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으로 팔공산 염불암을 그려본다.
팔공산은 내가 젊은 날부터 수도 없이 찾았던 산이다. 팔공산의 산중 절은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냥 한 번 스쳐온 것이 아니고 열 번, 스무 번씩 다녀왔다. 몸이 산길을 부담스러워하자 절집 찾기를 그만두었다. 요즘에는 산 아래의 절을 찾아가면 치장을 너무 많이 하여서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다.
팔공산의 절집 중에서 가장 많이 찾아갔던 곳은 생각할 것도 없이 염불암이다. 동화사에서 비로봉과 동봉을 오르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염불암 쯤에 오면 목이 말라 요사체의 처마가 만드는 그늘에 배낭을 벗어 던져두고, 석간수로 목을 젖신다. 지금도 다시 찾아가고 싶고,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암자이다. 동화사에서 오르막 길로 3km나 걸어야 한다. 여기서는 산봉까지가 겨우 800m이니,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얼마 전에 동화사의 뒷길로 제법 멀리 올랐지만, 절까지 오를 자신이 없어서 내려와 버렸다. 늙어 쇠락한 몸을 가진 나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명구를 따르기로 했다.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팔공산 염불암을 소개하는 사진과 글을 보았다. 눈에 익은 곳이라서 반가웠다. 지금 내 앞에 선하게 떠으로곤 하는 염불암의 모습 그대로이다. 다른 절집처럼 변하지를 않았다. 그렇다면, 오래전에 다녔던 염불암에 대한 옛 일들을 되새기면서 답사기를 써도 되겠다 싶었다. 펜을 들었다. 따진다면 예전에 다녀왔던 절의 답사기인 셈이다.
팔공산을 오를 때면 염불암까지 오면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진다. 염불암 요사체의 추녀가 만들어주는 그늘에 배낭을 던져두고 석간수를 마시면 시원함으로 몸도, 마음도 하늘을 나를 듯 가벼워진다.
암자 이름을 염불암이라고 한 것은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서 부처님을 새겼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새기고, 암자를 지어 기도처로 삼았다.
오늘의 염불암은 어떤 절집일까. 대한 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부속암자 이다. 경순왕 2년인 928년에 영조선사가 창건했고, 고려 중기에는 신령 거조암에 주재하던 지눌선사가 이곳에서 머문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병자 양란을 치른 이후에 몇 번의 중창이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1936년에 운경이, 1962년에는 혜운이 중건하였다. 주불전은 아미타불이고, 협시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다. 1841년에 그린 후불탱화가 있다.
염불암이라는 암자의 이름을 준 바위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 그냥 바위일 뿐일까. 우리의 선조들은 바위에 대하여 각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바위신앙이라고 할까. 어마어마헤게 크거나 높은 절벽 등의 위압감을 주는 바위에 대하여만 숭배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다. 동네 앞의 작은 바위에도, 들머리에 서 있는 선돌에도, 마을입구에 작은 돌로 쌓은 돌탑에도 신앙의식을 가진다.
염불암에 세겨진 부처님의 모습은 법당에서 모시고 있는 잘 생긴 부처님이 아니다. 부처님께 미안한 말이지만 봎품이 없다. 우리는 이처럼 볼품이 없는 부처님을 민불(民佛)이라고 한다. 민(民)은 일반적으로 지배층이 아닌 하류층의 백성을 말한다. 힘들게 살다보니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 어디에다 하소연도 하고, 도와주십시오 라고 빌어야 할 일도 훨씬 더 많다.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빌어야 할까.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은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더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리 하소해도 미동도 않는데 무엇을 들어주실까. 한다. 돌덩이 앞에 절을 하는 것은 미신이다. 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말하기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은 말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일이다. 바위의 의미이고, 바위가 부처님께 빙의된 것이 마애부처님이시다.
'들어주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말이 많이졌다. 내가 일일이 대답하고, 말을 잇는다면 누가 나에게 하소할 것인가. 들어만 주는 부처님 앞에서 실컨 말하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것이다. 염불암 부처님이 바로 그러 역할을 하신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보고, 잘 새겼으니 훌륭한 미술품이다. 라고도 한다. 또 새기는 솜씨가 뛰어났다면서 기술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은 미술품도 아니고 장인의 솜씨자랑도 아니다. 힘들게 살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힘없는 백성들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남쪽 면에 계시는 부처님은 보살님의 얼굴이기보다는 무당들의 굿당에 모셔진, 무슨 각시니 하는 신주의 모습이다. 무녀도의 그림을 닮았다. 신라가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조선 사람의 뿌리인 무속의 신앙도 버리지 않았다. 염불암의 마애불에도 우리의 토속신앙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무속신앙은 우리 조선사람을 조선사람이게 해주는 민족의 바탕이다. 민족의 기둥이다. 그런데 최근에 민족의 지도자를 뽑는 선거에서 무속을 마치 악의 꽃처럼 비방하는 것을 보고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백성들은 불교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속에서도 우리의 토속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불교의 교리는 복잡하고, 너무 어려워서 무지랭이 백성들이 따라가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어려운 불교 교리는 내버려두고 바위 앞에서 빌기만 하듯이, 그냥 부처님만 애타게 부르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다. ‘관세음보살 남무아미타불’만 애타게 부르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토속신앙과도 닮았다.
신라시대 기록 하나를 보자.
“경덕왕 때 지체높은 자제들이 여럿이 모엿서 미타사를 세우고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백일 동안 염불하는 계를 만들었다. 아간 귀진의 여종인 욱면은 신분이 미천하여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문 밖에서 시중이나 들면서도 아미타불을 영심히 염송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몸이 하늘로 치솟아 서방정토로 갔다.”
‘관세음보살 남무아미타불’만 염송하면 불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바위 앞에서 손을 모아 빌면서 소원을 중얼거리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우리의 토속신앙과 닮은 점이 많다. 영험하다고 빌었던 자위에 부처님을 새긴다면 훨씬 더 소원을 잘 들어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토속 바위 신앙과 칭명불교가 결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암자의 사진에는 극락전 바로 앞에 청석으로 만든 자그마한 9층 탑이 있다. 전해오기로는 지눌선사와 관련이 있지만,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고려탑이 분명하다. 이 암자는 아마도 고려시대 창건한 절이고, 수님이 수련을 하던 선종 사찰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것으로 나의 염불암 답사를 마감해야 겠다. 절집을 직접 찾아간 만큼이나 마음이 개운하다.
경주의 서출지 바로 옆에도 염불사 절터였으리라는 전설을 간직한 작은 연못이 있다.
첫댓글 염불암 가 본 지 십년이 넘었기에 글을 통해 참배하고, 선생님의 마음을 함께 누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