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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說話)에 나타난 기인(奇人) 토정(土亭)의 모습
최 운 식*
<차 례>
Ⅰ. 머리말
Ⅱ.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활동
Ⅲ.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
1.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2.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
3. 신술(神術)을 부리는 사람
4. 백성을 잘 보살핀 사람
5. 검소하며 절제력이 강한 사람
6. 운명에 순응한 사람
Ⅳ.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선조 때의 인물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이인(異人)으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게는 예언․기지(奇智)․신술(神術) 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오는데, 이런 설화를 연구하는 것은 실존 인물인 토정에 투영된 한국인의 의식과 문학적 형상력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연구 논문은 토정 이지함의 가문과 학통(學統), 시대적 배경과 유학의 동향, 경세(經世) 사상을 검토한 논문이 있다. 그리고 전설에 나타난 토정의 삶과 전설의 형성 과정을 고찰한 뒤에 허생과 이토정을 비교한 연구, 토정 이야기에 나타난 이지함의 세계관을 고찰한 논문, 토정 설화의 문헌자료와 구비자료를 개관한 뒤에 이 설화의 구의 구조와 의미를 분석한 논문 등이 있다. 이들 연구는 역사적 인물인 토정 이지함과 이지함에 관련된 설화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토정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 토정 설화에 투영된 ‘민중’의 의식, 토정 설화와 소설의 관계에 관하여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여기서는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고,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토정 설화는 최근에 채록하여 구비문학대계를 비롯한 설화집에 수록된 자료 89편과 어우야담(於于野談)을 비롯한 조선 조 문헌설화집에 수록된 자료 27편과 토정집에 수록된 내용 중 설화의 성격을 띤 자료 13편 등 모두 129편이다.
Ⅱ.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활동
이지함은 1517(중종 12)년에 현령 치(穉)의 아들 태어나서 1578(선조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이다. 1713(숙종 39)년 이조판서가 추증(追贈)되었다.
토정의 생애와 활동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조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정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글을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권고를 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공부하곤 했다. 그리하여 경전(經傳)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토정은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다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천하게 여겨 그만두었다고 한다.
토정은 젊은 시절부터 여색(女色)을 멀리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여행하기를 좋아하여 천리 길을 걸어서 다니기도 하고, 배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제주도에 여러 번 다녀왔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潮水)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기발하여 사람의 주의를 끌었으나, 수수께끼 같은 농담을 하며 점잖지 못한 자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토정은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평소에 욕심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 짚신에 죽립(竹笠) 차림으로 걸어서 사방을 다니며, 명망과 절의가 있는 선비를 사귀었다. 토정은 이이(李珥), 조식(曺植), 성혼(成渾), 조헌(趙憲) 등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이가 성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하자 욕심이 많아서 할 수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정은 모산수 정랑(毛山守 呈琅)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초례(醮禮)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弘濟橋)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 주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토정은 처가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가솔(家率)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처가에 화(禍)가 있었다고 한다. 또 토정은 상중(喪中)에 있는 조헌을 찾아갔다가 혜성(彗星)의 움직임을 보고, 10여 년 뒤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토정이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에 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토정은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賢否)와 길흉(吉凶)을 먼저 알아 맞추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 맞추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하였다.
토정은 56세 때인 1573(선조 6년)년에 보령에 있었는데, 이조의 추천으로 그에게 6품의 벼슬이 내려졌다. 형 이지번의 병 때문에 한양에 왔던 토정은 이 소식을 듣고는 귀를 씻고 돌아갔다.
토정은 57세인 1574(선조 7)년에 포천 현감이 되었는데,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빈약한 재정을 보충해 주지 않아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토정은 만년(晩年)에 아산 현감이 되어 시폐(時弊)를 진술한 상소를 올리고, 바른 정치를 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고을 사람들은 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는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뒤에 비록 큰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 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조헌은 주학 제독관이 되어 붕당(朋黨)의 시비(是非)와 학정(虐政)의 폐단을 상소한 상소문에서 토정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지함의 사람됨은 타고난 자질이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습니다. 형 지번(之蕃)이 서울에서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령(保寧)에서 걸어 상경하면서 조금도 노고를 꺼리지 않았고, 형에게 스승의 도리가 있다 하여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선과 의를 좋아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나와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 보았고, 안명세(安命世)의 죽음에 대하여 평생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은둔 생활을 한 조식(曺植)과 더불어 정신적인 교제를 매우 돈독히 하였고, 성혼․이이를 가장 공경하고 존중하였으며, 정철의 강직한 성품에 대하여 평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후생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이산보(李山甫)의 효우 충신(孝友忠信)과 박춘무(朴春茂)의 염정자수(恬靜自守)가 모두 그에게서 근원한 것입니다. 심지어 서기(徐起) 같은 이는 하천의 출신으로서 가난하여 학문에 전력하지 못하자 재물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 성취시켰습니다.
만년에 부름에 응하여 두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서는 박봉을 털어 아랫사람을 도와주고, 폐단을 제거하여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어 모두 원대한 계획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인(姦人)과 이속(吏屬)을 단속하는 데 있어 사납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규율이 잡혔으므로 한 고을이 모두 그의 신명(神明)스러움을 칭송하였습니다. 항상 한 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였으니 이윤(伊尹)이 뜻한 바를 지향한 것이고,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의 오욕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동방의 백이(伯夷)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을의 학교에서 문무의 재능을 겸비한 인재를 길러 국가의 쓰임에 대비하였으니, 그 계획과 재능은 은연중 공맹(孔孟)의 풍도(風度)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아산(牙山)에서 병사하자, 아산의 백성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거리를 가로막고 울부짖으며 다투어 고기와 술로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가 거짓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자신을 은폐한 것은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고, 밝은 시대에는 벼슬길에 나가 쓰였으니, 오로지 세상을 숨어서 산 것은 아닙니다.
토정과 가까이 지낸 조헌의 이 글은 토정의 성품, 효성과 우애, 교우 관계, 남을 배려하는 마음, 관직에 나갔을 때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토정은 경전에 통달하고, 사서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조정의 부름을 받아 포철 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는 앞일을 예견하는 지혜가 있어서 이 인으로 대접받았다.
토정에 대한 평가는 ‘훌륭한 성리학자였으며, 탁월한 경세가(經世家)였다.’고 한다. 그는 기인(奇人)이나 이인(異人)이기 이전에 출중한 주기파(主氣派)의 성리학자였으며, 훌륭한 경세사상을 지니고 있던 정치가요, 사상가요, 철학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Ⅲ.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은 아주 다양하고, 구체적이어서 흥미롭다. 이를 몇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토정이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었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몇 가지 사례가 나타나는데, 설화에는 이것이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토정이 아산 현감일 때, 천기(天機)를 보고 몇 월 며칠에 일부 지역이 바다로 변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라는 방을 곳곳에 붙였지만, 곧이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답답해진 토정이 시장에 나가 한사람, 한사람 관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죽을 상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천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니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토정은, 물이 찰 시각 하루 전날 저녁에 홀로 짐을 챙겨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토정이 한참 올라가고 있을 때, 소금지게를 진 소금장수 하나가 토정의 앞에서 올라가고 있었다. 토정을 본 소금장수는 소금지게를 받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토정이 올라가 그의 관상을 살펴보니 죽지 않을 상이었다.
토정은 하루 전에 왔으므로 느긋한 마음으로 소금장수와 이야기하니, 소금장수는 자오상통(子午相通)도 모르느냐며 올라가기를 재촉했다. 물이 찰 시각을 토정은 다음날 낮 열두 시(오시)로 보았는데 소금장수는 그날 밤 열두 시(자시)로 보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토정이 무릎을 치며 소금장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소금장수는 해일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지점에 소금 짐을 받쳐놓고, 바위에 앉아 토정과 농을 하며 학문을 주고받았다. 그 바위를 농바위 또는 농암(弄岩)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여러 편 전해 온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물난리가 날 시각을 잘못 알았는데, 소금장수가 일러주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물이 차 오를 지점을 잘 몰랐는데, 소금장수 또는 한 노인이 알려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소금장수나 노인은 산신령의 화신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것은 토정이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음을 말해 준다.
토정 선생이 해가 뜨기 전에 담배 모를 심으니까, 어떤 청년이 지나가다가 비도 오지 않는데 왜 모를 심느냐고 물었다. 토정이 열한 시면 비가 올 것이므로 담배 모를 심는다고 하였다. 그 청년은 그 시각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며 목숨을 건 내기를 하자고 하므로, 토정이 좋다고 하였다. 그 청년은 비를 내리는 용의 화신이었다.
옥황상제께서 그 날 열 한 시에 비를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청년은 내기를 했으니까, 기다렸다가 열두 시에 비를 내렸다. 그 청년이 저녁 때 토정을 찾아와 열한 시에 온다는 비가 열두 시에 왔으니, 목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토정 선생이 그에게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하니, 그는 잠을 안 자면 임금을 섬기고, 잠을 자면 옥황상제를 섬기는 ‘유정’이라는 신하를 잠 못 자게 하면 된다고 하였다. 토정이 임금을 찾아가 후에 보답을 할 테니, 그 신하가 잠을 자지 않게 해 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유정을 불러 바둑을 두자고 하였다.
유정은 바둑을 두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임금이 그를 깨우니, 깜빡 잠이 들었을 적에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용의 목을 잘랐다고 하였다.
옥황상제의 명을 어기고 토정 선생을 죽이려던 용은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비를 내릴 시각을 정확히 알았기에 청년으로 변신한 용과 내기를 하였다. 용은 토정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비 내리는 시각을 지체하였다가 옥황상제의 명을 어긴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소설 「당태종전」의 서두 부분과 공통점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하루는 토정의 부인이 토정에게 양식이 떨어졌으니 신술을 시험하여 궁색함을 구제하라고 하였다.
토정이 여종에게 놋그릇 하나를 주며, 서문 밖 경교(京橋) 다리로 가면 한 노파가 그 놋그릇을 사자고 할 것이니 한 냥을 받고 팔아오라고 하였다. 여종이 경교에 가니, 과연 한 노파가 놋그릇 사기를 원하므로, 한 냥을 받고 팔았다.
토정은 여종에게 그 돈을 도로 주며, 서문 밖 사거리에 가면 삿갓 쓴 사람이 수저 한 벌을 급히 팔고자 할 것이니, 한 냥을 주고 사오라고 하였다. 여종이 그의 말대로 수저를 사 가지고 와서 닦아보니, 은수저였다.
토정은 여종에게 은수저를 가지고 경기 감영 앞에 가면, 어느 집 하인이 은수저를 잃고 급히 같은 은수저를 구할 것이니, 15냥을 받고 팔아오라고 하였다. 여종이 그 말대로 하여 열닷 냥을 받아왔다.
토정은 여종에게 한 냥을 주며, 처음에 놋그릇을 산 노파가 식기를 무르고자 할 터이니, 가서 물러 오라고 하였다. 여종이 서문 밖 경교로 가니, 노파가 식기를 잃고 대봉(代捧)하려고 식기를 샀으나, 그 식기를 찾았기 때문에 무르고자 한다 하므로, 한 냥을 주고 식기를 찾아왔다.
토정이 부인에게 식기와 14냥을 주며 땔감과 식량을 구하라 하니, 부인이 한 번 더 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토정은 이만하여도 족하니,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이득을 얻어 식량을 구하게 한다. 토정은 한 번 더 하기를 청하는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데, 이것은 토정이 자기의 신이한 능력을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극히 자제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계서야담, 기문총화 등의 문헌과 최근에 채록한 설화집에도 실려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돌아온 토정이 사랑방에 누워 있는데, 동네 개구쟁이 하나가 사랑방 앞에 있는 큰 배나무 밑으로 왔다. 그 아이는 토정이 사랑방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조심조심 배나무 위로 올라갔다.
토정은 동네 아이가 배 몇 개 따먹는 것을 혼낼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 그는 변소를 가야겠는데 바깥문을 열면 아이가 놀라 떨어져 죽을까봐 안문을 열고 살짝 변소를 다녀왔다. 변소를 다녀와서 ‘이 녀석이 배를 먹을 만큼 먹었을 테지!’ 하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내다보니까, 아이는 이미 떨어져 죽어 있었다. 배를 따먹으면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아이는 그가 변소에 가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 떨어진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토정이 운세를 짚어보니, 5대 손이 그 아이를 죽게 한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는 유서 한 장을 남기면서, “5대 손에 가서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나라에 올리라.”고 하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 토정의 5대 손이 횡액(橫厄)을 당하여 잡혀서 형틀에 매이게 되자, 토정이 남긴 유서를 관찰사에게 바쳤다. 관찰사가 토정의 유서를 받으려고 동헌마당으로 내려왔는데, 그 순간에 동헌 대들보가 덜컥 내려앉았다.
토정의 유서에는 “내가 그대를 살렸으니, 그대도 나의 손자를 살려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자기의 잘못으로 아이를 죽게 한 벌이 5대 손에게 내릴 것과 동헌이 무너져 관찰사가 죽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이를 연계시켜 손자를 살렸다. 이 이야기는 토정의 예견력이 비상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 외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이에 대비할 것을 주장한 이야기, 자기 고향에 철마(鐵馬)가 지나갈 것을 예언한 이야기, 배가 가라앉을 것을 미리 알고 내린 이야기, 처가에 화가 있을 것을 알고 미리 피한 이야기, 책력이 틀린 것을 미리 안 이야기 등이 있다.
토정 설화 111편 중 토정의 예견력에 관한 이야기는 34편(30%)인데, 물난리가 날 것을 예견한 이야기가 21편으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은 물건을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가 5편, 임란 예언이 2편이고, 그 외의 이야기는 각각 1편씩 전해 온다.
2.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
설화에서 토정은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뛰어나 사람의 장래를 예견함은 물론, 그 사람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가 일찍이 이지함에게 사윗감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얼마 후, 이지함이 이산해에게 “어제 한 시골 양반이 수레에 이삿짐을 싣고 그 위에 남자아이를 얹어서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가 앞으로 크게 될 인물로, 아마 시골에서 살기가 어려워 서울 친척집에 의지하는 것 같으니, 그 집을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이산해가 그 집을 찾아가니 추측한 바와 같이 시골에서 살림이 어려워 서울로 올라와 친척집의 사랑방을 빌려쓰고 있었다. 만나기를 청하니 그 아이의 아버지가 집주인의 저고리를 빌려 입고 나왔다. 그는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를 만나보고, 정혼하였다.
집에 와서 이지함에게 어떤 인물이 되겠는가를 물으니, 이지함은 조카보다 더 빠른 나이에 재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인데, 36세에 재상이 되었으니, 과연 이산해보다 빠른 나이였다.
이 이야기서 토정은 가난한 집 아이가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 이산해에게 사위 삼으라고 하고, 이산해는 토정의 말을 믿고 따른다. 이산해는 토정의 형인 이지번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큰 인물인데, 이산해가 태어날 때에 이지함이 그의 우는 소리를 듣고, 앞으로 큰 인물이 될 테니 잘 키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기술되어 있다.
토정은 조카인 이산해(李山海)가 반심(叛心)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토정은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자기 집안이 큰 화를 당할 줄을 알고, 하루는 큰 세수 대야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자기 손으로 나뭇잎 모양을 한 다음 배를 하나 띄웠다. 그리고 소상팔경 구경이나 하러 가자며 배에 오르라고 하였다.
이산해가 미심쩍어 하면서 배에 오르자, 세수 대야가 무한히 넓은 바다가 되고, 배가 움직였다. 소상팔경에 이르러 구경을 마친 토정은, 조카에게 여기 온 것이 꿈결 같을 것이니 대(竹) 세 개를 잘라서 손에 들고 배에 타라고 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토정이 조카에게 반심(叛心)을 버려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하자, 조카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잠시 후, 풍랑이 멎고 바다가 잔잔해져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한바탕 꿈과 같았으나, 대나무 세 개가 그대로 남아 지난 일을 증명해 주었다.
몇 년 후, 중국의 사신이 왔는데, 이산해가 조정의 대신으로 대접을 하게 되었다. 사신은 소상팔경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이 아니면 음식을 안 먹겠다고 하였다. 이산해는 옛날의 그 대나무를 내놓았다. 사신은 그 대나무가 소상팔경 대나무임을 알고, 나라에 내릴 주의도 주지 않고 대우만 받고 돌아갔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조카 이산해가 역심(逆心)을 품은 것을 알고,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 또다른 이야기에서는 토정은 이산해와 함께 배를 타고 험한 길을 왕래하며 위험에 처하게 한 뒤에 역심을 버릴 것을 설득하고, 그래도 그 마음을 버리지 아니하자, 손이 방바닥에 붙게 하여 역심을 완전히 버리게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서 토정은 바닷속에서 건진 망원경 같은 물건으로 사람의 몸 속과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하여 역심을 버리게 한다. 정여립 또는 조양래가 역심을 품고 토정을 찾아와 점을 해 달라고 할 때에는 이것을 미리 알고 거절하거나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점을 쳐 주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토정이 사람의 장래를 알아봄은 물론, 그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3. 신술(神術)을 부리는 사람
설화에서 토정은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중국을 왕래하고, 두 발과 지팡이에 박을 매달고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 이것은 “어떤 때는 천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자주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구체화한 것이라 하겠다.
이 토정 선생이 산길을 가는데, 한 중이 길가에 앉아 이를 잡으면서 쉬어가라고 하였다. 토정이 중과 이야기할 때 중이 토정의 손을 잡는데 보니, 손에 털이 있었다. 토정이 호랑이가 변신하였음을 알아차리고 손목을 잡으니, 호랑이가 재주를 부려 손목을 뺀 뒤에 호랑이로 변신하여 달려들었다.
토정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축지법을 쓰며 천천히 걸었다. 뒤따라오던 호랑이는 토정을 잡으려고 높은 산에서 뛰다가 굴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토정을 유인하여 잡아먹으려 하다가 오히려 토정의 꾀에 넘어가 죽고 말았다는 것으로, 토정이 축지법을 쓰며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토정의 조카가 죽게 되자, 형수가 토정을 찾아와 아들을 살려달라고 사정하였다. 토정은 아이를 살리려면 자기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서 난색을 표하였으나, 형수는 막무가내로 졸랐다. 토정은 형수에게 밥 세 그릇과 음식을 산 중턱에 가져다 놓고, 숨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보라고 하였다.
자정이 되자 저승사자 셋이 지나다가 밥상을 보고, 토정이 시켜서 차린 밥상인데 먹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음식을 먹었다. 밥을 먹은 저승사자는 토정의 조카와 나이․이름이 같은 건너 마을 아이를 데려가자고 하면서 그 곳을 떠났다. 저승사자가 떠난 뒤에 토정의 조카는 살아나고, 그와 나이와 이름이 같은 건너 마을의 아이는 죽었다.
그 조카가 자라서 평양감사가 되었는데, 평양감사는 물난리가 나서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백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토정은 평양감사를 데리고 산 속으로 가서 조화를 부려 평양감사의 목까지 물이 차게 하였다. 평양감사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토정은 물난리 때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잘못을 꾸짖었다. 감사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빌자, 토정은 물이 빠지게 하여 그를 살려 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저승사자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물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등의 신술을 부린다. 수명이 다한 사람을 잡으러 오는 저승사자를 잘 대접하여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수명을 늘리는 이야기는 연명설화(延命說話))에 흔히 나오는 모티프인데, 이 모티프가 토정의 신술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었다.
토정이 아산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이웃 마을 사람에게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었다. 어느 날, 빚쟁이가 그에게 와서 빚 대신 병풍에 그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니, 토정은 병풍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토정이 상투를 풀고 아산만으로 뛰어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나오더니, 산발한 머리로 소래기에 갈아놓은 먹물을 찍어 병풍 위에서 흔들었다. 얼마 후, 그는 ‘이만하면 빚을 갚았네.’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화가 나서 병풍을 가지고 와서 외양간 선반에 던져두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에 중국의 박물학자(博物學者)가 천기를 보니, 한국의 아산 지방에서 서기(瑞氣)가 뻗치고 있었다. 이를 본 박물학자가 아산으로 찾아와 그 병풍을 팔라고 하였다. 그의 손자가 3만 냥에 그 병풍을 판 뒤에, 그 사람에게 병풍의 내력을 물었다. 그 사람이 병풍을 둘러치고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끼어 던지니, 물에 잠겼다. 조금 있다가 낚시를 올려 채면, 큰 붕어가 올라왔다. 그 병풍은 장소와 계절에 관계없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어 3만 냥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토정이 그린 병풍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으로, 토정의 신술이 뛰어났음을 말해 준다.
이처럼 토정은 땅 위나 바다 위를 마음대로 걸어다니고, 변신한 호랑이를 물리치며, 수명이 다한 조카를 살려주고, 사람의 목까지 물이 차게 하기도 하며, 병풍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돌을 금으로 변하게 하기도 하였다.
4. 백성을 잘 보살핀 사람
토정은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를 썼다.
이지함은 유랑민이 떨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그는 큰 집을 지어 그곳에 살도록 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하나를 손수 업으로 삼아 살도록 하였는데, 직접 대면하여 깨우쳐 주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각 사람을 이끌어 의식을 주선하여 주었다. 능력 있는 자에게는 미투리를 삼도록 하고 친히 감독하여 하루에 10켤레씩 만들어 팔게 하였는데, 이로써 의식이 풍족해졌다. 그런데 일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말없이 도망하는 자들도 많았다.
토정이 아산 현감을 할 때에는 걸인을 보살피는 걸인청(乞人廳)을 두고, 걸인들이 살 집을 마련한 뒤에 그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먹고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위의 두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떠도는 유랑민이나 걸인들에게 살 집을 마련해 주고,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려는 토정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토정은 백성들에게 장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맨손으로 생업에 힘써 수년 내에 수만 석에 이르는 곡식이 쌓였는데, 가난한 백성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또 한 섬에 들어가 바가지를 심어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든 뒤에 그것으로 천 석이 넘는 곡식을 산 다음, 경강(京江)의 마포로 운반하여 강촌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것은 토정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박지원이 쓴 「허생전」의 내용을 연상하게 한다.
토정이 천안시 성남면에 조양정(朝陽亭)을 짓고 거처하고 있었다. 흑성산에 가보니, 그곳이 앞으로 명당이 될 곳인데, 그러려면 봉황 한 마리가 더 있어야 하였다. 토정은 봉황이 한 쌍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천안시 북면에 봉황산, 봉황이 먹는다는 오동나무가 있는 오동촌, 봉황이 앉는다는 푸른 대나무가 있는 청대골 등의 이름은 붙였다.
이들 지명을 사람들이 널리 불러야 하는데, 물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살기 불편하였다. 토정은 보(洑)를 쌓아 물이 흐르게 하고, 사람이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보를 토정보(土亭洑)라 하였다.
이 이야기서 토정은 산과 마을의 이름을 그 곳의 지형과 풍수설에 맞춰 지어 살기 좋은 곳이 되게 하고, 보(洑)를 만들어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토정이 민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토정이 강원도에서 원님 노릇을 하는데, 나라에서 멧돼지를 잡아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둘레 사람들은 멧돼지 잡을 일을 걱정하는데, 토정은 염려하지 말라며 태연하게 지냈다.
기한이 다가오자 토정은 사람으로 둔갑을 잘 하는 호랑이 한 마리를 불러서 멧돼지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호랑이는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왔다.
이토정은 사람으로 변신한 호랑이를 데리고 임금님한테 가서 멧돼지를 바쳤다. 임금은 토정에게 멧돼지를 죽여서 잡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산 채로 잡았느냐고 물었다. 토정이 호랑이를 시켜서 잡았다고 하자, 호랑이가 어디 있느냐고 하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있던 호랑이가 재주를 넘어 호랑이의 모습을 보였다.
그 후, 임금은 멧돼지를 잡아 올리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멧돼지 잡는 고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 토정은 신술을 이용하여 호랑이를 부림으로써 임금을 놀라게 하고, 멧돼지를 잡아 올리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것은 토정이 아산현감이 되어 여러 가지 시폐(時弊)를 개혁하려 하였던 사실을 재미있게 구성한 것이라 하겠다.
5. 검소하며 절제력이 강한 사람
토정은 야인(野人)일 때에 검소한 생활을 하였는데, 포천 현감․아산 현감이 된 뒤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발령이 나, 낡은 옷에 짚신을 신고 임지에 도착하였다. 그의 모습을 본 아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 좌정하니, 그제야 원님인 줄 알고 음식상을 내왔다.
이지함이 음식상을 말없이 노려보자, 아전들은 서둘러 음식상을 물린 뒤에 더 호사스럽게 차려왔다. 그가 여전히 상을 찌푸리고 노려보기만 하자, 아전들이 벌벌 떨며, 넙죽 엎드려 빌었다. 그는 우리 나라 백성들이 고생을 하는 것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사치스럽게 먹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기는 잡곡밥에 산나물 한 가지만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다음 달, 이지함은 고을에 사는 모모한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원님이 새로 도임하여 한턱 내는 줄 알고, 모두 기대하고 왔다. 그러나 음식은 나물 한 접시와 끓인 죽 한 그릇이었다. 이지함은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린다며 당당하게 행동하였다.
이것은 포천 현감이 된 토정의 검소한 모습을 이야기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어우야담에도 전해 온다. 동야휘집(東野彙輯)에는 “공이 포천 현감으로 있을 때 매우 검소하였는데, 읍에서 찾아온 품관(品官)에게 채소 죽을 내놓았다가 혼자 먹은 후 곧 벼슬을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포천 현감 이지함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함은 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의 처신을 검소하게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는 대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토정이 아산 현감으로 오니, 도임 상에 물고기 반찬을 올려놓았는데 맛이 좋았다. 물고기를 어디서 잡았느냐고 물으니 고기를 잡는 못이 있는데 아무도 못 잡게 하고 현감이 올 때 도임 상에만 쓴다고 하였다.
3일 후에 토정은 고기를 여럿이 먹어야지 현감만 먹을 수 없다면서 못을 메우라고 하였다. 아랫사람들은 현감이 시키는 일이라 어길 수 없어 못을 메우고 논을 만들었다.
그 후, 어떤 현감도 그 물고기를 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못 터가 있다.
이것은 토정이 아산 현감이 되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 것인데, 토정의 검소한 생활 태도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해 준다.
토정은 고청(孤靑) 서기(徐起)와 함께 지리산 구경을 갔다가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찾아갔는데, 남명은 외출 중이었다. 남명은 성품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그의 일상생활이 매우 호사스러웠는데, 이를 본 토정은 그의 방에 소변을 보고, 벽과 책상, 이불에 똥칠을 하고 갔다고 한다. 이것에서 화려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토정의 의식을 알 수 있다.
토정이 젊어서 서화담에게 배우며 아래채 종의 행랑에 기식하였다. 종의 처가 토정의 미모를 사모하여 종종 추파(秋波)를 던지던 끝에, 남편이 출타한 날 밤에 토정의 방으로 건너왔다. 토정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종의 처를 지팡이로 때려 내쫓았다.
아내를 의심하여 숨어서 그 광경을 엿보고 있던 종이 감동하여 이 사실을 화담에게 알렸다.
화담이 다음날 토정을 불러, 이미 공부가 끝났으니 가고 싶은 대로 가되 군자 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것은 토정이 여인의 유혹을 물리친 이야기인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청야담수(靑野談藪)에도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이지함은 처신하기를 확고히 하되 여색을 더욱 조심하였다. 젊은 시절에 주․군(州郡)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克己)로 색욕을 끊었다.”는 기록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6. 운명에 순응한 사람
설화에 나타난 토정은 풍수지리에 능통하고, 신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 않고 운명에 순응한다.
토정이 부모를 장사지낼 때 묏자리를 보니 자손 중에 재상이 두 명 나오는데, 막내아들은 불길하였다. 막내인 토정은 자신이 그 재난을 당할 것을 알았지만, 그대로 맞이하였다.
후에 형의 아들인 산해(山海)와 산보(山甫)의 관이 1품에 이르렀는데도, 지함의 아들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동야휘집에도 실려 있는데, 조부의 묏자리로 되어 있는 점만 다르다. 토정은 풍수설에 밝아 그 묏자리가 막내인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알았지만, 자기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순응한 것이다.
토정의 형수가 살림이 어려워 고생을 하는데도 도와주지 않으니, 형수는 토정을 원망하였다. 형수의 마음을 아는 토정이 조카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니, 거기에 금덩이가 많이 있었다. 조카는 토정의 말대로 금덩이를 여러 개 주워 가지고 집으로 오는데, 오는 도중 금덩이가 개구리로 변하여 몸을 긁곤 하므로, 귀찮아서 하나씩 버렸다.
토정은 집 가까이 와서 조카에게 금덩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조카가 모두 버렸다고 하니, 재물은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깨달은 바 있어 토정을 찾아가 마음 속으로 원망한 일을 사과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토정은 형수와 조카를 깨우치기 위해 신술을 부려 돌을 금으로 변하게 한다. 그는 신술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를 위해서나, 조카를 위해서나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각자 타고난 복이 있으니, 그 복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토정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의 관상을 보니, 밥을 얻어먹어야 살지 잘 살면 단명할 것 같았다. 그래서 딸을 거지와 혼인시킨 뒤 움막을 지어주고, 그곳에서 밥을 빌어먹고 살게 했다.
토정은 자기 딸이 밥을 구걸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만들어 주고는 그것으로 점을 치며 살게 했다. 딸이 그 책으로 보아준 점이 백발백중으로 들어맞았다. 그러고 보니, 딸이 금새 부자가 되어 곧 죽을 것 같았다.
토정은 토정비결을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중간 중간을 틀리도록 고쳐 놓았다. 그래서 지금 토정비결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토정비결이 잘 맞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 이야기는 비슷한 이야기가 여려 편 전해 온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타고난 복대로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정여립이 반역하려는 마음을 먹고, 토정을 찾아와 점을 해 달라고 하였다. 토정은 ‘역심을 품은 사람의 점은 하지 않는다.’고 거절하였다. 정여립은 토정이 지네를 구워 먹는 것을 보고, 지네 먹은 뒤에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토정이 지네를 먹는다고 대답하였다.
점을 쳐 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정여립은 감자를 밤처럼 깎아놓고 밤을 치웠다. 토정은 “네가 밤을 감자로 바꿔놓은 것을 내가 알지만, 나는 이것을 먹고 죽는다.” 하고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정여립은 자기가 역심(逆心)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토정을 죽이기 위해 지네 즙을 먹은 뒤에 제독(除毒) 작용을 하라고 먹는 밤을 치우고 그 자리에 감자를 놓아둔다.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과 신술을 부리는 능력을 지닌 토정이 이를 모를 리 없는데도 그대로 먹고 죽는다. 이것은 토정이 아산에서 죽을 것이라는 자기의 운명을 알고 순응한 것이라 하겠다.
토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18편인데, 그 중 두 편은 토정이 아산에서 죽을 것임을 예언하는 내용이이다. 나머지 16편은 지네 즙을 먹고 해독을 못해 죽는 이야기인데, 대부분은 재물을 취하려는 욕심을 품었거나 꾸중을 듣고 앙심을 품은 통인이 토정을 죽이려는 마음에서 밤 대신 감자를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이야기에는 토정이 운명에 순응하는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Ⅳ. 맺음말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선조 11)은 한산 이씨로,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이다. 자는 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토정은 경전에 통달하고, 사서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뒤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포천 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다.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는 앞일을 예견하는 지혜가 있어서 이인으로 대접받았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는 예언․기지(奇智)․신술(神術) 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온다.
토정과 관련된 설화는 110여 편이 전해 오는데, 이들 설화에 나타난 토정의 모습은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 신술(神術)을 부리는 사람, 백성을 잘 보살핀 사람, 검소하며 절제력이 강한 사람, 운명에 순응한 사람이다. 이러한 토정의 모습은 민중들이 이인으로 알려진 토정에 대한 의식과 이인에게 거는 기대의 표현이라 하겠다.
토정 설화에 나타난 민중의 의식, 다른 문학 작품과의 관계 등은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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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雜說)
기인(奇人) 이토정선생(李土亭先生)
조선 중종 때. 주역팔괘(周易八卦)에 능통한 형중(馨仲) 이지함(李之函)이 있었다.
이지함은 그 유명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문하에서 학문을 했고, 한때는 아산(牙山) 현감의 벼슬에도 있었으나 적성이 맞지 않는다 하여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남 돕기를 좋아했던, 그는 성장하여 결혼을 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는데 더욱 힘을 썼다.
부인과 자녀들은 남다른 고생을 함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토하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싸움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나이가 더 할수록 학문과 인격이 높아감에 따라 비록 없이 살긴 해도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 그들은 그들대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지함의 조언대로만 실행했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몸이 아파도, 장사가 잘 안되어도 이지함 말대로만 하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문전에 사람들이 줄을 이어갔다.
이지함은 주역팔괘에 능통하였던 터라 그 괘를 응용해서 닥쳐올 액을 미리 내다보고 피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문에 소문을 듣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집을 놓아둔 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마포 나루터에 기둥과 상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흙으로만 쌓아올린 정자, 즉 일종의 토굴을 만들어 그곳에서 기거했다.
그런 연유로 세상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土亭)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봐 달라고 하는 통에 순서를 기다리려면 며칠씩 걸리곤 했다.
토정선생은 그런 폐단을 줄이고자, 주역팔괘를 응용하여 미래를 알아볼 수 있는 예언서로 소위「토정비결(土亭秘訣)」을 만들어 그 내용에 기준하여 예언을 해 주게 되었다.
그런데, 그「토정비결」이란 책이 너무도 신기하게 미래를 잘 맞추자 우매한 백성들 중에는 근면성과 성실성을 무시한 채 약은 꾀로 악용하는 폐단이 일기 시작하여 할 수 없이 절반 정도만 맞고 절반 정도는 맞지 않도록 「토정비결」을 고쳐버렸다.
토정선생은 몹시 가난해 밥솥이나 갓(冠), 신발 등을 제대로 구할 수가 없어 쇠붙이(鐵)로 두들겨 만든 쇠 갓(鐵冠)을 쓰고 다녔고, 솥에 구멍이 났을 때는 쇠 갓을 뒤집어 놓고 솥으로 대용했고, 신발은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특히. 토정선생은 세상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항해 기술로 제주도를 왕래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풍(狂風)이 몰아치는 악천후에 닻을 단 큰 배 들도 항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토정선생은 유유하게 조각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왕래하였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랬는지는 아직도 신비 속에 쌓여있으나, 일엽편주로 항해를 할 때면 꼭 닭 네 마리를 배의 귀퉁이에 매달아 균형을 유지하여 침몰의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가도 지팡이에 턱을 괸 채 서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개인의 운명을 매년마다 볼 수 있는「토정비결」과 주로 국가의 운을 비록(秘錄) 예언한「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 있는데, 그 학술적 근거는 주역팔괘에 두었던 것으로「토정가장결」에는 우리나라 국운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원숭이·쥐·용(申子辰)해는 병란이 있고, 범·뱀·돼지(寅巳亥)해는 혼란과 옥사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대로 임진왜란·병자호란·을사사화·을사오적신(乙士五賊臣)들의 매국노(賣國奴)사건과 1926년 항일학생 시위운동사건 등은 그가 예언한 일면을 그대로 실증해 주었다.
토정선생은 호걸(豪傑) 기인(奇人)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기문기답(奇問奇答)으로도 유명했다.
어느 사람이 선생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자는 누구요?"하고 질문하자, "부막부어불탐(富莫富於不貪)이라 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를 욕심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인(貴人)은 누구요?"라고 질문하자 선생은, "귀막귀어부작(貴莫貴於不爵)이라 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귀인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구요?"고 질문하자, "강막강어부쟁(强幕强於不爭)이라 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다투지 않는 것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토정선생은 보통사람으로서는 몇날 며칠을 두고도 생각지 못할 명답을 즉석에서 하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달인(達人)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한번은 조상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데, 제수 살 돈이 없어 쩔쩔매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머슴에게 주면서 어느 곳, 어느 시각에 그곳을 가면 얼마에 산다는 사람이 있을 테니 팔아 오라고 했다.
하인은 시키는 대로 가르쳐 준 장소에 가 보았더니 토정선생이 예언한 대로 그 장소에 아니나 다를까 인상착의 하나 틀리지 않은 한 노파가 그 가보를 보더니 두말하지 않고 사갔다. 하도 신기하여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면서 집으로 돌아 왔다.
하인을 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내년 이맘때면 반드시 오늘의 그 시간에 그 가보를 다시 팔려고 그 장소에 나올 테니 그때 다시 사 오라."고 했다. 하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정말입니까? 아니, 정말로 그 사람이 다시 팔러 나온다고요.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러나 선생은 웃음을 띄우며,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일년이 지나고 다시 작년처럼 제삿날이 다가왔다. 하인은 혹시나 하면서도 그 장소로 가 보았다. 그랬더니 선생이 예언한 그대로 그 노파가 그 가보를 다시 팔려고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토정선생의 많은 예언에 비하면 그러한 예언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사소한 것이었다. 토정선생은 이율곡(李栗谷) 선생과 친분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이념이 달라 다툰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한때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시끄럽게 되자. 율곡선생이 귀향을 하기로 작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토정선생은 율곡선생을 만나, "율곡마저 귀향을 하게 되면 당파싸움은 누가 막고 백성은 누가 다스리나."하며 설득을 해서 율곡선생의 귀향을 포기하게 한 적도 있었다.
선생이 일생을 마치자. 나라에서는 이조판서의 벼슬을 제수하고 강문공(康文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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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인 남사고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명종 말년에는 동서분당(선조 8년, 1575년)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특히 그는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에는 격암일고(格庵逸槁)가 있다. 남사고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이유 없이 자꾸 야위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이 까닭을 물어보니 서당에 올 때마다 여우목 고개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하자면서 자신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묘령의 여자는 입맞춤을 할 때마다 입 속에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하였다. 훈장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다시 입맞춤을 할 때 여자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도망치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서당에 오는데 또 예쁜 여자가 입맞춤을 하자면서 따라오자 남사고는 스승이 시킨 대로 얼른 여자의 입 속에 있는 구슬을 삼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처녀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뒤쫓아오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는 늙은 여우로 변하면서 슬피 울다가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서당에 온 남사고를 보고 훈장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보았냐고 묻자 땅을 제일 먼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훈장은 탄식을 하면서 "아깝도다! 넘어질 때 하늘을 먼저 보았으면 천문에 능했을 텐데 땅을 보아 지관에 머물겠구나"하였다 한다.
남사고가 젊었을 때. 경북 울진 불영사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둘은 같이 유람하다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힘써 보라"하면서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는 이로부터 명지관이 되었고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을 하여 지금도 '남사고결록' '격암유록'등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이 실재로 남사고가 쓴 책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남사고의 이름을 도용하여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천하의 유명한 남사고가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묘 하나도 제대로 명당에 묻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명당을 구해 장사 지냈는데 다음에 와서 보니 명당이 아니었다. 다시 명당을 구해 이장하고 다음에 와보면 역시 명당이 아니었다. 이러기를 아홉 차례나 반복하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 대지를 구해 어머니 유골을 안장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밭을 갈던 한 농부가 노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째 장사한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南師古)야! 용이 하늘을 날 듯이 올라가는 형국인 비룡상천(飛龍上天) 좋아하지 마라. 죽은 뱀을 나무에 걸쳐놓은 형국인 고사괘수(枯蛇掛樹)가 아닌가 하거늘."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산형(山形)을 자세히 보니 과연 사룡(死龍)이었다.
급히 밭을 갈던 농부를 찾으니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남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는 필히 그 주인이 있는 법이니 평소 덕을 쌓지 않은 어머니를 억지로 명당에 모시려고 해도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무해지지(無害之地)를 찾아 이장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당 대지는 천장지비(天藏地秘)하는 것으로 유덕지인(有德之人)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풍수 술법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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