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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20050927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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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7 부산강의-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셸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셸링을 이야기하면서 셸링이란 사람과 피히테란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헤겔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했었는데.
피히테라는 사람과 셸링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피히테는 절대자아,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어떤 생각을 갖던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결국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데 거기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진리고, 하나님이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셸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마저 자연 속의 자아다. 대자연 속의 나. 대자연 속의 나기 때문에 대자연 속의 나로 뭐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자연 속에 있는 나를 포함해서 대자연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 신의 실재, 신의 실제, 신의 지혜, 신의 활동, 이런 모든 것으로 돌아간다. 대자연 속으로 돌아온다. 이걸 가지고 셸링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성이라고 해요.
이성은 특징이 뭐냐 하면, 그냥 이성은 반성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성이 반성을 하게 되면 자꾸만 이성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유한에서 무한으로 절대 관념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지식, 절대 관념으로 가는 그냥 멈추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성은 반성하면서 다시 무한으로 절대 지식, 절대 관념으로 간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성이 절대 관념으로 가는데 결국 다 갔다고 생각하면 그건 뭐냐 하면, 대자연 속에 뭔가 작용하는 신의 자질, 또 신의 속성과 이성이 결국 신의 속성으로 인도하게 되겠지요.
철학가들이 이렇게 대자연, 하나님, 신, 이런 걸 따지는 이유가, 이 대자연이란 게 우리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이게 굉장히 그들에게는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왜 내 앞에 있느냐? 결혼한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내가 만들어내지도 않은 왜 한 여인이 나와 함께 사느냐? 이게 참, 굉장히 신기한 문제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만들었으면 내 마음대로 할 텐데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 존재하기 때문에 과연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관여할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패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나가라 할 수 있는데 뭔가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 서 있을 때는 관여하기도 뭐하고, 그리고 남남으로 이렇게 모른 척하기도 뭐한 게 남남으로 모른 척 하려면 그럼 나하고 왜 사느냐하는 그 문제가 또 남아요.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의 집안과 집안이기 때문에 자기 아내에 대해서 뭐라 하면 장인, 장모한테 물어봐야 된다는 그런 관계에 있지만.
좀 넓게 생각한다면, 이것뿐만 아니고 계라든지 타인이라든지 이 모든 것, 특히 하나님, 신에 대해서 한다면, 결국 신이 내가 만든 게 아니라면, 내가 신에게 복종하든지, 아니면 신을 내가 만들어서 내 안의 신, 내가 주무르고 있는 신으로 하든지, 뭔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되는데, 신이라는 것이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대자연은 내가 안 만들었으니까. 그럼 대자연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 만들었잖아요.
그렇다면 나보다 더 넓은 대자연을 바라볼 때 나는 신의 말씀을 순종해야 될 텐데 그런데 또 우리한테 한 고집이 있거든요. 고집이 세다 말이죠. 신에게 복종하면 자꾸 손해 볼 것 같아. 내 욕구가 내 욕심은 안 채워지잖아요.
내가 만약에 신에게 순종했는데 내 몰골이 이 정도면 무척 나 자신에게 신에게 불만이 가득한 거죠. 복종하고 싶어도 내가 요구하는 만큼도 안 들어주는 신 같으면, 복종하면 할수록 오히려 원망의 강도가 더 커지니까 이러다가 신을 욕보이는 수가 있겠단 말이죠. 신의 원수가 되는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신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려 하니까 영 마음에 안 차는 게 있어서 원수지간이 될 거고. 순종 안 하려고 하니까 이 대자연은 내 관리 하에 있기는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내가 손대려고 하니까 거기서 날카로운 칼날이 와서 어디, 니 것도 아닌데 니 마음대로 해. 이렇게 거기서 공격당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카트리나 같은 경우에 태풍이 불면 정든 집, 다 날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뭔가 대자연을 만드신 신에게 태풍을 만드신 신에게 뭔가 내가 섭섭하게 한 게 있는가? 스스로 자책이 되면서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철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입니다.
그 타협점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신이 하시는 하나님이 벌이시는 그 계획과 책략에 대해서 통달해 버리고 그리고 그로 더불어 나 자신이 누군가도 알아서 뭐든지 알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거기에서 버틸 수 있는 묘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그런 겁니다.
그 묘수가 헤겔에 들어오면, 그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게 돈으로 바뀝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헤겔 이야기하면서 헤겔이라 하는 것은 정반합이라 해서 마지막 절대이성에 이른다. 라는 이야기를 제가 해 드렸지 않습니까? 사실은 헤겔은 그것부터 출발한 사람이 아닙니다.
165페이지를 잠시 보면, 헤겔은 관심사가 뭐냐 하면, 이러한 셸링이 이야기한 신의 절대이성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라는 이 대명제를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그러면 신에게 복종하기 위한 어떤 자체 내 조직, 장치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일반교인들, 특히 장로급 되는 사람들의 제일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목사 입에서 나오는 그 성경 말씀,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그것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완전히 채택해서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할 수 있으려면 뭔가 질서 잡힌 체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이 있어서 그 교회가 목사 입에서 나오는 또는 성경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그 진리를 원활하게 실제적으로 실천에 옳기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나름대로의 어떤 도구 같은 것, 기구 같은 것, 이런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일반평신도들이 그렇게 꼭 마음을 먹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도덕이라 하는 건 추상적인 것이고, 그 도덕을 실천에 옮긴다 하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니까 신의 법이 그러하다면 그걸 구체화될 책임 같은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헤겔의 관심은 뭐냐 하면, 신의 절대이성을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진보하고 발달해서 마지막에는 신과 만나는데 만나기 위해서 이 지상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뭐가 확실히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되느냐 하면, 국가. 국가체제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국가냐? 교회가 아니고 왜 국가이어야 되느냐? 그것은 국가가 교회보다 범주가 넓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가 농지개혁 못하잖아요. 그죠? 교회가 모병제 못하잖아요. 국토방위 이런 것 없잖아요. 교회가 시장경제에 대해서 경제학 전문가를 모시고 시장경제에 대해서 증권, 주가에 대한 그런 관리를 교회가 월급 줘서 경제전문가 불러서 현재 주식시장동향조사, 못한다 말이죠.
교회는 기껏 해서 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라고 이론만 설파할 뿐이고, 그 이론을 받들어서 신의 뜻을 받들어서 실천에 옳길 수 있는 기구는 교회 말고 교회보다 전체적인 모든 인민들을 조절할 수 있는 그게 뭐냐 하면, 국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국가도덕에 대해서 헤겔은 처음에 뜻을 펼치는 겁니다. 한 국가가 전면적으로 너무나도 신의 뜻에 합당한 도덕적인, 우리가 갖고 있는 절대양심, 절대이성에 부합된 그런 국가를 어떻게 하면 세워서 이 지상에 참다운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있느냐? 그것이 헤겔의 관심사였습니다.
이 관심사를 여러분들이 이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될 것은, 목사는 교회 소속이지만 교인들은 세상에 소속되지 않았습니까? 그 세상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세상에서 하나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단용으로 수단으로 들어가는 국가체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목사의 설교를 말씀을 듣기 때문에 이 공부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가가 도덕적이어야 된다.] 이게 가능합니까? 라인홀드 리버의 책에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란 말이 있지요. 도덕적 인간과 도덕적인 인간과 개인 개인 만나면 다 도덕적인 사람이에요. 어떻게 도덕적인 사람이 모였다 하면 비도덕이 되느냐? 도대체가 어떻게 해서 이런 희한한 조화가 되느냐 이 말이죠.
살아있는 장미를 한 송이, 한 송이 보면 살아있는데 다 모아 놓으니까 죽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살아있는 장미는 모아놔도 살아도 다 장미고, 하늘의 해와 별은 지금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혼자 있을 때는 교회에서 찬양 잘하다가 기도하고 새벽기도 잘 하다가 어떻게 서넛이 모였다 하면 작당을 해서 신이고 뭐고 간에 자기 쾌락에 빠지고 자기 즐거움만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마귀도 하나님이 한분인 줄 알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말이 나오거든요. 마귀가 하나님 생각하면 떤다는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죠. 마귀는 하나님 생각하면 떠는데 어떻게 된 인간들이 하나님 만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해도 떠는 건 없고, 자기 애 성적 떨어지면 떠는데. 학교성적 떨어지면 벌벌 떨어요. 하나님한텐 하나도 안 떨어요.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에요. 그냥 장식용이죠. 선물 보따리 안이 중요하지, 장식용은 풀고 갖다 버리잖아요. 하나님은 잠시 이용하다 갖다 버리는 용이에요.
교회 왔다 잠시 입고 있다가, 성당 다니는 여자들 교회 올 때 핸드백에서 수건 꺼내서 잠시 쓰다가 성당 나가면서 획 벗어버리는 것처럼 일종의 의례용, 의식용, 폼 내는 그러한 너울 같은 것, 수건 같은 그러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란 개념이 되고 말았어요.
이 난제, 아주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헤겔은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겁니다. 자, 어떻게 그것이 됐느냐? 그거는 강제권을 가동하는 거예요. 강제권을 가동하는데 이게 좀 어려워요. 강제권을 가동하려면 여기에 폭력이 동원되죠. 그런데 폭력에도 합당한 폭력 따로 구분해야 되고, 합당치 않는 폭력을 누가 구분합니까? 구분을 해야 되는 거예요.
전두환 시절에는 제일 먼저 한 것이 삼청교육대에 깡패들 모아놨다고. 깡패가 깡패를 조지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깡패 조지는 자신은 정당하고 합당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뭔가 켕기는 것이 있으면 오버액션 하는 쪽으로 착한 일을 많이 나서게 됩니다.
그때 뭔가 수상해요. 대단히 수상하지요. 교인들이 갑자기 헌금을 많이 내면 그 교인은 뭔가 검은 돈을 받았다는 그런 증거가 됩니다. 미안스러움에서 내는. 그러니까 교회 헌금이 안 들어오면 교인들이 정당하게 잘 살고 있다고 뜻으로 보면 돼요.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땀 흘려 번 것이기 때문에 잘 안내고. 뭔가 갑자기 뇌물 받았다든지, 복권에 당첨됐다든지 뭐 있구나.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개인적으로 도덕적인데 뭉치면 왜 악한 것이 되느냐? 그걸 다루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잘 보세요. 내가 타인을 규제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입니다. 내가 타인을 규제하려면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딩동댕. 정답입니다. 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100% 알 때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정당함이 되는 거예요. 정당성이 보장되지요.
친구라는 영화에 보면 학교 담임선생님이 애를 행실이 방정치 못하다고 패는데. 너 아버지, 뭐 하시노? 이렇게 하니까 우리 아버지, 조폭입니다. 이게 농담하는 줄 알고, 우리 아버지 조폭이라는 말이 진심인데 선생님이 그 애 말을 마음을 읽지 못해서, 이게 ~풀어서, 나와 봐. 풀고 이게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팬단 이 말이죠. 나중에 재 진짜 재네 아버지, 조폭 맞는데요.
정확하게 완벽한 국가가 되려면 100% 국민들의 마음을 집어낼 수 있는 철학적인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떤 지혜가 완성되어야 되지요. 그래서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전부다 거기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는 진리체계가 수행될 때 비로소 그 법칙에 의해서 법을 만들고 그 만든 법에 의해서 당신은 이런 마음을 가졌기에 다른 다수의 공동체를 위해서 당신은 매 맞아야 돼. 라고 하는 것이 정당화 될 텐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제가 어제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원숭이 마음을 아느냐? 인간이 원숭이 마음도 모르는 게 어떻게 남의 마음을 아느냐?
어제 대구강의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감정이 안 실린 설교를 하는 법이 없어요. 어떤 때 기분 좋을 때는 진짜 교인들이 사랑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고, 자기가 일이 뜻대로 안 된다든지 교인들이 너무 늦게 온다든지 와야 될 교인 안 보이고 추석이라고 다 빠져버리고 가고, 화가 나서 같은 성경본문을 준비한 것 하면서도 식식거리면서 하거든요.
그러면 교인들이 목사님,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하면, 내 설교 본문, 진리에 어긋난 거 뭐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죠. 어긋났지요. 사랑으로 전하지 않는 것은 울리는 괭가리 됐으니까. 사람의 은사,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게 쏙 빠져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감정이 실리지 않은, 자기가 감정이 실려 버리면 자기가 아무리 진리라 해도 감정과 결합이 되면 이게 진리가 아니고 왜곡된 진리가 튀어나와 버립니다. 교통경찰이 뭘 잡더라도 집안에 부부싸움하고 나오면, 그 인간 봐주는 것 없어요. 5만 원짜리 같으면 5만 원짜리 다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집안에 애 성적이 올라갔다든지 갑자기 자기가 사놓은 아파트 값이 올라갔다든지 투기해 놓은 게 올라가 기분 좋으면 5만 원짜리라도 2만원으로 확 깎아버려요. 가소. 뭐, 가소. 이렇게 된다 한다니까.
법이 옳다 하더라도 법집행 사항에서 이미 개인은 인간은 감정이 개입되는 왜곡된 법집행이 돼요. 이거는 판사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고 저런데 얽매이지 않는 절대도덕. 절대도덕을 헤겔은 찾아 나섭니다. 아시겠습니까? 기존의 법이라 하는 것은 법을 다루는 사람마다 다 그 실천, 실행이 다 다르니까 절대적인 법. 그 법을 어디서 찾는가? 헤겔은 바로 성경에서 찾습니다.
이제부터 헤겔의 성경해석을 공부할 텐데 얼마나 탁월하게 공부하는지 완전히 신학자 저리 가라에요. 절대적인 도덕은 성경에 있다. 뭔가 복음적입니까? 아니지요.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실은 성령 받지 못한 일반교인들이 기독교를 접하고 할 때 주로 이런 선입감 전합니다. 사회 썩었다. 하지만 교회는 절대적인 법이 있겠지. 나는 그 절대적인 진리를 듣기 위해서 나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해서 뭐 하는가? 그거 해서 하나님한테 한 수 배워서 내가 사회에 나가서 절대적인 법을 실행하는 순종하는 착한 완벽한 사람으로 내가 달려가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 선입감이 그렇잖아요. 헤겔의 이러한 공부는 곧 우리들의 공부에 대한 좋은 선제 공부가 되는 겁니다.
166페이지 봅시다.
[1798년 헤겔은, '기독교 정신과 그 운명'이라는 저서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을 근대가 분열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더욱이 칸트의 도덕철학은 이 분열을 통해서, 즉 당위와 존재의 대립을 통해서 그 특색을 드러냈다.]
당위와 존재의 대립. 이거 중요합니다. 당위는 뭐냐? I must do it. 나는 해야만 한다. 나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실천이지요. 존재는 뭐냐? 나 여기 있다. 또는 나는 뭐가 되었다. 존재지요. 존재는 반드시 속성이란 내용물을 담고 있지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신분으로써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돌멩이는 돌멩이로 존재하고 성도는 성도로 존재하고 인간은 인간으로 죄인은 죄인으로 존재하잖아요. 그냥 있다고 존재하는 게 아니고, 뭐를 담고 존재 하느냐하는 말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칸트는 그 사람이 어떤 존재, 어떤 내용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하느냐에 따라서 존재의 내용이 밝혀진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흔히 성화론 주장하는 성화론 주장하면 요새 할 것도 없이 모든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교 교수들이 이거잖아요. 당신이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습니다. 새사람 되었으니 마땅히 뭐가 나온다? 마땅히 새 사람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혀야 됩니다. 이게 칸트 철학이에요. 칸트는 존재만 되면, 존재에서 반드시 이게 나온다고 본 겁니다. 이게 일반 사람들, 일반 목사들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여러분,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존재가 확립되고 그 다음에 그 존재에서 당위가 나온다고 했는데 이 존재가 어떤 존재인 것을 본인이 압니까? 본인이 알아요?
이런 건 있지요. 나는 성도가 되고 싶어. 되고 싶으니까 아마 성도일걸. 라는 생각은 있지만 정확하게 누가, 제3자가 당신은 이런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게 나와야 됩니다. 라고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성경책에도 없어요. 성경책에도 그런 말 없어요. 여러분 말 없어요.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물어 이야기한 것, 아무 성경에 없어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엔 있지요. 내가 태중에서 되었다든지 있지만. 예레미야하고 엘리야, 몇 명 안 돼요. 아브라함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게 하신 것이 본인이다 하는 것이 나오고. 이삭은 없는데서 나오고 아는데. 그 뒤에 나오는 대한민국 김철수라든지, 박영희, 이런 것, 삼순이 이런 것 안 나온다니까. 그게. 삼순이가 성도라 주장하면 누가 알 수가 있나. 몰라요. 모른다고요. 십자가 목걸이 한다고 해서 성도라 그런 거 속아 넘어갈 사람이 그런 바보가 없잖아요.
내 존재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 거기서 이런 걸 해야 된다는 게 자기 존재도 모르면서 이게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만약에 존재가 내 존재가 성도라고 잡았다가 정말 성도 아닌 반성도 같은 것이 나왔을 때는 그땐 당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해결하려 하느냐 말이에요.
우리교인 가운데 어떤 교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성령의 은혜로 내가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성령이 임해야 내가 예수를 깨닫게 되고 구출된 줄 알게 되어서 성도되는 것을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듣기로는 그 사람이 아이큐가 160이래요.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다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데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사실을 내가 안 믿으면 예수님이 구름 타고와도 내가 안 믿으면 나한테는 구름 안 타고 온 게 되잖아요.
그게 우리 배웠지요. 그게 피히테의 뭐라고 했습니까? 절대자아지요. 뭐, 한두 주 지나니까 다 빠져버리고. 왜 피히테, 셸링을 공부해야 되는지 알겠지요. 교인들에게 어떠한 질문이 터져 나올지 우리는 상상도 못합니다. 목사님 답변해달라는 겁니다. 우리는 다 공부했었어요. 했는데도 막상 응용문제 나오니까 응용문제 못 풀고.
제 답변은 이것이었습니다. 본인이 압니다. 했어요. 왜냐하면, 이거에요. 선풍기라는 것을 선풍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누구냐 하면, 내가 선풍기에요. 저거 선풍기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선풍기인가 보는 거예요. 돌아가는 거 맞네. 선풍기 맞다. 하는 거예요. 나를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선풍기라 하면, 관심이 내가 지목한 선풍기에 갑니다. 사물은 저거 시계다 하면, 시계에 갑니다. 사람들이 지시하는 대상이 대상에게 쏠릴 때는 그 대상은 본인들이 보면 그걸 파악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처럼 재림하십니다. 이거는 하나의 사물처럼 대상이기 때문에 누구나 바라보면 돼요. 그런데 그 사람은 뭐라고 질문했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내가 만약에 안 믿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한 것은, 지금 말하고 있는 나를 봐달라는 거죠. 예수님 재림을 봐달라는 게 아니고. 머리 잘 돌아가십니까? 그 정도는 아시죠.
그러니까 선풍기라고 했지만 내가 선풍기 아니라고 하면, 당신은 나에게 선풍기인 것은 어떻게 설득시키겠습니까? 그 이야기거든요. 그때 내 답변은 뭡니까? 본인이 압니다. 사물일 때는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본인이 이야기할 때는 제3자가 본인에 대해서는 관여가 안 되는 거예요. 관여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거는 본인이 스스로 알아요.
만약에 제가 여러분, 선풍기입니다 하니까 목사님, 선풍기 맞습니다. 선풍기 안 믿지. 실컷 약 올려놓고 지는 안 믿겠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서 난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아이고, 당신은 신자입니다. 실제로 난 안 믿지롱. 이렇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실컷 약 올려놓고.
나는 꿈에서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고 믿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오세요. 박수 치면서 앞에 나오세요. 여러분, 새신자 나옵니다. 하면 인사하고, 실제는 안 믿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나가면 그만 이라. 그만 이에요.
아버지 돌아가시는데 아버지, 마지막 사도신경 외우세요. 주기도문 외우세요. 아버지 장로기 때문에 달달달 다 외웠다. 목사가 와서 하나님이여, 이 영혼 받아주옵소서. 아버지 하는 말이, 나는 안 믿지롱.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 걸 다 외우는데 실제로 안 믿거든. 살짝 기분 나쁘려고 하네. 이것은 본인이 아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검토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피히테였다 말이죠. 아무리 남들이 천인, 만인이 백조는 하얗다? 이게 논리 책에 나오는데. 백조가 하얗다고 어느 놈이 이야기 하느냐 말이죠. 백조는 하얗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러면 모든 백조 조사해 본 적이 없어요. 765,645 마리 백조는 하얗지만 765,647번째는 까만 게 나오면 어떻게 할래? 안 되잖아요. 백조는 하얗다고 하면 안돼요. 이렇게 해야 돼요. 하얗지 않는 것은 백조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 말이죠. 이중부정으로 써야 되는 거예요. 하얗지 않는 것은 백조가 아닙니다. 만약에 765,646 마리 까만 게 나온다면 그건 백조가 아니다
철학가들은 논리에 대해서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따지는 겁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냥 일상 언어가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진리 찾겠다는 것이 그냥 5 키로 가고 됐다. 이곳이 천당이다. 돌아서는 사람이 아니에요. 갈 때까지 가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신은 어떻게 포착되는가? 갈 때까지 가보자.
이거는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 믿고 난 뒤에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기 위해서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이미 진리는 알지만 그 진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것을 이거는 성령에 의해서 점점 깊은 곳으로 가게 되지요.
하지만 그게 깊은 곳에 간다는 것이 슬슬 지가 망가지는 코스지만. 나중에 십자가에까지 가게 되고 내가 망했다. 내가 망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게 구원시켜 주는 거예요. 나는 망하며 죄인이며 모든 내 시도가 의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하지만. 일반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서 존재 문제에 있어서 여기 존재와 당위가 대립을 하면, 지금 헤겔을 보세요. 헤겔이 얼마나 성경진리와 신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보세요. 이런 존재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존재 따로 법 따로 에요. 존재는 법이 없고 존재 따로 법이 주어졌어. 이 법을 지켜야 돼요. 이 법이 칸트가 이야기하기는 최고선의 법이 있어서 도덕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헤겔은 166페이지 그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율법 종교라고 봐요. 이걸 율법 종교로 본 겁니다. 나는 새 사람 되었다. 이제 서서히 성경말씀 지켜볼까? 이거는 유대교가 낭패한 유대교가 실패한 율법종교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166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책 안 가져왔습니까?
[이 대립의 특징을 이제는 더 이상 순종의 외형으로 보면 안 되고 오히려 당위와 존재의 내적 구조에서 일어난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것 가지고 존재를 확인을 하려면, 존재자가 법을 지켜서 도덕이 되잖아요. 법 없는데 도덕이 있습니까? 법 없는 도덕이 없잖아요. 그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법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지요. 제일 중요한 건데 잘 한번 들어보세요.
존재자가 뭘 지켜서? 법을 지켜야 도덕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탐내지 마라. 하면 탐내지 말라는 법이 있어야 도덕이 나온다 말이죠. 그럼 내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확인하려면 뭘 해야 됩니까? 법 가지고 확인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죽으나 사나 어디에 메여 있습니까? 법에 메여 있는 거예요. 난 오늘 성경 몇 장 봤노? 나는 기도시간 오늘 몇 분 했어? 자꾸 법을 의식하고 법에 메이는 겁니다. 헤겔이 보니까 이거는 율법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예리해요. 신학자도 아니에요. 철학자에요.
법에 메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럼 목사님 법에 메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성화론 보세요. 성화론의 문제가 뭐예요? 나는 영생 얻고 구원 받았다는 것은 무엇에 호소해서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인합니까? 성경을 법으로 만들어서 그 법적인 관점에서 이런 법을 지켰으니까 나는 지금 성도 맞다. 법에 호소해서 자기가 성도임을 자꾸 확인하려고 해요.
만약에 법을 안 지키면 어떻게 돼요? 법을 안 지키면 자기가 성도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은 본인이 용납 안 하겠지요. 그렇다면 법을 안 지킨 것은 그 법 말고 세세한 법을 따로 만들어요.
예를 들어서 도둑질을 해 놓고 도둑질하면 이거는 성도답지 않잖아요. 도둑질한 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치꾼들이 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이건 내가 뇌물 받은 것이 아니고, 잠시 빌린 것이라고 하지요. 자기 합리화에 들어가지요. 자기 합리화하는 새끼 법을 또 만들지요.
자기가 하루에 성경 석장 읽는데 어떤 때는 한 장도 못 읽었어요. 그때는 마치 몸이 아파서 못 읽잖아. 그러면 새로운 법이 나오지요. 석장 읽되 예외 규정을 두는 겁니다. 뭐냐? 몸이 아플 때는 한 장 안 읽어도 읽는 걸로 해주는 거예요. 아프더라도 석장 억지로 읽을 때는 목사가 그렇게 될 때는 아프다는 것 때문에 두 장 밖에 못 읽은 사람을 치겠지요. 세상에 사람은 몸이 뜨거워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데 하루 석장을 못 읽어. 아무리 아파도 그럴 수 있어.
하다가 막상 자기가 몸 아파서 석장 못 읽고 나니까 그 사람은 이제 목사가 면제 해주는 거예요. 당신은 사면해줘 버려요. 왜? 자기가 당해보니까 안 되겠거든요. 사면해줘요. 그게 목사 나이 40대라면, 만약에 50대 되면 무슨 또 법을 만들어서 사면하던지 아니면 새로운 법을 정죄하던지 또 나올 거란 말이죠.
이거는 결국 유대교뿐만 아니고 인간 본성 자체가 칸트 이후의 본성 자체가 인간은 자꾸 어떤 법에 호소해서 자기 정당함과 자기 의로움을 가지고 그 정당함이 있는 그 보람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현재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라고 헤겔은 발견한 겁니다. 그럼 헤겔은 결국 인간 전체를 다 발견한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산다고요?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스스로 검열하고 자기가 스스로 심판하면서 때로는 자기를 정죄하고 때로는 자기가 의롭게 한다면서 제일 관심 있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행동 이웃 사랑, 봉사가 아니라 고아원 방문, 남한테 희생이 아니라 그거는 뭐의 핑계냐 하면, 내가 누구냐를 몰라서 그냥 날마다 자기 확인하기 위한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이란 말이죠. 이웃을 위한 사랑이 아니고 그게. 내가 저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니 나는 이렇게 착하구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러한 절차로서의 이웃 사랑을 동원해라. 동창생아, 동원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신한테 잘해 주고 남편, 아내한테 잘해 주는 것도 내가 개가 아니고 짐승이 아니고 참된 인간이다, 성도다. 라는 것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동원되는 거예요. 이걸 헤겔이 칸트의 철학의 허점을 발견한 겁니다. 그 칸트의 허점을 어디서 발견했느냐 하면, 바로 신학에서 발견합니다. 유대교회 율법종교가 왜 실패했는가를 통해서 아는 겁니다. 아주 참. 예리하기 짝이 없지요. 정말 뛰어난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아직까지 제가 던진 질문을 답변 안했습니다. 그러면 법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헤겔은 이렇게 합니다. 성경과 성경을 포기해야 되지요. 참 재미있는 게 성경을 포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은 봐 봤자 그게 뭐로 전환되느냐? 법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성경 자체를 포기하는 겁니다.
성경을 포기하게 되면 그거는 곧 그거는 신학을 포기하는 게 되고, 신학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포기하는 게 되죠. 그걸 포기하게 되면 나는 어디서 확인하게 되느냐? 나라는 것을 범위를 넓혀버려요. 넓혀버리면 계시가 특별계시, 성경에 메이지 않고 자연 계시로 나가버립니다. 전체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거예요.
못 들으신 분이 있어서 중요한 걸 다시 한번 해드리겠습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해도 괜찮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존재에서 행위가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거친다? 법을 거쳐서 나온다. 따라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 봐서 나는 성도다, 거듭났다 알잖아요. 그러면 알려면 행위에서 다시 존재를 알려면 뭘 거쳐야 된다? 법을 거쳐야 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맨 날 무엇에 얽매여 있습니까? 법에서 못 벗어나고 법을 자기가 만들어 쓰던지 성경 보던지 성경 봐도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들지요.
제가 아까 우리교회 성도 이야기했지요. 성경을 봐도 자기가 납득할만한 성경으로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뭐는 납득이 안 되더라? 만약에 성령께서 나를 거듭나게 해야 예수 믿는 건 인정하는데 그걸 진리로 법으로 인정하는데 하나 더 의심하는 게, 내가 만약에 이 법조차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도 새로운 법을 만든 거예요. 새로운 해석을 거기다 가미한 겁니다. 그럴 때 고민이 되서 찾아온 거예요. 저한테.
그게 데카르트가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해서 절대 주체사상이 데카르트부터 시작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실은 그런 질문은 누구다 다 할 수 있는데 그분이 좀 용감해요. 좀 솔직하고. 평소에 다 있었는데 이런 말하면 목사한테 이 믿음 없는 놈아. 지옥이 널 위해서 만들었다. 이런 소리 할까봐 겁나서 안 했는데, 가만 따져보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을 성령 때문에 내가 믿었다는 것을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 질문을 좀 더 나가면, 때로는 믿고, 때로는 안 믿을 때 믿을 때가 나냐, 안 믿을 경우가 나냐? 하는 그 문제가 생겨요.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머리가 두 개라고 생각한 겁니다. 머리가 아팠어요. 한 놈이 그 사람이 머리 아픈 쪽을 쏘아서 죽어버렸거든요. 그 머리가 오른 쪽을 쐈을까요, 왼쪽 머리를 쐈을까요? 사실은 머리가 하나인데 혼자 두 개라고 생각하니까 한 쪽을 아픈 머리를 치면 나머지 쪽은 깨끗하다고 봤는데, 사실은 머리가 하나였어요. 총 쏴버리니까 그 머리 하나밖에 없는 머리 다 날아가 버렸어요. 죽어버렸어요.
이런 경우가 우리가 매일같이 생깁니다. 절벽에서 널을 뛰었어요. 떨어집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 그 얼마나 공포, 곧 죽으니까 공포심이. 완전히 절벽에 떨어질 때 공포심을 갖고 있으면 진짜 죽는 거고, 죽어서 엎어져 있으면 꿈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서 엎어진 내 모습 볼 수 있다면 안심해도 괜찮은 거예요. 왜? 죽은 놈이 지 모습 못 보거든요. 그런데 떨어지는 순간엔 그걸 몰라요. 과연 떨어진 모습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이걸로 끝일까? 그건 몰라요. 이것을 연구한 게 라캉의 주체분열이라 하는 거예요.
자아에게 다 미루어버리면, 그 자아가 혼란스러워서 해답이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아를 대자연에 맡기자 하는 것이 셸링이었습니다. 그 셸링의 원칙에 따라서 똑같이 헤겔은 이 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법을 주는 성경을 치워버리고 성경 대신에 자연계시, 곧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역사의 발전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게 헤겔입니다. 역사의 발전.
교회 대신에 뭐가? 국가가 교회의 모든 도덕을 대신 해주면 되고, 이것이 옳다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게 되면 역사에 맡기면 되지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역사에 맡기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기는 역사보다 작으니까 자기는 역사 속에 맡기면 역사는 변하지요.
잘 들어보세요. 역사 속에 묻힌 자기도 변하지요. 변하는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나, 그때그때 달라요. 그러면 끝나는 거다 말이죠. 너, 왜 이런 짓을 했어? 법에 어긋나. 하면 나, 착한 일 할 수도 있어. 늘 그런 건 아니야. 이러거든. 그러면 그만 이란 말이죠. 역사한테 호소하면 그만이단 말이죠. 굉장히 편리하죠. 거듭나기 쉽죠.
헤겔에 의하면, 도덕에 얽매이지 말고 실제로 절대이성이 작용하고 있는, 그러니까 요새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죠. 하나님 은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이 역사의 흐름에 본인을 맡겨라. 헤겔식으로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이렇게 되지요. '내가 이제 역사와 함께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역사가 산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현재 헤겔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 한적하게 낚시 놓는 사람들. 한번 물어보세요. 그리고 살 뺀다고 유연 체조하는 아줌마들 물어보세요. 아줌마, 왜 삽니까? 그냥 세월 따라 살아요. 이게 이 이야기라고요. 고민 있습니까? 고민은 무슨. 나는 완전 내 마음이 천국이라.
그 사람들에게 제일 불쌍한 사람들 중 하나가 누구냐? 교회에서 목사 말대로 법대로 지킨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도 한때 교회 다녔지만 이제는 낚시 놓는다. 왜? 교회에서 나보고 죄인이라며. 죄인 같으면 잘 됐다. 교회 나와도 죄인이고, 안 나와도 되는 것 같으면, 나 나가고 싶은 낚시나 놓으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대자연 속에 나를 맡기리라.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복음 알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 숫하게 많습니다. 복음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은 헤겔을 공부 안 해서 그래요.
지금 피히테, 셸링, 헤겔 공통적으로 모로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유한에서 무한, 무한의 세계, 신의 세계에 가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그러니까 태양에 가까이 가면 뜨겁잖아요. 태양에 멀어지면 차갑고. 태양계에서 제일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제일 끝에 명왕성은 굉장히 추워요. 하지만 가까운데 수성, 해 뜨겁잖아요. 마찬가지로 무한에서 유한 가면 점점 의롭고, 유한에 가까우면 죄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게 바로 비복음적인 시발점입니다.
그런데 피히테나 헤겔이나 데카르트도 마찬가지고. 이 아마추어적인 냄새가 풍기는 복음을 모르는 철학자들, 신학자들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 성화론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보기에는 아마추어적이에요. 제가 문동환 목사 보고 아마추어적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살다가 교회 나오고 신에게 가면 점점 의롭다고 여기는 겁니다. 죄의 개념, 죄가 뭔지를 몰라요. 다만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악이 많으면 죄악하고, 선이 많으면 착하다. 이러한 기본 육적인 상식에서나 나올 그런 죄관을 가지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계시를 이야기하고, 신을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십자가 믿었다. 십자가 걷어 차버리고, 이제는 신에게 달려가세. 이게 뭔 뜻입니까? 이게 뭐냐? 점차점차 무한으로 가면 갈수록 기존에 보다 더 나아졌다. 이게 개혁주의의 진보관입니다. 이게 진화론 그렇게 싫어하지만 저거들의 진화론자에요. 진보론자에요. 점점 더 진보를 나타내서 진보를 보여주고 있어요. 진화, 발전, 성장. 몸을 자라게 하느니라. 맨 날 하는 게 에베소서 4장에 니 몸이 그리스도 몸이 자라게 하느니라.
그리고 씨앗. 대성교회 누굽니까? 박윤식. 씨앗이 뿌려지고 씨앗이 커지고. 당신은 얼만큼 커졌습니까? 이런 식으로. 가루의 서 말에다가 누룩 넣는 것, 기대 안고 심어놨더니 나무가 커지는 것, 하늘나라의 확장, 우리 내부의 확장, 외부의 교회 부흥. 전부다 교회 부흥하는 그런 데는 해석이 전부다 그따위 식으로, 지금 이런 식으로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166페이지 중간에 보면, 헤겔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도덕적 법률고문이 아니다.]
멋진 말이죠. 고문이라 하는 것은 누가 물어보잖아요. 고문님, 이 법은 어떻게 실천해야 됩니까? 물어보는데 예수님은 자문상담원이 아니에요. 고문이 아니에요. 아, 그 법은 이렇게 지켜라. 그거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사랑이라는 겁니다. 아까 헤겔이 성경해석 뛰어나다 했지요. 사랑이다.
그 뒤에 보면,
[사랑은 판결하지 않는다.]
야,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5장 21절 보면, “예수 믿는 자에게 이미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헤겔은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지금은 생명의 세계죠. 생명의 세계인데 온전한 생명은 아니란 말이죠. 다만 생명이 작용하고 이런 것을 우리가 감지할 뿐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그 최후 생명은 유한의 역사에서 무한의 세계. 헤겔은 역사의 끝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의 끝이 있으면 역사의 끝은 누구냐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샤르뎅의 이론처럼 헤겔도 그런 이야기죠. 진보, 날마다 시행착오해서 진보해서 역사 끝에 간다면, 지금 역사 끝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 끝에 있는 진리가 미리 앞당겨서 여기 도착하겠지요.
이걸 선취라 하죠. 미리 당긴다. 선취라 하는 것은 판넨베르그도 유명하지만 그 전에 판넨베르그 말고, 그 다음에 역사를 향한 가다머라든지, 하이데거, 특히 하이데거도 이야기했고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걸 신학적으로 판넨베르그가 선취란 이야기해서 유명해졌어요. 이게 몰트만 책에도 보면 선취란 말이 나와요. 미리 취한다. 십자가는 부활을 미리 취한다.
제가 석사학위 논문 보면 그림 하나 있어요. 이게 뭐냐? 십자가에서 재림 있다. 재림의 것이 미리 와서 당겨 본다. 이런 그림이.
미리 올 것 아니냐? 선취해서 미리 맛보게. 그러면 뭐라고요? 칸트는 뭘 주장했다고요? 법을 주장했죠. 그러면 이것은, 칸트는 법을 주장했지만 이것은 성경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허점이었다 말이에요. 율법종교의 대표적이다. 이러면 안 된다. 예수님은 뭐 한다? 판결하지 아니한다. 법률고문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버리고 뭘 하느냐 하면, 철학으로 나가야 돼요. 철학은 신학보다 더 크니까. 왜냐하면, 신학은 성경을 대상이지만 철학은 자연 전체에 대해서 연구하기 때문에 철학이 신학보다 월등하다. 그것이 그 뒤에 나와요.
166페이지, 일곱 번째 줄에.
[즉 사랑 안에는 많은 특수한 것과 갈라진 것이 총체가 아닌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 안에도 갈라진 것이 있지만 더 이상 갈라진 것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일치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이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했다. 그 사랑의 기쁨은 다른 이들의 생명과 혼합되며, 그것을 인정한다. 사랑이 곧 오성의 분리를 극복한다.]
뭐가 분리한다? 행위와 존재를 분리를 존재자가 있다, 그게 행위 해야 한다. 그러한 분리를 헤겔은 사랑 안에서 결합을 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나가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면 법이 되니까 내가 있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잘 들어보세요. 사랑이 나를 만들지요. 사랑이 나를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타인과 나는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다 같은 사랑이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랑 안에서 하나 된다고. 만약에 타인이 가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하느냐 하면, 사랑이 저만치 가네~ 모든 게 사랑이다. 모든 게 생명이고.
이것은 신학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습니까? 철학이 인간을 구원하는 겁니다. 성경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성경은 하나의 힌트를 줬을 뿐 예수님의 그 사상은 온전한 철학을 위한 하나의 힌트를 제공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헤겔은 신학을 버렸다 하지만 뭐는 버리지 않았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버리지 않았죠.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을 신학으로,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를 신학으로 해버리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칸트의 법이 돼버려요. 법이 되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헤겔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뭐로 보느냐? 사랑으로 그대로 이어내자는 겁니다.
하도 녹음이 자꾸 안 되서 집에서 녹음한다고 애를 먹어서 잘 해야지.
모든 것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나가야 된다. 완전히 복음주의자 중에서 이런 복음주의자가 없지요. 헤겔이. 그런데 여기에서 철학적으로 신학보다 더 큰 철학적으로 뭉쳤으니까 거기서 사람들이 헤겔의 주장을 뭐라고 반대하겠습니까? 반대를 헤겔은 의식하고 있어요.
그것은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주관적이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사랑한다고 이 선풍기가 에어컨 됩니까? 그렇다면 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요. 선풍기에다가 나는 너한테 명하노니 에어컨 되어라. 전부 에어컨 다 돼버리면, 전기값 더 나오겠지만.
객관적이라 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내가 어떤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객관이 객관으로 안 변하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내 주관 상관없이 변하잖아요. 이거 철학적으로 해결해야지. 철학적으로 해결할 방법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뜨겁게 믿는다. 그러니까 성화론에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내 안에 예수 있으면 내가 곧 예수이다. 이 말입니다. 간단한 논리에요. 이거는 기존 불교에서 기독교를 그렇게 보는 거예요. 부처를 믿지 말고 내가 부처인 것을 믿어라. 이 말 아닙니까? 이제는 예수 믿지 말고 내가 예수인 것을 믿어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한테 내가 묻지요. 흔히 말하는 주관적이다. 하는 것과 통하는데. 예수님이 t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해가 어두워졌고 캄캄해졌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설쳐 댔지요. 맞지요?
그러면 내가 무덤가에 가면 죽은 사람이 일어납니까? 해야 흐린데 좀 맑아져라. 맑아집니까? 누구는 무 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뿌리 먹고. 나 고난 받으면 천지가 깜깜해집니까? 대자연이 바봅니까? 지금도 해와 달은 하나님을 고요하게 소리 없이 지금도 찬양하고 있는데. 별아, 멈춰라. 하면 멈춰집니까? 별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디서 온 뼈다귀고, 이게.
주관적으로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대자연은 제 말 듣는 것이 아니고, 주님 말씀 듣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어요. 참, 황당 시추에이션이지만. 황당한 일이지만. 하지만 자기를 바라볼 때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꾸중해서 잔잔케 했습니다. 지금 바다 한번 실험해 볼까요. 잔잔해 지는가. 대자연이 누구 말 들어요? 내 말 안 들어요. 아무리 믿음 좋고, 복음 알고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해도 물론 사랑하겠지요.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내 말 안 들어요. 안 듣습니다. 주의 말씀만 듣습니다.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면 헤겔이 진정 내가 왜 죄인인가를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해야 될 텐데 칸트도 마찬가지, 헤겔, 피히테, 셸링 다 마찬가지. 오늘날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십자가에서 죄를 끄집어낼 때 잘 보세요. 아까 집사님 말이 맞아요. 십자가 있다면 십자가 보기 전에 인식론 문제인데, 내가 십자가는 성경에서는 죄를 대신한다. 이 죄의 개념은 이미 선악적으로 알고 있는 죄의 개념 그대로 이 죄의 개념을 가져가서 그 죄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백날 천 번, 만 번 거쳐 가도 이 사람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 죄 때문에 용서 받았다고 그거 이용할 뿐이지, 달라진 게 없어요. 진짜 십자가의 죄를 아는 사람 같으면 뭐냐 하면, 예수님 고백이 나와야 돼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쳤던 것이 그대로 나와야 됩니다.
나는 버림받고 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은 구원받고. 이게 그 사람의 능력 속에서 자기 능력이 아니지요. 어느 미친놈이 지가 버림받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는 낯선 능력, 진짜 십자가를 제대로 믿은 자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은 선물이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온 사람은 나는 버림받아도 좋으니 너는 구원 받아라. 하는 그러한 희생정신이 나와 줘야 됩니다.
그거는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기존의 개념의 죄관에서는 나오질 않아요. 진짜로 예수님 살아계셔서 그 사람에게 뭔가 십자가의 능력을 집어넣을 때에만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죽을 때까지 죄인이며 다만 내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 구원하라고 내가 지금 살아간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나와요. 거기에 무슨 성화론이 나옵니까?
제가 복음 회복의 책이 있지만 성화론이 주의 은혜로 성화된다면, 이거는 성령님의 성화론이지, 내 성화론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훌륭하지 내가 훌륭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그 성화론은 뭐냐? 성령님의 성화론이에요. 그러니까 성령님의 성화론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잖아요. 처음부터 거론하고 있는데 무슨 성화론이 됩니까? 그러니까 애초부터 성화론 없는 거예요.
내가 잘나서 성화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성화된다 하는데도 성령론을 무시한다 한다니까. 그러면 성령의 성화론이지 니 성화론이 아니잖아. 그러면 성화론을 왜 거론하느냐 말이죠. 이게 복음 회복 책에 나와 있어요. 벌써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것도 하나 극복 못해서 개혁주의란 이름으로 떠들어대고. 기가 찰 지경이죠.
이천우 목사님이 이제 아, 그게 문제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저보고 하데요. 개혁주의 성화론 보통 문제 있는 게 아니야.
주관적에 빠져버리면, 결국은 내가 예수가 돼버립니다. 날 건드리면 저주받아요. 이래서 목사 돼버리면 교인들에게 자기가 교인보다 한 수 높은 게 되고, 그러면 그건 단체로 가운 걸쳐서 맞춰야 돼요. 전부다. 어디 목사하고 놀아.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높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신앙심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되죠.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는 아니에요.
이게 셸링이 164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나옵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닌 그것에서 발생한다.] 셸링에 나와 있다고요.
[실재는 이중적인 어두움을 갖고 있다.]
이미 셸링은 이 점을 알았어요. 알았는데 헤겔은 뭐냐 하면, 사랑, 절대적으로 나가버렸지요.
자, 그렇다면 헤겔의 남은 과제는 뭐냐 하면, 그 사랑을, 오늘 강의 제일 먼저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헤겔의 관심은 어디 있다고요?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뭘 만들자? 완벽한 국가 만들기 했죠. 그렇다면 신 뜻은 이제 알았지요. 유대교적 법적인 체제가 아니고, 사랑이에요.
그럼 사랑공동체 가지고 뭘 만들어낸다? 국가를 만드는데 이 국가는 절대 나중에 역사 끝에 만날 절대 예수님 앞에 만나도 부끄럽지 않는 국가가 되겠죠. 사랑공동체. 이 사랑공동체 앞에서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어떤 인간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그 안에는 전부다 주님의 사랑의 들어있기에 그 사람은 사랑공동체가 국가가 어떤 법을 실시할 경우에 국가가 실시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마음을 다 안 알아도 사랑으로 역사할 때는 그것이 개개인 속에 다 파급이 되고 실효성을 거둔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완벽한 사랑공동체, 교회보다 더 큰 범주의 교회. 그러니까 최고의 큰 교회를 뭐로 보느냐 하면, 국가로 보는 겁니다.
헤겔의 이런 사상 이후에 교회가 그나마 담당했던 구제라든지 자선 이 문제는 이제는 국가 효율적으로 처리해 버려요. 법적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국가가 뭐 법을 초월해서 사랑 해 놓고 왜 법으로 합니까?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법은 그게 법이 아니고, 사랑이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13장에 보면 나오지요. 니가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칼을 잡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다. 그 사람들은 뭐하기 위해서? 착한 사람들에게 상주고, 나쁜 짓 한 사람들은 벌을 주기 위해서 했다. 그 로마서 13장 그걸 뚝 떼어내서 사랑에 의한 목적에 의했더라면 나머지 실천은 어떤 폭력도 폭력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어제 대구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게 좀 달라요. 자연법을 주장하는 사람, 자연법을 헤겔은 사랑으로 봤지요. 자연법은 뭐보다 크다? 특별계시, 성경보다 더 크다. 성경에서 교통정리 못하고, 교회에서 교통정리 못하고 교회가 환경조사 못하잖아요.
누가 해야 된다? 국가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국가에서 하는 일은 교회에서 하는 일보다 더 크고 국가가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되죠. 이러면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철학이지만 교회는 기껏 성경 가지고 하는 것이니까 성경보다 철학을 따라가야 된다. 이걸 헤겔이 주장하는 겁니다.
자연법은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어떤 경우에도 성립하다. 가능하다. 그 다음에 실정법적 실정법은 뭐냐 하면, 수단이 정당하면 목적이 어떻게 됐든 그것은 정당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이거는 전두환 예를 들면 돼요. 전두환이 대통령된 것은 국가가 투표해서 부정이든 어떻게 됐든 간에 나온 사람들은 다 체육관 대통령이잖아요. 체육관에서 몇 퍼센트? 99.7퍼센트 했지요. 몇 퍼센트 반대는 안하고 그때 통일주체국민회의 만들어서 했잖아요. 하여튼 대통령 됐잖아요. 됐으니까 수단이 정당했기 때문에 정당한 수단에서 나온 전두환이 무슨 행동을 해도, 돈을 1600억 착복해도 그건 뭡니까?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 일. 당한 거예요.
그런데 천주교는 그렇게 보지 않고, 천주교가 정의실현 반대 했잖아요. 뭐냐 하면, 목적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전두환이가 아무리 투표하고 해도 뭐 해도 장충체육관에서 뭘 해도 노태우도 그거는 반대한다. 이게 천주교의 주장이에요. 목적이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기의 체제를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천주교의 이런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남북통일 갈리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미국이 한민족의 일에 외세가 이라크 공격한 미국 있잖아요. 미국이라는 타국가가 한민족이라는 단일공동체에 개입해서 분단국가로 남으니까 미국이여, 떠나라! 맥아더 동상을 떼어내는 거예요. 그거는 침략자에요.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지.
미국은 날아가 버리고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끼리 하는 이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미국의 앞잡이인 현 국가에 허가받지 않고 미국을 통해서 또는 동독을 통해서 나는 북한에 들어간다. 황석영 같은 경우에. 이게 뭐가 나쁘냐? 또 거기 가서 태극기 흔들었던 여대생 있지요. 임수경. 임수경, 그 사람이 이혼했다 하던가 하지요. 애가 죽었다 하던가? 하여튼 있어요. 교통사고 났다던가?
임수경이나 황석영 이런 사람은 뭐냐 하면, 내가 미쳤다고 미국의 앞잡이 국가, 이건 대리국가지요. 전 민족 한글 써. 미국은 영어 써. 우리는 같은 혈통이야. 단군의 혈통이야. 목적이,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제가 지금 황석영, 임수경을 옹호하는 게 아니고 천주교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주교는 뭐냐 하면, 생명, 자연법을 위주로 하거든요. 자연법은 뭐다? 법은 뭐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은 어떤 것도 그 정당한 목적을 위한 것을 막아서는 어떤 외부적인 수단은 나쁜 수단이 되는 거예요. 왜? 목적이 정당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천주교가 석가탄일날 절에다가 플래카드 걸치는 것을 개신교가 왜 반대하면 안 됩니까? 불교나 천주교나 다 한민족 아닙니까? 그게 헤겔의 사랑이잖아요. 사랑하겠다는 걸 종교교리가 막을 수 없다는 거예요. 다같이 신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생명은 선하다고 했어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해요. 존재하는 자가 존재하는 자끼리 만나서 선을 추구하는데 여기에 무슨 예수의 교리가 기독교의 교리가 필요하냐 그 말이에요. 그저 축하해 주고 사랑받고 이럴 때 우리 민족은 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민족, 선한 민족. 참, 니가 종교의 벽을 꿰뚫은 그것도 희생적으로 남의 욕먹어가면서도 플래카드 걸었으니까 참, 착하고 충실한 종아, 니가 백배나 하늘나라 상을 받으니라. 그렇게 되는 상 받는 길을 왜 신부가 목사가 반대한다고 안 하겠어요? 하죠.
이야기 이렇게 쭉 들어보니 세상에 같은 성경책 펴고 같은 교회 다니고 같은 예수 믿고 해도 지 성격 따라서 지 성질 따라서 전부다 지 마음대로죠. 결국은 이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한 행동이 정당함을 위해서 성경의 해석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아까 제가 한 집사의 질문. 내가 예수 믿는 걸 정당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 또한 주님이 주신 복음이 아니라고 봐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예수 믿는 자격도 안 되는데 이게 웬 은혜냐?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다니 이건 내 주제에 넘는 이건 큰 행운이다. 이럴 수가 없어. 나는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거야. 그런데 왜 주께서는 날 이렇게. 난 너무나 그것만 생각하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나와 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령의 열매, 온유와 화평, 자비가 맺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남들에게 자기 자랑 안 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된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한 진짜 성도의 참 모습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러한 참 모습입니다. 라고 성경에 이야기하면서도 이런 공부, 이런 어려운 공부, 피히테 철학, 셸링 공부해야 될 이유는, 그렇게 그 내 심정과 똑같네. 똑같네 하면서 자꾸 관심사가 딴 데로 흐르는 그 내막을 논리적으로 원천적으로 다 소개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러한,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만 철학 공부할 이유가 뭐냐? 죄가 온 방면에 철학이고 뭐고 온 방면에 그 치밀한 논리성을 가지고 마치 안방에 보일러 깔리듯이 전 방면에 다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비복음적 논리들이.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그걸 전부다 죄라고 규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하나님의 저주를 이길 수 있다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겁니다.
아직까지 우리 공부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뒤에 얼마 안 남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얼마 안 남은 것이 앞에 있는 것보다 내용이 더 깊어요. 뒤에 몇 페이지 안 남았지만.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까지 계산해야 되는데. 이것하고 오늘 마치겠습니다.
헤겔이 잘 한 번 들어보세요. 사랑의 공동체를 실시하고 뭐 한다? 국가가 되면, 반드시 여기는 정치적인 논리가 다시 여기 투입돼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각을 못 갖기 때문에 대의정치, 대신해서 의사를 펴는 대의정치, 의회정치. 의회정치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돈 가진 자가 돈 가진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이 의회입니다. 자기 손해 보는 법을 제정 안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하여튼 그런 당이 힘을 합할 때가 있어요. 따로따로 힘을 때가 뭐냐 하면, 농촌출신 국회의원 되면 쌀값 반대할 때는 이거는 초당적으로 연합해서 하다가 다시 헤어지고, 저거 당 할 땐 저거 당 하고, 여성 피해 있을 때는 여성 의원들 모여서 반대하다가 헤어지고, 또 국회의원 봉급 올릴 때는 너나할 것 없이 100% 찬동해서 올려버리고. 자신의 이득과 연관돼요.
그런 실제적으로, 그래서 헤겔이 요구하는 것은 정치인들이여,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으라! 이렇게 나옵니다. 요새 말하면, 목사들이여, 예수님의 사랑을 구현하시오. 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에요. 정치가들을 가지고 뭘 만드느냐 하면, 성직자 수준으로 올려야 된다. 그래야 나라꼴이 된다. 하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헤겔의 어떤 의미에서 이상주의. 그런데 헤겔은 이런 이상주의에서 깊이 들어가서 그러면 이 성경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것은 사랑을 실천한다.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희생자 되기를 원하지요. 정치인들이, 대통령이 희생자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자기는 희생 안 하면서 지도자들은 리더는 희생되어서 자기가 득을 보기를 원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나오기를 간곡히 기다리는데. 그런 사람이 누구냐? 고건, 박근혜, 이명박. 그거는 취향 따라 찍을 거예요. 취향 따라 찍을 겁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뭡니까? 나는 썩어빠져도 나는 폭탄주 먹고 2차, 3차 가더라도 우리 대통령만큼은 쌍꺼풀 수술도 안하고 월급 주는 것 월급만 하고, 자기는 가정은 이혼하고 개떡 같이 해도 대통령 가족은 이혼도 안 하고 모범적이고 자기는 남한테 조그만 것도 다 요구를 하면서도 온 국민이 요구를 해도 인자로서 다스리시는 덕치의 정치를 하기를 원하는 대통령, 그 대통령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정치꾼들이 백성들이 원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걸 위장하면서 할 수가 있지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이회창. 깨끗하고 정의롭고 해놓고, 수백억 받고 처먹고. 월급 가지고 못 사는 모양이라. 왜냐하면, 정치해서 땅 투기 안 하는 놈 없는데 저 혼자 깨끗한 척하면 나중에 나가버리면 남는 게 퇴직금 밖에 없잖아요. 부끄럽잖아요. 품위가 안 살아. 품위가. 본인은 38만원 밖에 없다. 통장에 38만원 밖에 없다는 인간이 불교 종정 죽으니까 제일 큰 화환 갖다 붙여놨어요. 38만원 주고 어떻게 그걸 삽니까?
결국 여기서 이상적인 국가는, 하여튼 헤겔은 이 실정을 알아요.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상호인정, 상호위선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요. 알면서도 적어도 이상적인 목표는 있어야 된다.
목표가 뭐냐? 국가는 예수님의 사랑을 공동하는데 리더십은 반드시 예수님처럼 희생할 그분이어야 한다는 그러한 목표. 적어도 정답 정도는 이렇게 내린 겁니다. 이게 헤겔의 이상주의인데. 바로 이 헤겔의 이상주의가 오늘날 순진한 교회의 교인들이 목사한테 그걸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러한 깊은 논의를 통해서 한번 검토해 보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사랑이 좋긴 좋지만 실제로 그 사랑의 능력이 저희에게 도달되어야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오니 이 안의 우리들을 주의 십자가 복음만을 위해서 쓰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