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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원칙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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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정광민 학생외 20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2000명의 학생이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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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항쟁의 명분 그리고 항쟁에 따른 영향들 >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을 시작으로 4월 11일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체 발견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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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79년 8월 YH무역이 폐업하였다. 당시 YH무역 노동자 일당은 막걸리 한통과 새우깡 한봉지 값이였다. 엄청난 노동착취를 하였던 사장 장용호는 당시 15억을 미국으로 빼돌린 후 도피한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회사회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부는 폐업절차를 강제진행 하였고, 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101호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의 강제해산이 시작된다. 100여명의 여성노동자를 진압하기 위해 1000명의 경찰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노동자들을 지지하였고, 이 사건으로 노동자 김경숙씨가 사망하고 김영삼 총재는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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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수출자유지역법에 의해 처음으로 마산이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었다. 71년에는 전체 수출의 8%를 차지할 만큼 핵심공단으로 성장되어 있었다.
이후 1978년 세계경제가 흔들리면서 수출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은 그 직격탄을 맞게 된다.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고,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과 함께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정부는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기름값이 60% 뛰면서 모든 비용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기업들은 줄줄히 파산하였고, 임금체불은 나날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게다가 1977년 도입된 부가가치세는 서민들의 생활고를 더욱 압박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부산과 마산은 영세자본과 저부가가치의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되어있었고, 이러한 경제불황은 부산과 마산지역을 그야말로 최약의 상황으로 몰고가게 되었다. 부도율만 보더라도 전국평균의 200%가 넘었으니 그 어려움은 실로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서민들의 불만은 극으로 달했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 박정권의 긴급조치 9호 (1975년 공포)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도 사회불만을 토로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실상 유신체제는 긴급조치에 의해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74년 1월 긴급조치 1호와 2호로 일체의 헌법개정 논의 금지하였고, 4월에는 민청학련사건으로 4호가 공포되었고, 75년 유신철폐운동에 따른 7호, 그리고 75년 5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행을 금지하는 강력한 긴급조치 9호를 발호하였고, 10.26사태 직후까지 4년이상을 유지되면서 국민의 기본권 자체를 박탈한 조치였다. 이를 위반할 경우 일명 "막걸리보안법"이라 하였던 국가보안법으로 어떠한 절차도 없이 구속되었다.
그런 서민들의 생활고와 기본권의 박탈속에서 상류층의 부정부패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2차 오일쇼크가 서민들의 삶을 힘들게 했지만 정치에 빌붙은 대기업들은 아파트 열기가 솟아오르면서 정경유착을 통해 사업확장의 계기가 되었고, 갖은자에게는 재산증식의 방법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정면으로 맞선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의 총재가 되었고, 김대중 선생은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였다. 당시 78년 총선에서는 여당(공화당)을 야당인 신민당이 승리하며, 정부와 여당은 철권통치의 위기감을 느끼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YH사건이 발생하고 부산, 마산이 정치적 성지였던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은 3•15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렸던 부산, 마산시민들에게 "항거"라는 용솟음이 용암처럼 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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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신민당사에서 진압작전 중 추락사한 김경숙씨에 대한 사인이 문제화 되었다.
경찰의 투신자살 발표는 당시의 시민들을 아연질색하게 하였고, 미국 국무부까지 경찰의 진압작전의 무리함을 발표하였다,
"백두진 파동"을 주도한 김영삼의 제거를 노리던 정부여당은 김영삼의 총재직을 강제 박탈하였고, 김영삼은 미국 타임지와 인터뷰를 통해 미국이 박정권의 독재를 제어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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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김영삼은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김영삼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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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정광민은 강의실에 들어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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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도서관앞에 정광민 학생을 비롯한 200명의 학생이 모였고, 이내 이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2000여명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내로 진입하였고, 그 동안 억눌려져 있던 분노가 폭발한 시민들의 합류로 그날 저녁에는 인파가 수만명으로 늘어났다. 일제잔재교복을 입었던 깨어있는 대학생들의 항거는, 이내 억눌려져 있던 시민들의 폭발에 도화선이 된 것이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고 동아대와 더 많은 시민의 합류가 이어지자 정부는 18일 새벽 0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10월 19일 경남대학교 정인권 학생을 필두로 마산 315의거 기념탑에 진입하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근로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마산시내는 한때 치안부재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며 1563명을 연행하였고, 125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된 후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이런 진압과정에서 시민 1명이 사망하였으나 이를 은폐하였다. 당시 51세 故 유치준씨였고 40년이 지난 후에야 부마항쟁으로 인한 사망자로 확인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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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이 발발하고 이틀 후 김재규 중정부장이 부산을 다녀온 후 박정희에게 보고하기를 "단순히 학생데모가 아니며 시민과 함게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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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옆에 있던 차지철 비서실장은 한 술 더떠 이렇게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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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부가가치세 도입와 김영삼의원 제명등 사사건건 박정권과 대립했던 김재규는 박정희 제거를 결심하게 된다.
결국 부마항쟁 후 1주일도 안되어 1026사태가 발발하고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한다.
부마항쟁은 4.19혁명에 이어 범 대중적 민주민중혁명이며 반유신운동의 종결이다.
이러한 부마항쟁의 정신은 서울의 봄과 광주혁명으로 계승되었고, 4.13 호헌에 이은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6.19선언을 끌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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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 이은 군사 구테타로 인한 5공화국 출범과 6공화국으로 인해 부마항쟁의 진실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그 누구도 부마항쟁에 대한 의견을 꺼낼 수도 없는 살벌한 정국이 이어졌다.
이전까지 부마사태라 불리며 10•26 사태에 묻혀버린체 지방의 작은 소요사태로만 인식되었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부마 민주항쟁"이라 명명하였고, 특별법 입법청원이 시작되었지만 당시의 야당의 반대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과 마산의 시민이 뭉쳐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주의 성지"라 언급하였다.
이후 여러 민주단체에서 진상조사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2013년 5월 부마항쟁 보상 특별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박근혜는 선거유세기간 마산을 방문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약속하지만 허울좋은 위원회일뿐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3기 진상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급진전을 보이고, 고 유치진씨가 부마항쟁 사망자로 인정 되었다.
그리고 10월 16일을 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 Yh 무역 찾아보다가 읽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