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동 시절
대흥동 시절이란 시골에서 대전으로 이사 나와 초등학교 취학 이전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던 때를 말한다. 대전에서 삼 십리 떨어진 금강 상류 변 시골에 살던 우리는 내가 다섯 살 -1943년 2차 대전 때 대전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이사를 온 뒤 미B-29폭격기가 간다는 동네 사람들 말을 처음 듣고 뛰어 나와 아이들과 함께 손으로 눈부신 햇빛을 가리고 점과 같은 은빛 폭격기가 소리 없이 남기고가는 흰 비행운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마냥 쳐다볼 수 있게 한 이사였다..
대전으로 이사하며 우리 집은 초가에서 기와집이 되었다. 이사 온 집은 대전여중 앞 대흥동 기와집 주택가에 있었다. 집은 골목 남북으로 각각 다섯 채씩 들어선 북쪽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집은 기역자형으로 문간방 안방 가운데 방 사랑방 등 방 네 개에 대청마루로 지어져있었다.
울안에는 샘, 옹기 항아리 반들거리는 장광, 마당 한 옆에는 자그만 채소밭, 그리고 마당 위에는 두 빨랫줄이 하얗게 쳐져있었다. 대문 안 오른 쪽엔 강아지 집, 채소 밭 한 귀퉁이에는 닭 집도 있었다. 강아지 집 앞 마당엔 역기도 하나 있었다. 아궁이 달린 부엌에는 무쇠 검은 큰 솥이 걸려있고 장작도 쌓여있었다.
아래 이웃에는 3남 2녀를 둔 7명의 가정, 위 이웃에는 1남 3녀를 둔 6명의 가족이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집 앞 길 건너 집에는 2녀만 둔 4명의 가정, 그 옆집에는 1남 1녀를 둔 4명이 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 집 아들 셋은 모두 초등 동문이고 첫째 둘째는 고등학교 선배였고 큰 따님은 초등동기동창이었다. 아래 집 2남은 나를 보기만하면 시골에서 이사 온 촌놈이라며 골려댔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또 놀려댔다.
놀려대는 그에게 눈을 부릅뜨자 집 안으로 쏜살 같이 달아났다. 이러기를 몇 번. 벼르던 끝에 그를 붙잡아 한 대 때렸다. 반항하는 그를 길 옆 하수구에 밀어 넣었다. 이를 목격한 그의 형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으며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억지 약속도 했던 시절이다.
위 이웃 아주머니는 우리 집에 자주 놀려오셨으며 그 때마다 자기 집에 놀러오면 맛있는 것 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예쁜 우리 딸’아무개 공부 좀 가르쳐달라며‘우리 딸 예쁘지 않느냐?’며 웃기도 했다. 중학생 때 여름 우리 집 마루에서 벌어진 점심 상추 쌈 자리에 오셔서는 내 코 밑을 유심히 처다 보고는‘어머! 얘 봐, 벌써 코 밑에 수염자리가 까맣게 자리 잡았네!’라 하여 얼굴을 붉히게 하기도 한 아주머니였다.
길 건너 우리 집 바로 앞집은 두 딸을 두고 있었다. 둘은 모두 다 연하. 그래도 이른 아침
등교시간이면 교복을 입고 나오다 맞은편에서 나오는 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대문을 닫고 되돌아 뛰어 들어가거나 부끄러워하며 골목길로 달아나던 시절이다.
바로 우리 이웃집은 1남 3녀를 둔 사업가의 가정. 따님 둘은 연배, 가운데인 외아들은 1년 연하, 그리고 그 아래엔 여동생, 이렇게 구성되었다. 이 집엔 큰 대추나무 한 그루가 가을이면 붉게 익은 대추 열매 꽃을 피우고 민물생선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아저씨는 아예 샘을 어항 삼아 좋아하는 민물고기를 기르시며 가끔 부르시어 그 맛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풍금치기를 좋아하던 둘째 따님은 명문여대 기악과에 입학하여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갔다. 외아들은 고교 1년 후배로‘형! 형!’하며, 긴 머리 땋은 그의 여동생은‘오빠! 오빠!’하며 동생처럼 따랐었다.
마을 서쪽을 흐르던 맑은 물, 모래밭도랑에는 말잠자리 각시잠자리 붕어 송사리 등 여러 잠자리 고기들이 자라 잠자리 고기를 잡으며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내게 해 주었던 곳이다.
도랑 아래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둘째 따님은 한 선배가 눈깔사탕을 주며 전해달라는 편지만 전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반기며 사택 울안 옥수수 쪄주고 풍금을 치며 동요를 함께 불렀었다.
날 촌놈이라 부르던 아랫집 둘째 1년 연배는 벌써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나의 초등 동창인 그의 큰 여동생은 지금 대전에서 이름 있는 여성 사업가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교장 둘째 따님은 장상의 부인, 그의 큰 언니는 내 초등 은사님의 사모님이 되었다.
대흥동 시절은 모두 흑백시절로 바뀌었으나 그 동네 그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총천연색이 되어 다시 아름답게 피어오른다. (2008. 11. 18.)
첫댓글 대흥동에 흐르던 맑은 시냇물에 말잠자리랑 붕어,송사리들이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다니 그 때가 그리워지는군...필자의 이웃에 대한 기억을 비롯하여 자상한 관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
내 어린 시절의 집도 기와 집에 마당이 넓고 돼지우리, 닭집, 텃밭, 장광, 허청, 해우소 가 있었고 뒷쪽문을 열고 나가면 그 곳에도 텃밭이 크게 있었던 기억이 되 살아 나는군. 나도 이웃들이 초랑초랑하게 기억되는데 그때는 총기가 좋았던 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