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 중에서 트위드강 하류부로부터 셰비엇 구릉을 거쳐 솔웨이만(灣)에 이르는 경계선 북부 지방.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스코틀랜드의 일부 정당, 시민단체, 개인들이 스코틀랜드가 독립 주권국을 목표로 벌이는 정치적 운동이다.
2014년 9월 18일 스코틀랜드에서 주민투표가 시행되었다. 투표자들은 "스코틀랜드가 독립국이 되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찬성 또는 반대를 답하게 된다. 투표 전 일주일 동안에 여론조사에서는 찬성과 반대 양측에서 근소한 차이를 보였으며, 스코틀랜드의 경제, 재정, 통화, 유럽연합과의 관계에 대한 '찬성' 투표의 결과에 관해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가열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중세 초기에 세워진 독립국이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코틀랜드의 건국연도를 케네스 1세의 재위 기간이었던 843년으로 추정한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정통성은 잉글랜드의 수많은 침공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요구하면서 수많은 명분을 들었는데, 교황과 다른 외국 통치자들에게 군사 침략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 보통이었다. 잉글랜드 민속에서는 트로이의 브루투스가 큰아들 로크리누스를 잉글랜드에, 작은아들 알바나크투스를 스코틀랜드에 남겨 영국을 세웠다는 유명한 설화가 하나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 신화를 반박하고 스코틋랜드만의 유명한 설화를 만들었는데, 그리스의 왕자 고이델 글라스와 그 아내이자 파라오의 딸인 스코타가 스코틀랜드를 더 일찍 세웠다는 내용이다. 전설에 따르면 스코타는 이집트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운명의 돌을 옮겼다고 한다.
1290년에 일어났던 왕위 계승 위기는 스코틀랜드 왕국사의 분수령이었으며,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는 잉글랜드의 시도로 이어졌다. 잉글랜드 세력에 맞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오울드 동맹이 이때 처음으로 발동되었고, 1500년대까지 계속해서 유효한 채로 남아 있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이 벌어진 끝에 왕국은 다시 부흥하여 로버트 1세 (1306년 즉위)를 모시게 되었다. 로버트 1세의 장남은 스튜어트 왕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이라 선포하면서 같은 군주를 공유하게 되었는데, 이를 동군연합이라 부른다. 가톨릭-개신교 간 분쟁이 벌어지던 와중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가 1688년에 퇴위하고, 프로테스탄트 스튜어트 왕가가 몰락할 조짐 (실제로 1714년에 몰락)을 보이던 1707년,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가 독자적인 길로 갈 것을 우려하고 두 왕국의 형식적인 연합으로 이어지도록 연합 조약에 이어 연합법을 통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이루었다. 보니 프린스 찰리를 비롯한 제임스 7세와 2세의 후손들을 필두로 연합에 맞선 스코틀랜드의 거센 저항은 174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연합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1800년 연합을 통해 형성되었다. 아일랜드 남부의 26개 주는 1922년에 연합을 탈퇴했고, 나머지 지역은 오늘날의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 및 북아일랜드가 되었다.
위치 |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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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78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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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 GMT(UTC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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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분 | 32주(Council A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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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관청 소재지 | 25 Chambers Street, Edinburgh, EH1 1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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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www.scotland.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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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 | 에든버러(Edinburg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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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명) | 5,116,900(2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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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듣기 |
스코틀랜드(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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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성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중세기 의 성으로 7세기경부터 축성이 계속되어 왔다. 성내에서는 11세기의 교회 세인트 마 거렛트차펠, 그래트홀, 박물관 등이 있다.
남으로는 잉글랜드 최북부의 노섬벌랜드주(州) 및 컴브리아주와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북해, 서로는 대서양을 앞에 두고 있으며, 남서부에서는 노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北)아일랜드와 마주보고 있다. 지리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향해 하일랜즈·롤랜즈·서던업랜즈로 갈라져 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동부 해안지대로부터 롤랜드에 이르는 평야부에 모여 있다. 북부와 서부의 해안선이 길며, 헤브리디스 제도·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를 비롯하여 800개 가까운 유인도·무인도가 있다. 처음에는 픽트인(人)과 스코트인으로 대별되는 켈트계(系) 부족들의 소왕국이 몇 개 있었으나 11세기까지 스코트인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왕국이 수립되어 점차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였으며, 15세기에는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 제도도 스코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잉글랜드와의 항쟁이 계속되었으나 13세기의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2세·3세시대에 현재와 거의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고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인은 흔히 이 시기를 자국의 황금시대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사이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에 대한 1313∼1314년의 독립전쟁의 승리, 1503년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의 결혼, 1567년의 메리 여왕의 처형 등과 같은 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되어(제임스 1세), 양국의 동군연합(同君聯合)관계가 성립하였다. 시민혁명 당시에는 크롬웰에 의한 스코틀랜드 정복도 있었으나, 명예혁명 후인 1707년에 양국의 의회가 통합되고, 이에 양국은 연합왕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스코틀랜드의 귀족 16명이 런던의 상원 의석을 차지하는 원칙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특히 글래스고의 상공업이 급속히 증대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은 그 후에도 존속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개의 자치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독자적인 사법제도와 보건·교육제도를 가지며 국교회제도(國敎會制度)도 독립해 있다. 주도(主都)는 에든버러이고, 경제적 중심은 글래스고이다. 주요산업으로는 보리와 사탕무·감자 등의 농업, 소·양의 목축업, 임업·어업 이외에 석탄의 산출이 풍부하며, 한때 활발했던 제철·조선 등은 쇠퇴하였다. 그 밖에 그레인지머드를 중심으로 한 화학공업과 각지에 분산해 있는 전통적인 모직물 공업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06일차 2016년 06월 06일 (월) [지역] 맨체스터-하워스-윈더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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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 호텔 조식 후
다양한 건축 양식을 감상할 수 있는 체스터 대성당 시청사, 목조건물이 아름다운 로즈 아케이드가 등 관광 후
맨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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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스 |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되었던 하워스로 이동 브론테 자매 생가(내부) 및 하워스 교구교회(내부) 등 관광 후
★하워스 교회 지붕공사로 인해 6월30일까지 내부입장이 불가합니다. 윈드미어로 이동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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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산과 호수 산책 보네스-앰블사이드간 윈드미어 호수 크루즈 탑승 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ontents.verygoodtour.com%2Ffile%2FDIABLO%2FERP%2FPRODUCT%2FEPP319%2FSCHEDULE%2F2011019%2Fcontent%2F%EC%9C%88%EB%8D%94%EB%AF%B8%EC%96%B4_horz.jpg) 펜리스로 이동하여
호텔 투숙 및 휴식
윈더미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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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 LOW WOOD 44-15394-33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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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 조식 : 호텔식 / 중식 : 호텔식 / 석식 : 현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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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일차 2016년 06월 07일 (화) [지역] 윈더미어-에딘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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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더미어 | 호텔 조식 후 '북쪽의 아테네' 라고 불리는 에딘버러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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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딘버러 |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에딘버러성 중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로얄마일 왕자의 거리, 소설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된 로슬린성당 관광 후
어바인으로 이동하여 호텔 투숙 및 휴식
에딘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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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 MENZIES IRVINE 44-1294-274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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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 조식 : 호텔식 / 중식 : 중국식 / 석식 : 호텔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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