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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인사
벧전 5:10-14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벧전 5:10-14 / 그리스도를 통해서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짧은 고난 뒤에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여러분이 흔들릴 때마다 그 자리에 굳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강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권세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소서. 아멘. 12) [작별인사] 나는 진실한 믿음의 형제인 실루아노의 손을 빌어서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고 많은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가 겪고 참아 나가야 할 일들을 상세히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내가 말한 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굳게 서게 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13) 주님 안에서 맺어진 여기 바벨론에 있는 자매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내 아들 마가도 문안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굳게 설 것을 당부합니다.
영광과 온전하게 하심(10-11) 모든 성도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중간도 모두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공급되는 은혜를 통해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 진리와 악과 십자가 앞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터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에는 건물을 지을 때 기초 돌이 되는 반석, 바위 같은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돌로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그 견고한 터 위에 크고 웅장한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그분의 길에 대한 견고한 확신 위에 흔들림 없이 자신을 세워 나가는 모습입니다. 반석 위에 든든히 선 교회는 이 땅에 뿌리 내린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신 살아 있는 성전과 같은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찬송하며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안과 친교(12-14) 베드로는 마무리하면서 서신서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지막 인사말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베드로에게 최종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편지를 전달하는 자와 도움을 준 사람을 언급합니다. 실루아노(실라)는 바울과 디모데의 동역자이고, 바울이 죽은 후 베드로를 도왔습니다. 베드로가 실루아노의 이름까지 밝히며 그가 서신 기록을 도와주었지만,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것을 분명히 하여 서신의 사도적 권위와 진위성을 확증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위로를 통해 살아있는 소망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했습니다. 본 단락에서 “이것이”란 본서가 품고 있는 모든 은혜를 말합니다.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까지 모두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적용: 시작과 마무리를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이 담긴 서신에는 오직 주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시작과 끝이 주와 함께 하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 이 시간 먼저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며 시작하고 저녁에는 하루의 끝을 맺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의 섭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사람과 동식물과 심지어 미생물일지라도 하나님이 관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인간과 동식물과 미생물까지, 운명은 하나님의 말씀아래서 움직이며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바로 성도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연의 질서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하여 기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설 교 >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
벧전 5장 10~11절 / 이응효목사
<존 뉴턴> 이란 분은 십대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던 상선에 선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고구마처럼 생긴 얌 이란 식물로 배를 채우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먹지 못하여 죽을 것 같았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선장의 흑인 부인의 노예가 되어 온갖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천신만고 끝에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자신도 노예가 되어 고생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선장이 되자 노예들을 학대하기도 하고, 살인도 하고, 간음도 하고, 도적질도하고, 술과 방탕함으로 온갖 죄를 다 저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죽음 직전에 그리스도를 찾던 그를 주님은 만나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국에 돌아와 신실한 신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어 런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찬송가를 지었는데 우리들이 애창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바로 그 찬송입니다. 그 가사는 그의 간증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의 무덤에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때 불신자며 난봉꾼이었던 나, 아프리카 노예들의 종인 내가 우리 주와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로 이제 보전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았다. 그리고 내가 한 때 그토록 오랫동안 파괴시키기를 원했던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한 어부출신인 자신을 불러주셨고, 주님의 제자로 세워주셨으며, 배신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 주셔서 성령의 권능을 주시고 사도로 사용하시는 그 은혜를 생각할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본문에는 세 가지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 불러주신 은혜입니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해매이던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세상에서 불러내어 거룩하게 한 무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이 죄악세상에서 불러내어 주셨고,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15:16절)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절)고 하셨습니다.
이사야43:1절에는“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알아주어 청와대로 불러주었다면 감격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하물며 우주의 주인이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지명하여 불러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썬다 씽>은 1889년 9월 3일 북인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의 부유한 대지주였고 이슬람의 시크교의 신자였습니다. 14살 때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곧 이어 친구처럼 지내던 그의 형도 죽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공허함과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난폭하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량소년들의 리더가 되어 기독학교의 학생들을 구타하고 선교사들이 집회하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방해하고 오물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기독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어 버렸습니다.
찢어버린 성경을 손에 들고 다시 던지려는데 눈에 성경 구절이 들어왔습니다. 마태복음11:28절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이 성경에 있구나. 마음에 약간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다신 다른 곳을 펼치니 요한복음3:16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말씀을 읽은 뒤 그는 놀라운 말씀이로구나. 영생을 주신다고 그는 중얼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믿었던 시크교의 알라신이 참신인가? 아니면 자기 민족이 믿어왔던 힌두교의 브라만이 참신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예수가 참신인가?
그는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방에 들어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신이여! 당신 없이 나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갈급하게 사모하오니 오직 당신 안에서만 내영이 쉴 수 있나이다 누가 참신입니까?”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그는 1904년 12월 16일 선생들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경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살을 결심하였습니다. 사흘 동안 기다려 보고 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새벽 다섯 시에 마을 앞을 지나가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할 것이라고 단단히 결심하였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애원하며 신을 찾던 중 12월 18일 새벽 시계가 4시 30분을 가리킬 때 그가 앉은 방안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그 빛 가운데 한 분이 서 계셨습니다. 영광과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하신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나의 생명을 버린 예수 그리스도이니라.”
그는 그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마침내 큰 평안이 왔습니다. 그는 그 밤에 거듭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을 하였고 인도와 티벳과 네팔 전역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따랐고 1920년부터 22년 까지 오대양 육대주를 순회하면서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다 1929년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비록 반항하고 난폭하게 굴고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마음에 갈증을 아시고 주님은 그를 만나 주셨고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5: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각 시대 마다 그 백성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날은 전도지를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주님 안으로 불러 주십니다.
주님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평안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만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1912년 4월 14일 밤 대서양 바다에 침몰하여 1513명이 차가운 바다 속에 가라앉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구명정을 탄 711명은 살았습니다.
죄인들은 모두 죄악의 바다에 빠져 죽고 또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자면 구명정으로 오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 죄 없는 보배피를 흘려 우리 죄를 씻어 주셨고 생명을 버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속의 은총은 그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들만이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만병통치약이 있어도 환자가 먹기를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누구의 권유로 오셨던지 아니면 스스로 오셨던지 이 자리에 오셨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이 시간 저를 통해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지체 말고 주께로 나아가야합니다.
2. 잠시 고난 후에 온전케 하시는 은혜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어려움이 올 수 있고,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신 백성들은 끝까지 책임지실 뿐만 아니라 권능의 손으로 항상 붙들고 계십니다.
“아무도 너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너희를 빼앗을 수 없느니라.”
사람의 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합니다.
마음에 들면 움켜쥐고 싫으면 미련 없이 놓아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잡는 기능은 있어도 놓는 기능은 없는 것 같습니다.
탕자의 손도 잡아주시고, 문둥병자의 손도 잡아주시고, 간음한 여인의 손도 잡아주시던 그 부드럽고 따뜻한 손으로 당신을 잡아 주십니다. (사41:10절)
우리는 이 땅에서 고아와 같이 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온다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고난 뒤에 반드시 승리를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롬8:28절)
로마서5:3~4절에는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작은 시련이 와도 흔들리고 절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살하고 맙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로스쿨에서 공부하던 수재인 정모씨가 지난 19일 기숙사 9층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서울대에서 자살을 많이 하여 <스누콜>이란 전화 상담을 하는데 1주일에 20~30통 일 년에 3000통의 전화가 걸려온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열고 대화할 상대가 없고 도와줄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오지만 우리는 이런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고난 가운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이 고난을 통하여 날 더 성숙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1:1절에서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창세기23:4절)에서“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라고 하였고, 다윗도 (시편39:12절)에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영원히 갈 것처럼 생각하고 땅에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20절)에“우리의 시민권은 저 하늘에 있다”라고 하셨고,
(히브리서13:14절)에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새 예루살렘 도성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룬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가 정복한 땅에 자기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심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의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과 중동의 모든 민족을 정복하고 더 이상 정복할 곳이 없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를 공격하고 난후에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 후 그렇게도 위대했던 그리스 나라는 점차로 기울어져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은 그가 죽을 때, 유언을 하기를 자신의 장례식 때 자기의 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아, 백성들에게 인생의 허무를 알게 하도록 하라 고 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정복한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도 결국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 부귀영화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우리는 빈손으로 가야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침 안개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을 가지고 너무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로다.”하고 만족한 웃음으로 맞이하였습니다.
*<디 엘 무디>가 죽을 때 “오 하늘이 열리고 천국이 내려오는 도다 내가 그리던 저 하늘나라로 가는 날이다.”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구세군을 창설한 월리엄 부스의 부인인 <캐서린 부스>가 죽을 때 “오 저 찬란한 도성이 내려온다. 이것이 죽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겠다.”하고 죽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국의 광경을 조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천국은 영영한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눈물이나 한숨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고 슬픔 아픔 고통 괴로움 질병 늙는 것과 죽음과 이별이 없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16:19~31절)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부자와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잣집 쓰레기통의 부스러기를 먹고 살던 나사로 이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은 다음 그 영혼이 즉시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는데 그 영혼은 음부(하데스)에 떨어져 불속에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떵떵거리고 잘 살았겠지만 자기 배만 알고 이웃을 생각하지 않았던 이 부자, 그 부귀영화가 지속될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이 부자는 죽은 다음 영원한 고통 속에 부르짖어 보지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 부자는 불속에 고통 하는 가운데 부르짖기를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이런 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살려 보내 전해 달라고 하여도 주의 종들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날지라도 믿지 않는다고 거절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영광이냐 아니면 영원한 형벌이냐가 결정됩니다.
이 땅 가운데서 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 세계에서 아무리 후회하고 애걸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이름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전도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전도지의 제목이 뭐냐면 “당신이 지옥에 가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음표가 크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뒤를 넘겨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게 답입니다. 가만있으면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대로 가만있으면/ 여러 분의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은 지옥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내가 결단하고 방향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 곳은 지옥밖에 없습니다.
버스를 잘 못 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서 내려서 갈아타야만 할 것입니다.
갈아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세상에 속아 살았던 지난 날 뉘우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강조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믿음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 한 분인 것을 믿어야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은혜는 죄악세상에서 불러내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입니다.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어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입니다.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 드립니다.
실라를 본받는 교회?
벧전 5장 12~14절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0. 들어가는 글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교회 생일입니다. 김포한신교회를 개척한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하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은 아파하는 성도들과 함께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성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면서 기도하는 목회자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전서의 마지막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말에 실루아노가 등장합니다. 실리아노는 사도행전에서 실라로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서 실루아노가 어떻게 사역하였는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실라의 사역을 본받아서 건강한 교회를 세워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연결시켰는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실루아노를 신실한 형제로 소개하며, 그의 편지를 대필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12절). 베드로가 신실한 형제로 소개하는 실라의 이름이 어디에서 처음 나옵니까?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을 끝낸 후에 할례파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더라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행15:5).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율법으로 괴롭게 하지 말고 우상의 더러운 것만 멀리하라”는 것입니다(행15:19,20).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파송했습니다(행15:22). 여기서 처음으로 실라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로서 안디옥 교회에 보냄 받아 이방인들을 권면하는 일에 마음을 다했습니다(행15:32).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대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두 교회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로 바사바의 유다는 예루살렘 교회로 복귀했지만(행15:33), 실라는 바울에게 택함을 받은 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행15:40).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선지자 실라와 안디옥 교회 출신의 바울이 선교여행을 함께함으로 두 교회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결고리가 생겼을 것입니다. 실라는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가 대립하지 않고 서로 화목케 하는 역할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너무나 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교단만 정통이라고 하면서 다른 교단들을 정죄합니다. 한국교단이 실라같은 마음으로 서로 연합하고 하나 되기를 소망합니다.
실라가 바울의 택함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사역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실라도 바사바의 유다처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얼마든지 선지자의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과 함께 하는 선교사역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은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역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섬기면 화목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어붙이다가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원하는 선교 사역에 마음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어떻게 베드로와 바울을 연결시켰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선교여행을 떠났던 실라가 베드로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 적어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12절). 바울의 동역자였던 실라가 이제는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선교사 베드로와 이방인 선교사 바울이 입장이 달라서 충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바울과 베드로를 연결시켜서 화목케 하였습니다. 그가 바울과 베드로를 연결시켰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았고, 어느 쪽에도 줄을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곳에서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지지 않고 겸손히 헌신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선교 동역자가 필요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함께 했습니다. 또한 그는 베드로의 서신을 받아 적어서 보낼 사람이 필요했을 때도 그곳에서 헌신했습니다. 실라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역을 함으로서 바울과 베드로의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가려가면서 사역하다가 사람과 부딪쳐서 주님의 사역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실라처럼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식하는 사역을 함으로 화목케 하기를 소망합니다.
3. 어떻게 실라는 마가와 동역자가 되었는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인사말에서 베드로는 실라를 신실한 형제로 소개한 후에 마가를 내 아들로 소개합니다(13절). 실라와 마가의 관계를 살펴보면 서로 어색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 도중에 마가가 낙오했습니다(행15:38).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행15:39). 그리고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바나바와 마가를 대신하여 실라가 함께했습니다(행15:40).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실라와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바벨론 지역을 선교했습니다. 이 선교가 가능한 이유는 실라가 선교사역에 성공했다는 우월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선교사역에 실패한 마가를 배척하지 않고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했다고 내세우는 것은 그럴 수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실라는 바울과 선교 도중에 포기함으로 관계가 끊어졌던 마가를 다시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골4:10). 누가 자신에게 실수하면 주홍글씨를 새기고 단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실수했다고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실라처럼 다시 기회를 주면서 품어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4.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헌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라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드러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 실라가 안디옥 개척 교회의 선교사 바울보다도 신앙의 경력이 더 우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라는 것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고 바울을 겸손히 섬겼습니다. 실라가 바울을 섬기는 것이 진짜인 이유는 빌립보 감옥에 함께 갇혔을 때도 그를 따라서 선교한 것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바울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고 후회하며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바울과 함께 고통을 겪으면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행16:25). 이런 실라의 믿음은 오직 자신이 아니라 주님만을 따르면서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어찌보면 마가복음은 베드로 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가뿐만 아니라 실라도 베드로 전후서를 대필한 것을 보면 얼마든지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실라 복음을 남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거나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실라는 베드로의 서신을 받아 적어서 바벨론 지역에 보내는 사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며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를 신실한 형제라고 최고의 칭찬을 했습니다(12절). 오늘 본문의 실라를 보면서 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목회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교회는 실라의 믿음을 본받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드러냄으로 신실한 형제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선교에 참여하는 믿음이 되게 하시며.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식하는 사역을 함으로 화목케 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 과거에 실수했다고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다시 품어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고 드러냄으로 신실한 형제라고 칭찬받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은혜 위에 굳게 서라
조학환목사 / 벧전 5:12~14
오늘 말씀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이다. 베드로사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본 서신의 대필자를 소개하고 은혜에 굳게 설 것과 서로 문안 할 것을 권면한 후 축도로 마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몇가지 교훈들을 살펴보자.
1.신실한 조력자 실루아노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써서 권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앞의 말씀들은 베드로가 실루아노를 시켜 이 서신을 대필하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 12절부터 14절까지만 베드로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을 직접 기록한 것은 본 서신이 베드로의 서신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베드로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직접 서신을 기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실루아노에게 대필케 하고 그를 통하여 편지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으로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2차 전도여행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했던 신실한 동역자이다. 실루아노라는 이름으로는 고린도후서나 데살로니가전후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경로로 베드로를 돕고 있었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서는 베드로를 도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실라 즉 실루아노는 때론 처음에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있다가 지금은 베드로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슨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곁에서 도와줄 조력자들도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같은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실라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뵈뵈 등의 훌륭한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어떤 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물론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잘해야 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잘 도와주고 협력해 주지 않으면 어떤 공동체도 바르고 힘있게 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기보고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데 이런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런 내조가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저도 물론 마찬가지다. 저의 목회사역의 반 이상은 아내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고맙고 다른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도 물론 그렇다. 교회청소나 식사준비나 차량운행이나 예배위원이나 모두 너무 귀한 사역이다. 다시 말해 꼭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이나 무슨 선교회나 전도회의 임원이나 이런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세워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고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름답게 유지하고 제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구조가 아주 잘못된 것 중의 하나는 말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공부많이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농사를 짓거나 작은 공장이나 식당이나 혹은 속된 말로 노가다 일을 하면 아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런 곳에 일하는 분들이 안계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겠나? 누군가는 청소도 해야하고 농사도 지어야 하고 공장에서 일도 해야 하고 노가다도 해야 한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고 타고 보고 듣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런 분들의 수고에 의하여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분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은 나 자신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어떤 곳에서든지 어떤 일을 맡았든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귀히 여기자. 그래서 우리 모두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도 이루어가며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서신의 대언자를 말씀한 베드로는 마지막 권면에 들어간다. 마지막 권면의 첫째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은혜가 뭐냐? 내가 지금까지 써서 보내는 것이 참된 은혜인데 바로 이 참된 은혜위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써서 보낸 참된 은혜란 무엇인가? 물론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혜택들이다. 우리 생명,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그 중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은혜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은혜이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신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이 은혜란 그런 포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베드로전서에서 강조했던 내용들이다. 우리는 산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어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 그게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이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선을 위하여 고난도 받으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은혜위에 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중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진짜 은혜이다. 그냥 잘먹고 잘살고 만사형통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물론 은혜이긴 하지만 그것은 온전치 못한 은혜이다. 그런 은혜에 빠지면 환난과 핍박이 오고 뭔가 일이 잘 안되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하게 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게 된다. 일이 잘 풀되고 알아주면 주의 일을 좀 하다가 일이 잘 안되고 알아주지 않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주의 일을 회피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무조건 편하고 좋은 것만을 찾지도 않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며,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관계없다. 주님 주신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고난이 오거나 누가 어떻게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감사하며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약하고 악하고 거짓되고 죄로 말미암아 어두운 곳이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들엔 일희일비하지 않고 의연히 주신 사명 감당하며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 진정한 은혜를 받자.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생각하자. 그래서 어떤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모든 상황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며 의연하게 천성을 향해 나아감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 서로 문안하라.
벧전5:13,14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서로 문안할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바벨론이란 오직 육체적 물질적 유익과 기쁨과 만족만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세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계18:2절에서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래서 당시 교회에서는 오직 세속적 관점으로 나라를 통치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가장 큰 세력인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 마가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멋모르고 1차 전도여행 시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갔다가 너무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2차전도 여행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이 사람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의견 충돌이 생겨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따로 전도여행을 하게 된다. 이후로 마가는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바울에게도 인정받고 베드로에게도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교회와 마가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면서 너희 끼리도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볼이나 이마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물론 이것은 친밀감의 표현이다. 그렇게 너희도 서로 친밀하게 문안하라는 것이다.
물론 문안한다는 것은 그저 서로 안부나 물으라는 것은 아니다.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된 자들로서 마땅히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형편을 살피며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고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고 도우며 좋은 교제 가운데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자. 서로 가까이하며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자. 그러기 위하여 더욱 친밀한 교제도 이루어가자.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진정한 가족으로써 서로 위로받고 힘을 얻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자.
4.축도
벧전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서신서의 마지막은 언제나 축도이다. 고전16:23,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빌4:23 골4:18, 살전5:28, 살후3:18, 딤전6:21, 딤후4:22, 딛3:15.....
이러한 축도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축복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축복의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는 무조건 서로 축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원수조차 사랑하라 하였고, 롬12:14절에서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물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자. 결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하지 말라. 그건 마귀가 하는 짓이다.
그러면 축복하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다. 물론 돈과 건강과 명예의 복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은혜보다 더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생명을 얻고, 물질도 육체도 명예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고 모든 상황에서도 진정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을 지키자. 아니 믿음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와 기쁨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자. 이 일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고 위로하고 축복하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멘.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 5장 12~14절 / 이상호목사
오늘 베드로전서 5장 12절에서 14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2절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을 직역을 하면 은혜 안에 너의 자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너 자신을 고착시키라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그 자리에 못을 박아 놓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총각이 장가들고 처녀가 시집을 가서 가정을 이룩합니다. 그러다 보면 부부가 되고 얼마 안가서 아들과 딸을 낳게 됩니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면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자는 남편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확실히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자에게는 아내라는 자리, 어머니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마련해 놓고도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심각한 가정입니다. 본인 자신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라고 하는 그 안에 우리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 놓자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어떤 은혜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연단의 은혜 (12)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연단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연단의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은혜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유명한 성도가 욥기 23장 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욥이 평안 할 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때 ' 더 이상 감당하겠나'할 정도로 고난을 연속적으로 당할 때 그 고백을 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 중
첫 번째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욥은 그 나라의 갑부가 아니라 동방의 갑부라고 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재산을 다 잃고 거지가 됩니다. 즉 재산을 전부 박탈당했습니다. 큰 부자가 거지가 되었다는 것은 감당키 어려운 고난입니다.
두번째로는 가정을 잃어버립니다. 욥에게는 10남매의 아들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 딸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릅니다. 전국에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들들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로서 참으로 대견스러운 아들, 딸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 딸들이 집이 무너짐으로 하루아침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번째로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즉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기왓장을 가지고 긁어도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못 고치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건강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욥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중에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나를 연단하기 위한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감당키 어려운 이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여 나를 키우고 내 믿음을 정금같이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정금이어야만 귀하게 쓰여지지 않습니까? 욥은 이런 의미에서 연단자체, 고난자체를 은혜로 여기고 그 은혜 가운데 자리를 굳게 잡고 버티어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때 흔들리거나 자리를 옮겼다면 욥은 실패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에서 12절을 보십시다.
여기에서 베드로전서를 언제, 누가, 왜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쓸 때 평안한 가운데 우리처럼 마음놓고 예수 믿으면서 쓴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말년에 그것도 예루살렘에 있을 때가 아니라 로마에 가서 카타콤에 숨어 교인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쓴 것입니다. 그때는 네로 황제가 아주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할 때입니다. 그 당시 건성으로 믿던 사람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사람은 전부 살림을 정리하고 카타콤으로 들어갔습니다. 국제적으로 흩어진 유대인들 그리고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고난은 첫번째로 자기 동족 유대교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로마 황제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배교하는 사람은 교회를 떠나갔지만 정말 죽어도 믿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은 너무 고난이 막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처럼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베드로전서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보면 인사가 끝난 다음 천국의 소망을 역설한 끝에 6절과 7절에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서신 첫 부분에서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금을 연단하는 것과 똑같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난 자체가 고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연단이요, 그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것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비하면 잠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난받고 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케하고 굳세게하고 강하게하고 터를 견고케 하리라는 겁니다. 즉 연단이 곧 은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연단하사 정금같이 키워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이므로 이 은혜 가운데 자리를 잡고 고난 중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거기에 자리를 잡고 그 자리에서 승부를 보라는 뜻입니다. 즉 승리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받는 성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기 어렵습니까? 심지어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지고 나오신 분들은 없으십니까? 그러나 저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고난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유익하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으시고 연단의 결과는 꼭 은혜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 가운데 굳게 서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교제의 은혜 (13-14상)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눈을 감고 태어납니다. 몇 일을 지나고 나면 눈을 뜨게 되는데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어린아이는 엄마와 더불어 사귀면서 또는 보면서 들으면서 자랍니다. 그래서 먼저 배우는 말의 첫마디가 "엄마"입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를 알아보고 형제를 알아보고 가족 식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보고 듣고 배우면서 자랍니다. 이 어울림의 교제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런 교제가 없는 어린아이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러므로 교제는 은혜요, 복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어린아이가 걷고 뛰어 다니게 되면 집안에만 있습니까? 골목에 나가서 앞집, 옆집, 뒷집 친구들을 불러내고 함께 어울리면서 자랍니다.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내 집에서 못 보던 것을 보고 들으면서 배우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제는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고 우리 성도들은 교회에 나왔다하면 교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지내야 합니다. 그 결과 ‘나 혼자 잘 믿는 줄 알았더니 저 분은 저렇게 믿는데 나보다 더 잘 믿네’라고 하면서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나에게 은혜가 되고 또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교회에서 나 혼자 예배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로 고백이 될 때 성도의 교제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교제 속에 우리는 자리 잡고 굳게 서서 살아가는 동안에 은혜가 되고 복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에서 14절 상반절을 보면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베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는 말씀은 로마에 있는 교회가 흩어진 나그네들의 교회에게 문안한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 대 교회의 문안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아들 마가도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즉 개인 대 교회의 문안 인사입니다. 이어서 너희들도 피차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문안 인사입니다. 여기서 문안이라는 말은 인사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인사한다는 것은 교제하는 것입니다. 인사 없이 어떻게 교제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인사는 하나의 인격의 기본입니다. 인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덜되어도 보통 덜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학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인사할 줄 모르는 학위는 무의미합니다. 교회에서 30년의 믿음생활을 자랑해도 인사할 줄 모른다고 하면 교인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사도 하지 않는 상황인데 어떻게 교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사를 잘하고 또 정중히 하시면서 교제가 이루어질 때 거기에서 얻는 것과 배우는 것이 많아 결과적으로 덕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 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교회에 나왔다 하면 혼자만 예배드리고 가지 마시고 오후예배도 드리고 구역예배도 같이 드리고 서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 함께 어울려 교제할 때 여러분들의 믿음에 큰 도움이 되는 은혜의 자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가르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평강의 은혜 (14하-)
다윗은 자기는 어미 품에서만 평안함을 얻는 젖뗀 아이와 같다고 시편 131편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젖을 떼면 얼마나 허전한지 아십니까? 젖 먹는 아이들은 젖만 실컷 먹여주면 세상은 내가 알바 아니라 하고 마음대로 기어 다니면서 놀고 배고플 때만 엄마를 찾습니다. 그러나 젖을 떼게 되면 너무 허전해서 어머니를 떨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치마 자락을 잡고 어디든지 따라 다니려고 합니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꼭 어머니가 품에 안아 주고 재워줘야 평안히 잠을 잡니다. 젖뗀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만 평안함을 얻습니다. 다윗의 이 고백에서 어머니는 하나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품에서만 평안함을 얻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 하반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였는데 예수님만이 참 평안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천상과 천하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평안의 주인도 예수님입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있으나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다시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만이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참 평안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안은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고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떠나지 마십시요. 예수 안에 굳게 자리를 잡고 있으면 예수님이 자기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일주일 동안도 그리고 평생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평안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은혜에 굳게 서라고 하였습니다. 즉 은혜 안에 자리를 잡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먼저 연단의 은혜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연단을 위함입니다. 연단은 받을수록 복이 되고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교제의 은혜에 굳게 서야만 합니다. 성도는 서로 교통하는 교제 가운데서 배우게 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즉 성도는 서로 교통하는 교제 가운데서 배우게 되고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제의 은혜 가운데 자리를 확실히 잡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의 은혜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평강은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자리를 확실히 잡으시고 주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