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색 구두
이 효순
늦가을로 접어들어 해가 일찍 지니 밤이 참 쉽게 온다. 원거리 통근을 하다보니 운동할 시간이 없다. 부족한 운동을 보강하기 위해 퇴근할 때 걷기로 했다. 퇴근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힘이 든다. 그러나 나와의 싸움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청주신한은행 앞에서 내려 청주대교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은 30분이 걸린다. 다리 난간에 곱게 핀 꽃을 보며 가는 길은 마음에 쌓인 하루의 피로를 모두 풀어준다. 그리고 사람 사는 모습들을 보며 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이렇게 걷기 위해 신발은 편한 것을 골라 신고 다닌다.
우리 집 현관입구의 신발장엔 10여년이 지난 낡은 구두가 여러 켤레 있다. 그 중에 제일 즐겨 신는 것은 카키색 구두다. 카키색 구두는 굽이 낮아 발이 편안하고 디자인이 단순하여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며칠 전 상가(喪家)에 문상을 다녀온 후 출근길에 구두를 보았다. 왼쪽의 옆 부분이 찢어져 있었다.
주로 정장을 입고 다니는 내겐 고민이 생겼다. 그 구두와 세트인 옷이 몇 벌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이 편하여 며칠동안 신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구두의 찢어진 곳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상가에서 누가 밟았는지 미운 생각만 들었다. 자꾸 내 눈길이 그곳에 머물렀다. 통근 길에 가끔 들르는 양화점에 수선을 부탁하니 할 수 없다고 하며 이제 그만 버리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구두를 쉽게 버리기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발과 정도 들고 편안한 구두인데…….
하루 날을 잡아 구입한 곳을 알아보니 몇 달 전에 문을 닫았다고 했다. 주변에 있는 백화점으로 연락을 해 보았다. 마침 매장이 있었다. 찢어진 구두를 들고 갔다. 매장 점원은 수선을 한번 부탁해 본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찢어졌던 구두가 새 것처럼 바뀌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찢어졌던 부분을 어떻게 수선을 잘했는지 새 구두 같았다. 어찌 생각하면 궁상맞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 발에 편안한 신발이 좋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매장 신발이 너무 비싸서 구경만 하였다. 어느 날 그곳에서 할인판매를 한다고 했다. 매장에서 보니 모두 높은 굽에 디자인이 복잡했다. 한참을 살피다 사이즈가 작아서 한 모퉁이 맨 아래에 방치된 구두가 눈에 띄었다. 발 중간 부분에 끈이 달린, 내가 생각한 모습의 구두였다.
나는 그 구두를 살펴보았다. 225미리 내 발에 꼭 맞는 치수였다. 점원은 작아서 제외시켰던 상품을 팔게 되어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상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친절하게 해 주었다. 집에 가져와 신어보니 고등학교 학생 단화와 비슷했다. 진한 카키색이 한참 유행하던 시대에 제작된 것이라 구두빛깔도 검정에 가까운 카키색이었다. 마침 정장이 카키색이 있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여 참 잘 신었다.
구둣방 점원은 지난번에 수선을 맡길 때 몇 번이고 아주머니처럼 구두를 신으면 자기들은 다 굶어 죽겠다는 농담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구두를 구입하여 신다가 낡으면 몇 번씩이고 수선을 하게 되니 말이다. 창이 낡으면 창을 갈고, 굽의 피에 상처가 나면 굽 피를 갈아 신는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구두는 낡아간다. 그렇지만 발이 편안해서 그 구두를 자주 신는다. 그렇게 수선해서 신는 적이 꽤 오래되었다.
요즈음은 너무 쉽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 마음도 수시로 변하고 사용하던 물건도 유행이 지나면 모두 생각도 없이 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발, 쓰던 물건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자식, 남편, 부인등 가족도 버린다. 새것만 좋은 것이 아닌데……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분분들을 채워가고 가꾸어가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구둣솔을 꺼내 수선한 카키색 구두를 윤이 나게 닦는다. 내일은 단풍이 곱게 깔린 가을 길을 걷고 싶다. 늘 곁에 있는 남편처럼 편안한 카키색 구두를 신고.
첫댓글 옷이나 구두가 유난히 만만한 것이 있더라구요, 선생님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시길...^ㄴ^....
"아나바다"로 하시죠~
쉽게 버리는 세상에 알뜰함이 돋보이는 교훈을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알뜰함은 + 절약 + 부자 + 여유 + 행복= 선생님 잘읽고 갑니다. 건강 하세요.
정감어리는 글입니다. 선생님의 마음을 몰래 훔쳐보고 돌아가는 기분처럼 즐겁습니다.
소박한 인상을 받고 갑니다.
반가움과 감사한 마음. 구두 한컬레. 등산화 한컬레. 케주얼화 한컬레 모두 십년이 넘게 창갈고 굽갈고... 어제 여동생이 내 오랜 신발이 걸렸는지 몇 문 신느냐? 색은? 오늘 아침에 그오랜 캐주얼 신발을 보며 새것을 사오면 저 것을 어쩌나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 수선하여 좀더 신다가 잘 보관하려 합니다. 버리지 않는다고 아내가 불평을 하겠지만.
오래신어 발이 편안한 신발이 홀대를 받는 경우는 허다하지요. 이작품을 통해 선생님의 고운마음을 읽고 갑니다.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도 쉽게 버려지는 요즘인데 이런 애착을 지닌 것에 공감이 갑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오래 쓰면 정이들고 함부로 버리지 못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