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계 간담회 진행 ----------------------------------------------------------
1) 주제 : “학교폭력 문제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지역교회의 역할모색”
2) 일시 : 2012년 5월 8일(화) 오후 6시-8시3) 장소 : 기독교회관 2층 에이레네
4)간담회 참석자
* 교육전문가:이광호 선생(이우학교 함께여는교육연구소 소장)
송형호 선생(면목중학교 교사, 현재 교육청 학교폭력지원파견근무)
육성필 교수(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임상심리전문가)
* 교단 교육책임자, 기독교학교 교목(안재완 목사), 이용환 전도사, 유낙준 신부
* 교계인사/ 손달익목사, 조경열목사, 김병무사관, 주성식 신부 조주희 목사와 은평지역 목회자 등
* 교회협 선교훈련원 운영위원장(육순종 목사), 이근복 원장, 배경임 부장
* 향후계획: 간담회에서 나온 의견을 수렴하여
대안을 만들고 교육전문가와 지역교회가 지역학교와 협의하여 공동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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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환대를 통한 관상기도를 하는 안전지대로서의 교회
유낙준신부(성공회 대전나눔의집, 유성교회)
1. 여기 모인 이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존재이유라면 기도는 하늘의 권능자를 이 땅의 권능자로 처음 모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권능자를 이 땅의 권능자로 모시는 그 자리를 세우는 자이다. 오늘 그러한 이유에서 이 자리에 왔다. 그래서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권능자의 관점에서 서려고 해 본다.
2. 저는 학교 안에서 학교부적응학생을 주로 만나는 자리인 “가정형 Wee센터(교과부에서 2010년 10월 제1호 설립)”에서 일을 한다. 비행과 문제 학생이라 지칭받는 이들의 공통된 자기표현은 이렇다. ‘전 나쁜 애예요. 왜? 공부를 못하니까요. 전 나쁜 얘예요. 왜? 도둑질했으니까요.’ 이렇게 자기 부정성을 먼저 드러내는 ‘자기 탓으로 돌리는’ 자책을 주로 표현방식에서 사용한다. 그 자기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자괴감과 자신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심화된 우울증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자기 탓으로 생긴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 첫 마디 상담사들의 위로의 말이 된다.
(참고: 여기서 학교밖 학교인 룩스문디(2010년 5월에 문을 연 3년차인 학교밖 학생을 위한 학교)의 학생들은 학업중단학생들이다. 이들은 학교안이라는 감옥에서 자신의 용기로 학교밖을 선택하였기에 고질적인 자기우울과는 다른 성질을 특성으로 갖기에 자살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4월 2일 수원서 가출청소년의 경우에는 대출금을 갚지 못한 심적 압박문제로 자살을 한 경우는 우울증과는 다른 경우였다. 중산층가정의 머리 좋고 체격 좋은 얼짱에다가 여학생이 많이 따른 학생이었다)
학업중단 학생이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로는 30여만명이라 보고한다. 이중 반 정도가 학교부적응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그 학업중단이유중 가정의 돌봄부족이 가장 크다. 가정에서의 돌봄부족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중 가장 큰 것은 자존감이 낮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이유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존중하는 자존감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는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런데 그 자존감이 자신을 지키지 못할 정도의 양과 질을 지녔다면 자기파괴적인 자기부정성의 삶의 방식을 주로 선택하게 된다.
가정형 Wee센터의 우리식 이름은 “경청과 환대”이다. 잘 들어주고 잘 맞이하면 사람이 변한다는 뜻(죄를 고백하고 말씀을 듣고 잔치를 여는 미사(감사성찬례)의 핵심가치를 사용한 것이고 중세기의 수도원적 가치를 사용한 것임)으로 그 이름을 택했고 그의 가치로 학생들을 만난다. 경청과 환대는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최고의 방식이라 여긴다. 물론 경청과 환대는 효율성과 그에 따른 돈을 중시여기는 현대인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여길 것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이것처럼 귀한 것이 없다 여긴다. 죄를 고백하는 방식만으로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린다. 또한 생명의 말슴을 잘 듣는 것으로만도 사람이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 아울러 잘 먹는 것으로만도 사람이 변한다는 믿음으로 경청과 환대의 방식으로 자존감을 살려 주는 것이다.
1) 일본의 청소년자립생활관인 ‘동수’는 아동시설에서 이삼십년간 활동한 간사들이 NGO방식으로 만든 기관인데 정부지원을 받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청소년을 만나다. 가장 주된 방식은 정성들여 밥을 잘 먹인다는 것이다. 돈많이 들인 밥이 아니라 정성을 들인 밥을 먹으면 청소년들이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로 잔치를 벌이는 방식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는 그것이다. 사랑에 허기진 배를 물질로 채우다가 비만해졌다면 그것은 단기간의 문제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자신을 위로해 주는 잔치는 비만을 향하게 하지 않는다.
2) 사소한 것을 세심하게 보는 감각이 요구되는 것은 경청의 기본기이다. 세심성이 없으면 학생들 만나면 안된다고 여긴다. 자라는 것은 매우 세심함을 필요로 한다. 갓 나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세심성이 학생들을 만날 때 필수요소인 것이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격려를 해줘야 그 일로부터 자존감을 찾게 되고 그 자존감이 자라게 된다. 경청은 자존감을 자라게 하는 좋은 땅이다.
3) 자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꼭 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한 자발적인 스스로의 고백이 자존감을 높이게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아주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표현하기 때문에 온 촉각이 학생에게 쏟아진 사람만이 듣게 된다. 스스로 말을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아주 작은 소리나 몸짓을 듣고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낮은 자존감을 높이면서 그를 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학교는 경쟁이 최고 동력이다. 경쟁이 최고인 곳은 아주 작은 공간에서 집중하는 방식을 택하기에 학교 교실 벽에 “감옥같은 학교”라고 낙서된 글을 쓰게 된다. 경쟁만이 최고의 살길이라면 그 경쟁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게 된다. 경쟁에서 떨어져도 난 안전하게 다른 길로도 살 수 있는 안점감을 주는 사회에서는 여유로운 경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그러한 안전지대 없이 경쟁을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경쟁이기 이전에 사회의 저변이 안전지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교회는 안전지대를 구성하는 대지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사회의 근대성을 준 동력이기에 성취지향적인 베이비붐세대들과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삶의 주된 방식을 양산해 냈다. 그러한 교회가 경쟁이후의 세대들에게 안전감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기존의 교회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세운 근대성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갈 교회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경쟁보다 인간적인 안전감을 주는 교회가 그것이다. 그래서 쉼의 교회,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청소년 수도원프로그램을 세우는 것이다. 개신교 수도원인 ‘디아코니아’의 방식을 교회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성공회의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삶의 방식을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오육년에 걸쳐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동을 거칠 것으로 많은 이들이 보고 있다. 그렇게 급격한 사회변동이 일어나면 그간 단단했거나 큰 것들이 무너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들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무기를 사는데 돈을 쓰는 국방부, 이미 공동체가 파괴된 농어촌부, 청년과 노년의 일자리도 마련하지 못하는 노동부, 전략도 없는 외교부, 대지를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국토부에서 그래도 희망을 본다면 교육일 것이다. 무너지는 공교육에서 대안교육을 그래도 마련했던 그간의 모습에서 새로운 변동의 급격함에서 두려움과 위험에 몰릴 대다수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역과 함께한 교회가 그 지역에 새로운 희망을 주게 될 것이고 그간 불편함을 지닌 사람들에게 안전감을 주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4. 생각거리
* 기존의 공교육체계와 연계 맺는다면 기존의 경쟁의 문제를 안고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문제를 풀어 가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물론 기존의 공교육체계의 문제를 보고 기존체계 안에서 다른 길을 가는 방식을 꾸릴 길은 없는가?
1) 공적 체계 안에서 같은 길로 문제를 푸는 방식
2) 공적체계 안에서 다른 길로 푸는 방식
3) 공적체계 밖에서 그림자체계를 이루어서 푸는 방식(Shadow system)
- 기존의 교회를 능력과 성향별로 나눠 자신에 맞는 방식으로 학생문제를 접근할 수 있겠다.
- 아니면 교회의 역할을 사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띨 수도 있겠다.
* 보호자교육과 대안가정으로의 협력가정 지원센터를 만들어 돌봄의 사회적 체계를 세워 내는 것이다. 이를 정책화하면 역동성이 사라질 수도 있겠기에 교회가 역동성을 담보한 채 이루어가는 그 과정에서 힘을 얻는 방식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학생간 폭력을 거대폭압기구인 국가기구로 경찰이 학교를 제압하는 방식은 미국의 학생양육에서의 제도도입일뿐이고 그것은 아주 비인간적인 양육방식이다. 더 성숙한 인간적이고 더 노련한 전통양식을 찾아내자. 그것이 지역에서의 문제를 푸는 지역 안전지대 형성하기일 것이다. 지역의 감시기구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더 인간적인 기구를 세워 나아가는 그 과정을 귀하게 여기자는 것이다.
1) 보호자교육- 부자가정, 모자가정, 부녀가정, 모자가정의 보호자교육지원센터역할로의 교회를 형성한다.
2) 협력가정지원센터로의 교회 형성- 대단한 모두식의 돌봄을 요구하는 것은 정부지원기관으로 하고 부분적 지원으로 건강하게 될 가정지원을 하는 돌봄대안가정과 혈족이 아닌 동호인 가정과 일정 기간의 보호소 역할의 가정지원을 하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3) 대안학교 건물이 위압적이지 않고 가정집같은 학교를 세워 내는 것을 교회가 맡는 것이다. 권위가 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색이 바랜 권위를 붙잡고 있는 공교육에다가 그러한 교회라면 희망이 있겠나? 협력가정지원을 하면서 학교를 빌라 한동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방식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