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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1-21 분리 2000. 2. 6
오늘 본문은 이삭의 출생과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일어나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삭의 출생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을 받아 100세에 아들을 얻었으니 25년만에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2장에서 부르실 때부터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25년간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 하였다가 구출된 사건, 롯의 분가, 롯의 구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마엘의 출생, 아비멜렉에게 또 아내를 여동생이라 한 사건. 이러한 세월속에서 하나님은 드디어 때가 차매 약속의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열심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를 가지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그렇게 낳은 자녀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임을 우리가 이미 이스마엘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만이 이루어 내심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서 또 다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봅니다. “봉독” 세 번이나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말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계시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은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기 위하 아브라함의 소원을 이루시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인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녀 낳기를 기대한 마음은 25년동안 포기시키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종을 취하여 86세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99세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사라에게서 낳을 네 자녀와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즉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라를 권고하셨습니다. 권고란 돌보심입니다. 그러니 사라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데 두 번씩이나 위기에서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두 번만 구하여 내신 정도가 아니라 늘 돌보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돌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사라에게 이루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는 오히려 웃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노아홍수를 사람들이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사고파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 것이 노아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이것도 은혜로 된다는 이 말씀을 농담으로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재림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동일하게 우습게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약속에 참여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정말 기적인 것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이것 보다 더 귀한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렇게 복이 됩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긴 사라에게 말씀하신 대로 권고하시고 행하심으로 말씀대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 내셨기에 믿지 못하여 웃었든 웃음이 약속의 자녀를 받고서 참된 웃음을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사야 55:10-11절을 봅니다. “봉독”
비와 눈이 대지를 적시고 열매를 맺히고 종자와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이루어질 때 비언약과는 갈등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비언약이 추방되는 것입니다. 약속과 비약속이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8절에서 21절입니다.
이스마엘만 있을 때는 갈등이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이 나의 자녀이려니 하고 산 것입니다. 종을 취하여 얻은 자식이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혈통이니 유업을 이을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갈이 잉태하여 사라에게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 와서 사라에게 복종을 하였지만 정작 아들을 낳고 나니 그 아들을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업을 이을 자로 생각하고 산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는 말씀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여기고 산 것입니다. 그때는 별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자 갈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마엘은 14세 이상입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입니다(16:16). 그러니 젖을 일년만에 땐다고 하면 이스마엘은 15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힘있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야 지금까지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들로 살아 왔는데 이제 이삭이 태어나자 자기는 찬밥신세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모든 관심이 이삭에게로 몰리는 것이 싫어서 구박을 한 것이지요. 마치 언니가 동생이 태어나면 질투를 하듯이 그런 모습입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문제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커다란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은 언약의 자손이고 뱀의 후손은 비언약의 자손입니다. 그러니 먼저 공격을 하는 자가 뱀의 후손입니다. 그러다가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 누가 강하고 힘이 있습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이삭은 어린아이입니다. 젖뗀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좋아 합니까? 이스마엘입니까? 이삭입니까? 힘 있고 강한 것을 좋아합니까? 힘있는 자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이삭을 좋아 합니까?
우리 모두의 추구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힘입니다. 그러니 신을 믿어도 자기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하여 신을 믿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힘이 없는 것을 택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놀라운 구절을 봅니다. 새벽기도회때 말씀드렸고 설교중에 한번 이용을 하였는데 또 보고자 합니다. 시편 131편입니다. “봉독”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위하여 힘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모두가 원대한 꿈과 포부를 밝히고 있는데 시편 기자는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위하여 힘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젖뗀 어린아이 같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삭이 젖을 뗄 때 이스마엘은 힘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 세상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남고자 힘을 원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상과 분리를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나타나면 세상은 온 힘을 다 동원하여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2편 1-12절 “봉독” 세상은 아들을 끊으려 함.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적들을 부수어 버리심. 시편8편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라” 주님의 전쟁에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83:1-6절 “봉독” 시편 2편과 비슷합니다. 대적들이 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에돔, 가인의 후손입니다. 아벨에서, 이스마엘, 이삭과 이스마엘, 모압과 하갈, 이방인 나라까지 이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함 그러니 이들을 끊어버리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성경은 계시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신약이 어떻게 증거하는 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9:6-9 “봉독”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로 분리합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이지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을 쫒아 내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단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니 화가 나서 그렇게 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과 이스마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문제로 고민하지만 결국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결국 비약속은 국가를 이루고 힘있게 살아도 언약에서 제외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하나는 계집종이고 이것을 시내산으로 율법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유자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행위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될 수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행위란 결국 이스마엘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육체로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약속의 자녀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약속의 자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약속의 자녀가 이 땅에 희롱받는 이삭의 모양처럼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롱 당하심이 세상의 힘을 심판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 언약의 후손으로 인하여 구속을 받은 자들은 다른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것이 약속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어린 아이 같아야 천국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힘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만 바라보시며 비록 육체를 따라 난자 들이 핍박을 할지라도 희롱을 할지라고 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을 우습게 여길 지라도 주님의 약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을 아시고 그 언약만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은 거대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21:22-34 브엘세바 2000. 2. 13
브엘세바란 각주에 보면 ‘맹세의 우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르게는 ‘일곱 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맹세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이러한 맹세가 이방인과 아브라함 사이에 일어난 배경을 살펴봄으로 이러한 맹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드러나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나머지 생애를 보낸 것으로 드러납니다. 22: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브엘세바로 돌아와서 거기 거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아주 오랜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곳에 정착할 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서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 하였다가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음으로 그 집안의 태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자기의 땅 어느 곳에나 거하여도 된다고 합니다(20:15).
이렇게 하여 많은 세월이 지났겠지요. 그런 중에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와서는 서로 맹세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2절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것이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아온 이유입니다. 그 당시의 세력으로 보면 아비멜렉이 왕입니다. 아브라함은 족장입니다. 그런데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계약을 맺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무엇을 약속하도록 합니까?
23절 “그런즉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것처럼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이러한 약조를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맹세하기로 하면서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에게 요청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금시초문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맹세를 하고서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떼어 놓고서 이 우물 판 것이 자기의 소유임을 증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방인과 아브라함의 맹세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 자기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장래를 대비한 것입니다. 장차 이 땅의 통치자는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만이 거할 수 있는 땅으로 계약을 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살 정도였지만 그러나 이방왕이라도 아브라함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자기가 당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 땅에 사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언약하신 복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의 신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아브라함이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의 택한 종들에게 이방인이 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들어온 바로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쪽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부자이겠습니까? 바로왕이나 아비멜렉왕이 부자이겠습니까? 왕이 부자요 강합니다. 그러니 단지 물질적인 축복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아도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면 누가 빼앗아 갑니까?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빼앗아 갑니다. 누가 강하기에 빼앗아 갑니까? 아브라함이 강하면 빼앗길 리가 없지요 그런데 빼앗긴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보다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이 언약을 하자고 찾아 온 것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일이 잘 풀리고 그 당시 우물은 커다란 재산입니다. 그러니 우물도 잘 파서 얻고 하는 그런 면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도 이러한 말을 동일하게 합니다.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창26: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삭이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과 꼭 같은 전철을 밟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마침내 거부가 되는 것을 보고서 아비멜렉이 와서 언약을 맺자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모습을 보고 이방왕이 찾아 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대통령의 신분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고 대통령 되니 청와대에서 살고 비서가 몇 명이고 월급이 얼마며 자가용 비행기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건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등한시하고 이외의 것을 추구한다면 틀린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6:23-25 “봉독”
내가 아브라함과 언약하였기에 아브라함을 위하여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의 흐름이 어떤 쪽으로 가는가 하면 결국 약속의 자녀로 가는 것입니다. 단지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쪽으로의 약속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야곱에게서도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표가 구약에서 물질적인 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구약의 물질적인 거부가 되었더라는 식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보면 구약의 성도들의 복도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철저히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얼마나 엄청난 고생을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약을 보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그것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그런 면으로 봅니다. 그러니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고서 아직도 구약의 물질적인 복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부자됨을 말한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한번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무엇을 추구하였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8-16절입니다. “봉독” 이들이 부자 되었으며 거부가 되었더라는 말을 한마디도 기록을 안하는 것입니다. 무엇만 남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증거가 있다면 나그네라는 증거 외국인이라는 증거 본향을 찾는 삶이라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미심쩍은 곳이 있습니까? 그러면 17절에서 22절을 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시 믿음을 말하고 있고 그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이시겠습니까?
예수 믿고서 부자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겠다고요? 그러면 예수 안믿는 삶이 더 부자인데 그들의 신이 예수님보다도 더 능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단순한 생각을 왜 못합니까? 아브라함보다 바로왕과 아비멜렉이 더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가 드러난 신약시대 그것도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일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보다 뛰어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별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뛰어남을 보이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열심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됨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업적과 실적으로 뛰어남을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바와 전혀 다른 방향을 살고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보이시고 사셨습니까? 무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한 업적을 남겼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는 말씀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 주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도대체 누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무어라고 고백합니까?
마가복음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렇게 죽으심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지나가는 그 자리, 이세상의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까? 과연 십자가를 알고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였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젠가 도망갈 사람들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십자가의 그 예수님을 믿을 진데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세상의 사람들이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이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어떤 방식으로 듣기를 원하였는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빨리 부자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쪽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어 가면서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표라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의 현장에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를 이제야 아시겠지요? 그렇게 높아지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라고 하였으니 가난하고 낮아짐은 저주로 보았으니 내가 예수 믿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를 세상의 뛰어남으로 보이려고 하였으니 뇌물도 쓰고 받기도 하고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자가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어야 마땅합니다. 오히려 종말에는 부를 축적함이 그 사람에게 재앙이 됩니다.
야고보서 5:1-6절입니다. “봉독”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2:43-47절입니다. “봉독”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니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다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성령이 임하니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러한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해 보셨나요? 나의 것을 나의 것이라 하지 않는 그런 믿음과 성령의 충만을 주옵소서 그렇게만 되면 분명히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봉독” 성도 안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교회안에서도 우선적인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내어 놓는 사람도 자랑할 것이 없고 가져가는 사람도 부끄러워 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주의 것이니 형제가 서로 나눔이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안에 일어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틀림없이 칭찬하고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계속하여 새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안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떠한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줄을 우리도 알고 사람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니 우리와 사이좋게 지냅시다 라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이 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주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나와 동행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봅시다. 우리의 가족에게서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합니다. 아주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만 아직 제대로 못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는 어떤 말을 듣고 있습니까? 단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 삶의 방향 가치관이 전혀 다름이 나타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욱 회개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형제라고 말은 하면서 형제의 사랑이 없고 서로의 자존심 싸움을 한다면 우리는 교회도 형제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보고서 이방인의 왕이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니 나와 계약을 합시다 하여서 브엘세바가 생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서로 유무상통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안에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직도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긍휼을 원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참으로 주의 긍휼을 제대로 알고 그 긍휼을 입었기에 우리안에 서로 긍휼이 나타남으로 서로 사랑하며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열심과 행함으로 사랑하여 참으로 당신들을 보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는 그런 사람 그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창세기 22:1-19 여호와 이레 2000. 2. 27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무엇을 중심으로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중요시하다 보니 성경의 건강법이라는 책을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과학자이기에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창조냐 진화냐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경영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마전에 책을 선전하는데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기업의 경영을 잘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경영술을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석유를 발견한 이야기,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의 그림을 보면서 바람에 날리지 않고 머리 스타일도 그대로 유지하는 모자를 만든 사람 등등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성경을 각자가 입맛대로 해석을 하고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의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빛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의 표어는 교회를 빛내는 교회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하는데 교회를 빛낸다고 하니 그 중심에 과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빛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이 수와 건물과 특정인물을 빛내려고 하는지 그 속이야 어찌 알겠습니까만 바울은 자기의 수많은 개척교회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하는데 무엇을 자랑하는지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구원론 중심으로 보느냐 계시 중심으로 보느냐도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교훈으로 훈화로 보아 왔는데 이것을 모범적 설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설교하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자 이렇게 보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구속사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중심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강해 설교가 나오고 하나님이 구속을 중심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개인의 구원중심으로 보다가 보니 구원파라는 이단도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구원을 최고의 목적으로 한다면 인간이 구원받고 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지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장 강조하는 데가 구원파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회개도 예배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커다란 뜻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인간의 구원도 결국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이제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설교 본문과 제목만 보아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계시하시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점검하는 시험입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아서 한번 말씀하시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왔고 또 믿음이 좋아서 아들을 바치라 하니 척 바쳤다 그런 식으로 볼 수 없음을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확인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데 그 기간이 75세에 부르시고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하여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와 같은데서 아들을 얻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이 나무짐을 지고 올라갈 수 있는 정도면 적어도 15세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 받았으니 몇 년이 지난 것입니까? 40년이지요. 하나님이 부르신지 40여년만에 테스트를 해보는 것입니다. 테스트 결과 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2절에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알겠노라는 것입니다. -이제야-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열심이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만 가지고 아침 일찍 떠났다 그러니 다른 생각 들기 전에 즉시 순종했다 그리고 아내와 상의를 안했다 상의를 하였다면 말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갔다 종들을 산 밑에 두었다 아니면 말릴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나열하다 보면 아브라함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개인이 훌륭하고 뛰어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 왔습니다. 삼일 길입니다. 산으로 오르면서 이삭이 묻습니다. 번제할 나무와 불은 있지만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절을 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자기의 아들 이삭을 향하여 하나님이 전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17:19절에서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그 이름까지 하나님이 지어주신 아들 이삭입니다. 그 씨로 인하여 언약을 세우며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리라는 약속을 하셨는데 지금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니 아브라함의 심중에 여러 생각이 일어 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40여년 동안 열심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에 모든 것을 다 걸어 버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거대한 나라 이집트의 바로왕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이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이렇게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성도들과 라는 말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과 같은 동일한 성도요 하나님의 식구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 “봉독” 믿음이란 죽은 자를 살리실 줄 생각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도 불가능한 아들이었기에 이제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여도 살려 내시리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일에 실패를 하였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브라함 너 탈락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서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내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예수 믿었으니 이제 다 끝났다 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으니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죄만 짓는 것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자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하는데 그러나 종이란 죽도록 충성하고도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모든 것까지 하나님의 약속 앞에 바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우리 아들 못 바치겠는데 그러나 바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들 목사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목숨까지 주님의 약속안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라는 말씀을 좀 더 살펴봅시다. 자식을 잡아 바치라는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그 아픔 속에 참여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 그것도 약속의 자녀 그 아이가 죽으면 대가 끊어지는데도 계속하여 단절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극단적인 절망은 하늘과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이 단절을 성도는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연결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불러 내셔서 그 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진짜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삭대신 준비된 양을 바치고 나서 하나님이 또 다시 언약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창22:18 “......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문을 얻는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에 예언된 그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를 라반이 시집보내면서 뭐라고 축복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24:60 “,,,,,,,,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결혼하는 딸에게 전쟁의 명령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의 성문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이 마태복음에서 16장 18절에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음부의 권세는 음부의 대문이라고 난하주가 달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음부의 권세 즉 대문을 부수어 버리셨기에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힘이 없다고 염려 걱정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몸이기에 대적의 문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산이 훗날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집니다. 성전의 기능이란 언제나 희생제물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희생제물은 사람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준비하여 드리는 희생제물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은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성전의 기능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자기 몸을 제물로 삼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그 여호와 이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 이레란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에 제물을 우리가 준비하여야 마땅한데 우리는 제물의 필요성도 모르고 알아도 준비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희생제물을 우리는 준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0절을 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복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화목제물을 준비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우리에게 은혜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세상의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분이 무엇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그러므로 성도에게 어떠한 환난이나 곤난이나 핍박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죽음이라도 그 어떤 세력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른 염려들일랑 푹 잊어 버리시고 주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약속에 묻어두고 깊은 수렁과 버려짐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는 자에게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참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3:1-20 사라의 죽음 2000. 3. 5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사라의 생애를 점검하고 또한 무덤을 위하여 밭을 사는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라의 생애는 아브라함과 함께한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훈련을 받을 때 사라도 동일하게 신앙의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가는 곳마다 자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그런 남편과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사라가 남편을 주라고 하면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3:5-6절입니다. “봉독” 남편 같지도 않은 남편, 자기가 죽을까 하여 아내를 팔아먹는 이런 남편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아내들이 본받으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1-4절을 함께 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삶의 원리입니다. 비록 남편이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지 말라는 말까지 순복하면 안되지만 정말 남편을 순복하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남편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믿음 좋다는 사람이 남편이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다고 하는데 가정에서 어떤지 모르지요. 늘 기도원이나 부흥회니 좇아 다닌다고 아이도 남편도 제대로 안 챙기면 남편이 그런 아내가 믿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일에서도 믿음의 조상의 아내가 본을 보인 것입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7절을 봅니다. 또 생명의 은혜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교훈하면서 왜 사라를 예를 들고 있는지를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면서 사라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7:15-16절입니다.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을 주라 한 것은 아내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타락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질서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의 아내에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라의 실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였으니 여종을 통하여 낳아도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나온 자녀를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면 처음부터 아이를 잘 놓는 여인을 선택하시지 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런 여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이를 낳았다 하면 서너 쌍둥이씩 그것도 연년생으로 마구 낳게 되어야 자손이 많아질텐데 원천적으로 자녀를 못가지는 이런 여인을 선택한 이유는 언약의 자녀는 사람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셔야 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라가 가장 적절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나오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함으로 상징화하고 사라는 아예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늙어서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무언가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낳으셔야만 된다고 요한복음 1:1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자녀가 주어지는 것을 이삭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결혼하여 몇 년 동안 자녀가 없습니까? 20년입니다. 그러니 이도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그런 방법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라가 127세를 향유하고 죽습니다. 성경에서 여인으로 죽은 나이가 기록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지를 사려고 나갑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지금 수십년을 살면서 땅 한 평을 사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나그네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라가 죽자 그 땅을 조금 사서 무덤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그곳을 약속의 터로 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후손들이 계속하여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덤을 사기 위하여 그 지방의 사람에게 가서 밭과 거기에 딸린 굴을 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곳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우호적입니다. 어느 땅이라도 무덤으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방백임을 그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아브라함에게 대한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그 들의 상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동의 사람들이 장사하는 태도가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주듯이 하면서도 받을 것은 다 받아 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겠다고 하니 은 400세겔이나, 어찌 사고팔겠습니까? 그냥 장사 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굴과 밭과 둘레의 수목인데 400세겔은 엄청 비싼 가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아브라함은 그 돈을 주고서 땅을 삼으로 그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그들의 법적으로도 정당하게 치룹니다.
또 다른 의미는 언약안에 들어오는 세상의 것은 반드시 값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을 치르지 아니하고서 언약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특색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려면 치러야 할 의식이 무엇입니까?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단지 통과의례가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벨라 굴을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입한 굴에 사라를 장사지냅니다. 이곳이 400년후에 돌아올 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 있다면 죽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을 아브라함이 슬퍼하고 애통하였지만 그러나 그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덤을 준비하여 자기도 그곳에 묻히고 이삭도 리브가도 야곱도 레아도 그곳에 묻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경우만 보겠습니다. 창세기 50:29-33절입니다. “봉독” 야곱의 최후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그 언약의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출세한 애굽에서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땅의 그 조상이 있는 무덤에 묻히는 것이 최후의 유언입니다.
창세기 50:24-26절입니다. “봉독” 요셉 역시 최후의 유언이 자기의 해골을 애굽에서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권고하셔서 이 땅에서 나갈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나를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이라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이기에 우선 애굽에 그 시신을 안장하여 두지만 그 유언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요셉의 시신을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여 430년의 세월이란 요셉의 생애를 뺀다고 하여도 300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차매 출애굽을 합니다. 이때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요셉의 해골은 막벨라 굴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세겜의 추장에게서 산 땅에 장사를 지냅니다. 이곳이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 지파가 정착한 곳이니 그곳에 요셉을 묻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다 정복하였다는 것이 여호수아서인데 그 마무리가 요셉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묻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 죽어도 그 언약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해골을 메고 와서 그 약속의 땅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 땅의 일부를 사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이 땅을 약속하신 대로 주실 것을 믿고서 준비한 것입니다. 이곳에 제일 처음으로 묻힌 사람이 사라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복있는 죽음입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계시록 14:13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람의 죽음은 두 가지입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와 주밖에서 죽는 자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죽는 자의 복이며 지금 주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쉬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죽음은 복인 것입니다.
군대에 가보신 분은 처음 훈련을 마치고 작대기 하나 달고 자대에 배치를 받아 가는데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그런데 가는 그 날에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개구리 복을 입고 제대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나는 언제 제대하는가? 그러나 훈련을 받을 만큼 받아야 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일찍 제대를 하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33세에 제대하셨으니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보다 오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보다 사라가 먼저 제대를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훈련 중임을 아시고 부지런히 훈련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우리를 부르시면 얼른 달려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준비를 항상 해두어야 합니다. 무덤을 준비해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안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을 봅니다. “봉독” 죽기를 무서워 일생에 종노릇 하는 자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 해방을 받은 자는 죽음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기에 이사 가는 날, 제대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신 집사님이 많이 아팠답니다. 그래서 아파서 죽겠다고 그런 모양이지요. 그러니 민석이가 있다가 아빠는 좋겠다 빨리 천국가니까! 이게 아이의 철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창세기 24:1-67 이삭의 결혼 2000. 3. 12
1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늙었다는 말은 단지 나이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신앙이 진전되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진전된’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만 많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만 아브라함은 이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진전된 신앙이란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린 그 사건으로 인하여 확정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56절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사건을 경험한 것이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언약의 핵심인 대속의 사건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떤 믿음인가 하면 세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리신 언약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언약은 무엇입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약속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자기의 고향에서 취하여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죽었고 자기도 나이가 많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계속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계속되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믿음의 훈련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처럼 이제 그 언약에 들어오는 자들도 아브라함 같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현지인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향에서 데리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믿는 자는 믿는 자 끼리 결혼하여야 된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그 어떠한 조건 보다 믿음을 보아야 당연합니다만 그러나 이때는 아직 아브라함의 고향 사람들이 여호와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자기 아들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은 약속의 민족은 아브라함 자신이 겪은 과정을 반복하고 답습시킴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내신 것처럼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격으로 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들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자기의 고향에 가서 데리고 올 것을 말하면서 맹세를 시킵니다. 이 종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이 종이 옛날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이 없어서 자기 집에서 길리운 엘리멜렉이 자기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 그 사람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이 종을 아브라함이 보내면서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7절에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 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찌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지금까지 이루어 오신 그 하나님이 너의 앞서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준비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평생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 그 무엇이 방해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종보다 앞서서 보내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혈통을 유지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의 혈통으로 되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게 하시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뒤에 이삭을 주심으로 이삭이 언약을 이어갈 자라는 것이지 자기의 혈통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이란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결혼이 왜 전쟁이 됩니까?
창세기 3:15절의 전쟁인 것입니다. 범죄 이후의 세상을 하나님이 이 기준에 의하여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입니다. 여인의 후손이란 범죄한 아담의 혈통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아브라함의 할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의 문을 얻을 자는 언약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씨가 바로 대적의 문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통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의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자가 되었더라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 그런 식의 믿음의 족장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시고 계시는데 한가롭게 다른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 전쟁을 아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전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여호와께서 앞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24장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의 흐름입니다. 24:1-27절까지만 말하고 그 다음은 그래서 리브가가 따라 왔다고 하여도 되는데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어떻게 인도되어 왔으며 리브가를 만날 때 어떻게 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내용을 리브가의 가족에게 또다시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이 어떤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드디어 먼 길을 여행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에 왔습니다. 그리고서 기도합니다. 12-14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순적이 만나게 하옵소서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물을 달라고 하여 물을 줄뿐만 아니라 낙대에도 물을 주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한 처녀가 오는 것입니다. 이가 바로 리브가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물을 줄뿐 아니라 낙대에게도 물을 길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인지를 물어 보니 아브라함의 동생집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종이 어떻게 합니까? 26-2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 경배하고 자기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인자와 성실을 끊지 아니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시지만 그 언약을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로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인자와 성실을 베푸시고 하나님이 사자를 앞서 보내셨기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인도하여 이곳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라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빠와 그 가족에게 다시 말하는 것이 48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고 일하셨는지를 증거하고 나서 49절에서 당신들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가족이 반대할 수도 있고 리브가가 반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족도 허락하고 리브가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을 50절에서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그러니 여호와의 말대로 하라고 하자 종은 또다시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그러면서 리브가를 보내는데 무어라고 보내는 것입니까?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60절입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받은 내용과 같은 내용입니다. 대적의 성문을 얻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의 씨 이삭의 씨가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를 무찌르는 내용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이 족장들에게서 좀 더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 국가 이스라엘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체의 힘과 능력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할 때도 역시 하나님은 전쟁을 하시는데 어떤 식으로 하시는가 하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종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먼저 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국가가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역시 여호와께서 먼저 사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몇 구절만 찾아봅니다.
출 3:2 “봉독”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심. 출 23:23 “봉독”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가서 적을 치심.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믿지 못한 자들이 죽습니다. 40년이 지난후 신 1:29-33 “봉독”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적을 물리칠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라고 하시는데도 이들이 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행하심으로 애굽에서처럼 하신다고 가나안에 들어가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안음같이 안고서 이것까지 왔는데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데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1장에서 남편이 되어 너희를 손을 잡고 인도하여 내어도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언약은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명기의 책망이 그러한 하나님을 앞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광야에서 망한 이유이고 또 이스라엘 국가가 망한 이유입니다.
32절 이 일에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는 이 일을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앞서 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실력을 믿는 것은 신념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앞서 행하시는 실력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 믿음이란 세상의 사람으로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33절입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싸움도 이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을 믿느냐 못믿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갖 염려와 장래에 대한 걱정을 혼자 다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니 이제 아브라함만큼 살지를 못하니 그 나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약 절반으로 줄여서 보면 되겠지요. 이제 우리가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발견하는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얼마나 세초부터 세말까지 지키시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은 늘푸른 교회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7절을 봅니다. “봉독” 마치 사라가 죽은 장막에 리브가를 대신 채워 넣듯이 하나님이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그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창세기 25:1-18 아브라함의 죽음 2000. 3. 19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후손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창세기를 보아오면서 또 금요일 성경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애초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주셨기에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동일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야 말 것을 이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로 인도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에 그의 출발과 과정과 죽음까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잠시 요약을 하고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보고 신약에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시니 떠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어떻게 거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이미 믿음의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브라함을 그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것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끊어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취미, 습관, 인정, 애정까지 끊는 것이라고 말합디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고향 친척 아비집을 어떻게 떠나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자칫 잘못생각하면 내가 굳은 각오와 결심으로 그런 일을 이루어 내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극기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고 자기가 죽을까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바로왕이 오히려 자기에게 잘못하였다고 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아내를 여동생이라 하는 사건이 있고 아예 가는 곳 마다 그렇게 하자고 사라와 약속을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디어 믿습니다. 그러자 그 믿음을 보고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언약을 행합니다. 그런데 지나가신 분은 하나님만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쪼개어지는 즉 생명을 담보로 맺는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은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사건도 결국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86세에 첩을 통하여 낳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13년간이나 말씀하지 아니하시다가 99세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언약의 후손은 사람의 혈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의 씨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속으로 인하여만 살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 씨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생애 최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여 자녀를 몇 명 더 낳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기 전에 이들을 어떻게 정리를 하는가 봅시다. 6절입니다.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고 다른 자녀에게는 재물만 주어서 자기 생전에 그 아들들이 이삭을 떠나서 살게 합니다. 동쪽으로 가서 살도록 조치를 합니다. 죽기 직전에 이제야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 그것도 이삭보다 더욱 노년에 낳은 자녀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삭과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분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아브라함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100년을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되어 이제 드디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서 이스마엘도 역시 이삭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12-18절에 이스마엘의 족보와 거주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6절에 이들도 12방백이라는 것입니다. 비언약의 자손이라도 언약의 자손이 나중에 12지파가 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가짜를 만들어 내는데 꼭 진짜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테이션 보석들이 인기가 있지요. 그리고 유명제품의 모방한 제품을 가짜인줄 알고도 사는 것이라고 하지요. 진짜가 있으니 가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가짜가 더 진짜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 그러는데 그 궁극점이 무엇인지 유심히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성경이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여정이라면 우리가 동일하게 믿음으로 부름 받았다면 아브라함을 신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봄으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C.D성경에서 성구를 찾아보니 아브람이란 단어가 53회, 아브라함이란 단어가 신구약 총 235회, 신약에만 74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족보를 말할 때도 사용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혈통을 주장하는 일에도 사용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데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창세기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보았는데 과연 신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받는 것입니다.
1. 마태복음 1: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신약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다윗과 언약하신 그 하나님으로 태어나는 언약의 후손 약속된 씨가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씨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하나님이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 씨의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 약 2,000년이 지나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이 씨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롭게 만들어 지는 족보가 되는데 여기에 아브라함과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그리스도에게서 소급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요한복음 8:56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 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의 전후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우리는 아멘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주여 라고 하였다는 것이 누가복음 20:41-44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보고서 주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시작되는 하늘의 족보입니다. 온 세상을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예수님으로 온 세상을 통일하시어 새로운 족보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이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혈통이나 전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마태복음 3:8-9입니다. “봉독”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이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기존의 혈통과 전통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의 말씀입니까? 자기들은 누군가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이미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도대체 더 큰 복과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복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잘 증거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한곳만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16절까지 봉독합니다. “봉독”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이고 또 이러한 복을 이방인도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데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저주 받으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란 결국 갈라디아서 3:16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그 자손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는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주는 복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란 분명한 변화가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행위가 바뀌어 지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서의 믿음과 갈라디아서의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다가 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종을 부리는 정도의 기반 잡힌 삶을 뒤로 하고 죽음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고대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그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간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풍요가 주는 그곳에서 떠나옴으로 불안한 장래를 향하여 나아갔지만 그것이 영생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오늘 우리는 순례자의 걸음을 걷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브라함의 죽음 앞에서 더욱 새롭게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죽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창세기 25:19-34 선택 2000. 3. 26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그 언약은 영원하기에 그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갑니다. 25:11절에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있고,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러 아들도 있지만 하나님이 지명하여 복을 주셨다는 사람은 이삭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복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스마엘 같은 복이 아니라 언약을 이어가는 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어가는 복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선택이란 말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개입되면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사람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들로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의 일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한 선택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데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2:17-18절에서 1)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 2)네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겠다. 3)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이러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결혼한 이삭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결국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자녀가 없는데 무슨 언약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사라와 연결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리브가는 사라의 장막에 들어왔습니다. 사라의 모습처럼 언약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실력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여 20년간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서 자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다면 기도 안하여도 자녀를 주시면 될텐데 왜 기도를 하게 하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는 너희의 실력으로 낳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당장에 기도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기도란 나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오히려 기도가 방법론처럼 되어 가지고 봐라 기도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기도 자체가 자기의 부족과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인데 기도하니 자녀 얻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자신의 기도한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한 기도란 언제나 자기가 부인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합니다. 자신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기도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이 이를 온전하게 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기도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여 아이를 주시려면 하나님이 언약을 이어갈 자 하나만 주시면 되는데 쌍둥이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쌍둥이가 배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브가가 하나님께 이게 왠일이냐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민족이 네 태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배속에서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 언약을 믿고 이루어 가는가를 보면 자기들은 전혀 그런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들의 취향대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들 입맛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야곱의 생애에서 더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놓고서도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봅니다.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선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모두가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이 누구를 좋아합니까? 에서를 좋아합니다. 육신적인 장남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냥하여 와서 요리해 주니 더욱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아랑곳없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줄테니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가로챈 것을 통하여 그제서야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입니다. 단지 야곱이 언약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잘 도와주니 야곱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이 이어갈 줄로 확신을 하였다면 이삭에게 바른 말로 이야기를 하여야지요. 야곱이 언약을 이어갈 자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이 장자권을 받아 내기 위하여 속이는 것입니다.
에서입니다. 배고파서 야곱이 끓이고 있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주는데 이것을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말로서 그렇게 한다고 하여서 장자권이 바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를 축복할 아버지가 자기를 더 좋아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데 어떠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망령되다고 합니다.
야곱입니다. 이름이 발꿈치를 잡다 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 이름의 뜻이 사기꾼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그러니 야곱은 장자권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확보하여야 되는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장자권을 빼앗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법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 현장에서 원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가 됩니까? 아브라함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였으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네 사랑하는 이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치는 그 희생 안에 누가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대신으로는 어린양이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도 나중에 야곱보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자기가 장자권을 획득하여야 되는 줄 알고 온갖 꾀를 다 동원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얍복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원수로 알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얍복강에서 누가 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곳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절름발이 이스라엘 그리고 마지막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어긋나게 안수하고 축복을 함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일하심이 어떠한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제대로 알아 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모습은 자기들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행동한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적절한 속어가 무엇입니까? 강아지는 짖어도 경부선 열차는 달린다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 드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는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없기에 창세전에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를 통하여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9:10-1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에게서 야곱을 태중에서 선택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말씀을 이 세상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입니다. 자기의 행위의 결과로 복과 화가 주어져야지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습게 여기는 사례가 교회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을 부정하고 시비를 거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4-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 반대론자들이 있을 줄 알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무슨 불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원한다고 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하여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를 강퍅케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으로 삼은 이유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바로가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니가 감히 무언데 하나님을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파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체계가 인과율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현대 그룹의 회장 승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장자를 제치고 5남이 회장의 승계를 한 것은 이 사람이 전체 경영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에 의하여 승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그 사람의 어떠한 자질과 능력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는 자기가 잘난 자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입은 것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후계구도를 세웠지만 결국 부르시고 택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됨을 보여주시는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1:10-11절을 봅니다. “봉독” 힘써 할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것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5:19-34 장자 만들기 2000. 4. 2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장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선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늘 누구에게 기대를 더 거느냐 하면 장자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니 딸만 낳는 집안에서는 아들 낳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자기의 이름을 이어갈 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기의 대가 끊어지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죽더라도 제사를 지내주는 아들이 있음으로 자기의 존재가 아들로 통하여 영속되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력의 시작이기도 하니 더욱 장남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과 꼭 같은 심정은 아니더라도 이삭이나 리브가는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로 장자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되면 아버지의 축복권과 상속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유산을 두몫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태어난 서열순서 보다는 누가 아버지의 장자권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과 리브가도 그 장자권을 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권을 믿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미 복중에 있을 때, 어떤 행함이 있기 전에 장자권을 약속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언약대로 이루어 가실 것이기에 일부러 속여가면서 장자권을 따 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리브가가 그렇게 장자권을 따 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위한다기 보다는 마치 몽구와 몽헌이 회장권쟁탈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아집니다. 몽구와 몽헌이를 야곱과 비교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야곱이 깨어지기 전의 삶의 모습은 자기가 장자의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잠도 안자고 수고하고 애쓰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는 장자가 무언지를 알아가는 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알아간 장자란 이 땅의 서열이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자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그의 말년에 아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 장자권을 에브라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장자인데도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의 생애 중에서 야곱 자신보다 요셉을 통하여 더 분명히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구체적인 실현이 요셉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누가 장자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요셉이 꾼 꿈을 가지고 사람들은 비젼을 가지라고 하는데 2,000년대의 비젼이 어떻고 하면서 요셉을 들먹이는데 그러한 인생의 포부나 야망을 위한 꿈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당찬 꿈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주가 되고 싶고 황제가 되고 싶고 신이 되고 싶은데 단지 현실이 그렇게 받혀주지 못하니 눌려 살 뿐입니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힘에 의하여 마지못하여 그렇게 살고 있지 누가 좋아서 낮아진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을 가지고 꿈을 크게 가져라 이런 말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을 통하여 성경은 무엇을 계시하고 있습니까? 요셉도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은 자기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서 자랑하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형들의 비리를 고자질하는 요셉이고 또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있으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 한번 죽어보라고 형제들이 사막의 빈 우물에 던졌다가 직접 피를 흘리기보다는 종으로 팔아 버려서 종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라는 식으로 팔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팔려간 요셉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란 세상이 주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가를 주의 역할을 받은 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의 역할을 할 자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란 버림받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가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주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려짐 속에서도, 인간의 방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한 사람을 주로 지목하여 세우셨다면 그가 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처음 팔려간 집에서 요셉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어도 명목상 일뿐이고 실제 가정의 제반 상황을 주관하는 자는 요셉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주인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감옥에서도 역시 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감옥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궁의 총리가 되어서도 애굽의 역사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왕이 아니라 요셉입니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 요셉이 주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야곱이 이집트에 오게 되고 야곱이 바로왕을 축복합니다. 누가 주입니까? 축복을 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역할은 야곱이 주가 됨을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주가 됨을 보이기 위하여 먼저 애굽으로 파송된 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버림 받았던 자가 버린 자를 구하는 주가 되는 자리에 이른 것이 바로 하나님과 야곱과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나중에 장자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이 창세기 49:22-26절입니다. “봉독” 형제 중에 뛰어난 자가 되는 것은 희생하는 자 섬기는 자가 장자가 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는 세상의 장자와 전혀 다르게 오히려 버림받고 배척받고 죽는 모습으로 나오는 장자입니다. 요셉의 장자에 대한 기록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역대상 5:1-2절입니다. “봉독”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요셉에게서 왕이 나오면 쉬울텐데 왕은 또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주어지는데도 주권자는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장자의 명분이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자가 오면 자리를 비켜서야 되는 그런 장자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개인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을 하나님이 장자로 만드시고 그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이제는 한 국가를 장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장자를 죽이리라”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애굽에서 출애굽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장자를 만들어 내는 일을 위하여 10가지 재앙이 주어지고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입니다.
장자의 죽음을 면하려면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만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장자로 삼으십니까? 히브리인들입니까? 애굽인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여기에서구별이 없습니다. 히브리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장자는 죽는 것이고 애굽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재앙을 통과하는 마지막은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란 어린양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서 매년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남아 있으려면 어린양의 피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모든 초태생의 수컷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시고 사람의 장자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를 대신하여 누가 바쳐집니까? 한 지파를 선택하여 장자를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민수기 3:11-13절입니다. “봉독” 장자를 대신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장자를 대신하는 것은 장자는 희생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는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 즉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희생을 반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제사장이 나오면 되는데 또 다시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혈통이나 족보가 아니라 제 3의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에 대하여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7 “봉독” 아들을 낳으심. 2:12 “봉독” 아들에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가 급하심. 시편 89:27-29절 장자를 세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가 어떤 일을 당합니까? 89:38-51절을 봅니다. 기름부은 자가 버림받음. 그리고 52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란 희생하는 자를 통하여 장자를 삼으시고 그 장자로 인하여 다른 아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장자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았지만 이스라엘이 제대로 아들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드릴 완전한 장자를 가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요 한 별다른 대제사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17절입니다. “봉독”
28절입니다.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아들로 인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절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만들어 내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맏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총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어 내신 것이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결론입니다. 맏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희생의 흔적을 지닌 장자의 모습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없이 쓸데없는 욕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장자의 희생아래 장자의 총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놓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6:1-35 이삭 2000. 4. 16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전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봅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라고 봅니까? 사람들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전도서 1:9-10절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고 하여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새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옛날에도 어느 정도의 발전은 있었기에 정도와 완급의 차이이지 다른 새롭다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시대와 지금을 대비하여 보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기, 전화, 자동차 등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는 별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삶의 내용을 보면 꼭 같습니다. 이삭의 살아가는 모습은 유목민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 정착하여 사는 곳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목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주 극소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러나 현대와 미래에도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양과 소떼를 몰고 다니지 않는 것일 뿐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형태를 띠고서 산다는 것입니다.
쟈크 아탈리라는 사람이 ‘21세기사전’이라는 미래를 예측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만년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다. 불안정하므로 모든 것을 휴대화할 할 것이다. 사람, 사물, 기관, 기업, 정보는 물론...... 모든 것이 휴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유목 물품 가운데 최초의 유목 물품으로 사막에서 석판의 형태로 받아 장막으로 가지고 온 주님의 말씀이며 이것이 최고의 성스러운 유목 물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정착민의 법과는 달이 박애의 정신이 생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는 것 가운데 유목민이라는 이야기가 이런 것입니다. 앞으로의 인류는 유목민의 삶의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30년후에 인구의 10분의 1이 부유하든 가나하든 유목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략 세 종류의 유목민이 될 것이랍니다. 부유한 유목민, 가난한 유목민, 가상 유목민이라는 것입니다. 부유한 유목민은 어디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가난한 유목민은 자기의 생업을 위하여 일거리가 잇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 나서야 하는 유목민이고 가상 유목민이란 이들이 가장 많겠지만 부유한 유목민의 생활을 꿈꾸며 한 곳에서 정착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정착이 아니라 부유한 유목민이 될 때까지만 가상적으로 정착하기에 가상 유목민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휴대가능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전화하나만 들고 나가면 안될 일이 없을 만한 세상이지요. 단순한 통화만이 아니라 은행결제 업무 인터넷까지 안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목민의 질서가 새워질 것을 내다보는데 그런데 이런 예측가운데서 무슨 말을 하는가하면 가상 유목민은 언젠가 부자 유목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가난한 유목민으로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강박관념 속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용한 이유는 이말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의 이삭의 삶이나 지금 우리의 삶이나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강박관념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생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75년을 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산 이삭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간 일과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물이 될 뻔하다가 대신 양을 바친 그런 사건도 잊을 수가 없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는 그 약속을 이삭도 동일하게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기근이 일어나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26:1절, 아브라함때 흉년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처럼 이삭도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블레셋왕 아비멜렉의 영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랄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제일 끝 지역입니다. 이삭은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기도한다거나 하지 아니합니다. 당연히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26:7절,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는 것도 꼭 같습니다. 그 말하는 내용도 꼭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달라지지 않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슨 역사의 발전이 있는 것입니까? 오직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서만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백성됨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26:2절, 하나님이 이러한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죄 지을 생각도 안나십니까? 예수 믿으면 세상 것이 하나도 안부럽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여전히 유혹이 있고, 죄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는데도 그 길이 막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고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오히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꼭같은 일을 하여도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길입니다. 금요일 구역공부시간에 하나님의 예정을 공부하셨지요. 우리를 기계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과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의 열심과 고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순종하고 고집부리고 다른 길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삭을 막아서신 것처럼 오늘 주의 백성들의 삶도 간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서 주와 동행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늘 이삭처럼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선적으로 내 살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길을 찾아 나선다고 찾아 집니까? 오히려 막힐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많이 막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도 되고 또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는 증거도 됩니다.
그러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으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봉독”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한 그 언약을 이삭에게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이루시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가 다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 갈 때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막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오히려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감으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바로왕과의 만남에서 더욱 알게 되는 것이고, 야곱은 내려감으로 그곳에서 자기의 후손들이 400년간 있다가 나오게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이 곳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그 구체적인 적용은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사람마다 다르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니 내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살게 되는데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거부가 됩니다. 흉년이 들어서 다른 곳에 살려고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흉년든 땅에 살았는데도 오히려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구약적인 방법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오늘날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새언약 시대의 복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러한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 있는 자가 복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복을 신약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언약안에 있는 표적은 의를 위한 핍박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가 자꾸만 지금도 예수 믿어서 세상의 것들을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지 않고 그 땅에 머물면서 거부가 되었는데 그런데 무엇이 따라 옵니까? 시기입니다. 우물을 파면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 곳에는 우물이 생명과 같은데 우물을 파면 막아 버리니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어디로 가는가 하면 브엘세바로 밀고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21:31-34, 22:1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맹세를 한 곳이고 아브라함의 노년에 그곳에서 살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삭도 이곳에서 살다가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시자 그랄땅에 거하였는데 그곳에서 비록 거부가 되어도 하나님께 단을 쌓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랄 사람과 계속된 다툼 속에서 브엘세바로 밀려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이르러서야 이삭이 무엇을 합니까?
26:23-2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다시 이삭에게 언약을 반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24절에서 두려워말라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복을 주어 내 자손으로 번성케 하여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자손이 누구인지 수차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않고 단수로 그 자손이라 하셨으니 이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 3: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진짜 복이란 양떼 소떼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 참된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있어서 복을 주겠다는 그 복이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도 이삭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약속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이삭은 흉년이 들자 자기 살길 찾아서 애굽으로 가려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이키시고 브엘세바로 인도하신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찾아와서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본문을 보더라도 이삭의 참된 복은 재산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몇 곳만 더 확인하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3:1-3 약속을 이루어 가나안에 가게는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과자와 장난감을 달라고 떼를 쓰다가도 엄마가 가버리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처럼 더욱 중요한 것이 가나안에 가서 사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더욱 중요한 복입니다.
여호수아 1:5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게 함이라. 마태복음 28:20절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을 하여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사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애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히고 돌이켜 져서 주님앞에 예배하는 자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 때문에 그 언약 때문에 복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복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이것이 복임을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7:1-33 이삭의 축복 2000. 4. 30
(무엇이 현실입니까? 성경인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 현실인가? 그런데도 가상현실 속에서 산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잘 보지를 못하였다고 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운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란 이상한 신비적인 것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 이었으나 그 언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의 욕구를 따라 하나님의 언약을 해석하고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축복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욕구를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5:27-28절입니다. “봉독”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조용한 야곱을, 그래서 장막에 거하며 어머니를 돕는 야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기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어야 할 텐데 그러나 늘 우리 편리한대로 해석을 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의 유리한 말을 찾아서 나를 합리화 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목사와 이야기를 해보시면 어떤 부분에 대한 잘못을 말하게 되면 수긍을 잘합니까? 안합니까? 좀처럼 수긍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빠져나갑니까? 성경을 가지고 자기 합리화 시키며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 더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만큼 이용하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하지만 사람들마다 자기의 뜻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네 사람이 모두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보고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삭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지만 이삭은 고기 한 접시에 하나님의 언약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눈은 어두워지는데 입맛은 살아 있었는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기에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서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입맛도 제대로 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냥한 고기와 집에서 잡은 양고기가 다를 텐데 그 고기를 먹고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각과 후각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임을 알지만 옷의 냄새를 통하여 에서인줄 알고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서 에서임을 확인하고서 축복을 합니다.
만약에 야곱인줄 알았다면 축복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거듭 내 아들 에서냐고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축복을 합니다. 아버지의 축복이란 장자권을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을 이삭은 자기의 입맛을 채워주는 아들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는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가 나중에 에서가 고기를 요리하여 왔을 때 놀랍니다.
33절에서 이삭이 심히 떨며 가로되 이삭이 심히 떠는 것은 자기의 축복이 뒤바뀐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였기에 심히 떨었다고 보아집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매달리는 에서에게는 축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정말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지옥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십니까?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과 장래에도 오직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줄을 믿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면서 고민하고 근심하기보다는 그저 내 눈앞에 닥쳐진 작은 이익, 고기 한 접시에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다 팔아 먹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삭의 이러한 태도가 주술의 시작이라고 어느 주석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술의 시작, 제물을 바치거나 제사를 지내서 하늘의 뜻을 돌이키려는 것이 주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삭이 자기의 욕심을 인하여 주술을 행하려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고서 복을 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복채를 받고서 복을 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줄도 모르고 별미를 바쳐서 축복을 받자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수요가 우리에게 있기에 그러한 것을 공급하는 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삭 같지는 않습니까? 눈이 어둡고 세상의 맛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지는 아니합니까?
둘째, 리브가입니다. 리브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입니다. 쌍둥이가 자기 배안에 있을 때 언약을 받았기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야곱마저 자기의 마음에 드니까 더욱 야곱을 사랑하였겠지요. 그런데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겠다는 말을 듣고서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서 축복을 받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서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삭에게 말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 무엇임을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음이 우리 인생들의 모습임을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도 늙어서 자기 후계자를 빨리 결정하지 않았을 때 아도니야가 반역을 합니다. 그러자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간하여 전에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을 상기시켜 솔로몬으로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임으로 장자의 축복을 받아 내지만 리브가는 이 사건 이후로 이삭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셋째, 야곱입니다. 야곱은 앞으로 계속하여 살펴보겠지만 형을 속이고 눈이 먼 아버지를 속임으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속는가를 보게 됩니다.
넷째, 에서입니다. 에서는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봉독”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로 정하여져 있는데도 노력한다고 안되는 것 아니가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경계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에 닥친 이익을 인하여 영원한 나라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를 위하여 에서를 사용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보지 못하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았다고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한 복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시큰둥하게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 12:15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울고불고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에서가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자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등한히 하다가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접시의 고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한 이삭이나 에서나 리브가나 야곱이나 간에 모두가 자기의 고집과 욕심과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는 사건이 생겼는데 자기는 에서인줄 알고 축복을 하였는데 야곱에게 축복이 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경 전체의 흐름입니다. 결국 축복이란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9: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뜻이 누구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입니까? 이삭도 아니요, 리브가도 아니요, 에서도 아니요, 야곱도 아닙니다. 야곱은 맞지 않나요? 할 수 있겠지만 야곱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기 뜻을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물질적인 것으로 알고 평생을 물질을 모으는 일에 불철주야 노력하였지만 그러나 얍복강에서 그 축복이란 자신의 재산 모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재산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 형 앞에서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자기 가까이에 두고서 거리를 두어 가게 합니다. 앞에서 치면 자기 혼자 도망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삭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27:27-29절입니다. “봉독”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기름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것을 의지한 야곱이 죽고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이해하는 야곱이 되는 것이 얍복강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의 핵심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이삭에게 하신 그 언약의 내용인데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 형제들이 굴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거듭 실패하여도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심으로 그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자기의 취미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삭이 축복을 하다가 놀라게 된 것은 자기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장자권이 야곱에게 주어지자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삭의 자기 취미에 의하여 자기 기호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메이지 않음을 에서를 축복하였는데 야곱이 받은 사건을 두고서 분명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일에 동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리브가와 에서와 야곱은 서로의 갈등으로 골이 깊어지고 원한관계로 야곱이 도망가고 에서만 남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이삭이 알게 된 이러한 하나님이 자기들의 욕심이나 기호나 취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야곱은 언제 알게 됩니까?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과 애굽에 내려가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축복의 내용처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주가 되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 표가 나오는데 자기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하는데 요셉의 의도는 장자인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야곱이 손을 어긋 맡겨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말리자 나도 안다고 하지요 이것이 야곱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어야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소원성취사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좋습니까?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의 고집과 야망과 탐심을 꺾어 내시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의 뜻이 꺾어지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6-11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신 그 하나님의 생각을 알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것이 우리의 참된 복임을 이삭의 축복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원망하기보다 아버지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알고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잘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를 치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여러 가지 가지를 자르실 때 고함만 지르지 마시고 깊이 묵상하심으로 우리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시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망치는데도 하나님은 이루시는 그 은혜를 바라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부족하고 무능하며 기도할 때도 다른 생각과 허영심이 들어오는 우리를 주님이 지금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심을 믿고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8:1-22 벧엘 2000. 5. 14
이삭의 축복을 받아 내기 위하여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삭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삭의 최고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이삭 자신의 기호나 취미로 축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 것임을 알고서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축복을 받고 나서 에서가 들어와서 축복을 간청할 때 이삭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7:33절에서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히 떨면서 하는 이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이나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따라 고기 한 접시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변개시키려 한 것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사건을 통하여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렇게 축복을 애원하는 에서에게 축복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뿐인데 복수로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나중에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주가 되어 축복하는 것까지 연결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에서가 야곱을 죽일 작정을 합니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나서 내가 야곱을 죽여버려야지 하는 말을 리브가가 듣고서는 결혼을 빌미로 야곱을 자기의 친정으로 보내도록 이삭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렇게 하도록 하면서 야곱에게 축복을 다시 합니다. 이것은 전에 에서인줄 알고 축복한 내용이지만 이제는 야곱인줄 알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28:1-4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그 복을 네가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축복을 받고서 밧단 아람의 라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삭과 리브가가 하는 모습을 보고서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8-9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이스마엘에게로 가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아 볼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언약밖의 사람들이 같은 모양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육적인 아들입니다. 그러니 에서와 이스마엘이 함께 통하는 라인이고, 이삭과 야곱이 언약의 라인인데 에서의 의도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삭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도가 자연인의 종교적인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도 이러한 위장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동일하게 주의 일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구별이 됩니까?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가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자랑과 또는 억지로 마지못해 사람눈치 때문에 하는가? 자기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자발적인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좀더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기를 소원하여 진행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일만 지나다보면 내가 괜히 새벽기도 차량오라고 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의 살길이 말씀과 기도에 있음을 더욱 인식하고 주를 더 알아가고 주를 더욱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기를 바랍니다. 에서처럼 어줍잖은 흉내를 내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삭의 축복을 다시 받고서 길을 떠난 야곱입니다. 늘 집안에 있던 사람이 홀로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죽이려하는 곳에서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두렵고 외롭고 힘드는 여행길입니다.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의 나이가 몇 세쯤 되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부분 젊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 에서는 결혼 하였지만 야곱은 결혼을 안하였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니 나이를 계산해 놓았습니다. 야곱이 바로왕을 만날 때 나이가 130세,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에 총리가 되고 7년 풍년과 2년 흉년을 지나 39세입니다. 그러니 야곱 91세에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는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14년 후에 낳습니다. 그러니 91세에서 14년을 빼면 77세입니다. 77세에 도망을 가다가 저녁이 되어서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돌로 베게를 삼아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꿈을 꿉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나 섰는데 땅과 하늘이 연결된 사닥다리입니다. 그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생명과 단절이 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하늘에 사다리를 놓겠습니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사다리를 만들어 하늘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공적을 쌓아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늘까지 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꿈에 사다리가 나타나고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야곱에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이삭이 아니라 야곱에게 나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한마디도 책망의 말씀이 없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것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실 때 어떠한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본질상 진노의 사람이고 본질상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자꾸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강조를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잘못된 하나님의 상이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이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야곱에게 직접주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13-15절입니다. 이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기에 이것을 이제 야곱에게 직접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에게서 두 번 이 언약을 받고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께 직접 이 언약을 받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2) 네 자손이 땅에 편만할지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3)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란 자기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언약을 받은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엘이 하나님이고 베이트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이란 고정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이제는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받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고 이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언약의 절정 최고의 자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절을 봅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는 복을 예수님 때문에 받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이미 야곱에게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나서 야곱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두려움입니다.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이 벧엘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 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념과 성별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서원을 하는데 서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키시고 먹고 입을 것을 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서원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이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믿고서 아멘 하면 될 텐데 그 언약을 자기가 또다시 조건화 하여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를 보탬으로 자기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원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자기의 서원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신변의 보호 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돌아올 때도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작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서원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보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그렇게 서원한 것인데 스스로 이 서원을 지켜내지 아니하는 야곱임을 그의 생애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셔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짓습니까? 아니지요? 세 번째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데 한번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형 에서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지만 서원은 서원이고 자기의 뜻대로 삽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속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할 수없이 벧엘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형이 기다리는데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1:41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라반에게서 도망하여 형에게로 벧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벧엘로 가는 것이 누구의 일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1:13, 이곳을 떠나 벧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벧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다가 세겜에 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겜의 추장과의 사건이 있고나서 또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절입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3절에서 야곱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구약에서는 장소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벧엘이란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여로보암왕 때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언약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2-12:6절을 봅니다. “봉독”
벧엘의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북 이스라엘 남 유다 모두가 하나님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행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라.
야곱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언약을 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벧엘은 어디 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정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전부임을 고백한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처럼 자기 살길 바빠서 불철주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하지만 열 번이나 속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쓸데없이 고생하고 방황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벧엘로 돌아갑니까?
벧엘로 돌아가는 자세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창세기 28:16-22 서원 2000. 5. 21
야곱의 서원을 통하여 성경전체적인 서원의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서원이란 개념은 우리의 소원의 간절함과 긴박함에 따라 즉 나의 절실한 필요에 의하여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든 아니면 생소한 대상이든 간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만한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그러한 대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비는 것 보다는 서원을 하면 더 잘 들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때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 쉽게 해줄 수 있는 입장이라도 한마디 하는데 무엇입니까? 맨입으로 되겠나 하는 말을 하지요. 이러니 우리가 정말 다급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서원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인 서원이란 것은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만 주신다면 제가 이것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서원한다는 기본적이 생각입니다.
야곱도 이런 생각과 별 차이 없이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신은 77세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길을 떠나야 하니 고대 사회일수록 혼자서 다니다가 강도를 당하여도 죽어도 어디서 항변도 못하는 시대인데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이곳에 돌아오게 하고 너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반복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받는 사람은 다르더라도 언약의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주시는 것은 언약을 받는 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이 언약을 받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서 야곱은 나름대로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도 또 자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여 주시고 자기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주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겠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자기를 지켜주시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조건하에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함께 하시겠다고 지키겠다고 자기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 까지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차원보다는 자기의 신변보호가 우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세 가지 서원을 살펴봅시다. 자기를 보호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과 하나님의 전을 짓는 것과 십일조에 대하여 야곱이 그 서원대로 행하였는가를 보면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기는 합니다만 이것이 그 서원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오신 것이기에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건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에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의미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뜻은 다른 것입니다. 야곱의 함께 한다는 생각은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 정도의 함께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혀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되심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하여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5:41절을 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후자죠.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어떠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런 신은 사실 우상입니다. 분명히 나의 필요와 나의 편의와 완급경중에 선택하고 부르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예수님 하여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중심이 아닌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결국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도 자기의 위급중에 꿈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서원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노년에의 고백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보면 나를 나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 때문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오늘날 또다시 쓸데없는 서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전체에서 서원에 대하여 살펴보면 처음으로 서원하는 자가 야곱이고 그 나머지의 서원의 말은 주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편과 잠언 전도서에 조금 나오고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소선지서에 조금 나오고 신약에는 사도행전에서 꼭 두 번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란 말이 구약적인 용어이며 그리고 서원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쓰이는 경우는 자기의 어떠한 특정한 소원을 위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기간 또는 자세가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실인으로서의 서원과 같은 것입니다.
민수기 6:2절입니다. 민수기 6장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인데 남자나 여자나 나실인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 30:2절입니다. 민수기 30장은 일반적인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서원을 하는 동기가 마음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가 서원인데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경우에 결혼 안한 자녀이면 부모가 그 서원을 파기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동의하면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아내의 서원은 남편이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어떠한 절박한 자기의 소원을 관철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고 괴롭게 하기 위한 그런 서원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서로 분방하는 것 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너무 무리한 서원을 하면서 무엇을 드리겠다고 하였을 경우 그 사람이 그 서원을 갚을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레위기 27:8절을 봅니다. 레위기 27장의 서원은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다면 나이에 따라 그 값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가를 정하여 주는데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는데 너무 가난하여 그 대속의 돈을 드리지 못할 때는 제사장이 보고서 그 형편대로 깎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물건중에서 서원한 것이 있다면 우열간에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 부정하면 그 가치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내고 혹시 서원하였다가 그 짐승이나 집이나 간에 무르려고 하면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서원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서원입니다. 자기의 어떠한 소원을 조건으로 내어 걸고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 외에 조건부 서원도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입다의 서원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를 사사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부릅니다. 그러자 한때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내어 좇아놓고 위험할 때 자기를 구하여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자손을 나에게 붙여 주시면 과연 나를 당신들의 지도자로 삼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입다가 서원하기를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를 환영하는 가장 먼저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데 누가 나옵니까?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영접하러 제일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의 태도를 봅시다. 사사기 11:36절입니다.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에 자신이 희생이 됨. 그러나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는데 이것을 참으로 번제로 드렸는가, 아니면 처녀로 시집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봉사하기 위하여 평생 드려졌는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서원에서 보면 서원을 통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서원에는 서원의 대가가 있고 서원에 따른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서원의 의미를 봅니다. 전도서 5:5-6절입니다.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원하였다면 갚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서원은 갚으라고 시편15편 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이 신약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두 곳에서 나오는데 바울이 무슨 서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서원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서 서원한 자들이 네 사람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자들에게 힐난을 받지 않도록 결례와 머리를 깎는 일을 합니다. 이외에는 서원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세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서원과 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맹세에 대하여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인데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한다거나 서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서원이고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서원이나 맹세를 하지 말 것이고 단지 우리에게는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하고자 서원하신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 됩니다.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급한 일이 있거나 사업이나 인생의 중요한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자세로 하면 됩니까? 서원을 하고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사실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있다면 주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나 맹세보다는 이런 말씀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고보서 4:13-16절입니다. 우리가 안개인데 무슨 서원이나 맹세를 합니까? 주님이 허락하시면 이것도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전체의 흐름에서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표가 서원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원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고 입다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에 대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에서 자기가 서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한다고 하시고 성전도 야곱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온전한 성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전한 십일조가 되신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날마다 서원하고 날마다 서원을 파기하는 부도수표를 남발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의 마음과 돌아설 때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 불이행자를 대속하신 분이 계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서원을 하나님앞에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온전한 서원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서원을 온전히 이루어 내신 주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급한 필요를 위하여 서원하기보다 예수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9:1-20 우물가에서 2000. 6. 4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 까지 자기의 축복을 만들어 내려고 하다가 이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로 도망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도망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이제 내가 너로 언약을 세우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는 것이 이미 태중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에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것과 네 자손을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동일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이루시기까지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쁘서가 아니라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을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셔서 결국 언약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알게 하심으로 야곱의 생애를 마무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사 하늘의 기업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기업보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이 땅의 기업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치 야곱처럼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땅의 기업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를 결국은 하나님이 꺾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좋은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더 좋아지기 까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야곱을 통하여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야곱 자신이 훈련받는 부분도 있지만 야곱에게 붙여져서 함께 언약의 자녀로 편입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야곱은 야곱 나름대로 자기의 살길을 찾아 나서는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물어물어 드디어 자기의 외삼촌 라반이 사는 곳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물가에 이르러 라반에 대하여 물어 봅니다. 그러자 마침 그 우물가에 라반의 딸 라헬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이야 수돗물을 틀지만 우리나라도 몇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우물을 길어 먹었지 않습니까? 좀 부자집은 자기 마당에 우물을 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네의 공동우물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우물이란 정보교환장소이지요. 이웃의 소문도 듣고 타지의 소문도 듣는 곳입니다. 이러한 장소에 야곱이 가서 라반에 대하여 묻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우물가에 라반의 딸 라헬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라반의 딸이 양떼를 몰고 옵니다. 혼자서는 돌을 옮기지 못하기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돌을 옮기고 우물을 길어서 양들을 먹게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라헬 혼자서는 못하겠지요. 그래서 야곱이 돌을 옮게 물을 먹게 하고서는 자기가 리브가의 아들임을 말합니다. 그러자 라헬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라반이 달려와서 자기 조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서 한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공으로 일을 하겠느냐 네가 품삯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일해 줄테니 라헬을 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려면 신부의 값을 신부의 부모에게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을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언니보다는 동생이 더 마음에 들은 모양입니다. 17절에 보면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다고 합니다. 새번역에 보면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으며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라헬이 훨씬 예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아마 첫눈에 반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7년을 수일같이 라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물가에서 이지요. 우물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야곱은 우물가에 와야 정보를 알 수 있기에 우물가에 간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우물에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연히 그렇게 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붙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살길을 찾아서 라반에게까지 왔고, 라헬은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간 것이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다른 곳에서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4:27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감사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사를 하는지를 아시지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이곳까지 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지만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왔기에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내용을 종을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물가에서 언약을 받은 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알고 갑니까? 모르고 갑니까? 모르고 가지요.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하면 물을 길어 주고 약대에게도 물을 주면 그 처녀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처녀로 알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처녀가 그 기도의 내용을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평상시의 물 긷는 일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중에 있는 자를 만남으로 그 운명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5-22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도 야곱과 비슷하게 도망을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목자들이 우물물에서 쫒아 내는 것을 막고서 양떼에 물을 먹이게 합니다. 야곱이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인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을 함께 보면 언약을 받은 자의 모습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히려 주도권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윤리 도덕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는 신세이고 또 살인자가 되어서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없는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종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만 이들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에게 붙여질 때 이들의 공통점은 우물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우물가가 신기한 장소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온 여인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속에 들어가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자기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의하여 물을 길러 오든지 아니면 양떼를 먹이러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우리도 다 동일하게 생존을 위하여서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그냥 그렇게 세상의 모습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이 있는 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행하고 있던 때에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여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저 물이나 쉽게 길어 오고, 양떼에 물이나 잘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의 발전이 수도로 연결되는 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합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유일한 싸움이란 어떻게 하여야 이 생존세계에서 더 나은 고지를 점령할까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나라에 편입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다른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이 전쟁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약속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떠나는 아픔이 있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지라도 언약을 받은 자와 함께 동행하는 길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에 우리를 다른 길로 이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받은 사람이란 다른 삶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받고서도 다FMS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 야곱의 언약에 포함이 된 라헬과 레아와 그의 종들까지도 언약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들의 생존경쟁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자녀낳기 시합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야곱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살고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불철주야 애를 쓰고 고생하며 잠도 안자고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디며 모은 재산, 교묘하게 양들을 불린 것,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심으로 결국 하나님의 언약 하나만을 남기시는 것이 언약을 받은 자의 생애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보고서 우리도 그러한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우물물이 아니라 생명수를 말씀하시고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실 물이 아니라 생명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물가에서 일어나 사건이 단지 마실 물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수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저 생존에 필요한 물이라면 이곳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우물을 단지 물로서만 말하지 않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2:2-3 “봉독”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우물이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노래가 되며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9:10절입니다. “봉독”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인도하시는데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구원을 샘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샘물을 어떻게 마십니까? 이사야 55:1절입니다. “봉독” 값없이 거저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로 그저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2:17절에서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우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물마시기 위하여 가다가 영생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영생을 가지신 분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우물가의 사건이 하나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우물가가 생각이 나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누가 미리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이시오 실체이신 예수님이 생명수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누가 나옵니까? 죄 많은 한 여인이 단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서 생수를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물가에 일어나 기적이요 은혜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생수에 취하여 마을로 달려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4:5-6절입니다. “봉독” 무슨 우물입니까? 야곱의 우물입니다. 야곱이 판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운 곳입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에 예수님이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우물가에 기다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세상에 목말라 하던 우리에게 영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이 영생수로 인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른 물을 좋아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원의 샘물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마련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 17:13절 “봉독” 여호와를 떠나는 것이 생수의 근원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달려갑니까? 생존의 현장에서 생명수를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시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29:21-35 총(寵)이 없음 2000. 6. 11
총이 없다는 말은 은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은총이란 사랑을 받다 라는 것인데 총이 없다 라는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하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데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남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성경의 이 총이 없음이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야곱이 처음부터 사랑한 사람이 라헬이지만 그러나 이렇던 저렇던 이제 아내가 되었는데도 계속하여 라헬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는 레아까지 자기의 이내가 되었습니까?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라반입니다. 누구의 모습입니까? 바로 야곱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배가 고파 헐떡거리는 그 간절함을 빌미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는 그런 야곱아닙니까? 그러한 야곱에 비하면 라반은 점잖은 편입니다. 단지 7년 더 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속인 것이며 라헬을 결국 주지요. 그러니 야곱이 더 교활한 속임수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은 간곳없이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보니 레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지만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술이 있고 또 밤에 이루어지니 분간을 못하였겠지요. 당연히 라헬인줄 알고 지냈지만 레아인 것을 알고 왜 나를 속였느냐고 따지니 라반이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 풍습에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일이 없다 라고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일 신혼기간이 지나면 라헬을 줄테니 그 대신 7년을 더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또 다시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7년을 수일같이 지냈는데 결혼하고서 7년을 더 봉사하지 못할게 없지요?
30절을 봅니다. 7일이 지나서 라헬을 주니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칠년을 또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라헬을 사랑하니 레아는 뒷전입니다. 그러므로 주로 어디 가서 잡니까? 라헬에게만 가서 잡니다. 가뭄에 콩나듯이 레아에게 한번씩 오는 것입니다. 아마 라헬과 다투어서 한번씩 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런 신세의 레아입니다. 다투었다니 이상하게 들립니까? 30:1-2절을 봅니다. 라헬이 자기는 자식이 없으니 언니를 투기하여 야곱에게 나도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겠노라 그럽니다. 이 말을 할 때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부드럽고 교양있게 했겠습니까? 내 죽겠다고 하는 정도로 하니 야곱이 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싸운 것이지요?
31절을 봅니다. 이 정도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아에게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태를 여신 것입니다. 얼마나 야곱이 자기를 사랑하여 주기를 원하였으면 장남을 낳고서 무어라고 하는지 32절을 봅니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 하나 낳았다고 하여 야곱의 마음이 레아에게로 돌아서지는 않았는가 봅니다. 33절을 봅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고서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의 뜻이 들으심인데 나의 총이 없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또 아들을 주셨도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이 레아에게로 돌아서지는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라헬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아들을 낳고서도 무어라고 합니까? 34절입니다. 레위입니다. 뜻은 연합이라는 의미인데 나의 남편이 이제는 나와 연합하리라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얼마나 남편이 자기와 연합을 하지 않았으며 이런 이름을 다 지을까요? 이름들에 대하여는 다음주에 한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주어지는 지를 보고자 합니다. 네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도 여전히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0:14-16절을 봅니다. 남편의 잠자리 주도권을 여전히 라헬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서 자기 어머니에게 드리니 이것을 라헬이 달라고 합니다. 합환채는 임신촉진제로 사용되거나 또는 흥분제로 사용되는 그런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그것을 형에게서 달라고 하자 내 남편도 빼았더니 이제는 합환채마저도 빼았느냐고 말하자 라헬이 무어라고 합니까? 내 남편을 형과 동침하게 해 줄테니 합환채를 달라고 합니다. 둘 다 자기 남편이라고 하지만 야곱이 주도권을 라헬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하는 쪽이 레아입니다.
공빈과 인빈이 서로 왕의 총을 받기 위해 시기 질투하는 것이 허준이라는 드라마에 나오지요. 성경의 인물이나 드라마속의 인물이나 인간의 속성이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가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는 한 남자가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와 라헬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라헬도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심으로 자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독차지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합환채를 가지고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라헬을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총이 없는 몇 사람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들입니다. 밧세바는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뺍니다. 우리아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에 오히려 우리아의 희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고 이름이 나온 네 여인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결같이 총이 없는 사람들이고 기구한 팔자요 운명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다말입니다. 창세기 38:1-11절입니다. 다말은 야곱의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인데 시아버지와의 관계속에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유다가 자기 아들 엘을 다말과 결혼시켰는데 큰 아들이 악하여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자기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님의 대를 이어서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동생이 오난인데 형의 씨를 이어주기 싫어서 설정을 할 때 땅에다 설정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의 셋째 아들이 아직 어려서 다말에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아들마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주지 않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 잡아먹는 며느리라고 할만 하지요. 그러니 셋째 아들을 주지 않자 다말이 기생으로 변장하여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하고서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러고나서 임신소문이 나자 바람을 피웠다고 죽이려하자 누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지 도장과 끈을 가지고 증명하자 네가 옳도다 합니다. 다말의 희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편복도 없다 싶은 그런 기구한 운명의 여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라합입니다. 라합하면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는데 무엇입니까? 기생입니다. 기생라합 기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여인입니까?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조국을 배신하고 소문에 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리고성의 진멸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역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세 번쩨 룻입니다. 이방인 모압 여인으로 베들레헴에서 이민온 사람의 집에 시집을 갑니다. 시집을 갔지만 시아버지 죽은 집인데 자기 남편죽고 자기 남편의 동생도 죽어버리고 과부만 세 명 남은 그런 집안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도 벌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오릅니다.
끝으로 마리아입니다. 처녀가 잉태한 것입니다. 요즈음이야 처녀가 아이를 가져도 할말이 있지만 유대인의 사회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처녀의 몸에 아이를 가지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이 네 사람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결같이 복이 없는 여인, 팔자 사나운 여인, 남편복도 없는 여인이 자식복도 없다고 누가 내 어미이며 누가 내 형제이냐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라고 하는 자기의 마음에 칼을 꽂는 것과 같은 예수였습니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세상의 분복을 다 받아 누린 것이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간 것이 참된 복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가 사납다느니, 운명이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 없다느니 저주를 받았다느니 하는 말도 우리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의 저주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세상의 천하고 약한 것이 자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것으로 자랑삼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하고 약한 것이 자랑이 아니듯이 부하고 강하고 지혜롭다는 것이 자랑이 역시 아닙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우리처럼 천하고 약하고 악한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레아에게 하나님이 총을 허락하셔서 그에게서 유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게서 왕이 나오고 그 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주님의 긍휼하심이 바탕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싫어버린바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세상적인 것들이 없다고 하여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총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여기에서 끊어지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으로 다 누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 세상의 분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야곱이 나중에 죽을 때 누구 옆에 묻히는지 아십니까? 라헬입니까? 레아입니까? 그렇게 사랑한 라헬옆이 아니라 레아옆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죽자 철드는 것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길가에 장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레아는 나중에 죽고서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있는 곳에 장사를 지내고서 자기도 죽을 때에 어디다 묻어 달라고 하는가 하면 레아 곁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9:29-33절입니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나도 그곳에 장사하라고 하면서 죽습니다.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보여준 두 가지 하나님의 계시가 손자를 축복할 때 손을 어긋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장자가 더 축복받기를 원하여 야곱의 오른손으로 가게 하였지만 야곱이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죽음앞에서 라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레아에게 가는 것입니다. 라헬은 사랑을 받았지만 레아가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더하신 것을 보이는 것이 야곱의 유언에서 자기를 레아 곁으로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한 가지 소망은 이 세상의 위로도 아니요 사람의 은총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만 있다면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아에게 은총을 베푸셨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긍휼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은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0:1-24 경쟁 2000. 6. 18
8절에 보시면 내가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고 합니다. 자기 언니와의 자녀낳기 경쟁에서 이겼다고 이름을 납달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이렇게 인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믿음의 조상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열두 지파는 무언가 태어나는 것도 고상하게 아름답게 신비롭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을 보면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욕망, 경쟁, 시기, 질투 이러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음을 또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보기 전에 잠시 야곱의 도망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처신을 그동안 보았습니다만 몇 가지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평전이라는 책을 지난주에 책소개하는 것을 듣고서 한권 사서 보았는데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 즉 장자가 되리라는 것을 리브가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 장자가 되리라는 기미마저 보이지 않자 드디어 형의 배고픔을 동원하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권리를 죽 한 그릇에 사기는 하였지만 30세에서 70세까지 40년을 기다려도 누가 너 장자하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서 리브가와 야곱의 합작으로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속여서 받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이삭이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설교중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사람의 기호와 취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야곱을 다시 축복하여 하란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약 180리길인데 하루만에 온 것입니다. 죽도록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야곱에게 하시자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겨우 자기의 먹을 것 입을 것 해결하여 주시면 하나님으로 섬기겠고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리고서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집 가까이 와서 라헬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버리는 것입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 이 부분을 야곱평전에서 잘 말하고 있어서 소개합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를 눈매가 아름답고로 말하기도 하고 눈이 부드럽다 약하다라고 말하는 데 시력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적 매력이 없다 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여인들의 특유한 성적 매력이 라헬에게 있었다고 그 당시의 여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이라고 하여도 얼마나 자기의 취향을 따라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란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챙겨나가는 것, 이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도 다 동일합니다. 라반이든 레아이든 라헬이든 서로 서로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경쟁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통하여 이들의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라헬만 사랑하고 레아를 등한히 하자 하나님이 레아의 총이 없음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이름을 지어야 할텐데 어떻게 이름을 짓습니까?
29:32절, 르우벤 뜻은 ‘보라 아들이다’ 남아 선호사상은 어디라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라 아들이다 하면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권고를 가지고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는 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29:33, 시므온, 뜻은 ‘들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29:34, 레위, 연합, 이제는 세 명을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는 이름입니다. 29:35, 유다, 찬송함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믿음의 표현 같아 보입니다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안됩니다. 야곱이 자기를 보호하여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정도인데 레아인들 별수 있습니까? 단지 자기의 억울함이 풀렸으니 이제 아들을 네 명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이겼다 야호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런 정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네 명의 아이로 만족하지 않고 나중에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자 자기도 자기의 시녀를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경쟁을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무리 백방의 노력을 하고 야곱을 거의 독차지 하여도 안되니 자기의 시녀 빌하를 주어서 자기 아들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단입니다. 30:1-6절, 단, 억울함을 푸심, 그러나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푼 것입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냐 그렇게 하게 하니까 자기의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고서 자기의 몸종이니 자기의 품에 두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데 단, 나의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 남편을 두고서 두 자매가 투기하고 질투하는 그 소리를 들어주셔서 응답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언니가 네 명의 아들을 낳기까지 얼마나 투기가 불 붙었겠습니까? 그러니 나로 아이를 낳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애써서 일하여 놓고서 속으로는 자기의 공로를 챙기면서도 겉으로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라면 지금 자기의 받은 것이라는 것을 몽땅 거두어 가버려도 할말이 없이 당연합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여야 할텐데 만약 라헬에게서 단을 빼앗아 간다면 하나님과 싸울 라헬입니다.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전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와 경쟁과 투기속에서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하나 사서 집들이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하면 정말 은혜라면 그 집을 내어 놓으시지요 하면 아멘하여야 하는데 당장 안색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먹을 것 안먹고 입을 것 안입고 장만하였는데 내어 놓으라니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이라면 앞으로 은혜라고 하지 맙시다.
30:8절입니다. 납달리, 경쟁 라헬의 여종에게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라헬이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납달리입니다. 내가 언니와 경쟁하여 크게 이겼다고 좋아하면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6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 언제 한번 양보하여 낳은 자녀가 있습니까? 서로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시기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자녀 4명으로 만족이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생산이 멈춘 줄 알고 어떻게 합니까? 라헬이 자기의 몸종 빌하를 주듯이 자기도 자기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12절에 보면 갓입니다. 복되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가 야곱에게서 아이를 낳아 주었으니 복되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복의 기준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자기들의 복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이 출산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시기와 경쟁을 하는지 보게 됩니다.
실바가 두 번째 아이를 또 낳습니다. 그러자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13절에서 기쁘다 라고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한풀 꺾여져야 하는데 경쟁의 불은 끝이 날줄 모릅니다. 산불이 나도 어느 정도 지나면 자연 소화가 되는데 사람의 경쟁의 불은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들이 자녀를 두명씩 낳고 나자, 잠시 조용하게 보이든 자매간에 또다시 불꽃이 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하여 들고 온 것입니다. 임신촉진제로 사용되는 식물인데 이것을 레아에게 드리니 라헬이 그것을 보고 달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레아가 분노하지만 라헬이 그 대신 자기의 남편을 하룻밤 언니에게 양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의 남편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레아가 합환채를 주는 대신 야곱을 하룻밤 자기와 동침할 수 있기에 양보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레아에게 아들을 주시니 그 아들을 받아서는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18절입니다. 잇사갈, 값 자기의 시녀를 남편에게 준 값으로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합환채도 동생에게 주었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이름을 값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가 또는 삯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딸까지 낳습니다. 이제 레아는 없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몸에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고 자기의 시녀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아들 일곱과 딸까지 있습니다.
처음에는 레아에게 야곱의 총이 없어서 하나님이 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제는 라헬이 총이 없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몸에서는 자녀가 없고 시녀에게서만 두 명을 얻었으니 이를 하나님이 보시고 라헬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라헬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허락하셔서 태를 열어 아들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아들을 얻고서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이제 내가 내 몸으로 아들을 하나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만족도 끝이 없습니다. 상대방과 자꾸만 비교 경쟁을 하니 상대적인 빈곤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처음 텔레비젼 나올 때 흑백, 동네 한 대 정도이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평면 아니면 안되지요. 그런데 이제는 평면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겸용 초박형 벽걸이용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제의 평면 텔레비젼은 이것을 보는 순간 고물이 되어 버리고 아 나는 가난하구나 언제 저런 것 한번 가져볼까? 그러면 더 경쟁을 하여야지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광고란 없는 욕망까지 만들어 내어서 가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에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이고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요셉, 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라헬의 둘째 아들의 출생까지 함께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5:16-20절입니다. 라헬이 난산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서 죽습니다.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어 그렇게 짓습니다만 야곱이 베냐민이라고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태어난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의 시기와 경쟁과 질투속에서 태어난 이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에 인간의 선제적인 조건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인간이 타락한 후로는 자기 주인이 되어서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세계에서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가 끊어지지 아니함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들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예 다 쓸어버리시고 끝장을 내어 버리시면 될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좋으심이 죄로 인하여 좋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그 상태를 회복하시고 유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말씀으로 이루어 내셨지만 그러나 재창조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재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피로 만들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 보다 죄인을 의인 만드시는 것이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의 은혜를 보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어 가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신명기 7:6-11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두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언약을 인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그렇게 경쟁과 시기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역대상 16:7-36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실 때 이스라엘은 인수가 매우 영성하여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속을 위하여 보호하시고 가나안에 들여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라헬과 레아 못지않게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교회안에서조차 얼마나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많습니까? 그러한데도 우리를 부르심은 무엇때문입니까?
디도서 3:5절입니다. “봉독”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욱 은혜의 풍성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6-11절을 봅니다. “봉독” 쓸데없는 변론을 하지 맙시다. 무익합니다. 족보, 변론, 율법에 대한 다툼을 버립시다. 이미 경쟁이 끝나고 은혜가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경쟁이 끝난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약속으로 받았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경쟁이 끝난 안식과 쉼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경쟁끝. 행복시작.
창세기 30:25-43 야곱과 하란 2000. 6. 25
야곱이 하란에서 사는 동안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까? 20년을 삽니다. 이 20년 동안의 야곱의 고생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왜 이런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서 선택을 하셨다면 태어날 때부터 장남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장자권을 가지고 속이지 않게 하시지 않고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록 차남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장자의 축복을 하지 않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을 오게 되고 하란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여놓으시지 않고 왜 사막으로 인도하여 물도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없다고 양식없다고 길이 험하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원망하기 전에 주시면 될텐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없습니까? 왜 이리 고생이 심하노 차라리 탁 죽어서 천국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고생할 것 다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명기 8:2-3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대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 밥이 모자랄 때는 어떻게 배부르게 먹느냐가 문제이고, 이제 배가 부르면 어떻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먹는가 하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사막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괴로운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힘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내 마음대로 나의 뜻을 세워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하란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인생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 나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예수 믿는다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식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기초가 안되어 있는 것인지 신앙클리닉으로 공부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요? 그런데도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하여 악착같아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예수를 믿는데도 어려움이 있으면 무언가 예수를 잘못 믿어 벌을 받아 저렇지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여유와 넉넉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헌금을 안하고서 모으니까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소득의 십분의 일 이상을 헌금으로 하지요. 십일조 감사 선교 건축들의 헌금을 하고자 하니 더욱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이라도 장만을 하고, 회사에서도 혹독한 상사가 되어서 승진을 빨리 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야곱도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부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 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봉사하고서 나서 야곱이 라반을 떠나려고 합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이 부자가 되었으니 야곱이 간다고 하니 이제야 품삯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정하는 품삯이 양과 염소 중에서 얼룩진 것을 따로 구별하고 나서 따로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얼룩진 것이 나오면 그것을 자기의 품삯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라반이 생각해보니 별 손해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양이나 염소 중에 얼룩이 있고 점이 있고 검은 것이 많지 않지요. 주로 희거나 회색계통의 양이나 염소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흑염소가 많지만 대부분의 목축하는 염소들은 희거나 회색의 염소로서 젖을 생산하는 염소입니다. 여기다가 얼룩진 것을 구별하여 3일 길이나 떨어지게 하고서 목축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계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무껍질을 벗겨서 얼룩덜룩 하게 하고서 양이나 염소가 물먹으러 와서 그것을 보고서 새끼를 배면 얼룩덜룩한 양과 염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어떤 속설로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만 그러나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곱이 오랫동안 양과 염소를 치다보니 흰 양이나 흰 염소에게서도 얼룩배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룩진 것을 다 구별하여 가더라도 얼룩배기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모르지만 야곱의 빠른 계산으로 보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얼룩진 것의 번식을 위하여 힘을 쓰는 것입니다. 나무껍질 보고서 새끼가 얼룩진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고서 오리고기 먹으면 오리발 나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얼룩진 것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얼룩진 놈이 새끼를 배게 하였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따로 놓았는데도 그렇게 나오는 것은 양과 염소의 임신 기간이 있지요? 그러니 구별해 놓아도 임신 중에 있는 것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31:10-12절입니다. “봉독” 꿈에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전부 얼룩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라반의 소행을 보시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기까지의 야곱의 생애가 어떻습니까? 창세기 31:38-41절입니다. “봉독” 야곱의 20년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다가 도적을 맞거나 짐승에게 찢겨 죽으면 자기가 다 물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서고 밤에는 추위를 무릎서고 일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결혼하고서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서로 시기와 질투 속에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삼촌 라반이 열 번이나 자기의 품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살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란에서의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라반에게서 호되게 당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였으면 라반에게서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이 자기의 딸들을 위하여 14년을 봉사 하였으니 딸들에게도 14년 동안 일한 것이 딸의 공적도 있기에 최소한 10%정도는 딸에게 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14년 동안 양을 1천마리로 늘렸다면 적어도 딸에게 100마리는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이것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라반의 딸들이 야곱과 함께 도망가면서 하는 말이 31:14-15절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14년 품값으로 받은 그 돈을 라반이 다 먹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응당 돌아갈 것까지 다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돌아올 몫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저것은 나에게 어느 정도 돌아오리라 기대 하였는데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일이 잘못되어 손해가 오는 경우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겨우 해결하는 정도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셨고,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 말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성도가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의 노력보다 얼마나 더 악착같아야 하겠습니까? 일요일 마다 쉬어야지요.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까지 하면서 직장생활 사업하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남보다 앞서고 윗자리에 오르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였으니 정말 불철주야 애쓰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고 하니 정말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는 것을 실감을 하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내가 피땀으로 번 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번 것을 누가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까?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라반의 말을 한 번 더 봅니다. 31:43절입니다. 딸들이 자기 딸이요 자식들도 자기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이 정당하게 14년 일하고 받은 아내이고 그리고 자기의 아내에게서 낳은 자녀이니 자기의 자녀이고 짐승떼들도 자기의 정당한 품삯인데 라반이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 빼앗아 갈수 있지만 어제밤에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선악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참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영악하고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하여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부모의 유산없이 자기의 정당한 힘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여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희소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사는 것은 세상에서의 출세나 성공이나 부자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돈버는 일에 마음을 쓰고 애를 쓰면 돈은 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러한 시련속에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미 언약을 하셨지만 야곱이 만약에 하란에서의 생활이 안락하고 성공적이었다면 그냥 머물러 있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서두에서 보았듯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라는 개인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자기가 신이고, 왕이고 주인이기에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부하로 신하로 부려먹으려는 그런 야곱을 꺾으시는 것이 하란입니다. 결국 하란의 마감이 얍복강에서 일어나는데 지금까지의 하란의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허리가 위골되어 버리는 불구자가 되는 것이 하란 생활의 종착점입니다. 얼마나 항복을 안하였으면 하나님에게까지 대어드는 야곱입니까? 그런데 이런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움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가야할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스스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 붙어 있으려고만 합니다. 세상에 늘어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떼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야곱평전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바로 천국에 데려가시지 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실직, 이혼, 이별, 전학, 이직. 실연, 재정적 어려움, 파산, 망신, 비난, 위축, 쇠약, 교통사고, 갑작스런 죽음, 낙방, 시험, 핍박, 자녀의 일탈 등등 오만가지 일을 다 겪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장자의 복을 받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이곳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를 하란에 보내어 고생하게 합니까? 아니지요. 에서는 자기도 부자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선물로 바치자 에서가 무어라고 합니까? 33:9절에 내 소유도 넉넉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고생하고 얻은 짐승떼보다 에서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적어도 자기의 개인 군대가 400명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인데 에서가 아브라함보다 군대가 더 많습니다. 에서가 세상에서의 힘과 부과 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다면 에서가 되는 것이 났지요.
그러므로 오늘 성도에게는 세상의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 더욱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을 이제 감사하는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서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과 난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좋다고 하면서 살면 더욱 큰 시련으로 떼어 놓고야 마시는 주님의 고집에 항복을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이번 주의 2주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