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즉위 이전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 포메른의 슈체친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루터교의 세례를 받고 조피 아아구스테 프리데리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남동생이 2명 있었는데, 위의 남동생은 12살에, 아래의 남동생은 태어나자마자 곧 사망하였다. 조피의 아버지는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공작이며, 어머니도 프로이센의 지방 귀족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더 베토이며, 스웨덴의 홀슈타인 고트로프 왕가의 일족이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교양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조피는 2살 때부터 프랑스 출신의 위그노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소녀로 자랐다. 승마도 능숙했지만, 음악 실력은 별로 좋지 못하였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녀는 사람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피는 수려한 외모에 요염한 숙녀로 자라났다.
본래 가문의 명성으로 봤을 때 도저히 대국의 황후 후보에 오르내릴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어머니 요한나의 요절한 오빠 카를 아우구스트가 러시아 제국의 여제 엘리자베타와 약혼자였던 인연이 있어, 조피는 14살이 되던 해인 1745년에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권자인 대공 표트르와 결혼하여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 뒤 대공비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독일 태생이었이 때문에, 표트르에게 있어서는 우선 독일어로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던 것 같다.
비록 러시아 문화에 서툴렀지만,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어를 습득함은 물론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교파를 바꾸는 등 러시아의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데 반해,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표트르는 독일풍을 계속 고집하여 독일식의 군인 놀이에만 열중하여 주위의 반감을 산다.
불행하게도, 표트르가 심각한 남성 능력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다. 훗날 표트르는 수술을 받아 간신히 부부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무렵에 이미 예카테리나는 다른 남성들과 공공연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미래의 황후라는 대의명분으로 묵인했다고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표트르도, 유력 귀족의 딸 보론트바를 총애하게 되어, 부부 관계는 완전히 파탄 상태가 되어버렸다.
표트르 3세의 평판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자, 1762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남편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3세는 제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되었다.
재위 기간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가장 시급하게 당면한 문제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저항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다른 하나는 군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 수행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녀는 먼저 입법을 논의하기 위해 입법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은 러시아 제국 전 지역에서 성직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계층의 대표자인 564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국가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입법의 틀을 기초하기 위하여 예카테리나 2세는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와 베카리아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참고하여 계몽 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이상적 정부 구성의 요건인 3권 분립 이론과 같은 권력 행사의 제약 요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러시아의 전제군주주의 원칙 수호에서는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은 결과를 낳아 입법회의 소집 의의는 빛을 잃고 말았다. 또한 지주 계급에서도 노예에 대한 권한의 내용을 명시하여 실질적으로 무한대에 가까웠던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의도에 필사적으로 반발했다. 이같은 충돌로 입법회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위원회가 구성된 지 2년도 채 안 되어 해산시키고 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녀는 지배 계층과의 투쟁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쪽을 선택했다. 즉 몰수했던 교회 영지와 황실 영지 중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농노와 함께 신하들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즉위 전에는 농노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지역에도 농민들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농민 정책은 그녀의 기본 노선이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는 사실상 농노제의 발달과 확장이 절정에 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은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 정치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처음 착수한 계획은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민족 및 우크라이나 민족의 주거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자신의 2번째 손자인 콘스탄틴을 새로운 그리스 제국의 황제로 앉히고자 하였다. 이 계획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넓히는 데 있어서 그녀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을 이용했다. 즉 1768년부터 1774년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성당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 관리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한 상업을 목적으로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영해 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1722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으로 폴란드 분할에도 가담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혁명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다.
말년
1767년 입법회의의 실패를 겪고 난 그녀는 영국인 블렉스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지방의 행정적 개혁에는 프랑스보다 영국의 예를 많이 적용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에는 진보적인 성격을 띤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을 선호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책이 빠른 속도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러시아의 계몽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 내의 보건주의적 폐단과 전제주의의 폐단과 지주들의 잔악함에 의한 하층 계급의 고통에 대해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몽 군주로서 명성을 얻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이때 이들의 작품을 관심 있게 읽었으며, 궁전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녀는 서유럽보다 훨씬 뒤쳐져 있는 러시아를 문명 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힘썼다. 그래서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고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던 1773년 그동안 쌓여왔던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쌓여 푸카초프를 중심으로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이 농민 반란은 농노제에 대항한 가장 큰 봉기였다. 그 여파는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농민들은 푸카초프를 환영할 태세를 갖추는 위험한 사태에 이르렀다. 많은 도시를 점령했으며 주력 부대가 오렌부르크를 포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푸카초프 군대를 저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74년 4월 부분적으로 반란군을 격파할 수 있었고 여세를 몰아 푸카초프 주력부대를 우랄 지방으로 일단 퇴각시켰다. 그러나 타타르족, 마리족 등이 합세한 바시키르 기병대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자 정부군이 급파되어 푸카초프 군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반란군은 수천 명의 병사를 잃고 결국 패배하게 되었으며 바시키르 기병대는 우랄 연방관구 지역 너머로 급히 도주했다. 이 봉기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봉하고 있던 계몽 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반란에서 나타난 잔인성에 크게 충격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러시아에 도입하려 했던 자유 사상을 강력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고 호소했다. 1793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관계를 단절하였다. 1796년 67세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사망하였다
한편 그녀는 정신이 불안정하던 아들 파벨과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는 편애하면서 그에게 계몽주의적 교육을 시켜 차기 후계자로 양성시켰다. 그녀는 알렉산드르가 파벨을 대신해 제위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알렉산드르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첫댓글 제일 중요한 사진은 왜 없는 겁니까?
햇스빈다
음..... 으음.... 어쩔 수 없는 군주주의자군요... 그닥.. 그냥 폴란드지방과 여하튼 영토확장밖에 없다고 생각되는군요.
이분에 대해서는 남성편력이 기억에 남는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