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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의 강의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강의에는 유명하고 뛰어난 학자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창밖에서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지금도 전해져 올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그 역사적 강의의 내용을 엮은 것으로, 시간에 대한 그의 혁신적 통찰을 기반으로 서양 철학의 역사 전체를 반성한다. 대표적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의 6인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루며, 시간과 지속이라는 맥락에서 서양의 고대 철학과 근대 철학의 핵심적 특징을 펼쳐낸다. 따라서 이 책은 베르그송의 탁월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만의 뛰어나고 섬세한 시선으로 풀어낸 서양철학사이기도 하다.
저자 소개
앙리 베르그송
20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 1859년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영국으로 이 주한 가족과 떨어져 홀로 프랑스에 남은 베르그송은 기숙학교 생활을 하며 다양한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뽐낸다. 장 조레스, 에밀 뒤르켐 등과 같은 해에 고등사범학교(ENS)에 진학한 뒤에는 스펜서의 진화론에 심취하여 과학철학에 매진하나, 클레르몽-페랑에서의 교사 생활 도중 과학적 시간 개념의 불충분성을 발견하고는 공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정한 시간인 지속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1889년 시간과 자유를 주제로 한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을 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896년 심신문제를 다룬 『물질과 기억』을 잇따라 출간하여 이름을 알린 베르그송은 1900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임용되고, 1907년에는 생명과 진화의 문제를 다루는 『창조적 진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1914년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프랑스의 외교 사절로 영국, 미국, 스페인 등 다양한 나라에 방문하고, 전쟁 후에는 국제 연맹 산하의 국제 지식인 협력 위원회(유네스코의 전신) 의장을 역임하는 한편 192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1925년 과로로 인한 류머티즘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해진 상황에서도 1932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과 같은 저작을 통해 임박한 전쟁의 위협을 경고하였던 베르그송은 결국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목격하고, 1941년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폐렴으로 쓸쓸히 숨을 거둔다.
목차
옮긴이 서문 5
첫 번째 강의 - 1902. 12. 5. 1 … 7
두 번째 강의 - 1902. 12. 12. … 47
세 번째 강의 - 1902. 12. 19. … 77
네 번째 강의 - 1902. 12. 26. … 105
다섯 번째 강의 - 1903. 1. 9. … 135
여섯 번째 강의 - 1903. 1. 16. … 163
일곱 번째 강의 - 1903. 1. 23. … 189
여덟 번째 강의 - 1903. 1. 30. … 221
아홉 번째 강의 - 1903. 2. 6. … 249
열 번째 강의 - 1903. 2. 13. … 281
열한 번째 강의 - 1903. 2. 20. … 313
열두 번째 강의 - 1903. 2. 27. … 341
열세 번째 강의 - 1903. 3. 13. … 375
열네 번째 강의 - 1903. 3. 20. … 409
열다섯 번째 강의 - 1903. 3. 27. … 443
열여섯 번째 강의 - 1903. 4. 3. … 471
열일곱 번째 강의 - 1903. 4. 24. … 503
열여덟 번째 강의 - 1903. 5. 1. … 535
열아홉 번째 강의 - 1903. 5. 8. … 571
책 속으로
어떤 연속적인 실재, 가령 어떤 운동의 연속성을 개념에 의해 인식하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다’나 ‘아니다’에 의해 대답될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언제나 이 연속적인 전개 과정상의 어느 지점(시점) 위에서입니다. 운동의 연속성은 이 지점과 관련해서 성립하는 이러한 ‘이다’와 ‘아니다’의 양분兩分을 언제나 벗어나는 것이지요. 개념에 의한 인식은 그러므로 불연속적인 것으로서, 실재의 연속성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이 있으니, 그것은 개념에 의한 인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의한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개념에 의해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관념들을 가지고서 실재에 다가가면서, 이 관념들이 짜놓은 틀 중의 어느 것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실재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113쪽)
어떤 사물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그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게 됩니다. 모든 생성, 모든 변화가 만약 정말로 비논리적인 것(로고스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며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은 비실재적인 것이라면, 변화나 생성은 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변화나 생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한갓 미망이라는 결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이었고 엘레아학파의 결론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논리와 가지성可知性(지성에 의한 이해가능성)을, 그리고 특히 완벽한 표현가능성이라는 것을 발견해 낸 철학자들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즉 절대적인 정확성의 조건이라는 것을 언어 속에서, 그리하여 또한 논리 속에서 발견해 냄으로써, 이러한 발견에 도취되어, 논리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즉 단순한 논리의 적용에, 정확한 담론의 적용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린 철학자들이 도달해 간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변화의 존재를 부정하는 생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속이라는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시간 일반을 부정하는 생각 말입니다. (152쪽)
우리는 시간의 발생을 해명하고 있는『티마이오스』의 몇 안 되는 구절들을 읽고 해설했습니다. 물론 시간의 문제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처음에 보이는 것보다는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에 대한 이론이 일단 한번 구성되고 나면, 그다음에 등장하게 되는 커다란 문제가 바로 어떻게 이데아로부터 사물들로 나아가게 되는 이행이, 즉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행이, 이루어지느냐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이 순전히 신화적이기만 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해법은 그저 상징들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에서 결코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게 되면 벌써 이 문제는 앞자리를 향하여 나오게 되어, 비록 아직까지도 제일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렇게 되기까지 목전에 이르렀을 만큼 중요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313쪽-314쪽)
언어든 이데아들 자체든, 여하간에 이러한 것들이 진리의 비장처라는 생각은 명백하게든 암묵적으로든 고대 철학 속에 항상 있었으며, 그러므로 고대 철학 전체 속에서 이처럼 이미 구비되어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것들을 물리치는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미 구비되어 있는 관념들 같은 것을 이처럼 물리치고 나서, 데카르트는 그 자리에 무엇을 대체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어떤 행위, 어떤 활동을 그것에 대체하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행위 혹은 활동을 진리의 밑천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행위가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행위가 그의 모든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의식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의식은 영원 속에서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의식은 시간적인 어떤 것인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사유함을 의식하게 되고 또한 그와 동시에나 자신의 존재함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즉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자, 바로 이것이 데카르트의 출발점입니다.(509~510쪽)
칸트에게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은 공간적인 어떤 것, 공간과 아주 비슷한 어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칸트의 견지에서 보자면, 라이프니츠는 한편으로는 예정 조화의 방법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즉 실제로 있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끌어들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을 한갓 혼잡한 지각일 뿐인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번에는 자신의 밑천이 있어야 할 것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수 논리학과 수학 사이에 있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에게 어떤 실재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이제 보편적인 기계론을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공리만을 갖고서, 따라서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인 과학의 필연성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에게 어떤 실재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통해, 이 하나이고 통합적인 과학이 어떻게 그리고 왜 수학적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보여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594~595쪽)\
출판사 서평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전설이 된 강의”
시간의 본모습, ‘지속’으로 서양철학사를 반성하다
프랑스 지성계의 자랑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의 강의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강의에는 유명하고 뛰어난 학자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인들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강의실에 들어서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창밖에서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지금도 전해져 올 정도로 말이다. 삶에 치이고 쫓기며 숨 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의 철학에 대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왜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철학적 진리의 열쇠,
세계 근본 형식으로서의 시간
철학이란 어려운 것이다. 말로는 세계의 근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란 어렵다. 다시 말해, 무엇을 묻고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세계의 어느 한 귀퉁이만 건드리는 사소하고 한시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을 벗어나,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철학을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을 물어야만 이 근본적인 진리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지의 문제부터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분명치 않은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피할 수 없이 적용되므로, 우주의 모든 것이 펼쳐지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형식이다. 이 근본 형식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철학이 소망하는 근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시간은 공간이 아니다
시간의 본모습 ‘지속’
베르그송이 철학사상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그가 시간에 대해 매우 혁신적인 생각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멍들게 했던 수많은 난제들을 성공리에 해결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대체 무엇이지, 세계와 우리 삶의 참모습을 밝혀낼 수 있는 비밀이 시간이 공간과 다르게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 등이 베르그송이 이 강의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나는 시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공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이 지성의 논리에 의해 우리 주관의 요구에 맞게 휘어지게 된 것을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부른다. 우리 지성이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실은 시간의 본모습이 아닌 공간이라는 것이다. 반면 공간화된 시간의 모습에서 벗어난 시간의 본모습, 과거-현재-미래라는 관념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개념적 표상을 거부하고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본성을‘지속’이라 부른다. 공간이 아닌 시간,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는 시간의 본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는 시간의 본모습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통찰을 통해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반성하고, 이러한 반성을 통해 시간에 대한 자신의 이 새로운 통찰에 정당성을 보여 주려 한 것이다.
시간의 본모습을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적어도 베르그송에게는 자유와 필연의 문제, 의식과 몸, 기억과 두뇌의 문제, 무의식과 의식의 문제 등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관련되는 문제들이 결국에는 모두 시간의 문제로 수렴된다. 또한 생명 진화의 수수께끼나 우주 전체와 우리 인간 자신의 존재 이유 등의 궁극적인 문제 역시 이 시간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진정한 이해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플라톤이나 칸트와 더불어 2500여 년의 세월을 헤아리는 서양철학사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이와 같은 깊은 울림 때문일 것이다.
‘지속’으로 펼쳐내는
서양철학사의 독창적 해석
베르그송은 서양 고대 철학의 사유와 서양 근대 철학 사유의 핵심적인 특징을 시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매우 일목요연하게 그려 내고 있다. 물론 베르그송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저술들을 통해 자신의 놀라운 천재성을 보여 주었지만, 서양철학사라는 장대한 사유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나왔는지를 단 몇 개의 결정적인 혈맥을 짚어 내어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한 이 강의에서도 그의 놀라운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베르그송이 시간에 대한 이해의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 이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각 철학자들의 사상이란 저마다가 엄청난 내공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베르그송은 각자가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하고 복잡한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사상들 하나하나의 내적 완결성을 훌륭히 그려 낸 것을 넘어, 시간에 대한 그 자신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만 그 정체성과 방향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게 되는 더 큰 사상적 흐름 속의 일부가 되어 들어오도록 이것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 짓는 데 성공하고 있다. 즉 이 사상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베르그송이 진단하고 있는 이 사상적 흐름의 맥락 속에 놓이게 될 때 더욱 선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깊은 독창적인 사유의 능력을 지니는 것과 함께 많은 철학사 문헌에 대한 광대하고 조직적인 식견을 겸비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시간의 문제란 꼭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보통의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철학은 다분히 어려운 것이지만, 베르그송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 강의록에서도 그 명료하고 생동감 넘치는 사유와 언어의 힘으로,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추어 주고 있다. 시간에 대한 막연한 철학적 의구심뿐만 아니라 베르그송의 사상과 그의 서양철학사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그 요구를 섬세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