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이중섭
서울 중랑구 망우산(281m) 기슭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이기도 한 특별한 공원이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다.
산길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시민들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엔 만해 한용운· 시인 박인환· 조봉암 등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고 불리는 이중섭의 무덤도 만날 수 있다.
'묘지번호 103535',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조각상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의 무덤인지 전혀 모른다.
추모비엔 후배 조각가가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6.25 전쟁을 피해 그가 머물렀던 부산과 제주 서귀포에
이중섭 거리나 이중섭 미술관이 조성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묘소는 의외로 단출하다.
그는 1916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 직후 불과 마흔 살의 나이인 1956년
조현병과 간염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사망했다.
더욱 가슴 아픈 점은 그가 전쟁을 피해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두 아이를 결국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참으로 소박한 희망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이중섭이 겪은 질곡의 삶은 고스란히 우리민족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지 싶다.
전쟁이 망가뜨린 그의 삶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준 이는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다.
평안남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19살 때인 1935년 도쿄에 미술유학을 가서
. 그림공부를 하며 일본에서 8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후배 마사코를 만나게 되었다.
1943년 이중섭은 마사코를 두고 조국으로 귀국했지만
그를 잊을 수 없었던 마사코는 결단을 내려.
1945년 홀로 연락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 원산에서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이중섭과 결혼을 했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미술학도가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찾아 타국으로 건너간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그녀의 한국이름 '이남덕'은 이중섭이 지어준 것으로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난 덕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란다.
1945년은 조국의 해방과 함께 아내까지 얻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었으나 얼마 후 터진 전쟁의 광풍은 피하지 못했다.
해방 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일제강점기에도 부를 쌓았던
이중섭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인민의 적'이 되었고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궁핍해져만 갔다.
그리고 몇 해 지나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화. 어머니를 고향에 남기고
아내 남덕과 두 아들,
그리고 죽은 형의 장남인 조카 영진과 함께 한겨울 원산 부두에서 부산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은 피난민이 된 이중섭은 이전까지의 삶에서는 전혀 마주할 수 없었던 지독한 가난을 겪게 된다.
부산에서 제주까지 계속되는 피난 생활을 하면서
남덕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했고,
두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렸다.
고민 끝에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처가가 있는 일본에 먼저 보내고
자신까지 곧 뒤따라 일본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가족을 떠나보내고 한국에서 혼자 살아가기에 전쟁 직후인 조국의 상황은 너무나 척박했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에 이중섭은 그만큼 강하지도 억척스럽지도 못했다.
이중섭이 남긴 작품은 약 320여 점으로 전해진다.
유화 60여 점, 은지화 120점, 드로잉 150점, 엽서화 88점 등이다.
은지화는 그림 재료 살 돈이 없어 양담배 종이에 그린 그림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림을 치열하게 그렸다.
그림을 빨리 그려서 팔아, 보고 싶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다.
며칠이 멀다 하고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에게 그리운 마음이 담긴 편지를 부쳤다.
오늘로 1년째가 됩니다.
1년 또 1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세월을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된단 말이오?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떠 있는가를 생각해 보구려.
힘을 내 주시오. 나는 꼭 확실한 성과를 거두도록 하리다. 답장 기다리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54년 여름)
중섭처럼 그림과 인간이, 예술과 진실이 일치한 예술가를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
- 시인 구상 -
도쿄 유학시절 만났던 오랜 친구이자 이중섭을 후원하고 아꼈던 시인 구상의 말처럼
그의 작품을 보면 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속에서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중섭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본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느껴져 가슴이 찡해지기도 한다.
화가 '반 고흐'에 비견되는 불운하고도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자 한국 미술계의 신화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한없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평범한 아버지이자 한 남자였구나 싶다.
이중섭은 죽어서야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된다.
지인들이 그를 화장한 후 남은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나머지는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남덕은 남편의 뼛가루를 도쿄 인근의 가족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뼛가루로나마 그는 가족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중섭은 천재적인 미술가였으나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6.25 전쟁이 일어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제주도와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서 통영으로, 대구로, 서울로 옮겨 다니면서,
가난과 외로움과 질병으로 인해 40세에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영양실조로 무연고 행려병자 처리된 주검은
사흘 만에 이중섭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에 있는 가족과도 재회하지 못하고 미술가로서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사코는 1952년 아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중섭은 부산 범일동의 부둣가를 전전하며 문인,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6.25 피난시절에 이중섭은 제주도 모슬포에서 8개월인가 살았는데도,
제주도에서는 이중섭 미술관을 설치하고, 요란법석을 떨며 대대적으로 추모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2년 가까이나 살아가면서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밥걱정 안 하고
많은 예술인들과 교유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통영에서는
이중섭에 대한 기념행사 뿐 아니라 기념관 하나 없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피난 시절 중에 가장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4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전시회도 두 번이나 가진 곳이 통영입니다.
이중섭 미술활동의 르네상스가 통영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세간에는 이중섭을 제주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산이나 통영에서의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이 더 긴데 말입니다.
제주도에서는 왜 매년 추모행사를 열어가면서. 천재화가 이중섭을 잊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화가 이중섭을 동향사람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제주도민의 예술을 향한 사랑이 다른 지역보다 더 지극한 것 같습니다.
요즈음 펜션 민박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루는 가수 이효리나
잠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나
마음속에는 제주도 사람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주도가 천재화가의 제 2고향이 되어버렸습니다.
19/01/14 허주
첫댓글 천재 화가 이중섭
서울 중랑구 망우산(281m) 기슭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이기도 한 특별한 공원이 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다.
산길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시민들의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엔 만해 한용운· 시인 박인환· 조봉암 등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고 불리는 이중섭의 무덤도 만날 수 있다.
'묘지번호 103535',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조각상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의 무덤인지 전혀 모른다.
추모비엔 후배 조각가가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두 아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6.25 전쟁을 피해 그가 머물렀던 부산과 제주 서귀포에
이중섭 거리나 이중섭 미술관이 조성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묘소는 의외로 단출하다.
그는 1916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 직후 불과 마흔 살의 나이인 1956년
조현병과 간염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사망했다.
더욱 가슴 아픈 점은 그가 전쟁을 피해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두 아이를 결국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참으로 소박한 희망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이중섭이 겪은 질곡의 삶은 고스란히 우리민족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지 싶다.
6.25 피난시절에 이중섭은 제주도 모슬포에서 8개월인가 살았는데도,
제주도에서는 이중섭 미술관을 설치하고, 요란법석을 떨며 대대적으로 추모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2년 가까이나 살아가면서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밥걱정 안 하고
많은 예술인들과 교유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통영에서는
이중섭에 대한 기념행사 뿐 아니라 기념관 하나 없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피난 시절 중에 가장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4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전시회도 두 번이나 가진 곳이 통영입니다.
이중섭 미술활동의 르네상스가 통영 시절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