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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벧후 1:10-15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0-15 /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더욱더 힘써 여러분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11)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접하시고자 우리 주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실 것입니다. 12) 이런 일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어서 잘 지켜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여러분이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 당부해 두는 것입니다. 13-1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이 땅 위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이러한 것을 여러분에게 적어 보내어 깨우침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15) 그러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여러분이 이것들을 기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하게 새겨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고 유언하듯 성도들에게 신앙을 굳게 지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10-11)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신 자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2). 또한 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9). 여기서는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들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신분적으로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과 택하신 뜻을 알고 행하여 실족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알고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15)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이미 이 진리를 알고 있으며, 이 진리에 굳게 서 있지만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고 세 번(12, 13, 15)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 그들에게 이 진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는 것이 옳은 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이 장막”(13), “나의 장막”(14)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사도로서 받은 사명이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각성을 통해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권면하는 일이라고 여겼으며, 초대교회 성도들로 항상 생각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베드로는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 앎이라”, “내가 떠난 후”라는 표현을 통해 이미 자기의 임박한 죽음을 인지하고 유언하듯이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여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부르심의 목적과 사명을 기억하고 영적으로 각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적용: 당신은 주님이 굳게 하라고 했는데 흔들리는 부분은 없습니까? 성령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피고 서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이루어 가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나를 왜 부르셨을까?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을 맡기셨을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받게 될 것입니다(벧후 1:11).
< 설 교 >
보배로운 믿음
벧후1장 1~11절 / 이동휘목사
1.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성숙해가는 신앙생활이 되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모유를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한 두 달이 되면 뒤집기도 하는데 이때 부모는 박수를 치며 환호합니다. 뒤집기를 한 후 기어 다니면 더욱 더 기뻐합니다. 생후 5,6개월 지나서 이유식을 하게 되는데 그 때 배변이 달라집니다. 묽은 것이 아니라 단단한 것인데, 이를 보고 부모는 대변에서 냄새난다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다 자란 것처럼 환호성을 지릅니다. 어느 정도 단단한 음식을 갈아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제 손자가 자라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잽싸게 기어다니며 걸으려고 시도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름 자기 의사를 표현하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이제 후로 조금 있으면 걷게 되겠고, 간단한 말도 할 것이고 나중에는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발표하고 말하기도 하면서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격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인격과 성품 등에서 보다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야만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모유를 먹다가 자라면서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고, 더욱 더 성장하게 되면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여 생활하게 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5:12-14)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그 말씀을 경험하는 가운데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선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날로 자라나게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 전서3:5-7입니다.
(고전3:5-7)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보배’라는 말은 헬라어로 ‘특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보배로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장해가는 구체적인 모습, 구체적으로 변화되어가는 삶의 열매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이 성장해가며 그 인격과 성품 등이 성숙해져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해 “신의 성품”, 즉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과 성품 등을 닮아 가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되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에 이런 덕목들이 고루 갖추어질 때에 비로소 “보배로운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는 성령의 교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할 때, 내 속에 성령이 함께 계심을 믿고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나 말,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먼저 염두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성령과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14:16-17입니다.
(요14:16-1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6)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렇게 성령의 교제를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려면,
1) 믿음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한 삶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서 믿게 된 것이나, 내가 내 노력이나 능력으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각자에게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내가 신의 성품을 다 이루었다 해도 내 힘이나 노력이나 능력, 그리고 내 의지 등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2) 이러한 믿음 위에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덕”은 탁월한 도덕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덕을 세우기 위해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또한 탁월한 덕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롬15:1-3)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도 이같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류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덕을 세우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3) 이러한 덕 위에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탁월한 도덕성을 지니고 살려면 ‘지혜’ 또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지혜’ 또는 ‘통찰력’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고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15:14)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위기 가운데서 승리하게 했습니다. 이 일로 나날이 다윗의 인기가 상승하자 사울 왕이 몹시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다윗에게 넘어가지 않겠는가?’ 라면서 다윗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기회를 틈타 다윗을 죽이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사울 왕은 다윗을 살해하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을 때까지 숙청대상 정적 제1호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망자의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한시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없는 가운데 헤렛 숲속에 피신해 있을 때 불레셋이 그일라(유다지파거주지역)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삼상23장)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도망 중인데 그래도 나가 블레셋을 칠까요?’ ‘그래, 나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네 동족을 구하라.’ 다윗이 나가 블레셋을 격퇴하고 그일라를 구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몸 하나 운신하기도 힘든 때에 도망하는 처지에서도 동족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은 배은망덕하게도 다윗을 배신하고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에게 밀고하게 됩니다.(삼상23:7,8) 사울은 군대를 동원하여 다윗을 포위했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하시므로 다윗은 사해 근처 황무지인 엔게디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 역시 사울의 보복이 두려워 다윗의 은신처를 밀고하므로, 이번에는 사울이 3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숨어있는 다윗을 수색했습니다. 다윗은 양의 굴 깊이 피신해 있었습니다. 사울이 수색도중 용변을 보러 들어온 곳이 바로 다윗이 숨어있는 동굴이었습니다. 그러나 동굴 내부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해서 다윗과 그 일행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동굴 내부에 먼저 들어와 피신해 있던 다윗과 그 일행은 어둠에 익숙해서, 사울의 행동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전혀 동굴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호위병도 없이 단독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를 발견한 다윗의 추종자들은, 그 많은 동굴 중에 사울이 하필이면 이 동굴로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절호의 기회라며 사울 왕을 죽일 것을 다윗에게 요구했습니다. 이 기회에 사울을 제거하면 민심이 급속도로 다윗에게로 돌아와 쉽게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 갓을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말씀도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수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때라며 강력하게 사울 제거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말씀하셨고, 추종자들의 강력한 요구대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도망자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더 이상 비참하게 쫓겨 다닐 필요 없는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숨 막히는 상황에,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윗을 전혀 감지 못한 채, 사울이 다윗과 그 일행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추종자들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이 일 후에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낸 것으로 인해 마음이 찔려 자기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그리고 다윗은 추종자들로 하여금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명령합니다. 이 사건으로 통해 우리는 다윗의 인격과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도망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동족을 구한 것은 탁월한 도덕성에서 나온 것이며,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덕을, 그리고 그 덕 위에 지식을 더하는 삶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겉 옷자락을 베어낸 것에 대해 마음이 찔렸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겉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양심에 괴로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옷자락을 벤 일이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자의 인격을 조롱한 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나라 민족을 구원한 일등공신인 자신을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죽이려는 원수 같은 사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자라는 사실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떠난 자일지라도 기름 부었던 자에 대한 결례인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큰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진 사울이었지만 이름과는 달리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사울의 행위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웠다는 것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과 인격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윗의 인격과 성품, 신의 성품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 원장이 많은 수도원생 가운데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수도원생들은 원장이 인간 차별을 한다고 뒤에서 투덜대며 그 수도원생을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은 모든 수도원생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나누어주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모든 수도원생들이 새를 죽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사랑하는 수도원생만 산 채로 가지고 왔습니다. 수도원생들은 그가 원장의 말씀에 불순종했음을 비난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원장이 사랑하는 수도원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새를 죽여 오지 아니했나?” “원장님, 저는 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께서 저를 보고 계셔서 새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수도원 원장이 다른 수도원생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이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새 한 마리라도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살아있는 양심을 가진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과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닌 뛰어난 분별력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에 정확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네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다윗은 사무엘상24:12에서 이렇게 결단합니다.
“(삼상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원수에 대한 보복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만 하실 일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살인면허를 받았음에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신앙의 초점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자는 하나님께서 처분하시고, 자신은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존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결코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폐하실 때까지 오히려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할 주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다윗의 생각이 결코 사울을 죽일 수 없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따르겠다는 신앙에 입각한 다윗의 인격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12장 19,20절을 보겠습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앙과 인격을 쌓아가고 있음이 검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악을 선으로 이겨낸 신앙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사울이 이같은 다윗의 신앙과 인격에 감복하여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4:17-19)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과연 사울의 악을 선으로 이긴 결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앙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그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드린 기도를 보면 그의 신앙과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가시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침을 밷고 갈대로 머리를 치는 무리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와 나를 구원해보라며 비아냥거리며 욕하는 강도에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며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그들 무리들을 위해 축복하신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으시며 의로우신 예수님은 악으로 대하는 무리들에게 선으로, 축복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때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다가 아무리 악한 일,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상대방을 저주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상대방이 잘 될 수 있도록 축복하는 신앙의 인격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깨끗하고 살아있는 양심과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생활로, 믿음 위에 덕을, 덕 위에 지식을 더하여 신의 성품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그리고 지식 위에 절제를 가지라 했습니다. 절제는 세대를 통하여 가장 높이 평가되는 덕목이기도 합니다. 육체적 욕망에 대한 절제를 가지지 못하면, 타락과 방종에 빠져 인생을 한 순간에 망치게 됩니다. 신의 성품으로서 절제는 성령에 의해 그 생각이나 마음이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 위에 절제를 가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게 되었으면 육체의 소욕에 따르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에 대해 절제하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게 되면,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갈라디아서5:16-21입니다.
(갈5:16-21)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 넉넉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5) 다음으로,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세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5:11입니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순식간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한 치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앙의 인격과 성품을 온전히 지켜낸 인내의 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을 당했을 때,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하며 찬양했습니다. 욥기1:21-22입니다.
(욥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2:10)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이러한 인내로 욥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습니다,” 욥기42:12-17입니다.
(욥42:12-17)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그래서 야고보는 인내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6) 이어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하나하나에 존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1070년경, 이스라엘에 엘리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들을 가져오면 그 예물들을 제 마음대로 가져다가 먹어치웠습니다.
(삼상2:14-17)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심지어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까지 성폭행했습니다.
(삼상2:22)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결국 하나님께서 이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삼상2:23-25)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그리고 엘리 제사장 가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삼상2:28-34)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결국 얼마 후 블레셋과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고, 엘리는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삼상4장)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 가문에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두 아들들을 더 중하게 여겨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소흘히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 말씀과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경건한 신앙생활로 하나님 앞에 존중히 여김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경건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신다고 했습니다.
(말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경건한 신앙생활로 하나님 나라 기념책에 기록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7) 다음으로,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롬12:10)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살전4:9)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여기 “형제”는 예수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 믿는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서로 한 형제자매들인 것을 깨달아 서로 우애하며 지내라는 것입니다.
(요일5:1)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삼상18:1)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하자 이렇게 항의합니다.
(삼상19:4-5) (4)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그러나 사울 왕은 온갖 수단 방법으로 다해 다윗을 죽이고자 시도합니다. 그래서 아들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0:31)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어찌보면 아버지 사울 왕의 이 말대로 다윗을 죽여야 요나단이 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사울 왕이 결코 다윗을 죽일 수 없고 다음왕에 오를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이처럼 다윗과 요나단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8)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 신의 성품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시킴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 남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베풀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21)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1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같은 사랑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마19:23-26)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사랑은 우리 힘이나 능력, 노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의 성품이 흡족하여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며, 보배로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로 생각나게 하노라
벧후 1장 12~16절 / 박조준목사
사람은 잊어버리는 동물입니다. 지난날에 끔찍스러운 사고가 있어서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입 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잊어버려서 그럽니 다. 좋은 것, 고마운 것은 더 잘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내려오는 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 는 돌에 새긴다 는 말이 있습니다.그런데 사실은 잊어버려야 될 것은 빨리 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하나님의 은택은 잊 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할 수 있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헌신과 봉사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에 믿었던 것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주신 말씀에 서 그들이 마음속에 새기고 간직해야 할 것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그가 글을 쓴 목적이고 자 기가 언급한 사실들을 거듭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그의 특유한 강조나 메시지뿐만 아니라 많은 일반적인 원리들 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가령 우 리의 기억력에 관한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특징 중에서 망각하려는 경향보다 더 두드러 진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을 아주 쉽게 잊어버립니다. 어디서 한두 번 만나 인사를 나누 었지만 곧 잊어버립니다. 또는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고 우리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 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곧 잊어버립니다. 때로는 세월이 약이라 는 말을 하는 데, 이것도 우리가 언제나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우리 는 중요하고도 흥분된 순간들마저도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 은 개인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하는 것이나 서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겪고 난 후에 우리는 흔히 맹세나 서약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방법, 이런 태도로 살기로 맹세했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맹 세나 서약, 혹은 엄숙한 선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전에 살던 그 자리로 되돌아 가 버립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경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그런데 기 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괴로 운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 게 강조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 점이 무엇보 다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우리 마음속에 기 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입니다. 안다고 해서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학생으로서의 경험이 있으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강의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습니다. 강의를 들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 을 다 압니다. 그래서 이 강의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시험을 볼 때 바로 그 문제를 푸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강의를 들었고 이 주제에 대해서 읽었다는 것도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기는 하지 만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사도 베드로가 마음에 품고 있던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원리를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만큼 실생활에서 실천하고 활용하려고 노력하지는 않 습니다. 우리가 어떤 도덕적 기준은 알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이라고, 그러니 까 알고 있기만 하면 실천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죄가 우리를 유인한다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한 것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을 행한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람들 이 기억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깨닫기 어려운 위험입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어떤 원리가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기억을 회상하고, 그런 기억 속에서 살고, 기억에 힘입어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속에 살 수는 없 습니다. 기억만으로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입니다. 과거 속으로 거슬러 가서 살려고 하는 것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이나 추억 속에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뒤 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추억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부 분이 있거나, 아니면 그 자체가 전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 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가 추억 속에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 아니라 이 원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이것에 의해서, 또 우리가 이것으로 살 수 있도 록 하기 위해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과거 속에 살고, 과거 속으로 이끌려 가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주시는 원리에 의해서 현재를 살아가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중심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는 흔히 예, 그 말씀을 제가 압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아니다. 너희는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단 하루도 거르지 말고 이 사실을 명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 니다. 바로 그 주님과 우리는 날마다 같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명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일 이런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이 원리가 단지 기억이라는 것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원리를 실제 우리 생활에 활발하게 적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일반적인 진술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중심 사상을 반복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도 기독교의 복음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보다도 정치,경제, 문화, 사회여건, 같은 데 관심을 갖습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말에 더 관심을 갖 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은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이런 것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상기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생활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복음에서는 인생의 위 대함과 영광스러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은 저속한 방법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도 합니다. 그들은 지혜의 정수란 인간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지혜를 최대한도로 이용해서 무엇인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생은 위대하고 훌륭하고 커다랗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 로 돌아가라 고 한 성경의 말씀은 영혼에 대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보면 인간은 하등동물에서 진화된, 생각하는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특별한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고 모양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 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가르침입니다.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절망과 비관으 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개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로서 인간이 위대하고 위엄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품고 계신 생각과 인간을 위한 그의 방법, 그리고 계획을 기억해야 합 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매우 흥미 있는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3∼14절을 보십시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 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 은 우리가 잠시 거주할 집이나 장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사 우리와 함께 잠시 거 주하셨다고 말합니다. 육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장막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 세상에 보내져서 잠시 동안 이 거주지에 머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시 체류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은 하나의 순례 이고, 인간은 순례자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여행하면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종의 여관 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75세라고 하니까 다소의 차이는 있 을 것이지만 75세면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성경에도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육신을 입고 사는 것은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 생활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우 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사항입니다. 만 일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인생관을 갖게 된다면 곧바로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살아야 합니까? 우리와 함 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가버리고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생이란 단지 우연에 불과합니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 때가 되면 죽는 것,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래서 사 람은 세상에 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까?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물적인 생활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독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아 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런 의도와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서, 아니 면 그럭저럭 살기 위해서 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 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 인간을 만 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큰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그 영원하 고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드신 위대한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상에서 행하는 일과 인생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중요하고 모든 순간 순간들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 찮다고 생각하며 하는 말까지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도 하나 님이 보실 때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고 했습니다. 돈도 아껴써야 하지 만 시간은 돈과 비교할 수가 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모든 것이 존엄 하고,위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할 때 인생의 목적이 새로워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질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인생의 과정이라면 왜 인생이 이 모양입니 까? 만일에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생의 창시자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독특한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시겠 습니까? 도대체 전쟁은 왜 일어나 많은 생명이 죽어갔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만이 우리에 게 참되고 실제적이고 적절한 설명을 해 주기 때문에 여기에 모순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 통과 시련과 비극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죄 때문이라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죄를 상기시 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고통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사실 그대로 보려면, 모든 고 통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고 설득한다 하더라 도 그 말속에는 진정한 확신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너희가 나 없이 살려 하면서 이루어 놓은 너희 자신의 모습과 너희들 세계를 스스로 보도록 해오고 있다 라고 말씀하 신 분이 바로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는 한 인류나 이 세 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 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사도의 위대한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 시다. 15절에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 려 하노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 고 하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 살고 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세상을 떠납니다. 이 말은 죽음이란 실제로 하나의 탈 출임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도는 나의 탈출이 이를 때까지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 습니다. 여러분, 이 표현은 퍽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애굽의 속박과 포로 상태에서 새로운 땅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잔인한 독재자 바로 왕의 압제와 속박과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후 그 들은 애굽을 떠나서 홍해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풍성한 소산물을 얻게 되었습니 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궁극에 이르러서 접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장막을 걷어 이동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떠나(탈출하여 ) 강(요단강)을 건너 영원불멸의 왕국(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 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시고 이 계획과 목적을 시행하고 계신 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는 한 고통이 있고 마침내는 대변동 사 건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상적인 낙천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에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에 대해서 쓰여져 있기도 하지만, 죽음과 죄와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이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고, 하나 님께 대하여 적의를 가진 모든 요소들은 마침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최후의 탈출, 최후의 계시 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해오신 일을 생각하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기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궁극적인 것,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촉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는 기억하는 것이나 희망하는 것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부활입니다. 생명과 죽음, 그밖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의 삶에 대 한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음과 무덤을 이기고 영원한 삶을 얻 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고 다 시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다른 모든 기억이 거룩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주 신 말씀 16절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 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 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주신 말씀대로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 자신도 친히 성경 여 러 곳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학적인 이론도 아니고 철학적인 평론도 아닙니 다. 이것은 목사가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을 위해서 쓴 목양의 편지입니다. 그들을 돕고, 격려 해주고 확고하게 세워주고, 강하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들이 부 름받고 택함받은 것을 확실히 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그 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가지고 외면으로나 내면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강한 위치에 있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도 결국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있는데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나라들의 심판에 대한 것이 다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 성경을 해석하는 여러 학자들의 이론이나 주장, 그리고 학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 을 믿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핵심은 최후의 성취와 그리스도의 재 림과 계시적 요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너무 분명하고 큰 사실입 니다. 그가 어떻게 다시 오십니까? 주님은 인격으로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육체로 다시 오십니다. 성경은 그가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것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육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십니다. 그는 하늘 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여러 곳에서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사람들은 산과 바 위들에게 자기를 숨겨달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볼 것입니다.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갑자기 다시 오실 것입니다.주님은 그가 언제 오실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고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다시 오십니까? 이 세상 일들을 종결지으시고,시간을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부활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오십니다. 주 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죽은 자가 선악간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 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긴 삶의 기록대로 심판받게 될 것인데, 택함받은 사람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 책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돼 사람은 영원히 구원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들은 다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드리는 말씀은 깨어 있어서 준비하라 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간교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약의 정수입니다. 잘 준비하셨다가 언제 주님 다시 오신다고 해도 영광 중에 맞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
벧후 1장 12~21절 / 이상호목사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단에서 후학을 위하여 수고하는 중견 시인 이동순씨의 시를 한 수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쥐구멍'
사랑채 아궁이에
한참 군불을 안 넣었더니
쥐가 방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내 마음도 꼭 저와 같으리
잠시만 돌보지 않아도 어둡고 퀭한 구멍이
여기 저기 뚫려 있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동순씨의 시를 읽고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도 세밀하게 읽어내었을까? 마치 옛날 어렸을 적 이야기가 제 앞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학교마다 방학이 끝날 때면 쥐잡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쥐를 잡아가지고 꼬리를 끊어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지고 학교에 가지고 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랫동안 불을 지피지 않으면 정말 방 바닦에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닿는 부분은 "내 마음도 꼭 저와 같으리 잠시만 돌보지 않아도 어둡고 퀭한 구멍이 여기 저기 뚫려 있으리"라는 싯구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런 마음으로 다시 다짐하며 말씀을 마음에 새길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하셨고 13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서는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라고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육신의 장막을 벗을 날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그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할 때 생각나게 하려고 애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시던 베드로 사도가 이 천년이라는 역사 저 너머 있는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부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진리에 서고 그 말씀이 생각는 사람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는 당시 성도들의 신앙적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이미 있는 진리, 너희가 알고 있는 진리를 항상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진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의 영적인 삶이 아무리 든든하다고 하여도 사탄은 구멍을 내버리기 때문입니다.
요 15:5-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맺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였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 영적인 법칙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훈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붙잡힌다는 것은 신앙의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을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하는 행동이 믿음에 있는가? 나의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인가? 그리고 내 안에 예수님은 확실히 나를 주관하고 계신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게 시험해 보고 확신이 없다면 심각한 영적인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처럼 정말 주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씀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 안에서 살도록 힘쓰고 애써서 이 시대의 가치와 목표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생명의 공급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사명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13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일깨우고 생각나게 할 이 시대의 사명자가 요구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마 진지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부탁하셨던 것 같습니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몬아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네 형제를 굳게하라! 부탁하신 말씀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하노라!
국민일보에 박세록 장로님의 간증 수기가 연재된 바 있습니다. 단동에서 우연히 한 북한 여인이 돈 때문에 중국인에게 팔려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자신이 대신 그 돈을 치르고 여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감격한 그 여인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낳아주신 부모도 나를 버렸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제게 풍성한 생명과 믿음, 소망을 주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가 고마워 나는 하나님 말씀을 잘 학습(성경공부)하여 북한의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데 한 몸을 바쳐 나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사명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개인 개인이 이 시대에 사명에 불타며 살아간다면 우리 가정은 분명히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명에 바르게 살아간다면 분명히 이 나라는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바울 사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에 관심을 두는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에 붙잡혀 있느냐에 따라서 그를 평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학문에 붙잡힌 사람은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술에 붙잡힌 사람은 예술가가 됩니다. 돈에 붙잡힌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식이 많았지만 지식에 붙잡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경험에 붙잡혔다고도 하지 않았고 논리에 붙잡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오직 복음에 붙잡혔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명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베드로도 모든 성도들이 항상 복음에 붙잡히고 사명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어두워 가는 시대의 아픔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연의 신앙을 회복하여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 교회는 이 시대의 지도적 위치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 바로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명에 불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이 부탁하신 일들이 생각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하시고 있습니다. 이 귀한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언제나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산에 있을 때 하늘로서 나오는 소리를 들은 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단순하게 자랑하는 소리가 아니라 잊지 못할 감격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첫사랑에 대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은 사건이었고 이사야에게는 성전 안에서의 스랍과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게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는 다메섹의 사건이 바로 감격의 첫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능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성자 스크리븐은 신학교를 다닐 때 해변에서 우연히 한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그 처녀는 몸이 허약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어 얼마 후 유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딜가나 슬픔과 비애만은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교회 문 앞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거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지는 스크리븐에게 구원을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으나 그는 냉대하였습니다. 얼마 지난 후 그의 가슴속에 "내 너를 위해 피흘렸건만 너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었느냐"고 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한 사람에게 주려던 첫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줌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심적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주께 맡기세. 주께 사정 아뢰잖아 평화얻지 못하네. 우리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하는 찬송가를 지었고 그후 훌륭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변화산에 올라갔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은 나이 늙어 장막을 벗을 날이 가까이 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았던 그 사랑 그 감격을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내가 본 것이요 내가 거룩한 산에 있을 때 하늘에서 들려왔던 그 소리에 대하여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 믿음의 감격을 다른 믿음의 사람들에게 증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도록 돕는 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혹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영혼의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감격을 가진 자 되어 주님의 은혜와 그 말씀에 붙잡혀 생명의 감격 속에서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새영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벧후 1:12-15 / 우인택 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요12:13).
그러나 그들은 불과 닷새 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마 27:22-25, 요 19:6).
그들이 그렇게 돌변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해석을 잘못하자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직분을 권력의 도구로 삼게 되었고, 그들의 삶은 점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기에 힘쓰는 것은 그들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에피그노시스’ 정확하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여덟 가지 품성’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절)
그리고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11절)
그리고 오늘 사도 베드로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1.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12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라는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앞에서 언급한 교훈들을 이 글을 읽는 성도들은 이미 잘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사도베드로가 권면하기 이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뜻을 잘 알고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위에 든든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이들에게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성품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것은 한 번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이 계속해서 더 깊어지고 삶을 통해 자라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이 바로 이 부분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고 순종했었지만, 결정적일 때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년이 되어 스스로 그 원인을 돌이켜 보니, 당시 그의 신앙이 지식적이고 감정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성령의 권능과 살아 움직이는 교훈의 말씀을 듣고 배웠을지라도 삶에서 계속해서 훈련되어지지 않고 실천되어지지 않는 신앙은 사탄의 시험에 쉽게 넘어지고 마는 것을 스스로의 신앙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신앙의 단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이러한 연약함을 사도 베드로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강조하는데,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다 질그릇이되 ‘복음이라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고후 4:7)
그런데 여러분,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웠기에 그릇 중에서도 가장 깨어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인 우리가 복음이라는 보배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잘 깨어지기 쉬운 자신의 약함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깨어지기 쉽고, 더럽혀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자’임을 늘 인식하고, 스스로를 지키고 보존하기에 힘쓰되 보배를 담을 수 있는 정결을 유지하는데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님의 택하심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10절).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님의 택하심’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사명이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0:21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보냄을 받았는지’ 사명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우리 성도들은 자신을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될 수 있으며,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올바른 증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2. 이어서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말씀합니다(13절).
여기에서의 ‘장막’은 ‘육체’를 뜻하고,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라는 말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순교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유언처럼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14절에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예언하신 것을 말한 것으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 성령의 사람,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사명을 마치고 순교, 곧 죽음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가 ‘사도’일지라도,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사명을 마치면 병들어 죽든지, 늙어 죽든지, 순교하든지 다 죽습니다.
이 중에서 순교는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 대신 죗값을 치루는 것이기에 성도에게 있어 가장 값진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죽음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성도가 맞이하는 임종의 자세는 불신자들의 자세와는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생은 자유한 인생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 속박된 인생입니다.
그러하기에 죽음의 날이 다가올수록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죽음의 고통 앞에서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자유를 외치지만 결코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죽음 이후’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아노니”(고후 4:14).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모든 것의 종결을 의미하는 ‘끝’이 아닙니다.
성도의 죽음은,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나듯 ‘끝’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잠시 자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 성도들은 죽음이 임박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알기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활의 약속을 붙잡고 소망함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을 힘있게 증언함으로써 주변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는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합니다(15절).
제가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구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소유, 즉 ‘예수님의 제자,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가 결여되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이 그가 죽은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속에 남아 그들을 ‘믿음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 베드로의 정신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했기에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훈과 언약의 말씀은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들에게 있어 피난처가 되며 인도자가 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과 그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아니면 아직 믿음이 약해서,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합니다.
심지어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삶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은혜 받기를 두려워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말씀을 멀리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언제고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주간을 앞두고 노 사도의 권면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또한, 모두 주신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신앙의 원리와 집필 동기
벧후 1:10-15 / 최영백목사
앞 단락은 성도가 삶을 통해 구현해야 할 일곱 가지 덕목과 관련한 교훈이었다. 이어진 본 단락은 성도가 믿음에 정진해야 하는 이유와, 베드로가 본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밝힌 부분이다. 따라서 주제는 크게 둘로 구분 된다.
1. 풍성한 영광에 이르는 신앙에 대한 논증(10, 11절)
본 단락은 퇴보하지 않는 신앙을 위해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논한 내용이다. 그리고 내용은 둘로 요약된다.
1) 성도가 힘써 굳게 해야 할 것에 대한 논증
베드로는 이에 대해 10절 전반절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여기서 ‘부르심' 이란 성령께서 진리를 통해서 성도들을 중생케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택하심' 이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목적자로 확정하신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시간차의 순서를 따른다면 택하심이 앞에 위치해야 한다. 택하심은 창세전의 사건인 반면 부르심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그렇게 논증한 바 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하셨느니라” 라고 말하였다. 구원서정에서 택하심을 맨 앞에 배열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부르심을 말하였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부르심을 앞서 말한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성도들의 행위와 의지를 강조하려는 취지의 발언이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실제 본문은 구원의 논리를 말하는 과정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순서는 그렇게 중요한 핵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말하고자 함인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함을 주문하였다. 여기서 ‘굳게 하라' 고 할 때 ‘굳게' 로 번역된 헬라어는 ‘베바이안'(βεβαίαν)이다. 이는 ‘견고한', ‘확실한', 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 ‘베바이오스'(βέβαιος)의 목적격이다. 그리고 ‘하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이스다이'(ποιεῖσθαι)는 ‘행하다'란 뜻을 지닌 ‘포이에오'(ποιέω)의 중간태 현재형이다. 여기서 이 동사의 중간태는 ‘스스로 행하다' 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은 100% 하나님의 주권적 범위에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굳게 하는 것은 그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몫이란 교훈이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은 전적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이를 굳게 하라고 함은 무슨 뜻인가? 무엇보다 받은바 이 큰 은혜를 망각해선 안 됨을 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실제 이 부분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운데 가장 큰 은혜이다. 아울러 가장 기본이 되는 은혜이기도 하다.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나 지혜로 되는 것 역시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100%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기인된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 은혜에 대한 감격한 감사와 감동이 언제나 그들 마음속에서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심각한 신앙의 퇴보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이 구속의 원리를 굳게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단의 역사는 언제나 교회 안에 침투하여 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화 시키려고 한다. 구속사의 원리를 인간의 의지의 소산으로 바꾸어 놓으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행위구원이나 만인구원설 같은 것들이 다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도 그러하고 성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진리를 견고하게 세워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교회로서의 역할이 가능할 수 있다. 또한 성도의 개개인의 신앙생활 역시 이것이 분명할 때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요 성도 신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크고 성도가 많은 것이 교회가 아닌 것이다. 혹연 성도가 두 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원리를 굳게 함이 진정한 교회인 것이다.
2)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할 때의 결과적 열매에 대한 논증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할 것을 주문한 베드로는 그렇게 할 때 성도들에게 두 가지 유익이 있을 것을 이야기하였다.
첫째는,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다.
여기서 ‘이것을' 은 앞에서 말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가리킨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의 진리를 확고히 할 때 절대 믿음이 퇴보하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맞다. 부르심과 택하심이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성도들의 의지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기에 성도 자신이 힘쓰지 않으면 믿음을 지켜나가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부분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중생 이전의 삶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너희가 이것을 행치 않으면 언제든지 실족하게 될 것이라” 고 하였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 자체가 이미 실족이란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행위구원이나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굳게 해야 할 진리가 택하심과 부르심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즉 창세전 선택과 거저주신 믿음의 은혜를 굳게 하지 않는 것이 실족임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중요한 진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와 관련된 의미이다.
대부분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나라' 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4장 17이나 마가복음 1장 15절을 근거로 삼는다. 마 4:17에서는 ‘천국이 가까웠다' 고 하신 말씀이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고 하였다. 이런 말씀을 성도의 심령에 주님의 통치가 임한 것을 가리킨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런 의미로서의 나라를 말한 것은 아니다. 이는 미래적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질 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심령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그런 말을 한 바 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역시 미래에 속한 나라의 영광을 표현함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이 가까웠다' 는 표현이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성도의 심령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적 개념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그보다는 주님의 대속과 관련한 의미로 해석됨이 보다 합당하다. 그렇다는 것은 성도의 심령에 임한 주님의 통치는 주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의 심령에도 동일하게 있었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 고 언급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를 천국에 이르게 되는 기본구원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구원은 은혜가 아니라 성도들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된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함이 아니라 상실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적 열매를 말씀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 이란 표현은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한 표현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넉넉히 주시리라' 란 표현을 쓴 것이다. 여기서 ‘넉넉히' 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루시오스'( πλουσίως )는 ‘풍부하게', ‘부유하게', ‘충분히'란 뜻을 나타내는 형용부사이다. 즉 많고 큰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다. 그러므로 이는 성도들이 부르심과 택하심의 원리를 전제한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의 원리에 따라 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 하늘 영광의 상급이 풍성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는 베드로전서에서부터 줄곧 강조해온 베드로의 신앙사상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그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벧전 5:3, 4)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창세전 택함을 받은 백성은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확정 된 것이다. 그럼에도 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래야만 바른 신앙생활, 올바른 주님 섬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넉넉히 더해주시는 영광의 면류관, 무궁한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저 은혜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요구한다하여 되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이는 오직 바른 원리에 따라 행한 것만큼 주시는 행위에 따른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양만 내는 적당한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바른 진리에 기초를 세워야 한다. 즉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과 뜻을 다해야 한다. 전 인생을 주님 섬김에 걸어야만 한다. 거기에는 넉넉한 영광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본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한 논증(12-15절)
본서의 기록 목적을 밝히고 있는 본 단락은 내용상 주제가 넷으로 요약된다.
1) 수신자들에 대한 현재의 신앙에 대한 평가(12a절)
베드로는 12절 전반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라고 함은 앞에서 베드로가 진술한 내용을 가리킨 표현이다. 그리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라고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들의 신앙을 나타낸 표현이다. 즉 아시아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깨닫고 진리의 기반 위에 바르게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이미 있는 진리' 라고 할 때 ‘이미 있는'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루세'( παρούσῃ )이다. 이는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파레이미'( πάρειμι ) 동사의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문자적으로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진리' 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언급에서 보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베드로와 함께한 전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미 베드로 사도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 보면 저가 두 번째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천사의 도움을 입어 출옥케 됨을 볼 수 있다. 그 후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형제들과 잠깐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곧바로 형제들과 작별하고 다른 곳으로 간 것으로 밝혀주고 있다. 거기서의 ‘다른 곳'이란 본문에서 볼 때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있던 소아시아 지역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곳 소아시아 유대인 성도들은 과거 성령이 임했던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찾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상당한 사람들이 변화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하나님께서 하루에 3천 명씩 5천 명씩 믿는 자를 더해주었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이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기록할 때는 로마에 이르러 복음을 증거 한 것으로 보여 진다. 때문에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이들 교회들을 계속해서 지도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 지속적으로 이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상태에 대해 보고를 받았을 것 역시 명백하다. 그리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편지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들었던 진리를 변함없는 믿음으로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이들을 향해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라고 저들의 신앙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것일 것이다. 신앙이란 한 순간의 과정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어렵다.
갈라디아교회 같은 경우 처음 복음을 받아드렸을 때는 저들의 열정이 심히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갈 4:14에서 저들이 바울을 천사처럼 주님처럼 대접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바울의 눈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서는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4장 15절 말씀이다. 그러나 저들은 이내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었다. 그리고는 바울을 사도로도 인정치 않으려는 배은의 행위가 있었다. 실로 이러한 신앙생활은 복음을 전한 사람에게는 가장 큰 실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성도들은 그래도 변치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있었음을 말씀하였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들의 신앙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진정한 신앙이란 교훈을 받게 된다.
2) 본 서신의 집필 동기(12b, 13절)
수신자들의 믿음이 가르침에 충실함을 인정한 베드로는 이어진 12절 하반절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벧전 1:12b)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본 서신의 집필 동기를 말함이다. 수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고 잘 지켜가고 있음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진리를 잃지 않고 그 진리 안에 살게 하고자 이 편지를 쓴다는 그런 표현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한 순간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한 때 잘하였다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일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장거리 경주와도 같다. 그러므로 잘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르침은 계속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목사들을 보면 신학교를 다닐 때는 그래도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편이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만 되면 배우려는 자세를 갖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욱더 배움의 기회를 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 성경은 일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는 방대한 불량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회 지도자는 날마다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성도들을 먹여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어진 13절에서도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였다.
(벧후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여기서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때' 란, 베드로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이란 그런 뜻이다. 그리고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란 말은 원문을 직역하면 ‘너희를 생각하게 함으로써 너희를 일깨우는 것이' 가 된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단순히 과거의 가르침을 회상하고 기억함에서 멈춤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근거로 더 깊은 것을 깨닫고 분발케 하려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본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임을 말한 것이다.
3) 베드로 자신의 신변에 대한 입장 표명(14절)
앞 단락은 본서의 집필 동기에 대한 진술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14절에서는 그렇게 말하였다.
(벧후 1: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이는 베드로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여기서 ‘이는' 이라고 함은 앞 절에서 ‘이 장막에 있을 동안' 이라고 한 언급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라고 함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주님께서 예언해 주신 말씀에 대한 표명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21장 18절에서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란 사실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더러 주석가들 중에는 본 절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예언을 가리킴이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전설로 전해지고 있는 ‘쿼바디스(Quo Vadis)'의 내용을 여기에 대입시키기도 한다. 즉 베드로가 순교하기 얼마 전에 주님께서 저의 죽음을 계시해 주신 것을 가리킨 말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요한복음에서의 주님의 예언은 죽음의 방식에 대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즉 시기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진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이 어떤 죽음을 죽게 될 것인지 이미 주님으로부터 예언을 들었던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때는 그야말로 노년의 시기였다. 거기에 네로의 박해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 이 편지를 쓸 때만 하더라도 이미 66년 발발한 유대의 민족 반란이 확산일로에 있었던 때였을 것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옴을 느꼈을 수도 있다. 특별히 죽음의 시기를 계시를 해 주지 않았다 해도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력 짐작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임박한' 할 때 ‘임박' 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타키네'(ταχινή)이다. 이는 ‘짧은', ‘신속한', ‘박두한' 이란 뜻을 가진 ‘타키노스'(ταχινός)의 주격 형용사다. 문자적 의미에서 보면 죽음에 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죽음이 임박해 옴을 알면서도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잠잠히 받아드리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여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복음의 역사에 몰두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느끼기도 한다. 오직 복음과 성도들의 신앙을 위한 염려로 남은 인생을 보내는 노(老) 사도 베드로였던 것이다. 오직 드림과 희생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베드로가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기 세상 욕심을 채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축복이라고 자랑삼는 교회들이 세상을 가득 메워가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모습에서 보면 이러한 행태가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았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에게 드림과 헌신의 삶이 없다면 말이다. 반대로 아무리 받은 것이 없다 한들 그것이 자기 믿음 생활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없는 가운데서도 드리고 헌신하는 삶이 있다면 말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받았음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 무엇을 드리고 헌신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을 가늠하는 진정한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4) 본 서신의 집필 목적(15절)
본서의 집필 동기를 밝힌 베드로는 중복하여 다시금 본서의 집필 목적을 밝히는 것으로 본 단락을 매듭지었다. 이에 대해 15절에서 그렇게 말하였다.
(벧후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본서를 쓰게 된 보다 구체적인 목적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나의 떠난 후에' 라고 함은 자신이 죽은 이후에 대한 의사 표명이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죽은 이후의 성도들의 신앙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죽은 이후라도 이 말씀을 살펴 다시 진리를 생각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설명하면, 늘 말씀이 수신자들의 생각 속에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말씀이 성도들의 중심에 살아 역동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이 편지를 쓴다는 의사 표명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두 가지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의를 생각해 본다.
첫째, 성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살아 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속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의미이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쓴 동기를 13절에서 말했다. 진리에 대해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서의 집필 목적 역시 동일하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라도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성도들의 중심에 살아 역동하는 말씀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이 기억되고 생각 속에 살아 운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끌고 주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실상 신약시대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과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말씀이 그 마음에 기억됨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말씀이 자기 안에 살아 운동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다른 사람을 살피는 불빛은 되면서 자기에게는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결국 그것은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과 교통하신다. 따라서 말씀과의 단절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씀이 자기에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저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무엇보다 말씀이 자기 안에 살아 운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작동되는 말씀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이며 목적임을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이다.
둘째,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떠나는 감격한 신앙의 결산이란 진리
이는 베드로가 자신의 죽음을 표명함에 담긴 중요한 구속사적 의의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나의 떠난 후에' 라고 하였다. 여기서 ‘떠난' 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소돈'(ἔξοδον)은 본래 ‘떠남'이나 ‘탈출'을 의미하는 명사 ‘엑소도스'(ἔξοδος)의 목적격이다. 문자적으로 ‘길을 떠나다'란 뜻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헬라어로 표기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주님께서도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는 과정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러했다. 그런데 거기서는 ‘별세'(눅 9:31) 라고 번역하였다. 왜 베드로는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하신 그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죽음을 표명하고 있는 것인가? 그만큼 변화 산상에서의 신비한 경험이 베드로의 신앙과 삶에 심히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에게 있어서의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죄악 된 이 세상을 떠나는 감동과 감격의 역사였음을 암시해 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의 신분에서 떠나게 될 때의 그 감동과 감격처럼, 베드로에게 있어 육신의 죽음은 그와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저는 자신의 죽음을 ‘출애굽'을 뜻하면서도 주님께서 사용하신 ‘엑소도스'( ἔξοδος )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겠냐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베드로만은 아닌 것이다. 성도들의 모든 죽음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살아생전의 주님을 위한 삶의 정도에 따라 역시 감동과 감격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삶을 이동하는 감동과 감격의 역사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맺은 인연과 세상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버리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더러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분명 원리상 축제여야 함은 분명하다. 결혼 축하를 위해 울리는 팡파르보다 더 큰 팡파르를 울리며 축하해야 할 축제요 기쁨이 아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육신의 장막을 떠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온 믿음의 결산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본서는 베드로의 유원과도 같은 서신이다. 저가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만족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크나큰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 명백해 보인다. 그만큼 저의 전 인생은 오직 복음을 위한 삶으로서의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쇼 윈도우에 세워진 마네킹처럼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 신앙은 아닌지? 심각한 고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실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주님 섬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진다. 오직 주님의 기쁘심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진다. 하나님 섬김이 보다 적극적이고 보다 전폭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우리 역시 결국은 주님 앞에 서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우리에게도 불원간(不遠間)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