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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구용서씨가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진은 한국은행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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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한국은행 |
| 과거사 청산문제를 놓고 정치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초대 한국은행 총재였던 구용서씨가 친일 매국노로 평가되는 송병준씨의 외손자였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콜금리 인하로 네티즌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는 한국은행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친일청산’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최고의 친일가문 출신 구용서가 한은 초대총재라니’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서부터다.
네티즌이 올린 글은 지난 93년 반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친일파 99인-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돌베게 펴냄)의 ‘친일 매국노 송병준’ 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당시 책을 집필한 배재대 강창일 교수(현 열린우리당 의원)는 22일 “구용서라고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지냈던 사람의 아버지는 구연수씨였으며, 그는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사위였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이어 “구연수는 을미사변당시 민비의 시체를 소각하는 일을 감독했던 인물로, 송병준의 추천을 받아 조선총독부 경무관을 지냈는데,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구연수가 유일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구연수의 아들인 구용서는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상대에 입학했고 이후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갔다”면서 “45년 해방된 후 조선은행 부총재가 면직된 후 구용서가 부총재로 임명됐고, 50년 한국은행 개편되면서 초대 한은 총재가 됐다”고 강조했다.
강 의원은 “나라가 해방됐음에도 친일가문의 자손들이 정관계를 비롯해 금융 등 경제고위 관료에도 그대로 앉았다”면서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구용서는 이후 초대 산업은행 총재를 역임했고, 이승만 정권시절에는 상공부장관(58-60년)을 지내기도 했다.
구용서, <조선>을 일본에 1억5000만엔 넘기려던 친일 매국노 ‘송병준’의 외손자
한편 최근 매국노 송병준에 대한 새로운 친일기록들이 연달아 나오기도 했다. 지난 13일 일본 가쿠슈인대학 동양문화연구소가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육성증언을 녹음한 테이프를 해독해 놓은 기록에 따르면 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다로 당시 일본 총리에게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대가로 1억5000만엔을 요구했다.
총독부 전직 관리들은 “송병준이 ‘1억5천만엔으로 이만큼 넓은 토지와 2천수백만명의 인구를 모두 일본의 손에 넣을 수 있다. 조금도 비싸지 않다’며 가쓰라 총리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송병준의 증손자들은 올해초 인천시 부평구 소재 미군부대 일대 토지 3000여평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걸고, 토지 매매계약 등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광복회와 시민사회단체는 “일진회의 주역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지원한 대표적 친일반민족 행위자 송병준의 증손들은 과거에 대해 먼저 속죄하고 각성해야한다”며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다음은 <친일파 99인 (1)-분야별 주요인물 친일이력서> 내용 가운데 ‘매국노 송병준’ 가운데 ‘구용서’와 관련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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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 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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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한국은행 | '해방'이 도리어 '행운'을 가져다 준 친일 가문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宋種憲)이 물려받았다. 그는 '병합' 후에 경기도 양지군 참사(1910∼1913), 중추원 참의(1921∼1933) 등을 지냈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具然壽)로, 그는 을미사변 당시 민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일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귀국한 그는 송병준의 천거로 통감부 경시(警視:총경)를 거쳐, 총독부 경무관으로 경무총감부에서 근무했다. 이것은 경시보다 한 급 위인 경찰 최고의 직급인데,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구연수 한 명뿐이다.
그는 3.1 운동이 나던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경무국장과 거의 맞먹는 경무국 칙임(勅任)사무관을 지냈으며, 1925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직위는 중추원 참의였다.
구연수의 아들, 그러니까 송병준에게는 손자가 되는 구용서(具鎔書)는 1918년 졸업생 105명 중 조선인이 단 2명뿐인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상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25년에 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간다.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더불어 침략기관의 중추부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 직전에 조선은행 오사카(大板) 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을 맡고 있던 그에게 해방은 '고통'이나 '비난'이 아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1945년 11월 10일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星野喜代治)가 면직되면서, 일개 지점장도 못되던 구용서는 하루아침에 부총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1950년 총재로 승진한 그는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은행.금융계의 최고 지위에서 '해방'의 빛을 마음껏 누리던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까지 지내기도 하였다. |
2004/08/22 오후 3:39 |
ⓒ 2004 OhmyNews | |
첫댓글 친일했던자들은 대대로 떵떵거리고 살고 독립운동한 사람과 자손들은 때도 못끓이고 돈이없어 공부도 못하여 직장도 없이 대부분 판자집이나 전전하는 티비 프로를 봤습니다만 그대표적인 케이스같습니다. 독립우동 후손중에 공부한사람을 차관급 이상에 임명키위해 현정부가 인사파일을 관리하고 있는데 그수가
얼마되지 않는다는 뉴스를 접하고 안타까웠는데 정말 이런 불균형을 깨트리기위해서는 그후손중 자격있는사람들을 고위직에 임명을 많이 해야한다고 봅니다. 노무현정부에 그거하나 확실하게 하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좋으신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