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벧후 1:16-21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16-21 /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언자의 말] 우리가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는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리스도의 광채와 그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17-18) 거룩한 산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의 광채로 그리스도께서 눈부시게 빛나셨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영광스럽고 위엄에 찬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ㄱ)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흐뭇하게 여기는 아들이다.' (ㄱ. 창22:2,시2:7,사42:1) 19)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언자들이 말한 것이 사실대로 이루어진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것을 보다 직접적인 사실로 연관시켜 보아도 좋습니다. 마치 어두운 구석을 환하게 비추는 빛과 같이 예언자들의 말은 우리를 도와 암시적이고 어려운 것을 많이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깊이 깨달을 때 여러분의 영혼 속에 놀라운 진리가 빛나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샛별처럼 자리잡으실 것입니다. 20-21) 성경에 있는 예언의 기록들은 예언자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신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직접 경험한 변화 산 사건과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이 교묘히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6-18)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이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임을 밝히기 위하여, 자기를 직접 본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그리스 시대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적 신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도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하나의 종교적 신화에 불과한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야고보와 요한 같은 사도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큰 영광을 직접 보았고,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직접 들었습니다(마 17:1-8; 막 9:2-8; 눅 9:28-36). 베드로의 이 증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이 땅에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인 동시에 초월적인 권능을 지닌 신이심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19-21) 베드로는 첫 번째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메시야의 강림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예언하였고, 사도들은 이 예언이 실현된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가르침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적용: 당신의 신앙은 성경에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판단, 경험 위에 두고 있습니까? 서로 나누고 기도합시다.
항상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노자. 남을 제압하기 위해 거칠고 딱딱한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강압적 말투에 내용조차 들어보지 않고 반기를 드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딱딱한 이보다 부드러운 혀가 오래 살아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 삶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나님과 교제시간을 가질 수 있으며 인내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열정이 많아 많은 일을 한다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서 죽어져 갈 때 주님의 성품을 만들고 열매를 맺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믿음의 근거
벧후 1장 15~21절 / 박봉수목사
금년에 들어서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큰 지진들이 연이어 발생되고 있습니다. 지난 1월말에 인도, 2월에 에콰도르, 인도네시아, 그리고 미국 북서부 등에서 진도 6이 넘는 강진이 발생해서 큰 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인도의 지진과 미국 북서부 지역의 지진은 큰 대조를 이루고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 1월 26일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에서 진도 6.9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미 2만 여명이 죽었고 부상자만도 10만명이 넘으며, 그 피해액수는 너무 커서 산출 조차하기 힘이 들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2월 28일 시애틀을 비롯한 미국 북서부 지역에도 비슷한 수준 즉 진도 6.7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상자가 2백 72명만 생겼을 뿐 단 한 명의 직접적인 피해 사망자가 없었습니다. 피해액도 약 20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인도나 지난 94년 로스앤젤리스 지진 때와 비교해 보면 그 피해는 정말 경미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같은 수준의 지진인데 이토록 피해가 차이가 날까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를 살펴보니까 지진이 발생된 구자라트 주에는 최근에 개발붐이 일어나 건설업자들이 한 몫 챙기기 위해 날림으로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구자라트 주 주택장관의 발표에 의하면 80%의 집이 부실 공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시애틀의 경우 25년 전부터 지진에 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특히 스페이스 니들이라는 시애틀 중심의 탑은 강도 9.1에도 견딜 만큼 철저하게 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지진이라도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피해는 달라집니다. 기초를 튼튼히 하고 내진 공법을 철저히 따라 집을 지으면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를 부실하게 하고 집도 허술하게 지으면 그 피해는 엄청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기초를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기초를 든든하게 닦은 뒤에 그 위에 믿음을 세우면 어떤 풍파가 몰려와도 그 믿음이 별로 흔들리지 않고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를 부실하게 닦은 뒤에 그 위에 믿음을 세우면 조그만 풍파에도 그 믿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나아가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위에 여러 가지 치장도 하고 필요한 것들도 올려놓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모릅니다. 지진이 나듯이 큰 환란과 풍파가 일어나면 믿음의 기초가 어떠냐에 따라 그 결과는 너무도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믿음의 기초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음의 근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음의 동요
베드로 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서 정말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전후해서 정말 혹독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그 모진 박해를 잘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베드로 전서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아시아 교회들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이단자들이 몰려들어 와서 성도들의 신앙을 교란시켰고, 교회의 믿음의 뿌리를 뒤흔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무리를 2장 1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부의 박해 때문에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이번에는 내부의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진정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해서 베드로가 붓을 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성도들의 믿음을 뒤흔들었던 것이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향락주의입니다. 2:2을 보면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친다고 하면서 향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술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음란행위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저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 결과 믿음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단사설입니다. 3:3-4을 보면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즉 주의 재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판단을 따라 지금까지 사도들이 가르쳐 온 정통교리를 부인하고 정통 신앙을 뒤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렸고 교회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세워놓은 건축물들의 안전을 위협하듯이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이 생겨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서울은 지진에 얼마나 대비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에 대해 얼마나 대비하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유혹과 시련은 우리 그리스도인인 학생을 위한 훌륭한 신학교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요소가 두 가지인데 바로 유혹과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이 이 유혹과 시련으로 우리의 믿음을 저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뒤흔들어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 견디고 이겨내면 오히려 믿음을 굳건하게 만드는 학교요 훈련장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유혹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 짓도록 유혹합니다. 죄를 짓고 믿음의 길에서 실족하도록 유혹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대개 이런 전술을 씁니다.
첫째, '너만 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술 마시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 줄 알아 대개 다 그래...'
둘째, '이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술 한잔 한다고 그게 뭐 큰 죄인가? 사회 생활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셋째, '딱 한 번인데!'라고 말합니다. '이번에 딱 한 잔만 하지 여러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 딱 한번뿐인데 뭐...'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전술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일단 이런 유혹 전술에 넘어가면 우리의 믿음이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다음으로 시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포기하도록 시련을 줍니다. 욥에게 자녀가 다 죽는 시련을 주었습니다. 가진 재산을 다 날리게 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했습니다. 건강도 빼앗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사탄은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줍니다. 때론 예수 믿기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깁니다. 예수 잘 믿는데 건강의 문제가 생깁니다. 열심히 주를 위해 봉사하는데도 사업이 더 어려워만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욕하고 박해를 가해 옵니다.
이런 것이 시련입니다. 이런 시련을 잘 이겨야 합니다. 이런 시련을 잘 이겨내지 못하면 믿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루터가 말한 유혹과 시련에 하나를 덧붙여 본다면 미혹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미혹이란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못되었다고, 교회의 가르침이 문제가 있다고 속입니다. 우리를 설득해서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지도록 만듭니다.
얼마 됐습니다. 우리 교회에 새신자 한 분이 왔는데, 이분이 열심히 교회를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아봤습니다. 친구를 따라서 점보는 데를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점쟁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교회 다니는 것을 어떻게 맞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교회 다니면 가정에 큰 문제가 생긴다고 겁을 주더랍니다. 이분이 그 말을 듣고 겁이 났습니다. 그날부터 교회에 발을 끊었습니다. 설득하고 또 권면해도 요지부동입니다. 그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으면 안됩니다. 미혹 당하면 안됩니다. 잘못된 논리로 믿음을 뒤흔들 때 그 미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별의 별 일이 다 생깁니다. 유혹도 있고, 시련도 있고, 또 미혹도 있습니다. 마치 바다에 풍랑도 일고, 태풍도 치고, 해일도 일어나서 항해하는 배의 갈 길을 방해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 생활에 이런 저런 사탄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믿음의 근거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믿음이 흔들릴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든든한 믿음의 근거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든든한 믿음의 근거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면 마치 지진이 일어나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어도 잘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믿음의 근거로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가 체험입니다.
본문 16절에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믿음은 주님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친히 말씀하시는 증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믿음의 굳건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체험을 주십니다. 물론 사도들이 직접 주님을 본 것처럼 주님을 직접 우리의 육안으로 본다든지, 사도들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우리의 귀로 듣는다든지 하는 식의 체험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체험을 주십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남들보다 좀 늦은 나이인 35살에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는 열심히 다닌다고 다녔습니다. 35살 되던 해 런던의 올더스게잇이라는 길거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집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날 그는 누가 설교했는지 기억을 잘 하지 못하지만 또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집회 도중에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일꾼으로 부르신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체험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수시로 이런 마음의 뜨거움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그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이런 체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나야 합니다.
얼마 전입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등록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예배 도중에 계속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왜 이런 일이 생기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때로는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때로는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때로는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만져주심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체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됐습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메롤탈이란 사람이 쓴 "강한 바람과 같이"라는 책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수백만부가 팔릴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었던 책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에 놀라운 기도 응답의 역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메롤탈이란 사람이 자기 삼촌하고 시골 마을에 긴급히 가야할 상황이 생겼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느헤네야라는 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는데 그 때 그의 삼촌이 기도하고 일어서더니 맨몸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뛰어가서 말렸는데 그 삼촌 말이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야 만일 내가 여기서 죽거든 복음을 전하다 죽었다고 전해 주게...' 성큼 성큼 강물 속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강 한 복판에서도 강물은 무릎 위를 넘지 안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은 모두가 이런 기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기적적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기도 응답의 체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영적 체험이 우리 믿음을 굳세게 해 줍니다. 사탄이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 때 이런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둘째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선물로 이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 7:24에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지진이 일어나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의 믿음을 뒤흔들어도 우리의 믿음은 굳건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책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지?"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집의 성경책에는 우리 누나의 남자친구 사진하고 연애편지가 있는데요?"
성경은 읽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20절에 보면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썼습니다. 따라서 읽는 사람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 속의 참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았으면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그 말씀은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줍니다. 지탱시켜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댑니다. 유혹과 시련과 미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댑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심령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체험과 말씀 위에 굳게 선 믿음을 우리는 산 믿음이라 합니다.
더 확실한 예언
벧후 1장 16~21절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개는 음성을 들었다고 하던데, 아무개는 꿈에 천사를 보았다고 하던데, 아무개는 입신을 해서 천국을 다녀왔다고 하던데 그들에 비교하면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고 그야말로 무슨 밑천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선배님들이 교회 개척에는 3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40일 금식을 했느냐? 둘째는 교회 이름을 응답받았느냐? 그리고 하나 더 있었는데 잊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 자이언트 앞에서는 위축되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그때부터 늘 고민했습니다. 교회 이름을 응답 받는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느냐? 어떻게 하면 교회이름을 응답받을 수 있느냐? 궁금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는데 저희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 하루는 제가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중에 감동이 왔어요. 그러면서 어떤 깨달음이 왔냐면 복음은 참 good news. 좋은 소식이구나. 기쁜 소식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오면서 그렇게 해서 기쁜 소식교회라는 교회 이름을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른 단체들도 그런 이름을 응답으로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순간에 그것이 교회 이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응답받는 것이 저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그렇게 하기 때문이에요. 어떤 설교를 할 것인지. 어떤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채택할 것인지. 무슨 주제를 설교할 것인지. 그것이 떠오를 때에 동일한 방법으로 떠오릅니다. 기도하는 중에 묵상하는 중에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을 이번 주일에 설교해야 되겠다라고 확신이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주 경험한 일이에요.
요즘에 커피메이커는 그냥 위에서 물을 흘러내리는 방법으로 커피를 만들지만 옛날에 커피메이커는 좀 달랐습니다. 그것은 포트에다가 물을 넣고 그리고 커피가루를 위에다가 얹고 뚜껑을 닫고 스위치를 켜면 아래 있는 물이 끓으면서 위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식으로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뚜껑에 투명한 상투가 있어가지고 그 투명한 상투에 커피가 솟구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커피메이커를 포커 레이터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이 솟구칩니다. 샘물처럼. 아래로부터 위로 솟구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주시는 감동은 솟아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혜는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은 솟아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거하는 사람은 다른 엉뚱한 것이 솟아납니다. 욕심, 음란, 분노, 미움, 다툼, 시기, 살인 이런 생각이 솟아날 것입니다. 성령에 거해야 신령한 생각이 솟아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고 그리고 특별히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신령한 생각이 솟아납니다. 이 후자가 바로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실 때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그를 인하여 기뻐하노라’ 그 사건을 오늘 본문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의 영광 중에 이러한 소리가 나기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하고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절에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냐면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보다도 어떻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에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다하니라’ 여기서 주의한다는 말은 묵상하다, 주목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된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다하다.
이것이 바로 큐티의 원리입니다. 저는 큐티라는 단어를 별로 안 좋아 합니다. 진지한 신앙생활에 경박한 이름을 갖다 붙였습니다. 말씀 묵상이란 말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쓴 것이 아니고 성경에 감동에 의하여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사람이 성경말씀을 묵상하면 성령이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종용하셔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이것이 바로 묵상의 원리입니다.
묵상의 목적은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마음의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더 확실한 예언이에요. 과거로부터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을 하고 하나님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성어거스틴은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중에 창 밖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어라, 책을 읽어라’라는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책을 폈는데 우연히 로마서 말씀이 펼쳐지고 눈이 다음구절이 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거스틴이 회심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미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는데 그가 어느 날 저녁에 올더스게이트(Aldersgate)라는 작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다가 설교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강해를 읽는 것을 듣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요한웨슬레의 유명한 회심사건이 된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목사의 소명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는 중에 어느 날 우연히 성경책을 폈는데 로마서의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성경구절이였어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 구절이 제 마음에 확 다가오면서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번민이 해결되고 정말 주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그게 하나님의 응답인지를 어떻게 아느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할 수 있지만 경험을 해보면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경험. 그걸 경험을 해봐야 느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와 닿는 것도 경험을 해보면 압니다.
샛별이 떠오르는 느낌 그대롭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과 기쁨이 솟아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라고 했는데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종영하실 때에 우리의 영혼에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럴 로버츠목사도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요한3서에 있는 말씀을 읽게 됐는데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자여 내가 영원히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라는 성경구절이었어요. 그래서 오럴 로버츠목사가 사모님한테 물어봤데요. 당신 이 구절을 읽어 본적이 있냐? 그랬더니 사모님도 없다고 하더니 그런데 그 순간에 그 구절을 읽을 때에 이분에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부흥사역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는 영원히 잘되는 것과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것과 몸에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이 오럴 로버츠목사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이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례는 다 우연한 성격이 강하지요. 우연히 읽은 성경구절.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필요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주기적으로 성경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그것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이 주기적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는 성령의 은사가 있으면 성경말씀을 무시해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언이든 방언이든 방언통역이든 직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건너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보다도 더 큰 실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예언이란 없습니다. 거기에 추가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언이든 계시가 옳은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성경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후서 1:16-21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예언이 있다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잘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뢰기만 하는 것이 듣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아뢰는 것은 직통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지만 듣는 것은 직통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것이니라’ 이것은 성경이 기록된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성경의 영광을 받는 일에 익숙해지면 기도하는 중에도 간혹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숙련을 필요로 하고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양으로 때우려고 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통독을 강조합니다. 통독위주로 읽으려고 하는데 성경을 빨리 읽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읽어 버릇해야 됩니다. 빨리 많이 읽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묵상하면서 읽어야 됩니다.
언제까지? ''날이 세어 샛별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저 별은 나의별 그 노래와 헷갈리면 안 됩니다. 그 노래에는 아침이슬 내릴 때까지라고 되어있지만 베드로는 말하기를 ‘샛별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주목하는 것이 가하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믿음과 그 근거는
벧후 1장 16~20절 / 이수관목사
일년 중 이맘때가 되면 TV에서는 너도 나도 할 것없이 특집 방송으로 종교에 관한 프로그램을 많이 다룹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각 종교를 비교하는 어떤 특집같은 것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언젠가도 그런 특집 방송을 한번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방송은 각 종교를 비교하면서 결국 예수님도, 석가모니도, 그외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도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부르짖다 죽어갔으니 우리도 그런 가르침을 기억하자는 것이 그 방송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집중해서 비추어 주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사랑을 부각시켰습니다.
방송은 그런데로 설득력이 있었지만 전 그때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사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랑이 많은 가르침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기독교는 아마 다른 많은 종교와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어떤 종교도,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가 아니고는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종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신념도 사랑을 가르치고 있으니 사랑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믿음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다시 얘기해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건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1장 16절 이하의 글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바로 전 1장 12-15절에 보면 베드로는 본인이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내 목숨이 남아 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우리가 받은 진리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깨우치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오늘 본문을 시작합니다. 다시 얘기해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베드로후서 1:16-21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의 가장 핵심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있는가 하는 것을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설교가 혹시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아직 조금 남아있는 어떤 분들의 의심을 벗기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 16절 전반부를 읽어보면 사도 베드로는 우선 그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두가지를 꼽고 있습니다. 권능과 재림, 이 두가지 중에서 권능이 무엇을 나타내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해석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권능이 그분의 부활을 대표해서 얘기한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즉, 베드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권능으로 부활하신 부활의 주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분은 언젠가 다시 오실 재림의 주라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죄와 심판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은 죄때문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지난 주 설교에 이어서 계속 얘기하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의 죄 때문에 언젠간 죽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죽으신것은 그분의 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서 4:25절에의하면, 그분이 죽은 것은 우리의 죄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다는 얘기이고,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신 분이 다시 부활하셨으므로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15:20절에서 그분의 부활이 첫열매가 되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즉, 그분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공로를 믿는 사람은 그분을 따라서 같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영생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이 땅의 삶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이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과는 비교가 안되는 영원한 곳에서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희망이 없다면 세상은 비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짜피 죽으면 끝이니 먹고 마시자’ 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구요, 이 세상의 삶은 억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이 땅을 사는 누구 한명 안 슬프고 안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쁜 날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은 기쁨의 날이 아니라 재앙의 날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7절에서 예수님은 그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지는 날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부활과 재림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고 하고, 또 선하고 좋은 말씀이 많아서, 즉 배울 것이 많아서 교회를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시작은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몇년이 지나도록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야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베드로가 뒤에 3장 10-12에서 얘기하듯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가다듬고, 그래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의 핵심을 아는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혹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부분만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땅에서의 풍요에만 관심이 있고 부활과 재림에는 관심도 없는 그런 불균형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땅에 부정의는 모두 사라지고 공평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그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며 사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자 이까지 얘기를 한 후에 사도 베드로는 이어서 우리가 이러한 부활과 재림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즉 이것을 믿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이어서 설명합니다.
2.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1)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때문에 믿을 수 있다
우선 사도 베드로가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유는 본인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어떤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바꼈던 일명 변화산 사건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사건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가 그 많은 예수님에 대한 경험중에서 하필 이 사건을 얘기하는 이유는 아마 이것이 그의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고, 동시에 이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제일 잘 설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7:2-3절에 보면 마태는 그때 예수님이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변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표현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 모습이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의 모습과 가장 비슷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의 모습과 비슷했고, 아마도 예수님은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째튼 그는 자기가 바로 그 증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관심은 과연 그런 사도 베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 사도 베드로의 말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 증언 자체가 믿을 만 하다 (내적 증거)
물론 그 답은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많은 증언들이 사실로 믿을 만하다는 충분한 내적 증거들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성경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성경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몇십년안에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 안에 거짓말이 들어 있다면 당장 다른 증인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았고 전도가 않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것은 신화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삶을 들으신 분은 기억하겠지만 대부분의 서신서는 AD50년초반에서 후반사이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20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신화는 고사하고 조금의 거짓말을 보태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 그 쓰여진 연대를 어떻게 아는가? 사도행전때문에 압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총독의 이름이라던가 지명이나, 사건들이 실제 로마 역사나 기록에도 나오기 때문에 그 년도는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복음서의 경우는 AD63년 전후로 쓰여졌습니다. 즉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30년밖에 안 지난 시점입니다. 그때도 역시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살아있던 시점이니 신화가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 복음서가 AD63년 전후로 쓰여진 것은 어떻게 아는가? 역시 사도행전을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을 보면 사도바울이 1차 투옥되면서 얘기가 끝나고 사도바울이 죽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것으로 볼 때 사도행전은 63년경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지만 사도행전은 시리즈 두편중에 후편입니다. 전편이 뭡니까? 누가복음이지요. 그렇다면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보다 적어도 1년은 이전에 쓰여졌겠지요? 그럼 61년. 그런데 누가 복음을 보면 마가 복음과 토시하나 안틀리게 베낀 부분이 있는 것을 누가가 마가복음을 참고 했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60년 이전에 쓰여졌다는 말이 되지요. 다시 얘기해서 복음서들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불과 30년이 지나기 전에 쓰여진 것이예요. 거기에 어떻게 신화가 끼어들어 갑니까? 불가능하지요. 참고로 보통 역사학에서 신화가 생겨나는 시기를 보통 400년정도 잡습니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 전기에 신화가 끼어든것은 480년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예수님 돌아가시고 불과 몇년 안에 있었던 아주 초기의 글들이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이 있지만 한가지만 찾아 봅시다. 고린도전서 15:3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도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나는 사도들에게 배운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께 직접 받았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전해 받았다고 하면서 2절부터 7절까지를 전하고 있는데 이말은 그 당시 예루살렘에 떠 돌던 말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때의 상세한 설명이 나오는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3년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거든요. 그 때 가서 전해 받은것이 이 얘기라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핵심적인 증언, 예수님의 죄를 사하심, 그분의 부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3-4년안에 이미 예루살렘에 좍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화가 시작되려면 다른 곳에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생겨야지 이렇게 적들이 우글우글하는 그런곳에서 3-4년만에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성경의 증언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믿을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하나 들면, 사람들은 각 복음서들간의 사소한 차이가 모순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지요. 그들은 사도들이 30년전의 얘기를 기억을 더듬어 자유롭게 얘기하는 것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Detail은 조금씩 다른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겁니다. 만약 이 얘기가 꾸며낸 얘기라면 모든 사람의 말이 똑같이 일치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증거가 믿을 만한 가장 결정적인 내적 증거는 바로 그들의 변화입니다. 최목사님도 여러번 언급을 하셨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전하다가 모두 체포되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똑같은 십자가형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고, 전승에 의하면 어떤 사람은 뼈마디가 다 부러뜨려져서 죽었고, 그랬는데 이 세상의 누구도 거짓말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배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아무도 배신자가 없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언하다가 죽어가는가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라는 답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증언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 성경외의 증거가 있다 (외적 증거)
그런데 이런 성경의 내적인 증거말고 외적인 증거도 존재합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의 얘기는 처음부터 조작된 얘기기 때문에 성경책에서만 나오지 다른 세상 역사에는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세상의 역사책이 이들의 얘기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사람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2세기초에 타키투스라는 로마의 역사가에 의해 쓰여진 책에도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형벌을 당한 그리스도 라는 사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2세기 초반에만 가만 로마의 모든 역사책과 문서들은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골치를 알고 있는 그 당시의 정치상황을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도 예수님은 치유자이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외적인 증거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또하나는 고고학입니다. 물론 고고학의 발견들이 성경의 영적인 내용이 옳고 그름을 판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이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성경의 기자들이 쓴 그 당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날씨등이 옳았다는 것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해서 쓴 복음서가 세월이 지난 다음에 만들어 진 조작이라면 뭔가 당시에 관한 설명에 잘못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살인 누명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 나는 그 시간에 어느 동네에 가서 어느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관람했고,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 앞에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사먹었다”라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수사관들은 그런 동네에 그런 영화관이 있었는지, 또 그 영화를 상영했었는지, 그리고 그날 그 포장마차가 있었는지를 확인할 것이고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알리바이는 거의 확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성경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고고학자가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32개의 나라, 54개의 도시 그리고 9개의 섬을 다 조사를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언급에 단 하나의 실수도 없더랍니다. 요한복음의 경우를 보면, 요한 복음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다섯개의 행각, 실로암 못,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우물등이 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고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예를 하나만 들어 봅시다. 요한복음 19장 13절을 보면 빌라도가 돌을 깔아놓은 곳에서 재판을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실지로 돌을 깐 광장이 있었다는 것이 아주 근래의 고고학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성은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 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요한복음이 후대에 신화같이 쓰여졌다면 몇백년 전에 폐허가 된 그곳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묘사해 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이런 모든 정황을 볼 때, 성경의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베드로가 봤다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 이제까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얘기한 사도 베드로는 그 다음 믿을 수 있는 근거로 성경의 권위를 얘기합니다.
2) 하나님의 권위로서의 성경
19절부터 21절까지를 읽어보면 사도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근거로 성경의 권위를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성경을 쓰신 분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도 바울도 디모데 후서 3:16절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하고, 히브리서를 쓰신 분도 히브리서 1:1절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4:4절에서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쓰신 분의 주장이고 우리는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가 있는가? 첫번째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통일성이고, 두번째는 성경안에 있는 예언의 성취들을 봄으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 성경의 통일성을 보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은 우리가 보기에 한권의 책이지만 사실은 66권의 책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이 66권의 책은 기원전 1500년전에 쓰여진 창세기에서부터 기원후 100년경 쓰여진 요한 계시록까지 1600년에 걸쳐서 거의 40명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스승과 제자의 사이도 아니었고, 어떤 학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같은 장소에서 살았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냥 어느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쓰라고 하셨다 하면서 쓰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썼는데 나중에 그것을 모아 놓고 보니까 놀랄만한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한 스토리를 얘기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인데, 내가 왜 이세상을 만들었고, 왜 인간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인간이 죄에 빠져서 내 곁을 떠났고,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구원하겠고, 어떻게 인류를 마감하겠다는 계획을 쓰고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한 사람이 이 66권을 썼다면 아닐 수도 있어요. 또 40명이 선후배 관계여서 짜고 썻다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건 사람이 썼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1600년간에 걸쳐서 쓰여진 책이 이렇게 한 스토리를 보일 수 있느냐 말이예요.
두번째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예언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예언은 창세기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 3:15절은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의 예언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2:3절에 보면 조금 더 발전된 형태로 보여줍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가 받을 복을 그려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만 더 볼까요? 출애굽기에 오면 하나님이 이집트 사람을 벌을 내릴 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어린양을 잡아서 그피를 문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피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양의 고기는 먹되 뼈는 꺾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출애굽기 12:24절에서 이것을 대대로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구절을 지키게 하셨을까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양고기는 먹되 뼈는 꺾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것을 1500년동안 지키고 살았어요, 이유도 모르고.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본 사람은 본 순간 알았을 거예요. “아, 죽음이 피해가는 어린 양의 피, 그리고 뼈가 꺾기지 않은 어린양” 그 기억이 워낙 생생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장면을 목격한 요한은 요한복음 19:33절과 36절에서 그것을 적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분명해 지는 예언들은 기원전 1000년경 쓰여진 시편 정도에 이르면 좀 더 확실해 집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만 보면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사형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700년전에 쓰여진 이사야서에 가면 이런 예언들은 절정에 이릅니다. 이사야서 53:4-7이 가장 대표적이지요. 제가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때부터는 예언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떤 책에서는 그 분의 이름이 뭐다, 또 다른 책에서는 어느 동네에서 태어나신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 400년전에 쓰여진 말라기서에는 그가 오시기 전에 누군가 먼저 온다 라고 까지 하시고 그리고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말라기 3:1절에 보면 '나의 특사'를 얘기하고, 그리고 맨 마지막절인 4:5-6절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주의 크고…내리겠다” 자.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이 시작됩니다. 3:1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광에서 선포하여...”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두 책 사이의 Gap이 느껴 집니까? 도대체 이 두권의 책 사이에 400년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 지세요. 그냥 한 사람이 쓴 책의 Chapter가 넘어 가는 정도로 놀라운 통일성을 보이잖아요. 어떻게 이것을 보고도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을 못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것을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 이 세상에 구원을 주실 이름은 단 하나 예수의 이름밖에는 없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신화가 아닙니다
벧후 1장 16~21절 / 성홍모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산상변모일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교회력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내려왔고, 교회의 역사와 함께 발전되었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우리 예수님의 지나간 사건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는 생생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력의 한 절기나 축일을 기쁘게 지키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고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인 교회와 함께 존재하고 계시며, 오늘 우리와 함께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절기를 지킨다고 할 때에 주님이 행하시고 당하신 그 날의 사건으로 몰입하고 들어가면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여야겠습니다.
교회력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었습니다. 교회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주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켰습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주님께서 살아가신 공생애의 사역을 몇 개의 절기로 나누어 1년 동안 지켰습니다. 교회력에는 가장 큰 절기가 있는데,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이 있습니다. 성탄절기에는 12월 25일의 서방교회의 성탄절과 1월 6일 동방교회의 주현절이 들어 있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4주간의 대림절이 있고 성탄절과 주현절을 맞이합니다. 주현절 첫 번째 주일을 주님의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수세주일로 지킵니다. 성탄절기가 끝나면 사순절로 들어가는데, 성탄절기가 끝나고 사순절로 들어가기 전에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력 안에는 여러 축일들이 있습니다. 주의 수세주일과 산상변모주일, 삼위일체주일, 한국교회는 잘 지키지 않지만, 만성절,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축일은 큰 절기를 마치면서 다음의 중요한 절기를 연결시켜주는 과도기적인 날이라고 봅니다. 산상변모일은 부활절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 함께 여행을 가셨다가 돌아오면서 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 오르기 전에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과 거기서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귀중한 사건이 있은 후 한 주간쯤 지나서 예수님은 12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들 세 사람의 제자들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아이가 죽었던 방에 들어갔으며,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중에 베드로는 훗날 이 변화산에서 체험한 것을 소중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3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눅9:28-29) 예수님이 그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얼굴은 해 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입으셨던 옷이 희게 변하는데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눈이 부셔 쳐다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용모가 변화되고 입으신 옷이 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말씀하는 것을 보니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해방자요, 율법을 받아 전해주신 모세였으며, 또 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능력이 많았고, 우상숭배에 맞서 싸운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이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이 산에 오셔서 주님 예수와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들 구약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두 분이 나타나셔서 예수님과 말씀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들 곧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가실 일, 죽으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실 일, 즉 죽으심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율법과 선지자들이 외쳐온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되며, 인류의 숙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소망이요, 구원이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기도하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졸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시고, 구약의 대표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마치셨는지 두 분이 떠나가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신령하였으며, 이미 죽어 천국에 들어간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그런 황홀경에 빠지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산을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이 때에 구름이 몰려와서 그들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에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늘의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까이 오셔서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눈을 들어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는 예수님만 계시고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의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이며, 거기에서 세상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부활하시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과 다시 오실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자요,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나타나신 것은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신 분이요, 엘리야도 역시 시내산이라고 불리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신 분입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일으키실 것을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신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고 하면 하나님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한 사람을 세우실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님의 선구자로 엘리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엘리야는 산 채로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들 두 분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오신 것을 보면 그들의 받았던 소명과 사역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학수고대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저작한 서신입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1:1)라고 하셨습니다. 이 서신을 쓰는 이가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 1:16에서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시면서 17절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라고 하시면서 18절에서 분명하게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제자 베드로가 쓰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는 신화가 아닙니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16절 말씀에서 베드로의 강력한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권능과 다시 오심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이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서신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베드로는 주님의 위엄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요, 주님이 보내어주신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4 제자중의 한 사람이며, 의욕이 앞서므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수제자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목숨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구세주가 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에게 잡혀 들어가 엄청난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도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 거지를 고쳐주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온 시내가 떠들썩해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무리들이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면서 앞으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그들이 체험하고, 알고, 믿는 바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걸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베드로와 같은 목격자요, 증언자였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도 고대로터 내려오는 그리스 로마 신화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보면 황당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들이 사람과 결혼한다느니, 거인 족이 있었다느니, 저런 허무한 이야기를 가지고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라, 승천이라 하는 것이 신화가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기독교회도 교묘하게 꾸민 신화로 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를 몰아내자"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단체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회를 무너지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란 유대교에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엉터리 종교라고 몰아붙입니다.
저들 중에는 기독교인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무릎 꿇고 기도드리는 의식-'세레머니'(Ceremony)도 싫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회를 선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런 세레머니를 하느냐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주는 것은 교묘하게 만든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화를 창조한다는 말은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우리 축구팀이 월드컵 4강신화를 창조하였다"는 말은 위대한 업적의 의미로 사용하는 예로 신화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봅니다.
신화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상적인 성격을 가진 허구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화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거짓말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란 분은 다만 고상한 인격을 가지진 선생님이셨는데,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하여 예수님이 로마 군대에 잡혀 죽게 되자 그의 생애를 미화시키고, 신격화하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거짓으로 신화를 지어내고 그런 신화를 전하다고 죽었다고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해놓고 그 거짓말을 합리화하다가 그 거짓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순교 당하였다고 하면 인생의 가치를 모르는 억지인 것입니다. 그런 억지를 부리면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여 기독교회를 폄하하고 깎아 내리려는 사람은 혹시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을 합리화하려다가 죽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12명 제자들이 다 미친 사람도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하였다고 한번 거짓말을 하였는데, 그 거짓말을 합리화하려고 다 죽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생은 거짓말을 변명하기 위하여 죽을 정도로 무가치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산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가 변모되신 것처럼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20에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낮은 몸이지만, 장차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화산에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에도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진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은 시2:7의 말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인류의 메시아가 되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사야 42:1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는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서 용모가 달라지고 옷이 빛나며, 광채가 나는 변모의 사건을 통하여 힘을 얻으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산 변화산에서 우리 주님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놀라운 일, 영의 세계에 속하는 위대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셨습니다. 깊이 기도하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9절 말씀에서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어두움 속에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은 반드시 성경 말씀으로 조명해야 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연구할 때에는 사사로이 하지말고, 성령의 밝은 조명과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임을 알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것처럼, 사도 베드로가 변화된 것처럼,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고, 성숙해져야만 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영광과 존귀를 아는 사람, 우리 주님의 능력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헤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개인적인 체험보다도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확신하지 못하면 그가 어떠한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고 해도 바른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날이 새려는 시간에 놓였으며, 샛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았기에 이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오직 소망을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저 천국에 두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언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
벧후 1장 16~21절 / 이필재목사
예수를 믿든 안 믿든 12월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탄 계절에 흥분합니다. 성탄을 알리는 불빛으로 온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교회보다도 크리스마스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물센터, 백화점, 호텔, 유흥가들이 제일 야단입니다.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투자를 해서 불을 반짝이고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2월 초인데 교회들은 오히려 캄캄합니다. 호텔이나 백화점은 크리스마스트리로 요란합니다. 저에게도 메일이 10통 정도는 왔습니다. 크리스마스 특별 세일하니까 물건 사러 오라고 온 것입니다. 일류 호텔이나 파티 장소 예약도 이미 다 끝났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다들 잘 먹고 살면서 예수님은 안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크리스마스 때 성탄절 특사령이라는 죄수 석방의 순서를 갖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하실지 안하실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이번에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에 천사가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유대인만의 기쁨이 아니요 예루살렘만의 축제가 아니다. 온 세상, 어디, 누구에게나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전했습니다. 세상에서의 기쁨은 매우 모순된 기쁜 문화입니다. 지금 월드컵 축구 경기를 합니다. 온 국민들이 그 빅게임에 열광을 합니다. 우승팀 국민들을 보십시오. 마치 오늘만 살고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 흥분으로 온 나라가 좋아합니다. 그런데 패배한 팀은 어떻게 됩니까? 잔디밭에 맥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립니다. 한쪽의 기쁨은 한쪽의 슬픔이 됩니다. 만약 전쟁에서 이기면 승전 국가는 그날을 영원한 국경일로 정합니다. 8·15해방은 우리나라의 영원한 국경일입니다. 하지만 일본에게는 영원한 슬픔의 날입니다. 한쪽의 기쁨은 다른 쪽의 슬픔이 됩니다. 세상은 이런 문화가 됩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 때 보십시오. 당선된 사람은 아주 기뻐하고 반대는 죽을 맛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기쁨이 지금 세상에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성탄의 계절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예언성을 살펴봄으로 이 대강절을 지키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갖는 이상한 느낌은 ‘예수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태어나시고, 왜 그렇게 사시다가 왜 그렇게 가셨는가?’ 여기에 정확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언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예언을 우리가 몇 가지 한번 들추어봅시다. 예수님 출생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700년 전 사람입니다. 예수님 탄생하기 전 700년 전에 세상에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이 비합리적이고 자연과학이 아닌 이야기에 대해서 믿음을 갖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사야 자신도 설교하면서 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합당치 아니한 말인가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을 우리가 들어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기를 낳으려면 사내를 알아야 된다는 자연과학을 나도 알고 있는데요.” 사람은 누구나 다 사춘기 정도만 되면 누가 구체적으로 교육을 시키지 않았어도 어린 아기 출산에 대한 구체적인 상식을 알게 됩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 동물에게 성교육 시켰습니까? 그것들이 뭘 안다고 종족 번식을 알고 행합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리까?” 그런데 700년이 지나니까 마태복음 1장에 와서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천사가 말했습니다. “700년 전 그 예언이 지금 너에게 이루어질 테니 그렇게 믿으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니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예언되어져 있는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출생 장소도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왔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신분과 목적을 밝혔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메시야 출생했는데 어딘지 가르쳐주십시오.” 헤롯왕 때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느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왕도 모릅니다. 그래서 알만한 종교 지도자들을 긴급 소집했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이 사람들이 메시야가 났다고 한다. 어디서 나겠느냐?”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습니까? “베들레헴입니다.” “왜 거기냐?” “그렇게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B.C 500년입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500년 전 사람입니다. 500년 후에 그 예언대로 베들레헴 출생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언되어져 있는 대로 되었습니다.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베들레헴 예수님 출산은 기적입니다. 왜 기적이냐? 요셉과 마리아가 사는 지방은 이스라엘 나라 북쪽 나사렛입니다. 베들레헴은 남쪽 예루살렘 곁에 붙어있습니다. 만삭이 되었는데 그 몸을 이끌고 걸어서 왜 북쪽에서 남쪽까지 위험하게 걸어왔습니까? 거기서 낳으면 어때서 그랬습니까? 로마 정부 통치자 아구스도가 호적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천하로 호적하라.” 당시의 호적 인구 조사는 그 방법이 조상의 고향으로 사람들이 가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요셉도 다윗의 족속이라 황제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왔는데 아마도 그 여행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의사들은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오자마자 출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호적 명령이 한 달만 일렀어도, 한 달만 늦었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추어서 베들레헴까지 왔을 때 출산이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상황은 절대로 그렇게 못할 거 같았었는데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 안에서 태어난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우리 딸과 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물어봤습니다. 두 달 전에도 제가 그 교회를 가서 설교하고 만나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아가씨의 엄마가 그렇게 비행기에서 출산하는 것이 위험해서 계획을 안했을 텐데요.” “사실 출산이 그렇게 이루어지리라 생각 못하고 엄마가 비행기를 타셨는데 비행기가 아마 흔들어주었는지 할 수 없이 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아가씨는 24살까지 그 항공사 비행기를 공짜로 탔다고 합니다. 두 달 전에도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다.” “거기 살지 않는데….” “잔소리 말아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부를 것이 이사야 11장에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와서 만민의 기초가 될 것이요”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이라고 그렇게 다 예언되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여!”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그렇게 말합니다. 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고 예언되어져 있는 당신이여!” 그 말입니다. 출생하자마자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했지 않습니까? 애굽으로 피난 가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베들레헴에서 애굽은 지금은 멀어 비행기로 다니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을 왜 가셨습니까? 호세아 11장에 그렇게 애굽으로 갈 거라고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셔서 30년 동안 나사렛 동네에서 사셨는데 왜 나사렛에서 사셨습니까?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의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사역하신 중에 사역 예언성을 보면 예수님이 참 슬퍼하셨던 일이 예루살렘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자기를 환영하고 자기를 메시야로 발표해주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 번이었느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이 기쁨의 구원의 소식은 이방 세계로 갈 것이다.” 어떻게 이방세계로 갈 것인가? 이사야 예언 중에 이방 세계로 갈 것이라고 이미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게 알게 할 것이며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미 예언되어져 있는 일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이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입니다. 그리고 노예들이 타고 다니는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점잖은 사람들이나 귀족은 절대 당나귀를 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당나귀 문화가 없어졌습니다. 에티오피아 갔다 오니까 길거리에 “앞으로 나란히!” 조랑말 같은 당나귀들이 그 무거운 짐들을 싣고 다닙니다. 짐 실어 나르는 불쌍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말을 타게 되어있지 당나귀를 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옛날 전쟁했을 때 항복하는 쪽은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백기를 들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 가야 합니다. 말을 탔다가는 죽습니다. “우리는 이제 당신들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죽이지 말고 노예도 좋으니까 항복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중에서도 새끼 나귀를 탔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더구나 그때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왕의 행차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이 지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썼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다윗의 자손이여! 메시야여! 당신은 왕으로 여기 오시는 것입니다.” 왕 대우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말을 타지 아니하시고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까?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노래를 부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 구원 사역은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 자신도 고통스러워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이 그냥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만이 인간 구원의 방법이 되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실 수 있으실 터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언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려서 피를 흘리게 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여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그렇게 징계를 받아야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가 채찍에 맞아야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노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인신매매할 계획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나에 대해서 기록된 대로 가려니와” 이 말이 무엇입니까? “예언되어져 있는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짜놓으신 계획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질 일을 말씀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대로 세상에 오셨고 예언대로 사시다 예언대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그렇게 정해놓으셨다는 것이 답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러 오셨다. 그것이 메시야의 사역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뭐냐? 왕이다.’ 로마에게 빼앗긴 국권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우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 꼴이 도대체 뭐냐? 저 꼴도 보기 싫은 로마 빌라도가 앉아서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거기 쩔쩔 매면서 식민지 노예 백성이 되었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메시야여! 빨리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소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빨리 하소서.” 이게 제자들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은 왕이 되시고 자신들은 국권 회복의 사역의 일등 공신이 될 거 같은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예수님이 첫 번째로 이에 대해서 예언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1절에 보면 “내가 이때로부터”라고 했습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시며 처음으로 예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예언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도 안 믿었고 “그렇게 되면 어떡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면서 “그리 마옵소서.” 항변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어 버렸습니다. 예언대로 죽으셨고 예언대로 3일 만에 정확히 부활하셨습니다. 평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하나도 착오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신다고 예언하신 것을 믿은 제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다음에 가서 말을 하니까 “어? 그러면 정말 살아나셨는가?” 거기서부터 부활을 접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예언하십니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왜 그러느냐? 그렇게 예언되어져 있다. 기록된바 목자를 치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그 말씀이 이것이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즉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다 그럴지라도 나는 그러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일 먼저 도망갔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개인적 예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무슨 그런 말씀이십니까? 나를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죽어도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장래가 아니라 오늘밤이라고 했다면 몇 시간 뒤의 일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를 했다면 정말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언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세 번씩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다못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신 옷 한 벌까지 군사들이 제비뽑아 나눠가질 것이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신학의 기초 위에 바울 신학이 세워졌는데 바울은 그래서 철저하게 예정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우선 자신의 문제를 말할 때 뭐라고 합니까? 바울은 모든 바울서신의 1장 1절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나 바울은”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어떤 예정론을 말씀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5절에 “성도들이라는 우리를 그 깊으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너희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안에 들어있다.” 3장 11절에 가면 이러한 일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영원 전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쉽게 말하면 2011년 12월 4일 갈보리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드리고 이필재 목사는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일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뜻대로 되었습니까? 안되었습니다. 우리 고등학교, 대학 다닐 때 꿈이 이루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가 노력했는데 왜 안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무시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 오늘의 나입니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대로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정확히 해석할 능력이 없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장차 될 일을 기록한 것이다.” 예언이란 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 마지막 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가지 예언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이 그리스도 때 다 이루어졌고 그리스도가 예언하신 것이 사도시대에 다 이루어졌는데 아직 안 이루어진 예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바로 재림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인자는 왕권을 가지고 오리라. 초림 예수는 고난의 종이요 재림 예수는 심판의 주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구름을 타고 영광스럽게 오리라.” 이 예언이 남아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9~10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서 올려져 가시니 사람들이 눈을 뜨고 바라봤는데 구름을 저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했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언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떻습니까? 예수님 시대와 똑같은 반응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한 것처럼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은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예언성에서 객관성 있게 나를 평가할 때 궁금하십니까? ‘앞으로 나의 여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됩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그대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순례자라. 하늘의 뜻을 믿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삶의 철학을 예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네가 모르고 있다. 내 말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과학을 보십시오. 과학의 종말은 소멸됩니다. 모든 우주 만물이 소멸되는 것이 과학의 종말입니다. 여기 과학자들 많이 계십니다. 마지막에는 모두 다 소멸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 망하겠네.”라고 했습니다. 우리 대강절을 맞이해서 마음을 열고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나와 함께 행복한 대강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의 권위
벧후 1:20-21; 딤후 3:15-17 / 김용국목사
한국의 어떤 젊은 가수가 꽤 성공을 하고 나서 ‘내가 분에 넘치는 성공을 했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두게 되었을까?” 라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열 네 가지의 결코 우연 같지가 않은 행운이 계속 되었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열 네 가지의 행운 중에 딱 하나만 맞지 않았어도 오늘의 내가 있을 수가 없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는데 “아! 누군가가 있구나! 나를 만드신 그분이 계시고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지더랍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나를 만드신 그분이 도대체 누구시며, 나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그분을 꼭 만나서 알아내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그날 이후로 2년 동안 그분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예 일주일에 하루는 꼬박 시간을 들여서 과학책, 성경책, 불경, 코란을 펼쳐놓고 열심히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가수가 바로 JYP 박진영입니다.
그가 공부를 하다보니까 우리 인간의 몸이 약 2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의 단 한 개의 세포도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기계보다도 더 정밀하더랍니다.
여러분! 시시한 기계라도 그것을 만든 회사가 사용설명서를 반드시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어떤 기계보다도 복잡한... 세포가 200조개 이상이 모여서 나라고 하는 인간이 만들어졌고, 내가 잠을 잘 때에도 심장이 뛰고, 폐가 숨을 쉬며, 혈관에 피가 흐르고, 뇌가 움직여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런 나를 만드신 분이 계시지 않을 리가 없고, 그분이 나를 만드시고 나서 사용설명서를 안 주실 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사용설명서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우리 인간은 참된 자유도 행복도 절대로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종교에 의지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만드신 분을 꼭 만나서 사용설명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말한 것을 듣고 저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과연 누가 창조했으며, 내 인생에 대한 사용설명서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요? 목회자가 왜 성경만 가지고 설교를 할까요? 교회는 왜 성경만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까요? 성경 말고는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는 다른 기준이 과연 없을까요?
성경은 역사적으로 가장 널리 읽혀지고 꾸준하게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베스트셀러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지 누군가가 너무나도 잘 썼기 때문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쓴 어떤 책도 십년 이상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수백 년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의 저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성경을 기록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쓰신 특별계시라고 말을 합니다. 화려한 꽃의 모양과 색깔을 보거나 쓰나미가 몰려오고 화산이 폭발하는 자연현상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그 앞에 얼마나 초라한가를 깨닫고 이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지 않겠느냐? 라고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을 자연계시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서 사회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역사를 주관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계시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계시로는 창조주가 어딘가에는 계시겠구나! 라는 정도는 대충 알 수가 있는데, 그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실 분은 도대체 누구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반계시 아래에서 어떤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하고 섬기는 무수한 하등종교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특별계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과 자신이 하시는 일을 직접 알게 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계시를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을 감동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게 하시고 글로 기록해서 남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특별계시이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바른 사용법을 위해서 주신 설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요, 교양서적 중의 교양서적이지만, 단지 책들 중에 유명한 책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올바른 삶을 위해서 주신 설명서이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알게 해주는 특별한 계시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서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완전한 법칙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받아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18:18-20에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계시를 여러 세대에 걸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해주셨습니다. 히1:1에 보시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계시의 최종적인 방법은 아들을 통해서 직접 보여주시고 말씀해주시고 행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9에서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6:38에서도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성경책에 고스란히 담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맺은 언약대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과 관련된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실천하신 내용과 우리가 믿고 따라야 될 내용을 알게 해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꽤 방대한 양이지만 계시들의 내용이 동일하고, 서로 유기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계시를 음성으로만 들려주셨다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고, 또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의 문자로 확실하게 기록되게 해서 혼란을 예방해주시고,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이 모든 세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때에 선지자나 사도들을 성령으로 감동하게 하셔서 그 말씀을 알아듣게 하셨고, 그들의 생각과 의지를 붙잡으셔서 그들의 글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1절에 보시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을 기록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게 하셨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딤후 3:16-17절에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까닭에 오류가 전혀 없습니다. 신구약66권의 성경이 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까닭에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문자나 사상까지도 오류가 전혀 없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34:16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채용하셨고 말씀하셨고 그 책들을 모으게 하셨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완성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귀가 딱 들어맞고 전체가 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은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어떤 유명한 사람이 이 책은 놀라운 책이다. 라고 서평을 써주어서도 아니고 교회가 그것을 보증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요, 성령의 주도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권위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성경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시 119:138에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42절에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객관적인 권위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키는 권위가 있습니다. 벧전 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히 4:12에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폐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역적인 권위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의 생활과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규범적인 권위라고 하는데, 시119:105에 보시면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성경보다 더 바르게 제시된 사상이나 규범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 전체가 말씀에 근거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회는 더 복잡해졌고 직업의 수도 훨씬 더 다양해졌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것도 아주 옛날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삶의 규범이 될 수 있을까... 이 시대에 맞는 말씀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진리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나 환경이 변해도 인간의 마음과 죄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보면 “모든 시대에 / 모든 사람의 / 모든 삶의 문제에 원리적으로, 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가르침을 충분히 계시해 놓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구원을 받는 신앙의 규범으로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규범으로서도 매우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믿고 순종하면 영생과 구원을 넉넉히 얻게 되며, 성도로서 성결하게 되고, 영적으로도 더 성숙해지며, 이웃이나 자연과의 관계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맨 끝장인 22장 18-19절에 보시면 “...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성경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더 이상 추구해야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하기 때문에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오히려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 성경 맨 마지막 부분에 아예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을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고 바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성경 안에 다 계시되어져 있습니다.
벧후 3:16에 보면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 어떤 부분은 우리가 이해하기 정말로 어려운 부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신앙과 삶의 관한 부분은 아주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성도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어린 아이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가장 큰 숙제는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마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예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을 묘사해 놓은 길가와 같은 마음, 처음에는 들었으나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는 돌밭과 같은 마음, 깊이 새겨들었지만 상황이 어려워질 때 결국 포기하고 마는 가시밭과 같은 마음, 신중하게 듣고 새겨서 그대로 실천하는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성경을 대하고 설교를 들으십니까? 길가 밭입니까? 아니면 돌짝 밭입니까? 아니면 가시 밭입니까? 아니면 좋은 밭입니까?
우리 교회는 성경말씀만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말씀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뉴스나 교훈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평온교회 성도님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딤후 3:15-17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허락해주신 몇 가지 중요한 목적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앞으로 미래에 영생을 얻게 되는 것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이 바로 성경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 20:31에도 보시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답게 해주시려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엡 4:13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자라가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시민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왜 살고 있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안에서 찾아내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용설명서가 분명히 맞습니다.
세 번째는,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엡 2:10에 보시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는데 이런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성경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최고로 좋은 신앙훈련의 방법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의 가장 자연스런 표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하늘의 창고를 여는 만능열쇠입니다.
이런 말씀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기도를 할 수도 없고 기도를 해도 허공을 치는 막연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이며 전능하신 분이시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아버지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신다. 라고 말씀하셨고,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는 부모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에게 기도도 없고 기도가 없으면 응답의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주 특별한 계시입니다. 또 성경이 없이는 우리가 바르게 살아갈 수도 없고, 구원의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행복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들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축복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절대성
벧후 1장 20~21절 / 임덕순목사
우리는 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워야 하는가? 교회는 왜 성경만을 가지고 설교하는가? 이것을 알기위해 4월은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배우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들을 주실 때 그것을 기록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벧후 1:21). 따라서 성경의 원 저자는 성령 한분입니다(고전2:10-14). 하나님께서는 기록하는 자들을 성령으로 감동시켰을 뿐 아니라, 기록 자체도 감동으로 기록되게 하셨습니다(딤후3: 16). 그래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습니다.
1. 필요성
성경이 없어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법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바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들은 성경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직도 본성이 전혀 오염되지 않고 아주 깨끗하고 아주 똑바른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이 과연 자연현상이나 타고난 지식만을 가지고도 창조주요 심판주인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피조물 가운데 어렴풋이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그런 흔적들만으로도 사람이 구원을 받는 길을 알 수가 있을까요? 성경 없이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 주신 우리의 구원자이며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시 19편에 보면 시인은, 자연을 보고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신성과 능력과 솜씨를 노래하고 있습니다(시19:1-6). 그러나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눈을 밝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 허물을 깨닫고 구주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19:7-14).
천문학과 점성술에 밝았던 동방박사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서 유대나라에 큰 왕께서 탄생하신다는 것을 예견하고 예루살렘까지 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선지자에게 물어서 미가의 예언서에 베들레헴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아들이 나신다는 대답을 얻고서야 베들레헴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각이나 양심이나 예지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구주 하나님을 바로 알고 구원을 얻게 하는 데에는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이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이 지닌 신의식이나 자연만물에 나타난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데 너무 부족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신앙고백 1장 1항, 자연계시의 불충분성)
우리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타락한 뒤로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해지고 자연도 오염되어 크게 훼손되고 왜곡되었습니다. 이로서 타고난 신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고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도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성경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주님이 직접 밝히신 바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부패로 인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직접 선포하셨고, 당신의 뜻을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글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적극적 이유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부패와 사단의 방해로 인하여 진리가 왜곡되고 잡다한 말들과 혼합되지 않게 하려고 문자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성경이 기록된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게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말씀을 묵상함으로서 믿음을 튼튼하게 해야 하고(행17:11-1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이 말씀을 전파해야 하며(딤후4:1),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조명 아래서 옳게 분변하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2. 영감성과 무오성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계획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되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완벽하게 주도하고 통제하고 감독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영감이라고 합니다. 벧후 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되어있는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까닭에, 그것의 내용뿐 아니라 문자와 사상까지 전체적으로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오류가 없는 것은,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받아쓰기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기자들을 붙들어 사용하시며 철저히 감동하여 사용하셨기 때문인데, 그들의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그들의 지식, 하나님에 대한 영적 체험 등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범위 내에서 취사선택하여 사용하여 기록하도록 성령이 통제하신 까닭입니다(웨스트. 신앙고백 1장 2항). 성령의 영감이란, 성령의 감동하심이 사도들의 손과 마음과 경험과 판단 등을 통제하고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각권은 기록자들의 특징이 살아있으면서도 내용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을 보면, 의사들이 환자 진찰할 때 언제부터 아프냐, 어디가 아프냐고 자세히 물어보고 근원을 따지는 것처럼, 자료들을 자세히 연구하여 역사적 순서를 따라서 기록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눅1: 1-3). 마태의 경우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장부를 정리하던 습관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연대순 보다는 내용이 같은 것 끼리 분류하여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문체가 따로 있고 베드로의 문체가 또 다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기록하기에 합당한 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의 배경과 어휘와 지성적 통찰력을 사용하시면서도 주권적으로 감독하시어 당신의 뜻을 온전하게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유기적 영감론’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다는 것을, 성경의 증언을 근거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유기적 영감론에 반하여, 역동적 영감론, 기계적 영감론 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깨달음보다 약간 높은 차원의 감동을 마음속의 느껴서 기록했다고 보는 견해를 역동적 영감론 이라고 하고, 기록자들은 단지 펜만 잡았을 뿐이고 오직 성령님이 하나하나를 불러주셨고 기자는 다만 불러주시는 단어를 그대로 기록했다는 견해를 기계적 영감론 이라고 합니다. 역동적 영감론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기계적 영감론은 기록자의 영적, 지성적 특징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오류 없고 완전하게 기록되면서도 기록자들의 특성이 드러난 성경의 사실과 다른 견해들일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핵심적 내용은 성령의 영감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부분은 기록자들에게 맡겼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성경의 모든 부분에 전체적으로, 그리고 성경에 사용되어 있는 단어와 어휘들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이든 지리적이든 사상적이든지를 막론하고 전체가 영감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완전축자영감론’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연대나 숫자, 또는 자연현상에 대한 표현이 부정확하거나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소요된 기간이 7년이 다소 넘었지만 7년이라고 기록한 것과 같은 정도의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왕상6:37-38).
개혁신학이 성경의 유기적 완전축자영감 교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의 무오성과 무위성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나 표현에서 오류나 거짓이 없고 정확하고 진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절대로 신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권위성
성경의 저자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시요, 성령으로 완전하게 감동되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성경은 자체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성경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권위를 가진 교회가 인정해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에 의해서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지, 교황이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도들의 권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나 사도들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약점과 오류가 많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객관적 권위와, 사역적 권위와, 규범적 권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본래부터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시119:138, 142). 이것을 객관적 권위라고 합니다.
하나의 예로, 성경의 과학성만 들어도 성경의 권위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 28:25에 보면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라고 공기의 무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릴레오 이전에는 공기에 무게가 있는지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람의 무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36:27-29에 보면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 즉 그것이 안개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위에 쏟아지느니라.” 라고 하였고, 전 1:7에는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던지 그리고 계속하여 흐르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과학 이전시대에 물의 순환법칙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자연법칙을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을 때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레17:11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라고 하였고, 14절에는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과학적 진리를 알려주는데 생물학적으로 피의 기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다는 것을 현대의학은 이제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3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는 이 사실이 완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3:45, 46에 보면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격리수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격리 방법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때입니다.
전 1:6-7에 보면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라고 하여, 바람과 기압의 순환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9:5-6에 보면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그 길을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라고 하시어, 태양과 태양계가 궤도를 따라 운행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시 102:25,26에는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라고 하시어, 우주의 노쇠와 물리학적 사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과학이 이제야 말하는 내용(열역학 제1,2법칙)입니다.
과학적 측면에서 일부만 찾아보아도 수없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의 비밀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대한 증언도 정확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고고학의 발견과 다르다는 보고가 한건도 없습니다. 여리고성이 안으로 와르르 무너진 사건, 대 홍수 등의 사실성은 고고학의 발견으로 다 증명되고 있습니다. 1600여년 기간에 걸쳐서 40여 명의 기록자들을 동원하여 기록하신 성경의 내용이 철저하게 일관된 주제로 통일성을 유지하며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이 오류 없이 완벽하다면 그것은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에는 또한 읽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권위가 있습니다(벧전1:23, 히4:12). 성경을 읽다가 죄인이 회개하고, 가졌던 사상을 바꾸며, 삶의 방향을 찾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처럼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킨 책이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의 사역적 권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활과 신앙의 규칙이요 규범으로서 권위가 있습니다(시119:105).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느 세대에 그 누구도 말해 본 적이 없는 윤리중의 윤리입니다. 이렇게 삶의 완전한 규범을 말씀하는 면에서 성경은 규범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또한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3,000번 이상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고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하고, 말씀의 신적 권위 앞에서 복종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견해나 고집이나 사람의 학설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거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도 성경이 가르치신 대로 살아서, 성경을 신앙과 삶에 연결시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충분성과 최종성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 비해 보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는 너무나 달라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경만으로 충분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신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의 모든 삶의 문제에 원리적으로 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적용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웨스트. 신앙고백서 1 장 6항)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데 필요한 모든 가르침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세상을 가장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진리를 충분하게 계시해 놓았습니다. 성경 말고 다른 법이나 규칙이나 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유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사회는 요즘 주 5일근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는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쉬라고 하셨습니다. 유럽에서 주 5일근무제를 해본 나라들이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일을 좀 더하자면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 데에 아주 충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말씀되어진 대로만 믿고 순종하여 살면 영생과 구원을 넉넉히 얻으며, 성도로서 성결하게 되고, 영적으로 온전히 성숙되어지며, 이웃이나 자연과의 관계도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아주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보통의 성도라면 누구나 쉽고 충분하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고 어두워져 있습니다(눅24:25).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깜깜한 데서는 읽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성경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데, 성령은 우리의 눈을 밝혀주며 마음을 열어주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 천 년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의 내용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 계시를 다 기록해 두었다고 하면 그 분량이 너무나 방대했을 것입니다(요21:25).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의 성경책 안에 당신의 계시를 압축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치신 말씀을 다 기록하자면 그 기록된 책의 분량이 온 지면을 덮고도 남을 것이라 했고(요21:25), 복음서에 기록되지 못한 사건도 많다고 했으며(요20:30), 다만, 그 많은 사건들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요20:31) 성경에는 우리의 구원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만 기록했는데, 기록한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성경 밖으로 넘어가서(고전4:6), 새로운 계시를 구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내용의 계시를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새로운 내용의 계시를 더 이상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일 뿐입니다. 누가 어디서 계시를 받았다는 말에 현혹 되지 말아야 합니다. 초신자에게 뿐 아니라 오래 믿은 신자에게도 이런 유혹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거짓말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맨 마지막 책, 마지막 장에 이런 경고를 해 두셨습니다.
계22: 18-19에 보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성경에 추가하거나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꼭 필요한 만큼의 계시를 성경에 담아 놓으시고, 그것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의 계시를 성경에 압축해 놓으시고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계시의 홍수사태가 없고, 혼란이 있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답을 오직 성경 안에서 얻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성경만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이나 신학적인 논쟁이나 교리를 확정하는데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모든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최종적으로 성경에 의존해야 합니다.(웨스트, 신앙고백 1장 8)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고 우리 인생의 사용설명서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령께서 이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