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의 恨을 입고 뛴 전사들,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이 지닌 원색의 강렬한 대조는, 뭔가 지독한 원한을 품은 듯한 전사적 이미지를 쉬이 표상했고, 녹색의 그라운드 위에 탄탄한 수비 대형을 이뤄 포진한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넘치는 근성과 승부욕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런 그들의 이미지는 실제 승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타이거즈는 리그 출범 이후 16년 째인 97년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한국 시리즈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으며, 말 그대로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전통의 명문구단으로 군림해 왔던 것입니다.
타이거즈를 빛낸 투수 역대10명....
용남이사진이 없어서 내가 왔당께....(김봉연)
1.원조에이스 김용남(58년생) 타이거즈시절 155경기출장 40승39패12세이브 방어율3.37 654 1/3이닝 329탈삼진
70년대중반 최동원,김시진과 자웅을 겨뤘던 3대에이스였던 김용남... 김용남은 원년부터 해태에 입단해서 에이스의 역활을 수행했습니다. 각종 투수부분에서 10위 안에 들어가는 성적을 남겼지만, 그의 명성에는 못 밑치는 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듬 해, 세계선수권대회 때문에 프로에 참가하지 못했던 최동원과 김시진이 입단해서 거둔 성적들과 비교하면, 한 때나마 트로이카라고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이를 보였습니다.
어쨋든 해태는 83년 MBC를 꺽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나서 김용남은 후배 이상윤에게 에이스 자리를 물려주고 2선발로서의 역활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차후 해태의 V9신화에 한몫한 60년대 젊은 신인등이 잇따라 입단하면서 마침내 빙그레에 이적해서 2년간 활약한끝에 85년에 거둔 11승을 끝으로 마운드에 그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사진이 별루 없어서요...닮은 꼴인 김성한감독님사진 올릴까?ㅡ,ㅡ^
2.이상윤(60년생) : 별명이 기억안남...^^;;; 타이거즈시절 175경기출장 65승46패14세이브 방어율3.13 843 2/3이닝 482탈삼진
원조에이스인 문용남의 급격한 기량하락으로 83년에 타이거즈사상 첫번째로 20승투수을 달성해서 83년 타이거즈의 우승주역이 되었으나 30승대 장명부에 밀리는 바람에 골든글러브에 좌절되었습니다.
그때는 이상윤의 성적은 다승2위 20승(1위장명부),방어율4위 2.64(1위하기룡),탈삼진2위 178(1위장명부) 리그를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No.2투수였습니다. 84년에도 역시 해태에이스로 활약해주었구요...
그후부터 갑자스런 팔꿈치부상을 당해서 방어율 10.8까지 올라가는등 올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에이스의 부진으로 곤란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었던 타이거즈도 선동열에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시작되었으며 차후 선동열의 신인답지 않는 센셔이션한 활약에 단숨에 에이스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88년에서 화려하게 부활해서 16승6패 방어율2.89 선동열다음으로 좋은 활약을 펼쳐 다음해부터 2선발로써의 좋은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석연치 않는 부상으로 결국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3.가을까치 김정수(62년생) 타이거즈시절 451경기출장 88승68패32세이브 방어율3.08 1311 1/3이닝 1131탈삼진 한국시리즈MVP1회
데뷔 원년해 한국시리즈 4경기에 등판해 혼자 3승을 독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는 바람에 당시의 에이스인 선동열선수을 제치고 등극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었고,화려한 데뷔무대를 장식한 셈입니다. 89년부터 이상윤의 갑작스런 은퇴으로 선동열과 이룰 원투펀치파트너로써 그럭저럭한 활약을 펼쳤고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이름값에 비해 부진했던 "선동열"보다 팀내 에이스 몫을 톡톡히 해내 야구팬사이에 인상남았으며 그때부터 "가을까치"라고 불려지기 시작되었습니다. 김정수는 해태시절 한국시리즈에서 19차례나 등판, 역대 한국시리즈 최다출장기록,한국시리즈 최다승(7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86년부터 88년까지는 최다연승기록(6연승)을 세워서‘가을까치’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근데 해태 시절 잘나가던 선발에서 팀을 세 번이나 옮기며 마무리에서 원포인트릴리프 투수까지 최고의 자리엔 오른적이 없었다고 할정도로 이름값에 비해 일반 페넌트 레이스에서는 정상급 투수에 항상 거리가 멀었습니다.
김정수 선수 그는 페넌트시리즈에서 정상급 투수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한국시리즈에서 항상 MVP활약을 펼친 김정수의 모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것같습니다.
4.무등산폭격기 선동열(63년생) 타이거즈시절 367경기출장 146승40패132세이브 방어율1.20 1647이닝 1698탈삼진 골든글러브 투수부문 6회수상 MVP 3회수상 다승3회 방어율8회 탈삼진5회(트리플트라운 3년연속 수상) 구원2회
말할것필요없는 "국보급 스타 선동열" 갠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투숩니다.
시속 150Km를 상회하는 강속구에 직구와 구분하기 어려운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방어율부문 3연패와 더불어 방어율 0.99 0.89의 불멸의 전설적기록을 남겼으며 입단시 국내 투수로는 처음으로 억대의 계약금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한 선동열은 무실점, 무홈런, 무4구의 3무투수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해 86년부터 계속된 49 1/3이닝의 연속이닝무실점 기록을 세우기도 해 국민적 영웅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일본 진출 첫 해인 96년에는 낯선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참담한 성적을 남겼지만 97년 재기에 성공해 주니치의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됐고 올해는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4년동안 10승4패98세이브, 방어율 2.79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습니다.
주니치 리그우승당시 도키치투수가 되었으나 내년 시즌에 대한 계약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중에서 공식은퇴선언해 선동열은 85년 해태 타이거스 입단 이후 11년 동안의 국내 프로생활과 96년 이후 일본에서 4년 등 총 15년 동안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참 아쉽기만 합니다. 적어도 2,3년간 뛸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5.싸움닭 조계현(64년생) 타이거즈시절 245경기출장 108승70패17세이브 방어율2.69 1476 2/3이닝 899탈삼진 다승왕1회 방어율1회
80년대 초 군산상고를 기억하는 야구 올드팬들은 자연스럽게 조계현(37)이란 이름 석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현역시절 공격적인 피칭으로 싸움닭이라는 별명과 함께 한국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1989년 타이거즈에 입단한 그는 다양한 변화구를 무기로 삼성과 두산을 거치면서 13시즌 동안 320경기에 출장, 126승92패17세이브에 방어율 3.17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으며. 93년(17승),94년(18승)에는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95년에는 방어율 1위(1.71)에 올랐습니다.
그당시 그의 투구는 대단했으며, 특유의 다이내믹한 피칭폼으로 직구 같은 변화구, 변화구 같은 직구를 뿌리며 타자들을 손안에 갖고 놀던 시기였고 특히 잠실에서 펄펄 날아서 LG,두산킬러로 유명했었습니다. 예컨데 20년이 넘은 프로야구 역사상 변화구를 밥먹듯이 던진 최고의 변화구투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의 변화구는 직구,포크,슬라이더,커브,싱커,체인지업,슈트 또하나의 변화구가 기억안나지만 못던진 변화구가 없을정도로 정말 잘 던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선동열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투수입니다.^^;;;
6.신데렐라 문희수(65년생) 타이거즈시절 241경기출장 59승49패13세이브 방어율3.69 943 1/3이닝 438탈삼진 한국시리즈MVP1회
타이거즈사상 최초의 고졸투수 스타였던 문희수....
86년부터 리그에 합류한 빙그레가 한국시리즈에 진출, 최강 해태와 일전을 벌인 88년 한국시리즈는 문희수라는 '신데렐라'를 탄생시키며 해태의 한국시리즈 3연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8회 1사후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마운드를 물러난 선발 선동렬을 구원 무실점으로 빙그레 타선을 막아내며 첫 세이브를 올렸으며, 3차전 3 대 0완봉승을 거둔 문희수는 2승 3패로 쫒긴 6차전에 다시한번 선발 등판 4대1 완투승을 이끌며 부상으로 등판기회가 적었던 선동렬을 대신해 한국시리즈의 에이스 노릇을 톡특히 해냈습니다.
MVP는 당연히 그의 몫이구요 그는 6차전 8회 빙그레 조양근에게 홈런을 맞기 전까지 한국시리즈 25.2이닝 무실점 행진을 이어왔던것입니다.
그당시 88년 한국시리즈 성적은 3게임출장 19 2/3이닝 방어율 0.457 2승 1세이브입니다.
김정수과 마찬가지로 더불어 한국시리즈에 미쳤지만 페넌트레이스에 별다른 활약을 못미쳤고 항상4,5선발로 대기해봤던 그럭저럭 선수였던것입니다. 아마두 정규시즌서 10승이상 따낸적이 2번일듯...
그러나 88년도 한국시리즈때 막강 다이너마이트타선을 가진 이글스에게 정체불명의 위기에 처있던 타이거즈를 구해 홀로 고전군투하는 문희수의 모습을 생각하기만 하면 고맙기만 합니다....
7.댄디보이 이강철(66년생) 타이거즈시절 568경기출장 151승107패53세이브 방어율3.22 2146이닝 1714탈삼진 탈삼진1회 한국시리즈MVP1회
이강철은 89년 타이거즈에 입단하였고 이후 10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10승과 더불어 세자리수 탈삼진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작성하였습니다. 프로통산 어찌 보면 선동렬,조계현,이대진으로 이어져 온 에이스 계보에 밀려 영원한 2인자 이미지가 강했습니다만 꾸준한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라 할만합니다.
데뷔이래 지난 3년 연속 15승 이상을 거두며 특급투수로써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92년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다승왕 경쟁을 펼친끝에 아쉽게 18승으로 다승 2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93시즌 비록 10승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으로 장기 슬럼프에 빠졌고 데뷔 이 후 현재까지 단 한차례도 개인타이틀을 수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개인타이틀과 인연이 없었지만 그러나 타이거즈의 역사를 새로 써가고있습니다. 이미 승수,탈삼진,이닝수로는 선동렬을 넘어선 상태고 지금 기아에서 불펜서 활약하고 있고하니 언젠가 타이거즈사상 팀내 투수통산최다승수,팀내 투수통산최다탈삼진,팀내 투수통산최다탈삼진 역사상 팀3관왕을 거머쥘것입니다.
이제는 댄디보이보다 젠틀맨이 더 어울리는 이강철 선수는 항상 깨끗하고 단아한 학과 같은 모습으로 15년이란 긴세월을 마운드에 올랐고 그리고 영광의 대기록을 작성하였고, 철저한 자기 관리는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기 충분했습니다.
8.마당쇠 송유석(66년생) 타이거즈시절 271경기출장 51승33패25세이브 방어율3.66 841 1/3이닝 399탈삼진
혹시 아시나요? 해태에서 원조 유동훈이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 해태시절부터 중간계투로는 잔뼈가 굵은 선수이고, 군말없이 팀을 위해 희생해온 성실한 선수였습니다. 아마때 투창던지기선수였던 그의 묘한 투구폼도 꼭 단점이라고 할 수만은 없고 장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공이 좀 투박하다고 할까나?.....그당시 보통투수와는 달리 전천후로 혹사하는 경향이 있었고, 역시 타이거즈가 점수 내줄 위기때마다 나타난 흑기사 송유석...
직접 팀을 구해줌에 따라 팀윅의 능력을 100퍼센트 가깝게 끌어내어 항상 팀승리로 길목을 터주곤 했습니다. 해태에서 엘지로 이적한 이후 3년동안 무난하게 활약하다가 막판2년동안 오랫동안의 혹사때문인지 갑자기 구위가 떨어져 중간계투보다 종종 패전처리로 써먹는 경우가 있었고 조용히 말없이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보잘것없는 중간계투였지만 타이거즈를 위해 묵묵히 던져준 선수이기때문에 당신을 타이거즈를 빛낸 역대투수 10명에 선정되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9.전라도용병 이오수(72년생) 타이거즈시절 116경기출장 41승26패13세이브 방어율3.26 569이닝 368탈삼진
지난2002,03년동안 그럭저럭한 용병으로 활약했었지만 전훈캠프 때부터 에이스급 피칭을 선보인 리오스는 1선발로 확실하게 낙점받았으며 그는 13일 광주에서 벌어진 두산과의 시범경기 개막전서 선발로 등판, 5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잘 던지며 승리투수가 된이래 갑자기 외계인급으로 변신해서 김진우가 빠진 호랑이 마운드의 '에이스'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국내무대서 3시즌째를 맞는 관록이 묻어났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알아서 페이스를 조절해 온 흔적이 보이는등 캠프 때부터 연습한 체인지업 등 변화구를 많이 연습하고 있었고 그는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됐던 몸쪽 승부를 많이 시도했고, 사구를 한개 내주긴 했으나 의도적으로 직구와 싱커를 타자 몸쪽으로 붙여 던지며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습니다....한마디로 무서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날 리오스의 직구 최고 스피드는 시속 143㎞. 평소 150㎞에 육박하는 빠른 볼을 던지는등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었고 타팀들의 타자들의 방망이는 잇따라 허공만 가를 뿐이였고
말그대로 시속 150㎞의 직구와 140㎞의 고속 슬라이더,110㎞대 커브가 하모니를 이룬 완벽한 피칭을 갖춘 리그를 지배할만한 능력이 있는 기아의 에이스였습니다. 지금 그는 삼성 배영수와 함께 다승 공동 선두에 올랐을 뿐 아니라 올 시즌 전 구단 상대로 승리를 챙긴 첫 투수가 된 시점이었습니다.
지난 2년간 기아에서 뛰었던 리오스는 사실상 버릴까말까하는 계륵신세과 다름없었고, 지난 해 10승을 거뒀지만 많은 패전(13패)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경기를 망쳐버리는 성격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올해 다승왕의 꿈까지 현실로 다가왔고, 리오스는 "부상없이 뛰고 있다는 데 만족한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한국에서 계속 뛰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밝혔을 정도로 기아타이거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갑니다.
몇년간 계속 기아에서 뛰어주세요....당신은 이제 용병이 아닙니다....이제 기아의 한가족이랑 다름없습니다.
10.에이스오브에이스 이대진(74년생) 타이거즈시절 218경기출장 85승52패22세이브 방어율3.22 1079이닝 956탈삼진 골든글러브 투수부문 1회수상 탈삼진1회
93년 광주 진흥고를 졸업하고 해태에 입단한 그는 입단과 동시에 향후 투타 보직을 둘러싸고 큰 이슈를 낳았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명성을 떨친 그의 타격솜씨 때문이었는데,과연 그에게 타자와 투수 중 어느 역할을 맡길 것이냐가 논쟁거리였고.
결국 그는 김응룡 감독에 의해 투수로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데뷔 첫 해 31경기에서 10승 5패 2세이브 방어율 3.11의 발군의 성적을 올리며, '포스트 선동렬' 칭호를 얻었습니다. 또한 그는 150km를 상회하는 강속구와 빼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95년부터 4년 연속 두자리승수 및 세자리 탈삼진을 기록하며, 자신만의 고졸신화도 이어갔었고 특히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과시했던 그는 97년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서 2승 무패 방어율 1.38을 기록, 팀의 아홉번째 한국시리즈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듬 해 소속팀이 '이(李)빠진 종이 호랑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가을잔치 티켓 획득에 실패했을 때에도 그는 한국 최고의 '닥터K'로 승승장구했으며 95,98년 등 두 차례나 닥터K에 등극했던 그의 탈삼진 능력이 더욱 빛났던 경기는 역시 98년5월 현대전. 그 날 경기에서 이대진은 10타자 연속 탈삼진, 매이닝 탈삼진 및 선발전원 탈삼진, 정규이닝 최다탈삼진(16개) 등의 기록을 작성하며, 근래에 보기 드문 위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으며 게다가 이는 지금까지도 야구팬들에게 회자되는 투수들의 명경기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인모를 어깨 통증에 시달렸고, 4년넘게 던지는 혹사가 결국 그의 몸에 이상을 가져오는데, 병명이 들어본 적 없는 '근육충돌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렸고 이듬해 그는 완전치 않은 몸으로 마운드에 복귀했고, 시즌 후반 김응룡 감독과의 신경전 속에 173개의 투구수를 기록하며 치렀던 롯데전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부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김응용감독의 무리한 욕심때문에 당대의 최고에이스 한명을 잃어야 하는 비극...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재활훈련하고 있었고 자신이 언젠가 기아마운드에 호령할 날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땀흘리고 있습니다.ㅠㅠ
이것이 이러한 선정된 이유입니다. 김상진,차동철,최상덕,임창용,김진우 후보도 게임출장,방어율,이닝수 이러한 이유로 역대타이거즈투수 10선에 아쉽게 탈락되었고 특히 김상진의 죽음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기아팬들의 아쉬움을 위해 스폐셜 보너스 김상진(77년생)를 올립니다. 타이거즈시절 84경기출장 24승26패2세이브 방어율 3.90 392 1/3이닝 170탈삼진
96년 광주 진흥고를 졸업하고 해태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은 김상진은 데뷔 첫해부터 고졸 신인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두각을 드러냈었고, 조계현과 이강철,이대진,김정수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과 함께 선발투수로 기용돼 9승5패 4.29의 성적을 남겼습니다.
97년에는 9승10패1세이브를 기록한 김상진은 방어율을 3.60으로 낮췄고 특히 그해 LG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2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거둬 해태 우승의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그는 98년으로 접어들며 목의 통증을 호소해 6승11패로 갑자기 페이스가 떨어졌고 단순히 목부상인 줄 알았던 김상진은 시즌을 마친 10월8일 광주에서 친구들과 저녁식사 도중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이때부터 갑자기 비극이 시작될줄이야...
전남대병원에서는 3번 목뼈에 자라난 종양 제거수술을 한 뒤 정확한 원인을 찾기 위해 조직검사를 실시한 결과 위암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밝혀냈었습니다.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받아 한 때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기도 했지만 차후 병세가 악화돼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다 끝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타이거즈역사상 타이거즈팬들의 슬픈 눈물샘을 자아내는 투수가 누가 있었을까요?ㅠㅠ 고인이 그저 하늘에서 공 던져주기만 바랄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