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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身邊雜記)에 대하여
1. 신변잡기란 문학화가 안 된 잡문을 의미한다.
신변잡기란 무엇인가 할 때 먼저 생각 해 볼 문제는 '신변잡기'라는 말 자체의 뜻일 것이다. '신변잡기'의 국어사전적 뜻은 다음과 같다.
신변잡기 :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적은 수필체 글.(에센스 국어사전)
위의 낱말풀이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신변잡기란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필체로 적은 글'이라는 것이다.
먼저 신변잡기의 첫 번째 뜻인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라는 말에 관해서 생각 해 보자. 이 세상에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에서 소재를 취해가지 않은 문학예술작품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E.T' 이야기나 '해리포터' 이야기도 결국은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서 창작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들임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변잡기라는 것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라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될 것이 없다.
그러면 '신변잡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두 번째 낱말 풀이인 '수필체 글'이라는 것이 문제다. '수필체 글'의 '수필'이란 무엇인가? 다시 국어사전을 찾아 보자.
수필 :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에센스 국어사전)
상기 수필이라는 낱말의 뜻 풀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라는 것과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는 것이다. 문학에서 일정한 형식이란 무엇인가? 문학에서 형식의 문제는 현대문학은 차라리 형식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최재서) 형식창조를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시 소설 희곡 등 창작문학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다. 일정한 형식이란 도장 같이 일정하게 미리 정해 진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창조적 세계로서의 작품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풀롯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서두는 앞에 아무 것도 없고 뒤에 따르는 무엇이 있는 것이고, 종결은 앞에 무엇이 있고 뒤에 따르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중간은 앞에 무엇이 있고 뒤에도 따르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데서나 시작 할 수도 없고 끝낼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일정한 길이의 독립적이고 완성된 하나의 세계로서의 형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필이라는 글은 이 같은 일정한 형식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니까 [앞 뒤 차례를 가릴 것도 없이 그때 그때 생각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즉시 즉시] 적어 놓으면 수필이 되는 것이다. 남송 때 사람인 홍매라는 사람이 자기가 쓴 어떤 글 서문에 주석해 놓은 '隨筆'이라는 글자의 뜻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의 다른 이름은 무엇인가? 바로 잡기 혹은 잡문이라는 것이다. 잡기 혹은 잡문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찾아 보자.
잡기 : 자질구레한 일을 질서 없이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잡록(雜錄) 잡필(雜筆).(에센스 국어사전)
잡문 : 일정한 형식이 없이 되는 대로 쓰는 글(에센스 국어사전)
이상에서 찾아 본 국어 사전의 '수필', '잡기', '잡문'의 뜻은 한마디로 모두 같다고 해도 크게 잘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뜻이 '생각나는 대로'와 '질서 없이'와 '되는 대로'라는 말로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신변잡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변잡사'가 아니고 '신변잡기' 임이 밝혀진 셈이다. 신변잡사의 '신변'이란 '몸과 몸의 주위'를 뜻하고, 잡사란 '자질구레한 일'을 뜻한다(에센스 국어사전).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이 세상에 신변잡사에서 소재를 취해가지 않은 문학예술 작품이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신변잡사는 문학의 문제로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신변잡기'인 것이다.
신변잡기가 왜 문학에서 문제가 되는가? 위에서 살펴 본 대로 그것은 ['생각나는 대로', '질서 없이', '되는 대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생각나는 대로, 질서 없이, 되는 대로] 쓰는 글을 문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문학화가 안 된 글이라고 한다. 문학작품이란 소재를 취해다가 문학화 작업을 한 것을 가리켜 문학작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변잡기라는 글은 문학화가 안 된 글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결정적인 문제로 부각 된 것은 대한민국 국어 사전의 낱말 뜻풀이에 의하면 우리가 그 동안 문학인 줄 알고(?) 문학으로 여기며 작가 연 해 오던 그 [수필]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문학화가 안 된 신변잡기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즉 신변잡기란 수필이고 수필이란 신변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필]이라는 말의 낱말의 뜻을 우리나라 국어 사전 낱말 풀이 보다 무려 약 6,7백년이나 앞서서 그 뜻이 신변잡기 임을 명확하게 밝혀 준 사람이 있는데 그가 다름 아닌 아닌 수필문학(?)이라는 것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홍매라는 사람의 '붓 가는 대로'라는 '隨筆'의 뜻 풀이인 것이다. 홍매가 설명하고 있는 '隨筆'의 뜻은 다음과 같다.
豫習懶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後先 無復詮次 故曰隨筆.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 바가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챙길 것도 없이 바로 바로 기록하여 놓은 것이기 때문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었다.) -(<문학개설> 장백일 홍석형 공저 탐구당 260쪽)
홍매라는 사람이 자신이 쓴 [용제수필]이라는 책의 이름을 '수필'이라고 붙이게 된 까닭을 스스로 밝혀 놓은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문학화가 안 된 글이라는 뜻, 즉 신변잡기의 '잡기'의 뜻이며, '잡문'의 뜻인 ['생각나는 대로', '질서 없이', '되는 대로'] 인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국어사전 낱말풀이와 '수필'이라는 한문자의 주인인 홍매에 의하면 기존의 수필은 신변잡기라는 뜻이 된다. 신변잡기라는 그 '수필'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잡문을 일컫는 말이고, 잡문이란 문학화가 안 된 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변잡기란 무엇인가의 본질적인 뜻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기존의 수필을 향하여 '신변잡기'라고 평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확한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문학화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문학론에서 말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창작문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학화란 창작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생잡사에서 소재를 취해다가 창작화 하는 것이 문학화인 것이다. 창작물도 아니고 창작적이지도 못한 것이 다름 아닌 문학화가 안 된 신변잡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썩어도 준치'가 '어물전 망신 꼴뚜기'보다 낫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려한 문장으로 잘 쓴(?) 글이라도 그 속에 창작물이 없고, 창작적인 것도 없다면 그것은 문학화가 안 된 신변잡기일 뿐인 것이다.
2. 문학이란 이웃과의 관계의 이야기이다
문예사가들은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났고,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역사의 전환점을 표현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세계 문단은 지금 한창 T.S 엘리엇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형이상' 시론을 놓고 새로운 시대의 시창작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현장에 대한 표현을 인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는 근대시를 버리고 새로이 등장한 시임에는 틀림없다. 그 때문에 단순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동된 시가 아니라 근대시를 버렸다는 점에서 현대시는 근대시의 한 반동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왜 버려야만 했던가에 대해서는 추정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근대시로서는 현대시가 안고 있는 시대적 요청, 즉 20세기가 요구하는 시대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현대시학이론과 실제> 박진환 자유지성사 25쪽)
문예사조는 비단 시문학에 국한된 사조가 아니다. 전체 창작문학은 물론 전체 예술 사조까지 아우르는 사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 전반이 싫든 좋든 이를 수용하거나 안 하거나 어떤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문예사조를 말하듯 소설도 말하고, 희곡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수필은 문예사조를 말하고 있는가? 수필문학과 문예사조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필자가 학문이 짧은 탓인 줄로 알지만 아직까지 수필문학과 문예사조와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글을 본 일이 없다. 다른 모든 방면에 관한 문학론은 과히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도 있고, 저절로 눈에 자주 뜨이기도 하는데 왜 수필문학과 문예사조와의 관계에 관한 글은 일부러 찾아 보려고 애를 쓰는 데도 찾아 볼 수가 없는가? 이는 분명 필자가 학문이 짧은 탓만이 아닌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것임을 말 해 주고 있지 않은가.
필자자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작품을 접하였을 때 머리에 떠 오른 생각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와 같은 의문들이었다. 이 시를 읽고 그런 의문이 머리에 떠 오른 까닭이 무엇인가?
남南 으로 창을 내겠소/밭이 한참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이 작품은 전원을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목가 풍의 서정시 작품이다. 시인이 생존하여 활동하던 시대는 방금 서구의 모더니즘이 이 땅에도 상륙하여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때였지만 19세기 낭만주의 기풍이 여전하던 1930년대였다. 짧은 몇 개의 시어들 행간 속에 나부끼고 있는 낭만적 서정을 충분히 만끽하고도 남을 듯한 작품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제2연 3행에 있다. 제1연과 제2연 2행까지는 다른 것 다 돌아 볼 것 없다는 듯 서정 그것에만 한껏 취한 듯한 서정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정을 위한 서정의 노래만을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2연 3행이 그 사실을 말 해 준다.
제2연 3행에서 시인은 자기 속의 서정에 취해있던 시선을 들어 이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웃을 초청한다. 제3연에서는 초청 되어온 이웃과 사이에 '왜 사느냐'는 물음이 오고 가게 된다. 즉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작품에서 주목하여 본 점은 이 작품이 서정을 위한 서정의 노래에서 그치지 않고 철학을 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정을 위한 서정은 자기 기분에 취해 노래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술 취한 상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술 취한 상태의 공통점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결여 일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철학, 사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것들은 모두가 다 이웃에 대한 관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신변잡기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자기 이야기 뿐인 글>이 신변잡기이다. 즉 신변잡기란 작가의 시선이 자기 배꼽만 들여다 보는, 자신의 배꼽 큰 줄만 아는 글을 말한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세 번 들으면 싫증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은 본질상 이웃과 더불어 살게끔 빚어진 존재다. 철학도 사상도 종교도, 그리고 사랑과 미움도, 행복과 불행도 모두가 다 이웃과의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골치 아픈 학문임에도 인류 역사를 통해서 철학의 샘물이 마른 적이 없었고, 종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의 수필문학만이 이웃과의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수필은 작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직접 작품의 소재와 자료로 삼아 쓰여지는 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어느 장르의 문학보다 더 치열하게 이웃과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는가? 인간이란 혼자서 사는 존재도 아니고, 혼자서 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자신의 삶의 경험'이란 곧 이웃과의 삶의 경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한민국 수필작품에는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가? 이웃에 관한 관심은커녕 한 가족, 아내 이야기, 남편 이야기 조차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수필이라는 것이다.
수필 작가들은 어떤 살일 강도가 사람 일곱을 죽이든 열을 죽이고 있든 아무 느낌도 아무 생각도 머리에 안 떠 오르는가? 그런 것은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수필작가들은 생전 부부싸움도 안 하는가? 수필 작가들에게는 수험생 아들도 딸도 없는가? 저들 어린 것들의 족쇄 채인 젊은 날의 시험지옥이라는 고통이 눈에 안 보인단 말인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 문제도, 아무 고민도, 아무 다툼도, 아무 갈등도 없는 글! 그럼에도 이태백이 놀던 달은 지금도 변함 없이 곱기만한 글이라면 그런 글이 신변잡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아 쓰여진다는 수필 작품 속에서 생전 부부싸움 하는 소리 한 번 들려 나오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 해 주는가? 부끄러운 얘기는 안 쓴다는 얘기가 아니냐? 자신의 부끄러운 얘기, 즉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갈 이야기는 안 쓴다면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인가? 자기 자랑이나 자기 미화美化 의 글만 쓰고 있다는 뜻이 아니냐? 문학이 자기 미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냐? 신변잡기란 무엇인가? 자기 자랑, 자기 미화의 이야기가 곧 신변잡기인 것이다.
우리 수필문단에서 '신변잡기'를 말 할 때 그것에 대한 개념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적혀 있는 수필문학론이 있기나 한가? 수필계에서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하고 있는 논점은 주로 작품 제작상의 기술적 미숙의 문제에 치중되어 있는 것 같다. 소위 문장 수련이 덜 된 상태에서 등단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라는 되풀이 되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것은 물론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반드시 논의해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선이 없는 거듭되는 되풀이 논의라면 정신이상자의 중얼거림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몇 십년이 지나도록 수필문단은 신변잡기의 근본 원인이 되는 '붓 가는 대로'를 대체 할 말만 근본적 개선책(이론)은 단 한 줄도 내어놓지 못한 채 '수준미달' 등단 문제만을 아무 개선책도 내어 놓지 못한 채 되풀이 논하고 있다.
'신변잡기' 문제는 단순한 기술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현대문학 1백년 동안 수필문학은 문예사조와 어떤 연관도 맺지 못하고 있는 철학 부재의 문학, 사상 부재의 문학, 종교 부재의 문학, 자기 시대에 대한 고민 부재의 문학, 그 위에 이론부재의 문학이라는 것이 근본 문제인 것이다. 1백년 동안이나 그렇게 흘러 왔으니 이것은 문장훈련을 잘 한다고 해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본질 자체가 잘못 된 문제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 잘못된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첫째는 위에서 지적한 문학화가 안 된 글, 즉 수필은 본질상 즉 문학이론상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 신변잡기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문학의 본질이 되는 이웃과의 관계의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박진환 교수의 글은 일부러 찾아 다닌 결과 찾아낸 예문이 아니다. 문학론들을 읽다 보면 문학 장르마다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시대의 진단서다. 그러나 수필문학만은 이태백이 놀던 달 타령 뿐이다. 어떤 젊은이가 길가는 여자들을 집까지 태워준다고 유인해가서 돈 뺏고 강간하기를 그야말로 밥 먹듯 하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그 한 옆에서 한가하게 이태백이 놀던 달이나 노래하고 있다면 그 사람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 시대가 수필을 향해서 '신변잡기'라고 손가락질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문학화가 안 된 글일 뿐만 아니라 전철역두 가판대의 미담꺼리 만한 이웃과의 관계의 이야기가 빠진 글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태백이 놀던 달 타령이나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이란 무엇인가? 다른 것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타 장르 문학예술과 함께 우리 시대를 함께 붙잡고 고민하며 함께 울고 웃는 문학을 하자는 것이다. 즉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만들 줄 아는 문학을 하자는 것이다. 문학의 소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말은 문학이라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작업이기 때문에 하는 말인 것이다.
신변잡기란 첫째로는 문학화가 안 된, 즉 <이것>을 가지고 똑 같은 <이것> 밖에 재탕해 낼 줄 모르는 그것이 신변잡기다. 두 번째로는 아무리 달을 아름답게 그렸어도 그 달 속에서 이웃을 만날 줄 모르고, 이웃을 불러 와 함께 울고 웃을 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이태백이 놀던 달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 신변잡기인 것이다. 문학화도 안 되어 있고, 이태백이 놀던 달의 재탕 밖에 없는 글이라면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문학소녀적 감상'에 빠진 자기 자랑, 자기 미화 밖에 남은 것이 더 있겠는가? 그런 글들이 바로 신변잡기인 것이다.
신변잡기의 개념
1. 문학화가 안 된 글이 신변잡기다. 이는 글의 형식 면에 관한 개념이 될 것이다.
2. 문학의 기본적 가치인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외면한 글이 신변잡기다. 이는 내용면에 관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가치란 이웃과 세계와 우주, 나아가서는 신과의 관계 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기 배꼽만 들여 보는 자폐적 문학이나 자기 감상에 빠져 있는 문학 소녀적 감상주의가 아닌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고뇌 할 줄 아는 문학이 곧 인생과 세계의 보편적 가치 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