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대통령은 결코 기회주의자도 친일분자도 아닙니다. 1932년 대구사범학교, 1937년 문경보통학교 교사, 1940년 만주군관학교, 1942년 일본육사, 1944년 만주군 소위, 1945년 광복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 1961년 군사혁명, 이 모든 결단들은 오직 시대의 실존상황을 뛰어넘는 수단이며 죽음을 각오한 선택입니다. 박정희를 보면서 나는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를 생각합니다. 박정희, 그는 '엄청난 성취동기를 가진 행동인'일 뿐입니다.
2. 박정희대통령은 절대 독립군을 토벌하지 않았습니다. 1944년 7월에 열하(熱河: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지명)의 興隆縣 半壁山(북경 동북부 150km지점)에서 괴뢰 만주국 군대인 만주군 제8단(연대)의 소위로 근무할 당시 열하일대에는 독립군은 없었습니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 알렉세예프스키에서 일어난 적군의 독립군 공격사건인 흑하사변을 전후하여 만주일대의 독립군은 대부분 러시아로 이동하여 서서히 소멸해 갑니다. 박정희 만주군소위가 열하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3. 성균관대의 김삼웅교수라는 자는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을 110회나 했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또 어떤 자들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소속된 공산계열인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이 일본군과 싸운 것을 가지고 독립군 토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을 독립군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팔로군 즉, 중공군과 일본군의 싸움이지 조선독립군과 만주군의 싸움은 아닙니다. 만주군은 정규전에 투입되지 않고 주로 치안유지만 담당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의용군의 활동근거지는 박정희의 주둔지와는 터무니없이 떨어진 하북성 한단시 태항산(북경서남부 380km지점)일대입니다. 조선의용군활동지역에 없던 박정희가 어떻게 조선의용군과 싸울 수 있습니까?
4. 오히려 박정희 만주군중위는 1945년 광복군(북평잠편지대 지대장 최용덕(崔用德), 참모 이성가(李成佳))에 가담했습니다. 노무현과 좌파들은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무시하려 하지만 임시정부가 힘이 없어서 해방 당시 3개 지대를 갖고 있던 광복군을 모두 7개의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설치해 모두 10개의 지대를 각 1만명씩 사단으로 육성해 10만명을 귀국시켜 국군의 모체로 삼으려고 한 광복군 확충계획이 무산되었을 뿐 제대로만 되었으면 박정희대통령은 처음부터 광복군으로 해방조국에 당당히 귀국했을 것입니다.
5. 역사에서 우연과 필연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갑니다. 역사는 역사가의 눈으로 재해석될 뿐입니다. 그러나 열우당과 좌파들은 역사를 법률이라는 이름아래 자의적으로 재단하려 합니다. 열우당 송영길은 '친일분자의 자손들은 사죄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친일진상규명법의 음모와 저의가 무었인지 명백히 드러나는 말입니다. 공산당과 관련한 연좌제는 기를 쓰고 없애면서도 35년 일제식민통치를 고뇌한 만주군소위와 관련한 연좌제는 기를 쓰고 되살리려고 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관용의 1/100만 있어도 있을 수 없는 더러운 음모입니다!
박사모 여러분! 긴장하여 공부하고 철저히 대비하여 박근혜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날까지 이론적 무장을 게을리 해서는 않됩니다!
첫댓글 초지일관님! 좋은 자료 감사!
네..잘보구 갑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