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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내가 새롭게 변하는 날/마 2:1-23
○ 동방 박사의 방문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눅2:4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민24:17, 사60:3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시2:1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말2:7, 요7:42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5:2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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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처럼 되신 예수님 >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인 멕스웰 몰츠(Maxwell Maltz)의 얘기입니다. 그의 환자 중에 화재에서 부모를 구하려다가 큰 화상을 입은 환자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결국 죽었고 자신도 화상으로 얼굴이 흉측하게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화상을 입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아내가 찾아왔을 때 몰츠 박사는 말했습니다. “손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성형수술을 하면 거의 원래 얼굴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방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되지 않자 얼마 후에 아내가 말했습니다. “박사님! 제 얼굴도 남편처럼 망가뜨려 주세요. 저도 남편처럼 되어 남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남편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 말에 몰츠 박사는 감동해서 그 얘기를 해주려고 남편의 집에 가서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손님! 저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성형수술을 하면 손님은 거의 정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번 말해도 아무 반응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손님! 손님의 아내가 당신과 옛날처럼 하나 되어 지내고 싶다고 자기 얼굴을 망가뜨려달라고 제게 사정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자 조금 후에 남편이 문을 열고 나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려고 그분의 신성을 잠깐 망가뜨리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절망 중에 빠진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 3종류의 사람 >
본문에는 좋은 역할과 나쁜 역할을 하는 3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요즘 TV 드라마를 보면 악역으로 뜨기도 하지만 아무리 떠도 인생 드라마와 교회생활에서는 악역을 맡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3종류의 사람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1. 헤롯과 같은 사람
본문 1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은 헤롯왕 때 태어났습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 안티파터의 아들로 로마 황제에 아부해 주전 47년에 유대 총독이 되었고, 주전 40년에 유대지역 분봉 왕으로 임명되어 주후 4년까지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4가지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힘 지상주의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으로 정적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회유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극도로 불신해서 처남, 장모, 자신의 두 아들, 심지어는 아내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를 야만인(barbaric)이라고 불렀고, 어떤 역사가는 그를 ‘무자비한 미치광이(malevolent maniac)’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그는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피폐한 경제를 일으켜 ‘요단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성과를 이뤘습니다. 그는 7개의 궁전과 9500석을 가진 7개의 극장을 세웠고, 예루살렘을 예술성과 편의성을 갖춰 재건축했고, 스포츠 경기장도 세웠는데 가장 큰 경기장은 30만 명까지 수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 성전이 헤롯 성전입니다.
셋째, 그는 특권의식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대를 좋아했고, 남들로부터 찬양받고 예술로 남을 감동시키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언어를 가졌고 반대자를 설득하는 언변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10번 결혼했는데 많은 결혼이 정략결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정적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넷째, 그는 편집증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독살된 후로 편집증에 시달려서 먹는 것을 철저히 체크했습니다. 또한 수만 명의 노예들을 동원해서 10개의 중무장된 요새를 건축했고,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철저히 감시하고 반역 혐의가 있으면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이 얘기를 듣고 베들레헴 경내에 있는 2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을 자기가 죽는 시점에 같이 죽이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니까 그 위인을 죽여 눈물을 흘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며 사셨습니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대를 탓하지 마십시오. 내가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이런 환경에서 지내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런 처지에 있는 데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나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시대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때라고 느껴질수록 ‘탓하기’보다 ‘참여하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에스더 4장 14절에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그처럼 내 현재의 위치는 지금 때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시대에 분당샛별교회로 보내신 목적이 있고, 내게 현재의 배우자와 자녀를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현재의 그 자리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2. 제사장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
헤롯은 말년에 중병으로 수시로 발작하고, 가슴이 썩고, 피부에 반점이 생기면서 거의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방박사들이 와서 속을 뒤집는 말을 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다는 말에 헤롯과 온 이스라엘이 소동을 했습니다. 헤롯은 모든 대적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태어난 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들어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은 많았고 겉으로는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실제로는 메시아에 대해 관심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메시아가 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처럼 습관적인 믿음에 젖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성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까요?
마음속에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 신앙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기한 일은 진짜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자랑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요새 관상기도를 통해서 투심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았는데 투심능력이 있으면 뭐합니까?
중세에 마카리오스 수도원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원장님! 원장님은 제가 신비주의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다 보입니다. 아무개 수도사가 아무개 수녀와 은밀하게 관계하는 모습이 기도 중에 보입니다. 그 사람들 정말 큰일 날 사람입니다. 그 수도사를 조심하십시오.”
그 말을 듣고 마카리오스 원장이 말했습니다. “누가 자네를 신비주의자라고 생각한다고 그랬나? 자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인격파탄자네. 동료 수도사가 여자관계가 있다는 100% 물증이 있어도 그에 대한 언급을 조심해야 하거늘 자네는 그저 기도 중에 보았다고 그렇게 가볍게 입을 놀리니 자네야말로 큰일 날 사람이네. 자네는 주님의 성육신이 말해주는 진짜 신비를 알았으면 좋겠네.”
신비주의자가 제일 욕하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이 성령의 체험은 없고 성경 지식과 형식만 내세운다고 욕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주장만 다를 뿐 신비주의자들의 태도와 품성은 남을 비판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바리새인과 다름이 없고 오히려 더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는 알아도 모르는 척, 능력이 있어도 능력이 없는 척 소리 없이 음지에서 몸과 마음을 드려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동방박사와 같은 사람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헤롯은 말했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그래서 박사들이 메시아를 찾으러 갈 때 다시 그들을 인도했던 별이 나타나서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섰습니다.
본문 9절에서 ‘아기’는 원어로 ‘갓난아기(newborn baby)’보다는 ‘유아(toddler)’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태어나던 날 방문한 줄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꽤 시간이 지나서 방문했다는 주장이 훨씬 많습니다.
서울에 한국을 대표하는 한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성탄절에 담임목사님이 예수님이 태어난 날 동방박사가 방문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수석부목사가 비판 목적이 아니라 지나가는 말로 “주님 탄생 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서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다는 주장이 많다.”고 말했다가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에 나오는 “집에 들어가”라는 표현도 동방박사의 방문이 마구간이 아닌 상당한 시일이 흘러 아기 예수님이 집에 있었을 때였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값비싼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장면을 통해서 예배와 관련된 중요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1)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목적은 무엇을 얻겠다는 목적 때문이 아니었고 오직 ‘경배!’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그런 결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은혜는 예배 태도가 좌우합니다. 사실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태도입니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러도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강한 욕구를 가지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1994년, 러시아 교육부가 약 100명의 고아들을 위한 정부 주최 교육 프로그램을 이끌어달라고 2명의 미국 선교사를 초청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성탄절이 가까이 오자 성탄절 얘기를 고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한 얘기, 여관에 묵을 곳이 없어 마구간에 가서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었던 얘기를 들려주자 처음 듣는 성탄절 얘기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얘기가 끝나고 선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마분지로 구유를 만들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선교사들의 지시를 따라 구유를 만들고 노란색 냅킨을 뜯어 구유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버린 잠옷을 잘라 담요로 사용하고 아기 예수 인형도 만들었습니다. 그때 미샤(Misha)라는 이름의 6살짜리 소년이 만든 구유에는 아기 인형이 2개가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깜짝 놀라서 통역을 통해 미샤에게 왜 구유에 아기 2명을 놓았느냐고 했습니다.
미샤가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뉠 때 예수님은 제게 네 집에 머물 수 있는지 물어보셨어요. 저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머물 집이 없고 예수님께 드릴 선물도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뜻하게 해드리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저도 구유 안으로 들어갔어요. 나머지 인형 하나는 제 인형이에요. 그렇게 들어가자 예수님이 저를 쳐다보시면서 저와 항상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 얘기를 하면서 미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때 미샤는 자신을 영원히 버리지 않는 또 한분의 진짜 부모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미샤와 함께 계실 것이고, 최선을 다해 예배하는 우리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2)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예물 숫자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 3가지 예물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예물입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제사장임을 상징하고, 몰약은 슬픔과 탄식과 죽음과 관계된 약으로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상징합니다.
그처럼 박사들이 예물을 드린 것은 물질적 헌신도 예배의 중요한 요소임을 잘 말해줍니다. 축복받는 예배의 가장 기초개념이 있습니다. 예배는 ‘복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승리는 ‘드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구경하는 자나 받으려고 하는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또한 영혼의 보람과 하나님의 보상도 ‘받으려는 자’보다 ‘드리려는 자’에게 있습니다.
미국에 채드(Chad)란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학교에서 거의 왕따였습니다. 학교 끝날 때 아이들이 함께 집으로 가면 채드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채드가 반 모든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엄마는 채드가 원하는 대로 종이, 풀, 크레용을 다 사주었었지만 한편으로 걱정했습니다.
35장의 카드를 만드는데 3주가 걸렸습니다. 반 파티가 있는 날 아침에 채드는 흥분하며 35장의 성탄 카드를 가지고 학교로 갔지만 엄마는 채드가 성탄 카드를 한 장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그 일로 아이가 큰 상처를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그 상처를 달래주려고 엄마는 채드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구워 놓았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거리에 아이들 소리로 넘쳤습니다. 엄마가 보니까 다른 아이들은 함께 걸으면서 웃고 있었지만 채드는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엄마는 채드의 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집 문이 열리자 엄마는 태연한 척 말했습니다. “채드! 학교 잘 갔다 왔니?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구워 놓았다.”
그때 채드는 엄마의 염려와는 달리 기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 친구들 모두에게 카드를 주었어요.” 채드는 카드 한 장 받지 못했지만 모든 친구들에게 카드를 준 것 자체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같이 기뻐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에 탁월해야 합니다.
요새 미션센터 인테리어 공사 중입니다. 최대한 재정을 절약하며 하고 있지만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이디어를 주어서 4500명의 사랑칼럼 회원들과 인터넷을 통해 말씀으로 은혜 받는 분들을 대상으로 ‘3% 후원운동’을 펼쳤지만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인지 몇 명밖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공사를 진행하시는 집사님이 많이 어려워하십니다. 어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재정 문제로 언제 공사를 중단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처럼 비전을 향해 나갈 때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면 산고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지금은 그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도우심이 있어 공사가 포기되지 않도록 하실 줄 믿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어려울 때 여러분들이 오병이어의 헌신을 보여주시면 그 ‘눈물의 헌신’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빗물의 은혜’로 변화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헌신은 때가 있습니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 헌신하고, 감동이 있을 때 미루지 말고 기쁘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쁨이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헌신의 때에 헌신하지 못하면 오래도록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본적으로 교회생활을 기쁘게 잘하려면 항상 교회생활 철학을 받기보다 드리는데 두는 태도를 계속 연습하고 훈련해서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드리는 삶처럼 영혼을 기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3)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최고로 드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우상화의 본능이 있어서 영성을 자랑하고 신비주의에 빠지며, 주님이 문인데 자기가 문인 줄 압니다. ‘문’이란 말은 거꾸로 하면 ‘곰’이 됩니다. 자기만 ‘문’인 줄 아는 사람은 ‘곰’같은 사람입니다. 영어의 ‘star(별)’란 단어를 거꾸로 배열하면 ‘rats(쥐들)’이 됩니다. 자기가 스타인 줄 아는 사람은 쥐처럼 못난 사람입니다.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일수록 인격은 저하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동방박사는 경배하고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그런 순종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바보 같아 보이고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저렇게 형편없고 말도 되지 않는 일에도 순종하는구나.”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순종하면 그때부터 은혜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결론은 인격에 순종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론지어집니다.
가끔 어려운 여건에서도 순종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감동이 됩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나?”
왜 그렇게 순종할까요?
대우 받으려는 마음을 아예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자존심이 없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나 자존심보다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자기 생각과 감정을 극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 성탄절은 내가 변하는 날 >
예배의 3가지 요소, 즉 정성과 예물과 순종이 없는 예배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해서 다시 한 번 참된 예배의 길을 결단하십시오. 특히 성탄절을 가장 기쁜 날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내가 변하는 가장 복된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우체국 직원이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성탄 며칠 전, 그는 수신되지 못한 우편물을 분리하는 일을 하다가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그 편지는 산타클로스에게 보내는 편지였는데, 놀랍게도 그 편지는 자기 딸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 우리는 금년에 아주 슬펐어요. 지난봄에 동생이 천국에 갔어요. 저는 아무 것도 원치 않아요. 대신 우리 집에 오시면 동생의 인형을 천국으로 가져다주세요. 인형들은 부엌에 둘게요. 그 인형들이 없으면 천국에서 동생이 외로울 거예요. 저에게 선물 주는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나 아빠가 예전의 아빠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아빠가 엄마에게 오직 영원(Eternity)만이 아빠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아빠에게 영원의 일부 조각을 주실 수 있나요? 그러면 저도 착한 소녀가 될게요.”
얼마나 아름다운 편지입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소녀와 같은 남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성육신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내가 새롭게 변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계기로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주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더욱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 처| 이한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