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산행기
엷은 안개가 음습하게 도시 전체를 내리 누르고 있다. 중부지방의 예상강우량은
5mm 정도라는 기상예보의 전언이니 강우량을 보아서는 산행에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산행당일의 일기예보가 비록 산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적은 강수량을 예보하고 있지만, 전국적인 비소식은 주말산꾼들을 움츠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전화벨 소리는 산행예약취소를 통고하는게 태반이고,
잔뜩 찌푸린 날씨는 산행준비를 서둘러야 하는 살림꾼의 마음을 짓누른다.
전국적으로 비소식이 예보된 탓인지
의외로 산행을 떠나려는 차량들은 몇대 되지않고, 주말새벽이면 관광버스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북문근처나 시청앞 정거장도 비교적 한산하기만하다.
신갈나들목을 벗어나고 오산에서 예약이 되어있는 동료들을 태운후 금새라도
비를 뿌릴 것같은 도로를 버스는 그래도 힘차게 달린다.
한식경도 안되서 안개가 더욱 짙어지는가 하더니, 어느새 는개로 변하고,
빗줄기가 되어 서서히 차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가 오후에는 날씨가 개인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우중산행은 피할 것같은
기대도 가져보지만 차창에 부딪치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다.
산행들머리 상신리 마을버스 종점에 도착해서도 빗줄기는 가늘어 지긴 했어도
쉽게 그칠 분위기는 없어보이고 빗줄기 사이로 희미하게 올려다 보이는 계룡의
산등성이는 희뿌연 운무에 뒤덮혀 우중산행채비를 하는 동료들의
심사를 어둡게 한다.
천상의 변화를 몰고오는 바람도 숨을 삼켰는지 잠잠하고, 가을걷이를 마친 후에
특별히 바깥 일도 드문 탓에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딱히 문밖을 나설 일도
없을 것이다. 마을은 비에 젖은 적막강산이다.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삼불봉에서
서쪽으로 급히 꺽이며 작으마한 지능선의 산자락을 내려놓은 남향받이의 조용한
마을 상신리,오가는 인적도 없고 그 흔한 개짖음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산길을
점령한 진갈색의 낙엽위로 처연하게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계곡의 적막을 걷어낸다.
얼마전부터 도자기를 굽는 예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작은 마을을 이룬
도예촌이 구룡사지 계곡 웃동네에 아담하게 터를 잡고있다.
그래서인지 계곡 길섶주변 농가들이 제법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았는지
제법 세련미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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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하게 시작되는 상신계곡 상류의 큰골오르는 산길에는
크고작은 바위들이 산길을 수놓았다. 빗소리에 가물거리던 계류의 흐름소리도
어느틈에 멈추었고 부지런한 빗줄기만이 귓전을 울린다.지다만
단풍이파리가 주름진 손끝을 한껏 오므리고 빗물에 온몸을 떨고있다.
이름모를 작은 산새들만이 분주하게 먹이를 찿아 이골짜기 저골짜기를 헤맨다.
막바로 삼십여분이면 삼불봉과 수정봉사이의 금잔디 고개에 닿을 수 있는
큰골삼거리, 이정표가 빗물에 선명하다. 짙은 운무와 비가 내리는 상황을 바꾸려면
변화의 단초를 제공할 바람이 불어와야만 한다.
짙은 운무에 뒤덮힌 큰배재, 학봉천의 천장골에서건 큰골에서건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성글던 곳에서도 변화를 바라는 바람은 손을 놓고있다.
여전히 소리없이 내리는 빗줄기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그쳐갈 때가 되었는데 말이다. 운무에 뒤덮혀 있는 상원암의 기와빛이
더욱 검어보이고 스피카를 타고 들려오는 독경소리가 희뿌연 운무를 타고
남매탑사이로, 모든 이파리를 떨군 모세혈관가지위로 퍼져 나간다.
젊은 시절 등산의 등자만 알던때, 사랑하는 사람과 1박2일로 산행을 하고 흑백의
빗바랜 사진을 남겼던 곳, 남매탑, 그때보다도 한결 젊어(?) 보이는 남매탑도
희뿌연 운무속에 묻어두었던 추억을 되살린다.
가지런하게 다듬어놓은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삼거리 능선길에 닿는다.
삼불봉고개, 맞은편 내리막은 금잔디고개를 향하는 산길이고, 우리의 진행방향은
좌측의 완만한 오름길을 향해야 한다. 그리고 이곳 삼거리는 남쪽에서 달려오던
금남정맥의 산줄기가 급하게 각을 달리해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수정봉을
경유하여 만학골재와 윗장고개로 산줄기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정오도 안되었는데 후미대장을 책임진 시트박사가 조금전부터 점심요기를
해결하고 가는 것이 어떤가 채근한다. 굳이 식사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출출하고 허전하면 시간가릴 것 뭐있나, 김장김치에 돼지고기 듬뿍넣고 두부까지
곁들여 끓여낸 찌개가 비에 젖은 생쥐차림의 산객들에겐 더 없이 반가운 먹을 거리,
먹다죽은 귀신 뭐도 좋다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도 했고, 진홍색깔의
복분자가 주인을 기다린다는 전언이고 보면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고 두텁게 뒤덮혀있는 운무, 가시거리는 수십여미터,
가파르고 굴곡이 심한 바윗길에 설치되어있는 철계단 난간에 빗방울이 줄줄이
흐르고 빗물을 잔뜩머금은 기암괴석들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연신 들이댄다.
전신의 모든 이파리를 떠나보내고 모세혈관의 잔가지까지 나신을 드러낸 나무
가지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구슬을 매달고 있다.
오전내내 쉼없이 내리던 빗줄기들도 이젠 어느틈에 슬그머니
운무속으로 몸을 감추려 한다.
커다란 파라솔을 닮은 노송이 바위절벽 모서리에 몸을 뒤틀고 자리한
바위봉우리 삼불봉, 세분의 부처가 앉아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 해발777,1m의 암봉이다.
사통팔달 거칠 것 없는 조망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
그렇지만 짙고 두텁게 드리운 운무로 제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게 되었다.
계룡8경중의 삼불봉의 설경,관음봉의 한운(閑雲) 그리고 이제는 실록의 옷을
벗어내고 나신을 드러낸 동학사 계곡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룡 제일의
전망대 삼불봉이 운무에 뒤덮여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짙고 두텁게 계룡의 전신을 뒤덮은 운무와 빗줄기를 불러들인 천상의 주인은
생명이 있는 모든 삼라만상의 눈을 가리고 승천을 하려는 계룡를 도우려는
고도전술이 아닌지 모른다. 백마강과 미호천을 거느린 연기뜰 복판에 들어 설
세종시 문제로 전국의 관심거리가 된 들판도 이곳에서 편안하게 내다볼 수 있을텐데
계룡의 심사는 그마져도 거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오르는 각이 급한 경사라면 내려오는 각도 급한 것은 당연지사, 침봉을 올랐다
내려서 듯이 산길은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철계단을 요소요소에 설치해
놓았다. 천길 낭떠러지 바위절벽의 병풍을 두른 바위 능선길에는 철제 난간이
세워져있고, 바위절벽아래 으슥한 무속인들의 기도처 근처에서 오만과 자만의
산행자세를 준열하게 꾸짖은 절벽추락사고의 현장도 짙게 드리운 운무속에
변함없는 위엄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천변만화의 절경은 짙은 운무속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오로지 뚜렷이 드러난 산길만 이어가며 추억을 반추하며 하산하라 한다.
육각의 정자로 대표되는 관음봉,해발766m의 봉우리로 계룡팔경중 제4경
관음봉 한운을 만날 수 있는 전망대 육각정자가 운무속에 기이한 형상으로
우뚝하다.태조 이성계가 수도이전을 고려했던 신도안의 널다란 들판정경이
눈을 부시게 했을텐데 그것마져도 다음을 기약하란다.
동학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은선폭포 향하는 산길은 한눈을 팔다가는 곤두박질 할
우려가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과거에는 산사면에서 부서져내린 돌부스러기와
바위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어 산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었는데 그러한 수많은
돌과 바위들을 이용하여 계단을 만들고 길섶에 돌담을 쌓아서 삭막했던 산길에
운취를 보탠 손길이 따스하다. 천길 바위절벽 사이로 낙차큰 은선폭포는 부족한
수량(水量)으로 폭포라는 이름의 흔적만 느낄 수 있을 뿐 휑하니 적막감만 감돈다.
그래도 그런 적막감이 폭포주위를 감도는 와중에도 폭포하단부에서 암반에
부딪히는 작은 물소리가 속삭이듯이 협곡위로 피어 오른다.
짙은 운무로 간신히 거뭇한 실루엣의 쌀개능선위로 아직도 스멀스멀 희뿌연 가스가
쉼없이 등성이를 향한다.
일찌기 무학대사가 산세가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자,
나는용이 승천하는 형상인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서 그 이름을 계룡이라
했거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계룡의 남쪽에 도읍을 이전하려 천도계획을
세웠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유야무야 되었던 사실, 역사는 흘러 모진 세월이 지나고
근대화의 중흥 깃발을 든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도 안보을 염두에 두고 수도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했었고,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 또다시 명칭만 새롭게
포장된 채 수도분활인 행정중심복합도시 이전문제가 정국의 핵심사안으로
떠올랐다. 오랜 세월동안 이곳이 수도이전 장소로 거듭 거론되는 것을 보면
좌우지간 이곳이 천하의 명당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어쨋던, 계룡의 승천을 바란다면 은선폭포가 우렁찬 폭포음을 울리도록 빗줄기는
장대처럼 세차야 할 것이다.
희뿌옇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운무속의 어수룩한 오리무중에서는 세인의
이목을 피해서 승천하기란 지난하기만 할 것이다.
계룡이 승천하려면 강력한 동력이 필요하다. 장대처럼 힘차고 강력한 동력의
전폭적인 어시스트를 원한다면 부지런한 몸놀림과 지칠줄 모르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절실하다.
전력을 다한 동력이 아닌 어설픈 주력으로는 첩첩의 밀집대형을 뚫고
쏘아대는 통쾌한 슈팅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온종일 계룡의 주름진 골짜기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운무도
서서히 엷어져가고,
희뿌연 운무와 가을비속에 파묻혀만 있던 계룡의 팔등신도 때를 맞춰
점차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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