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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뱀을 보았다. 아주 이상한 색의 뱀이었다. 낮은 풀들 사이에서 뱀은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것처럼 내 옆을 지나갔다. 뱀이 놀라 뛰어갔을지도 모른다. 다리가 없으면 걸어가는 게 불가능한 것일까. 부드럽고 차가운 아랫배로 걷거나 뛰어갈 수도 있지 않나. 도로 위에는 죽은 뱀들이 한가득하였다. 차에 치여 죽거나, 차에 치인 상태에서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햇빛에 말라 죽었다. 또 내가 알 수 없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별로 알고 싶지 않으나 알게 된 것도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에 의해 죽는 뱀이었다. 궁지에 몰린 뱀은 발악하고, 쏘아보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아무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즐거워하는 모습으로 뱀을 내려다보며 돌멩이를 던졌다. 그래서 뱀들은 대부분 머리가 깨져 죽거나 내장이 터져 죽거나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혀만 내빼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죽어가는 뱀들이 쏟아내는 얘기들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중에 모두 이렇게 죽게 될 거래.
그러면 아이들은 나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뱀처럼 목숨을 구걸하지는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빌고 있었다. 아이들이 저만큼 멀어지면 무릎을 탁탁 털며 일어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덤프트럭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겨울부터 이 도로를 걸어 통학하기 시작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있어서 시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큰어머니에게 말한 핑계였다. 사실은 경주 언니 때문이었다. 경주 언니는 여러모로 멋있는 언니였다. 긴 속눈썹과 볼에 있는 점, 큰 키와 넓은 어깨. 누구나 언니가 운동장에서 축구나 발야구 하는 모습을 본다면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언니는 남자애들에게 밀리지 않고 골을 넣거나, 운동장 끝에서부터 공을 차올려 축구 골대 근처까지 날려 버리곤 했다. 나는 첫눈에 경주 언니에게 반해 버렸고, 항상 언니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만을 꿈꾸었다. 그때, 눈이 오던 날에도 똑같았다. 나는 한 마디라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언니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언니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있었고, 시야를 가릴 만큼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정류장을 지나쳐 도로의 갓길로 걸어가고 있는 언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달려가서 먼저 말을 걸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녕! 하고 인사해 볼 수도 있었겠지. 부끄러워서 망설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간간이 언니의 붉은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듯 집중해서 걸었을 뿐이다. 이제 경주 언니는 중학생이 되었고, 읍내에 있는 학교에 갔다. 버스를 타고 갔다. 그래서 도로에는 아이들, 덤프트럭, 버스만 다녔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도로 위에는 햇빛이 쏟아졌다. 햇볕은 너무 뜨겁고, 그것이 아이들을 열 받게 하였다. 열 받은 아이들은 뱀을 죽였다. 뱀을 죽이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
나는 남이면 수수리에서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살았다. 번지수는 688번지.
집 뒤로 커다란 밤나무가 있고, 밤나무 뒤로 묘지가 서너 개 있었다. 큰 묘지, 작은 묘지, 아주 작고 볼품없는 묘지, 반듯하게 잘 깎인 묘지, 껑충껑충 풀이 자란 묘지, 돌로 뒤덮인 묘지. 아이들이 끼워줄 때는 묘지들 틈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형제이거나, 자매이거나, 남매이거나 했기 때문에 봐주기도 하는 모양으로 놀았다. 나만 얄짤없기 때문에 나는 숨을 때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묘지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가 지자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돌 묘지 틈에서 눈을 홉뜨고 있었다. 나가면 무조건 술래였다. 술래가 되면 아무도 찾지 못하리라. 아무도 찾지 못하면, 계속 술래인 채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내 머리 위에 앉았다. 나는 졸지 않기 위해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뜨자 큰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었다. 나는 두 팔로 큰아버지의 굵은 목을 감싸 안았다.
자꾸 거기서 놀면 못써.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등에서 울림으로 전해졌다. 나는 짚 냄새와 솔 냄새, 돼지 똥 냄새로 범벅된 큰아버지의 등에 머리를 박고 대답했다.
애들이랑 숨바꼭질하고 있었어요.
마루 위에 나를 내려놓고 큰아버지가 큰어머니에게 말했다.
얘가 자꾸 귀신이랑 노는 것 같아.
그러나 큰아버지는 진짜 귀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집에서 수요예배가 있었다. 전도사님이 참석했고, 마을 노인들이 할머니의 방에 둘러앉았다. 전도사님 역시 노인이니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거의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글을 읽지 못하나, 가사 한마디 틀리지 않고 찬송가를 불렀다. 노인들 모두 마치 주문처럼, 높낮이가 불분명하게 찬송가를 불렀고, 간간이 외쳤다.
주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는 예배가 끝나면 먹을 수 있는 외제 쿠키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묘지를 파고 안으로 들어갔고, 축축한 흙의 느낌이 온몸을 전율시켰기 때문에 눈을 떴다. 그때 본 것은 나를 내려다보는 노인들의 얼굴이었다. 노인들은 나를 둘러싸고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날 위해 기도하는 중일까. 노인 중 누군가의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차갑고, 까칠했다.
어둠 속에서 이 어린양을 구원해 주시옵고.
내 발등을 무릎을 손목을 아랫배를 잡았다.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덮쳐왔고, 나는 손가락 사이로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노인들은 돌아가며 한마디씩 외치기 시작했다. 노인들의 소리는 묘지의 흙처럼 축축하게 나를 덮었다.
큰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했다. 밥상은 검은색이고 자개 무늬로 꾸며져 있었다. 겨울 동안에는 내내 토끼 고기만 먹었다. 토끼는 두 귀를 잡힌 채 집으로 들어왔고, 처마 밑에 매달린 채 단단하게 굳어갔다. 겨울의 처마 밑에는 고드름, 토끼가 있었고, 그것은 무슨 부호처럼 느껴졌다. 고드름, 토끼, 고드름, 고드름, 토끼, 고드름, 고드름, 토끼, 토끼, 토끼……. 때때로 토끼는 가죽이 벗겨진 채로 매달려 있기도 하는데, 양손을 모은 모양이어서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겨울에는 까맣고 까만 밤들이 계속되었다. 큰어머니는 그 밤마다 토끼를 가지고 저녁을 차렸다. 무를 썰어 넣고 국을 끓이거나, 고추장을 넣고 볶거나, 찜 솥에 몇 마리씩 삶아내기도 했다. 겨우내 내린 눈만큼이나 자개 무늬로 꾸며진 밥상 위에는 토끼 뼈가 수북하게 쌓였다. 할머니는 토끼 고기를 입에 담고 오물오물 씹는 시늉을 하다가 삼켰다. 할머니는 될 수 있는 대로 다 삼켰다. 밥, 김치, 달걀, 장조림, 마늘장아찌, 고등어, 모두 모두 삼켰다.
봄과 초여름 사이에는 개구리를 먹었다. 나는 개구리의 쫄깃한 뒷다리와 배에서 가득 나오는 검은 알들을 먹었다. 이 사이 사이에 으깨진 검은 알들이 끼어 있어서 일부러 입을 벌리고 웃었다. 웃으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우리 주 예수님,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개구리를 너무 많이 먹어 개구리처럼 입이 커지고, 목청도 좋아지고, 혀도 길어졌다. 토끼를 먹을 때는 높이뛰기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개구리를 먹고 나니 장사꾼, 사기꾼, 가수가 되고 싶었다.
여름 밥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수박이었다. 이것도 나름의 부호가 있었다. 수박, 옥수수, 옥수수, 수박, 수박, 수박과 옥수수……. 밥상 위에 쌓인 수박 껍질이 뱀 무늬처럼 보여서, 나는 밥상 위에 수박을 게워내고 말았다. 김칫국물 같은 것이 줄줄줄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또 뱀을 죽였고, 그래서 수박 껍질이 죽은 뱀 같았기 때문이다. 큰어머니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중환자 둘을 모시지, 내가.
할머니는 다음 날부터 더 빨리 삼키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흘러내릴 틈이 없게 하기 위해 입에 넣자마자 삼켰다.
걸어다니는 것, 뛰어다니는 것, 날아다니는 것, 모두 모두 검은색 자개 밥상 위에 올라왔다. 뿌리째 올라오거나, 뿌리만 남겨둔 채 올라오기도 했다. 밥상 위에 올리기 위해, 비와 햇빛과 바람이, 그토록 수고하고 있는 와중에 검은색 자개 밥상은 모서리가 깨지고 말았다. 밥상이 깨지는 순간, 먹이 피라미드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았다. 식물, 곤충,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로 쌓인 피라미드에서 밥상은 새벽 무렵의 하나 남은 별처럼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밥상은 한순간에 발라당 뒤집혀서 모든 음식을 내쳐버렸다. 나는 너무 쉽게 뒤집힌 밥상을 보며 배신감을 느꼈다. 밥상을 뒤집은 큰아버지 역시 적잖이 놀란 모양으로 벌건 얼굴을 쓸었다. 할머니는 그 순간에도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켰다. 삼키는 소리가 재생 버튼이 된 듯이 꼼짝없이 앉아있던 큰어머니가 깨진 접시를 줍고 음식물들을 담았다.
못살아, 내가!
큰어머니가 소리를 팩 질렀다. 큰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해가 떠 있었다. 큰아버지는 밥상이 부서졌기 때문에 술을 마실 것이다. 그다음에는 큰어머니가 못살겠다고 해서 술을 마실 것이고, 그 술이 또 술을 불러 큰아버지를 친구들 곁으로 데려갈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큰아버지의 친구 둘이 죽었다. 큰아버지의 죽은 친구들 중의 하나가 경주 언니의 아버지였다. 경주 언니의 아버지는 트럭을 끌고 저수지로 들어가 죽었다. 또 다른 사람은 낫으로 자신의 목을 베고 죽었다. 농약을 먹고 죽으려 한 사람도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불을 낸 사람은 집만 태워 먹었고, 목을 매단 사람은 공중에서 소변만 보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비읍과 시옷이 들어간 글자만 보아도 침을 뱉었다.
버스, 불신, 병신, 분신, 번식, 밥상.
이게 모두 다 버섯 때문이었다.
버섯은 한순간에 우리 마을로 들어왔다. 버섯이 오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벼농사를 짓고, 깻잎을 키우거나, 고구마, 감자를 심었고, 남아도는 땅 언저리마다 호박과 가지를 키웠다. 그것은 너무 평화로웠고, 그 말은 ‘6시 내 고향’ 같은 프로에는 나오지도 못하는 마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뿐인가. 지역적으로 이도 저도 아닌 마을은 선거철이 한창일 때도 등장하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의 투표권에 대해 무관심했다.
이번에 1번 찍었어. 같은 성씨잖아.
선거가 끝나면 마을은 조용했지만 ‘6시 내 고향’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블루베리나 알로에, 브로콜리에 관해 떠들었다.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해 먹어보기도 하고, 새싹 채소를 시범적으로 길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이야기 속에서 어느 날, 봉긋하게 버섯이 솟아났다.
마을 사람들은 먼저 빚을 내, 거대한 봉분 같은 버섯 하우스를 만들었다. 하우스는 안으로 들어서면 온몸에 침샘이 생긴 것처럼 축축했고, 죽은 나무들은 시옷 모양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마치 두려운 듯, 홀로 남아 있는 게 무서운 듯, 두 개의 나무토막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 서 있었다. 처음에 버섯은 분명 훌륭한 것이었다. 경주 언니의 아버지 말에 의하면 버섯을 먹고 송장이나 다름없던 이가 살아났다고 했다.
여기 봐라, 여기. 내가 밑줄을 쳐 놓았어요. 병원에서도 내쫓겨 나온 말기 암 환자가 있는데, 저승 문턱에서 버섯을 먹고 이승으로 되돌아왔다지 뭐냐.
경주 언니의 아버지는 낡고 오래된 책을 차르르 넘기다가 자신이 밑줄 쳐 놓은 부분이 나오면 나와 큰아버지 앞에 들이밀면서 말했다.
불로장생의 다른 말이 버섯이라잖아, 이 사람아.
그런데 왜, 이토록 훌륭한 버섯은 한순간에 경주 아버지를 삼켜버린 것일까. 문제는 ‘6시 내 고향’이 아니라 ‘소비자 출동’이었다. 식당의 청결함을 검사하는 프로그램에서 빵점을 맞은 식당은 하필 버섯 요리 전문점이었고, 경주 언니의 아버지 얼굴이 부착된 버섯 상자가 화면에 나왔던 것이다. 식당에 출동한 공무원은 경주 언니의 아버지가 누렇게 변색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상자 속에서 오래되어 형체가 무뎌진 버섯 한 다발을 발견했다. 그 장면은 너무 짧아서 큰어머니가 저거, 경주 아버지 아니야? 라고 말했어도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빨리 패나 돌려, 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경주 언니의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그 시간이 경주 언니의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돈도 없고 빚도 없던 시절은 경주 언니의 아버지와 함께 묻혔다.
이제 민둥산 같은 무덤 두 개가 더 생겼으니, 숨을 곳이 늘어났다.
*
밤이 되었는데도 매미는 미안- 미안- 하고 울어댔다. 나는 큰어머니의 머리맡에 앉아 흰머리를 뽑았다. 큰어머니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으나 잠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동네에서 빚 없는 집은 우리밖에 없어. 흰 머리 많이 뽑으면 내가 대학도 보내 줄게.
큰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고 웃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큰어머니의 얼굴이 거꾸로 보여서 벌린 입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텔레비전 소리에 집중하며 흰 머리를 하나하나 뽑아 갔다.
큰아버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버섯 농사를 짓는 대신에 돼지를 키워서 빚이 없었다. 경주 언니의 아버지가 버섯을 종교처럼 받드는 책을 볼 적에 큰아버지는 종교처럼 돼지를 받들어 빚이 없었다. 비닐로 하우스를 만드는 대신에 축사를 세웠고, 버섯을 따는 대신에 인삼을 넣고 사료를 배합했기 때문에, 남아도는 시간마다 자꾸자꾸 쌓이는 돼지 똥을 치웠기 때문에 빚이 없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큰아버지가 서커스 공연장 같은 하우스를 만들고, 버섯을 키워서, 감당하지도 못할 빚을 졌다면 밥상을 뒤엎지 않았을 것인가. 빚보다 어마어마한 양의 돼지 똥이 더 무서웠다면 어땠을까. 경주 언니의 아버지를 묻고 온 날, 큰아버지는 밥상을 뒤엎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큰어머니와 화투를 치던 이들은 모두 읍내의 식당으로 일하러 나갔다. 새벽 첫차를 타고 나가 막차로 돌아왔다. 막차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이 넘실넘실 다리를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큰어머니는 마루 위에서 까치발을 한 채, 돌아오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빚이 없어.
큰아버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 노인들은 회관 앞에 모여 혀를 끌끌 찼다.
젊은 놈들이 갔으니 농사는 누가 짓나 모르겠네. 땅을 놀리면 벌 받는 법이여.
노인 중 한 사람이 펴들었던 찬송가를 접고 곡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마시고 홍학처럼 붉어진 노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굽은 등을 덩실거렸다. 곡소리에 매미들이 울음을 그쳤고, 가로등이 켜지자 도깨비처럼 불쑥, 노인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마주 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그림자끼리 섞여 주인을 놀려먹듯 낄낄낄, 웃어 젖히기도 했다. 교회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노인들의 곡소리는 밤새 계속되었다.
저기 슈퍼 가서 술 좀 사 올래?
경주 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큰아버지를 찾으러 나왔다가 경주 언니를 만났다. 경주 언니를 따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경주 언니의 친구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쓰러진 나무토막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여전히 버섯이 달린 것도 있었다. 달린 버섯의 모양이 젖꼭지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무토막은 젖꼭지가 여덟 개나 열 개쯤 붙어 있는 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경주 언니는 길게 침을 뱉었고, 나에게 말했다.
돈 줄 테니까 소주 하고 맥주 좀 사다 줄래? 대충 둘러대고.
그래서 몇 번 심부름했다. 나는 경주 언니와 친구들이 낄낄대는 게 좋았다. 큰어머니가 수면제를 삼키고 잠드는 것을 보는 것보다. 수면제를 삼키기 전에 두 눈을 감고, 예쁜 옷을 사주겠다고, 뭔가를 잔뜩 사주겠다고, 중얼거리는 것보다. 방학하니 마을 애들은 저희끼리 물놀이를 했다. 나에게는 항상 깊은 곳에 가보라고 하니, 나는 물놀이를 하는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또 애들은 뭐를 하나. 의사 놀이를 했다. 어른 없는 집에 가서 옷을 벗고 남들의 성기를 뒤적거리는 건데 냄새 나고 재미도 없었다. 또 대부분 내가 환자 역할을 맡고 남매이거나 자매이거나 형제인 애들이 의사와 간호사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나는 거의 누워 있었고, 아이들이 내 성기를 지우개 달린 연필로 뒤적뒤적하는 걸 견뎌야 했다. 또 애들은 뭐를 하나. 뱀을 죽이고, 개를 괴롭히거나, 들과 산에 누웠다. 또 애들은 뭐를 하나. 쏘다녔다. 저녁이 되면 돌아오기 위해 쏘다녔다.
나는 경주 언니의 하우스에 갔다. 햇볕이 따가울수록 하우스 안은 숨이 탁탁 막혔다. 나는 담배를 주면 피우고, 술을 주면 마셨다. 빙빙 돌 정도로 취하면 나무토막에 달린 버섯을 빨다가 잠이 들었다. 잠들었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겁게 눈썹을 올렸다. 경주 언니와 친구들도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비는 하우스의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경주 언니와 친구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방학이어서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지만, 앞으로도 학교에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누워서 빗소리를 들었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반투명한 비닐 너머로 밖 풍경이 뭉개진 듯이 보였다. 오래도록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는 마치 우주선을 타고 어떤 공간을 지나며 미래 같은 곳으로 나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미래. 경주 언니와 친구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미래. 더 멀리. 학교에 가지 않아서, 오토바이를 타고 피자 배달을 하는 미래.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나는 미래. 머리를 꿰매고 병원에 누워 병원비를 걱정하고 있는 미래. 경주 언니가 십팔 세에 엄마가 되는 미래. 아비라는 것은 고작 피자 배달로 육십만 원을 버는 미래. 피자 배달, 치킨배달, 짜장면 배달, 물건 배달, 오, 경주 언니는 한 바구니의 꽃 배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계속 미래로 갔다. 내가 계속 미래로 가니까 모두 훌쩍였다. 경주 언니가 엉엉 울었다. 엉엉 울면서 나무를 발로 찼다. 나무를 계속 차니까 발이 아파서 또 울었다. 나는 하우스를 운전해서 계속 미래로 갔다. 모두가 청약부금을 다 채워 십오 평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까지, 자동차를 이리저리 굴리는 날까지, 빚을 다 갚는 날까지. 무슨 빚이든. 빚이란 빚은 깡그리 사라진 날까지.
*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고, 밀린 일기를 써야 했다.
큰아버지는 돼지와 함께 산다. 밥도 돼지와 먹고, 잠도 돼지와 잔다. 돼지가 킁킁거리며 잠든 큰아버지를 밟고 다닌다. 큰아버지는 돼지가 자신을 밟고 간다고 좋아한다. 꿈인 줄 아는 것 같다.
큰어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마루에 나와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 매일 저녁마다 마루에 나와 사람들이 다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추를 한 가마니 채운다고 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리를 지으러 갔다. 오이를 한 상자 채운다고 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지으러 갔다. 시멘트를 만들고, 벽돌을 운반하고, 못질을 하였다. 햇빛이 강렬하게 쪼아대고 있는 순간에도, 삼십 층 높이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에이, 콱, 뒈져버리자, 수십 번 다짐하는 순간에도, 뚝딱뚝딱, 쾅쾅쾅, 계속 만들어졌다. 그런데 빚은 버섯 농사를 지은 농부들에게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아파트는 다 만들어졌지만 농부들은 돈을 받지 못했다. 회사 사장도 빚이 있었다. 회사 사장의 사장도 빚이 있었다. 아파트 입주자도 빚이 있었고, 모든 건 빚으로 만들어졌다. 농부들은 현수막을 내걸고, 땅바닥에서 잠들었다. 길고양이가 무심하게 농부들 곁을 지나쳐 아파트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가볍게, 어디든 달아났다. 가볍게, 어디든, 달아나기 위해 농부 중 한 명이 몸에 불을 질렀다.
이제, 인터뷰 연습이나 하자.
기자들이 찾아왔다. 텔레비전에도 방송됐다. 마을 노인들은 아홉 시 뉴스에 아는 사람이 나왔다고 좋아했다.
방학은 짧은 것 같은데, 밀린 일기는 써도 써도 계속 써야 했다.
다리를 지으러 간 농부들, 공장에 취직한 농부들, 돈 같은 건 만져보지도 못한 농부들. 그들은 길바닥으로 내몰린 채 소리쳤고, 아주 잠깐 울었다가, 어둠이 오자 촛불을 밝혔다. 그러나 일을 시킨 곳은 있으나 돈을 주는 곳은 없었다. 텔레비전 출연으로 아파트를 지은 농부들이 간신히 얼마의 돈을 받아내자 그들에게도 분신의 그림자가 뱀처럼 기어왔다.
불을 질러야 해. 누가 할래?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는 버섯 농사에 성공하면 아가씨를 얻어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가씨는커녕 어머니의 얼굴도 보기 어려워졌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라이터를 켰고, 담배를 두 개비 피웠다. 다시 라이터를 켰다. 침대 공장에서 일하며 굳어진 엄지손가락은 아무리 라이터를 켜도 닳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라이터를 켰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겁이 났고, 화가 났고, 뭔가 억울해져서, 불씨를 공장으로 던져 버렸다. 공장 안에는 출하를 앞둔 침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의 편안한 밤을 위해 만들어진 침대들이 불타올랐다. 불타는 공장을 보며, 그는 누군가의 완벽한 세계를 망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장이든 누구이든, 두 발을 뻗고 잠드는 인간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날 밤, 그는 깊은 잠을 잤다. 아주 달콤했다.
온종일 마루에 엎드려 일기를 썼다. 큰어머니가 나를 보며 그러다 뱀이 되겠네, 했다.
잠자리들이 낮게 날았다. 너무 낮게 날아서 얼굴에 부딪칠 정도였다. 떠났던 사람들은 잠자리 떼를 헤치며 돌아왔다. 나는 경주 언니와 그 친구들과 함께 하우스 안에서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다시 올 거야, 우린.
경주 언니의 친구 중 누군가 말했다.
우린 분명히 망해서 돌아오겠지. 망하지 않으면 돌아올 필요도 없으니까.
나무토막들 사이로 오줌을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데 실패한 것만 같아. 완전 거지라서 이 더러운 하우스 안에서 사는 것 같아.
경주 언니의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을 했다. 다만 경주 언니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공장에 불을 지른 농부는 큰아버지를 찾아왔다. 큰아버지 곁에 있던 돼지들이 농부를 노려보았다. 그는 큰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월급을 달라고 애원할 때는 보이지도 않던 사장이 공장에 불이 나자 찾아와 그를 고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때렸다. 텅텅 울리는 소리가 축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새끼 돼지를 받고 있을 뿐이었다. 누워있는 어미 돼지는 마치 커다란 소파처럼 보였다.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큰아버지의 등이 땀으로 얼룩졌다. 돼지는 불안한 듯 몸을 떨기 시작했으나 순조롭게 출산을 마쳤다. 큰아버지는 총 아홉 마리의 새끼 돼지를 받았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돼지들이 꿈틀거렸다. 큰아버지는 개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돼지를 골라 농부에게 내밀었다.
나도 이거 하나로 시작했지.
새끼 돼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농부를 바라보았다. 농부는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안고 축사를 내려왔다. 다시 아가씨를 얻을 꿈을 꾸었다. 농촌에 살 만한 참한 아가씨를 얻어 돼지처럼 자식도 많이 낳으리라. 농부는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는 순간에도 생각했다. 창고마다 대추와 사과, 복숭아를 잔뜩 쌓아 놓으리라. 라이터에 붙은 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농부는 자신의 가슴으로 불을 안았다. 사장은 모든 책임을 농부에게 넘겼다. 공장에 불을 지른 농부는 이제 자신의 동료로부터 비난받기 시작했다. 새끼 돼지 한 마리로는 아무것도 처리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만 농부는 오랫동안 불 속에 있었다. 불 속에서 농부는 집과 땅을 빼앗은 빚을 꼭꼭 씹어 먹었다. 당장은 가질 수 없지만 미래에 갖게 될 작은 소망들을 모조리 압류한 빚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농부가 자신의 모든 빚을 다 먹고 나자, 눈앞에 아가씨가 나타났다. 아가씨는 웃으며 불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걸어 들어와 농부를 안았다. 그 품이 너무 따뜻해서 농부는 와락 주저앉았다.
농부가 죽자 나타난 사장은 공장을 다시 짓는 데 밀린 월급을 쓰겠다고 말했다. 공장에서 일했던 농부의 동료들은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 훗날 경주 언니와 그 친구 중 누군가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고 똑같은 일을 겪었다. 그들이 하우스를 떠날 때, 어렴풋이 예상하던 일이었다. 경주 언니와 친구들은 불현듯 떠났다. 도둑질 게임을 했고, 제일 근사한 것을 훔쳐오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는 큰아버지의 축사에서 새끼 돼지를 훔쳐왔고, 다들 컵이나 신발, 양장본 동화책, 토마토, 수건, 햄스터 같은 것을 훔쳐왔다. 그리고 역시 멋진 경주 언니는 오토바이를 훔쳐왔다. 낡고 오래된 오토바이는 한여름인데도 덜덜덜 떨고 있었다. 경주 언니와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에워쌌다. 마치 오토바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를 운전할 사람은 금방 정해졌고, 언니는 훔쳐 온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경주 언니에게 다가가 새끼 돼지를 내밀었다. 어미 곁에서 떼 온 새끼 돼지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촌스럽게. 그걸 어디서 키우니?
경주 언니가 말했다. 나는 오토바이를 막은 채 간신히 대답했다.
잘 키우면 집을 살 수 있을 거야.
경주 언니와 그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차라리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지 그랬어?
경주 언니는 새끼 돼지를 받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빠르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사람의 허리를 부여잡은 단단한 주먹이 보였다.
버스나, 기차, 또 다른 오토바이를 타고 모두 떠났다. 분신자살을 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하는 동료를 지켜보기 위해, 병신 같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가여운 자식들을 낳기 위해, 슬픔에 겨워 걸레질을 하기 위해, 미래로, 미래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미래로, 미래로, 떠났다. 정말로 떠났다.
나는 그들처럼 작게 솟은 가슴과 거뭇거뭇한 털이 없었기 때문에 새끼 돼지를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
할머니가 드디어 밥알을 흘렸다. 할머니는 턱에 힘을 주고 입을 꼭 다물었으나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은 없었다. 큰어머니는 엉엉 울었다.
아이고, 이제 내가 똥 기저귀까지 빨게 생겼네!
할머니는 멀쩡하게 화장실을 오가지만 큰어머니가 우는 바람에 기운이 빠져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할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온 오줌이 내 스커트를 적셨다. 오랜만에 아침을 먹으러 들어온 큰아버지가 문지방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큰어머니가 큰아버지를 보며 두 손으로 코를 막았다. 할머니와 나도 코를 막았다.
아유, 이 냄새. 그나저나 이 양반이 미쳤나. 어디다가 옷을 벗어놓고 다니는 거예요?
큰어머니가 물었으나 큰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네 발로 꼿꼿이 선 채 한동안 들창코를 들어 밥상을 향해 킁킁거렸다. 밥상에 둘러앉아 있던 큰어머니와 할머니, 나는 숨죽인 채 큰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큰아버지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큰아버지는 큰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서서 앞에 놓인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큰어머니는 큰아버지의 분홍빛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많이 먹어요. 잔뜩 먹고 없는 빚도 갚을 수 있도록 돈을 벌어요.
할머니는 입안에 남아있던 밥을 자신의 손바닥에 뱉어내며 말했다.
몸을 놀리면 벌 받는다. 어차피 죽으면 가루약처럼 되고 말 거 아니냐.
큰아버지는 바닥에 고인 오줌을 깔고 앉아 뭔가를 계속 입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을 큰아버지 앞으로 밀어 드렸다. 큰아버지가 밥상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꿀꿀.
나는 수줍게 대답했다.
네, 밥 많이 먹고 더 클게요.
나는 오줌에 젖은 스커트를 입은 채 가방을 메고 집을 빠져나왔다. 아침부터 햇빛은 아스팔트를 달구어 놓았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앞서 걸었고, 뱀을 두 마리 죽였다. 나는 학교에 도착해서 방학 숙제로 해 온 일기장을 꺼내놓았다. 다른 숙제는 한 것이 없었다. 개학식을 하기 위해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다. 국민체조의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교실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반투명한 유리 너머로 아이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킥킥 웃어대는 소리가 국민체조의 음악 소리와 함께 섞였다. 나는 의자를 집어와 문을 향해 던졌다. 문에 붙어 있던 유리창이 깨지고 파편들이 문밖과 안쪽에 흩어졌다. 깨진 자리로 햇빛이 들어왔다. 나를 달구었다. 나는 허물을 벗었다. 기어서 문을 넘어갔다.
ㅡ 201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첫댓글 5,60년대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묘사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웃집의 가정사뿐만 아니라 부엌의 살림살이까지도
훤히 알고 지넬 때였지요.
그래도 그때에는 인정이란 것을 느끼고 살았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