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설움을 시로 노래하다 – 김삿갓의 〈환갑연〉 〈멱자시〉 〈이십수하〉
◇ 한시에서 한글시로
감삿갓은 한시의 대가이기도 했지만, 한시를 우리말(그 당시에는 언문이라고 했습니다)로 잘 운용하여 쓴 19세기 이 땅의 최고 시인입니다. 개화가사의 등장 이전에 김삿갓은 시조와 한시의 한계를 깨닫고서 파격적인 시를 써 한글 시로 가는 가교의 역할을 했습니다.
저기 앉은 저 노인 사람을 닮지 않았구나. 彼座老人不似人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아닐는지―. 疑是天上降眞仙
그 중에 일곱 자식이 도둑이 되었구나. 其中七子皆爲盜
푸른 복숭아를 훔쳐와서 환갑잔칫상에 바쳤으니. 偸得碧桃獻壽筵
― 〈환갑연(還甲宴)〉 전문
허다한 운자 두고 하필이면 멱자인가. 許多韻字何乎覓
그 멱자도 어려운데 하물며 이 멱자라. 彼覓有難況此覓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렸구나. 一夜宿寢懸於覓
산촌의 글방 스승 멱자만 아는구려. 山村訓長但知覓
― 〈멱자시(覓字詩)〉 전문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서러운 나그네에게 二十樹下三十客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 四十村中五十客
인간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 人間荳有七十事
집에 돌아가 선 밥을 먹느니만 못하리. 不如歸家三十食
― 〈이십수하〉 전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에 가면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라고 있습니다. 이곳은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 지역으로, 산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난고 김삿갓(본명 김병연, 1807~1863)은 원래 전라도 동북(지금의 전남 화순군)에서 작고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아들 익균이 아버지가 말년에 거처했던 바로 이곳 노루목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김삿갓의 묘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의 노력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습니다. 가보고자 하는 분은 김삿갓문학관이나 영월군청 문화광광과로 전화를 해보십시오.
김삿갓이 방랑시인이 된 이유를 짧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평북 선천의 부사였던 김익순(김삿갓의 할아버지)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난이 평정된 후 익순은 처형을 당했고 남은 가족은 멸족의 벌을 받았습니다. 집안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는데 마침 집안의 노복 김성수가 아들 안근과 그의 처, 손자 병하와 병연을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시켜 대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그 집안에서 벼슬을 할 수 없게 하는 형법)으로 벌이 감해지자 안근의 처는 남편도 화병으로 죽은 터라 두 아들을 데리고 강원도 영월로 가서 숨어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병연은 과거에 응시, 할아버지 익순을 비판하는 시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 나왔을 때 무지막지하게 성토를 했는데, 내용 중에는 한 번 죽어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까지 나옵니다. 단연 뛰어난 글이라 장원급제를 했습니다. 이 기쁜 사실을 어머니께 자랑스럽게 고하니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문의 내력을 비로소 어머니에게 듣고서 알게 된 병연은 그 연유야 어떻든 간에 조상을 비방한 죄를 지은 자책감에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하여 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전국 방랑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미 결혼하여 자식까지 둔 몸이었습니다. 방랑생활 4년 만에 귀가하여 1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둘째아들을 보았으나 다시 방랑길에 나섰습니다. 둘째아들 익균은 아버지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귀가를 종용했지만 병연은 57세 때 전라도에서 객사하였고, 익균이 아버지의 유해를 강원도 태백산 기슭에 묻었습니다.
김삿갓은 주로 대갓집에 가서 잠시 식객 노릇을 하거나 잔칫집이나 상갓집에 가서 시를 써주고는 구걸을 했습니다. 때로는 시골 서당에 가서 훈장과 시제를 겨룬 뒤에 잠자리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뒤 3편의 시는 모두 구걸과 관계가 있습니다.
〈환갑연〉이 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한 마을을 지나다가 환갑잔치를 여는 집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형색이 초라한 김삿갓을 쳐다보는 그 집 자식들의 시선이 영 곱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김삿갓이 송축시를 한 수 올리겠다고 청하자 그 집의 장남이 마루로 올라오라고 하고는 종이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잔칫날 지나가는 과객을 푸대접했다가는 혹 재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글재주나 한번 자랑하게 하고는 술 한 상 주어 보내면 그만이었습니다.
김삿갓은 바랑에서 벼루와 먹을 꺼내들더니 금방 먹을 갈았습니다. 붓을 꺼내 들더니 한 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일곱 글자를 쓰고는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습니다. 첫 번째 행을 썼으니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첫 수는 노인이 늙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곱 자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그중에는 “아니, 저 늙인이가 미쳤나” 하면서 욕을 내뱉는 이도 있었습니다. 감삿갓이 주위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줄을 더 쓰자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자식, 미소를 짓는 자식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줄을 쓰자 다시 자식 일동 분기탱천, “아니, 이 노인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재수 없으니 당장 쫓아냅시다.” 하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김삿갓이 좌중을 둘러보니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회심의 미소를 지은 후 김삿갓이 마지막 행을 썼을 때,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김삿갓은 한 상 거하게 얻어먹고 노잣돈까지 얻어 그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멱자시〉 탄생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산골의 훈장은 내가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말을 하며 김삿갓을 깔보는 것이었습니다. 콧대가 여간 높지 않았지만 김삿갓으로서는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훈장의 요구에 응해야만 했습니다. 요구란 한시 쓰기였지요. 칠언절구 한시의 첫 번째 운을 말하면 상대방은 그 글자가 들어가는 시를 짓고, 또 그 다음 운을 말하면 또 그 글자가 끝에 들어가는 시를 지어 완성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운이란 대개 1, 2, 4행의 끝 글자를 말해주는 것인데, 모음에 통일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컨대 회(回)·쇄(刷)·래(來)나, 다(多)·마(麻)·파(波) 같은 것이었습니다.
훈장은 첫 번째 운으로 한시에서 좀처럼 쓰지 않는 멱자를 말했습니다. “구할 멱!” 이 말을 듣고 김삿갓은 “허다한 운자 두고 하필이면 멱지인가.”라고 썼습니다. 산골 훈장은 눈을 왕방울처럼 뜨며 ‘이놈 보게’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꾀죄죄한 나그네가 시의 첫 행을 멋지게 쓰자 심술이 발동하여 같은 운자를 말했습니다. “구할 멱!” 하고요. 같은 운자를 말하는 것은 반칙이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훈장은 김삿갓을 애먹이기로 한 것이지요. 김삿갓은 잠시 생각한 뒤 “그 멱자도 어려운데 하물며 이 멱자랴.” 하고 썼습니다. 훈장의 두 눈동자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발악하듯이 되까렸으니 또다시 “구할 멱”이었습니다. 김삿갓은 한숨을 내쉰 뒤에 붓을 들었습니다.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렸구나.” 맞는 말이었습니다. 멱자를 운자로 한 시를 잘 쓰면 쉬었다 갈 수 있지만 쫓겨나면 이 밤에 어디서 잠자리를 구한단 말입니까. 훈장은 사색이 다 되어 이빨을 꽉 깨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할 멱!” 시쳇말로 엿먹으라는 말이었는데 오히려 김삿갓은 마지막으로 훈장을 한방 멋지게 먹였습니다. “산촌훈장단지멱”이라 씀으로써, 그날 밤을 두 사람이 어떻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십수하〉는 한시의 파격입니다. 우리말로 이해하지 않으면 뜻이 통하지 않는데, 김삿갓은 이런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십수하〉는 이런 연유로 씌어졌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당도한 어느 마을, 김삿갓은 제일 으리으리하게 보이는 대갓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인이 나왔지요.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남은 밥이 있으면 한술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하인은 주인 아낙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낙은 밥 한 그릇을 김삿갓의 바가지에 퍼줄 것을 명했습니다. 그 밥을 들고 뒷동산 스무나무(일명 시무나무, 느릅나무과의 낙엽 교목) 아래에 앉아 숟가락을 드니 쉰내가 코를 찌릅니다. 김삿갓은 서러운 마음에 밥을 땅이 묻고 붓을 들었습니다. 시의 뜻을 풀어봅시다.
‘이십수하’는 스무나무 아래, ‘삼십객’은 서러운(서른은 조금 달리 말하면 ‘서러운’입니다) 나그네입니다. ‘사십촌중’은 망할(마흔을 조금 달리 말하면 ‘망할’입니다)놈의 마을이고, 오십은 정확하게 쉰이므로 ‘오십식’은 쉰 밥입니다. ‘칠십사’의 칠십은 일흔이니, 조금 혀를 굴리면‘이런’이 됩니다. 즉, ‘칠십사’는 ‘이런 일’입니다. 삼십식의 삼십은 순우리말로 서른이니 조금 달리 말하면 선 밥, 덜 익은 밥입니다. 선 밥을 먹더라도 집에 가야지 이런 설움을 안 당하겠다고 한탄하는 내용을 담은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이십수하〉입니다. 소설가 이문열은 김병연의 일대기를 장편소설로 썼으니, 그 제목이 ‘詩人’입니다.
- < ‘詩 어떻게 쓸 것인가?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수업(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