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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가 있는 숲길 원문보기 글쓴이: 구절초#
500년 이어져온 삶의 터전 名家 마지막 발자취 '오롯이' | ||||||||||||
8. 문화류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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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유주 문화로 지명 바꿀정도 영향력 흥덕사 백제무덤군 발굴로 세거지서 이주 "서기 1400년쯤 조선 건국초 선조 휘 소께서 이조판서로서 조선왕조에 치사하시다가 청원군 옥산면 수락리에 낙향하신 후 그 손 휘 효달 재령군수께서 1500년쯤 청주시 신봉동에 터를 잡아 근 500년간 존속하다가 시대 변천으로 부득이 지속할 수 없게 되어 류씨의 터전이란 조상의 얼을 남기기 위해 여기 이 회관을 건립하고 종원의 구심체로써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이 글을 남깁니다. -1989. 7. 문화류씨가속종친회 문중일동.-" 흥덕대교 사거리에 있는 흥덕예식장 앞에는 윗글이 새겨진 큰 비가 있다. 문화 류씨가 살았다는 세거비다. 이 짧은 글속에는 문화 류씨가 청주와 인연을 맺은 시기와 세거지 형성, 그리고 500년간 이어온 터전을 잃은 문중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성리학의 뿌리를 내려 도내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며 지역 정치무대에서 명문가로 자리잡은 문화 류씨. 황해도 문화를 본관으로 한 그들이 어떤 연유로 충북에 뿌리내리게 되었고, 또 어떤 연유로 세거지를 지속할 수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연원을 살펴보면 문화 류씨의 가장 윗 조상으로서 기록에 나타난 이는 시조 류차달이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신라말부터 고려초의 인물로서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서 큰 부(富)를 지녔던 지방 호족(豪族)이었고, 그 부를 기반으로 왕건의 삼한통일을 도와 고려의 공신이 되었다 한다. 황해도 유주를 문화로 지명을 바꿀정도로 영향력을 지녔던 이들은 지명에 유주의 선비유(儒)와 문화의 글월문(文)에서 높은 학문을 지닌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유추하고 있다. 지방 호족이었던 문화 류씨가 청주로 입성한 연유는 당시 결혼 풍습과 관련 있다. 장가를 가면 처가에서 살아야 하는 당시 혼인 풍속으로 류소는 고려말 명문가 김사겸의 둘째 사위가 된다. 그는 청주 오근장 장인 집으로 이거하며 청주에 처음 뿌리내린 낙향시조가 된다. 류소는 처가의 후관으로 출세가도를 걷게 되는데, 목은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으며, 동문수학한 길재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당대 석학들과 교우하면서 류소는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친다. 하지만 조선의 개국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그는 고려 신하로서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키며 청주 옥산 수락마을로 낙향한다. 슬하의 자녀 8남매를 두었으나 장남 류지인과 세째 아들 류지례 자손만이 남아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를 중심으로 오창면 양청리와 보은군 산외면 일원, 청주 운천·신봉동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 중 청주 운천동에 세워진 세거비에 나타난 "효달 재령군수께서 1500년쯤 청주시 신봉동에 터를 잡아 근 500년간 존속하다가 시대 변천으로 부득이 지속할 수 없게 되어…"라는 사연에는 직지와 연관이 깊다. 택지개발로 실시된 운천·신봉동은 공사도중 흥덕사와 백제무덤군이 밝혀지면서 유적지로의 보존이 요구됨에 따라 일족이 세거지를 떠나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세거지에는 현재 고인쇄박물관과 백제유물전시관으로 연결되는 문화축이 형성되어 청주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인물 & 인물 류차달, 왕건 도와 삼한통일 고려·조선시대 걸쳐 많은 인물 배출 명문가 지방 호족이었던 문화 류씨는 시조 류차달이 고려 개국공신이 되면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잡는다. 류차달은 개국공신으로의 벼슬이 대승에 이르는데,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는 "태조 19년, 대승공께서 그곳을 갔다가 신라의 박혁거세와 박제상을 모신 곳이 황폐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동계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 고종때 인물 류경은 문장에도 뛰어났지만,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공로로 유주였던 그의 고향이 문화로 바뀌고 현으로 승격되는 계기가 된다. 청주로 처음 이거한 류소는 고려 전서와 이조 판서를 지내며 정치를 관장했으며, 그의 장남 류지인은 효와 청백을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 후손들은 물론 효에 뿌리를 둔 문중의 자랑이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위화도회군으로 조선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좌의정 류만수와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고 나라에 공을 세운 영의정 류정현이 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 중 하나인 류성원, 남원 부사로 재직 중 광한루의 단청을 말끔히 단장하고, 백성들에게 밤나무를 심게해 생활고를 해결하도록 도왔던 류지례는 지금도 남원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유명인물이다. 효와 충의 정신은 일본강점기 창씨개명 거부로 이어진다. 당시 보은 산외소학교 2학년이었던 류흥렬씨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끝까지 지킴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잘 모르지만 개명을 안한다는 이유로 받은 억압은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그는 "창씨개명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장도 빼앗기고 담임선생님한테 불려나가는 것은 예사였으며, 결국 이 때문에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고 들려줬다. 성리학 집안으로 악한 짓을 한 선조가 하나도 없을 만큼 선비 가풍이 후손들로 이어지고 있는 문화 류씨. 현재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중 인물에는 류용기(전 청주시장),류태기(청주시교육장), 류진열(전 청주시의원), 류호담(충주시의원), 류근중(동림건설), 류인혁(대종친회이사), 류두혁(전 청주시의원), 류성룡(변호사), 류정아(시의원) 류인승(전 괴산부군수), 류장혁(산림청장), 류경혁(한국방송공사국장), 류인철(한국전력공사),류재덕(성모정형외과원장), 류장현(전 제천보은부군수),류정만(한의사), 류재만(발명가), 류귀현(청주 화물터미널 회장) 등이 있다. |
첫댓글 위글에서 등장하시는 분들을 파별로 분류하여 주시면 문화류씨 변천사 탐구에 더 좋은 자료가 되겠습니다. 물론 파란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분류된 것으로 당시에는 파가 없었지만 수고 스럽겠지만 파별로 분류해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대종회 홈페이지 관리에 수고 하시는 재균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문평군파에 대한 기록이나 문평군파가 아닌 분들이 몇분 등장 하는데 기자가 글을 쓸때 문화류씨 종중사를 발췌 하여 쓴 것 갖습니다. 문중 어른들에게 여쭈어 보고 분류를 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