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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7)
교회의 직분④ : 장로의 의무(직무)
말씀 : 행 20:28-35; 벧전 5:1-4
많은 사람들이 장로들의 의무는 교회의 정책을 수립하고, 재정을 관리하며, 행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인들에 대한 목자적 지도를 한다는 것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의무로만 생각하고 장로의 의무는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크게 잘못되었다. 교회에서 목자적 지도는 장로와 목사에게 기본적인 의무로서 똑같이 지워져 있다. 단지 목사는 가르치는 일과 목자적 지도에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장로들은 세상에서 다양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목사와 협력하여 목자적 봉사를 한다. 그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로는 본질적으로 목사와 같은 목자적 의무를 지고 있다. 성경에서 장로의 의무에 대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이다. 사도행전 20:28-35절을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 보면 장로는 양떼를 치고 감독하는 자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았다”(행 20:28)고 함으로써 장로를 세우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가 누구의 뜻을 따라 봉사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장로들에 대한 직분적 권위의 원천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을 투표로 선택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 직분적 권위의 원천은 아니다. 성도들은 단지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장로로 불러 세우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될 뿐이다. 성도들이 선택할지라도 장로들을 세우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장로는 성도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수행하는데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교회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니라 신정정치이다. 장로는 교회 성도들의 여론을 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를 불러 세워주신 성령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고 그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와 대변자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 아니라, 직분자로 불러 주신 주의 이름으로 언제나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의 사역을 언급할 때는 주로 목자상을 사용하고 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내 양의 무리”라고 하면서 그 지도자들을 “목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2, 7, 31).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고, 그의 백성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심으로 선한 목자의 본을 보여 주셨다(요 10:11).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그의 양을 치는 목자로 세우시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요 21:16-17). 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주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로 봉사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먹이고, 돌본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을 치는 일은 목사들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모든 교회 직분자들이 해야 하는 봉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1-4절에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했다. 바울도 사도행전 20:28절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장로는 교회에서 목자로서의 의무를 지고 있다. 장로는 기본적으로 목사와 같이 양떼를 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장로들에게 그들 스스로에 대한 의무와 양떼를 향한 의무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1. 자신에 대한 장로의 의무(행 20:28-35; 벧전 5:1-4)
1) 장로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행 20:28)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다(행 20:28).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매일 삶 가운데서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장로가 깨어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양떼를 지킬 수 없다. 사단은 목자를 넘어뜨리면 쉽게 모든 양무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로와 목사가 실족하고 범죄 하게 될 때는 자신만이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에 큰 해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살펴보아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한다.
2) 장로는 교리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행 20:27-28)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삼가라’고 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한 것은 생활뿐만이 아니라, 그가 전한 진리를 마음에 두고 한 경고였다. 바울은 27절에 보면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삼가라’는 말 속에는 거짓 교리를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울은 앞으로 거짓 스승이 교회안팎에서 일어날 것을 내다보고 경고한 것이다. 사도행전 20:29-30절을 보면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들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일찍이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7:15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다.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짓 교리에 대하여 끊임없이 깨어 있는 것이다. 장로가 진리 안에서 사는 최선의 길은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장로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한 시편 기자처럼 말씀을 즐기며 사는 생활을 해야 한다(시 119:103).
나아가, 장로는 신앙고백의 내용을 통해 교리적으로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조직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장로교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19) 장로교회는 이 교리적 표준서를 기치로 내걸고 “우리는 이 고백서에 담긴 내용이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장로는 임직 받을 때 하나님과 교회 회중 앞에서 “본 장로교회 교리표준인 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교훈한 교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히 마음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익숙해야 한다. 신앙고백에 대한 지식은 여러 책들을 읽을 때에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신학자의 글을 읽더라도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게 하고, 목사의 설교에서도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장로는 성경뿐 아니라 신앙고백서의 내용이 밝히는 진리에 대하여 민감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3) 장로는 자원함으로 봉사해야 한다(벧전 5:2)
사도 베드로도 사도 바울처럼 장로들을 양무리를 치는 자들로 보았다. 그는 특별히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 예수님이 그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셨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주의 양을 치는 자들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참조. 요 21:15-17). 그는 로마제국 동쪽 5개 지역교회에서 봉사하는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어떻게 칠 것인지를 말하였다. 그가 준 교훈은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이별사를 생각나게 한다. 베드로도 이 편지를 보낸 후 얼마 있지 않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교회의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자원함으로 하라”고 했다(벧전 5:2). 하나님은 억지로 그의 백성을 돌보는 종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억지로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나 친구의 강요로, 혹은 목사나 장로의 권고 때문에 장로가 되어 봉사한다면 “억지로”하는 것이 된다. 장로는 강제 징집된 군사처럼 억지로 할 것이 아니고, 자원입대한 의용군처럼 기쁨으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것처럼(고후 9:7), 자기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봉사하는 장로를 사랑하신다.
4) 장로는 더러운 이를 위해 하지 않아야 한다(벧전 5:2)
사도 베드로는 장로는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라고 했다(벧전 5:2). 장로는 삯꾼의 정신으로 봉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꺼이’라는 말은 앞에 ‘자원함으로’라는 말보다 훨씬 강한 뜻으로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장로는 언제나 깨어 있어 속된 명예나 인기나 어떤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큰 기쁨을 가지고 봉사해야 한다.
바울이 디도에게 장로의 자격에 대해 말할 때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다(딛 1:7). 사람은 물질에 매우 약하다. 장로나 목사가 물질 문제로 비난을 받게 된다면 이 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것이 없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장로들 중에 건축과 선교헌금 등을 취급하다가 자기 사업이나 이권을 이용함으로써 문제가 종종 일어나곤 한다. 특별히 목사들 중에서도 물질 때문에 문제를 일으켜 비난을 사는 일을 가끔 보게 된다. 이것은 모두 탐욕 때문이다. 목사는 가능하면 교회에서 금전을 취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질에 대한 시험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크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별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장로들의 탐욕에 대해 경고했다. 사도행전 20:33-35절을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다. 여기서 보면 바울 사도는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하면서 나아가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다”고 덧붙이고 있다. 신약교회 건설 초기 바울은 물질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킴으로써 미래의 교회 봉사자들인 장로와 목사들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장로는 물질과 돈에 대해 탐욕을 갖지 말아야 하며, 열심히 일하여 자기 가정에 쓸 것을 대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어야 한다. 장로의 생활은 근면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아름다운 삶을 드러내어야 한다(참고. 엡 4:28).
5) 장로는 주장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벧전 5:3)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한다(벧전 5:3). 이것은 장로가 세상에서 하듯이 권세를 바라서도 안 되고 그것을 남용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사도였음에도 자신을 여러 지역의 장로들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함께 장로된 자”라고 하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가 오순절에 행한 설교를 통해 예루살렘에 큰 규모의 첫 신약교회가 탄생했다(행 2장). 열한 명의 동료 사도들과 장로들과 함께 그는 동역자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당시 사도들은 장로로 불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에서 장로직 역할을 다른 장로들과 함께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현재 교회에 복음을 증거 하는 종의 입장에 있으면서 교회 장로들을 향하여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겸손히 섬기는 교회 직분자의 아름다운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직분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임직을 받아서 권세를 부리기를 좋아하는 세상 풍조가 교회에 침투해 오고 있다. 교권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종종 시험거리가 되곤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풍조가 있어서 에스겔은 이렇게 경고했다. 에스겔 34:4절을 보면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고 했다. 주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행세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속한 일이라고 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막 10:44). 사도 요한은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정죄하였다(요3서 9-10).
장로는 결코 교인들에게 통치자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 같은 장로들 세계에서도 으뜸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종종 한국 교회에서 당회 내에 장로들의 서열이 문제될 때가 있다. 먼저 장로로 임직되었다는 이유로 선임 장로, 혹은 수석 장로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수석 장로’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의 예절문화상 선임자를 예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우는 주변에서 해 주는 것이지 스스로 예우를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먼저 장로가 되었거나 뒤에 장로가 되었거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의 가치와 권위는 동일한 것이다.
6) 장로는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벧전 5:3)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다(벧전 5:3). 장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를 본받아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한 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모든 사람은 그의 종들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가 특별히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한 것은 주장하는 자세로 권위를 행사하는 자에 반해서 한 말이었다. 장로는 겸손하게 봉사함으로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여 무엇을 하게 하기보다는 스스로 겸손히 행함으로 본을 보여 행하도록 해야 한다.
장로는 양무리의 목자다. 옛 목자들은 양무리를 뒤에서 몰지 않고 앞장서 걸으면서 양무리가 따라오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장로들이 따라야 할 목자장이다(벧전 5:4). 장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사랑, 헌신을 통해 양무리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이를 위해 항상 자기를 살피고 깨어 있어야 한다.
2. 양떼를 향한 장로의 의무(행 20:28-35)
1) 장로는 양떼를 거짓 스승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행 20:29)
사도 바울은 장로를 감독이라고 불렀다. 감독이라는 말은 보호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행 20:28; 빌 1:1; 딛 1:7). 감독은 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말한다. 양은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약하고 유순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누가 돌보거나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양은 언제나 위험하다. 성경은 목자 없는 양들의 비참한 상태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민 27:7; 슥 10:2). 성경은 성도들(교회)을 양떼라고 부른다. 장로는 양떼의 감독으로 양 우리 안팎에서 닥쳐올지도 모를 위험을 항상 살피고 보호해야 한다. 잠언 27:23절을 보면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게 마음을 두라”고 했다.
양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거짓 스승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이별사의 핵심은 ‘사나운 이리’를 경계하고 양떼의 보호를 부탁하는데 있었다. 사도행전 20:29절을 보면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바울은 거짓 스승을 “사나운 이리”라고 불렀다. 이리란 양떼에게 가장 무서운 원수로서 아낌없이 물어뜯고 생명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거짓 스승은 “사나운 이리”와 같이 교활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교회에 무서운 해를 끼치는 존재인 것이다. 장로는 교회의 감독으로 거짓 스승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해야 할 사명이 있다.
바울은 거짓 스승이 교회 밖에서 들어올 뿐 아니라(29),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사도행전 20:30절에 보면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했다. 여기서 ‘어그러진 말’이란 복음의 진리를 어지럽히고 왜곡시키는 것을 말한다. 거짓 스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그 본질이 바로 드러나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 스승은 진리를 전적으로 주정하지 않은 채 교묘한 말로 왜곡하고 속임으로써 자기 정체를 감춘다. 바울이 장로들에게 “일깨어 있으라”고 권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31). 바울은 거짓 교리를 전하는 흉악한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은 사도였다. 그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다(갈 1:9). 그에게 있어서 거짓 스승은 “십자가의 원수들”이었다(빌 3:18).
장로는 거짓 스승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인 줄 알아야 한다. 장로는 이 사명을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장로가 이 사명을 수행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시험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격렬한 투쟁도 각오해야 한다. 장로가 거짓 스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권위나 조직의 힘으로가 아니고, 교회의 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다(행 20:32; 딤후 3:16-17).
장로는 먼저 교회 밖에서 오는 거짓 스승을 경계하고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 교회의 집회에 강사를 선택하고 청하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번 강단에서 전한 잘못된 가르침을 거둬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에 큰 해를 끼치게 된다. 최근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기치 아래 신학의 입장이 전혀 다른 교회들끼리 강단 교류를 한다는 말이 들린다. 이런 식의 교류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허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회(치리회)는 강단 허용에 있어서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강단의 진정성을 지킬 책임은 담임목사뿐 아니라 모든 장로들(당회)에게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장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짓 스승으로부터도 교회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실제로 장로는 임직된 교회의 감독으로서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할 큰 사명이 있는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은 함께 장로된 동역자들로부터 올 수도 있고,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는 부교역자들이나, 심지어 담임 목사로부터 올 수도 있다. 장로는 임직을 받은 자기 교회의 양무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모든 동역자들을 오류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특히 장로는 담임목사를 오류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다. 목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잘못될 수 있는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시류를 따라 그릇된 신학을 수용하거나 잘못된 교리를 좇음으로 양떼를 그릇 인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장로가 의도적으로 목사의 결함을 찾으려 하거나 비판을 전제하고 설교를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태도가 전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겸허하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을 자기 마음에 조금 들지 않는다고 해서 목사의 흠을 잡으려 해서도 안 된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주해가 전혀 잘못 되었거나 설교 내용이 장로교 신앙고백에 담긴 교리와 전적으로 어긋난다고 확신했을 때 겸허한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교정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잘못된 교리로부터 목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양무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대로 형제 사랑에 기반 한 권징의 단계를 밟는 것이 바른 일이다. 이에 대한 동기와 목적은 언제나 교회의 지도자를 오류로부터 보호하고, 결과적으로 양떼를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하는데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장로나 교인들이 설교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감사하는 말 이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대하여 매우 민감하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정의를 고려할 때 찬양과 감사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맡은 목사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언제나 무오한 선포자가 될 수는 없다. 특히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에 민감한 것 같다. 이런 정서가 교회정치의 장로 직책을 언급하는 데서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장로의 제일 중요한 직책 중의 하나가 거짓 교회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행 20:28-31). 설교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이라고만 하고 있다.
개혁교회에는 개교회의 당회마다 빈도는 다르지만 매년 몇 차례 당회의 회순에 설교토론 순서를 넣고 있다. 이때 목사에게는 어떤 돌발적인 말이나 비판이 나올지 조금은 긴장하게 된다. 목사는 사회를 하면서 이 순서를 진행한다. 이때 혹 설교 내용 가운데 의심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고 필요하면 해명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장로들이 심방하면서 교인들로부터 들은 목사의 설교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 중 누구도 이런 설교에 대한 토론 전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목사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전통이 신실한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하는 한 방편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회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장로교회들도 교회정치에서 장로의 직무에 대해 양떼뿐 아니라 목사의 교리와 생활의 순수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미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교회정치 중 장로 항목에는 “장로들은 말씀의 봉사자들의 교리와 행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가 사역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의 교회정치 중 장로 직책 부분에서도 “장로의 직분은 맡기워진 양무리를 개별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부지런히 지켜 교리와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여기에 언급한 장로는 가르치는 장로(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치리장로) 양자를 포함한다. 장로와 목사는 다 함께 양무리를 교리의 탈선과 도덕생활의 부패로부터 보호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 안팎으로부터 올 수 있는 ‘흉악한 이리(거짓 스승)’를 경계하고 양떼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행 20:28-31).
장로가 잘못된 교리와 생활을 분별해 내고,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말씀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바른 이해가 없이는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는 건전한 개혁주의 입장의 주석을 적어도 한두 벌 갖추고 성경을 읽고 그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아가 장로는 거짓 스승의 거짓 가르침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교회의 공고백의 내용에 익숙해야 한다. 교회는 일찍부터 거짓 스승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신경(신앙고백서)을 받아 읽혀 왔다. 고대 교회에서는 영지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사도신경을, 또 아리우스의 오류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니케아 신경을 차례로 받았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날까지 이 신경에 담긴 진리를 통해 거짓 교리를 가려내는 표준으로 삼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신앙적 후예들은 각기 지역적인 교회의 역사적 환경을 따라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받고, 개혁주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어 왔다. 대륙의 칼빈주의 ‘개혁교회’들은 세 가지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도르트 신조)를 일치신조로 받았고, 영국과 스코틀랜드계의 칼빈주의 장로교회들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았다. 이 신앙고백은 성경의 복음을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에 속한 장로들은 이 신경의 내용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거짓 교리를 분별해 낼 수 있다. 장로는 이 신앙고백 내용을 스스로 연구할 뿐 아니라, 교회와 노회 혹은 전국적인 모임을 통해서도 전문 강사를 청하거나 장로 중에 발표자를 선정하여 연구, 발표하게 하고 토론함으로써 지식을 넓혀 가야 한다. 장로가 ‘흉악한 이리’로부터 양무리를 보호하고 자기 사명을 다할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교회가 받은 신앙고백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장로들은 권징에 신실해야 한다(마 18:15-20)
장로는 교인들 가운데 교리와 도덕적으로 잘못을 발견했을 때 개인적인 충고와 권면을 통해 교정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결과를 맺지 못할 때 장로는 이를 당회에 보고하고, 당회는 함께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할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당회가 교정과 치유를 위한 공적인 권징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렇게 권징을 시행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일찍이 가르쳐 주시고 명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8:15-18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다. 교회는 양의 무리다. 한 마리 양이 길을 벗어났을 때 이를 속히 발견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 목자적 장로의 사명이다. 교회의 권징은 먼저 성도들 사이의 교제 가운데서 시작된다. 권징을 통해 주께서 가르쳐 주신 질서를 귀하게 여기고 이에 따라 시행하도록 노력하고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 한 교인이 구역 장로에게 찾아와 어떤 형제 혹은 자매에 대한 죄문제를 알리거나 제기하게 될 때, 장로는 먼저 그 형제, 자매를 만나 회개를 권고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한 회개를 위한 노력이 결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장로는 범죄자의 회개를 위해 직분자의 입장에서 나설 것이다. 그가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모든 과거를 잊고 끝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라는 권고를 듣지 않으면 교회의 당회가 공적인 권징 과정을 밝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양을 바른 길로 돌이켜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다. 교회의 권징은 최후의 단계까지 모두가 교정과 치유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출교도 최후의 극단적인 치유 방법인 것이다.
교회의 권징은 성도들의 교제생활에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시작되지만, 이것이 효력을 거두지 못할 때 교회의 공식 치리기관인 장로들의 회인 당회가 하게 된다. 장로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연합해서 교인들의 교리와 기독교 윤리로부터의 탈선을 교정하기 위한 권징시행에 성실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로들의 회인 당회가 그의 법과 말씀을 따라 시행하는 교회적 권징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셨다(마 18:18, 16:19). 권징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명령이다. 권징을 통해 교회는 교리적 순수성과 생활의 성결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런고로 교회의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명을 따라 교회를 살피고 권징을 시행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3. 장로들은 교인 가정을 심방해야 한다(히 13: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인은 그의 몸의 지체라고 한다(고전 12:27). 심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맥박과 체온을 점검하고 건전한 영적 성장을 돌보는 일이다. 종종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는 것은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나 전도사가 하는 일이고 다스리는 장로의 의무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께서는 장로를 교회의 감독으로 세워 주셨다. 감독하는 일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을 때에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사도시대의 교회생활을 따라 처음 장로 제도를 도입해 장로들로 하여금 성찬예식을 베풀기 전에 자기구역의 모든 신자 가정을 방문하고 영적 생활을 살피게 했다. 교회가 1년에 4번 성찬예식을 베풀었으니, 장로들은 모든 교인 가정을 매년 적어도 네 번씩 심방한 셈이다. 장로들은 당회에서 교회정책을 세우고 행정 하는 것이 주 임무가 아니다. 규칙적으로 교인들의 가정과 목자적 접촉을 함으로써 양떼를 돌보고 섬겨야 하는 사명이 있다.
개혁교회에서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의 전통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여 장로들이 교인가정을 심방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이행한다. 다만 제네바 교회처럼 성찬식을 앞두고 심방하지는 않는다. 당회에서 구역을 나누고 장로 두 명씩 조를 만들어 그 구역에 속한 가정을 심방하는데, 1년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공식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 교회정치에는 장로 직책에 이런 규정의 문장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장로들은 유익이 되는 만큼 빈번히 가정심방을 할 것이나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해야 한다.
그래서 당회는 규칙적으로 심방 보고를 하고 받는 회의를 갖고 보고 받은 결과를 살펴 기도한다. 목사는 일반적인 심방을 장로들에게 맡기고 병자와 고독한 교인들에 대해 특별 심방을 한 후 보고한다. 목사는 장로들로부터 심방 보고를 받고 교인들 가정의 상황을 잘 파악한 후 목사의 특별 심방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가정을 심방하게 된다.
성경은 교인들과 장로 양자에게 다 심방을 통한 책임을 묻고 있다. 히브리서 13:17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과 교인들은 어느 날 주 앞에서 어떻게 인도하고, 또 순종했는지에 대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장로들의 가정 심방은 여러모로 교회생활에 유익하다. 장로들은 가정 심방을 통해 교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되고, 당회에서 교회의 예배, 교육, 선교, 구제, 청소년 지도 등에 관해 의논하고 프로그램을 만들 때 크게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가정 심방을 위한 준비
장로의 이름으로 하는 가정 심방은 방문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가정 심방은 혼자 하는 것보다 적어도 두 사람이 조를 만들어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이유는 심방 중 대화 하는 일에 서로 도움이 되고, 그 가정의 형편을 편견 없이 이해하고 당회에 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가정 심방은 하나의 팀워크가 되어야 한다. 한 교회에 장로가 두 사람 이상이 되지 못해 조를 만들 수 없는 형편일 때는 목사와 함께 심방하는 길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는 목사가 자연스럽게 심방을 주도하게 된다. 장로 두 명이 조가 되어 심방할 때는 누가 성경을 읽고, 누가 마침 기도를 할 것인지 미리 정하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목자는 양을 아는 것이 상식이다(요 10:4). 심방하기 전 그 가정에 속한 가족의 이름을 다 기억하되 특별히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목자적 장로로서 친근감을 갖게 해야 한다. 가정의 직업과 장성한 자녀가 있으면 어떤 일에 종사하는지를 아는 것이 좋고, 자녀들이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 때 효과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유익한 심방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심방 장로팀은 미리 계획을 만들고, 가정의 형편을 따라 미리 심방날짜와 시간을 약속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다. 개혁교회의 생활을 보면 주일마다 주보나 공식 광고를 통해 심방할 가정과 날짜와 시간을 알리고 있다.
2) 심방할 때 주의할 점
심방하는 장로들은 밝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장로들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불러줌으로써 친근하고 부드러운 목자다운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종전의 한국교회가 목사나 장로의 심방은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을 비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식의 심방을 하고 있다. 이런 기복신앙에 기초한 심방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심방은 예배가 아니다. 심방은 교회로서 그 가정의 제반 사정을 살피고 도와주고 지도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특히 교회를 통해서 선포된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돕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로들의 심방이 엄숙한 예배형식을 갖춰서는 안 된다. 마음을 열고 대화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장로가 심방 갈 때 반드시 자기의 성경을 가지고 가야하며 빌려 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로가 성경을 읽고 몇 마디 간단한 설명을 하는 것은 좋으나 짧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교회의 공예배 시에 목사가 봉사하는 사명이다. 성경을 읽고 나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는 예, 혹은 아니요, 하는 문답식으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씀을 통한 영적 성장, 성경 읽기와 연구, 주일학교, 가정기도, 학교생활과 신앙, 직업과 신앙생활 등에 관하여 하는 것이 좋다.
심방 중에 목사의 설교와 관련된 대화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장로들은 강단에서 선포된 목사의 설교의 결실이 교인들의 생활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장로들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교인들에게 목사의 설교를 즐기고 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이런 물음은 자칫하면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요청하는 것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왜 설교가 우리 생활에 중요하며, 설교에서 유익을 얻으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준비가 필요한지 등을 물어보는 것이 좋다. 장로는 심방을 하면서 절대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판을 끌어내어서는 안 된다. 장로의 가정 심방은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하는 당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이때 장로는 교회 봉사를 위한 목사의 동역자이다. 동역자에 대한 비판을 교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혹 어떤 가정에서 교회와 목사, 예배의식 등에 관해 일종의 불평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장로들은 찬반논쟁을 피해 듣기만 하고 그 사정을 당회에 보고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과의 찬반논쟁은 심방에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면 다음에 적당한 기회를 마련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비판을 들을 경우 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거나 변명하며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때 장로의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마침기도는 심방을 통해 발견한 그 가정에 필요한 것을 위해 구하고 그 가정의 평안을 기원할 것이다.
장로는 공식적인 심방을 할 때 필요한 시간 외에 길게 머물지 말아야 한다. 공식적인 심방을 마친 후에 그대로 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심방의 영적 가치를 다 상실하게 될 수 있다. 장로의 심방은 주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한 감독자의 자격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교제할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
장로는 교회에 속한 가정과 개인이 당면한 여러 어려운 문제를 접하고 다루어야 할 형편이 있을 수 있다. 부모와 자녀관계, 이혼과 재혼, 편부모, 미혼모 등의 문제를 접하게 될 경우 매우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장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성경적 지도 원리를 터득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장로 직분은 결코 명예직이 아니다. 이 직분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책을 구해 읽고 끊임없이 연구함으로써 자기 계발을 해 나가야 한다.
4. 장로는 부지런히 일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행 20:33-35)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준 이별사에서 물욕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했다. 사도행전 20:33-35절을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다. 장로들은 물질과 돈 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한다. 장로가 돈 문제로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면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없다. 장로가 탐욕 때문에 부정에 가담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거래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우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장로들이 교회에서 건축이나 선교 등의 헌금을 맡아 다루다가 자기의 사업이나 이권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특별히 목사들 중에서도 물질 문제 때문에 비난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이것은 모두 물욕 때문에 자초한 화이다. 장로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하여 가족의 쓸 것을 공급하고, 교회를 위해 바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바울은 전적으로 복음 전파에 헌신하면서도 스스로 일하여 쓸 것을 감당함으로써 물질 문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물론 바울의 이런 생활은 앞으로 복음전파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들이 다 자기 쓸 것을 감당하면서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디모데전서 5:17-18절에 보면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를 존경할 것을 말하면서 구약 말씀을 인용하여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교회 건설 초기에 바울이 자기 스스로 일하여 쓸 것을 감당한 것을 본으로 들면서 장로들에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라”고 한 것은 교회 봉사를 하는 장로들은 물질 문제에 있어서 깨끗하고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너그러운 시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2절에 보면 로마제국의 다섯 지방에 있는 교회 장로들에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했다. 장로들은 감사의 마음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쳐야 하며, 물질적인 이득이나 명예를 얻을 목적으로 봉사해서는 안 된다.
5. 병든 자들에게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약 5:14)
주의 형제인 야고보는 야고보서 5:14절에서 병든 자를 상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다. 장로는 교회 안에 병든 자를 찾아 기도할 사명이 있다. 이는 장로가 어떤 병을 치유하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교회에서 주의 양떼를 돌보고 섬기는 공식적인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5:15-16절을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다. 이 말씀에 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하고 있다. 병자를 방문하고 낫도록 기도하는 것은 목자적 의무를 가진 장로의 본질적 의무다.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에스겔 34:4절에 보면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라고 책망했다(참고. 슥 11:16). 병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기도를 요하는 특별한 종류의 고통이다. 장로는 고통 하는 양을 위로하고 돕고 기도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하고 주의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야고보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다. 이 기름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병자에게 쓰는 약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맞지 않다. 기름이 모든 병에 약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는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처방하여 쓰는 의사가 아니다. 여기 기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서 뜻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야고보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구약 역사에 보면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거나 바치는 물건에 기름을 부었다. 그 첫 번째 예는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길에 꿈에 천사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에서 나타나는데, 여호와께서 보호를 약속하신 자리에 베개를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던 것이다(창 18:18-19). 야곱은 돌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곳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전으로 삼기를 원했다(창 18:20-22). 그 다음으로는 제사장이나 제사장의 옷, 장막 등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할 때(출 29:21, 30, 40:9)와 왕을 구별하여 세울 때(삼상 10:1, 16:13; 왕상 1:39; 왕하 9:6) 기름을 부었다. 그러므로 장로가 주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례를 따라 하나님의 돌보심과 고치심을 병자에게 촉감으로 느끼도록 구별하여 맡기면서 기도할 것을 뜻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은 기름이 아니고 기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5:13-18절에 보면 ‘기도’라는 말이 7회나 나온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의 표현이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을 움직여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라.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다(참고. 마 21:22; 눅 11:5-13; 요 15:7, 16).
그런데 여기서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항상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그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달리 응답하심으로써 그의 완전성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응답하신 것이다(고후 12:7-9). 장로는 병자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성실히 기도함으로써 자기 사명을 다해야 한다.
둘째로,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에 주목하게 된다. 성경은 개 교회 장로를 언급할 때 언제나 복수를 사용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여기서 복수로 장로를 언급한 것은 먼저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장로의 직분 이행은 개인적이기 보다 교회를 대표하여 집단적으로 하는 것이다. 병으로 고통 하는 자의 병상 옆에서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장로들이 합심해 기도하게 될 때 결과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나아가, 장로들이라는 복수를 언급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이상 함께 병자를 방문하는 것이 서로에게 덕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령에 관계없이 혹 혼자 앓고 있는 여성도에게 장로가 혼자 방문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장로가 복수로 방문하게 될 때 신뢰감을 더 얻을 수 있고 바람직하지 못한 의혹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목사가 병중에 있는 여성도를 심방할 때도 다른 동역자를 동반하는 것이 덕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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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개혁교회는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삼위일체 신조로 받아드린다. 화란 개혁교회는 저녁 예배(오후 예배)에 아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설교하도록 교회법으로 정하고 있다.
20) 베드로는 주후 63년 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다.
21) 베드로는 주후 63년 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다.
22)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개체성(신성)과 아버지와의 일체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23) The Church Order of the Reformed Church(Dort), Art.20
*강의자 : 손재호 교수
*본글은 2024년 8월 16-17일에 부천개혁성경신학교 2024년 봄학기 집중강의 겸 부천개혁교회 제직교육을 '개혁교회의 목회와 실제'란 주제로 실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