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혜곡최순우기념관)과 간송미술관, 동선동에 있는 권진규 아틀리에는 지금 가을 전시(展示)가 한창이다. 봄과 가을에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는 소장한 문화재 중 각 시대를 대표하는 동물과 식물 그림 100여 점이 공개된 ‘화훼영모대전’이 17일부터 31일까지 열리고 있고, 성북동 최순우옛집에서는 '최순우를 사랑한 예술가들- 최영림전(展)'이 16일부터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그에 앞서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에서는 ‘조각가 권진규를 만나다’ 전시가 그의 아틀리에였던 곳에서 20일부터 24일까지 열렸다. 고미술 회화작품에서 현대조각 작품, 예술가들이 주고받은 연하장까지 성북동과 동선동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가을의 전시들을 찾아가 봤다.
동선동 권진규 아틀리에 - 조각가 권진규를 만나다 전(展)
우리나라 근현대 조각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천재 조각가 권진규가 직접 짓고 오랫동안 작업실로 썼던 곳이 오늘의 전시장소였다. 한국 근대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로 평가받는 권진규는 일본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1960~70년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73년 51세의 나이에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아틀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로댕, 부르델로 이어지는 서양 조각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한국적 리얼리즘을 표현해 그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신여대역 1번 출구로 나와 성북구 동선동의 골목길을 한참 올라가자 ‘조각가 권진규를 만나다 전(展)’을 알리는 작은 현수막이 보였다. 가파른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자 복원·보전 중인 권진규 아틀리에가 나타났다. 그가 1959년 일본에서 귀국 후, 작업실용으로 지은 집이다. 작가 사후에 빈집 그대로 남아있던 아틀리에는 2004년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등록됐고, 조각가의 여동생인 권경숙씨로부터 기증받아 2008년 5월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시민유산 3호로 지정하면서 시민문화유산기금으로 2개동의 개·보수 작업을 마치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가을 햇살을 담은 아틀리에는 고즈넉하고 아담했다. 작업실 천정은 무척 높았고, 작품을 진열할 수 있는 작업대와 선반이 입구 위쪽에 다락방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오르는 작은 계단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흙을 개고 작품을 만들어 굽고 하는 일련의 작업을 한 공간에서 할 수 있도록 만든 아틀리에 내부에는 흙 저장 공간과 작은 우물, 불을 때서 작품을 구울 수 있는 작은 가마 등이 남아 있었다. 작가가 작업을 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담고 있는 사진이 작은 현수막 형태로 다락방 위에 걸려 있기도 했다. 의자, 탁자, 이젤, 물레를 올려놓았던 틀 등 현장에 남아 있는 유물들 사이로 '남자흉상'(1967), '순아'(1968), '말'(1965년 경) 등 세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점토를 빚어 굽는 테라코타 여인상, 종이에 옻칠한 건칠 소재의 사실적 인물 그리고 동물상에서 조각가 권진규의 삶을 지긋이 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예술 작품이 탄생된 아틀리에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끝났지만 권진규 아틀리에는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4시에 아틀리에를 오픈한다.
관람문의 : 3675-3401~2
성북동 최순우옛집 - '최순우를 사랑한 예술가들 - 최영림전(展)'
권진규 아틀리에를 나와 성북동으로 향했다. 현대문명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성북동의 주택가. 개발로 인해 옛것들은 헐리고 높고 번듯한 건물들 사이로 아담한 한옥 ‘최순우옛집(혜곡최순우기념관)이 서 있었다.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전(前) 국립 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가 살던 곳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의 대표적인 명저들이 탄생한 곳이다. 그가 갖고 있던 미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한옥은 지역 개발 붐으로 인해 훼손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을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회원들의 모금으로 집을 매입하여 보수와 복원을 거쳐 2004년 4월 일반인들에게 개방했고, 2006년에 등록문화재 제 268호로 등록되었다.
세월이 멈춘 듯 단아하고 조용한 한옥이 속 모습을 드러냈다. 앞마당 작은 정원엔 150년이나 되었다는 잘 생긴 향나무와 멋스럽게 옆으로 굽어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서가로 구성된 ‘튼 ㅁ 자’ 한옥은 전통 한옥의 운치가 그대로 남아 있다. 평생 한국미를 탐색했다는 최순우선생이 1976년 이사해 작고할 때까지 살던 이 집은 한국미의 탐색자인 그의 눈에 든 한옥이었을 터였다.
최순우옛집은 혜곡 최순우의 유품을 상설 전시 개방하며 해마다 봄과 가을에 문화 프로그램을, 가을에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최순우를 사랑한 예술가들-최영림 전(展)'. 화가 최영림이 혜곡 최순우에게 보낸 연하장을 전시 중이었다. 최영림은 최순우와 한국현대회화전(1968), 아름화랑 개막전(1973), 공간미술대상(1975) 등에서 참여작가와 평론가로 함께 활동하며 친분을 쌓은 사이로, 전통을 잇고 재해석하여 그 시대의 예술을 발전시키려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최영림은 새해마다 목판화와 독특한 은박지화로 정성을 들인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며 새해 덕담과 안부를 나누었는데 그의 연하장은 자연과 인간을 그린 그림과 개성 있는 글씨를 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사람의 교류와 화가 최영림의 작품세계를 정감 있는 연하장을 통해 만나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연하장 전시를 관람한 후 최순우옛집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늘 방문해도 정겨운 사랑채, 안채, 마루 등 집안 곳곳에는 친필원고와 앨범 등 혜곡 최순우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흔적들을 전하고 있었다. 특히 앞마당 툇마루에는 방문자들을 위해 그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이 놓여 있어 마음 놓고 책을 볼 수도 있었다.
‘매죽수선재’, ‘매심사’, ‘오우당’ 등 추사 김정희와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새겨진 집안 곳곳의 현판에서는 선비의 멋과 풍류도 엿볼 수 있다. 사랑방 바깥에는 그가 직접 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즉 문을 닫아걸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란 뜻의 현판이 걸려 있어 일상의 번잡함을 잊고 집필에 몰두하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 전시기간에는 그가 직접 쓴 현판 탁본 체험도 마당 한쪽에 마련되어 있다. 또한 공판화 체험과 최순우옛집의 자세한 해설도 들을 수 있다.
관람문의 : 3675-3401~2
성북동 간송미술관 - 화훼영모대전
또 하나의 품격 있는 전시가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꽃과 풀, 새와 짐승 그림이 총 망라된 ‘화훼영모대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으로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로 칭송받는 간송 전형필이 설립한 간송미술관은 10여 점의 국보를 간직하면서 매년 수준 높은 전시회를 열기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서화를 비롯해 자기, 불상, 불구(佛具), 전적(典籍), 와당, 전(벽돌)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전시의 목적보다는 문화재 유출을 막기 위한 보관과 보호를 위해 지어진 미술관이므로 5월과 10월 일 년에 두 차례 각각 보름씩만 문을 연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에도 매년 1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가을색 짙은 숲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시실로 가는 정원의 작은 소로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탑과 석조부도 등이 자연스럽게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번 전시는 꽃과 풀, 새와 짐승 그림 100여 점으로, 고려 공민왕(1330~1374)의 얼룩 양 그림부터 조선 순종 때의 이당 김은호(1892~1979)의 가을 국화와 참새 그림까지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고르고 추린 동식물 그림들을 시대 순으로 직접 살펴 볼 수 있는 자리다. 조상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시대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꽃과 풀, 새와 짐승 그림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시대를 넘어 온 그림 속 꽃과 풀, 새와 짐승들의 모습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정교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조선 전기를 살던 화가들은 이 땅에서 볼 수 없는 소와 양을 그렸고, 우리 산수를 우리 눈이 본대로 그려냈던 진경산수의 창시자인 겸재 정선의 작품에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와 꽃, 짐승들의 친숙한 모습들이 화폭을 장식하고 있었다. 정선,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 속 개와 고양이, 물고기, 꽃과 나비, 새 등 동식물들은 무척 정밀해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적확한 묘사가 돋보였다. 관람객들은 멀리서 혹은 그림 가까이에서 한참 동안 그림에 몰입해가며 감상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연대별로 수백 년 전 화가들의 세밀한 화훼영모화들을 짚어가며 그림을 살펴보니, 같은 동식물 그림이라도 표현기법의 차이도 약간씩 보였고,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화훼영모화의 계보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화훼영모대전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와 간송미술관 뒤편 오솔길을 따라 미술관을 한 바퀴 돌며 미술관 숲이 주는 가을 정취를 덤으로 만끽했다. 고미술이 주는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하지만 새삼 고미술을 보는 안목이 한 뼘은 자란 것 같은 문화적인 충족감에 기분 좋은 발길로 간송미술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