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는 디카시임을 선언한 경전
- 유은희, 『수신되지 않는 말이 있네』를 읽고 -
나병훈
1. 디카시는 디카시다.
디카시는 작시(作詩)의 구조상 시가 아니라 동족(同族) 일뿐이다. 디카시는 새로운 정체성과 독자성을 지향한다. 복효근 시인의 시각대로 시가 ”언어의 순혈주의“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시문학적 장르라고 봄이 타당하다. 디카시는 포착과 언술과 소통이 하나의 영상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 융합'을 생명으로 한다. 모름지기 시는 존재의 언어이어야 하나, 디카시는 사물과 풍경의 언어 이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디카시는 하이데거식 ’존재(存在)의 언어‘를 초월하는 시적 형상이 전제되어야하기 때문에 어쩌면 '극서정성'을 띄어야 할지도 모른다. 디카시가 시적 측면보다는 영상적 측면이 강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고 보면 디카시는 난삽한 산문적 장시(長詩)로 인해 외면당하는 현대시를 본연의 서정세계로 인도하는 소중한 안내자일지도 모른다.
2. 디카시의 '제목'은 영상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디카시의 창작측면에서의 본질적 특성은 일례로 ‘제목 정하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시에서의 제목은 암시적 상징성이어야 한다. 시의 내용을 구속하고 통제해야 한다. 함축적이며 내포적 의미망의 폭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디카시는 기 언급한 영상이 전제라는 구조적 특성으로 결을 달리한다. 순간 포착 된 풍경과 사물이 묵시적으로 이미 제목을 정하고 있다. 제목은 영상속에 존재한다, 기존의 시적 방식을 허물어트리는 디카시의 절연 선언인 셈이다. 김종회 디카시 평론가의 견해대로 디카시는 영상에 잇대어져 있는 시는 단순한 비유적 언술울 넘어 영상의 시각적 현상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유발할 수 있도록 주밀한 언어와 의미가 배합되어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연유의 하나로 시문학계에서는 ‘디카시는 디카시일 뿐’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는것이다.
3. 이 시집을 왜 주목해야 하는가
유은실의 『수신되지 않는 말이 있네』는 이상과 같은 디카시의 작시 측면에서의 본질상, 그 정체성을 명징하게 선언한 참신한 경전으로 읽힌다. 풍경과 사물이 제목을 암묵적으로 그러나 명료하게 던지고 있다. 순간포착이 그만큼 멋스럽게 언술과 소통을 순간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는 애기다. 디카시의 생명인 ‘직관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기왕에 붙여진 제목은 구조상 제자리를 탄탄하게 받쳐만 주고 있을 뿐이다. 대신 본문의 행간 속으로 돌아가 어우러지면서 시적 언술을 완성 해 내는 동반자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니까 시처럼 내용을 구속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이런 작시태도는 현존하는 디카시들과는 차별되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디카시가 지향해야 하는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향후 이 시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평가가 주목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참신성을 예증하는 시 한편을 초청해 본다.
(시 쓰기는) 쇠를 부드럽게 구부리는 일
(시 쓰기는) 쇠에서 부리가 생가는 일
(시 쓰기는) 쇠가 새로 전환하는 일
(시 쓰기는) 그 새 무인도 하나쯤 거뜬히 옮기는 일
- 「 시 쓰기 」 전문
주> ( ) 내서는 본문의 목적상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문구
영상이 전제되지 않고 영상이 제목이요 본문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이해하기 힘든 디카시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시는 어디에도 있었으며, 하찮은 것, 의미 없는 것은 없다‘라는 디카시인의 고백<시인의 말> 은 곧 디카시를 통해서 말을 걸고, 말을 들을 수 있는 직관적 통찰의 깨달음을 이미 터득하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와 구별되는 디카시의 본질을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서 50여 편에 이르는 작품들 중 필자가 박수를 치며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던 명편이 있다. 대문을 여는 시 (「한 개비의 불빛만으로도」)와 대문을 닫는 시 ( 「몰랐습니다」) 그리고 인용한 바와 같이 커버에 대표적 영상을 제시한 「시 쓰기」 다. 이러한 시는 디카시의 기본 교재로 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