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신촌에 있는 라이브 클럽이다. 많은 클럽들처럼, 좁고 무덥고 불편한 곳이다. 인디 음악 또한 좁거나, 무덥거나, 불편하거나, 혹은 셋 중 둘이거나, 아니면 셋 모두인 음악이다. 빵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곡을 모은 이 두번째 편집 음반 또한 좁고 무덥고 불편하다. 녹음 상태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음반의 비좁은 소리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장혁, 쓰루 더 슬로(Through The Sloe) 등의 곡은 듣는 내내 '녹음이 좋았으면...'하는 생각이 든다. 음반의 뮤지션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빵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감안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은 더 큰 아쉬움을 낳을 것이다.
얼추 '모던 록'이라 묶어두면 무리가 없겠지만 '목소리도 얼굴도 예쁜 여성 보컬이 프론트에 서 있는 밝고 상큼한 기타 팝'이라는 스타일에 해당되는 편한 곡은 없다. '영국산 우울 기타 록'과 (역시 영국식) 포크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는 해도 쓰루 더 슬로나 우리는 속옷도 생기고 여자도 늘었다네, 네눈박이나무밑쑤시기같은 팀들의 곡은 다소 실험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음반의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면 참가한 팀들이 보여주는 정서와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이를 얘기하기 전에, 우선 음반을 들어보자.
오프닝을 장식하는 아스(The Ass)의 포크-컨트리 팝 "On The Bright Side"는 너무 진지해서 패러디처럼 느껴질만큼 어색한 영어 발음만 아니었다면 멋진 오프닝이 되었을 것이다. [Slouch EP](2001)에서도 이랬던가? 그랬던 듯 하지만, 이 정도의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매끈하게 만들어진 곡도 그 EP에는 없었다. 페일 슈(Pale Shoe)는 나른한 서프 뮤직 "Body In The Wind"를 들려준다. 길고 반복적이지만, 들리는 순간 귀에 감기는 멜로디는 무시할 수 없다. 고음역만 강조된 좋지 않은 녹음 상태가 이 경우에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다. 모래밭에 묻힌 단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같다. 뒤를 잇는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의 "야행"과 더불어, 여기까지는 곧 시작될 휴가철을 에어콘도 없는 골방에서 보낼 이들의 배경음악이 될 공산이 크다.
중반부 이후 음반의 스타일은 자잘하게 가지를 친다. 레드 메이플(Red Maple)과 스타리 아이드(Starry-Eyed)는 전형적인 '우울 기타 록'을 연주하며, 아무밴드 출신의 이장혁은 1980년대 풍의 신서사이저 효과음과 키보드를 전면에 내세운 "꿈을 꿔"를 신실한 선율과 함께 들려준다. 우리는 속옷도 생기고 여자도 늘었다네는 별(Buyl)의 스타일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실망스러울 것이다. 슈게이징과 앰비언트는 물리적으로만 섞였고, 반복되는 효과음이 내뿜는 날선 불편함은 지루하다. 포크-사이키델릭 성향의 "Days And Waves"를 들려주는 쓰루 더 슬로의 '빠∼ 빠빠'라는 코러스는 편안하면서도 몽환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의 "Undo"이다. 데뷔 음반에서 슈게이징과 시부야 스타일의 멜로디를 로파이 전자음에 섞어 들려준 바 있는 이 자매 밴드는 이 곡에서 보컬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일렉트로니카에 대한 관심을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아편굴에서 울릴 법한 타악기 소리로 시작하여 또렷한 선율 주변을 휘젓는 각종의 효과음과 샘플들은 '국적'이 없는 듯한 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바로 앞에 나온 네눈박이나무밑쑤시기의 "Eye... Piece"가 솜씨좋게 선보이는 이국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코스모폴리탄' 같은 소리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곡 자체도, 곡이 표현하는 정서도 'undone'하다. 흔하다면 흔한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고, 마치 작업중인 70분 짜리 음반에서 5분 정도 떼어온 것 같은 곡 자체의 구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음반은 '우울 모드'로 유명한 빵 소속 밴드들답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시종한다. 들떠도 들뜨지 않은 척 하고, 울적하면 울적해한다. 그 울적한 감정을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은 귀차니즘과 더불어 우리 세대의 독특한 정신상태일 것이다. 두 번째, 이장혁과 운디드 플라이(Wounded Fly) 정도를 제외한다면 '가요' 풍의 곡을 만드는 밴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누구의 영향이 보인다'라고 말할 팀 또한 보이지 않는다. 이 음반의 의의라면 '외국 스타일의 가요화'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따라쟁이 되기'의 사이 어느 지점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 팀들의 소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좁고 무덥고 불편해도, 계속 울리는 영어 가사가 귀에 걸려도 감수할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여기서 좀 더 깊은 의미를 캐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재 인디 씬이 처한 상황이 이 음반의 녹음상태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예측을 할 마음은 없다.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음반이라기보다는 의미에 대한 예가 될 공산이 큰 음반이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20030719
수록곡
1. On The Bright Side - 아스 (The Ass)
2. Body In The Wind - 페일 슈(Pale Shoe)
3. 야행 -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
4. Curved Eye - 레드 메이플(Red Maple)
5. 자위 - 푸른새벽
6. Remember Of Season - 스타리 아이드(Starry-Eyed)
7. 꿈을 꿔 - 이장혁
8. 손짓을 취하다 - 우리는 속옷도 생기고 여자도 늘었다네
9. Days And Waves - 쓰루 더 슬로(Through The Sloe)
10. 모든게 떠났지만 - 운디드 플라이(Wounded Fly)
11. Eye...Piece - 네눈박이나무밑쑤시기
12. Undo - 라 비앙 로즈(La Vie En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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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자가 누군지 몰라도 정확하게 보고 있는거 같아요~~~ 정말 리뷰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아마 적어도 3~4달은 된듯 싶어요. 암튼 나왔어요~!
우리 이젠 자매밴드 아닌데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