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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閤記(1965年刊 少年少女世界名作文学全集)
● 이 이야기를 읽기 전에
태합(太閤) 히데요시는 오와리 지방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 곁을 떠나, 먹고 살기도 어려운 고생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관백 태정대신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그 지위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해낸 것입니다. 세상은 전국시대, 실력 있는 자가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시대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내일까지 살아가기 위한 양식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세상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 천하를 통일하고, 그 위에 평화로운 일본을 세워 올렸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밝은 평화를 가져다주고, 즐겁게 살아가는 기쁨을 가르쳐 준 히데요시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아즈치·모모야마 문화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대 문화의 중심이 되었던 회화나 다도 등을 더없이 사랑했던 히데요시의 마음속에는, 단순히 천하를 차지한 무장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합니다.
전투에 능한 무장으로서 히데요시는 유명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일을 가능한 한 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좁은 그릇 안에서 서로 다투는 어리석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결과로 이루어진 평화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어 낸 히데요시가 가장 의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힘입니다. 히데요시는 언제나 그 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인간이 지닌 힘의 작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있었던 그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작은 힘을 진지하게 갈고닦았습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큰 힘이 되어 갔는지는, 이 책을 읽은 뒤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히 남게 될 것입니다.
오자키 시로(尾崎士郎)
태합기(太閤記) 목차
I 日吉丸の巻 (히요시마루 편)
01. 히요시마루의 결심
02. 절의 대장
03. 야하기의 다리
04. 무라사마사의 명도
05. 수상한 고무소(虚無僧)
06. 말 위의 무장
07. 흐릿한 달밤
08. 오와리의 젊은 군주
09. 짚신 나르기
II 木下藤吉郎の巻 (기노시타 도키치로 편)
10. 부엌 담당 관리
11. 기요스 성의 흰 벽
12. 오케하자마 전투
13. 스노세의 패전
14. 스노마타 성을 쌓아라
15. 명장 다케나카 한베에
16. 불타오르는 이나바야마 성
17. 전투는 이세로
18. 이치조다니에서의 철수
19. 잇코잇키
20. 히에이산의 방화
21. 오다니 성 함락
III 羽柴筑前守の巻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편)
22. 나가시노의 결전
23. 주고쿠 출정
24. 혼노지의 변
25. 아케치 미쓰히데의 최후
26. 후계 다툼
27. 천하 통일
28. 꿈 위의 또 하나의 꿈
29. 지도
30. 해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01. 히요시마루의 결심
한여름의 태양이 땅을 달구어, 닳아 해진 짚신 밖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은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웠다. 오와리(尾張-지금의 아이치현 서부)의 다이묘 오다(織田) 씨의 기요스성(清洲域)의 하얀 외벽이 아지랑이에 싸여 거칠게 흔들려 보인다. 히요시마루는 땀투성이가 되어, 도자기를 실은 무거운 수레를 계속 끌고 있었다.
아침, 동이 트자마자 도자기의 고장 세토를 떠난 히요시마루는 이미 한낮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점심도 먹지 못했다. “휴, 이제 조금만 더다. 어떻게든 기요스 마을까지는 왔구나.” 더위와 공복으로 현기증이 나는 것을 참고, 히요시마루는 몸을 앞으로 숙여 수레의 손잡이를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을 노려보며 기요스 마을을 지나갔다.
“어이, 원숭이다! 원숭이가 수레를 끌고 간다!” “그래도 이번 가게에서는 꽤 오래 버티는군.” 히요시마루의 모습을 보자 여기저기서 놀림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통나무통 가게, 우산 가게, 대장간, 염색집에서 마부, 도시락집까지—모두 한 번쯤 히요시마루가 점원으로 고용되었다가 떠난 곳들이었다.
사흘 만에 뛰쳐나온 곳도 있고, 열흘 만에 쫓겨난 곳도 있다. 드물게 한 달이나 일한 곳도 있었지만… 어쨌든 기요스 마을 사람들은 히요시마루를 문제 많은 말썽꾸러기 꼬마로 보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놀리면 못 쓰지, 아저씨들. 그런 시간 있으면 장사나 열심히 하라고.”
히요시마루는 수레를 길 한가운데 세우고 눈에 스며드는 땀을 닦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야, 원숭이가 우리한테 장사를 가르치려 드는군. 참 많이도 변했어.” “우리 집에 있을 땐 일도 안 하더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다, 원숭이야.” 통나무통 가게 주인은 대나무 테를 만들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너, 찻그릇 가게에 들어간 지 몇 년 됐냐?”
“2년.”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렇지도 않아. 어디든 별반 다를 건 없지. 하지만 나도 이제 열셋이야. 슬슬 자리를 잡고 장사를 배워야 할 나이지.” “흠. 그럼 무사가 되겠다고 하던 건 포기하고 상인이 되기로 한 거냐?”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가게를 그만둘 때마다 엄마가 슬픈 얼굴을 하거든. 어쩔 수 없어서 이번 가게는 참고 있는 거야.” “그래, 그래.”
일을 멈추고 가게 앞에 나온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우리도 기쁘지. 다 같이 응원해 줄 테니, 부지런히 일해서 장사를 배워라.” “고마워.” 히요시마루는 솔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뛰쳐나오고 쫓겨난 사람들을 상대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점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듯했다. 그는 참으로 손해 보지 않는 성격으로 태어난 소년이었다.
“자, 이쯤에서 쉬는 건 그만하고 돌아가야지.”
숨을 고른 뒤, 히요시마루는 다시 수레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무거운 수레는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장 힘이 든다. 몸을 반으로 굽히고 “영차” 하고 발을 내디뎠지만, 빈속이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체구도 몹시 작았다. 휘청—한쪽 바퀴만 돌아가며 수레는 길 한가운데서 가로막듯 옆으로 돌아버렸다.
그때, “비켜라!”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친 외침이 울렸다. 수레에 매달려 있던 히요시마루가 놀라 고개를 들자, 눈앞에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한 필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는 무사가 타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히요시마루는 옆으로 돌아간 수레를 바로잡아 길을 내려고 허둥댔다. “방해된다!” 그 순간 무사의 채찍이 내리쳤다. “앗!”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 손에서 놓친 손잡이가 뒤로 튕겨 올랐다.
그리고 덜컹, 덜컹— 실려 있던 도자기들이 수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며 먼지를 크게 일으키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무사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다친 데 없냐?” “너무하군.”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길 한가운데 서 있던 히요시마루는 입술을 깨물고 무사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분노가 불타고 있었다.
히요시마루가 찻사발 가게 뒷마당으로 손수레를 끌어 들여오자, 기다리고 있던 반장이 호통을 쳤다. “놀고 온 게 아니야. 난 점심도 안 먹고 서둘러 온 거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히요시마루의 태도는 평소의 밝은 모습과는 달랐다. 반장은 이상하게 여겨 짚신을 신고 내려왔지만, 이내 짐이 부서진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깨졌어.” “뭐라고? 이 자식,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한 소리를 하고 있네.” “내 탓이 아니야.” “이 바보 자식!”
그 소리를 듣고 가게 앞에 있던 사람들과 사환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주인님, 보십시오.” 반장은 손수레를 가리켰다.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질러 놓고도, 저 원숭이 녀석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지껄이고 있습니다. 야, 원숭이! 네 탓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 탓이냐!” 반장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등에 업고 더욱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겠다. 난 이 가게를 그만두겠다.” “뭐라고, 이 자식이! 이렇게 가게에 손해를 끼쳐 놓고 그만두겠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반장은 몹시 화가 났다. 그 기세에 휩쓸려 사환 아이들까지도 “이 자식, 이대로 넘어갈 줄 아느냐!” 하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히요시마루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빙 둘러선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히요시마루는 조금 전의 사건으로 이미 굳게 결심을 해두고 있었다. “난 역시 무사가 되겠어. 저런, 사람을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무법한 무사들을, 반드시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말겠어. 꼭, 꼭.” 히요시마루는 지지 않으려는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무사가 되고 싶은 희망을 버리고 상인이 되기 위해 이 가게에서 참고 지내려 했던 것이었지만, 방금의 사건이 그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그래, 가게 사환 같은 건 그만두고 무사가 되자. 굽실굽실 머리만 조아리고 사는 건 이제 끝이다. 너희 같은 자들에게 내 마음이—이 억울한 마음이—이해될 리가 없지… 이렇게 생각하며, 히요시마루는 말없이 서 있었다. “이봐, 원숭이.” 하고 주인이 불렀다.
“어찌 된 일로 짐을 부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번 일은 용서해 주겠다. 너도 이제 슬슬 한 사람 몫의 일을 해도 될 때라고 생각해서 세토까지 심부름을 보냈는데, 아직은 좀 이른 모양이구나. 오늘부터 다시 아이 돌보는 일이나 잔심부름을 하거라.”
“싫어요. 난 오늘부로 그만두겠어요.” 히요시마루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자식이, 주인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데 기어오르기는…!” “건방진 놈이군. 불만이 있으면 먼저 손해를 물어내고 말해라.” 그렇게 말하는 반장과 사환들을 히요시마루는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못 해.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갚겠다.” “끝까지 뻔뻔한 놈이네. 좀 혼내 줘라.” 누군가의 성난 목소리에, 모두가 “그래!” 하며 달려들려 했다. “기다려!” 히요시마루가 날카롭게 외쳤다.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 봐라. 가만두지 않겠다.” “흥, 웃기고 있네. 힘도 없는 작은 원숭이 주제에…” 히요시마루는 확실히 몸집이 작고 힘도 약했다. 게다가 얼굴은 ‘원숭이’를 닮아 있었다.
‘작은 원숭이’라고 놀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대신 히요시마루는 날카로운 머리와 거침없는 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원숭이의 궤변’이라든가 ‘원숭이의 말대꾸’라며, 동료 사환들이나 주인에게 미움을 사고 꺼림을 받는 일이 많았지만, 히요시마루는 지금 자기의 이 무기를 써서 모두를 말로 눌러버리려고, 날카로운 머리를 굴렸다.
여럿이 달려들어 집단으로 얻어맞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맞지 않고 이 가게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나에겐 들무사(野武士)친구가 있어.” 재빨리 히요시마루가 말했다. “난 전에 가이토군의 고묘지에 사환으로 있었어. 그 근처는 하치스카 고로쿠의 세력권이야. 난 하치스카의 들무사들과 친구가 많이 있어. 곤란할 때는 언제든 힘을 보태 주겠다고 했지. 만약 날 때리면 불러올 거야. 이런 가게쯤은 한바탕 휘젓고 부숴버릴 거다.”
사환 아이들은 ‘들무사’라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 막 치켜들었던 팔을 내려버렸다. 무엇보다도, 수십 년 동안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져 온 흉흉한 전국시대였다. 일본 어디에나 들무사가 있었다. 어떤 자는 전투에서 패해 달아나는 무사를 기습해, 포상을 노리고 이긴 다이묘에게 그 목을 바쳤다.
어떤 자는 전장의 시체에서 물건을 빼앗았다. 또 어떤 자는 부잣집에 들이닥쳐 금품을 훔쳤다. 그중에는 수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전쟁의 지원군으로 고용되는 자도 있었다.
들무사란 특정 다이묘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해 제멋대로 살아가는 전국시대의 폭력 집단이었다. 가이토군의 하치스카 고로쿠라고 하면, 이 오와리를 비롯해 미카와, 미노 일대에 이름을 떨친 들무사의 우두머리로, 수백 명에 이르는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하치스카 고로쿠를, 히요시마루가 안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로 밀고를 당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몰려와 심한 보복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일동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히, 히요시… 그것만은 봐줘. 절대 때리지 않게 할 테니까…”
찻사발 가게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자, 반장과 사환 아이들은 방아찧는 메뚜기처럼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입 다물고 있겠어. 하지만 난 이 가게를 그만둘 거야.” “한번 말하면 물러서지 않는 네 성미야. 붙잡지는 않겠다.”
주인은 몹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들무사 친구를 둔 듯한 그 위험한 사환 아이가 가게를 나가 주는 것을 기뻐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짐의 손해는 꼭 물어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히요시마루는 굳어 서 있는 동료 사환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유유히 찻사발 가게를 나섰다.
“잘 됐다.” 가게 앞에 나섰을 때, 히요시마루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홉 살 때부터 일 년 동안 가이토군의 고묘지에 사환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하치스카의 들무사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였다.
애초에 아홉이나 열 살짜리 아이에게 들무사 친구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는데도, 가게 사람들은 몹시 당황한 나머지 히요시마루의 지어낸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들무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만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히요시마루는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다.
“영감님이 또 험상궂은 얼굴로 고함치겠지.” 기요스 마을을 등지고 일 년 만에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히요시마루의 모습에는, 도무지 소년다운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 험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걸어가는 모습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뒤돌아보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 번 꼭 뵙고 싶어.” 두 번째 아버지인 다케아미의 얼굴을 떠올리면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히요시마루였다. 나카무라까지는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한 길이었다. 무겁게 옮기는 그의 발밑에서는 푹푹 먼지가 일어올랐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02. 절의 꼬마대장
덴분(天文) 5년(1536년), 히요시마루는 전국시대 한창때에 오와리의 나카무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노시타 야에몬이라 하여, 나고야의 성주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던 신분이 낮은 무사, 즉 아시가루였다. 히요시마루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야에몬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무사를 그만두고 농부가 되어 있었다. 누나는 한 명 있었다.
가난했지만, 부지런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네 식구는 사이좋게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전국시대의 아이답게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웃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지내는 골목대장이었다. 그러나 이 기노시타 집안의 평화로운 생활이 깨질 때가 찾아왔다. 히요시마루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죽은 것이다.
두 번째 아버지 다케아미가 집에 들어오자, 히요시마루는 이제 마음껏 놀 수 없게 되었다. “원숭이, 원숭이. 이리 와라.” 히요시마루가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있는데, 다케아미가 불렀다. 히요시마루는 부루퉁한 얼굴로 일어섰다. 어제 막 이 집에 들어온 두 번째 아버지가 자신을 ‘원숭이’라고 부른 데에 화가 났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원숭이처럼 생겼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렇게 부를 것까지야 없잖아. 돌아가신 아버지조차도 나를 꼭 ‘히요시’라고 불러 주셨는데. 기분 나쁜 인간이야.) 이것이 히요시마루의 속마음이었다.
“뭐요?”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하고 앉는 법이다.” 다케아미는 화로 곁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죽은 야에몬의 친구였던 그는, 예전에 나고야 성에서 어린 영주 노부나가의 말동무를 하며 잡담을 하거나 차를 올리는, 이른바 차시중 같은 일을 맡았던 탓인지 예법에 엄격한 버릇이 붙어 있는 듯했다.
히요시마루는 불대나무를 내던지고 마지못해 무릎을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원숭이, 너 몇 살이냐.” “여덟. 알고 있잖아.” “쓸데없는 소리 마라. 이놈, 원숭이. 너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벌써 여덟 살이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 여덟이나 먹고도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부터는 제대로 농사일을 거들어라.”
히요시마루는 털털한 성격이라 다케아미처럼 잘난 체하며 사람을 부려먹는 인간을 몹시 싫어했다. 힘으로 억누르려는 상대에게는 일부러라도 고개를 치켜드는 성질이었다. 울컥 반항심이 치밀어 올랐다. “아저… 아니, 아버지 나리께서는 여덟 살 때 뭘 하고 계셨는데요?” ‘아저씨’라고 부르려다 말을 바꾼 것이었다.
“나 말이냐…” 다케아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같은 나카무라에 살던 그는 평소 히요시마루가 장난꾸러기이고 말대꾸를 잘하는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어른의 약점을 찌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다케아미 자신도 그 나이 때는 놀기만 했던 것이다.
“닥쳐라. 내 일은 상관없다. 내가 이 집의 가장이 된 이상, 모든 일을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똑똑히 새겨 두어라.” 화로 칸막이를 화집게로 탁탁 두드리며 다케아미가 소리쳤다. “그리고 나를 ‘아버지 나리’라니 무슨 말이냐. ‘아버님’이라 불러라. 비록 지금은 농부일지라도 원래는 성을 섬기던 무사다. 죽은 야에몬도 무사였다. 그 자존심을 잊지 마라.”
“난 성의 어린 영주님이 아니야. 농부 자식이 ‘아버님’ 같은 소릴 하면 다들 비웃는다구.” 히요시마루의 날카로운 빈정거림에 다케아미는 완전히 격분했다. “이 녀석! 건방진 놈이라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버릇없을 줄이야… 이렇게 해 주마!”
화집게를 치켜들기 전에, 히요시마루는 별명 그대로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달아나 버렸다.
다케아미가 만약 차분히 타일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히요시마루를 어린애라고 얕보고 그 성격을 인정하지 않은 채 명령만 내린 것이, 오히려 그의 반항심을 부추겼다. 이렇게 해서 히요시마루와 다케아미의 불화는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뒷마당으로 나가 보니, 어머니가 아침도 먹기 전에 벌써 괭이를 들고 있었다. “어머, 히요시. 왜 그렇게 부루퉁한 얼굴이니? 아궁이 불은 잘 타고 있니?” 어머니가 말을 걸자 히요시마루는 싱긋 웃었다. 이 말썽꾸러기인 그도 어머니에게만큼은 순하고 인정 많은 소년이었다. “제가 부루퉁해 보인다고요? 아마 아궁이 연기 때문일 거예요.”
히요시마루는 일부러 익살을 부렸다. 다정한 어머니에게 다케아미와의 다툼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도 안 먹고 일하면 몸에 해로우니까 부르러 왔어요. 밥 다 됐어요.” “고마워요.” 이때는 어물쩍 넘겼지만, 히요시마루와 다케아미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곧 어머니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원숭이, 원숭이.” 다케아미가 고집스럽게 하루 종일 히요시마루를 불러 일을 시키려 하면, 히요시마루는 일부러 도망쳤다. “히요시야, 엄마 일 좀 도와다오.” 새 남편의 눈치를 본 어머니가 다케아미보다 먼저 일을 시키려 하면, 히요시마루는 “네!” 하고 순순히 대답하며 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 옆에서 풀을 뽑거나 씨를 뿌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다케아미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괭이를 내던지고 일부러인 듯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성질 나쁜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히요시마루를 감싸려 하며 다케아미의 눈치를 보았고, 다케아미는 그런 어머니와 누나를 호되게 꾸짖었다. 기노시타 집안에는 히요시마루를 사이에 두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히요시마루가 다케아미의 눈을 피해 숨어서 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웃 아이들과 놀 때의 그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난폭해져 갔다. “이봐, 이야기 좀 하자.” 다케아미는 히요시마루의 어머니와 누나를 불러들였다. “그 원숭이 녀석이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건, 너희들이 너무 응석을 받아주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나를 우습게 보고 있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히요시는 아직 놀고 싶은 나이의 아이일 뿐이에요.” 어머니 나카는 히요시마루를 감쌌다. “그런 감싸기가 문제다. 나는 이 집에 온 지 1년 동안 어떻게든 저 녀석을 제대로 된 아이로 키워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전부 헛수고였다. 저 녀석은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요즘은 거의 미친 개나 다름없다. 동네에서도 골칫거리야.”
다케아미는 격하게 단정지었다. “이대로 두면 저 녀석은 틀림없이 큰 악인이 될 거다. 나는 이 집에서 그런 악인을 내보내고 싶지 않다. 너희도 같은 마음이겠지.” “히요시가 악인이 된다니… 그런…”
누나 도모 역시 하나뿐인 남동생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나카와 도모는 ‘당신이 너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되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당시에는 여자가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나서서 의견을 말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너희들, 나에게 대들 생각이냐?” 창백한 뺨을 떨며 다케아미가 호통쳤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음… 그래서 말이다. 나는 저 원숭이 녀석을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절에 맡기기로 했다.” 두 사람은 놀라 얼굴을 들었다. “네? 히요시를 절에요…?” “그래. 가이토 군의 고묘지 주지는 옛날부터 아는 사이니 부탁해 두었다.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너희들, 반대는 없겠지. 모두 저 못된 녀석을 위한 일이니까.” “….” “….”
다케아미가 아무리 히요시마루를 비난해도, 어머니와 누나에게 히요시마루는 영리하고 순수하며 마음씨 고운 소년이었다. 물론 최근의 히요시마루가 난폭해진 것은 사실이고, 이웃 사람들의 불평도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케아미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엄격함에 대한 반발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카는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 히요시마루를 집에 두면, 다케아미는 점점 더 엄격해지고 히요시마루의 반항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것은 히요시를 위한 일이 아니다. 떨어뜨려 놓는 것은 괴롭지만, 결심해서 절에 맡기자. 절에 가면 학문도 배울 수 있다. 영리한 저 아이에게는 농사일보다 중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나카는 어머니로서의 사랑에서, 히요시마루를 고묘지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말하면 저 녀석은 일부러라도 듣지 않을 게 뻔하다. 너희들 의견이라고 말해라.” “예.” 히요시마루는 어머니에게 설명을 듣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고묘지에 맡겨졌다.
어머니와 누나와 헤어지는 슬픔보다도, 다케아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만큼 히요시마루는 두 번째 아버지를 싫어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케아미의 계략이라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히요시마루는 사람이 달라진 듯이 주지의 말을 잘 따르고 경을 외우며 학문에 힘썼다.
“다케아미는 저 아이를 미친 개니 골칫거리니 했지만, 이건 보통 아이가 아니다. 머리도 뛰어나고 노력도 대단하다. 이런 아이는 좀처럼 없다. 게다가 밝고 쾌활하다. 얼굴은 원숭이 같지만, 장차 큰 인물이 될 게 틀림없다.”
주지는 히요시마루의 진짜 성품을 알아보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하지만 단 하나, 곤란한 점이 있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정말 히요시의 말대꾸에는 당해낼 수가 없구나.” 히요시마루는 약 1년 동안 얌전한 동자승 생활을 이어갔지만,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이 절에 맡겨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핑계 삼아 날 속였구나. 젠장. 그렇다면 아버지 뜻대로 순순히 굴지는 않겠다.)
히요시마루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절 근처의 아이들을 모아 전쟁놀이를 벌였다. 나카무라에서는 강가나 들판이 놀이터였지만, 이제는 넓은 절의 본당과 지붕, 묘지가 놀이터가 되었다. 종도 있고 목어도 있다. 전쟁놀이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힘은 약하지만 머리가 좋은 히요시마루는 절에 머무는 아이 신분을 이용해 금세 골목대장이 되어 버렸다.
“사내아이라면 조금쯤 난폭해야 기운이 있는 거지.” 히요시마루를 완전히 믿고 있던 주지는 절 안이 전쟁터가 되어도 웃으며 내버려 두었다. (주지를 화나게 해서 이 절에서 쫓겨나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계획이 어긋났네. 하지만 언젠가 도망칠 기회가 오겠지.)
히요시마루는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 기회는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주지가 마을의 법사에 나가 절을 비우게 된 것이다. “오늘은 주지가 저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 배고프면 부처님 공양도 먹어라!” 이미 완전히 대장 노릇이 몸에 밴 히요시마루는 주지만 앉을 수 있는 붉은 칠을 한 기묘한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선언했다.
본당에는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하자! 하자!” “와아!” 아이들은 개구리처럼 본당 안을 뛰어다녔다. 종을 치는 아이, 목어를 두드리는 아이, 촛불과 향에 불을 붙이는 아이, 거꾸로 서거나 씨름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아미타불상에 장난을 칠 정도로 불경한 아이는 없었다.
히요시마루는 금빛으로 빛나는 그 아미타불과, 소란스럽게 떠들며 돌아다니는 소년들의 무리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 깊은 곳에는 뭔가 꿍꿍이가 숨어 있는 듯했다. “야, 사루(원숭이), 너도 우리 편에 들어와라.” “좋아, 간다.” 히요시마루는 붉게 칠한 의자에서 뛰어내리더니 쿵쾅, 쿵쾅 하고 북을 울려 한바탕의 소란을 잠재웠다.
“얘들아, 떠드는 게 부족하다. 이건 마치 장례식 같잖아. 오늘은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리 난폭하게 굴어도 괜찮다. 나중에 책임을 물어서 중이 화를 내면, 내가 책임을 질 테니까 겁먹지 말고 아미타불이든 뭐든 기어올라라. 마음껏 날뛰지 않으면 다시는 이 절에 못 오게 할 거다.”
“책임은 내가 진다”고 하며 거칠게 부추기자, 소년들은 전보다 더욱 심하게 장난과 난폭한 행동을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히요시마루는 집요하게 부추겼다. 소년들은 그때마다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는 힘을 다해 점점 더 대담해졌으며, 그런 일이 거듭되자 평소와는 다른, 미친 듯한 기색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눈은 번들번들 빛나고,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며 새로운 대담한 장난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마치 미친 개떼 같았다. 히요시마루가 “절을 부숴라”라고 명령해도, “정말로 불을 질러라”라고 해도, 집단으로 그대로 실행해버릴 만큼 무모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흠, 흠… 이제 슬슬 됐군.” 소년들의 열기에 찬 모습을 둘러보며 히요시마루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히요시마루만이 마치 바다 밑바닥처럼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몇 번째인지 모를 북소리가 다시 그의 손에서 울려 퍼졌다. 소년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미친 개처럼, 히요시마루의 입에서 나올 명령을 기다렸다. “다들 잘 들어라. 이건 말이다…” 히요시마루는 본당 안쪽에 서 있는 아미타불을 북채로 가리켰다.
“이 아미타불은 금 옷을 입고 매일같이 경을 들으면서 거들먹거리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다. 중이나 마을 사람들은 이 아미타불이 인간의 고통과 고민을 구해준다고 믿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힘이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정말로 힘이 있다면 이렇게 수십 년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마을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릴 리가 없지 않느냐. 이건 아무것도 못 하는 얼간이다. 내가 때려도 화도 못 낸다. 봐라, 이렇지 않느냐.”
히요시마루는 아미다불에게 달려가 북채로 세게 내리쳤다. 불상이 화를 낼 리 없었다. “이런 엉터리 아미다불을 떵떵거리게 놔둘 수는 없다. 자, 다들 이 목에 줄을 걸어서 마당으로 끌어내라. 그리고 마음껏 때려부숴라. 그러면 아미타불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세상을 좋게 만들 거다.”
능숙한 연설로 히요시마루는 장난꾸러기들을 부추겼다. 이렇게까지 부추김을 당하고도 물러서면 비겁자가 된다. 소년들은 본당 마룻바닥 밑에서 굵은 밧줄을 꺼내어, 자기들 몸의 네 배는 될 듯한 아미다불에 기어올라 그 목에 줄을 감았다. “자, 당겨라!” “영차!” 소년들이 힘을 맞춰 줄을 잡아당기자, 아미타불의 몸은 다다미 위로 고꾸라져 넘어졌다.
그리고 코를 다다미와 마룻바닥에 긁으며, 툇마루 끝에서 거꾸로 뒤집힌 채 마당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해냈다!” “와아!” 환성을 지르며 소년들은 아미타불 위로 뛰어올랐다. 히요시마루는 본당 끝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어젯밤부터 계획해 두었던 일이었다. 아미타불은 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그 불상에 이런 장난을 치면, 아무리 성격 좋은 중이라도 화를 내고 자신을 절에서 내쫓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노림수로 마을 장난꾸러기들을 부추긴 히요시마루에게는 겨우 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담함과 예리함이 있었다. 이제는 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 멍청한 아미다타놈, 이렇게 해주겠다!” 한 소년이 외치며 아미타불의 머리를 걷어차자, 덜컹 하고 흔들리더니 목이 몸통에서 떨어져 버렸다. 마당으로 떨어질 때 금이 간 모양이었다. “앗!” “큰일 났다!” 장난꾸러기들도 이번에는 놀라고 말았다.
방금까지의 미친 듯한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얼굴빛이 변해 멍하니 서 있었다. 히요시마루 역시 깜짝 놀랐다. 그저 마당으로 끌어내는 정도라면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옮겨놓을 수 있겠지만, 목이 부러져버린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히요시마루는 완전히 난처해졌다.
소년들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말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나도 안 했어.” “이렇게 된 건 사루 때문이야.” “맞아, 사루가 우리를 부추겼잖아.” “다 사루 탓이야. 나쁜 건 사루야.” 지금까지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던 열 명 남짓이 갑자기 하나로 뭉쳐 히요시마루를 적으로 돌렸다.
“겁먹지 마라!” 히요시마루는 툇마루 끝에 서서 외쳤다. “처음에 말했듯이 책임은 내가 진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소년들은 그 말에 안심하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히요시마루는 떨어진 아미타불의 머리를 주워 불경을 올려놓는 탁자 위에 두었다.
“아미다님, 죄송합니다. 머리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는데, 그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이 절을 나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스님을 화나게 해서 쫓겨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먼저 떠나겠습니다. 아미다님, 엉뚱한 피해를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히요시마루는 두 손을 모아 진지한 얼굴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을 외웠다. 히요시마루는 쪽지를 남기고 광명사를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그 후 그는 기요스 마을로 나가 품팔이를 했지만, 이곳저곳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도망치는 생활을 2년 동안 이어갔다.
무사가 되기로 결심한 히요시마루는 찻그릇 가게를 나와 나카무라로 돌아왔다. 어머니에게만은 그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는 중이 되라거나 장사꾼이 되라고는 하지 않겠다. 네가 가고싶은 길을 가거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 조금씩 모아둔 돈을 몰래 히요시마루에게 건네주었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03. 야하기의 다리(矢矧の橋)
태양이 산그늘로 가라앉자, 사방에 저녁 안개가 자욱이 깔려 왔다. 히요시마루는 야하기강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어, 모래먼지로 새하얗게 된 발을 씻기 시작했다. “아, 기분 좋다.” 숨이 막힐 듯 무더운 한여름 한낮을,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오카자키 거리를 돌아다닌 히요시마루의 발은 열이 올라 부어 있었다.
그 발을 차가운 물에 담그는 것은, 그야말로 다시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발을 식히고, 얼굴을 씻고, 크게 한숨을 돌리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프네. 하지만 오늘 밤은 밥을 먹을 수 없겠지. 이걸로 참을 수밖에.” 히요시마루는 길가 밭에서 훔쳐 온 무의 흙을 씻어내고, 강가의 풀숲에 털썩 주저앉아 그대로 베어 물었다.
개구쟁이에 기운 넘치는 히요시마루라 해도, 해질녘이 되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더구나 오늘은, 팔아야 할 바늘이 하나도 팔리지 않아, 값싼 목조 여관에조차 묵을 수 없는 처지였다. 강가든 신사 마루 밑이든, 가릴 것 없이 잠을 잘 수 있는 히요시마루였지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생무를 씹으면서, 그는 문득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어머니는 잘 계실까. 보고 싶다…” 2년 전 헤어진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쓸쓸함과 함께 가슴 속에 되살아났다. 발걸음 빠른 히요시마루라면 고향 나카무라까지 이틀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있고, 누나도 있다. 그리고 먹을 것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다케아미도 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히요시마루는 얼굴을 찡그리며 퉤 하고 무 껍질을 뱉어냈다.
“쳇, 생각만 해도 그 영감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그는 남은 무를 내던졌다. 무는 한 번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곧 떠올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내려갔다. “――그래도, 내가 없기만 하면 그 집은 잘 돌아가. 그 영감의 불기분도, 어머니와 누나의 고생도, 전부 내 탓이었지. 모처럼 평온하게 살고 있는 집에 돌아가서 또 소란을 일으키면 어머니가 불쌍해.
그보다 하루라도 빨리 무사가 되어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야 해. 그렇게 되면 그 영감도 틀림없이 나한테 고개를 숙이게 될 거야. 아아, 빨리 그렇게 되고 싶다. 무사가 될 기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히요시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어디서 잘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음, 음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발치의 바늘 상자를 들고 둑 위로 올라갔다. 그 상자에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비상금으로 사들인 바늘이 들어 있었다. 이 바늘을 팔러 다니며, 히요시마루는 무사가 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야하기강의 얕은 여울을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하나도 없는 고요한 한밤중, 어디선가 수십 명의 사람 그림자가 한 무리를 이루어 다리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떠오른 그 모습은 분명 갑옷 차림이었다.
허리에 찬 칼의 장식과, 손에 든 창끝이 번쩍번쩍 빛났다. 위엄 있고 삼엄한 이 일단은 도대체 누구일까. 다리 한가운데에는 거적이 둥글게 말린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선두에 선 한 사람이 “거슬린다.” 하며 그 거적을 발로 차고 지나가려는 순간, “아야!” 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일행이 걸음을 멈추자, 한 소년이 벌떡 일어나 다리 위에 털썩 앉았다. 히요시마루였다. 거적을 덮고 다리 한가운데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거지 꼬마였나. 조심해라. 이런 데서 자다가는 밟혀 죽는다. 거지는 거지답게 다리 밑에서나 자거라.” 대장처럼 보이는, 진바오리(陣羽織)를 걸치고 은으로 감은 창을 든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하자,
“기다려!” 히요시마루가 날카롭게 외치며 그 창자루를 붙잡았다. “――다짜고짜 사람을 걷어차 놓고, 거지 취급을 하다니 무슨 짓이냐. 이대로는 못 지나간다.” “뭐라고?” 수십 명의 사내들이 히요시마루를 둘러싸고 노려보았다. 달빛에 떠오른 그 모습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뿐이었다.
“이 거지 놈, 손 놔라.” “못 놓는다.” 히요시마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타고난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너, 나를 거지라고 했지. 나는 비록 바늘 장사를 하고 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남에게 구걸한 적은 없어. 무례하군.”
“닥쳐라, 무례한 건 네놈이다. 이봐, 꼬마야. 네 앞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도 이렇게 길을 막는 거냐?” “시끄러워, 하인은 물러서 있어라.” “이분은 하치스카 고로쿠님이시다.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도 모른다고는 못 할 것이다.”
갑옷 아래로 털이 무성한 정강이를 드러낸 한 부하가, 쿵 하고 창자루를 울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치스카 고로쿠….” 히요시마루는 진바오리를 걸친 대장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흘겨보았다. 수염이 난 얼굴이며, 진바오리 아래로 보이는 갑옷과 칼의 당당한 모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小六)인 듯했다.
이로써 상대의 정체가 노부시(野武士-떠돌이 무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찻집에서 협박용으로 이름을 들먹이던 그 하치스카 고로쿠라니…. “그래, 겁이 나느냐.” 부하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진짜라는 것을 알아보자, 히요시마루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부시라도 하치스카 고로쿠라면 올바른 사람일 거야. 나는 이자의 부하가 되겠다. 언제까지나 바늘 장사만 해서는 소용없어. 우선 이자의 부하가 되고, 그다음 기회를 기다려 제대로 된 무사가 되면 된다.’)
몇 시간 전, 강가에 앉아 하루라도 빨리 무사가 되고 싶다고 바랐던 그 기회가, 지금 이곳에 찾아왔음을 히요시마루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머리를 숙여 부탁하지는 않았다.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하치스카 고로쿠님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불경하다.” “뭐라, 사칭이라고…!” “이놈봐라…!” 노부시들이 저마다 외치며 다가왔지만, 히요시마루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하치스카 고로쿠님은 훌륭한 노부시다. 사람을 걷어차 놓고 거지라고 부르는 그런 예의 없는 분이 아닐 거다.” “음…” “……”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두들겨 패려던 노부시들은, 아픈 곳을 찔린 듯 신음했다. 히요시마루는 이런 흥정과 밀고 당기기에 놀랄 만큼 능숙했다. "이봐, 아이야. 확실히 네 말이 맞다. 거지라고 한 것은 내가 잘못이다. 나는 하치스카 고로쿠 마사카쓰. 결코 가짜가 아니다.” 진바오리를 입은 사내가 히요시마루를 향해 사과했다.
“――하지만 이런 데서 자고 있으면 밟혀 죽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느냐. 자려면 남의 방해가 되지 않는 곳에서 자거라. 자, 그 손을 놓아라. 우리는 바쁘다.” “아직 놓을 수 없어. 아저씨는 방금 이런 데서 자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여긴 아저씨 집이 아니야. 야하기 큰다리 위라고. 자든 말든 내 마음이야. 발로 찬 아저씨가 나쁜 거지.”
“자지 말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다리 한가운데서 잘 필요는 없잖느냐.” “유감이지만 난 구석이 싫어. 걸을 때도, 잘 때도 한가운데가 좋아. 사람이 기분 좋게 자고 있는데 발로 차 놓고 설교하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야.” “그런가. 그렇다면 사과하겠다.”
소문난 노부시의 대장인 하치스카 고로쿠도, 히요시마루의 궤변 앞에서는 결국 고개를 숙여 사과하게 되었다. “그런 말로만 하는 사과로는 안 돼.” 히요시마루는 교활한 눈빛으로 고로쿠를 노려보았다. 부하가 될 수 있을지, 이제부터가 중요한 고비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저씨가 여기 누워. 내가 발로 차 줄게.” “뭐라고?”
고로쿠는 벌컥 화를 냈다. 노부시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많은 부하들 앞에서 이런 꼬마에게 걷어차이게 되면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다. “싫겠지.” 히요시마루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대신 내 부탁을 들어줘. 그러면 용서해 줄게.” “돈이냐?” “아니야. 나를 부하로 삼아 줘.” “호오. 네가 이 고로쿠의 부하가 되고 싶다는 거냐?”
“그래. 아니, 그렇습니다.” 히요시마루는 여기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말투까지 바꾸어 고로쿠에게 부탁했다. “부디 저를 부하로 삼아 주십시오. 싫다면, 반드시 당신을 걷어차겠습니다.” 고로쿠는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하는 히요시마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십 명의 노부시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낌 없이 말을 내뱉는 이 소년에게는, 어딘가 고로쿠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히요시마루.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원숭이라고 부릅니다.” “원숭이라, 과연.” 노부시들은 달빛에 비친 히요시마루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고는 하하하 웃었다.
히요시마루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태어난 곳은?” “나카무라입니다. 오와리의 나카무라요.” “나카무라라면 하치스카 마을 바로 옆이군. 같은 오와리 사람끼리 여기 미카와의 야하기 다리에서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겠지. 어쨌든 따라오너라. 저택에서 심부름이라도 시켜 주마.”
히요시마루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다리 위에 두 손을 짚고 노부시들에게 머리를 숙인 뒤, 히요시마루는 베개 삼아 쓰던 바늘 상자를 안고 일어섰다. 고로쿠의 부하가 되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자였지만, 어머니에게 받은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것을 버리고 갈 히요시마루가 아니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던 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부시들은 다시 한 덩어리가 되어 야하기 다리를 건너, 미카와와 오와리의 경계를 넘어 하치스카 마을을 향해 밤길을 걸어갔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4 무라마사(村正)의 명도(名도)
무사가 되고 싶다고 어릴 적부터 바라왔던 히요시마루는, 하치스카 마을의 고로쿠(小六)의 저택에 살게 됨으로써, 드디어 그 소망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비록 떠돌이 무사라 해도, 어쨌든 칼을 찬 무사의 말단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농민이나 상인들과는 다르다. 나에게는 처음 겪는 세계다. 무사가 농민이나 상인과 어떻게 다른지, 나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
수십 명의 하인들이 어슬렁거리며 드나드는 크고 위엄 있는 저택에 들어섰을 때, 히요시마루는 그렇게 결심했다. 원래 히요시마루는,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고, ‘싫다’고 생각하면 어떤 혹독한 일을 당해도 절대 따르지 않는, 강하고 고집 센 성격의 소년이었다.
그래서 고로쿠의 저택에서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 보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가을 낙엽이 정원을 노랗게 뒤덮기 시작한 어느 아침, 하치스카 고로쿠는 툇마루로 나와 칼 손질을 시작하려 했다. 안쪽 정원에서는 히요시마루가 등을 보인 채 낙엽을 쓸어 모으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蜂須賀小六(はちすかころく)彦右衛門(ひこえもん)正勝(まさかつ): 1526~ 1586年.愛知県あま市にあった蜂須賀城で生まれ.豊臣秀吉: 1937~1998]
“히요시, 좋은 아침이다.” 고로쿠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저택 사람들은 모두 히요시마루를 ‘원숭이’라고 불렀지만, 고로쿠만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천 명의 부하를 거느린 장수답게, 그는 사람을 가벼운 별명으로 부르는 경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뒤돌아본 히요시마루는 비질을 멈추고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정원을 나가려 했다. “이봐, 히요시, 어디 가느냐.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잖느냐.” “예. 다른 데를 먼저 하고, 나중에 다시 여기 와서 이어서 하겠습니다.” “왜냐. 네가 내 모습이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서냐?”
“아닙니다. 저는 누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고로쿠님께서 칼 손질을 시작하시는 것 같아서, 먼지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이곳 청소를 잠시 중단하려는 것입니다.” “호오.” 과연 고로쿠는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손질 도구가 든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상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먼지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정원을 떠나려 한 히요시의 재빠른 판단에 고로쿠는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고로쿠는 칼 손질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배려한 하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고로쿠 자신도 그런 점을 의식해 본 적조차 없었다. “잘 알았다. 히요시, 네 성의를 보아 청소는 그만두고 이리 와라. 내가 칼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마. 무사에게 중요한 마음가짐이니라.” “예.” 히요시마루는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고로쿠의 손놀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고로쿠님.” “뭐냐.” “참으로 훌륭한 칼이군요.” “그래, 무라마사(村正)다. 내 칼 가운데서도 으뜸이지.” “흠…” 히요시마루가 너무 열중해서 바라보자, 고로쿠는 문득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갖고 싶으냐?” “그야…” 당연하다는 듯 히요시마루는 웃었다. “줄까?” “예?” “이 무라마사를 너에게 주겠다.” “저, 정말입니까?”
히요시마루는 꿀꺽 침을 삼켰다. “공짜로는 못 준다. 내 목숨만큼 소중한 물건이니까.”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 급해하지 마라. 지금 생각 중이다.” 고로쿠는 눈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 재빠른 히요시마루를 어떻게 놀려 볼까 궁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좋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한번 빼앗아 보아라.” “도둑질해도 됩니까?” “아니, 내기다. 나는 이 칼을 늘 몸에 지니고 있다. 틈이 있으면 빼앗아 보아라.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가져갈 수 있다면, 네게 주겠다.” “알겠습니다.” “사흘이다. 모레 아침까지로 하겠다.” “반드시 받아내겠습니다.” “꽤 자신이 있구나. 하지만 못 가져가면 어떻게 할 테냐?” “글쎄요…” “머리를 깎겠느냐?” “좋습니다.” “하하하.” “하하하.”
고로쿠와 히요시마루는 서로의 속내를 떠보듯, 경계하면서 웃었다. 고로쿠는 무라마사를 허리에 꽂고, 미닫이문 너머로 사라졌다. 히요시마루는 다시 일어나 청소를 계속했다. 빗자루질은 전보다 훨씬 느려졌다. 틀림없이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이리라. 고로쿠 같은 인물은 수십 자루의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명도는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특히 수십 년간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였기에, 무사들은 서로 다투어 좋은 칼을 얻으려 했다.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켜 주는 무기가 바로 칼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난 명도는 거의 다 유력한 다이묘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보통 무사는 물론 떠돌이 무사 따위가 손에 넣을 기회는 전혀 없었다. 무라마사는 하치스카 가문이 오래전부터 음으로 지원하던 미노의 사이토 가문에서 협력의 답례로 받은, 사연 있는 물건이었다.
고로쿠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만지게 하지 않았던 명도였다. 그런데도 그런 약속을 해 버렸으니, 상대가 히요시마루인 이상 어떤 계략을 쓸지 알 수 없었다. 고로쿠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도코노마에 걸어 두던 무라마사를 하루 종일 품에 안고 다녔다. “이래서는 그 원숭이도 기회를 잡지 못하겠지. 틀림없이 밤을 노릴 것이다. 사흘 동안 나는 절대 잠들지 않겠다.”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날 밤, 결심대로 고로쿠는 밤새도록 졸음과 싸우며 기다렸지만, 히요시마루의 모습은커녕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새벽이 밝자마자 비막이 덧문을 열어 보니, 이미 히요시마루는 정원을 쓸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하얀 이를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뿐이었다. 칼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고로쿠는 왠지 혼자 씨름한 듯 맥이 빠졌다. 손에 든 무라마사를 바라보았다. 잠을 못 잔 탓에 그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낮이라고 해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수십 명의 하인과 바깥의 천 명 부하를 거느린 몸이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날 밤. 고로쿠는 점점 지쳐 갔다. “그놈, 내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자면 안 된다. 오늘 밤쯤 틀림없이 몰래 올 것이다.” 그는 다다미 위에 단정히 앉아 졸음을 참고 있었다. 삐걱, 삐걱.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흠, 역시 왔구나.” 소록은 어둠 속에서 씩 웃으며 오른손으로 무라마사를 꽉 움켜쥐었다. 발소리는 미닫이문 앞에서 멈추고, 금방이라도 열 것 같았다.
고로쿠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여 깨어 있음을 알렸다. 히요시마루는 한동안 상황을 살피더니, 결국 포기하고 조용히 물러나는 듯했다. 그날 밤,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었고, 소록은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툇마루로 나온 고로쿠에게, 히요시마루는 평소처럼 빗자루질을 멈추고 인사했다. 얼굴은 아주 개운해 보였다.
전날 밤 세 번이나 방을 엿보았다면 도저히 푹 잘 수 없었을 텐데, 마치 밤새 푹 잔 사람처럼 상쾌한 표정이었다. “……” 어젯밤 내 방을 엿본 놈이 정말 이 녀석이 맞나? 고로쿠는 여우에게 홀린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히요시마루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매실처럼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지친 기색이 아침 햇살에 또렷이 드러났다.
“오늘 밤에는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히요시마루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쳇.” 고로쿠는 혀를 차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손에는 무라마사를 꽉 쥔 채였다. 그가 하루 종일 바쁜 일에 쫓겨 다니는 동안, 마굿간의 짚더미 속에서 가볍게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는 자는, 틀림없이 히요시마루였다.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오늘 밤만 버티면 된다.” 고로쿠는 졸음을 참기 위해 발밑에 나무토막을 받치고 앉았다. 이렇게 하면 발이 아파 잠이 깨기 때문이었다. “전장에 나가면 닷새, 이레쯤은 안 자도 끄떡없는데, 이번에는 쓸데없는 장난기를 부린 탓에 정말로 진이 빠지는구나.” 누구에게도 불평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고로쿠는 혼자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원의 나뭇가지들이 사락사락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히요시마루가 말했던 대로 비가 빗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 원숭이 녀석, 비바람 소리에 섞여 몰래 다가올 게 틀림없다. 방심은 금물이다.” 고로쿠는 사방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히요시마루의 출현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비와 바람은 점점 거세질 뿐이었다.
“그 녀석, 결국 포기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빗소리 사이로 대나무 삿갓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틀림없이 히요시마루였다. “왔다, 왔어. 어젯밤에는 복도를 따라 오다가 실패했으니, 오늘은 정원 쪽으로 온 게지. 하지만 비를 피하려고 삿갓을 쓰고 오는 걸 보니, 아무리 영리해도 역시 어린애야. 이런 밤에 삿갓을 쓰고 오면 금방 들키는데… 아, 쪽문을 열었군. 정원으로 숨어들었다… 발걸음이 다 들린다. 의외로 멍청한 원숭이로군.”
밖의 소리가 훤히 들리니, 고로쿠는 완전히 안심하고 앉아 있었다. 삿갓을 때리는 빗소리는 한동안 바로 밖에서 이어지다가, 이윽고 멀어졌다. “뭐야. 모처럼 왔는데 되돌아갔군.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내일은 저 녀석 머리를 깎아 주겠어. 조금 불쌍하긴 하지만… 울며 빌면 용서해 줄까? 아니지, 무사의 약속은 쇠보다 단단하다는 걸 가르쳐야 하니 역시 삭발시키는 게 좋겠다. 머리카락쯤은 금방 자라니까 오히려 그 녀석을 위한 일이겠지.”
고로쿠는 내일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다리가 저려서 못 견디겠군. 그래, 이불 속에 있어도 발소리나 빗소리는 다 들린다. 누워서 기다리자.”
마침내 무라마사를 베개 곁에 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누워 보니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이 강하게 붙으려 했다. 그때, 후두득 후두둑― 다시 삿갓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까워졌다. “이건 안 되겠다.” 고로쿠는 고개를 흔들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소리는 다시 처마 밑에 서서 집 안의 기척을 엿보는 듯했으나, 잠시 후 또 멀어졌다. 같은 일이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고로쿠는 그 소리에 점점 익숙해졌고, 걱정보다도 졸음이 더 강해졌다.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반쯤 잠들고 반쯤 깨어 있는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정신이 들어 귀를 기울였다. 후두득 후두둑… 삿갓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끊임없이 처마 밑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꽤 끈질기게 서 있군. 내가 방심하고 잠들기를 기다리는 거다. 하지만 처마 밑에서 비막이문을 열지 않고는 이 방에 들어올 수 없다. 도대체 저 녀석, 어떻게 소리도 없이 비막이문을 열 생각일까. 솜씨를 한번 보자.” 고로쿠는 이불 위에 다시 앉아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았다.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 여전히 비는 삿갓을 두드리고 있었다. 멀리서 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새벽인 듯했다. 비막이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희미한 아침빛이 실처럼 늘어져 종이에 그림자를 비추었다. “자, 마지막 밤이 밝는군. 이 내기는 내가 이겼다. 결국 저 녀석에게 틈을 주지 않았어. 머리를 밀릴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
고로쿠는 혼자 씩 웃으며 크게 하품을 했다. 빗소리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흐흐흐, 아직도 서 있군. 좋아, 내 승리를 선언하고 잠이나 자자.” 고로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다시 크게 하품하고, 툇마루의 빗문을 열었다. “이봐, 히요시.” 낮은 수풀 뒤에 삿갓이 보였다. 오래 기다리다 지친 히요시마루가 쪼그려 앉아 졸고 있는 듯했다.
“이봐, 히요시.” 다시 불렀지만, 삿갓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로쿠는 희미한 아침빛을 비추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삿갓을 응시했다. “앗!” 낮게 외친 고로쿠는 몸을 홱 돌려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런!” 베개 곁에 두었던 무라마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음…!” 고로쿠는 문지방 위에 서서 신음했다. 칼을 빼앗긴 분함보다, 히요시마루의 기막힌 계략에 감탄한 것이었다.
삿갓은 히요시마루의 머리 위가 아니라, 수풀의 가지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낮 동안 푹 잔 히요시마루는 여러 번 삿갓을 쓰고 정원을 오가며 일부러 소리를 냈다. 그 때문에 고로쿠는 히요시마루가 계속 처마 밑에 숨어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로쿠의 주의를 정원 쪽으로 끌어두고, 히요시마루는 몰래 집 안으로 돌아와 복도 구석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쿠는 비막이문을 열고 정원을 들여다보는 순간, 히요시마루는 재빨리 방 안으로 숨어들어 무라마사의 명도(名刀)를 가지고 나왔다. “히요시, 나와라. 내가 졌다.” 고로쿠의 목소리와 함께, 복도의 어둠 속에서 히요시마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얄밉도록 태연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약속에는 틀림없지요, 고로쿠님?” “그래, 그래. 네 계략은 참으로 훌륭했다. 깨끗이 인정하고 칼을 주마.” “감사합니다.” 히요시마루는 한 번 칼을 머리 위로 받들었다. 그리고는 고로쿠에게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저택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칼이 저 같은 자의 손에 들어온 것이 알려지면 분명 시기와 비난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고로쿠님께서 가지고 계십시오. 필요할 때가 오면 그때 돌려받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 내가 맡아 두마.”
이렇게 해서 무라마사의 명도는 히요시마루의 것이 되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고로쿠 마사카쓰의 칼로 보이게 되었다. 히요시마루는 여기서 고로쿠에게 하나의 빚을 지워 둔 셈이었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5. 수상한 고무소(虚無僧)
(虚無僧-こむそう: 禅宗の一派である普化宗の僧であり、剃髪しない半僧半俗の存在である/허무승-코무소: 선종의 일파인 보화종의 승려이며, 삭발하지 않는 반승반속의 존재이다.)
삼 년이 흘렀다. 하치스카 고로쿠의 저택에서는 주인 고로쿠에서부터 히요시마루 같은 하급자까지 모두 같은 음식을 먹었다. 검소한 생활이었지만, 그럼에도 히요시마루에게는 그것이 처음 겪어보는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한껏 일하고 배부르게 먹는 히요시마루는 몸집은 작았으나, 어느덧 한 사람 몫을 하는 소년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열여섯 살이라고 하면 슬슬 어른의 무리에 들어갈 나이였지만, 히요시마루는 그 작은 체격과 왜소한 몸집, 그리고 타고난 꾸밈없는 성격 탓인지 여전히 아이 취급만을 받았다. 그래도 히요시마루는 불평 하나 늘어놓지 않고, 익살스러운 말을 하여 저택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면서, 몸놀림 가볍게 일을 해내고 있었다.
이 삼 년 동안 히요시마루는 ‘노부시(野武士)’라는 존재를 예리하게 관찰해왔다. 천 명에 이르는 노부시들은 완전히 고로쿠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힘자랑이나 공적 자랑은 해도, 서로를 시기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없었다. 동료를 밀어내고 출세하려는 자도 없었다. 모두가 단결하여 오로지 고로쿠의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이 노부시들은 이처럼 훌륭하게 단결하여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힘을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무슨 목적을 위해 단결하고,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일까. 이 단결과 힘을 가지고 이 전국시대에 나선다면, 틀림없이 큰일을 해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이 하치스카 노부시의 세력을 이용하려는 다이묘는 없는 것일까…”
히요시마루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야하기가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왜 그런 수상한 모습으로 그곳을 배회하고 있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로부터 삼 년 동안 거의 그들이 무장하고 출동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히요시마루에게는 하급 신분의 생활이었지만, 어떻게 이 많은 가신들을 먹여 살리고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지조차도 신기하기만 했다.
이만한 인원을 먹여 살리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 여러 의문 가운데 하나가 마침내 풀릴 때가 찾아왔다. 고로쿠의 넓은 저택은 해자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름의 태양이 겨우 서쪽으로 기울 무렵, 히요시마루는 어슬렁거리며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어라?” 해자에 놓인 다리를 건너려던 순간, 히요시마루는 한 사람의 고무소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고무소는 해자 가장자리의 버드나무 아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라고 히요시마루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 저택 사람인가?” 라고 고무소는 깊이 눌러쓴 삿갓 속에서 물었다. “그래. 아저씨. 이런 데 앉아 있어서 어쩐 일이야? 배고픈 거야?” 히요시마루는 늘 배를 곯던 처지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쪽으로 생각이 미치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 배는 고프지 않다.” “그럼 병이야?” “아니.” “보시를 받고 싶다면 받아다 줄게.” “필요 없다.” “볼일이 없는 거라면 이런 데 앉아서 해자를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아. 깊이를 재는 걸로 오해받으면 곤란하잖아. 이 저택엔 강한 사람들이 많아서, 들키면 큰일 나.” “그렇겠지.” 고무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끼고 있던 팔을 풀고 무릎 위의 퉁소(尺八)를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 손을 보는 순간, 히요시마루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하기야, 아저씨는 무사 같은 사람이니까, 하치스카 노부시도 무섭지 않겠지.” 깊은 삿갓이 움찔 흔들리더니, 고무소는 벌떡 일어섰다. “어째서 내가 무사라는 걸 알았지?”
“손이야. 손가락 사이가 하얗잖아. 진짜 고무소라면 일 년 내내 밖을 돌아다니니까 더 햇볕에 타 있어야 해. 앉는 자세도 갑옷 입었을 때의 자세고.”
“무서운 아이가 있구나.”
고무소는 그렇게 말하며 삿갓을 벗었다. “—나는 미노에서 왔지만, 오는 길에 누구에게도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실은 고로쿠 마사카쓰 공께 볼일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아니, 사람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좀 더 어두워진 뒤에 들어가고 싶다. 고로쿠 님께 전해주겠나. ‘미노의 사자’라고 하면 알 것이다.” “좋아.”
히요시마루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여 문 안으로 들어갔다. “뭐라, 미노의 사자라고… 좋다. 해가 지면 이리로 안내해라.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 고로쿠는 매우 긴장한 기색으로 히요시마루에게 명했다. 그날 밤, 고무소 차림의 사자와 고로쿠 마사카쓰는 늦은 시간까지 안쪽 방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노(美濃)라면, 틀림없이 사이토가문(斎藤家)의 가신일 것이다. 사기야마성(驚山城)의 성주인 사이토 도산(斎藤道三)과 이나바야마성(稲葉山城)의 성주인 그의 아들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竜) 부자 사이가, 부모 자식이면서도 원수처럼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인데, 저 고무소는 어느 쪽의 가신일까.” 정원을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안채의 등불을 바라보며, 히요시마루는 그 주변을 서성거리며 걷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고로쿠 마사카쓰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무언가 상의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은 안쪽 뜰에 들어오지 마라”는 말을 들은 히요시마루는 청소를 멈추고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부산하고 긴장된 공기가 저택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이봐, 대장님이 부르신다.” 히요시마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구간을 나섰다. 이 비상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 때가 온 듯했다. 긴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어른스러워 보였다.
“히요시. 미노의 사자는 네 날카로운 눈에 놀라고 있었다. 그자는 사기야마성의 사이토 도산 공의 밀사다. 도중에 이나바야마성의 요시타쓰 공의 엄중한 경계를 뚫고, 더 나아가 이 오와리에 들어와서는 오다 가문의 영지를 통과해 왔다. 그 사이 수백, 수천의 눈을 거쳤지만, 저 고무소의 정체를 간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들켰다면 목숨이 없었겠지만… 참으로 무서운 소년이라고, 너를 칭찬하고 있더라. 덕분에 나도 어깨가 으쓱했다.”
고로쿠는 빙긋 웃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네 그 날카로움과 용기를 사서 하나 부탁이 있다. 중대한 일이다.” “무슨 일입니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히요시마루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고로쿠는 시험하듯 되물었다. “그 고무소가 사이토 도산 공의 밀사라면, 틀림없이 도산과 요시타쓰 부자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음.” “아마 은거한 도산 공이 아들 요시타쓰 공을 공격하여 멸하고, 다시 이나바야마성의 주인으로 돌아가 미노를 다스리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를 위해 고로쿠님께 힘을 빌려달라고 밀사를 보내신 것이겠지요.” “어째서 그걸 알지?” “지금까지의 말씀으로요. 게다가 사이토 부자의 불화는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곡이다. 참으로 무서운 녀석이로군.”
히요시마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탄하며 고로쿠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사이토 도산 공의 원조를 받고 있다. 이렇게 많은 가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도산 공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다.” — 그렇구나, 미노의 사이토 도산이 이 고로쿠와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인가… 히요시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그가 품어왔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그래서 나는 실력 있는 가신 열 명 정도를 이나바야마 성 아래로 보내 불을 지르게 할 것이다. 그것을 신호로 도산 공의 군세가 공격해 들어올 계획이다. 히요시, 너도 그 일에 참가해라.” “싫습니다.” 히요시마루는 그 자리에서 단호히 거절했다.
“뭐라고…?” 고로쿠의 눈썹이 험해졌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왜냐.”
“다른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이토 도산 공의 부자 싸움에는 손을 빌릴 수 없습니다. 도산 공이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 사람은 진정한 악인이 아닙니까.” “말이 지나치다, 히요시. 전국시대에 사는 사람이 정직함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고로쿠가 아무리 꾸짖어도, 히요시마루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도산 공은 본래 악당입니다. 원래는 기름을 팔던 행상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름 장수가 미노 한 나라의 다이묘로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잔혹한 짓을 해왔겠습니까… 제가 들은 것만 해도, 먼저 주인 나가이 나가히로 부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더 나아가 주군인 미노의 슈고 토키 가문까지 멸망시켰습니다. 아무리 전국시대라 해도 주인을 죽이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 자식까지 치려 하고 있습니다. — 이 정도의 악인은 없습니다.”
“……” 이런 지식을 어디서 얻어왔단 말인가. 틀림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바늘을 팔던 지난 이 년 동안 얻은 것일 터였다. 고로쿠는 마치 자신이 비난받는 것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가장 아픈 곳을 찔린 것이다. “저는 오늘을 끝으로 이 저택을 떠나겠습니다. 도저히 사이토 도산 공을 돕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떠난다고…?” “예.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밀사의 일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고로쿠의 속내를 앞질러, 히요시마루는 말했다. “내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삼 년 동안 신세를 진 고로쿠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례지만, 설령 죽더라도 그런 악인과 손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라도 빨리 도산 공과의 연을 끊으십시오. 그는 저주받은 다이묘입니다.”
말없이 앉아 있는 고로쿠를 남겨두고, 히요시마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중히 간직해두었던 바늘 상자를 안고, 저택을 나선 그는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고로쿠에게 맡겨두었던 무라사마의 명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6 마상의 무장 (馬上の 武将)
[*織田信長 1534 06 23~1582 06 21 (48)
豊臣秀吉 1533 03 17~1598 09 18 (65)
徳川家康 1543 01 31~1616 06 01 (73)]
“바늘사세요… 바늘…” 히요시마루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소리를 외치며 길을 계속했다. 삼 년 전과 비교해 그 모습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들무사들 사이에서 살아온 탓인지 어딘가 예전보다 더 늠름해 보였다.
덴분(天文) 20년(1551년), 히요시마루(日吉丸)의 모습은 도토미(遠江-현재 静岡県 서부) 하마마쓰(浜松)의 변두리에 나타났다. 마침 가로수길의 나무들이 푸른 새싹을 내밀기 시작한 때였다.
“나는 벌써 열일곱이 되었구나… 하치스카(蜂須賀)를 떠나온 지 반년, 완전히 장사꾼이 되어버렸어. 이 전국(戦国)의 세상에 무사는 아무리 많아도 모자랄 텐데, 어째서 나를 써주려는 무장이 하나도 없는 걸까… 참으로 아까운 일이야.” 아무리 몰락해도 자존심과 자신감을 잃지 않는 히요시마루는, 작은 언덕에 걸터앉아 봄 안개에 희미하게 흐려진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봐, 이봐.”라고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 오자 히요시마루는 돌아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었던 탓인지 발소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중년의 무사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명의 수행을 거느린 것으로 보아 꽤 높은 인물인 듯했다. “응?”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무사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방심하지 않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수상하게 여겨 조사하려는 거겠지—라고 히요시마루는 짐작했다. 여러 나라를 떠돌다 보면 이런 일은 늘 있는 법이었다. 적의 첩자가 정세를 엿보러 온 것이 아닌지 경계하는 것이다.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히요시마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바다가 신기하냐?” “아닙니다. 신기해서가 아니라… 바다 저편에 있는 나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오… 말해 보아라.” 말 위의 무사는 그의 대답에 몹시 흥미를 느낀 듯했다. “바다 저편에는 명(중국)과 천축(天竺-인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넓은 바다를 건너 그런 나라들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네놈은 참으로 큰 생각을 하는 젊은이로구나…” 그 대답이 너무도 기발했기 때문에, 무사는 히요시마루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바늘 장사를 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싫어도 이 전국의 세상 모습을 눈에 담게 됩니다. 작은 나라와 나라가 한 치 한 자의 땅을 두고 다투어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죽음을 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루빨리 일본 전체가 하나의 나라가 되어, 상인도, 농민도, 무사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다 저편의 나라들과 교류하며 장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틀림없이 그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화와 보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나라에 들여온다면, 우리 나라는 더욱더 부유해질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 위의 무사가 이해심 있는 인물이라 어떤 이야기든 안심하고 할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한 히요시마루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초라한 바늘장수 소년이 이런 터무니없이 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은, 그 무사에게는 진심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그 말대로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네 말이 옳다.”
그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는 앞으로도 바늘 장사를 계속할 생각이냐?” “아니요. 좋은 주인을 만나 무사가 되고 싶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너는 도저히 바늘 장사로 평생을 마칠 상이 아니다. 나는 관상을 조금 연구했기에 잘 안다.” 무사는 ‘이 녀석, 보통 인물이 아니로군’ 하고 여긴 듯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히요시마루입니다. 오와리 나카무라 출신으로, 아버지는 기노시타 야에몬이라 하였습니다.”
“무사였느냐?” “예, 오다 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상인은 아닌 듯하구나. 나는 이 앞의 구노성(久能城)의 주인, 마쓰시타 가헤이(松下嘉兵衛)이다.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 하는 일에 따라서는 장차 무사로 삼아줄 수도 있다만…” 뜻밖의 말이었다. 이 기회, 이 주인을 놓쳐서는 안 된다. 히요시마루는 즉시 말발굽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스루가의 수호(駿河守),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라 하면, 이 무렵 도카이도(東海道)에서 으뜸가는 대다이묘(大大名)로, 교토의 황실과 공가(公家)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가문이었다. 서쪽 이웃인 미카와(三河)를 지배하고, 미카와의 다이묘(大名)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훗날의 徳川家康)를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다케치요는 열 살의 소년이었다. 이렇게 해두고 요시모토는 다른 무장들과 마찬가지로 교토로 진군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치려 하고 있었다. 마쓰시타 가헤이는 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 무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와리의 오다 씨를 견제하는 중요한 전선 기지인 구노 성을 맡고 있는, 병법과 학문에 밝은 뛰어난 무장이었다.
하는 일 자체는 하치스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히요시마루의 마음은 훨씬 밝고 희망에 차 있었다. “처음으로 진짜 무가에 들어왔다. 하치스카처럼 여긴 들무사 집단이 아니다. 보람이 있어.” 실제로 보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성 안의 분위기가 하치스카의 저택과는 완전히 달랐다.
성 안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창, 칼, 활, 총의 훈련이 이루어졌고, 그와 함께 성주 가헤이의 병법 강의가 자주 열렸다. 전국 시대를 사는 무사다운 생기 넘치는 긴장이 가득 차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가헤이의 짚신을 가지런히 놓고, 말을 씻기고, 정원을 쓸었다.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그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철저하게 일에 몰두했다. “저 녀석, 참 잘 일한다. 말도 없이 우리 몫까지 해치워 주니 덕분에 숨 좀 돌리겠군.”
처음에는 근습(측근 시종)들도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두세 달이 지나자— “저 녀석, 좀 너무 일하는 거 아니냐. 이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래. 신참 주제에 너무 나댄다. 한 번 혼을 내줘야겠어.” 근습들은 제멋대로 히요시마루의 ‘지나친 성실함’을 미워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괴롭힘을 시작했다.
“하하하, 나를 미워하는군. 여기가 바로 제대로 된 무사와 들무사의 차이다. 하치스카 쪽 들무사들은 출세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질투심이 전혀 없었지.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주인의 눈에 들어 출세하려고 한다. 남을 깎아내리려 하지. 나 같은 하찮은 놈까지 경쟁 상대로 보고 시기하는 거야.” 세상을 떠돌며 살아온 히요시마루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날카로웠다.
그는 근습들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위험하다, 조심해야 한다’며 경계하고 있었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 07. 으스름 달밤(おぼろ月夜)
어느 날 저녁 무렵, 히요시마루는 뜰을 쓸고 있었다. 소나무 잎과 솔방울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매일 그것들을 긁어모아 부엌으로 가져갔다. 하녀들은 잘 탄다며 크게 기뻐해 주었다. 전에는 그저 쓸어 버리고 말았던 것들이었다.
“어이, 원숭이.” 도장으로 수련을 가는지, 근습(近習-초보무사) 다섯 명이 목검을 들고 다가왔다. “예.” 경계하면서도 히요시마루는 밝게 대답했다. “너,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청소를 하고 있는 참입니다만, 그렇게 안 보입니까?” 그는 빗자루를 눈앞에 내밀어 빙글빙글 돌렸다. 히요시마루의 나쁜 버릇이었다.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을 덧붙이고 마는 것이다.
“청소라… 그런 청소법이 어딨냐.” 곧바로 근습 한 명이 시비를 걸었다. 본래 오늘은 주인이 없으니, 원숭이를 도장으로 끌고 가서 혼내 주자고 입을 맞춘 자들이었다. “우린 네가 빗자루 위에 올라타고 자고 있는 줄 알았다.” “청소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한 근습이 고함쳤다. 그리고 발밑에서 솔잎 하나를 집어 올렸다. “쓸었다면 이런 게 떨어져 있을 리 없잖아.” “솔잎 한두 개쯤은 남겠지요.”
심술궂은 괴롭힘에 히요시마루는 욱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명이 노골적으로 업신여기는 말투로 말했다. “어이, 바늘장수.” ‘바늘장수’란 히요시마루를 가장 업신여겨 부르는 말이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훌륭한 무사의 자식이지만, 너 같은 출신도 모를 바늘장수와는 사람 자체가 다르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또래 근습들의 멸시를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바늘은 솔잎보다 작지. 그 바늘을 팔고 다니던 네놈이 이 큰 솔잎을 못 볼 리가 없잖아.” “바늘장수가 무가 봉공을 하려거든 좀 더 기합을 넣어라.” “너, 해이해졌어.” “검술 하나 못 하면서 무가 봉공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도장으로 와라. 우리가 좀 가르쳐 주지.” “그러면 청소도 좀 나아지겠지.” 입술을 깨물고 있는 히요시마루를 향해 하고 싶은 대로 욕을 퍼붓던 근습들은 마침내 그의 팔을 잡아. “자, 가자.” 하며 끌고 갔다.
수련이 끝난 도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히요시마루는 그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목검이든 창이든, 마음대로 골라라.” 다섯 중 한 명이 목검을 들고 나서며 거만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칠 수 없다—히요시마루는 각오를 굳히고 벽에 걸린 연습용 목제 창을 집어 들었다. “어디 한번 덤벼 봐라.”며 상대는 히죽거리며 도발했다.
나머지 네 명은 히요시마루를 놓치지 않으려 목검을 들고 둘러싸고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창을 마루판에 세워 놓고는 전혀 자세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이 녀석, 바늘 파는 법은 알아도 창 쓰는 법은 모르나 보네.” 근습들은 그를 부추기며 맞서게 하려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그때 갑자기, “얍!”
엄청난 기합과 함께 히요시마루가 한쪽 무릎을 꿇고 긴 창을 가로로 휘둘렀다.
“앗!” “윽!” 다섯 근습은 히요시마루가 좀처럼 자세를 보이지 않자 완전히 얕보고 있었던 터라 속수무책이었다. 정강이를 한꺼번에 얻어맞고 모두 쓰러졌다. “비, 비겁하다!”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나려 하지만, 너무 아파 다시 나뒹굴고 말았다. 그들을 향해 히요시마루가 말했다. “전장에서는 비겁도 무모함도 없습니다. 방심하면 목숨을 잃습니다.”
그렇게 내던지듯 말하고 도장을 뛰쳐나갔다. 꾸물거리다가는 화가 난 근습들이 칼을 뽑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히요시마루의 뒷모습을 도장 창 아래에서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다. 주인 마쓰시타 카헤이(松下嘉兵衛1538~1598)였다. 외출에서 돌아오다 우연히 도장 옆을 지나며 안의 광경을 모두 보아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 히요시마루는 ‘창고지기’(納戸役-なんどやく)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작은 성이라도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를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이는 히요시마루 같은 신분 낮은 하인에게는 대단한 출세였고, 주인 가헤이가 그를 깊이 신뢰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보잘 것 없던 바늘장수 놈이 주인을 잘 구슬려서 대단한 자리를 차지했군. 이러다간 우리보다 더 위가 되겠어.” 젊은 근습들은 모이면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러나 히요시마루는 모르는 척하고 그저 한결같이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무사는 자신을 이해하고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해 언젠가 목숨을 건다고 한다. 나도 이 주인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괴로워도 참고 견디겠다.”
가헤이의 신뢰에 감사하며, 더욱더 직무에 힘쓸 결심을 굳히는 히요시마루였다. “단도(몸을 지키는 작은 칼)가 없어졌어.” 어느 날, 한 근습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분명히 원숭이가 훔쳤을 거야. 그 녀석 태도가 수상했어.” 다른 근습이 끼어들었다. “흠, 지금까지 이 성에서 물건이 없어진 적은 없었는데…” 처음부터 히요시마루를 의심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단도는 다른 사람 방의 벽장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러자 “원숭이가 한 번 이 단도를 훔쳤다가, 우리에게 들킬 것 같으니까 슬쩍 벽장에 숨겨 둔 거야. 정말 어디까지가 이렇게 행실이 나쁜 놈인지 모르겠군.” 하며, 자기들이 놓아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더욱더 히요시마루의 험담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돈이 없어졌다느니, 지갑이 없어졌다느니 하며 근습들의 소동이 잇따랐다. 그리고 그때마다 범인은 원숭이라는 소문이 은근히 돌았다. “흥,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내서 나를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군. 못된 근습 놈들 같으니. 비겁해도 정도가 있지.”
히요시마루는 속으로는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상대했다.
이 악질적인 소문은 마침내 가헤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근습들은 불려갔다. “너희는 무슨 물건이 없어지기만 하면 모두 히요시 탓으로 돌린다던데, 옛말에 일곱 번 찾은 뒤에야 사람을 의심하라고 했다.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히요시를 범인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원숭이… 아니, 히요시가 이 성에 들어온 뒤부터 물건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주인어른께서는 히요시를 몹시 믿고 계십니다만, 저 녀석은 겉만 착한 척하는 놈입니다. 뒤에서는 게으름을 피우고, 정직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근습들은 이때다 싶어 히요시마루를 몰아내려 했지만, 가헤에는 엄하게 꾸짖었다.
“히요시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저 아이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정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창고지기라는 큰일을 맡긴 것이다. 사람은 십 년, 이십 년을 사귀어도 믿지 못할 자가 있는가 하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은 한 번 만나기만 해도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법이다. 히요시를 나쁘게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욕하는 것과 같다. 삼가도록 해라.”
근습들은 “예” 하고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지만, 이제 와서 히요시마루와 손을 잡을 리는 없었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음습한 괴롭힘을 계속했다. 성 안의 벚꽃에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보고 히요시마루는 이 성에 온 지 벌써 2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세월도 잊은 채 온 힘을 다해 봉공해 온 것이다.
따뜻한 밤이었다. 히요시마루는 가헤에에게 불려 의아한 마음으로 그의 거실을 찾았다. 밤에 불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침울한 기색이었다. 히요시마루는 무릎을 단단히 모았다.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다.”
가헤에는 말하기 어려운 듯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너에게 이 성을 떠나 주었으면 한다.” “예?” 쫓겨나는 것인가. 히요시마루는 깜짝 놀랐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는 비록 작은 성이라도 한 성의 주인이다. 내 가신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나에게는 좋은 가신들이다. 그러나 너에게 하는 짓을 보면 도저히 칭찬할 수가 없다.”
히요시마루는 그것이 근습들의 괴롭힘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런 가신들이 내 성에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 “아닙니다, 그런…” “조용히 듣거라. 나는 너를 괴롭히는 자들을 열 명, 스무 명 내쫓고서라도 너 하나를 남기고 싶다. 하지만 저들은 대대로 우리 집안을 섬겨 왔고, 이곳에서 쫓겨나면 다른 데서 봉공할 능력이 없다. 그에 비해 너는 어디를 가든 훌륭히 봉공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 그런…”
히요시마루는 주먹을 꽉 쥔 채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다. 내 눈은 틀리지 않는다. 오히려 너는 나 같은 작은 성의 주인을 섬기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나는 진심으로 너를 보내기가 아쉽다. 그러나 결심했다. 너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싫습니다—히요시마루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가헤에의 신뢰와 따뜻한 배려가 가슴을 죄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무장들이 많다. 너처럼 머리가 예리하고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 좋은 주인을 만날 것이다. 그런 주인 밑에서 마음껏 힘을 펼쳐라. 그리고 언젠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이 나라를 하나로 만들고, 너의 뜻을 바다 건너 나라까지 펼쳐 보거라.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네 도움으로 세력을 넓히기에는 늦었다. 더 젊고 더 뛰어난 주인을 찾아라.”
가헤에는 말을 마치고 손상자에서 돈을 꺼내 조용히 히요시마루 앞에 놓았다. 히요시마루는 고개를 떨군 채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주고 가치를 알아주는 무장이 또 있을까… 이곳을 떠나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헤에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알겠습니다. 이 2년 동안 신세만 진 것을 사과드립니다.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으러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다리마.” 히요시마루는 돈을 공손히 받아 들고 성을 나섰다. 뒤돌아보니 봄의 흐릿한 달빛 아래 구노 성이 검게 우뚝 서 있었다.
히요시마루는 걸음을 멈추고 깊이 고개를 숙인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갈 곳도 없이 성을 떠나갔다.
“바늘이요, 바늘—” 몇 달 뒤, 바늘 상자를 메고 다니는 히요시마루의 모습이 교토(京都)에 나타났다. 어느 여름에는 에치젠(越前-福井県北部), 어느 겨울에는 야마토(大和-奈良県), 어느 봄에는 가이(甲斐-山梨県), 어느 가을에는 스루가(駿河-静岡県)—히요시마루의 모습은 곳곳에서 보였다. 긴키(近畿), 도카이(東海), 호쿠리쿠(北陸), 간토(関東) 지방을 귀를 기울이고 눈을 번뜩이며 돌아다닌 것이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태합기(太閤記) I 히요시마루(日吉丸) 편
●08. 오와리의 젊은 군주(尾張のわか君)
젊고,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찬 무장을 찾아, 히요시마루(*日吉丸 1537~1598)가 일본의 중앙부를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그에 걸맞은 인물이 오와리국(尾張国)에 나타나 있었다.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이다. 오와리(지금의 아이치현 서부)라 하면, 히요시마루가 태어난 곳이다.
게다가 오다 가문은 그의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과 두 번째 아버지 다케아미가 모두 섬겼던 주인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방황한 것은, 빈틈없던 히요시마루로서는 큰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 약 8년에 걸친 방랑은, 훗날 히요시마루에게 큰 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덴분(天文) 20년(1551년), 히요시마루가 하마마쓰 근처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마쓰시타 가헤이를 만난 약 2년 전, 오다 가문에서는 당주 노부히데
(織田信秀1511~1552)가 죽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고야 성주가 된 인물이 바로 그의 아들 노부나가였다. 히요시마루보다 두 살 위인 열아홉 살이었다.
“오다의 바보 도노(젊은 군주)”라는 소문이 이전부터 퍼져 있었다. “노부히데가 죽으면 오다 가문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평판이었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에 태어난 무장의 아들답게, 어릴 적부터 활쏘기, 승마, 수영, 씨름, 병법은 물론, 신병기인 조총까지 배웠다.
힘이 세고 용기가 넘쳐 이미 무장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소년이었지만, 거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결코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길가의 감을 따서 말 위에서 거칠게 씹어 먹으며 기요스 거리를 활보하는 그런 소년이었다. 그것이 아버지 노부히데의 장례식 때 폭발했다. 장례식은 본래 슬프고 조용한 법이다. 친척과 가신들은 옷차림을 바로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머리를 끈으로 묶어 틀어 올리고, 허리에는 거친 새끼줄을 둘러 칼을 반쯤 꽂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에 쓰려는지 부싯돌을 큰 주머니에 넣어 매달고 있었다. 쿵, 쿵 하고 거칠게 발소리를 내며 불단 앞으로 다가가더니, 향을 한 움큼 집어 확 던졌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며 달달아나 버렸다. 미친 짓이었다.
“오다 가문도 끝이구나. 원래부터 어리석은 젊은 군주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조차 슬퍼하지 않는 바보라니… 이게 무슨 젊은 군주인가.” “바보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는 노부히데 님도 성불하지 못할 것이다.” 이 소문은 당연히 노부나가의 귀에도 들어갔다. 노부나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길러주고 이끌어 준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 1492~1558)를 불렀다.
“노인장, 나는 아버지 장례식을 다시 치르겠다.” “어째서이옵니까. 이미 얼마 전 끝나지 않았사옵니까.” 마사히데도 직접 노부나가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았고, 성 안팎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마음이 괴로웠다. “내가 슬퍼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판이 매우 나쁘다.” “당연하옵니다. 평소 그렇게 제가 간언을 올려도, 젊은 군주께서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예법대로 제대로 치르시옵소서.” 마사히데는 노부나가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방식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영지 안을 지나는 승려들을 전부 붙잡아와라.” 노부나가는 엄하게 명령했다.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나는 여행자들은 모두 오다의 영지를 지나기 때문에, 곧 300명 이상의 승려가 붙잡혔다.
노부나가는 아버지를 모신 만쇼지(万松寺)라는 절에 그들을 모아 놓고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사흘 밤낮, 너희가 아는 모든 경을 외워 아버지의 혼을 달래라.” 독경 소리는 아침이고 밤이고 기요스 마을에 울려 퍼졌다. 사흘이 지나자 노부나가는 막대한 보수를 주고 승려들을 풀어주었다. 이것이 장례식의 재실시였다.
오와리를 떠나 여러 나라를 여행한 승려들은, 가는 곳마다 노부나가를 어떻게 소문냈을까. 어떤 이는 “소문대로 노부나가는 바보다”라고 떠들었고, 또 어떤 이는 “두려운 자다”라고 했을 것이다. 노부나가의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를 바보라 여기는 자는 방심할 것이고, 두렵다고 생각하는 자는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에는 도카이 제일의 대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1519~1560)가 미카와(三河), 도토미(遠江), 스루가(駿河)를 장악하고 있고, 북쪽에는 사이토 도산(斎藤道三1494~1556)과 요시타쓰(斎藤義竜 1527~ 1561)부자가 호시탐탐 틈을 노리며 오와리(尾張)를 노리고 있었다. 도산은 노부나가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부모 자식이라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서쪽을 보면 북이세(北伊勢)에서만도 48명의 소다이묘가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이(甲斐-현 야마나시현)에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1521~1573), 에치고(越後-현 니가타현)에는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1530~1578)이라는 걸출한 장수들이 틈만 나면 천하를 손에 넣으려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겨우 18세의 노부나가가 오와리의 영주가 된 것이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짓밟힐 운명이었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얼마 안 되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전쟁에 바쳤다.노부나가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획적으로 바보처럼 보이며 적의 눈을 속이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연극이었다. 그를 길러낸 마사히데(平手政秀1492~1558)조차 그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덴분 21년(1552년) 정월이 지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할복해 버렸다.
“뭐라, 노인장이 죽었다고…?” 집이 무너지고 섬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만큼 대담한 노부나가가, 이때만큼은 창백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젊은 군주님, 부디 무모한 행동을 그만두고 올바른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그것은 충고의 유서였다.
“노인장이여, 어찌 그리 성급한 짓을 했는가. 당신만은 나의 이 괴로운 처지를 이해해 줄 줄 알았건만… 당신마저 나를 오해하다니 원통하구나. 나는 바보가 아니다. 어리석은 자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적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다. 적을 방심시키는 동안 오와리의 힘을 기르려는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이 나라는 이미 지쳐 있다. 노인장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인가…”
눈물을 흘리며 노부나가는 중얼거렸다. 마사히데가 할복으로 충고했다 해서, 갑자기 바보 같은 태도를 바꿀 노부나가가 아니었다. 한번 옳다고 믿으면 절대 굽히지 않는 그 격렬함이야말로 노부나가의 본모습이었다. 그런 노부나가의 ‘바보 같은 모습’을, 미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사이토 도산(斎藤道三1504~1556) ――즉, 노부나가의 장인으로, (*히요시마루가) 예전에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小六 1526~1586)에게 “저런 악인과는 인연을 끊으시오.”라고 충고했던 인물이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이 도산과 몇 번이나 싸웠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손을 잡았고, 도산의 딸이 노부나가의 아내가 되었다.
이를 세상 사람들은 정략결혼이라 불렀다. 적끼리 친족 관계를 맺어 일시적인 평화를 만드는 것으로, 전국시대에는 흔히 행해지던 일종의 속임수였다. 도산이 딸을 가마에 태워 미노에서 오와리의 노부나가에게 보낸 지 5년이 지났다. 사위 노부나가가 어떤 어리석은 자인지, 그는 아직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사위는 올해 스무 살일 터. 바보다, 어리석다 하는 소문은 들었지만, 어딘가 수상한 점이 있다. 한 번 만나 실제 모습을 확인해 보자. 정말 바보라면 공격해 멸망시켜 버리면 된다.” 기름 장수에서 미노 한 나라의 다이묘가 된 인물답게 빈틈이 없었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청하자, 좋다는 답이 왔다. 나고야 성의 가신들은 모두 걱정했지만, 노부나가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수백 명의 가신들에게 붉게 물들인 옷을 입히고, 삿갓과 각반도 붉은색, 창에서 조총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색으로 통일했다. 노부나가 자신은 평소처럼 머리를 차선(차 젓는 도구) 모양으로 틀어 올리고, 거친 새끼줄을 허리에 두른 채 칼을 꽂고, 큰 부싯돌 주머니와 호리병을 매달고 안장에 비스듬히 올라타 있었다. 게다가 부채로 바람을 부치며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사이토 도산은 약속 장소인 쇼토쿠지에서 빠져나와 길가의 집에 숨어 노부나가의 행렬을 엿보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구나. 이런 자에게 딸을 준 것은 평생의 실수였다.” 도산은 황급히 쇼토쿠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노부나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노부나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도산은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관을 쓰고 노시(直衣-のうし-무사의 예복)를 갖춰 입은 모습은 모든 것이 규범에 맞아,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다이묘의 풍모였다. “노부나가 공, 이쪽이 사이토 도산 공이십니다.” 미노의 중신이 소개했지만, 노부나가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농담이 지나치오. 이 사내는… 내가 오는 길에 상민의 집 그늘에서 엿보던 자가 아니오. 그런 비천한 자가 내 장인일 리가 없지. 거짓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호되게 꾸짖자 미노의 중신들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도산은 역시 노련한 인물이었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 사위여, 용서해 주게. 한시라도 빨리 그대를 보고 싶어서, 그만 그런 천한 행동을 하고 말았네. 나이가 들면 성질이 급해지는 법이라네.”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능숙하게 넘어갔다. “이런 재미있는 장인을 두어 노부나가는 행복하옵니다.”
노부나가 역시 도산임을 알고 벌인 연극이었기에 크게 웃으며 그 자리를 넘겼다. 사기야마성(鷺山城)으로 돌아간 도산은 중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앞으로 노부나가를 어리석은 자라 부르지 말라. 그는 두려운 사내다. 만약 그를 얕본다면, 미노 한 나라는 그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나고야 성문에 말을 매고 항복하게 될 것이다.” 간사하기로 이름난 도산이기에, 노부나가의 인물을 정확히 꿰뚫어본 것이었다. 이후 도산은 죽을 때까지 오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먼저 싸워야 했던 상대는 외부가 아니라, 같은 오와리의 친척과 형제들이었다. “나고야의 바보.” 이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를 얕보고 만만하게 여겼다. 먼저 기요스(清洲-아이치현 북서부)성주 오다 히코고로(織田彦五郎 ?~1555)가 공격해 왔지만, 순식간에 반격을 당해 오히려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덴분 24년(1555년) 4월의 일이었다.
이 일로 정신을 차렸어야 했지만, 동생 노부유키
(信行1536~1558)는 노부나가를 대신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게다가 이 계획은 아버지 노부히데 때부터의 중신들인 하야시 사도노카미(林佐渡守)·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형제, 시바타 권로쿠 가쓰이에(柴田権六勝家)등이 부추긴 것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공격해 왔다. 이 내분에서 처음으로 노부나가의 진가가 드러났다. “적에게 목을 내줄지언정, 동생에게 목을 내줄 수는 없다. 그런데 동생이 나에게 목을 내놓다니,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그는 형 노부히로(信広1532~1574)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미 승리는 자신에게 있다는 기세였다. 노부히로는 크게 놀랐고, 노부유키도 얼굴이 창백해져 어머니를 통해 사죄했다.
이후 노부나가의 처리는 실로 훌륭했다. “노부유키, 너는 꿈이라도 꾼 것이겠지.” 이렇게 웃으며 넘겨 버렸다. 시바타 가쓰이에 등은 즉시 머리를 깎고 두려움에 떨며 노부나가 앞에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북을 배운 노부나가는 그들의 삭발한 머리를 옆에 끼고 “퐁, 퐁” 두드리며, “좋은 소리가 나는군.” 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죽임을 당할 줄 알았던 노부히로, 하야시, 시바타 등은 한마디 책망도 받지 않고 용서받았다. 이후 그들은 오직 노부나가를 받들고 복종하며, 다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노부유키만은 어리석게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노부나가도 엄격했다. “사방에 적이 둘러싸인 오다 가문이 내분으로 힘을 약하게 해 틈을 보일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용서해 주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불러내어 베어라.”
첫 번째는 그의 대범함이, 두 번째는 그의 엄격함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둘 다 전국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장의 자질이었다. “나는 병에 걸려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동생 노부유키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기요스 성으로 와 주었으면 한다.”
노부나가는 이런 거짓 편지를 써, 어머니와 함께 작은 성에 살고 있던 노부유키를 불러냈다. 어머니는 노부유키를 특히 아꼈기에 기뻐하며 함께 기요스 성으로 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부나가의 가신들이 노부유키를 처단했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더 이상 어리석은 척하는 모습을 버렸고, 가신들은 단결하여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태합기 I 히요시마루의 권
● 09. 짚신 담당
에이로쿠 원년(1558년), 바늘 상자 하나를 짊어지고 5년의 세월을 여러 지방을 떠돌며 보낸 히요시마루의 새까맣게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기요스 마을에 나타났다.
"젊고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찬 주인을 찾으라고 마쓰시타 가헤에 님은 말씀하셨다. 수십, 수백의 다이묘와 무장이 있는 세상에서 ‘이 사람이다’ 싶은 자가 없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가이의 다케다 신겐, 오미(지금의 시가현)의 아자이 나가마사 등은 내 눈에 들었지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바늘 장수를 고용해 줄 리가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야.”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으며 기요스 거리를 걷던 히요시마루는, 왠지 모르게 몸이 긴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라. 옛날 내가 점원 꼬마로 일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공기가 마을을 덮고 있다. 대단히 활기가 넘친다. 기운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바보라는 소문이었지만, 이 마을의 공기를 보면, 크게 달라진 모양이군.”
여러 지방의 성이 있는 마을을 떠돌아다닌 히요시마루는, 마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나라의 기세를 곧바로 판단할 수 있었다. 성주의 인품이 마을의 공기 속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곧장 히요시마루는 옛날 알던 상인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노부나가 님이 바보라고… 그건 옛날 이야기지. 노부히데 님도 훌륭했지만, 노부나가 님은 그보다 훨씬, 훨씬 뛰어나고 날카로운 분이야. 용기도 있는 분이고, 젊은 분이지. 우리 같은 상인들은 노부나가 님을 신뢰하고 있어. 바보 따위로 부르면 다시는 우리 집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할 테니, 알겠느냐, 원숭이!” 대단한 기세였다.
히요시마루는 밖으로 뛰쳐나와, 더욱 꼼꼼히 마을의 소문을 캐물었다. 모두가 노부나가를 칭찬하고 신뢰하고 있었다. “음… 태어난 고향에 눈을 두지 않았던 건, 나도 참 경솔했군. 오다 집안이라면 아버지가 봉사하던 인연도 있다. 좋다, 노부나가 공을 섬기자.” 히요시마루의 마음은 정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가신으로 받아줄까.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뭇가지 위에서 때까치가 요란하게 울었다. 끝없이 맑게 개인 가을 하늘 아래, 노부나가는 연전(連銭-회색 얼룩이 있는 큰 말)에 올라타고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뒤따르는 근시들은 노부나가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표정이 몹시 밝은 것은 오늘 매사냥에서 사냥감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수 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무 그늘에서 토끼처럼 튀어나온 자가 있었다. 말이 히히힝 하고 놀라 앞발을 치켜들었지만, 노부나가는 고삐를 솜씨 좋게 다루며 “워, 진정해라” 하고 말을 달래었다. 그리고 길 위에 웅크리고 엎드린 자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었다. 땅에 엎드려 두 손을 짚고 있었다.
“누구냐. 달리는 말 앞에 몸을 던지다니, 무모해도 정도가 있지 않느냐. 나를 노부나가라고 알고 한 짓이냐?” “예. 목숨을 건 부탁이옵니다.” ‘목숨을 건 부탁’—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노부나가는 얼굴을 들라 명했다. 히요시마루였다. “호오, 원숭이로군.” 물론 노부나가가 히요시마루를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원숭이를 닮은 얼굴을 보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예,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아버님, 노부히데 님을 섬기던 아시가루 기노시타 야에몬의 아들, 히요시마루라 하옵니다. 두 번째 아버지는 다케아미…” “기억하고 있다. 다케아미라면 그 도량이 좁은 녀석 말이냐. 그래서, 소원은 무엇이냐. 어서 말해라.” “예! 인연이 닿아 저를 부디 부려 주십시오. 반드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자신의 주군이라 굳게 믿은 히요시마루는 필사적인 얼굴로 청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숨, 나에게 맡기겠느냐.” “예.” “마음에 든다. 네 말투도, 네 얼굴도. 따라오너라.” 노부나가는 모든 결정이 빨랐다. 뒤따라온 가신들에게 한마디로 히요시마루를 소개했다. “사냥감에 원숭이 한 마리가 늘었다.”
처음 히요시마루에게 주어진 일은 마굿간지기였다. 이보다 더 낮은 신분은 없었지만, 그는 노부나가의 말을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일본 제일의 말로 키워야 겠다.” 히요시마루는 빈 마구간에 들어가 살며 말 돌보기를 시작했다. 노부나가는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때, 화가 날 때, 성질이 폭발할 때—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날씨가 좋을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였다.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말을 끌어오라”고 명했다. 그러면 근시(近習-수하)이 마구간까지 달려와 말을 준비하라고 알렸다. 마굿간지기가 안장을 얹어 근시에게 넘기면, 근시는 그것을 마당으로 끌고 가고,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올라타 채찍을 대는 순서였다. 성미 급한 노부나가가 이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은 드물었다. “빨리 하라”, “늦다!” 하고 반드시 두세 번은 호통을 쳤다.
히요시마루는 곧 그 점을 깨달았다. “빨리 안장을 얹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틈만 나면 안장 얹는 연습을 했다. 배띠가 느슨하면 안장이 미끄러져 탄 사람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너무 조이면 말이 괴로워한다. 히요시마루는 열심히 연구했다. 게다가 타고난 귀 밝음을 살려, 근시들이 달려오는 발소리를 조금이라도 빨리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주일쯤 지나자, 근시가 “말이다!” 하고 달려올 때에는 이미 준비된 말이 마구간 앞에 기다리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아진 것을 노부나가가 모를 리 없었다. “이누치요, 마굿간지기가 바뀌었느냐?” 노부나가는 말을 달리며 뒤따르던 근시, 마에다 이누치요에게 물었다. “예.” “누구냐?” “이름은 잊었으나, 원숭이를 닮은 사내입니다.”
“아, 사냥 돌아오는 길에 주워 온 놈인가.” 원숭이를 닮았다는 점도 편리한 일이었다. 노부나가는 곧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빠른 녀석인 모양이군.” “한 번 제가 마굿간을 들여다보니, 그 사내, 땀투성이가 되어 안장 얹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하고 노부나가의 눈이 번뜩였다.
“말도 살이 올랐다. 꽤나 아끼는 모양이군.”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노부나가는 말을 멈추었다. “원숭이를 만나보자. 되돌아가자.” 다이묘가 마굿간지기를 만나러 간다는 것은 보통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노부나가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곧장 성으로 돌아갔다.
마굿간 앞에 앉아 있던 히요시마루에게 말했다. “원숭이야, 마굿간지기 일은 재미있느냐?” “예, 재미있다 없다 할 일이 아니옵니다. 저는 주군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사오니, 맡겨진 일에 목숨을 걸고 있을 뿐입니다. 말을 곧 노부나가 님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통이라면 직접 말을 섞을 수 없는 영주와 마굿간지기 사이였지만, 노부나가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고, 히요시마루 또한 생각한 바를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말을 나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녀석이군.” 그렇게 한마디 남기고 노부나가는 휙 돌아갔다. 이것이 노부나가식 칭찬이었다. 좀처럼 입 밖으로 드러내어 치켜세우거나 칭찬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이누치요, 원숭이에게 내 짚신 담당을 맡겨라.” 마굿간지기로 두기에는 아깝다.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눈여겨보며 시험해보려는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에다 이누치요가 머리를 숙였다. “네가 감사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 “예.” 왠지 이누치요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 노부나가는 씩 웃었다. 두 사람 모두 히요시마루가 마음에 든 듯했다.
‘짚신 담당’이란 노부나가의 신발을 내고 들이는 역할로, 마굿간지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낮은 신분의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노부나가 곁에서 시중드는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 젊은 무장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동틀 무렵이면 일어나 들판으로 나가고, 정원을 거닐었다.
현관에 서서 근시가 “짚신!” 하고 부르면 짚신 담당이 나타났지만,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 만큼 재빠르게 내놓는 자는 좀처럼 없었다. 여러 사람이 짚신 담당에서 물러났다. 히요시마루가 그 역할을 맡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현관에 서면 이미 그 자리에 짚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히요시마루가 두 손을 짚고 절하고 있었다. “음, 음. 이 원숭이 녀석, 보통이 아니군.” 노부나가는 속으로 감탄했다.
겨울이 왔다. 하룻밤 사이에 쌓인 눈이 뜰의 나뭇가지를 새하얗게 덮은 아침, 노부나가는 맨발로 현관에 섰다. 맨발이었다. 전장에서는 어떤 고생을 겪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평소부터 몸을 단련하고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 노부나가는 버선을 신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기상이었다. 근시들은 아무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원숭이도 아직 자고 있겠지—노부나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안녕하십니까.” 눈빛이 비치는 문턱에 손을 짚고 히요시마루가 앉아 있었다. “오, 원숭이냐. 오늘은 평소보다 빠르구나. 잘도 일어나 있었군.” 기분 좋은, 상쾌한 목소리였다. “예, 저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다른 분들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라도 하려고 마음쓰고 있습니다.”
“음, 좋은 마음가짐이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놈이 좋다.” 그렇게 말하고 짚신에 발을 얹는 순간, 노부나가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원숭이, 너 지금까지 이 짚신 위에 앉아 있었지.” “아니옵니다, 그런 일이…” “닥쳐라. 네가 앉아 있지 않았다면 어찌 짚신이 이렇게 따뜻하겠느냐. 입으로는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서는 주인의 짚신 위에 앉는 무례한 놈. 이 노부나가를 속일 셈이냐.”
노부나가의 격한 꾸짖음이 히요시마루에게 쏟아졌다. “주군!” “닥쳐라!” “주군!” 큰 목소리로는 노부나가에게 뒤지지 않는 히요시마루였다. 가신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불린 적은 없었다. 노부나가는 잠자코 히요시마루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냐.”
“저는 마굿간지기였을 때는 말을 주군이라 여기고 일했습니다. 지금은 짚신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짚신을 어찌 엉덩이 밑에 깔겠습니까. 오늘 아침은 유난히 추위가 심합니다. 아무리 참을성이 강한 주군이라 해도 이 바람 맞는 돌바닥 위에 둔 짚신은 발에 차가울 것이라 생각하여, 품에 안고 데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위에 앉았다니, 참으로 분합니다…”
얼굴을 새빨갛게 하며 히요시마루는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노부나가는 순간 멈칫했다. 이 정도로 자신을 생각해주는 가신이 있다니… “용서해라, 원숭이야. 내가 잘못했다. 짚신을 품에 안아 데워 주는 가신을 두다니, 이 노부나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용서해라, 용서해 다오.” “그런 말씀을…”
좀처럼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노부나가가, 히요시마루의 손을 잡을 듯 감동한 것이었다. “원숭이야, 너는 짚신 들기를 그만두고 더 큰일을 하거라. 더,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다음에는 어떤 일을 맡게 될까. 히요시마루는 귀를 기울였다. 잠시 노부나가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 부엌을 맡아라. 음식은 성에 사는 사람들의 첫째 힘이다. 성의 식사는 모두 네게 맡기겠다.” “예!” 히요시마루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의 출세였다. 그리고 노부나가의 신뢰였다.
II 木下藤吉郎の巻
●10. 台所奉行. 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