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기행 보련산 보탑사(1/2) 진천하면 회자하는 말이 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 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인데 이는 진천이 예로부터 물이 많고, 평야가 넓으며, 땅이 비옥하여 풍수피해가 적어 농사짓기 좋은 곳이며 또한 인심이 후하여 사람이 태어나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생거진천이라 했다. 그리고 웃동네 격인 경기 용인은 산세가 온후하고 사대부들의 묘소가 많다하여 생거진천(生居鎭川) 과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함께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음성휴게소에서)
또한 진천에는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옛날 진천 사는 어느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출가 아들 하나를 낳고 살다가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친정인 진천으로 돌아와 재가를 하였는데 진천에서도 또 아들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인에 살던 아들이 장성하여 찾아 와서는 어머니를 모셔가겠다고 한다. 진천의 아들은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마을 원님에게 상소를 올렸다. 전후이야기를 들은 원님은 생각 끝에 내린 답이 살아서는 진천에 살다가 죽어서 그 제사는 용인에서 모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거진천(生居진천),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추천석이란 동명이인(同名異人)에 얽힌 이야기인데 저승사자가 용인에 사는 추천석을 잡아갔다는 것이 착오로 진천에 살고 있는 착하고 순진한 농부 추천석을 잡아드렸다. 그러나 뒤늦게 잘못되었음을 알고 이승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이미 장사를 다 지낸 후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다가 그 시체에 진천 살았던 추천석의 혼을 넣어 환생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보탑사 입구의 고목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전해 내려오던 옛 절터에 세운 보련산 보탑사는 삼층 목탑의 금당(金堂)이 특이 하다. 1층은 금당으로 4분의 주존불과 협시불이 모셔져 있는데 심주(心株)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서쪽에는 아미타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 북쪽에는 비로자나불을 협시불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는 곧 일반 사찰에서 약사전 원통전, 대웅보전, 극락보전이라는 4개의 전각을 모시는 부처를 1층 한 요사체의 심주를 중심으로 하나의 금당 안에 동서남북으로 배치한 것으로 흔히 불 수 없는 특이한 전각이다. 2층은 법보전으로 윤장대로 꾸며져 있고, 3층은 용화보전으로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보탑사의 목탑은 여늬 목탑과 달리 삼층까지 걸어서 오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3층은 용화전으로 미륵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에는석가여래를 주볼로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주존불로 모시진 협시불로 아미타불(서방정토)과 약사여래(동방정토)를 모신 곳도 있고, 협시불로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또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불을 모신 절도 있다. 대광명전이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일반적으로는 대적광전이라 할 경우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대광명전이라고 할 때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약사보전이다.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월광불과 일광불을 협시불로 모셨다. 불단 앞에 공양물로 수박을 올려놓은 것이 특히하다.
아미타불전에는 협시불로 대세지보살(정병)과 관세음보살(화불)을 모셨다. 극락전이라 할 경우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시고, 무량수전이라 할 경우 지장보살과 관음불을 협시불로 둔다. 2층의 법보전은 윤장대 안에 팔만대장경을 안치하고 주변에 법화경 17만자를 새겨 봉인 되어 있다. 일반 사찰의 경우 대개는 전각 밖에 윤장대를 두는 데 보련산 보타사는 전각 내에 두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아마 이는 윤장대 안에 모신 경전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층 장경각에서 조망해 본 전경 3층은 미륵전이다. 밖의 현판은 용화보전인데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어 미륵보전이라고 한다. 협시보살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을 모셨다. 사찰에 따라서 용화전이라고도 하며 법륜보살과 묘향보살을 모신 곳도 있다. 적조당(寂照堂)은 와불을 모셨다. 적조란 말은 불광대사전에 의하면 진리의 체(體)를 적(寂)이라 하고 진리의 용(用)을 조(照)라 한다고 했다. 능엄경 육(六)에 「정(淨)이 극(極)하면 광명(光明)이 통달(通達)하고 적조(寂照)는 허공을 포함한다.」 하였고, 정진론(正陳論)에 「진여가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한 것이 법성(法性)이 되고,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이 법신(法身)이다. 의(義)는 비록 이름이 둘이지만 적(寂)과 조(照)는 또한 둘이 아니다.」라고 했다.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이다. 협시불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모셔져 있다. 설화에 나타나는 도명존자는 중국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승려로서 우연히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한다.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 속에 지장보살의 안내자로 등장하고 있는 재수보살의 전신이라고 한다. 지장전의 명경대(明鏡臺) 지옥의 염마왕청(閻魔王廳)에 있다고 하는 거울로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行業)을 그대로 비추어 준다고 하여 업경대(業鏡臺)라고도 하며, 화경대(華鏡臺), 명경(明鏡)이라고도 한다. 미륵반가사유상
삼소당(三笑堂)이다. 삼소란 말은 호계삼소란 말에서 유래한다. 호계삼소(虎溪三笑)는 호계에서 세 번 웃었다는 의미다. 호계는 중국의 여산(廬山)에 있는 계곡으로《여산기(廬山記)》에 "유천(流泉), 절을 돌아서 내려와 호계(虎溪)에 들다"라고 하였는데, 여산의 고승 혜원(慧遠)이 손님을 배웅할 때 이곳을 지나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하여 이런 명칭이 붙었다 한다. 삼소는 혜원이 손님을 보낼 때는 이 호계를 경계로 하여 그 곳 이상 배웅을 하지 않았으나, 도사인 육수정(陸修靜),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두 사람을 배웅할 때는 이야기에 도취한 나머지 이 호계를 지나쳐버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 하여 생긴 말이다. 혜원은『影不出山 跡不入俗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신념으로 살았던 선승이다. 이 이야기는 宋(송)나라 陳聖兪(진성유)가 지은 [廬山記(여산기)]에 있는 이야기다. 이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은데 특히 宋(송)나라의 화승 석각(石恪) 그림 「虎溪三笑圖(호계삼소도)」가 유명하다. 이백도 이곳에 들려 시 한수를 남겼다. 달 뜨고 흰 원숭이 우네 여산에서 멀리 나와 웃으며 헤어지니 어찌 호계 지암을 성가셔 하리 ~李白~
2층 장경각에 서광이 비치는 기연을 만났다. 묘한 인연이다.
산신각이다. 여늬 사찰의 산신각과는 달리 마치 너와집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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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보탑사 부처님 도량 잘 보고 갑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좋은사진 즐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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