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김강현 金康顯
氣喘突發猝逝20年過去了
你我都長大了只有鄧麗君依舊人靚歌甜追憶裡難忘寸寸昨日
1995년 5월 8일 밤
덩리쥔은 태국 치앙마이에서 천식이 갑자기 생겨 돌연 세상을 떠난지 스무해가 지났고,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었지만, 오로지 덩리쥔의 변합없는 아름다운 자태와 감미로운
노래의 추억 속에서 지난 날 하나 하나를 잊기 못하네
전언
그녀는 아시아의 가희. 애국 연예인, 최초이면서도 영원한 군인의 연인이었고, 십억명의 박수소리를 들었으며,
두루 일본, 해협 양안, 동남아의 일대 전설로 인기를 끌었다.
이런 칭호들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며,그녀는 어떤 칭호나 상장도 결코 필요하지 않는데,
그녀의 노래는 바로 모든 것을 대표하는 데 왜냐하면 그녀가 등려군이기 때문이다.
덩리쥔은 단지 한 시대의 유행음악 가수 이상으로, 가요계의 천왕 劉德華, 여왕 王菲 등
수많은 아이돌의 우상으로, 더욱이 대만 ,중국대륙, 심지어 세계 각지의 중화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圖說:1981年鄧麗君於金鐘獎頒獎典禮演唱)
1981년 덩리쥔이 금종상 시상식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鄧麗君甜美歌聲溫婉形象永留世人心中)
덩리쥔의 달콤한 노래와 따스하고 포근한 자태가 영원히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 있다
鄧麗君是1970-90年代的超級巨星,發行過的歌曲高達2000首,在台灣、日本、美國、星馬開過無數演唱會。對於 歌迷來說,她是遠在天邊的明星,也是近在眼前的鄰家女孩。她的歌聲,和那一代人生活中的悲歡離合緊緊交織。歌迷們聽著她的歌聲,追憶的是自己的人生 ─ 那些由鄧麗君的歌聲陪伴著走過的酸甜苦辣。
덩리쥔은 1970-90년대의 슈퍼스타로, 발표한 노래가 2000 곡을 넘었고,
대만,일본,미국,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등지에서 수많은 공연을 열었다.
팬 입장에서 그녀는 멀리 있다면 저 멀리에는 스타이지만, 가까이에 있다면
바로 눈앞에 있는 이웃집의 소녀이었다. 그녀의 노래는 한 시대의 생활속에
슬픔 기쁨의 만남과 헤어짐이 서로 단단히 얽혀져 있었다.
팬들이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서 ,떠올리는 것은 자기의 삶 -
이들은 덩리쥔의 노래를 통하여 겪었던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이끌어낸다.
그녀의 서세 소식은 대만을 뒤흔들어서, 여러 신문의 제일면과 나머지 3면도 모두 장식을 하였다.
이렇게 몇해동안 그녀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없었는데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조금은
줄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매년 그녀의 생일 기일에 세계 각지에서 팬들이 그녀의 묘소 앞으로 와서 꽃을 바치고 있고,
그녀가 태어난 운림현의
옛집에 가서 추모를 하며, 텔리비젼 방송국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연속극을 제작하며,
기념 공연을 열고 있다.
올해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스무 해이어서, 우리들은 함께 대 스타의 면모를 회고하며
그녀의 매력을 느끼고 있다.
(1995年5月10日,鄧麗君辭世消息震撼台灣,各大報均以頭版篇幅報導)
1995년 5월 10일 덩리쥔이 세상을 떠난 소식이 대만을 뒤흔들어서, 여러 신문사가 일제히 제1면에 보도를 하였다.
전방 초소에 있는 그대
덩리쥔은 군인 가족 출신으로 마치 어느 누구보다도 아주 많은 애국심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는데,
더욱이 군 위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상이었다.
어린 시절, 노래를 흥얼거리기 좋하던 어린 소녀 덩리쥔은 이미 군대의 康樂隊를 따라서 도처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설령 인기가 많던 시절에도 그녀는 언제나 군 위문 자선 공연 참여를 하여서,막대한 수입이 들어오는
상업공연 기회를 포기 하기를 차라리 바랬다.이런 진심의 오랜 참여로 덩리쥔은 국군 장병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서 지금도 흔들지 않으며,「軍中情人」이라는 4 글짜를 언급하기만 하면
아무리 오래 되어도 첫째로 떠오르는 이름은 여전히 덩리쥔이다.
(1966年,16歲的鄧麗君(右2)拿到歌星證。左起:張帝、韓菁菁、鄧麗君、涂昭美)
1966년 16살의 덩리쥔(우 2) 이 가수증를 쥐고 있다. 왼쪽부터 張帝、韓菁菁、鄧麗君、涂昭美
그 중에서 흥미있고 인상 깊은 것은 1981년 「君在前哨」텔레비젼 특집을 능가하는 것은 없었다.
합동으로 건국 70년 경축 활동을 위하여 덩리쥔은 잇달아 한달 동안「long stay」군 위문 공연을
하러 여러 군사기지를 두루
다녔는데 당시에 여전히 잠수병사들이 출몰하는 진먼도의 최전선 烈嶼 섬도 포함되어 있었다.
(截自youtube,「君在前哨」)
(截自youtube,「君在前哨」)
그때 그녀는 이미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군장을 갈아입고 악단도 없이 도와주는 사람도 동반하지 않고
국군 형제들과 더불어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함께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며 웃으며 병사들을 위하여 땀을 흘렸고,
손에 손을 잡고서 춤을 추며, 게다가 철모를 병사들과 함께 쓰고서 체조를 하였는데, 너무나 큰 철모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떨어져 덩리쥔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개구장이 웃음을 보이며 잇달아 머리에 썼었다.
오늘 돌아보면 이런 진심을 드러내며 한 마음으로 봉사하던 대 스타는 전에도 없고 아마 뒤로도 없을 것이다.
(鄧麗君勞軍,1980年)
(鄧麗君勞軍,1980年)
오로지 군 위문 자선 공연에 대하여 그녀는 언제까지나 도의상 거절하지 못하고 가장 먼저 참여하였다.
그녀가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기 마지막으로 한 차례 공연을 열었데 역시 1994년의 「永遠的黃埔:영원한 황푸 」야간 공연을 바쳤다.
(截自永遠的黃埔)
심지어 조금은 지나친 면도 있지만,만일 당시의 사회분위기로 돌아가서 다시 덩리쥔 본인의 성장 배경을 생각하여 본다면
「枕戈待旦」、「毋忘在莒」를 여전히 믿던 시절에서 완전히 일어난 감정의 기초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軍中情人」덩리쥔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언제 천진하고 아름답던 추억이 아니라고 한적이 있었는가?
(鄧麗君是永遠的軍中情人,1991年)
일본 가요계에서 테레사 텡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녀는 아마도 쟁쟁한 대 스타 일것이다. 매우 배타적인 일본 공연계 속에서
그녀는 많은 팬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연속으로 3년간 동시에 전 일본 유선방송 대상, 일본 유선 음반 대상
일등상을 차지 하였다.
당신은 이 테레사 텡이 도대체 누가인가 의심할 것이다 맞습니다
그녀는 바로 덩리쥔 입니다
(日本歌壇大名鼎鼎的Teresa Teng)
일본가요계에서 명성이 대단한 덩리쥔
70년대초 동남아에서 이미 대스타인 덩리쥔은 일본의 polydor 음반회사의 중개인 舟木稔의 마음에 들어서
도오쿄오로 가서 발전하였다.
(1973年,舟木稔到香港說服鄧麗君進軍日本市場;鄧麗君手中拿著唱片公司的企劃書。)
1973년 舟木稔이 홍콩에 와서 덩리쥔의 일본 시장 진출을 설득하였다. 덩리쥔이 손에 음반회사의 기획서가 들려 있다.
(鄧麗君在唱片公司安排下赴日本,到京都觀光。)
덩리쥔이 음반회사의 배려로 일본에 건너 가서 교토에서 관광을 하고 있다.
일단 시작하였지만 결코 순조롭지 않아서 음반 판매고는 보통 이었고 심지어 또한 수초 간의 촬영을 위하여 우두커니 촬영기 앞에서
온종일 앉아있는 비통한 경험도 있었다. 이후로 1974년 「空港」이 인기를 모아서, 그녀는 일본에서 첫번째 상;최우수 신인 가수상을 확실히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덩리쥔은 일본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뷰를 하게 되고 이름을 내게 되었다.
(鄧麗君與舟木稔1993年在香港合照,鄧麗君比出招牌「勝利」手勢。)
덩리쥔과 舟木稔은 1993년 홍콩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덩리쥔은 승리를 나타내는 손짓을 하고 있다
80年代中期,鄧麗君在日本歌壇再創高峰,多次入選NHK招牌跨年節目「紅白歌唱大賽」,並連續3年以「償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我只在乎你」日文原曲)」, 創下同時蟬聯全日本有線放送大賞、日本有線唱片大賞冠軍的驚人成績,就算對日本本地歌手來說,這項紀錄都是至今難以突破的「障礙」。
80년대 중반 덩리쥔은 일본 가요계에서 다시 전성기를 만들어 내는 데 여러번 NHK 초청의「紅白歌唱大賽」연말 대회에 뽑혔고
아울러 연속 3년 「償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我只在乎你」日文原曲)」으로 동시에 전 일본 유선 방송 대상,
일본 유선 음반 대상 일등상의 경이로운 성적을 만들어 내었는데, 설령 일본 출신 가수라 하더라도 이런 기록은 정말로 지금껏
돌파하기 어려운 장벽일 것이다.
(鄧麗君在日本發行過許多專輯,辭世之後仍有各式影音產品問世。)
덩리쥔이 일본에서 수많은 특집을 출시하였는데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형식의 비디오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다른 나라의 무대에서 덩리쥔은 자기가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를 조금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중요한 무대에서 공연을 열때면 그녀는 언제나 고심하여 중국 특징이 갖추어진 옷으로 바꿔입었다.
여러 가지 화려한 치파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홍백전 공연때 「愛人」를 부를 때 그녀는 더욱이
단아하고 섹시함이 온몸에 스며든 당나라의 미녀로 화장을 하였다.
그녀의 고귀한 품위와 잘 어우러져서 설령 30 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출중하고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截自youtube,1985年鄧麗君初次登上紅白舞台)
1985년 덩리쥔이 홍백무대에 첫 등단함
1995년 덩리쥔이 태국에서 급서 하자, 일본의 많은 팬들은 모두 다 정말로 슬퍼하였고, 덩리쥔의 영면 묘소 新北市金寶山
묘원은 수많은 일본 대만 방문객이 반드시 찾는 장소가 되었다.
2007년 일본 아사히 텔레비젼은 특히 당시 인기 여배우인木村佳乃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극「台灣歌姬鄧麗君」을 요청하였다.
비록 木村佳乃는 똑같이 아름답게 웃었지만 그녀가 입은 치파오는 조금은 그다지 멋이 적었다.
좀더 많이 그리워하거나 추모를 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다시는 제2의 덩리쥔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在「台灣歌姬」中扮演鄧麗君的日本女星木村佳乃)
대만 가희에서 덩리쥔으로 출연한 일본 여배우 木村佳乃
(鄧麗君1981年著旗袍於金鐘獎頒獎典禮上演唱)
덩리쥔이 1981년 치파오를 입고서 금종상 시상식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小鄧 만이 있으면,老鄧은 필요가 없다
일본 시장을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것과 동시에 덩리쥔의 노래는 또한 중국대륙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래는 철의 장막 아래의 고생하는 심령을 녹였다. 대륙에서
「낮에는 老鄧(鄧小平)을 듣고,밤에는小鄧(鄧麗君)을 듣는다」、
「只要小鄧,不要老鄧;小鄧 만이 있으면,老鄧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다 「甜蜜蜜」,「何日君再來」몇 소절을 부를 수 있었다.
(小鄧魅力風起雲湧)
小鄧의 매력이 넘쳐나고 있다 (1982年,鄧麗君與反共義士吳榮根會面)
1982년 덩리쥔과 반공의사吳榮根이 만나다
陳可辛이 연출하고, 홍콩의 황금상을 휩쓴 영화「甜蜜蜜」은 중국어 영화계가 덩리쥔에게 경의를 보낸 작품이다.
대륙에서 홍콩으로 발전하는 張曼玉과 黎明은 같이 덩리쥔을 좋아하였기에 인연을 맺었다.
여러차례의 곡절을 겪으며 마지막에도 거리에서 서서 덩리쥔의 급서 뉴스를 보았기 떄문에 다시 만난다.
영화는 생동감 있게 그당시 대륙인의 덩리쥔을 미치도록 좋아하던 심정을 그려냈고
덩리쥔은 유행가 가수 이상으로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도 하였다.
(甜蜜蜜海報,取自甜蜜蜜官方微博)
첨밀밀 해외 포스터 첨밀밀 공식 사이트微博에서 제공받음
(甜蜜蜜海報,取自甜蜜蜜官方微博)
줄곳 중국대륙이 덩리쥔에게 최고의 개런티로 손짓을 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1980년 덩리쥔이 공연할 때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 내가 대륙에서 공연을 하는 그 날은 바로 우리의 삼민주의가 대륙에서 실현되는 그 날입니다。」
이 한마디가 비분강개를 불러 일으키어 무대 아래의 무수한 박수소리를 얻게 되었다.
나중에 중국대륙은 깨끗하게 그녀의 노래를 금지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듣은 덩리쥔은 웃으며 이야기 하였다
:「나의 노래는 대륙에서 전혀 인세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금지하는 것과 금지 하지 않는 것은 전혀 차이가 없어요。」
(截自youtube,1980年鄧麗君在國父紀念館舉行演唱會,左為主持人田文仲)
부모 양친 모두 중국대륙에서 왔기에, 덩리쥔은 중국대륙에 대해서 자연히 전혀 느낌이 없지 않았다.
1989년 5월 천안문 앞에서 민주를 싸우던 학생들을 위하여 덩리쥔이 머리에 「民主萬歲」라는 흰띠를 매고
가슴에는 간판을 걸고서 목이 쉰채로 「我的家在山的那一邊」을 불렀다.
몇년 뒤 파리에 정착한 그녀는 여전히 파리의 민주 운동 활동에 출석하여서
「 전제 정치와 타협하지 마라,폭정에 굴복하지 마라」하며 대중을 격려하였다.
(
截自youtube,鄧麗君在香港為聲援民運演唱,1989年)
민주운동 인사 吾爾開希는 덩리쥔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방송 매체에 그녀를 추모하는 글을 보냈다.
그는 70년 말의 중국대륙을 묘사하였는데, 덩리쥔의 노래는 「마치 암흑 속에서 저 멀리 작은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것
같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따스함을 느끼게 하였고, 희망을 느끼게 하였고 , 울게..... 하였다。」
이 노래는 하늘 위에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덩리쥔 노래의 매력이다
덩리쥔의 곡조 가사는 대부분 간단하고 글짜도 평이하고 선률도 어렵지 않다.
「甜蜜蜜,你笑得甜蜜蜜,好像花兒開在春風裡」,「小城故事多,充滿喜和樂」이거나
또는「你去想一想,你去看一看,月亮代表我的心」도 가사를 볼 필요가 없고 또한
무엇을 불러도 잘 알아들을 수 있고 두번 들으면 바로 한 소절은 흥얼 거릴 수 있다.
(小城故事)
이렇듯 고상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모두 좋아 하는 것, 게다가 덩리쥔의 따스함과 다소곳함의 독특함, 그리고
높은 음도 부담감을 주지않는 목소리이어서 모든 피곤함을 달래주고, 모든 정서가 슬프게 되고 쓸쓸하게 되고 방황하게 하였다.
비록 그녀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불렀던 전설적인 노래는 여전히 세상에서 불리워 지고 있어 사람 주변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덩리쥔은 사실 아직도 대중의 마음 속에 살아 있고 아직도 떠나지 않았다.
(中央社/童一寧、黃淑芳)
(2015年5月23日東京澀谷將舉辦鄧麗君逝世20年紀念演唱會)
덩리쥔 소개
1953年1月29日
出生於雲林縣褒忠鄉,是家裡的老四
운림현 포충향에서 태어 났으며 집안에서 4 째이다.
1964年
年僅11歲的鄧麗君參加中華廣播電台舉辦的黃梅調歌唱比賽,以一曲「訪英台」奪冠。
나이 겨우 열한 살때 덩리쥔은 중화 광파 라디오가 개최한
황매조 노래경연대회에 참가하여 「訪英台」노래로 일등을 차지 하였다.
1969年
中國電視公司開播,鄧麗君主持晚間黃金時段節目「每日一星」,並主唱中視首部電視連續劇「晶晶」主題曲,歌聲家傳戶曉。
1970年
被白花油及香港《華僑日報》加冕為「慈善皇后」,並邀約赴港登台。
백화유 와 홍콩 《華僑日報》에 의하여 「慈善皇后」의 왕관을 썼으며 아울러 홍콩으로 초대되어 무대에 올랐다.
1974年
鄧麗君赴日本發展,第2張單曲《空港》榮獲日本唱片大獎新人獎,這是她在日本獲得的第一個獎項。
덩리쥔은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하면서 두번째 싱글《空港》으로 일본 음반 대상 신인상을 차지 하였는데
1979年2月14日
鄧麗君持印尼護照入境日本引發軒然大波,日本將她驅離,一年內不能再踏上日本。擔心返台可能面對更多調查和媒體追問,她決定轉赴美國。也在這段期間,鄧麗君的歌曲在中國大陸愈來愈紅⋯⋯。
여권 파문
1979년 2월 14일
덩리쥔이 인도네시아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여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데,일본은 그녀를 추방하였으며
일년 이내에는 일본
에 들어 올 수 없게 되었다. 대만으로 돌아가게 되면 많은 조사와 방송매체의 취재를 걱정하여서,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시기에 덩리쥔의 노래는 중국대륙에서 점차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1980年
拿下金鐘獎最佳女歌星獎
금종상 확정
1980년
금종상 최우수 신인 여가수 상 차지함
1980年-1981年
政府派人與鄧麗君商議,若她返台勞軍、義演,當局便不追究護照事件。這年,鄧麗君回台舉辦演唱會,跑遍全台勞軍,錄製成「君在前哨」電視專輯,也贏得「軍中情人」名號。
정부는 사람을 보내서 덩리쥔과 상의를 하였는데,만일 그녀가 대만으로 돌아와서 군 위문 공연,자선 공연을
한다면 당국은 여권 문제를 추궁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때 덩리쥔은 대만으로 돌아와서 공연을 개최하였고
대만 전역을 두루 다니며 군 위문공연을 하며,「君在前哨」 텔레비젼 특집을 제작하였으며 아울러
「軍中情人」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1984年3月28日
1984年-1986年
以《償還》、《愛人》、《任時光從身邊流逝》(《我只在乎你》日文原曲)連續3年拿到日本有線大賞和全日本有線放送大賞,創下日本歌壇空前紀錄,多年後才被日本藝人追平。
《償還》、《愛人》、《任時光從身邊流逝》(《我只在乎你》日文原曲)을 가지고 연속 3년 일본유선방송대상
과 전일본유선방송대상을 차지하여서 일본가요계에서 공전의 대 기록을 만들었는데, 몇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1989年
北京天安門民運期間,人在香港的鄧麗君不顧周圍人的反對,參加抗議集會,甚至掛上抗議標牌,公開表態支持學生。
북경 천안문 민주화 운동 기간에 홍콩에 있던 덩리쥔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돌아보지 않고 항의 집회에
참가하였으며
1991年
鄧麗君在金門前線馬山觀測所向大陸喊話說,「親愛的大陸同胞們,你們好,我是鄧麗君。我現在來到金門的廣播站向大陸沿海的同胞們廣播,我今天要跟大家說的是, 我很高興的能夠站在自由祖國的第一前線金門,我感覺到非常快樂、非常的幸福。」
덩리쥔이 金門前線馬山관측소에서 대륙을 향하여 마이크로 방송하고 있다.,
「사랑하는 대륙동포 여러분,모두 안녕하십니까,저는 덩리쥔 입니다。저는 지금 金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대룩 연안의 동포 여러분께 방송하고 있습니다,오늘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매우 기쁘게 자유스런 조국의 최전선 金門에서 서서, 많은 즐거움、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95年5月8日
與法國攝影師男友保羅(左)在泰國清邁度假時,因哮喘病發作辭世。
1995년 5월 8일
프랑스 사진사 남자친구 폴(왼쪽)과 태국 치앙마이에서 휴가를 보낼 때,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번역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鄧麗君의 기일이군요 ......(건강하세요)
기일이 조용히 지나가는 것 같아서 대만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늘 지켜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고의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읍니다.
늘 활동 힘차게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지기님을비롯진캉시앤님
넘넘 감사드립니다 ~ ^^
울님서세20주년을추모하며
막걸리 한잔하겠습니다~
불료정 을 들으며~~
서세 20 주년을 추모하시며 막걸리 한잔
님의 노래도 함께 들으시면서 어떠셨나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4 03:02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 하신 글 종종 보았습니다
내공이 대단하신 분 이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대기를 정리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일본 NHK에서 5월 9일 덩리쥔 추모 방송을 1 시간 하였더군요
여러 관련자의 인터뷰가 새롭게 조명되어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그 전체 방송분을 올릴까 합니다
소중하고 귀한자료 감사히 봅니다
감사합니다
세월이 흐르니 인걸도 스러지고
그 흔적도 역시 희미해지니
다만 그것이 안타까와
이처럼 흔적을 남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