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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약졸(大巧若拙)
훌륭한 기교는 마치 서투른 듯하다는 뜻으로, 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언뜻 보기엔 서투른 것 같다는 말이다.
大 : 큰 대(大/0)
巧 : 공교할 교(工/2)
若 : 같을 약(艹/5)
拙 : 졸할 졸(扌/5)
출전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四十五章
참으로 교묘한 것은 범인의 눈에 도리어 거칠고 치졸한 것으로 보인다. 아주 능숙한 사람은 자연스럽고 꾀도 쓰지 않으며 자랑하지도 않으므로 졸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크게 강직한 것은 굴종하는 것 같고, 대교는 졸한 듯하며, 큰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
속담에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뿔이 없다'는 말이 있다. 뿔이 있으면 이빨이 없다는 각자무치(角者無齒)와 같다. 세상에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도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철학자보다 속이 덜 찬 사람은 자신이 다 아는 듯 거들먹거리지만 말이다.
그런데 난득호도(難得糊塗)란 성어대로 무궁무진하게 재주가 많은 사람이 없는 체 바보처럼 굴기는 어렵다고 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아주 훌륭한 기교(大巧)는 도리어 서투른 것 같이 보인다(若拙)는 성어에 닿는다.
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실력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서툴기 짝이 없다는 의미도 되는 이 성어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나왔다.
도덕경(道德經) 45장 홍덕장(洪德章)에 실린 이 말과 함께 비슷하게 다른 좋은 말도 많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모자란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부서지거나 닳지 않아 그 쓰임이 끝남이 없다
大盈若沖 其用不窮.
넘칠 듯 가득 찬 것은 마치 빈 것 같으나 아무리 써도 끝이 없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아주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아주 교묘한 것은 서투른 것 같고, 아주 말 잘하는 것은 말더듬는 것 같다.
노장(老莊) 사상의 다른 축인 '장자(莊子)'의 거협(胠篋)편에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더 극단적인 주장을 편다.
고대 중국 음악의 달인 사광(師曠), 십리 밖의 사물도 보는 밝은 눈의 이주(離朱), 최고의 장인 공수(工倕) 등의 뛰어난 재주를 모두 없애야 세상 사람들은 본래의 솜씨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인위적인 기교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갔을 때 '천하 사람들은 비로소 진정한 기교를 지닐 수 있으니 큰 교묘함은 마치 서투르게 보인다(而天下始人有其巧矣 故曰大巧若拙)'는 이야기다.
진정한 고수는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완벽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을 투박하게 하더라도 진정성을 담아 전달하면 웅변가다. 청산유수같이 말을 잘 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둘러대기도 잘 하는 것을 주위에서 자주 본다.
불리한 사항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했던 일이 반대로 자기에게 해당될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을 싹 닦고 말을 바꾼다. 어느 때나 변하지 않고 진심이 드러날 때 모두가 승복한다.
중국문화 대교약졸
🔘 제1장 대교약졸의 의미
대교약졸이라는 말은 그리 자주 접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로 자주 듣는 말도, 눈으로 자주 볼 수 있는 글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사고방식, 감정표현 방식, 행동양식, 문화, 예술 등에는 모두 대교약졸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대교약졸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을 무렵이면 대교약졸이라는 말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깊게 들어와 있는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대교약졸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교약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라는 사람과 도덕경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장은 노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대교약졸 속에 담긴 뜻과 논리구조, 그리고 노자의 수양과 대교약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노자와 도덕경
때는 바야흐로 춘추시대 말기, 천하는 겉으로 주나라 천자를 존중하고 받들어 모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후국들이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면서 이들 나라 사이에 외교적 책략과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주나라는 찬란한 문명을 간직한 천자의 나라지만 이미 약소국으로 전락해 주변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다.
주나라의 서쪽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 윤희(尹喜)는 평소 때와 다름없이 부하들이 통행인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감독하고 특별한 사항은 없는지 둘러보기 위해 관문 앞으로 갔다.
그때 바람 먼지 휘날리는 저쪽 멀리서 어떤 사람이 소를 타고 관문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나이가 좀 많이 들었다는 것밖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길을 돌려 처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우연히 그의 눈길이 노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순간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끌림이 있었다.
그는 노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뜯어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찬찬히 보니 지극히 깊고 그윽한 눈매와 온화한 미소 속에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풍이 감추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백발 아래 넓은 이마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은 주름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품을 더했다.
갑자기 혹시 이 노인이 마음속 깊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현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시선이 얼굴 옆으로 가자 보통 사람보다 유난히 크고 긴 귀가 눈에 들어왔다. 큰 귀를 보면서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그는 노인에게 그리 바쁘지 않으면 잠시 쉬어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청했다. 노인은 뜻밖의 제안에 일순간 머뭇거리다 빙그레 웃으며 소에서 내렸다.
윤희는 노인을 조용한 곳으로 모신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눈은 못 속입니다. 선생님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제가 지금은 비록 여기서 수문장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우주자연의 도와 인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도를 찾아 온 천하를 두루 방랑하기도 했지요. 저를 위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수도 낙양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곳 문지기는 안목이 꽤 높은 사람이군. 이제 이곳을 벗어나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을 것이니 마지막으로 그와 이야기나 나누어볼까.'
노인은 자신을 알아보는 기특한 수문장의 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道)를 만약에 도라고 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궁극적인 도가 아니오. 이름을 이름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 이름이 아니오.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라오. 그래서 항상 욕심이 있음으로써 그 오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음으로써 그 드러남을 본다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나 이름이 다를 뿐, 그래서 다 같이 현묘(玄妙)하다고 하오. 현묘하고도 현묘하여 실로 모든 현묘함의 문이라오.'
윤희는 귀가 번쩍 뜨였다. '얼마나 심오한 가르침인가! 오랫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현자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도를 이곳 변방의 끝에서 저 이름 모를 노인의 입을 통해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구나. 이 분은 다시없을 대단한 현자임이 틀림없구나. 아아, 나에게 이런 복이 주어질 줄이야!'
그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일렁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고는 노인에게 큰절을 했다. 노인은 그저 담담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절을 마치자 그는 다시없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시켜 얼른 죽간과 붓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소중한 가르침을 글로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방금 말하지 않았소?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님을… 말과 글은 껍질일 뿐이오. 그것으로 참 도를 담을 수가 없소. 후세 사람들 가운데 내가 남긴 글에 매달려서 진정한 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이오.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하오.'
윤희는 공손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어떠한 언어와 문자도 도를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방금 선생님의 그 말씀을 제가 듣지 않았다면 어찌 도라는 것이 언어와 문자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글로 남기지 않는다면 나중에 또 어느 누가 진정한 도는 문자 너머에 있다는 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언어의 덫에 걸리지 않고 도의 길을 바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윤희의 지혜로운 말을 듣는 순간 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노인도 세상을 등지기 전에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 이미 포기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관문에서 적임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노인은 평생에 걸쳐 터득한 심오한 도를 죽간에 천천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가르침을 적고 난 뒤 전체의 글을 헤아려 보니 대략 5천 자 남짓했다.
다 쓰고 난 뒤 노인의 얼굴에서는 해야 할 일을 다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깊고도 편안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옆에서 심오한 가르침이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던 윤희도 얼떨결에 같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제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다오.'
천재일우의 기회로 만난 스승과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윤희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아직 스승의 존함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어르신의 현묘한 가르침에 취해 존함을 묻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어르신의 존함은 어찌되시는지요?'
'성은 이(李)씨고 이름은 이(耳)며 자는 담(聃)이라오. 어릴 때부터 귀가 남달리 크고 귓바퀴가 특이해서 주어진 것이라오.'
'어쩐지 가르침이 참으로 깊고 현묘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바로 황실 도서관의 관장으로 계셨던 그분이시군요. 선생님의 지혜가 깊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고, 저 멀리 노나라의 공자 또한 선생님을 찾아가서 예를 물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곳 국경의 끝자락에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윤희의 눈에는 눈물이 일렁거렸다. 갑자기 이런 위대한 스승이 왜 주나라를 떠나 변방으로 사라지려고 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르신, 왜 서쪽으로 떠나시는 것입니까?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특별히 그곳에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오. 주나라의 쇠퇴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냥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 한다오.'
천하의 종주국이었던 주나라가 점차 몰락해가는 것은 변방의 수문장인 윤희 또한 느끼고 있던 터라 새삼 비감한 마음이 들었다.
현자는 천하가 어지러울 때는 조용히 세상 밖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익히 들었던 그이기에 스승을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다. 다시 스승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 윤희는 예를 갖추어 큰절을 올렸다.
노인도 이번에는 제자의 예를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천천히 소에 올라타고는 느릿느릿 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는 다시 그 노인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의 글은 한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을 바탕으로 저자가 상상력을 덧붙여 꾸며본 것이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노자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노자가 태어난 곳은 초나라 고현(苦縣) 여향(勵鄕) 곡인리(曲仁里)다. 이름은 이(耳)고 자는 담(聃)이며 성은 이씨다. 주나라 황실의 도서관에서 장서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공자에게 깊은 충고를 해주었다. 그 내용은 공자가 추구하는 도란 이미 죽은 옛사람들의 말로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과 겉으로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자중하라는 것이었다.
공자는 노자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영물인 용에 비유했다. 노자는 도덕을 수양하는 데 있어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데 힘썼다.
주나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주나라가 점차 쇠퇴해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떠났다. 관에 이르자 관령으로 있는 윤희가 말했다. '그대는 장차 숨으려고 하니 억지로라도 나를 위해 책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노자는 상·하편의 책을 지었는데 도와 덕의 의미를 5천여 자로 말하고 떠났다. 그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
사마천은 이 뒷부분에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와 주나라의 태사(太史) 담(儋)이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이들이 노자라는 설도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노래자는 공자와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고 태사 담은 공자보다 백 년 뒤의 사람이다.
만약 태사 담이 노자라면 노자의 나이는 거의 2백 살 가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은 노자의 나이에 대해서도 160살 설과 2백 살 설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노자의 자손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노자 아들의 활동 시기를 추정해보면 노자는 전국시대 중기의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튼 대체적으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모호한 이야기들이다. 이는 사마천시대에도 이미 여러 가지 설들이 산재하고 있어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신빙성이 있어야 할 역사서가 이렇게 모호하니 후대로 갈수록 노자의 생애가 신비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한나라 후기에는 노자가 주나라를 떠나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위대한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은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무려 80년을 머물렀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상태였다는 전설을 만들기도 했다. 급기야 한나라 말기에 등장한 민간종교인 도교에서는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신의 지위에 올렸다.
도사들은 한술 더 떠서 노자가 관문을 지나 서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확대 해석하여 노자는 서역으로 가 부처로 환생하여 인도 사람들을 교화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후대 불교와 도교의 세력 다툼이 한창일 때 도사들이 불교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보다 더 힘세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므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주장이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진지한 주장이었다.
후대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노자에 대해 이런저런 학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많다. 우선 노자의 성은 이씨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 왜냐하면 춘추시대에는 이씨 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참 뒤인 전국시대에 이르러 이씨 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성이 이씨라면 이자(李子)라고 부르지 않고 노자라고 부른 것도 문제가 된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순자(荀子), 묵자(墨子), 장자(莊子), 손자(孫子) 등의 제자(諸子)의 '子'는 영자(英子), 미자(美子), 순자(順子) 등의 일본식 여자 이름에 붙는 '子'와는 달리 성씨에 붙이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인데 이 또한 원래는 한자(韓子)였다. 성이 '韓'씨고 '非'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송대 이후 신유학자들이 당나라 때 신유학의 부활을 제창했던 한유(韓愈)를 추존하여 한자(韓子)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를 한비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로 보아 노자의 성은 노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에 노씨는 이미 존재했던 성이다. 만약 노자의 성이 노씨라면 이씨 성의 당나라 왕실에서 자신들이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전국에 노자의 사당을 세웠던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도덕경의 내용 가운데는 전국시대 후기에나 나옴직한 구절들이 있기 때문에 춘추시대의 저작으로 볼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대 초기로 보는 설도 있다.
따라서 노자는 전국시대 후기 사람으로 장자보다 후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아니라 장로사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도덕경은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는 노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20세기 말기 도덕경과 관련한 경천동지할 두 개의 유물이 발견되는 바람에 노자와 도덕경은 또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973년 호남성 장사(長沙) 지방에서 비단 위에 쓴 백서(帛書) 도덕경 두 종류가 발견되었는데 한대 초기의 것으로 그 내용은 현재의 도덕경과 큰 차이가 없다.
두 개의 백서 모두 '덕경' 부분이 상편으로 되어 있고 '도경' 부분이 하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러므로 백서는 '덕도경'이라고 불러야 되겠지만 이 책에서는 관례상 그냥 도덕경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백서의 발견으로 도덕경의 저작 시기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무덤에 넣은 부장품으로 쓰일 정도라면 당시의 유통 속도로 보아 책이 나온 지 적어도 1∼2백 년은 걸린다고 할 때 적어도 전국시대 중기 이전에는 도덕경이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1993년 이번에는 전국시대 중기 초나라의 고분에서 대나무 조각에 기록된 도덕경이 발견되었다. 원본은 이보다 훨씬 전에 나왔으리라 추정한다면 원래의 춘추 말기 저작설이 다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죽간본(竹簡本)은 현재의 판본에 비해 분량이 현저하게 적고 내용도 차이가 많다. 다시 여러 가지 새로운 주장들이 나오는데 어떤 이는 죽간본이 바로 원래 노자가 쓴 것이고 현재의 판본은 주나라의 사관인 태사 담이 쓴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노자와 태사 담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학설이다.
이상 노자와 도덕경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여러 가지 전설과 학설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노자에 대해 이렇게 설이 분분한 것은 노자 스스로 자신의 도와 덕을 감추는 데 힘썼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으로는 분명 춘추 말기에 학식이 매우 깊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통해 깊은 경지를 체험했던 어떤 현인이 있었다고 본다. 그가 이씨인지 노씨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자의 '老'자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 '늙은이'라는 의미를 살려서 그를 '늙은 선생'으로 부르고 싶다. 물론 그는 단순히 세월 따라 나이만 먹은 늙은 선생은 아니다. 우주와 역사,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지혜로운 늙은이다.
사마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황실 도서관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당시 책은 아무나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황실 도서관에서 근무하려면 이미 상당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황실 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금의 역사와 문명에 관련된 수많은 지식을 접했을 것이다.
후한의 역사가인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에도 도가의 무리는 사관(史官)에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는 그는 젊은 날 분명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탐구하며 수도했던 사람이고 아울러 깊은 깨달음을 체험했던 사람이다.
도덕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도는 단순한 사변적인 추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도덕경 속에는 당시 현실 사회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들이 나온다. 이로 보아 그는 단순히 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산중도인이 아니라, 어지러운 사회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했던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젊은 날의 진지한 구도열과 방대한 지식, 냉철한 반성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무르익고 곰삭아서 나타난 것이 바로 도덕경인 것이다.
물론 그 속에는 노자 자신의 체험과 견해만이 아니라 당시 은자(隱者)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격언들과 지혜들도 함께 수록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경은 당시 안목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깊은 지혜의 책으로 평가를 받으며 점차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비단이나 깎은 대나무 조각에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어야 하는 고대의 서적 전래 방법의 특징상 약간의 윤색과 가필 또한 있었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용 또한 어느 정도 변형이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오래되고도 깊은 지혜의 원형은 큰 변화없이 면면히 이어져 중국문화,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책은 5천 자 남짓한 짧은 도덕경 가운데서도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한 구절을 통해서 중국문화,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하는 독특한 시도의 글이다.
지금까지 노자 또는 도가사상과 중국문화를 논한 글들은 많이 있지만 아직까지 도덕경의 한 구절인 대교약졸로서 중국문화를 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지금까지 대교약졸을 그다지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교약졸이야말로 노자사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후대 중국문화의 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넉 자밖에 되지 않는 대교약졸이라는 한 구절을 통해 방대하고도 유구한 중국문화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 먼저 대교약졸의 뜻부터 차근차근 풀이해보자.
대교약졸의 일반적인 의미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무엇인가? 먼저 한자씩 뜻을 풀이해보자.
'大'는 '크다'는 뜻 외에 별다른 뜻이 없다. 그리고 '若'은 '만약 ~한다면'의 뜻과 '마치 ~와 같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은 '巧'와 '拙'이다. '교'는 흔히 '기교(技巧)', '교묘(巧妙)' 등으로 쓰이는 말로 솜씨가 빼어난 것을 가리킨다. '졸'은 '치졸(稚拙)', '졸렬(拙劣)' 등으로 쓰이는 말로서 솜씨가 서툰 것을 가리킨다. '교'와 '졸'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이 구절을 풀이하면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 된다.
어찌 보면 참으로 황당한 말이기도 하다. 크게 솜씨가 뛰어난 것은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니! 노자의 대부분의 말들이 그렇듯이 이 말 또한 수수께끼 같은 심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흔히 동양은 직관적이고, 서양은 논리적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물론 여기서의 동양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가리킨다. 상당히 모호하고 엄밀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때로는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는 말이다.
확실히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분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에 대해서는 별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금방 이해되지는 않는데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한순간 탁 풀리면서 눈을 확 뜨게 하는 그런 말들을 좋아한다. 노자의 대교약졸이야말로 바로 그런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 구절이 나오는 도덕경 45장 전문을 한 번 보도록 하자.
大成若缺, 其用不弊.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손이 있는 듯하지만 그 쓸모가 닳아서 떨어지지 않는다.
大盈若沖, 其用不窮.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이 끝이 없다.
大直若屈,大巧若拙, 大辯若訥.
크게 바른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마치 서툰 듯하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마치 어눌한 듯하다.
靜勝躁, 寒勝熱. 淸淨爲天下正.
고요함은 떠들썩함을 이기고 차분함은 열기를 이긴다. 맑고 깨끗한 것은 천하의 바른 길이 된다.
이 장에서는 매 구절 모순된 말들을 계속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두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두 구절은 일단 논리적으로 볼 때 역접의 관계다.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결손이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면 닳아서 떨어짐이 없이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뒤에 그 쓰임이 망가지거나 헤져 떨어짐 없다는 말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 말처럼 보인다.
보통 상식의 세계에서는 완성도가 높으면 결함이 없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그리 높지 않았을 때 국산 전자제품과 일본산 전자제품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일본산 전자제품은 모양도 깔끔하지만 일단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서 고장이 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국산은 얼마 쓰지 않아도 고장이 나 속을 상하게 하곤 했다. 제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요즘 국산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튼 완성도와 결함은 분명히 서로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손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결손이 있는 것처럼 엉성해 보이는데 아무리 사용해도 고장이 나서 버리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그 다음 말은 또 어떠한가? 크게 가득 차 있는 것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가득 차 있는 것과 비어 있는 것은 분명 양립할 수 없는 말이다. 쌀독이 그득한 것과 텅 비어 있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지갑이 두둑한 것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누구나 다 궤변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면 무궁무진하다는 말은 또 어떠한가? 요술지갑이 아닌 한 불가능한 이야기다.
사실 이것은 일상의 논리가 아니다. 이것은 일상의 논리를 뛰어넘은 도(道)의 현묘한 작용을 이야기한 것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그 쓰임이 무궁무진하다는 이야기는 도덕경의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다. 이것들은 모두 노자의 명상과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새로운 차원의 논리다.
이 장의 뒷부분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노자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하는 수양을 통해 어느 순간 우주의 근본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바로 그 텅 비어 있음에서 삼라만상이 생성되어 나오는 것임을 통찰했다.
후대 중국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의 하나였던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有生於無)'고 하는 우주생성론은 바로 노자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도의 세계는 분명히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텅 빈 곳에서 온갖 삼라만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도 무궁무진하게…
그것은 인간들이 무언가를 만드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도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대자연을 다시 보자.
겉보기에는 인간이 만든 거대한 성벽이나 웅장한 궁궐처럼 튼튼하고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은 인공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고 쓸모도 무궁무진하다.
이어서 나오는 대직약굴(大直若屈)이나 대교약졸, 대변약눌(大辯若訥) 또한 대성약결과 마찬가지로 모두 도의 현묘한 작용, 그리고 도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천지만물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이 보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서양 기하학의 아버지인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따르면 한 점과 한 점 사이의 가장 가까운 선은 직선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대 기하학에서는 한 점과 한 점 사이의 가장 가까운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왜냐하면 공간 자체가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직선이라는 것은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실재 자연계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직선처럼 보이는 것도 좀더 정밀하게 바라보면 사실은 직선이 아니다.
난해한 기하학을 빌리지 않고 그냥 쉽게 생각해보자. 운동장 한쪽 끝에서 반대편 한쪽 끝까지를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선은 분명 직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울에서 파리까지 최단 거리의 선을 긋는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분명 직선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곡선이다. 왜냐하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에 긋는 선은 결국 곡선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큰 직선은 결국 곡선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노자가 이런 기하학적인 관점 또는 지구가 둥근 것을 바탕으로 대직약굴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상적 수양을 통한 깊은 직관으로 천지만물에 존재하는 것은 결국 곡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만든 것 속에는 직선이 있지만 자연계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직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도의 솜씨로 만들어진 대자연은 사람들의 솜씨로 만든 인공물에 비해 일견 서툰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화려함의 극에 다다른 솔로몬의 영화가 들에 핀 백합꽃 한 송이만도 못하다고...
또한 자연은 말을 못하기 때문에 말로써 자신을 변론할 수 없지만 어떤 뛰어난 웅변가보다 자신을 더 잘 설명한다.
봄이 되어 따스한 동남풍이 불어오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여름이 와서 뜨거운 남풍이 불어오면 그 기운으로 만물이 무성해지고, 가을이 다가와 소슬한 서풍이 불면 꽃과 잎사귀들은 색이 바래져 땅에 떨어지고, 겨울이 되어 북풍이 불면 모든 것은 딱딱한 껍질에 쌓여 얼어붙은 땅속으로 숨는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렇게 질서 정연하고 조리에 합당할 수가 없다. 이에 비하면 인간이 하는 변론은 언뜻 보기에 논리 정연한 것 같지만 그 속을 파고 들어가보면 허점이 없을 수가 없다.
도덕경의 전체 흐름을 보면 노자는 도의 세계에서 터득한 원리를 인간계에 적응하려고 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성인(聖人)은 텅 빈 도의 속성을 좇아 마음을 텅 비운 사람이고,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천지자연의 도를 좇아 겸손을 실천하며, 무위자연의 도를 좇아 무위의 정치를 펼치는 사람이다.
이 구절을 인간사에 끌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무언가를 만들 때 완벽하게 이루기보다는 마치 결점이 있는 듯 약간 허술하게 하고, 무언가를 꽉 채우려 하기보다는 약간 빈 듯이 하며, 일을 처리할 때도 곧게 하기보다는 둥그스레하게 하기를 좋아하고, 현란하고 인위적인 기교를 발휘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레 서툴게 하며, 화려한 수사와 정밀한 논리로 달변을 토하기보다는 적게 말하고 어눌하게 말하는 것이 미덕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 중국 사람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처세술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작용했으며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서구문화의 세례를 받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들은 상당히 고리타분하고 소극적이며 심지어는 의뭉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여기서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대교약졸로 초점을 모아보자.
대교약졸은 기교와 서툶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음악, 미술, 공예, 건축 등의 예술분야와 관련이 있다. 노자사상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장자 또한 이런 관점에서 대교약졸을 바라보고 있다.
음률을 어지럽히고 악기를 태워 없애고 사광(師矌)의 귀를 막아야 천하에는 비로소 사람들의 귀가 밝아질 것이다. 무늬를 없애고 다섯 색깔을 흩어버리고 이주(離朱)의 눈을 붙여놓아야 천하에는 비로소 사람들이 밝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고리와 줄을 부수고 자를 버리고 공수(工倕)의 손가락을 비틀어버려야만 천하에는 비로소 사람들이 교묘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큰 교묘함은 마치 졸박함과 같다고 했다.
- 장자, 거협(胠篋)편
사광은 고대의 음악의 달인이고, 이주는 눈이 지극히 밝은 사람이며, 공수는 최고의 장인이다.
고대 중국에는 맹인 음악가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시각을 잃으면 청각이 더욱 예민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맹인들 가운데는 음에 대한 감각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사광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서도 음악적인 감각이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주는 눈이 지극히 밝아 십 리 밖의 사물도 또렷이 보았다고 하고, 공수는 최고의 장인으로 생활에 편리한 수많은 도구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자는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음률을 파기하고 그 음률을 따라 만들어진 악기도 없애버리고 최고의 음악가인 사광의 귀를 막아버려야 사람들의 귀가 비로소 밝아진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손의 기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은 모든 인위적인 기교를 완전히 부정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교를 알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자의 글이 함축적이고 은근한 반면, 장자의 글은 다소 현란하고 과격한 편이다. 글의 스타일만 가지고 말하면 장자는 노자의 대교약졸의 심오한 뜻을 이어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노자와 장자의 개성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 상황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춘추시대에는 필기도구가 발달하지 않아 길게 기록하는 것이 어려웠던 반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필기도구가 발달하여 기록이 훨씬 쉬워졌다. 또한 시대적 분위기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비록 제후국들이 각축을 벌렸지만 비교적 점잖은 분위기 속에서 자국의 실리를 추구한 반면, 전국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을 하던 매우 살벌하고 격렬한 분위기였다.
이런 것들이 문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흔히들 공자의 말은 짧고 엉성한 듯하면서 심오한 깊이가 있는 반면, 맹자의 말은 논리 정연하고 통쾌하지만 무언가 깊이가 부족하다고 평한다.
이것 또한 개인의 수양의 깊이와 기질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기록매체의 발달 수준과 시대 상황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부분도 상당히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자의 완곡한 표현에 비해 장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파격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봐도 우리는 인간이 만든 악기와 소리만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연계에도 또한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깊은 산속 시냇물에서 나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그 시냇물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영롱한 울음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들리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 또한 하나의 음악이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인간이 만든 화려하고 정교한 음악소리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해서 음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요히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대자연의 합창이 주는 황홀감을 한 번이라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그것 또한 훌륭한 음악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장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의 소리나 색깔, 자연이 만들어낸 도구야말로 겉으로는 서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기교로는 따를 수 없는 최상의 솜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현란한 음악에만 귀가 길들여져 있고 그것만을 음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 내는 소박하면서도 은은한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자연이 주는 소박하고도 은은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일단 먼저 인간이 만든 화려하고도 현란한 소리에 물들어 있는 귀를 씻어야 한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자는 사광의 귀를 막고, 이주의 눈을 붙이고, 공수의 손가락을 비틀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교약졸은 노장사상의 중요한 심미이론의 하나로 중국예술, 나아가 언어의 예술인 중국문학에서 인위적 기교미(技巧美)를 최대한 배제하고 무위자연의 졸박미(拙樸美)를 중시하는 도구로 쓰였다. 여기까지가 대교약졸의 일반적인 의미다.
대교약졸의 숨은 의미와 논리구조
지금까지 대교약졸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인위적인 '교'와 무위자연의 '졸'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인위적인 기교미보다는 자연스러운 졸박미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장자'의 해석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다. 물론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교약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대교약졸에서의 '졸'이 단순히 '교'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교'를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하는 '졸'이 아니라, '교'를 포괄하는 '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대교약졸'을 문자적으로 풀이해 보자. 대교약졸은 '큰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다'는 뜻이다. '마치 ~인 듯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졸은 그냥 단순히 서툰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서툰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기교의 최고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대교'다. 대교란 '위대한 기교'라는 뜻으로, 앞에서도 보았듯이 철학적으로는 도의 작용 또는 도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조화를 가리킨다.
대교라는 말에 상대되는 것은 무엇일가? 그것은 소교(小巧), 즉 자그마한 기교다. 어차피 '대'라는 말은 '소'를 상정하고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대교가 천지자연의 기교를 가리킨다면 소교는 노자와 장자의 논법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이 추구하는 인위적인 기교다.
인위적인 기교는 자그마한 기교이기 때문에 금방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천지자연의 기교는 위대한 기교이기 때문에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겉으로는 서툰 듯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소교와 대교를 자연과 인위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관점을 바꾸어 그냥 단순히 기교의 수준 차이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아직 기교가 작아서 무르익지 않았을 때는 기교가 밖으로 그냥 드러나지만 기교가 커져 무르익게 되면 기교는 안으로 감추어지고 겉으로는 다시 서툰 듯이 보인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 졸은 그냥 단순히 교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를 통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차원의 졸이다.
지금까지 대교약졸을 말한 많은 사람들은 주로 천지조화의 솜씨와 인간의 솜씨라는 대립의 관점에서 졸과 교의 문제를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솜씨 속에서 교와 졸이 어떻게 대립하고 나아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즉, 인간이 어떻게 대교약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대교약졸 속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넣어 동태적으로 풀이해보자.
한 개인이나 한 사회를 볼 때 초기의 상태는 기교를 모르는 상태다. 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동굴의 벽이나 토기의 표면에 그린 그림들을 보자.
얼마나 투박한가. 그 원시적인 투박함 속에서 싱싱한 생명력이 넘치기는 하지만 미적으로 세련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자. 삐뚤삐뚤하게 그은 선, 비례가 전혀 맞지 않는 얼굴, 아무렇게나 칠한 색, 이 귀여운 그림은 입가에 미소를 자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미적 감동은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졸'의 단계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는 원시 상태에서 문명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고 미적 감각도 고도로 발달하여 어떻게 그리면 비례에 맞고 어떤 색을 칠할 때 전체 구도에 어울릴까 하는 안목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유치한 그림을 그리던 어린아이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미술 실력이 늘어감에 따라 점차 교묘함의 단계로 나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교는 더욱 무르익고 온갖 종류의 화려함과 기이함이 시선을 끌 것이다. 대부분 지역의 문명은 그렇게 서툴고 소박한 상태에서 교묘하고 화려한 상태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것이 바로 '교'의 단계다.
그러나 깊은 지혜를 지닌 노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말했다.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교란 여전히 자그마한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는 그 기교가 진짜 무르익어 큰 기교가 되면 오히려 다시 자연스럽게 졸로 돌아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졸에서 출발하여 소교를 거쳐 마침내 대교에 이르게 되면 다시 졸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졸'에서 '교'로 나아갔다가 다시 '졸'로 돌아온다는 말 속에는 회귀(回歸) 또는 복귀(復歸)의 개념이 들어 있다.
도덕경 속에는 '복귀'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복귀는 노자사상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다. 대교약졸의 구절도 시간의 요소를 두고 바라보면 복귀의 개념이 들어 있다. 복귀는 바로 순환을 가리키고 그것을 도형으로 표시하면 원이다.
흔히 동양사상은 원적, 순환적이고 서양사상은 직선적, 발전적이라고 한다. 물론 동양에는 순환만 있고 서양에는 발전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 흐름으로 보았을 때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종교의 내세관만 보아도 동양을 대표하는 종교인 불교는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다가 해탈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서양을 대표하는 종교인 기독교에서는 지상에서 영생복락의 천국이나 영원한 불지옥으로 단번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자의 대교약졸은 바로 동양적 사유형태의 표본인 원적, 순환적 모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중에 다시 돌아온 졸은 처음 출발할 때의 졸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원시적인 졸과는 달리 기교를 다 거친 뒤에 새롭게 이른 한 차원 높은 졸이다.
그것은 노자가 말하는 복귀란 말을 곱씹어보면 좀더 쉽게 알 수 있다. 복귀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도덕경 28장을 보도록 하자.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의 덕이 떠나지 않아 다시 어린애로 복귀한다.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항상의 덕이 어긋나지 않아 다시 무극으로 복귀한다.
영화로움을 알고 치욕스러움을 지킬 수 있으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의 덕이 넉넉하여 다시 원목으로 복귀한다.
수컷은 강하고 공격적이다. 그러나 암컷은 부드럽고 수용적이다. 암컷은 생명의 근원이다. 원시사회는 모계사회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문명권에서는 부계사회가 주류가 되고 세상은 강하고 공격적인 수컷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갈 때도 부드럽고 수용적인 태도보다는 강하고 공격적인 태도가 더 환영받게 되었다. 노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자는 당시 문명의 주류를 무조건 배격하지 않았다. 먼저 수컷을 알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암컷을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천하의 골짜기가 될 수 있고 우주자연에 항상 있는 덕에 머물 수 있으며 그럴 때 비로소 다시 어린애로 복귀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노자가 말한 어린아이란 생명의 원초적 상태이자 부드러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마냥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함을 다 알고 있는 부드러움인 것이다. 대교약졸의 논리와 거의 같지 않은가?
흰 것이란 밝고 지혜로움을 말하고, 검은 것이란 어둡고 어리석음을 말한다. 먼저 밝음과 지혜로움을 다 알고 난 뒤에 다시 그것을 감추고 어두운 듯, 어리석은 듯할 수 있을 때 만물의 근원인 무극으로 복귀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영예로움을 다 알고 난 뒤에 그것을 감추고 세상의 모욕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원목으로 복귀한다고 했다. 앞과 같은 논리로 이해하면 된다.
이로 보아 우리는 노자가 말하는 복귀란 그냥 무조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양극성을 다 겪은 뒤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원초적 상태에서 발전의 극을 다한 다음에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속에는 순환의 형태와 발전이 공존하고 있다. 발전과 순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형태는 무엇일까? 평면의 차원에서 보면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차원을 바꾸어 생각하면 아주 쉽다. 삼차원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금방 답이 떠오를 것이다.
동양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무척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하나 나온다.
주인공이 어떤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성냥개비 여섯 개로 삼각형 네 개를 만들라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평면 위에서 성냥개비 여섯 개로 삼각형을 만들면 아무리 해도 네 개의 삼각형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입체적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너무나 쉽게 풀린다. 소설에서의 답은 피라미드인데 실제의 답은 정사면체다.
앞의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평면의 차원에서 발전과 순환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삼차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쉽게 풀린다. 답은 나선형이다.
나선형은 순환이면서도 발전이고 발전이면서도 순환이다. 이차원의 평면에서 원을 그리면 처음의 출발점과 나중의 종점이 다시 완전히 만나게 된다. 이 속에는 발전의 의미는 없고 완전한 순환의 의미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삼차원의 입체에서 나선형을 그리면 순환과 발전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나선형을 위에서 투시하면 그것은 원이다. 그러나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나아가는 발전이다.
나선형의 구조는 사실 자연계 운동의 중요한 모형 가운데 하나다. 변기에 물을 내리면 물은 그냥 직선으로 곧바로 빠지지 않는다. 나선형으로 돌면서 아래로 빠진다.
그리고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도 소용돌이가 있다. 기압 또한 마찬가지다. 태풍이나 허리케인 등은 모두 나선형의 회오리바람이 크게 발전한 것이다.
그뿐인가, 우주의 행성과 항성도 나선운동을 한다. 바로 이 '나선형 구조'야말로 대교약졸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대교약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말은 '감추기'다. 대교약졸의 졸은 단순히 교와 대립하는 졸이 아니라 교를 통합한 발전적 졸이다.
모순 대립하는 두 개의 요소를 통합하는 것을 흔히 변증법이라고 한다. 노자의 대교약졸에서의 통합을 헤겔의 변증법과 서로 비교해보면 그 속에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자연스런 상태의 질박함을 '정(正)'이라고 하자. 다음에 이에 대한 반발로서 인위적인 기교미를 추구하는 교의 단계는 '반(反)'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대교약졸의 졸의 단계는 바로 이 정과 반의 '합(合)'이다. 기본 얼개는 서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이 겉으로도 확실히 모순과 갈등을 통합하는 발전적 모습을 보이는 반면, 대교약졸은 실제로 분명 모순 대립되는 양자를 통합하지만 그 겉에서는 다시 초기 상태로 돌아오는 순환적인 회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겉으로 다시금 처음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나타난 발전적 요소를 안으로 감추어야 한다. 즉, 졸을 밖으로 드러내고 교는 안으로 감추어야 한다.
대교약졸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내교외졸(內巧外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교를 안으로 감추게 되면 안목이 없는 사람들은 대교약졸의 졸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마치 평면적인 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나선형의 발전적 구조를 보지 못하고 다만 원적인 순환으로 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실 '감추기'는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대교약졸과 노자의 수양
대교약졸 속에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선형적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는 두 번째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면 노자는 어떻게 해서 이런 심오한 원리를 발견했을까? 나의 관점으로는 아마도 명상적 직관을 통해 우주만물의 변화 원리를 터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위대한 사상은 단순한 이성적인 추론과 사유작용을 넘어서는 깊은 직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때때로 그것은 명상 수양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나는 노자의 대교약졸의 원리인 나선형 구조는 노자 자신의 수양 과정이나 깨달음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노자가 수양을 통해 깨달은 세계관, 인생관, 문명관, 정치관 등을 사상적 관점에서 연구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그런 사상들을 얻게 된 수양의 과정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그것은 노자의 생애가 명확하지 않고, 아울러 노자가 남겼다고 하는 '도덕경' 속에서도 그의 깨달음의 내용들이 일정한 체계 없이 펼쳐져 있을 뿐 체계적인 수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는 판국이기 때문에, 노자의 수양 과정을 추적한다는 것은 학술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노자의 수양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도덕경'이라는 저술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의 사상의 자취를 탐색하여 그 속에서 대교약졸의 논리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노자의 수양 단계를 가장 효율적으로 설명해주는 구절은 '도덕경' 제56장에 있다.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구멍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해 티끌과 하나가 된다.
이 구절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 색태폐문(塞兌閉門)의 단계고, 두 번째는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좌예해분(挫銳解紛)의 단계며, 마지막은 빛을 부드럽게 해 티끌과 하나가 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단계다.
첫 번째 단계인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 것에 대해 역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감각기관을 막아서 외부로부터의 유혹을 막고 생명 에너지를 모으는 양생(養生) 수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화려한 소리와 빛깔, 그리고 자극적인 맛은 쾌락을 주는 원천인 동시에 거기에 탐닉할 경우, 우리의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주범이 된다. 아울러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해 깊은 고요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마음을 닦는 명상가들은 감각기관을 막아서 감각적 쾌락을 자제할 것을 강조했다. 노자 또한 마찬가지다.
도덕경 제1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다섯 가지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동을 어긋나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여기서 배란 단순히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배란 복식호흡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근원적인 생명력을 기르는 곳을 가리킨다.
눈을 버리고 배를 취한다 함은 감각기관에서 얻을 수 있는 값싼 쾌락을 버리고 깊은 생명력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외부로 향하는 감각기관을 닫고 생명력을 기른 뒤에야 비로소 두 번째 단계인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단계부터 본격적인 마음 닦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날카로움을 꺾는다는 것은 마음의 모난 부분을 꺾는 것을 말하고, 얽힘을 푼다는 것은 마음속의 여러 가지 얽혀 있는 매듭을 푸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모난 사람은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마음 편히 쉴 날이 없다. 그리고 마음에 얽힘이 많은 사람도 마음이 고요할 날이 없다.
모난 마음이 둥글어지고 얽힌 매듭들이 풀릴 때 비로소 마음은 고요해지고 텅 비게 된다. 그것이 바로 허정(虛靜)의 경지다.
노자는 허정의 극치에 이르렀을 때 천하만물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천하만물이 원래 나왔던 곳이자 다시 돌아가는 그곳을 노자는 '도'라고 했다.
노자는 중국사상사에서 최초로 우주의 본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도를 이야기함으로써 중국철학은 실로 엄청난 풍성함과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체론을 제기한 고대 동서양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노자의 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철학적인 사색이나 추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신비체험 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 '도덕경' 14장과 25장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며 만지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미(微)'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궁구하여 밝힐 수도 없는 것인데, 어우러져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위가 밝지도 않고 그 아래도 어둡지 않으며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름을 지을 수 없으니 무(無)로 되돌아간다.
이를 이름하여 형체 없는 형체요, 형상 없는 형상이라 하며 '홀황(惚恍)'이라고 한다.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르려고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어떤 것이 혼돈되어 이루어졌는데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네. 소리도 형체도 없는데 홀로 서서 변함이 없고 두루 운행하며 그치지 않아서 가히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네. 나는 그 이름을 몰라 글자로 나타내어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고 하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희미하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말로, 원래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어서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현묘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에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홀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황홀'과 같은 뜻으로 글자 순서만 뒤바뀐 것이다. '홀황'은 '희미'와 마찬가지로 어떤 형체나 형상을 넘어선 현묘한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감각적 쾌락, 종종 성적 쾌감이 극에 달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물론 명상에서 일상의 감각을 넘어선 깊은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감각적 쾌감과 관련시켜 쓰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런 감각적 쾌락이 극에 달하면 정신이 아득해서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자의 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희미'와 '홀황'의 경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원래 언어는 공적(公的) 약속이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 속에 담긴 뜻은 각 개개인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미묘한 주관적인 느낌을 설명하려고 할 때면 언어의 한계를 쉽게 느낀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인 오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체험 영역이 다르면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적도의 사람들에게 눈과 눈사람, 눈싸움 등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상상해보자. 아무리 많은 단어를 동원한다 해도 제대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일상적 오감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역대 이래 전 세계의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노자 또한 '희미'와 '홀황'의 깊은 경지에서 체험한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자신들만의 이미지를 더하기 때문에 노자가 체험한 그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게 된다. 그 때문에 노자는 '도덕경'의 첫머리에서 '도를 가히 도라고 하면 항상 있는 도가 아니다'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노자는 양생의 단계와 수심의 단계를 거쳐 일반적인 수양에서 최고의 경지로 여기는 현묘한 도의 세계를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인 화광동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빛이란 깨달음의 빛 또는 거기서 나오는 성스러움의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수도나 명상 등을 통해 일상적인 감각과 개념의 지배를 벗어나 깊은 내면세계 또는 초월적인 세계를 체험하게 되면, 그 눈이나 얼굴에서 무언가 성스러움의 광채가 나오게 된다.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유대의 선지자들은 야훼의 계시를 받거나 야훼를 만났을 때 빛을 체험하고 그 빛이 그들의 얼굴에도 나타나곤 했다.
예수 또한 마찬가지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또한 그러하며 높은 경지에 오른 인도의 요가 수행자나 이슬람교의 성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이 빛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빛은 아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보통 그것을 후광(後光)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명상을 통해 영안을 각성시킨 사람들은 실제로 후광을 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비적 이야기는 논외로 하자.
어쨌든 성자들에게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성스러움의 아우라(Aura)가 있다. 그 때문에 동서양의 대부분의 종교적인 성화(聖畵)에서 성자들의 머리 뒤에 그려진 후광을 볼 수 있다.
예수, 석가, 크리슈나, 마호메트 등의 종교 창시자나 신의 화신은 물론이고, 그 추종자들 가운데서도 성스러운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후광이 나타나고 있다.
중세의 유명한 수도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의 초상화를 비교해보면 공간적, 시간적,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르지만 머리 뒤에서 성스러움의 후광이 나타나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볼 때 무언가 있기는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를 체험한 노자 또한 분명 그런 성스러움의 빛이 뿜어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티끌과 어울려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티끌이란 당연히 빛과는 대립되는 개념으로 범속함의 세계를 상징한다. 화광동진이란 바로 깨달음의 성스러운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 보통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뜻한다.
화광동진을 중심으로 한 노자의 수행 과정을 도형으로 표시하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대교약졸과 마찬가지로 나선형의 구조다.
처음에는 범속함에서 출발한다. 그러다가 색태폐문과 좌예해분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면 성스러운 빛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화광동진을 통해 성스러움의 빛을 부드럽게 해 감추고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여기서 화광동진을 하고 난 이후의 범속함은 물론 처음의 범속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겉으로는 범속해보지만 속으로는 범속하지 않다.
깨달음의 빛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범속함과 성스러움이라는 대립적인 양자가 통합되면서 더 높은 차원의 성스러움으로 나아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범속함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성스러움을 전혀 모른다. 이것은 분명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그러나 수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스러움에 도취되어 범속함을 멀리한다. 그것 또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노자는 범속함과 성스러움을 통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차원 더 높은 성스러움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자가 택한 통합의 구조는 나선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감추기'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겉으로는 마치 되돌아오기로 보인다.
화광동진은 사실 대교약졸과 너무나 비슷하다. 나선형 구조는 물론이고 감추기를 중시하는 것도 똑같다.
실제로 대교약졸의 구절에서 중간의 '교'자와 '졸'자만 성스러울 '성'자와 범속할 '범'자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대성약범(大聖若凡)이 된다. 이 말은 '크게 성스러운 것은 범속한 것처럼 보인다'고 풀이할 수 있다.
대성약범은 화광동진을 문자만 바꾼 것으로 그 속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다. 이로 보아 노자의 대교약졸의 나선형 논리는 바로 노자의 수양 과정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노자는 나선형과 감추기의 구조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냥 개인적인 수양을 통해 스스로 깨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치게 되었을까?
노자와 관련한 기록 어디에도 노자가 스승을 모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 노자처럼 깊은 지혜와 깨달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평범한 농사꾼으로 은둔하는 사람들은 기록에 많이 보인다.
이로 보아 노자가 체득한 화광동진의 논리는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토양 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화광동진이나 대교약졸이라는 말 자체가 노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당시 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경구였을 가능성도 있다.
더 크게 보면 나선형의 논리와 감추기 구조는 당시 중국 문화와 사상 전체의 토양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제10장에서 좀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자가 화광동진과 대교약졸을 최초로 서술했다는 것이고,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도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논리구조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노자의 사상이다.
그리고 노자가 화광동진이나 대교약졸을 서술함으로써 중국문화 속에 있는 그런 성향들은 더욱 구체화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설령 화광동진이 당시의 은자들의 경구였다 해도 그들은 대부분 단순한 감추기에 급급하여 그 속에 있는 통합의 의미를 간과한 데 비해 노자는 통합을 지향하면서 감추기를 했다는 사실이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도의 세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당시의 사회와 문명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정치고 사회인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작위(作爲)와 탐욕을 조장하는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비판하며, 그 결과로 수반되는 전쟁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노자의 화광동진은 단순한 감추기가 아니라 초월의 성스러움과 현실의 범속함을 통합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나선형적 발전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통합이 미완의 통합이라는 것이다. 노자는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처방책을 제시했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막연한 것이어서 부분적인 쓸모는 있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삶도 범속한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감추기에 치우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깨달음과 도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고, 결국 주나라를 떠나 철저한 은둔의 길을 택했다. 역사와 문명 밖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만약 노자의 감추어진 성스러움과 지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관문의 수문장 윤희의 깊은 안목이 없었다면 그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교약졸과 화광동진 사상은 실로 위대하다. 그것은 2천 5백 년의 긴 세월을 흐르면서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종교, 예술, 나아가 중국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상으로 대교약졸의 의미와 논리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대교약졸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인위적 기교와 자연스러움 가운데서 자연스러움을 더 높게 평가하고 그것을 지향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세계의 여타 문화권, 그 가운데서 특히 서양문화권과는 대별되는 중국문화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둘째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스러움과 인위적 기교미를 통합하면서 다시 자연스러움으로 회귀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중국문화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자, 이제 대교약졸, 이 짧은 넉 자의 구절을 나침반 삼아 다양한 갈래와 긴 역사를 지닌 중국문화의 심오한 세계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 제2장 대교약졸 속의 아름다움(美)
노자는 대교약졸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지향했을까?
사실 노자는 아름다움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도덕경 전체에서 아름다울 '美'자는 모두 아홉 번 나오는데, 대부분 동사나 형용사로서 서술어나 수식어로 쓰이고 명사로 쓰인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철학은 개념의 학문이다. 철학에서는 개념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명사가 중요하다.
도덕경 전체에 아름다움이라는 명사가 거의 없다는 것은 노자가 아름다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 노자가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명사로 사용한 부분을 보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아는데 이는 추함이고, 모두 선함을 선함이라고 아는데 이는 악함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상대적으로 생기고, 쉬움과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긺과 짧음이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높음과 낮음이 상대적으로 의지하며, 음과 성이 상대적으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상대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 도덕경 2장
여기서 노자는 아름다움이니 추함이니 선함이니 악함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은 항상 서로 짝을 이루어 존재하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이원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원성의 특징은 한쪽 끝을 잡으면 다른 한쪽 끝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석을 보라. 자석은 항상 N극과 S극 양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한쪽 극만 가지고 싶어서 자석을 잘라보라. 두 동강 난 S극의 한쪽 끝에는 다시 N극이 생기고 N극의 한쪽 끝 또한 S극이 다시 생긴다.
자석은 아무리 잘라도 항상 N극과 S극으로 나누어진다. 이원성의 세계에서는 한쪽 끝만 잡을 수는 없다. 한쪽 끝을 잡는 순간 반대편 끝이 어느새 다가와 있다. 다만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원성의 세계에서 아름다움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름다움을 잡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추함도 같이 잡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이원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것도 저것도 잡으려고 하지 않는 무위를 강조했다.
장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움이나 추함에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것임을 강조했다.
장자는 춘추시대 최고의 절색이었던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을 예로 들면서 '서시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여기는 대상이지만, 물고기가 그를 보면 물 깊숙이 숨고 새가 그를 보면 하늘 높이 날며 고라니나 사슴이 그를 보면 재빨리 도망친다. 사람, 물고기, 새, 사슴 가운데 누가 천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참 재미있는 말이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매우 주관적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략적인 기준은 있고 그래서 거칠게나마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끄집어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이라는 것 또한 규모의 문제가 있다. 어느 집단 속에서는 통용되지만 다른 집단에 가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을 때 그것은 절대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집단의 주관적인 기준이다.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 사람들이 생각한 아름다움의 기준과 유럽 사람들이 생각한 아름다움의 기준과 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한 아름다움의 기준은 상당히 달랐다.
이 시대는 그 집단의 규모가 엄청나게 확장되어 대략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틀이 형성되어가는 중이다. 물론 대부분 서구적인 기준이다.
장자는 통이 참 큰 사람이다. 집단의 범주를 좀더 확장해서 아예 영장류, 어류, 조류, 포유류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는 서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영장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집단주관에 불과한 것이지, 어류나 조류, 포유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모든 인간이 다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 해도 그것 또한 전체 생물계에서 보면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지,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문제만이 아니라 선과 악, 참과 거짓에도 적용된다.
장자가 이런 말을 한 뜻은 결국 아름다움이니 추함이니, 선함이니 악함이니 하는 것들은 원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상대적인 것이니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이야기 정도가 될 것이다.
노자와 장자는 이렇게 아름다움에 대해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서 논한 바는 없다. 그러므로 대교약졸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결국 뒷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여기서 대교약졸의 아름다움으로 정련된 소박미(素樸美), 심오한 단순미(單純美), 숙성된 평담미(平淡美),분산된 통일미(統一美), 배경과의 조화미(調和美)를 들고자 한다.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 제3장 문학
중국문학의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중국문학의 원조인 시경(詩經)은 무려 3천여 년 전의 작품이다. 그러나 중국문학의 경이로운 점은 단순히 역사의 유구함에 있기보다는 안정성과 연속성에 있다.
사실 중국보다 더 오래된 문학작품을 지닌 나라는 많다. 그러나 중국처럼 3천 년 전의 고대의 작품이 이후로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이어져 나가는 나라는 없다. 어느 정도의 소양만 있으면 대략 2천 5백 년 전의 문헌도 독해할 수 있는 경우는 중국밖에 없다.
프랑스문학이나 영국문학이라면 어떨까? 1천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판독 불능이다. 중국문학에서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문이 지니고 있는 안정성 때문이다. 한문의 문법은 사실 춘추시대나 청나라 말기나 큰 차이가 없다.
도도한 장강과도 같은 유구한 역사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작품을 지니고 있는 중국문학은 3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부분적으로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크게 보았을 때 중국만의 독자성을 잘 보존해왔다.
이 장에서는 먼저 오랜 세월 고유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했던 중국의 고전문학이 서양문학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책의 주제인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양자를 비교하고자 한다.
사실 문화라고 하는 것, 특히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기술과는 달리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교와 졸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향이나 지향하는 바를 보았을 때 교와 졸로써 논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 다음으로는 중국문학 자체 내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교약졸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문학과 비교할 때는 주로 대교약졸의 일반적 의미를 중심으로 논하는 데 비해, 중국문학 자체의 발달을 논할 때는 대교약졸의 숨은 의미인 나선형적 발전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즉, 초기의 졸의 상태에서 교로 나아갔다가 그 교를 내재화하고 다시 졸로 돌아오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하 제9장까지는 모두 기본적으로 이 장의 이런 형식에 따라 서술했다.
🔘 제4장 회화
문학과 예술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학과 예술의 거리는 분명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거리보다는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문학의 한 갈래인 시와 미술의 한 갈래인 회화의 거리는 가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꼭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많은 시들이 회화의 소재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회화 속에 시를 써넣는 것도 흔하다. 그래서 시와 그림은 하나라는 시화일률론(詩畵一律論)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와 그림이 이렇게 가까운 것은 중국이 전반적으로 미분화의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시와 그림에서는 미분화가 아니라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와 그림은 처음부터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교약졸의 미학이 피어나는 송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중국회화와 서양회화의 차이를 비교하고 중국회화사의 흐름 속에서 대교약졸의 미학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과 비교를 해보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제5장 음악
회화 분야는 근대 서구회화의 거센 물결에도 불구하고 중국 나름대로의 독특한 미학과 예술성을 자랑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서양 학자들도 중국회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서양음악의 위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중국 고전음악은 사실 거의 설자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외롭게 전통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서점에 가봐도 중국회화에 대한 책은 산더미처럼 싸여 있지만 중국음악에 대한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는 음악은 회화와는 달리 책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회화가 공간예술이라면 음악은 시간예술이다. 공간예술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시간예술은 시간을 따라 공간에 퍼져나가고는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음악을 원하면 언제라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최근래의 일이다. 이 때문에 회화와는 달리 음악은 그 살아 있는 전체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저 낡은 책에 남아 있는 기록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악기들을 통해 옛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국음악의 미학을 설명하기란 회화에 비해서는 훨씬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 장에서는 주로 음악에 대한 개념, 음계, 악기 등을 중심으로 중국음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를 설명했다.
🔘 제6장 건축
건축은 예술의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나 중국의 자금성 등의 중요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건축물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가운데서도 잘 지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게다가 건축은 단순히 미적 요소를 즐기고 감상하는 예술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활동하고 사용하는 것이므로 유용성과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건축은 실용예술이다.
건축의 영역은 실로 광범위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주택, 성채, 궁전 등을 비롯해서 예배를 위한 종교사원, 죽은 사람을 위한 분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극장, 경기장 등이다.
그밖에 광장이나 정원, 성벽, 교각 등도 지금은 조경, 토목 분야로 분화되었지만 원래는 건축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면서도 문화를 잘 엿볼 수 있는 궁전, 사원 건축과 자연관을 잘 엿볼 수 있는 정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 제7장 태극권
중국 무협지를 보다보면 간혹 겉으로는 전혀 무술을 알 것 같지 않는 곱상하거나 평범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 실제로는 무공의 절정고수임이 밝혀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공의 경지가 아직 설익은 사람은 그 무공의 재주를 밖으로 발산하려고 하기 때문에 몸에서나 눈에서 범상치 않은 살기나 무기(武氣)가 뻗쳐 나오지만 무공의 경지가 무르익게 되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발산되는 살기나 무기를 안으로 거두어들여 겉으로는 오히려 평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바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되는 화광동진이나 기교의 최고 경지는 마치 서툰 듯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사상을 각색한 것이다.
중국에는 여러 가지 무술이 있지만 그 가운데 대교약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무술은 역시 태극권(太極拳)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권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극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태극권은 노자의 사상 가운데서도 대교약졸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면 대교약졸은 태극권과 구체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에 있는 것인지 살펴보자.
🔘 제8장 선종
대교약졸은 기교와 졸박함에 대한 말로 문학이나 예술 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종교와 사상에 대해서는 대교약졸보다는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을 지향하는 화광동진이나 대성약범(大聖若凡)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 장에서는 대성약범의 관점에서 인도에서 발흥하여 중국에 전래된 불교를 다루고자 한다. 사실 불교의 중국 전래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문명권간의 교류가 활발해진 근대 이전에 일어났던 문화교류 가운데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큰 규모와 심원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일반적으로 문명이나 문화는 발달한 지역에서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전파된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실제로 15~16세기까지만 해도 중국문명의 수준은 세계 어느 문명권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에 거듭 패배하면서도 그들의 과학 기술 문명은 인정했지만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존심을 꺾고 서양 문명과 문화 모두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은 다 같이 세계 주요 문명권의 하나로서 그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왕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엄청난 열정을 지니고 거의 일방적으로 불교의 학습에 매달렸다. 그 결과 인도의 문화와 사상은 중국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면 중국의 문화와 사상이 인도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 이런 일방적인 교류가 진행되었던 것은 바로 불교 속에 중국의 사상에는 없던 새로운 요소, 바로 종교적 성스러움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에서는 원래의 불교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데 비해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원형이 크게 바뀌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남방불교의 중요한 불교경전은 고대 인도어의 하나인 팔리어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팔리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다르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을 보지 산스크리트 원전을 보지 않았다. 번역되고 난 뒤에는 심지어 원전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도 있다. 그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중국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아예 인도에는 없던 새로운 불교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선종(禪宗)이다. 많은 학자들이 선종은 불교 중국화의 종점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중국적인 특색이 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관점에서 인도의 불교가 중국 종교사상과는 어떤 다른 점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중국에 와서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 제9장 유교
유가, 유교, 유학은 그 어감이 조금씩 다르다. 유가는 제자백가의 하나로서 사상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 유교는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종교의 의미가 강하며, 유학은 학문으로서의 느낌이 강하다.
이 세 단어는 서로 혼용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구분되어 쓰이기도 한다. 이 장에서는 주로 유교의 종교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기 때문에 유교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썼다.
유교는 중국문화의 중심축이고 그 영향력도 가장 심대하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 위세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화를 좀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대성약범(大聖若凡)의 관점에서 유교가 지니고 있는 종교성을 검토하고,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조명했으며, 마지막으로 대성약범의 관점에서 유교의 발달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 제10장 중국문화사의 흐름
지금까지 대교약졸의 사상과 미학을 나침반 삼아 중국의 문학, 회화, 음악, 건축, 태극권, 선종, 유교 등의 영역을 두루 여행했다. 이제는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중국문화 전체의 거대한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앞에서 문화, 예술, 사상 등은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서는 왕조의 흥망사를 중심으로 중국문화사의 대략적인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그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들이 명멸했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첫머리에 나오는 '천하의 대세란 분열된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된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는 말처럼 분열과 통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분열과 통일의 반복 속에서 수도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문화의 꽃이 피고 지곤 했다.
여기서는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기나긴 중국사를 크게 네 시기로 나누고자 한다.
우선 아득한 상고시대에서 한대까지를 첫 번째 시기로 했다. 이 시기는 문화사 전체로 볼 때 아직까지는 졸(拙)의 시기이자 범속함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위진남북조에서 당대 전기까지로 문화, 예술, 사상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교와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시기이자 교(巧)의 시기다.
세 번째 시기는 당대 후기에서 송대까지로, 교를 넘어서 다시 졸로 돌아오는 시기로서 대교약졸의 미학이 피어나던 시기다. 즉, 중국문화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기인 원, 명, 청대는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발전은 별로 없는 답보의 시기다.
🔘 제11장 중국문화와 한국문화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 문화의 종주국은 중국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입장에 있었다.
사실 한국의 전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나 불교는 모두 중국을 통해서 수입된 것이고 그 밖의 정치제도나 문물제도,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서 중국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다 같은 중국문화권에 속한 지역이지만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는 개성이 훨씬 강한 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소중화라고 불릴 정도로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는 측면이 많았고, 그래서 동양문화사를 전공하는 외국인들도 한국은 중국의 축소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바라보면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는 한국만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한국문화와 중국문화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다. 여기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두 나라 문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제12장 대교약졸의 현대적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대교약졸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나아가 중국과 한국의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면 대교약졸은 이 시대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저 과거 동아시아 문화의 하나의 특징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교약졸 속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교약졸 속에는 현재 인류문명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짚어보고 문명전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 大(클 대/큰 대, 클 대, 클 다)는 ❶상형문자로 亣(대)는 동자(同字)이다. 大(대)는 서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본 모양으로, 처음에는 옆에서 본 모양인 人(인)과 匕(비) 따위와 같이, 다만 인간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나중에 구분하여 훌륭한 사람, 훌륭하다, 크다의 뜻으로 쓰였다. ❷상형문자로 大자는 '크다'나 '높다', '많다', '심하다'와 같은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大자를 보면 양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크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大자는 기본적으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정도가 과하다는 의미에서 '심하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러니 大자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大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크다'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사람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大자가 본래 사람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大(대)는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 큰, 으뜸가는, 뛰어난, 위대한, 광대한, 대단한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존경(尊敬) 또는 찬미(讚美)의 뜻도 나타냄 (3)큼. 큰 것 (4)큰 달. 양력으로 31일, 음력으로 30일인 달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대) ②높다, 존귀하다(대) ③훌륭하다, 뛰어나다(대) ④자랑하다, 뽐내다, 교만하다(대) ⑤많다, 수효(數爻)가 많다(대) ⑥중(重)히 여기다, 중요시하다(대) ⑦지나다, 일정한 정도를 넘다(대) ⑧거칠다, 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대) ⑨낫다(대) ⑩늙다, 나이를 먹다(대) ⑪대강(大綱), 대략(大略)(대) ⑫크게, 성(盛)하게(대) ⑬하늘(대) ⑭존경하거나 찬미(讚美)할 때 쓰는 말(대) 그리고 클 태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정도가 지나치다)(태) ⓑ지나치게(태) 그리고 클 다의 경우는 ㉠크다, 심하다(다) ㉡극치(極致), 극도(極度)(다) ㉢지나치게(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위(偉), 클 굉(宏), 클 거(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작을 소(小), 가늘 세(細)이다. 용례로는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큰 일을 대사(大事), 크게 구분함을 대구분(大區分), 일이 진행되는 결정적인 형세를 대세(大勢), 크게 길함을 대길(大吉), 조금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음을 대동(大同),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큰 규격이나 규모를 대형(大型), 크게 어지러움을 대란(大亂), 사물의 큼과 작음을 대소(大小), 크게 이루어짐을 대성(大成), 크게 웃음을 대소(大笑), 넓고 큰 땅을 대지(大地), 넓혀서 크게 함을 확대(廓大), 가장 큼을 최대(最大),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뛰어나고 훌륭함을 위대(偉大), 매우 중요하게 여김을 중대(重大), 마음이 너그럽고 큼을 관대(寬大), 엄청나게 큼을 거대(巨大), 형상이나 부피가 엄청나게 많고도 큼을 방대(厖大), 더 보태어 크게 함을 증대(增大),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또는 만년이 되어 성공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대기만성(大器晩成), 넓고 큰 바다에 물방울 하나라는 뜻으로 많은 것 가운데 아주 작은 것이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대해일적(大海一滴), 넓고 넓은 바다에 떨어뜨린 한 알의 좁쌀이란 뜻으로 매우 작음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대해일속(大海一粟), 거의 같고 조금 다름이나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대동소이(大同小異),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는 뜻으로 큰 의리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의를 버림 또는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버림을 일컫는 말을 대의멸친(大義滅親),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 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중대한 의리와 명분을 이르는 말을 대의명분(大義名分), 큰 집과 높은 누각이라는 뜻으로 웅장하고 큰 건물을 이르는 말을 대하고루(大廈高樓), 크게 깨달아서 번뇌와 의혹이 다 없어짐을 이르는 말을 대오각성(大悟覺醒), 장군의 별칭으로 매사에 겸손하고 말 없이 수고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대수장군(大樹將軍), 큰 재목이 작게 쓰이고 있다는 뜻으로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됨을 이르는 말을 대재소용(大材小用),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슬피 욺을 일컫는 말을 대성통곡(大聲痛哭), 몹시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대경실색(大驚失色), 크게 간사한 사람은 그 아첨하는 수단이 매우 교묘하므로 흡사 크게 충성된 사람과 같이 보임을 이르는 말을 대간사충(大姦似忠), 바라던 것이 아주 허사가 되어 크게 실망함을 일컫는 말을 대실소망(大失所望), 매우 밝은 세상을 이르는 말을 대명천지(大明天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나 정도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을 대도무문(大道無門), 덕이 높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초연함 곧 도량이 넓어서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대인대이(大人大耳), 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명정대하여 잔재주를 부리지 않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말을 대지여우(大智如愚) 등에 쓰인다.
▶️ 巧(공교할 교)는 ❶형성문자로 丂(교)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장인공(工; 만들다)部와 음(音)을 나타는 글자 丂(교)로 이루어졌다. 巧(교)는 솜씨의 공교함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巧자는 '공교하다'나 '솜씨가 있다', '교묘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巧자는 工(장인 공)자와 丂(공교할 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본래 '공교하다'라는 뜻은 丂자가 먼저 쓰였었다. 丂자는 사물의 휘어짐을 표현한 것으로 '책략'이나 '재주'를 뜻하기 위해 만든 모양자이다. 巧자는 여기에 '장인'을 뜻하는 工자를 더해 기술이나 기능이 뛰어남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니 丂자는 옛 글자이고 巧자는 후에 뜻을 명확하게 하도록 工자를 더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巧(교)는 ①공교하다(工巧--: 솜씨나 꾀 따위가 재치가 있고 교묘하다) ②솜씨가 있다 ③예쁘다 ④아름답다 ⑤약삭빠르다 ⑥재주 ⑦책략(策略) ⑧작은 꾀 ⑨공교히(工巧-) ⑩교묘(巧妙)하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묘할 묘(妙),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옹졸할 졸(拙)이다. 용례로는 솜씨나 꾀가 재치 있고 약삭바름을 교묘(巧妙), 재치 있는 말을 교변(巧辯), 공교롭고 슬기가 있음을 교혜(巧慧), 재치 있게 하는 교묘한 말을 교설(巧舌), 교묘하게 속임을 교위(巧偉), 교묘하게 꾸며 맞춤을 교구(巧構), 교묘하고 민첩함 또는 재빠름을 교민(巧敏),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임을 교사(巧詐), 교묘함과 졸렬함 또는 익숙함과 서투름을 교졸(巧拙), 교묘한 거짓을 교고(巧故), 교묘하고 정밀함을 교밀(巧密), 교묘한 솜씨를 교수(巧手), 약삭빠른 슬기를 교지(巧智), 교묘하기는 하나 느림을 교지(巧遲), 간교하고 흉악함을 교악(巧惡), 간교하게 비위를 맞춤을 교중(巧中), 간교하게 모함함을 교함(巧陷), 교묘한 재주를 교기(巧技), 손재주가 있는 부인을 교부(巧婦),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을 교설(巧說),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또는 재치 있는 말을 교언(巧言), 음력 7월의 다른 이름을 교월(巧月), 솜씨 있는 사람이나 어떤 일에 숙련되어 있는 사람을 교자(巧者), 약삭빠른 지혜 또는 교묘한 재주와 지혜를 교지(巧知), 뜻밖의 사고로 공교롭게 기회를 놓침을 교위(巧違), 교묘하게 아첨함을 교유(巧諛), 솜씨가 교묘한 목수를 교장(巧匠), 정교하고 치밀함을 교치(巧緻), 정밀하고 교묘함을 정교(精巧), 솜씨가 아주 묘함을 기교(技巧), 뜻밖에 맞거나 틀림을 공교(工巧), 영리한 슬기와 기묘한 기교를 혜교(慧巧), 간사하고 교사스러움을 간교(奸巧), 여러 모로 빈틈없이 생각하여 낸 꾀를 계교(計巧),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묘히 꾸며서 하는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을 이르는 말을 교언영색(巧言令色), 교언은 시비를 어지럽게 하고 인덕을 잃게 함을 이르는 말을 교언난덕(巧言亂德),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졸렬한 듯하다는 말을 대교약졸(大巧若拙),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만든다는 말을 욕교반졸(欲巧反拙), 지나치게 솜씨를 부리다가 도리어 서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농교성졸(弄巧成拙), 사람의 타고난 성품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하고 공교롭게 쓰는 수단이나 방법을 일컫는 말을 선교방편(善巧方便), 그때 그때에 따라 교묘한 수단을 쓴다는 말을 기변지교(機變之巧),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아 취한다는 말을 교취호탈(巧取豪奪), 교묘하게 훔치고 무리하게 빼앗는다는 말을 교투호탈(巧偸豪奪), 교지는 졸속만 못하다는 뜻으로 뛰어나지만 늦는 사람보다 미흡해도 빠른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을 교지졸속(巧遲拙速) 등에 쓰인다.
▶️ 若(같을 약, 반야 야)은 ❶회의문자로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右(우; 오른손, 손으로 물건을 잡는 일)의 합자(合字)이다.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캐는 일의 뜻으로 만약의 뜻으로 쓰임은 가차(假借)의 뜻이다. ❷상형문자로 若자는 '같다'나 '만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若자는 艹(풀 초)자와 右(오른쪽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若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갑골문에서는 양손으로 머리를 빗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갑골문에서의 若자는 '온순하다'나 '순종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금문에서부터는 여기에 口(입 구)자가 추가되면서 '허락하다'라는 뜻이 더해졌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若자가 '같다'나 '만약'과 같은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言(말씀 언)자를 더한 諾(허락할 낙)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若(약, 야)은 ①같다 ②어리다 ③이와같다 ④좇다 ⑤너 ⑥만약(萬若) ⑦및 ⑧이에(及) ⑨바닷귀신 ⑩어조사(語助辭) ⑪성(姓)의 하나 그리고 ⓐ반야(般若;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야) ⓑ난야(蘭若; 사찰)(야) ⓒ성(姓)의 하나(야)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정도나 양 따위가 얼마 되지 아니함을 약간(若干), 어떠함을 약하(若何),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약혹(若或), 바둑에서 아직 어리석은 경지에 있다는 약우(若愚), 무덤이 집 모양과 같음 또는 그런 무덤을 약당(若堂), 자기의 몸이나 뜻이 더럽혀질 것과 같이 생각함을 약매(若浼), 갓난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같이 함을 약보(若保), 이와 같이를 약시(若是), 이렇게를 약차(若此), 만일이나 혹시를 만약(萬若), 과연이나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를 과약(果若),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과 참모습을 환히 아는 지혜를 반야(般若), 늙은이와 젊은이를 노약(老若), 가정하여 말하자면을 기약(假若),큰 일을 당하여도 아무렇지 않고 침착함을 자약(自若),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란 뜻을 이르는 말을 약팽소선(若烹小鮮), 부절을 맞추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꼭 들어맞아 조금도 틀리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약합부절(若合符節), 있는 둥 마는 둥을 일컫는 말을 약존약망(若存若亡), 이러 이러함을 일컫는 말을 약시약시(若是若是), 자기 나라와 힘이 대등한 나라를 얻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훌륭한 인재를 얻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약득일적국(若得一敵國),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방약무인(傍若無人),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함을 이르는 말을 명약관화(明若觀火), 마음에 충동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고 천연스러운 것을 이르는 말을 태연자약(泰然自若), 대문 안 뜰이 저자와 같다는 뜻으로 집안에 모여드는 사람이 많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문정약시(門庭若市), 문 앞이 시장과 같다는 뜻으로 대문 앞에 시장이 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는 말을 문전약시(門前若市) 등에 쓰인다.
▶️ 拙(졸할 졸)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서툴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出(출, 졸)로 이루어졌다. 손재주가 남보다 서툴다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拙자는 '옹졸하다'나 '둔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拙자는 手(손 수)자와 出(날 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出자는 발이 입구를 벗어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나가다'나 '떠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拙자는 본래 '둔하다'나 '서툴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래서 '나가다'라는 뜻의 出자에 手자를 결합해 '손이 나가다' 즉 '손재주가 별로이다' 라는 뜻을 표현했었다. 정밀한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손이 자꾸 엇나간다는 것을 出자를 응용해 표현한 것이다. 拙자는 후에 일을 잘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어리석다'나 '옹졸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拙(졸)은 ①옹졸(壅拙)하다, 졸(拙)하다 ②둔(鈍)하다, 어리석다 ③질박(質樸)하다(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④서툴다 ⑤불우(不遇)하다, 곤궁(困窮)하다 ⑥저(겸사/謙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못할 렬(劣),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공교할 교(巧)이다. 용례로는 서투르지만 빠르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서둘러 함으로써 그 결과나 성과가 바람직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졸속(拙速), 옹졸하고 비열함을 졸렬(拙劣), 보잘것 없거나 서투른 전투 또는 시합을 졸전(拙戰), 보잘것없는 작품을 졸작(拙作), 자기의 원고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졸고(拙稿), 변변치 못한 서투른 글 못 지은 글을 졸문(拙文), 졸렬한 계책으로 자기의 계책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졸책(拙策), 서투르게 쓴 원고라는 뜻으로 자기의 원고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졸고(拙稾), 늙은이가 자기 스스로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졸로(拙老),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졸부(拙夫), 자기의 아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졸처(拙妻), 자기를 겸손하여 이르는 말을 졸생(拙生), 자기의 의견이나 의사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졸의(拙意), 성질이 고지식하고 조금도 변통성이 없음을 졸직(拙直), 보잘것없는 의견이나 견해를 졸견(拙見), 재주가 둔하고 말을 떠듬거림을 졸눌(拙訥), 아주 재미가 없고 졸망하게 생긴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을 졸보(拙甫), 유치하고 졸렬함을 치졸(稚拙),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고 생각이 좁음을 옹졸(壅拙), 면밀하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함을 소졸(疏拙), 용렬하고 졸렬함을 용졸(庸拙), 예스럽고 솜씨가 서투름을 고졸(古拙), 말솜씨가 없음을 언졸(言拙), 자기의 변변하지 못한 점을 감춤을 장졸(藏拙), 말솜씨가 없음을 어졸(語拙), 둔하고 서투름 또는 그 모양을 둔졸(鈍拙), 성품이 단아하나 고지식함을 아졸(雅拙), 어리석고 못남을 우졸(愚拙), 융통성이 없고 옹졸함을 구졸(拘拙), 부끄러움이 많고 수줍음을 수졸(羞拙), 데면데면하고 보잘것 없음을 건졸(蹇拙), 자신의 졸렬한 점을 드러냄을 노졸(露拙), 어리석음을 지키고 본성을 고치지 않음을 수졸(守拙), 잘 만들려고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너무 잘 하려 하면 도리어 안 됨을 이르는 말을 욕교반졸(欲巧反拙), 지나치게 솜씨를 부리다가 도리어 서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농교성졸(弄巧成拙), 서투른 것을 보충하는 데에는 부지런함이 으뜸이라는 말을 근장보졸(勤將補拙), 교지는 졸속만 못하다는 뜻으로 뛰어나지만 늦는 사람보다 미흡해도 빠른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을 교지졸속(巧遲拙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