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 구형왕릉 - 구형왕릉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하계리 산 16에 위치에 있으며 사적 제214호로 지정. 구형왕은 구해(仇:원수 구 亥:돼지해) 또는 양와(讓:시양할 왕, 王)이라고도 하는데 금관가야 10대, 마지막 임금이며 신라 김유신 金庾信) 장군의 증조부다. 이 능은 돌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구형왕(증조부) - 김무력(조부) - 김서현(부) - 김유신
* 구형왕은 521년 금관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영토를 넘겨줄 때 까지 11년간 왕으로 재임.
* 이 무덤에 대해 왕릉이라는 근거 : 동국여지승람 권31<山陰縣 山川條>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문신인 홍의영 洪儀泳, 1750-1815)의 <왕산심릉기 王山尋陵記>에 "근처 왕산사 산사기권 山寺記券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산청현읍지 山淸縣邑誌에 의하면 정조 22년(1798)에 처음으로 왕릉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한다.
* 이 무덤은 경사진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각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 方形으로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닜다. 석열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은데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단의 높이는 7.5m이고 제4단에는 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의 감실이 있다. 이 돌 무덤을 중심으로 높이 1m 내외의 둘레담장을 잡석으로 쌓았으며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 讓王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 앞에 상석과 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석수石獸가 각각 1쌍씩 서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설치물인바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 이 자료는 심화학습 해설자료로 문지회에서 제공한 것이다.
* 동의보감촌
지리산을 품고 있는 산청은 우수한 각종 약초의 풍족한 자생적 생산으로 약초산업 발전을 위해 2010년 '동의보감촌'을 개장하였는데 경남 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로 55 일원에 위피해 있다. 중심 공간인 '한의학박물관'은 지하1층, 지상 2층, 총 740평 규모에 여러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1층은 전통의학실로 우리한의학, 한의원 모습과 한방치료번 등을 소개하고 있고 2층 약초 전시실은 다양한 약초의 종류 및 효능 등의 소개와 입체영상, 산청군을 배경으로 허준 선생에 얽힌 가상 스토리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산청군은 이곳을 '산청 한방약초 산업 특그'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지정받아 매년 9월-10월 경에 한방 약초축제를 열고 있다. 주요 공간으로는 전통의학 체험 공간인 주제관이 있고, 한방 氣체험장으로 귀감석과 석경, 복석정이 있다.
그리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산청일원에 자생하는 여러 종류의 약초를 모아 식재된 산청 약초관이 있다. 그리고 테마 별 여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점심 - 약초와 버섯골식당에서 제일 맛좋고 비싼 것으로...?
* 남명기념관
조식 선생의 자는 건중 楗仲, 호는 남명 南冥, 별호는 산해 山海, 본관은 창녕 昌寧이며 경남 합천군 삼가현 토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비 산림처사 山林處士이다. 경敬 과 의義를 앞세우고 실천한 남명 선생은 예禮 와 인仁을 앞세운 퇴계 이황李滉과 함께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룬 두 거두 였다.
남명 선생은 "군자는 敬으로써 안(마음)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바깥(행동)을 바라게 한다"라는 생의 좌우명을 더욱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이 갖고 다니는 칼에다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마음)에서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행동)에서 결단하는 것은 義다.'라는 글귀를 새겨 義의 상징으로 항상 가까이 했다. 또한 敬의 상징으로 성성자 惺惺子라는 방울을 항상 몸에 지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울림에 마음을 깨우쳐 수련하였다 한다.
남명 선생은 학덕을 갖춘 大儒子엿으나 벼슬에는 낭가지 아니하고 평생 선비와 처사로 일관하였다. 38세 때 헌릉 獻陵 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이 제수되고 왕이 면대하기를 청하는 징소 徵召가 있었으나 매번 상소 봉사 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다. 55세 때는 단성 현감에 제구되었으나 역시 퇴자 하였는데 이때 올린 상소문이 그 유명한 '단성 현감 사직소'(일명, 을묘 사직소)이다. 부패한 조정을 위해 재야 지식인으로서 품었던 의견을 가차 없이 표출하였다. 남명은 학문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했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으며 민본이 그의 핵심적 사상이었다. 선생은 31세에서 48세 까지는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산해정'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 48세에서 61세까지는 고향 합천에서 '뇌룡정'과 '계부당'을 지어 학문 연구와 후학들을 가르쳤다. 사후 선조 임금은 영전에 제문을 내려 당대의 선비 기상을 기렸으며 광해군 7년(161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追贈하였고 시호는 문저 文貞이라 하였다. 기념관 뒷산에 남명 선생 묘소가 사적 제 30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송하 全命秀,용지산/이영건, 淸豊(李勇熙), 昊圓/황영희, 혜원(이유정) 여러분들 격려해 주시어 감사를 드랍니다. 그리고 저가 올려놓은 내용들을 보신 모든 분들께도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폭염으로 무더운 날이 계속되는 때 건강하시어 문지회활동에 어려움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리승주 팀장님 수고 많았습니다.
리승주 팀장님! 심화학습 내용을 글과 사진으로 아주 상세하게 올려주셔서 감사하고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영상과 해설 이렇게 올려 주시니 시원하게 편히 앉아서 다시 한번 현장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날씨도 장난아니게
더웠는데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다시한번 고맙다는 인사 드립니다.
리승주 월2팀장님! 좋은 글과 사진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세심하고 어김이 없으십니다,
장면들과 역사 자료들 까지 그야말로 심화학습 이란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십니다,
당연히 모든분들의 격찬 받으실만 하십니다,
배우고 갑니다,
송하 全命秀,용지산/이영건, 淸豊(李勇熙), 昊圓/황영희, 혜원(이유정) 여러분들 격려해 주시어 감사를 드랍니다. 그리고 저가 올려놓은 내용들을 보신 모든 분들께도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폭염으로 무더운 날이 계속되는 때 건강하시어 문지회활동에 어려움이 없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