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사랑 …23
그렇게 내가 소한이에게서 새로 느끼고있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버린 그 사건 말고는
나름대로 평탄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후우.. 이제 강소한을 어떻게 보냐구...-
하지만 아침에 있었던 사건 하나 때문에 이제 강소한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나.
나중에 닥쳐올 강소한과의 만남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달리 태연한, 얼굴에 옅은 미소조차 걸치고 있는
사영이의 모습에 약이 바짝 올라버렸다.
사영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채 공책에 영어단어를 받아적기만 바쁜
나에게 종이 치자마자 말을 거는 사영이.
"나한테 뭐 삐진게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일단은 점심을 먹으며
화해하는게 어떨까? 너 아까 아침부터 계속 그러잖아."
"너 나빠."
다짜고짜 튀어나간 한마디.
그 한마디에 사영이의 눈은 엄청나게 커졌다.
"뭐..뭐? 나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털어놓는 내 마음.
"난 나중에 강소한을 어떻게 만날까 걱정하느라 수업에 집중도 못했는데 넌..."
"아아, 넌 태연하기만 한 내 모습에 약이 오른거지?"
"어? 응.. 어떻게 알았어?"
"넌 내 손바닥 안이잖냐. 초딩때부터 사겼던 친구를 내가 모를까봐?"
"엇, 난 아직까지도 널 모르겠는데..."
"흐음... 비나양, 이거 실망인데? 내 화를 풀려면 매점에서 도시락을 쏘거라!"
의자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매점으로 향하는 사영이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하고 웃어버린 나.
항상 그래왔다. 처음 학교란 곳을 접했던 10년 전.. 그때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주었던
아이가 사영이였다. 지금보다 약간 옅게 탄 피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영이.
그녀는 내게 예쁘게 웃어주며 '나도 친구 없는데... 나랑 친구하자!' 하며
붙임성 좋게 다가왔었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친구하자며 다가오는 수많은 아이들을 제치고 나에게 손내밀어줬던 사영이를.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리고 3년전에 유난히 심했던 내 투정을
넉살좋게, 인내심있게 받아주고 항상 지금처럼 쉽게 풀어주었던 사영이.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우리의 우정을 회상하며 느긋하게 걸어 도착한 매점.
그곳엔 유난히 튀는 목소리를 가진 사영이가 날 반겼다.
"많이 늦었네? 난 또 너가 도시락 안사줄려고 토낀줄 알았지."
진심으로 하는 듯한 사영이의 말에 또 피식하고 바람새는 웃음소리를 낸 나.
강소한을 만나고부터 많이 밝아진듯한 나의 모습에
사영이도 내심 기뻐하는 게 보인다. 괜히 10년 친구이겠는가.
"으하, 배부르다."
내가 한그릇을 거의 다 비워갈 때 쯤, 내 앞에선 깨끗히 자신의 도시락을 비우고
배를 떵떵거리는 사영이가 있었다.
도희명을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명랑해진 사영.
그 전에도 명랑했었지만 더 명랑해진 덕분에 이젠 오바수준이 되어버렸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난 오래전에 다 먹었다구. 너가 늦은거야."
"그건 도저히 사람이 먹는 속도가 아니라는걸 잊은건가?"
"야아! 너 요새 계속 기어오른다?"
"흐음, 다음시간이 아향언니가 담당하는 체육이었지?"
소한이, 성재, 희명이를 만나고 나서부터 사영이를 따라 덩달아 밝아진 내 성격.
이제 포기한 듯 핸드폰을 갖고 게임을 하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작은 탄성을 지르고
혼자 노는 사영. 그런 그녀의 모습을 힐끗 한번 보고 한숨을 쉰다.
-어쩌다 그지경이 됬니, 사영아.-
아향언니가 담당하는 체육. 우리 학교는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여고이다.
교장선생님은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시기에
중요한 과목은 대부분 여선생님들을 시키시는 편이다.
궂은일은 거의 다 남선생님들의 몫이 되고.
이 학교로 발령나는 남선생님들은 행복 끝 고생 시작인 것이다.
근데 왜 여자를 우선시하는 이 학교에서 힘든 체육을 아향언니가 맡게 되었느냐!
아향언니가 자원했다. 자신은 교실에 가만히 앉아 분필가루를 마시는 취미가 없다며.
자기의 고운 손이 분필가루로 까칠해 지는것이 싫다며.
워낙에 잘난 아향언니라 체육때도 여름엔 얼굴타지 말라고 썬캡을 쓰고 나온다.
우리 반은 적응된 모습이지만 다른 반 아이들에겐 여간 낯선 모습이 아닐 수 없을것이다.
"자아, 오늘은 봄볕이 너무 좋은 관계로 피구를 할꺼다."
"예에~!! 아향언니! 오늘따라 외모에 빛이나요!"
피구를 할꺼라는 말에 아이들이 아향언니를 띄워준다.
보나마나 자신들의 기분이 좋아서리라.
"호호호- 내 외모는 언제나 빛난단다."
"우욱, 아까먹은 도시락이 올라올꺼같애."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사영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며 급기야는 구토를 호소한다.
나머지 2학년 8반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향언니."
사방에서 우웩거리던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혼자 자화자찬에 빠져있던 아향언니도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어머, 우리 편안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시나 했더니 비나였구나!"
평소엔 쓰지도 않던 어머라는 감탄사를 연발하시며 노란 금발을 흩날려주시는 아향언니.
점점 상태가 안좋아지는 우리 반 아이들과 아향언니.
"조금 전 먹었던 점심이 올라올것 같아요. 이제 그만하시고 어서 아이들을 챙기신 뒤에
피구를 하는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약 15초간의 정적.
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게 충격이신 듯 한 아향언니의 멍한 표정.
그리고 점점 커지는, 운동장 한켠에서 우리반의 웅성거림.
플러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등을 두드려주는 사영이.
"비나 장서인한테 머리를 심하게 맞았나봐."
"쟤가 비나였단 말야? 몰랐어."
"목소리는 비나가 맞는데...."
"보나마나 뻔해. 사영이가 비나를 망쳐놓은거야."
"맞아맞아!!"
웅성거림의 결론은 끝내 '사영이가 나를 망쳐놓았다' 로 맺어지고 그런 결론에
적극 부인하는 사영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틈을 타 들려오는, 언제들어도 고운 아향언니의 목소리.
"비나야..."
약간 떨리는 아향언니의 목소리에 웅성거림도 잦아들었고
씩씩거리며 아이들을 노려보던 사영이도 아향언니를 바라본다.
"비나 너 미워!!!"
떨리던 목소리는 어디갔는지 상당히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금발을 흩날리고 녹색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을 맺힌 채
달려나가는 아향언니.
그런 언니의 모습에 교무실에 있던 남선생님들은 가슴아파했겠지.
그렇게 아향언니가 뛰어가고 나서 돌아오지 않는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체육시간은 끝났다.
체육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교시를 끝마치는 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은것처럼
그만큼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종례시간. 약간 넋 나간 표정으로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들어오시는 아향언니.
"얘들아, 오늘은 이 언니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으니 종례는 없다.
그리고 비나야? 넌 좀 남아라."
언니의 남으라는 말에 흘끗흘끗 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이들.
간혹가다 입모양으로 '힘 내' 라고 속삭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소때와는 다르게 얌전하게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가는 친구들.
"강소한이랑 버터랑 희명자기한테는 내가 잘 말할테니까 힘 내라.
아, 비나씨. 아까 그 모습. 평생 못잊을꺼야. 크크큭"
이 말만을 남겨둔 채 내 등을 토닥여주고는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가는 사영이.
그런 사영이의 뒷모습을 때려주고 싶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향언니와 나만이 남은 이 교실에는 침묵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그 침묵을 먼저 깬건 나였다.
"저기, 언니.. 왜 저를 남으라고...."
"비나야."
중간에 내 말을 끊어먹으시고는 손짓을 하며 자신의 앞자리를 가르키는 언니.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왜...요?"
"흐윽, 너 왜이렇게 변한거니!!!"
내 어깨를 약간 아플정도로 때린 다음 시작된 아향언니의 잔소리.
그런 잔소리를 등지고 교문으로 향하는 사영.
친구가 선생님께 혼나는데도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걸쳐져있었다.
조금 전, 체육시간에 비나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그 특유의 편안한 목소리로 아향을 당황케하던 그녀.
사영은 알고 있었다. 아향이 정말 화가 나서 비나를 남긴게 아니라는것을.
잔소리를 한참 하다가도 나중에는 포근하게 안아주고 먹을거를 사줄것이라는것을.
자령여고의 교문앞에 변함없이 서있는 3명. 와인색이 제일 먼저 보이기 시작해서
그다음으로 레몬색 그 다음에 다크블루색 순이였다.
그런 남자들에게는 관심없다는 듯 그냥 지나쳐가는 자령여고 학생들.
다른 여고학생들과는 다르다. 여자인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교장선생님을
본받아 이 자령여고 학생들은 상당히 도도했다.
"사영씨~♡"
비나를 데려오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생각하느라 잔머리를 굴리는 사영.
그런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희명이었다.
희명을 보더니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달려가는 사영.
"희명자기야~♡"
귀여운 성격과는 달리 넓은 희명의 품에 폭삭 안기는 사영.
그런 사영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희명.
하지만 이 둘을 결코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소한.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헤프게 웃는, 그 둘의 애정행각에는 관심조차 없는 성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한은 목소리를 깔더니 사영을 다그친다.
"씨댕아. 어이, 도희명깔씨댕아. 비나는 어디있냐?"
카페 게시글
하이틴 로맨스소설
[ 장편 ]
●아픈사랑 - 23●
돼냥이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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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2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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