인 것은 주관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붉은 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날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체험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재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피가 들어있습니다. 또 그 재속에는 암송아지를 태울 때 함께 넣어 태운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의 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향목과 우슬초는 세상을 의미하고(왕상 4:33) 홍색실은 죄를(이사야 1:18) 의미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위의 모든 것과 함께 태워진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모두 다 걸머지고 죽임을 당하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라는 것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재는 모든 물질의 마지막 형태요 또 재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것이며 또 재는 썩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구속사업은 최종적인 완성이요 영원히 변치않는 것이며 썩지 않는 구속사업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아무 때라도 어떠한 무서운 죄와 많은 죄를 졌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나와서 자백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받고 용서함 받고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다 담당하시고 대속의 사업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기 전의 죄나 예수 믿은 후의 죄나 무슨 죄라도 주님 앞에 나와서 자백하면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이 나타나서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 l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이라 함은 복음의 빛 은혜의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우리의 죄대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 께서 나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같은 죄라도 아무리 큰 죄라도 또 아무리 많은 죄를 졌더라도 다 포함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또 8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없다고 하고 숨기고 회개가 필요없다는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도리어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할 것은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쁘시다"고 하는 말은 이쁘다는 뜻이 아니고 믿으실만 하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신실하고 믿을 만하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2장 1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 범죄하게 되면 구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구원이 없어진다면 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 어떤 부모가 죄를 졌다고 해서 호적에서 지워버립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 우리는 자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 대언자가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 전의 죄나 믿은 후의 죄나 혹은 미래의 죄까지도 예수님은 모두 담당해 주셨 습니다. 모든 죄를 다 담당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 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언약을 안 지키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만일 회개치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치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께 잘못하고 그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숨기면 그 아이는 부모들이 아무 말을 안해도 무섭고 가까이 가기가 싫고 양심이 괴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치 않으면 스스로 하나님과 거리감이 생겨 기도가 나오지 않고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 보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섭다 할지라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마치 암송아지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불에 탄 재를 물에 타서 그 물로 씻기만 하면 어떠한 더러운 죄라도 다 깨끗함을 입는 것처럼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아무 때라도 그 앞에 자백하기 만하면 예수의 피가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덮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도 남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는 자가 됩시다>
그런고로 우리도 남의 죄를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운 죄인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끄집어 내어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가 없고 구원받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 그리고 잘못을 덮어 주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앞에 놓고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말까요?" 만일 "돌로 치라"하면 "당신은 사랑을 외치 면서 어떻게 돌로 치라"고 합니까 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하면 "구약 율법에는 간음죄를 범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 했는데 왜 율법을 무시합니까"하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간계를 꾸며 질문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시고 나서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 니까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을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러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고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형제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잔뜩 마시고 취해서 겉옷을 벗어 버리고 하체를 드러내 놓고 잠을 자고 있는데 "함"이란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덮어 드리지 않고 뛰어나와 형과 아우에게 흉을 봤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이 말을 듣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 드렸습니다. 후에 잠이 깬 노아는 셈과 야벳은 축복을 했고 함은 저주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덮어 주는 자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주볼 때는 충고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용서해 주고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의 친구 목사님 중에 김모(某)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 그 남편이 외항선을 타고 나간 여자 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신앙 생활 잘하시는 집사님의 남편이 수개월만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돌아온 주일 예배에 그 집사님이 참석을 안하셔서 아무리 반갑다 해도 주일 날 집사가 예배에 참석도 안하다니 신앙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또 한편 괘씸한 마음도 들어 "다리 뭉둥이가 부러져라"하고 교인들 듣는데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배가 끝난 얼마후 바로 그 여집사한테 전화가 왔더랍니다. 목사님은 이거 정말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덜컹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 여집사 말이 "목사님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 염려해 주시고 축복 기도까 지 해주시다니…" 하더랍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 이웃에 계신 집사님이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은 다리 몽둥이가 부러져라 했는데 그 말은 한마디도 안하시고 목사님께서 그 남편과 가정을 위해서 크게 축복기도 해주셨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가 고맙다고 전화를 한 것이더랍니다.
나쁘게 말했는데 좋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없는 것 있다고 하고 없는 허물도 덮어 씌우고 허물을 억지로 드러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대단히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아무리 큰 죄라도 자복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덮어 주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의 가르침대로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 주는 사랑의 성도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
벧전 5:1~4 / 김광일목사
김승태의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은 3.1운동 독립선언문 34번째 푸른 눈의 민족대표로 알려진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에 관련된 글과 사진 자료 모음집입니다. 스코필드는 평생 한국에서 활동한 의료선교사였습니다. 27살 때인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들어와 수의학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제암 감리교회에 방화를 일으켜 마을 신자 26명을 죽인 일본 경찰과 군대의 포악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한 사실을 기사로 작성하여 세계 언론에 알렸습니다.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만났습니다. 그가 스코필드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묻자 “먼저 이천만 동족에게 사죄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총독을 만나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고 한국의 식민 지배를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를 찾아다니며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등 독립운동 수감자들을 만나 위로하였습니다. 스코필드의 한국 이름은 석호필입니다. 스코필드는 19살에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갔습니다. 농장에서 고생하며 학비를 모아 토론토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 걸린 소아마비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억척같이 공부하여 세균학으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 몸으로 한국의 독립과 의료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한쪽이 마비된 손과 발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한국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고 전해집니다. 스코필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수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브란스와 서울대학에서 틈틈이 청년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며 복음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1969년에 한국에 영구 귀화한 그는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던 애국자요 하나님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요 평생을 복음과 예수 사랑 실천을 위해 살다가 돌아간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입니다.
다함께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를 부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를 받으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베드로전서는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서신입니다. 본문은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하는 자세와 겸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른 자세로 일하는 자들은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교회의 일을 맡은 이들은 사명을 마쳤을 때 면류관이 주어지는 영광에 참여할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충성스럽게 일을 마쳐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여기의 ‘영광에 참여할 자’는 원어로 ‘독세스 코이노노스’인데 ‘영광에 참여할 것을 보장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고난은 단지 고난을 당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에 참여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자가 아니라 바른 동기와 자세로 사명을 감당한 자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성공만 얻으면 된다고 비성서적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만이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당장 눈 앞에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는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는 과연 어떤 자입니까?
첫째로 자원함으로 하는 자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밤, 미국 필라델피아의 작은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왔습니다. 예약은 안 했지만 혹시 방이 있느냐고 젊은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직원은 만원이라 방이 없으니 다른 호텔을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호텔에도 방이 없었습니다. 직원은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하게도 객실이 없습니다. 이처럼 비도 오고 새벽 1시나 되었으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달리 갈 곳도 없고 해서 직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체크 아웃하면서 노신사는 직원에게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큰 호텔의 매니저가 되어야 할 사람 같군요. 내가 언젠가 당신을 위하여 호텔을 하나 지어 드리지요”라는 말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직원은 뉴욕행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자신을 방문해 달라는 노신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그를 노신사는 궁전 같은 호텔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건물이 2년 전 내가 당신에게 약속했던 호텔이요. 오늘부터 당신은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요.” 그 호텔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시초인 월도프 호텔이며 노신사는 윌리엄 월도프 아스토(William Waldort Astor)였습니다. 그리고 직원의 이름은 조지 볼트(Gorge C. Boldt), 그는 이 호텔의 첫 번째 지배인이 되었습니다. 자원함으로 하였던 호의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가져온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여기의 ‘자원함으로 하며’는 원어로 ‘헤쿠시오스’인데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발적인 열심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자발적인 열심은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자원한다는 것은 잘난 척하며 주장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헌신을 가리킵니다. 징집병이 아니라 자원병으로 일하는 모습입니다. 징집된 군사는 매사를 억지로 합니다. 징집된 마음을 가지면 시간이 아깝고 물질이 아깝고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징집된 자를 모아 놓은 수용소가 아닙니다. 자원하여 몸을 드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원함으로 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맡겨주신 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여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억지로 하지 않는 자
마크 트웨윈 (Mark Twain)의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머니가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라고 톰에게 시켰습니다. 톰은 칠을 하기가 싫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쉽게 할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묘안이 떠 올랐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톰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톰이 칠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칠을 하게 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그러나 톰은 일이 재미있다며 거절했습니다. 아이들은 더욱 그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한 아이는 사과를 주면서 일하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톰은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 주는 체하며 칠을 맡겼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톰은 손쉽게 페인트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원함으로 일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존 워너메이커 (John Wanamaker)는 83세까지 백화점 경영에 참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즐겁게 바쁘지요. 내 대답은 단지 두 마디(happily busy)면 족합니다. 사람들은 마지못해 바쁘지만 나는 내가 원해서 바쁘니까 즐겁게 바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일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여기의 ‘억지로 하다’는 원어로 ‘아낭카스토스’인데 ‘하기 싫은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이나 외적 요인에 의해 마음이 눌려진 상태에서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봉사와 섬김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의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것이 되면 즐거움이 사라지고 억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즐거워야 합니다. 나 같이 못난 인생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감격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모두 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잠기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기꺼이 하게 됩니다. 삯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으로 즐겁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적으로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할 때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양 무리의 본이 되는 자
데이빗 케이프(David Cape)의 ‘예수를 위한 바보(On the road with Jesus)’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던 데이빗 케이프 목사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발을 씻기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부르심이라 14개월 동안 부르심을 확인한 후에야 사역을 내려놓고 ‘길거리 세족사역’에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대야가 붙은 십자가를 들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만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순종하여 간 곳이 소웨토라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범죄로 악명이 높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부랑자 일곱 명에게 끌려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호해주셨습니다. 케이프를 죽이려던 그들의 발을 씻어 줄 때 변화되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조직 폭력배, 알콜 중독자, 동성애자, 한센 병자에서 군장성, 시장,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었을 때 초자연적 치유가 일어났으며 깨어진 가정이 회복되고 중독이 치유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케이프 목사를 발을 씻겨주는 사역으로 내몰았을까? 하나님은 말로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것보다 삶으로 본이 되어 복음 전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여기의 ‘본이 되라’는 원어로 ‘튀포이 기노메노이’인데 ‘모방해야 할 모본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서 일하는 자들은 겸손한 마음과 신실한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양들을 돌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양 무리를 돌보는 자세는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본으로 보여주는 것이 만 마디의 말보다 확실하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모습으로 섬겨야 합니다. 양들은 말한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따라갑니다. 자녀의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을 닮습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면 우리가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어 예수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크니이두스의 망대(The Tower of Cnidus)’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니이두스(Cnidus)는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바로 왕을 위해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망대를 건축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이름을 가린 다음 겉에 바로 왕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한 것처럼 가장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세월이 지나면 외벽에 칠한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 자신의 이름만 길이길이 남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혹시 우리도 크니이두스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면서 실상은 내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앙의 목적은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일해야 합니다. 부디 자원함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이 되는 모습으로 충성하여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가 내리는 장소
벧전 5장 1~6절 / 이필재목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구원” “은혜” “감사” 그런 단어들입니다. 오늘 이렇게 교회를 찾아오신 여러분들의 영혼에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여기에 오셨는가?” 제일 쉬운 대답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사실 예수 믿고 사는 기쁨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방면의 은혜든지 은혜를 입고자 늘 소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을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이 은혜의 개념 설명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어원에서는 이 ‘은혜’라고 하는 말은 어찌나 많은 말로 해석이 가능한지 무궁무진한 뜻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흔하게 통용하는 말이 “값없이 받는 것”인데, 만족도, 행복감, 즐거움, 부드러운 애정, 자비, 사랑, 동정, 기쁨, 아름다움... 이것이 다 포함된 말이 ‘은혜’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구체적으로 우리 신앙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이 오늘 교회에 오셔서 설교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감동되었다고 합시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혹은 우리 몸에 질병이 있다가 건강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건강하게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말하잖아요? 어떤 때는 우리가 가난하게 살다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가난에서의 해방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소?”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쉽게 우리가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이웃관계나 부부관계가 불화 하다가 아주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이 없던 사람이 또 믿음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말한다면 “아, 당신이 어떻게 목사가 되었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나쁜 습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음주, 도박, 마약, 절도, 강도, 퇴폐 등등... 이런 것들을 다 청산하였을 때 “아니,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청산하셨소?” “내 힘으로 안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소.” 교회가 부흥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중요한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야만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는 좁은 면의 은혜와 넓은 면의 은혜가 공존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지금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에로의 변화는 좁은 의미의 은혜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지금 내게 매우 좋은 것이 있어요. 이것이 나빠졌어요. 그러면 그것은 저주인가? 이것은 넓은 의미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것은 나빠지고 영적인 것은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잘 살던 사람이 별안간 사업이 망해서 가난해 졌습니다. 그러면 저주받았는가? 그 사람은 사업의 실패와 더불어서 신앙이 더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사업 망함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저는 제가 경험한 목회에서 경험한 일들이 많아요. 어느 젊은 30대 초반의 부인이 어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사무실에 찾아와서 한없이 운단 말이에요. “아니, 이야기를 하고 울어야 나도 같이 울지, 이야기도 안하고 혼자 울면 어떡합니까?”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이 지금 총을 맞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우리 남편은 한번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가장 열심히 한 일이 있다면 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많이 기도를 하고 온갖 서비스를 하면서 주일날이 되면 교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나는 안 간다고 하면서 헌금까지 주면서 혼자 갖다 오라고 하니 영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마음으로부터 포기하는 상태에 있었는데 아, 이번에 큰 사고를 만났습니다.” 미국에는 갱단 같이 아주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 타고 지나가면서 길거리에 있는 사람을 총으로 막 쏘며 지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젊은 친구는 이민 가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가게를 하나 내놓고 그날 아침도 새벽에 일찍 가서 자기 가게 앞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총을 쏴서 척추를 맞았어요. 이 사람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죽지는 않았는데 병원의 진단은 “평생 일어나지 못합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됩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나가십시오.” 하루 아침에 젊은 30대 초반이 이런 진단을 받았으니 이 청년이 목사님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며 평생 처음으로 목사를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목사님!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그래요. 갑시다.” 그래서 목사님 몇 분과 함께 급히 심방을 갔어요. 이 청년이 침대에 누워있어요. 총을 붙잡고 한없이 울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을 했어요. “목사님! 제 아내가 그렇게 교회를 가자고 해도 내가 안간 사람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래요. 도와줄 수 있어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어요.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듣겠습니다.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지금 내 진단은 평생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는데 일어나서 다리 하나만 쓸 수 있으면 그래도 내가 목발을 짚고라도 교회에 갈 수 있으니까 하나만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는 건 내가 아니고 의학의 판단이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의학은 판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기적적 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그것을 기대하고 당신도 나도 또, 우리 주변 분들도 열심히 기도하기로 합시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왔어요. 6개월 동안 누워서 대소변 받아내면서 6개월만에 양쪽에 목발을 짚고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데 성공했어요. 또 6개월 지나니까 목발 두 개 짚는 것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짚고도 일어날 수 있게 됐어요. 또 6개월 지나니까 목발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짚고 간신히 지팡이 의지해서 바깥출입을 할 수가 있었어요. 또 6개월쯤 지나니까 그것 마저 버렸어요. 혼자 걸을 수 있게 됐어요. 그 다음에 한 2년 반 이상 지나니까 완전히 회복이 되었어요. 뭐, 그 다음에는 스포츠카를 사더라고요. 가죽 잠바를 사서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서 교회에 오더라고요. “당신 나하고 약속했지? 한발만 쓸 수 있게 되면 평생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그러니까 그거 잊지 말고 평생 사세요.” “그럼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그분이 교회 제일 일찍 와요. 새벽 1부 예배에 나와서 아주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면에서 보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인데 총 맞는 고난을 통해서 영혼도 육신도 구원받았으니까 총을 맞은 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행복입니다. 은혜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가 받으며 누가 받지 못하는가? 오늘 말씀에 나와있어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서 이 “대적”이라는 말의 뜻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향해서는 전쟁을 하신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전쟁할 사람은 교만하십시오. 제가 목회 하면서 지금까지 깨달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를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죄는 하나님의 진노가 빠릅니다.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참지 아니하시고 진노하시는 두 가지 죄가 그겁니다.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우리 상식 수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작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잘합니다.
저 같은 목사의 경우 부흥회를 좀 다니잖아요? 제가 옛날 LA에 있을 때 신문을 봤더니 한국의 큰 대형교회 목사님이 LA부흥회를 하러 오신다고 신문에 광고가 났기에 ‘아! 잘됐다!’ 그때 우리 교인이 100명도 안 모이던 초창기 시절인데 ‘오시는 김에 우리 교회도 좀 덕을 보자!’ 한국에 전화를 걸어서 요청을 했어요. “시간이 있으시면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으니 저희 교회에 오셔서 연장 부흥회를 해주십시오.” “교인이 몇 명이냐?” “아직 100명도 안됩니다.” “안 간다!” 아니, 부흥 안되었으니까 부흥회 하는 거지... 그때 저는 시험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이 다음에 대형교회 목사가 된다면 작은 교회 부흥회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되었단 말이에요. 교인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작은 교회 부흥회를 다니겠습니다.” 그게 또 테이프로 온 세상에 퍼졌네요. 아, 사방에서 전화가 오는 겁니다. “테이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니까 약속한 대로 오십시오.” 이렇게 다 퍼졌으니 어떻게 해요? 하나님하고 또 약속한 건데... 그래서 저 루지애나의 아주 조그만 시골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섬기고 있다고 해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교인이 몇 명이 되기에 그렇게 작다고 하십니까?” “저까지 20명입니다.” “아, 그러면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서 공항에 내렸더니 나를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사실은 12명입니다.” “아니, 그러면 왜 8명을 속이셨습니까?” “차마...” 그래서 12명을 놓고 열심히 하자고 부흥회를 했는데 무슨 설교를 했느냐 하면 성경에 12 숫자만 얘기했습니다. “12제자가 얼마나 좋으냐, 하늘 아래 12지파가 있고, 12보좌가 있고...” 하여튼 12를 다 갖다 대고 12가 제일 좋은 것이다. 열심히 부흥회를 했는데 아, 3박 4일을 했는데, 글쎄 100명이 되었어요.
어쨌든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크고 작게 보지를 않습니다. 작은 일도 열심히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의 약점이나 인격에 흠집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집 부부싸움을 하면 바빠진다니까요. 남의 약점을 선전해야 되니까... 어쩌다 무슨 나쁜 소문을 들으면 그것을 선전하느라고 야단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그런 남의 흠이 새어나지 않도록 감싸주고, 나는 그런 일이 없나 돌아봅니다. 교만한 사람은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감투를 좋아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물질생활을 즐기기 좋아하고 유명하여 지는 일에 너무 지나친 신경을 쓰고 나타나기 좋아하고 이렇게 됩니다.
저는 저보다 10년이나 선배 목사님의 사모님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좀 만납시다.” 그래서 만났어요. “나는 이게 마지막이요.” “아니, 사모님! 뭐가 마지막이란 말입니까?” “우리 남편 목사하고 말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험악해 지셨습니까?” “나는 더 이상 못 견뎌요.” “이필재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수고해 줘요.” “왜요?” “나는 우리 목사 너무 혐오증이 나서 못살겠어요.” “그게 뭡니까?” 예를 들면 대형집회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러면 거기 순서 맡은 목사님들이 앉기 위해 강대상에 올라가잖아요? 자기는 그날 아무 관계도 없고 순서도 맡지 않았는데 제일 먼저 올라앉는다는 겁니다. 그게 환자이지 그게 정상입니까? 또, LA는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오면 영사관에서 사람을 불러냅니다. “이번에 국무총리가 옵니다. 대통령이 옵니다. 영부인이 옵니다. 공화당에서 누가 옵니다. 무슨 당에서 누가 옵니다...” 그러면 영사관에서 그분들을 영접해야 되니까 교포 사회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을 영접위원으로 부른단 말이죠. 저는 교회가 좀 크다 보니까 번번이 걸립니다. 교포사회에서 무슨 일 한다는데 협조 안 할거 뭐가 있습니까? 협조하고 그러는데, 이 분은 자기는 거기 초대받은 일도 없고 갈 이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제일 먼저 가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진 찍을 때는 중앙으로 어떻게 쑤시고 들어가서 그 주요인물 옆에 서는지... 교인들이 그거 다 알고 전부 목사님 욕하고 있는데 평생을 못 고친단 말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는 목사님 나는 혐오증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결국 이혼하셨어요. 겸손한 사람 분수에 맞게 살아갑니다. 허영이나 허세를 버리고 소시민적 생활을 즐기며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생활철학이 낮은 수준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교만했던 사람과 겸손했던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우선 왜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떨어졌는가? 교만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해주는 말에 하와가 유혹된 말이 “네가 하나님이 될 꺼야!” 그래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피조물인 인간이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고난에 손을 내밀었을 때 하나님은 “이것만은 안돼!” 가차없이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리셨다는 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워보려는 인간교만을 하나님이 파멸시키셨다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이 롯을 아들같이 키웠습니다. 이제는 성장해서 분가할 만큼 성장했는데, 다소 생업의 관할권이 그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좋은 땅을 네가 먼저 차지하라는 말입니다. “네가 갖고 나머지를 내가 갖겠다.” 그러면 롯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아니, 삼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나를 데리고 오셔서 이 사막에서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나는 나이가 젊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삼촌께서 좋은 땅을 차지하시고 나는 사막으로 나가겠습니다.”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늙은 삼촌을 사막으로 내어쫓고 좋은 땅을 자기가 차지해 버렸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겸손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롯은 대적하셔서 전쟁하셨습니다. 그래서 롯이 차지한 좋은 땅을 ‘소돔과 고모라’ 라고 하는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로 저주를 내버리고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나중에는 두 딸과 동침해서 종족을 번식하여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생기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어 지금도 그 사람들은 조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은 교만한 사람이요 다윗은 겸손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대적하셔서 몰락하게 하시고 다윗을 세워 빛이 나게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인 가정에 자녀가 탄생할 때 아이들 이름을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모두 성경의 이름을 지어주었거든요? 제일 많은 게 ‘다윗(David)’이고 여자들은 제일 많은 게 ‘에스더(Esther)’입니다. 좋은 이름 다 지어주었습니다. 하도 많이 지어주다 보니까 이제 없잖아요? “목사님! 아들이래요. 이름 지어주세요.” “다 지어주었다. 이제는 없다. 남아있는 게 하나 있는데 지을래? 가룟유다(Judas Iscariot) 어떠냐?” 여러분 구약 에스더를 보십시오! 거기 교만스러운 모습으로 하만 장군이 등장하고 모르드개는 성문지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하만을 대적하셔서 죽게 만들고 모르드개는 국가적 공신의 자리로 옮겨 큰 빛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로마는 왜 멸망당했는가? 힘의 교만 때문입니다. 로마가 멸망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는가? 신앙의 교만을 부리다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독일에 가서 너무 놀란 것은 퀼론 성당은 아이젠하워 장군이 제2차 대전 때 퀼론 성당에 쏘는 자는 처벌하겠다고 명령을 내렸어요. 왜? 이 지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는 또 지을 수 없다고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총 한방도 안 맞았어요. 그런 독일 교회들이 이제 교인이 없어요. 나는 목사로서 독일이 너무나 지나치게 신학 지식의 교만을 부리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말로가 비참해집니다. 권세의 교만을 부리다가 그런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물질의 교만을 부리지 말아야 영원하지 하나님이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고 주신 물질 가지고 자기들만을 위해서 쓰면 그것도 망합니다. 부의 교만을 부리면 망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영화산업의 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는 ‘타이타닉(Titanic)’입니다. 떠다니는 물체 가운데 당시로서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했고 선장은 그 배가 출항하는 기자 회견에서 자랑삼아 한 말이 “이 배는 얼마나 튼튼한지 하나님도 침몰시키지 못한다.” 그 말은 이틀만에 전 세계 해상 사고 가운데 가장 큰 해상사고로 1,5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예수님을 봅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요즈음에 보면 인간이면서 예수님같이 나오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이 되셨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다 이단이 되었잖아요?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말다툼을 했어요. “왜 또 싸우느냐?” 주제는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라.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잠언 29장 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느니라.” 그랬는데 여기서 영예란 “위대함과 부귀”라고 해석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기도했고 세리는 엎드려서 겸손하게 기도했는데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에 대한 성경구절 잠언 22장 29절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시편 10편 17절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22편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 시편 147편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붙드시겠다.” 잠언 11장에 “겸손한 자에게 지혜가 올 것이라.” 이사야 57장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성시켜 줄 것”이며 이사야 29장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크게 될 것”이며 열왕기상 21장, 스바냐 2장 “겸손한 자는 재앙을 막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을 탄생시킨 10사람 중의 한 명인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정치가요 사업가요 과학자요 저술가로서 미국 건국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는 절대 잊어버리지 못하는 젊은 시절의 작은 사건 하나를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은 아주 큽니다. 미국의 저택은 집이 대궐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늘 살던 사람이 가난한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오막살이집 같은 곳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문설주에 이마를 크게 부딪치고 기절을 해서 쓰러졌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났을 때 그 친구의 아버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프랭클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평생 머리를 숙이고 살아라.” 그래서 그 말을 실천하여 평생 겸손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을 탄생시킨 장소가 ‘필라델피아’입니다. 거기에 역사적 유적물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가보시면 지금 그 도시에서 제일 높은 건물 제일 꼭대기에 프랭클린의 동상이 서있고 그 도시의 법으로 “이 도시에서는 벤자민보다 더 높은 건물은 건축하지 못한다.”라고 결정했어요. 매일 머리를 숙이고 살았더니 하나님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을 탄생시킨 대표적 도시의 가장 높은 장소에 그를 세워놓고 국법으로 “이 동상보다 더 높은 건물은 여기에서 못 짓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오늘 성경말씀에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뜻을 우리 신앙 생활과 삶의 과정에서 실천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1mm라도 낮은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몰려가는 뜻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을 꼽으라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삶의 철학이 그의 고백으로 성경에 세 군데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그가 뭐라고 말하느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나보다 더 죄 많이 지은 사람이 없다고 그럽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꼴찌라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9절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모자라는 사람, 없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높이 쓰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올 것인가? 오늘 해답을 가지고 이 성전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겸손하라고 하셨는가? 그 뜻을 오늘 성경말씀에 저희들이 찾았습니다. 우리 마음을 교만하게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겸손하여서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내게 임재하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벧전 5장 5-6절 / 이삼규목사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이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 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덕삼과 이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자익은 장로로 피택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 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손자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조세형 장로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간의 관계에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먼 옛날인 베드로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었습니다. 오늘날도 경찰이나 소방공무원 혹은 우편집배원들은 제복을 입습니다. 그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수고하는 공무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상적인 제복(uniform)과 같은 것입니다.
겸손의 옷
바울 사도는 우리들이 입어야 할 옷이 있는데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순종’과 ‘겸손’이라는 성실한 자세가 그리스도인들의 제복과 장식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구속받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겸손의 옷을 입고 고난의 길을 택하여 낮아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겸손이 무엇인지 삶으로 친히 보여 주셨는데, 이 거룩한 모범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믿는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겸손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겸손의 옷을 입은 자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중에 이 교훈을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겸손한 섬김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아가서 5장에 보면 신부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합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밤에 찾아와 그녀를 불러내려고 했지만 그녀가 더디 응답하는 바람에 그가 가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녀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 5:2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신부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잠을 자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름에 즉시 응답할 수 있는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내가 자신과 같은 겸손과 섬김의 정신으로 함께 양떼를 먹이고 동산과 들에 나가 의무를 다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느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5:6)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신랑의 겸손한 태도를 따라 행하기 위하여 복장을 갖추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는 이미 떠나고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사람 편에 서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바로 겸손의 자리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완고한 사람을 대적하십니다. ‘대적’이라는 말은 ‘안티 탓소’라는 말입니다. ‘안티’라는 말은 설명 안 해도 아시겠지요. ‘탓소’라는 말은 ‘정렬한다. 배열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본래 전투용어로서 ‘대항하다, 대적하다’는 의미입니다. ‘~에 대하여 전투를 벌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고개를 쳐들고 “하나님, 나는 당신을 대적합니다! 당신에게 도전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방법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교만하고 완고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작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한다면 설사 그가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보다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웃시야 왕을 보십시오.
대하 26:16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대하 26: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대하 26:18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대하 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웃시야 왕은 나라가 강성해 지니까 마음이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문둥병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가 평생 별궁에서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웃시야 왕처럼 직접 눈에 보이게도 찾아오지만 대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과 태도의 죄 때문에 그를 대적하실 경우 심판의 징후로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영적 침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서서히 굳어지고 그러다가 결국 냉소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사람은 맛이 갑니다. 상하여 신맛을 내는 과일처럼 말입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꾸만 맛이 갑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데, 이와 관련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즉, 교만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문제는 그가 마음가짐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아래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즉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손아래서만 겸손해지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내가 교회 앞에 설 것이니 너희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너희를 낮추어라”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굴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높으신 곳에 위엄 가운데 얹으신 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겸손한 척 시늉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한 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어떤 여성도가 웨슬레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천국에서 휫필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웨슬레는 휫필드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그 여성은 “휫필드가 회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 때 웨슬레는 “회심? 물론 회심했지요.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지 않는 이유는 그는 하나님 보좌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반면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과연 그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웨슬레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당신의 구두를 닦을 자격조차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을 낮추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에게 퍼붓는 것은 무엇이든지 당신이 온유한 마음으로 다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온유한 마음이 생긴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매서운 채찍질에 살점이 뜯겨져 나갔습니다. 주께 채찍을 휘두른 자는 천사장이 아니라 로마의 병사였습니다. 주께 욕설을 퍼부은 자들도 하늘의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에 묻은 먼지조차 털 자격이 없는 사악하고 불경건하고 입이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손아래서 자신을 낮추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손아래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아래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겸손하라고 명하시면서 “때가 되면” 그들을 높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절).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때가 되면”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상황을 전부 고려해서 가장 적합할 때”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실 때,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최대의 유익을 끼칠 수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우리가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 오랜 세월 우리가 겸손과 복종하는 가운데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풀무 불을 통과할 수도 있고, 사자 굴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풀무불이 여러분을 머리털 하나 눈썹 하나 상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자들의 입도 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높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때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풀무불 속에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 너무 일찍 나오려고 발버둥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당신을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당신의 영혼에도 복이 있도록 적절히 계획 된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약점은 시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한을 풀어 달라고 끈질기게 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를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더욱 겸손의 허리띠로 단단히 묶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