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일까?>>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함께 읽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인간 존재의 깊은 고뇌와 죄의 문제, 그리고 구원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직면하게 된다. 그의 인물들을 통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법정적 용서의 개념을 넘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신성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의미란 무엇일까 더 생각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동방교회의 테오시스(theosis), 즉 신적 본성에의 참여라는 개념이 구원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서방교회의 구원 이해는 종종 지나치게 법정적이어서, 구원을 죄책감에서의 해방이나 법적 상태의 변화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과 신성에의 참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법정적 이해는 현실 속에서 구원의 깊이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서방적 관점을 동방교회의 테오시스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테오시스는 신적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으로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구현하는 여정이다. 구원을 단지 법적 선언에 머물지 않고, 신자들이 날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걷도록 돕는 구원의 참여적 의미를 갖게 한다. 이렇게 구원을 보다 관계적이고 변혁적인 참여로 볼 때, 테오시스 개념이 서방적 구원 이해를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반면, 동방교회 내에서도 테오시스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또는 신비적인 관념으로 해석해 현실과 유리시키는 경우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서는 테오시스와 같은 개념이 왜곡된 민족주의나 종교적 광기로 변질될 때의 위험을 잘 보여준다. “내가 하나님이다!”를 외치는 것 같은 오해가 보인다고 할까? 특히 민족적 자부심과 테오시스가 혼합되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작품의 악령적 인물들을 통해 드러난다. 테오시스가 신적 참여와 성화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져 민족적 우월감이나 배타적 의식으로 변질될 때, 이는 오히려 구원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서방교회의 법정적 구원 이해와 동방교회의 테오시스는 서로 보완하며, 우리가 현실 속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두 전통의 관점은 상호 보완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 녹아들어, 테오시스가 단순한 신비주의나 민족주의로 왜곡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변화를 이루는 구원의 과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니, 마이클 고먼의 비슷한 주제를 다룬 저서가 있었다. 그의 저서에서는 서방적 이해를 확장해 동방적 테오시스와 연결시키려는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고먼은 Inhabiting the Cruciform God: Kenosis, Justification, and Theosis in Paul’s Narrative Soteriology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의로움과 성화가 단순한 법적 선언을 넘어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참여적 구원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있는 지도 몰랐던, 로고스 장서 가운데 있었는데,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겠다.
p.s.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었네,
“십자가 형태의 하나님 안에서 살다” (IVP, 202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03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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